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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병호목사의 교회이야기

전병호 목사의 설교



일시: 2018년 1월 2일 장소: 지경교회당 주최: 군산기독교연합회

제110주년 전킨선교사 추모예배 설교문

성경: 요 12:24-26 제목: 밀알

 

우리가 살고 있는 지구상에 4개의 태풍이 불고 있습니다. 필리핀 근해에서 발단하여 우리나라 방향으로 불어오는 태풍을 타이푼이라고 합니다. 역시 필리핀 적도근해에서 인도 쪽으로 불어가는 태풍을 사이클론이라고 합니다. 적도에서 호주방향으로 부는 태풍을 윌리윌리라고 합니다. 그리고 대서양에서 미국남쪽으로 부는 태풍을 허리케인이라고 합니다. 태풍의 위력은 매우 크다고 하겠습니다. 바다가 흉흉하고 산이 무너지고 아름드리나무들이 뽑히고 자연재해로 인한 피해는 엄청납니다.

 

그런데 또 하나의 태풍이 있습니다. 그 태풍은 2000년 전부터 불어 지금까지 불고 있습니다. 이 태풍은 재앙의 태풍이 아니라 축복의 태풍입니다. 이름하여 성령의 태풍이라고 합니다. 예수그리스도께서 승천하시기전 제자들에게 한 사명을 주셨습니다.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다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는 사명입니다. 그래서 제자들과 120여명이 마가의 다락방에서 기도하기를 쉬지않고 하니 모두 성령을 받게 되었습니다. 이 작은 마가의 다락방에서 뜨거운 그리고 맹렬한 성령의 태풍이 불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 태풍은 예루살렘과 유대와 사마리아로 불어가기 시작하였습니다. 소아시아로 북아프리카로 로마로 불어가기 시작하였습니다. 마침내 성령이 로마로 불어가니 만심의 우상을 섬기며 기독교인들을 무참히 학살하던 로마제국이 기독교 국가가 되었습니다. 더하여 프랑크족으로 성령의 태풍이 불어가니 프랑스 기독교국가 되었고 게르민족에게로 성령의 바람이 불어가니 독일국가가 세워졌고 바이킹족에게 불어가니 놀르웨이 스웨덴 덴막 등 기독교국가가 되었고 엥글로섹손족에게 불어가니 영국 기독교 국가가 일어났습니다. 성령의 태풍은 아프리카로 남아메리카로 미국 카나다로 인도 동남아시아국가에게로 남태평양 멜리네시아 폴리네시아 섬나라들에게로 일본과 중국으로 지구 전 지역으로 성령의 태풍이 불어 갔습니다.

 

저는 사도행전 1:8절 말씀에서 도대체 예수님이 말씀하신 그 땅끝이 어딜까? 궁금하였는데 제가 전킨을 알고부터 이 말씀을 깨달았습니다. 성령의 태풍이 200년 동안 전 지구 구서구석 불어가다 마침내 땅 끝 코리아 우리나라에 지금부터 120여 년 전 성령의 태풍이 북으로는 압록강을 건너 서상륜 백홍준 등을 통해서, 서쪽으로는 언더우드 아펜셀러 선교사들과 함께 제물포 항구로 불어왔고, 남쪽으로는 부산진 항구를 통해서 성령의 바람이 상륙하였던 것입니다. 놀랍지 않습니까? 地球儀를 돌려보면 국가적으로 동쪽으로나 서쪽으로나 그 끝에 있는 단위 국가로는 우리나라 대한민국이 있습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그 땅 끝이 바로 우리나라인 것입니다. 그리고 19세기가 다 저물어 가는 때 전킨 이라는 젊은 선교사와 그 동려들로 인하여 땅 끝 선교의 마지막 보루인 군산 땅으로 성령의 태풍이 불어 왔던 것입니다. 할렐루야!

 

이제 그 성령의 태풍이 어떻게 군산과 우리 호남 지역으로 불어 왔는가에 말씀드리려 합니다.

 

결과가 있으면 그 처음이 있으니 그 먼 시발은 1861년부터 일어난 미국 남북 전쟁 시에 남 장로교회가 조직이 되면서 부터입니다. 남 장로교회의 외지선교사업회가 이태리 중국 일본 브라질 멕시코 쿠바 그리스 등 나라에 선교사를 파송하고 있었습니다. 남 장로교회의 해외 선교사 출신 신학교는 두 주류가 있었는데 하나는 시카고의 멕코믹 신학교와 버지니아의 유니언 신학교 였습니다. 이미 1885년 조선에 선교사로 파송 받은 북 장로교회 소속 선교사인 언더우드목사가 1891년 안식년을 맞이하여 귀국하여서 그해 9월 멕코믹 신학교에서 조선 선교 보고회를 가졌습니다. 이때에 이 학교 졸업생으로 그 강연 듣고 있는 루이스 데이트에게 성령의 태풍이 불어와 조선 선교에 대한 비전을 품게 되었습니다.

다시 10월에는 테네시주의 네스빌에서 전국신학교 해외선교연합회가 개최되었는데 이곳에서 언더우드 목사와 벤더빌트 대학에 유학하여 와있던 윤치호가 초청되어 선교 강연을 할 때 성령께서 온 회중들에게 임하였습니다. 그래서 이 강연에 이미 한 달 전 맥코믹보고회 때 감명을 받았던 루이스 테이트 그리고 버지니아 유니언 신학교의 존슨, 전킨, 레이널즈, 테이트의 동생 메리 데이트, 버지니아주의 아빙돈 출신 린니 데이비스, 버지니아주 렉싱톤 출신 메리 레이번, 역시 버지니아주의 펠시 볼링 이렇게 여덟명 청년들위에 성령의 태풍이 임하였습니다.

 

이 여덟 명의 남 여학생들의 가슴에 조선 선교에 대한 뜨거운 열정이 타올랐습니다. 그들은 서로 알지 못하였던 사이였지만 그 후 조선 선교의 열렬한 동지들이 되었습니다. 레이놀즈는 중국 선교를, 볼링은 아프리카 선교를 희망하고 있었는데 이곳에서 조선 선교의 뜻을 모으고 부부가 되었습니다. 레이번은 전킨을 만나 “당신이 가는 것이면 나도 가겠다”고 하여 마음 뿐 아니라 몸도 하나 되어 부부가 되었습니다.

 

언더우드의 강연을 들은 존슨은 아저씨 댁에서 조선에 대한 희귀본 역사책을 발견하여 이 책을 가져와 친구들에게 보여 주었습니다. 이 책을 돌려 일은 이 젊은이들은 매우 흥분하였고 지금이라도 당장 조선에 달려가고픈 열망에 사로 잡혔습니다. 테이트는 남 장로교 외지 선교부 실행위원회에 조선선교 신청서를 제출하였습니다. 그러나 선교회에서는 당시 조선이란 나라가 잘 알려지지 않은 미지의 나라로 선교사를 보낼 의도가 전혀 없다는 통고를 받게 됩니다. 당시 선교회는 그리스 선교에 관심을 가지고 있었던 터였습니다.

 

그러나 그런 통고를 받고 주저앉을 그들이 아니 였습니다. 레이놀즈 존슨 전킨은 다시 조선 선교 신청서를 제출하였지만 역시 돌아온 통고는 여전히 “새로운 선교지를 개척할 계획이 없다”는 것 이였습니다. 이제 포기 할 것인가. 아닙니다. 길은 항상 열려 있습니다. 성령의 태풍에 힘입은 그들이 찾은 길이 무엇 이였겠습니까? 바로 직접 하나님께 기도하는 일이였습니다. 그들은 조선 선교를 위한 뜨거운 합심 기도를 하였습니다. 매일 오후 3시에 기숙사의 방문을 걸어 잠그고 기도하였습니다. 얼마나 오래 동안 하였을까요. 그들은 2년을 작정하고 기도하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리고 여기저기 각 선교부를 찾아다니며 조선 선교사 파송을 호소하기 시작 하였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조선선교의 열망을 가지고 여기저기 선교부를 찾아다니던 이 젊은이들의 당시의 열정과 수고가 결코 그들만의 의지만 가지고 된 일이 아니요 여기에는 분명히 하나님의 섭리와 성령님의 놀라운 계획이 있지 아니하고는 어찌 모두가 반대하는 조선 선교를 마치 골리앗 앞을 달려 나가던 다윗처럼 그처럼 무모 할 수 있었겠습니까? 우리는 당시 그처럼 조선 선교를 열망하며 기도하던 그 젊은이들에게 고마운 마음과 하나님께 감사의 기도를 드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

 

특히 그들은 언더우드 목사를 모시고 버지니아주 노스케롤이나주 테네시주등 미국의 각 주의 여러 도시들의 교회들을 순방하면서 조선 선교의 필요성을 역설하고 그들의 도움을 청하였습니다. 그리고 여러 기독교 잡지들을 통하여 논문을 투고하여 선교를 상기하는 글을 올리기도 하였습니다. 1892년 2월에 <선교 The Mission>란 잡지에 “왜 우리는 조선에 가기를 원하는가?”라는 그을 발표하였습니다. 이 글에서 “지금 조선 왕실은 기독교에 대한 호의적입니다. 현재 조선에서는 기독교에 대한 강한 반대할만한 조직화된 종교도 없습니다. 현지의 선교사들만 가지고는 빠른 성장을 하고 있는 선교역량을 감당하기에 부적절합니다. 조선 선교는 우리와 쉽게 협동할 수 있는 북 장로교회에 의해 시작 되었습니다”라는 글을 발표 하였습니다.

 

하나님의 응답은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습니다. 성령의 역사는 반드시 이들에게 나타났습니다. 기도하고 각 방면에 호소한지 2개월여 지났을까? 외지 선교부 실행위원회로부터 “8월에 항해할 준비를 하시오” 이런 전보를 받았습니다. 할렐루야. 마태복음 18:19의 약속이 성취된 것입니다. “진실로 다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중의 두 사람이 땅에서 합심하여 무엇이든지 구하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그들을 위하여 이루게 하시리라.”

 

조선 선교에 대한 회의적인 미 남장로교회 외지선교회는 예기치 않은 일로 인하여 조선 선교에 대한 그들의 부정적인 생각을 바꾸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조선 선교에 열망을 가진 청년들의 기도를 들으시고 섭리하신 뜻 이였음을 깨닫게 됩니다. 이는 확실히 성령의 태풍의 위력이 나타난 것이니 때마침 남 장로교회가 선교사를 파송한 파송국의 하나인 그리스 정부가 선교활동을 방해 하므로 부득이 그리스 선교를 중단 할 수밖에 없게 되었던 것입니다. 따라서 그리스에 활동하고 있는 선교사들을 철수하게 되었습니다. 한편 북 장로회 소속인 언더우드 목사의 형인 존 언더우드가 2망 5천 달러를 조선선교를 위해 기부하였고, 언더우드 목사도 500달러를 조선 선교를 위해 헌금을 하였습니다. 그래서 남 장로교회 외지 선교부 실행위원회는 무슨 일로 함께 가지 못하게 된 존슨을 제외한 7명을 조선의 선교사로 파송 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마침내 1892년 9월 7일 테이트 남매의 고향과 가까운 세인트루이스의 센트럴 장로교회와 에비뉴 장로교회에서 파송예배를 드리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11월 3일 당시 제물포로 알려진 인천항에 도착하므로 마침내 그들의 선교 대장정이 아니 바야흐로 성령의 태풍이 이 땅에 불어오기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지금부터 125년 전입니다.

 

1895년 서울에서 조선어를 익히고 조선의 문화와 생활을 체험한 전킨 선교사와 드류 의료선교사가 4명의 선원들을 태운 목조선(木造船)을 전세 내어 여러 가지 약품, 책 그리고 다른 선교 용품들을 잔뜩 실고 제물포 인천을 출발하여 450리 바닷길을 여행하게 되었습니다. 그들의 목적지는 앞서 드류가 일차 방문 하였던 군산 이였습니다. 보통 4일이면 도착할 바닷길을 무려 11일이 지나 도착하였으니 어찌나 바다가 흉흉한지 파도가 드높아 배안으로 바닷물이 쉴 새 없이 들어와 물 퍼내기에 정신없을 정도였고, 안개가 자욱하여 앞을 바라보아도 알 길이 없어 사공은 이리저리 노를 저으니 한참 헤메다가 마침내 군산에 도착하게 되자 모든 사람들이 녹초가 되어버렸습니다. 선교의 시작은 언제나 사단의 방해가 있기 마련입니다. 그러나 이 두 선교사는 배안에서 무사히 군산에 도착하기를 기도를 계속하였습니다.

마침내 서양인들이 베실만이라 하는 군산진포에 도착하니 성령의 태풍을 잔뜩 짊어진 이들의 얼굴은 선교의 열정에 붉게 상기된 채 군산에 첫 발을 디딛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아직은 3월, 군산에 살고 있는 분들은 아십니다만, 3월 군산은 아직도 한 겨울 처럼 춥고 찬바람이 옷 속을 파고들어 체감온도가 영하 10도는 되는 그런 날씨입니다. 당시 군산은 아직 개항 이전이라 여기 저기 100여 호의 초가집들이 올망졸망 모여 있는 전형적인 어촌 이였습니다. 길은 구불구불하고 더럽고 먼지가 뽀얗게 일어나 길가 집들은 먼지로 뒤덮여 있었습니다. 남자들은 술에 취하고 여기 저기 도박판을 벌려 소리를 지르다가 도박판이 싸움판으로 바뀌곤 하였습니다. 여인들은 미신과 우상숭배에 빠져 있어 딩그덩 댕그랭 굿하는 소리가 여기저기서 들려 왔습니다. 당시 서양인들에 대한 감정이 좋지 않은 사람들이 있어 돌팔매질로 노골적으로 반감을 드러내기도 하였습니다. 그러나 한편 호감을 가지 사람들이 많이 있어 이들을 기쁜 마음으로 맞이하고 먹을 것을 나누어 주기도 하였습니다.

 

전키과 드류 의료선교사는 성령의 인도하심에 따라 선창가에서 멀지 않은 곳에 예배처소와 진료소를 차리기 위해 당시 군산 진영이 있던 수덕산 기슭에 있는 초가집 두 채를 50 달라에 구입을 하였습니다. 당시 환률 시세로는 상당히 비싸게 샀다고 하겠습니다. 그러나 앞으로 군산주민들을 구원할 값이라여겨 기꺼이 돈을 지불하였습니다. 드류 선교사의 집은 1917년 당시의 우체국 있던 앞에 언덕의 기슭에 있었고 전킨의 집은 조금 떨어진 곳에 있었습니다. 전킨은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고 드류 선교사는 환자를 돌보고, 사람들은 두 선교사를 찾아와 말씀도 듣고 치료도 받으니 점차 많은 사람들이 찾아와 그야말로 문전성시를 이루었습니다.

 

한 달 여 동안 생활하면서 집도 구하고 마을 사람들과 어느 정도 안면도 익힌 전킨 선교사와 드류 선교사는 가족들을 데리러 서울로 돌아갔습니다. 그러나 당시 동학 농민혁명과 갑오경장 이어서 청일전쟁이 일어나는 등 19세기 말 우리나라 국내외 정세는 한마디로 혼란의 극치를 이루던 때였습니다. 그러니 선교사들의 운신의 폭이 좁을 수밖에 없어 쉽사리 장거리 여행하기가 어려웠던 시기였습니다.

 

곧 군산으로 오리라 생각하였던 전킨 선교사와 드류 선교사는 차일피일 날자를 미룰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마냥 기다리기만 할 수 없었던 것은 아무리 위험이 있다하더라도 군산 선교에 대한 그들의 열정은 더 이상 지체 할 수 없었습니다. 그들은 성령의 태풍이 몰아감에 다라 1896년 4월 초 두 선교사 가족들은 인천에서 씨 드래곤이라는 증기선을 세를 내어 타고 내려가기로 하였습니다. 그러나 그 증기선은 갑자기 고장이 나 수선소에 들어가 버리니 할 수 없이 한 작은 일본식 배를 전세 내었습니다. 항상 주의 일에는 방해가 끼게 됩니다. 그 배는 매우 작았습니다. 이사 짐들은 작은 화물칸에 쑤셔 넣고 겨우 네 명의 어른들이 앉을 정도의 작은 방안에 쭈구리고 앉아 여행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들의 고생은 이루 말 할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드디어 1896년 4월 5일 안전하게 군산에 도착을 하였습니다. 전킨은 이때의 여행을 “닭장 속의 4일”이라고 표현하였습니다.

이때로부터 거슬러 11년 전 1885년 4월 5일 부활절 아침 언더우드 아펜셀러 두 선교사가 4월 5일 조선 선교를 위해 인천항에 도착을 하였는데 전킨과 두류선교사 부부 역시 4월 5일 군산에 도착을 하였으니 날자가 주는 의미를 생각해 보게 됩니다. 이 역시 땅 끝 선교를 위한 성령의 역사라하겠습니다.

 

낮 설고 물 설은 이국 땅 한 작은 어촌 마을에서 젊은 선교사 부부들이 생활한다는 것은 그야말로 고난의 행군이라 할 것입니다. 집 주변에는 그늘이 될 만한 나무 한그루도 없고 삭막하기까지 하였으며, 사리 때가 되면 바닷물이 범람하여 마당이고 길이고 질퍽하여 걸어 다니기가 힘들었습니다. 정기적으로 선교부에서 보낸 배가 온다고 하지만 말이 정기선이지 선장 마음대로이니 서울 선교부에서 보내는 생활 용품이나 선교용품들이 제때 공급되지 않아 불편하기가 말로다 할 수 없었습니다.

 

1897년 5월 어느 주일 예배를 드린 전킨 선교사는 아래와 같이 편지에 썼습니다.

 

“주말 예배 등록인인 40명입니다. 이중의 반은 빠지지 않고 예배에 참석하고 있습니다. 예배드리는 방은 종이 문 막이에 의하여 두 개의 방으로 분리되었습니다. 여자들이 한 방을, 남자들이 다른 방을 사용하였습니다., 바닥은 볏짚으로 짜서 만든 자리를 깔았습니다....출석을 부르고 결석자를 점검하여 그들을 아는 사람들에게 살펴보도록 하였습니다. 예배자들은 큰 목소리로 찬송을 불렀는데 이는 그들이 평상시 큰 목소리로 책을 읽던 습관 때문인 것 같습니다. 그렇게 함으로 좀 더 잘 이해하는 것 같습니다. 주일학교 성경공부를 한 시간 하였는데 ‘크리스찬 준수자’란 책을 번역하여 한 장씩 공부를 시켰습니다. ...주일학교가 끝나면 잠시 휴식을 취한 다음 다시 정기 예배를 드렸습니다. 설교제목은 ”주님께 드리는 것“이었습니다. 설교 후에 헌금시간을 가졌습니다. 두 사람의 남자가 헌금을 세니 1불 6센트, 엽전이 무려 530전이였습니다. 이 헌금을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서 사용할 것이며 돈이 남으면 교회의 장래를 위해 비축해 쓰여 질 것입니다”

 

이 편지에서 놀라운 것은 군산의 첫 교인들이 헌금을 하였다는 것입니다. 아마도 달러는 선교사들이 낸 헌금일 것이고 당시 아직 복음이 제대로 전해지지 않은 피선교지 40명 정도 되는 교인들이 530전 헌금을 하였다는 것은 놀라운 일입니다. 지금으로 따지면 10만 정도는 될 것입니다. 지금도 해외에 나가 처음 선교하는 선교사들의 말을 들으면 헌금은 고사하고 주민들에게 먹여주고 재워주고 차비까지 준다는 것입니다. 군산의 첫 번 교인들은 하나님께 헌금을 드리는 것으로부터 신앙생활을 시작하였다는 것이 성령의 태풍이 군산의 초대 교인들에게 임하였음을 알게 됩니다. 따라서 군산의 초대 교인들은 하나님이 이 땅에 풍요로운 축복을 내려 주시리라는 믿음으로 아브라함의 제단을 쌓았던 것이라 하겠습니다.

 

전킨 선교사와 드류 선교사는 군산에서 복음전도와 의료선교를 유기적으로 결합하여 주민들의 인심을 얻는데 성공을 하였습니다. 두 선교사는 매일 아침 9시부터 10시 반까지 사람들을 만나 복음을 전하였고 그 외 시간에는 환자들을 정성껏 치료하였습니다. 어떤 날은 50여명의 환자들이 몰려와 진료를 하였습니다. 비록 서툰 조선어 이지만 한사람씩 붙잡고 기도하며 친절하게 치료해주는 두 선교사의 정성에 감동하여 주민들은 답례로 생선, 김, 달걀 같은 식료품등을 가져와 고마운 마음을 표하였습니다.

 

이때에 김 봉래라는 분과 송 영도라는 분 그리고 차 일선이라는 분이 최초의 원입교인이 되어 군산 선교의 첫 수확을 얻게 되었습니다. 전킨 선교사는 매 주일 오후 세 사람에게 세례 예비교육을 시킨 다음 1896년 7월 20일 세례식을 거행하니 이들은 호남에서 최초의 세례 교인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날에 호남지역에서 최초로 성찬예식이 거행되었습니다. 몇 달이 지난 10월 4일에는 송 영도의 딸 송 성장이 유아세례를 받았는데 이 역시 호남 최초의 일입니다. 계속해서 차 인원 주 원선 문 화숙 이 자유 박 시길 등 20여명의 학습교인을 세웠으니 옥토에 뿌린 복음의 씨앗이 놀랍게 자라 이제 바야흐로 수많은 열매를 맺을 조짐이 나타나기 시작한 것입니다.

 

어떤 이는 주일예배에 참석하기 위해 토요일에 군산에 와서 하룻밤을 묵은 후에야 주일 오후 돌아가기도 하였습니다. 주일 예배와 성경공부에 결석자가 있는가 확인하고 만일 병으로 결석하였으면 드류 선교사가 곧바로 가정방문하여 환자를 돌보니 군산교회는 사도행전의 초대 교회처럼 그 수가 날마다 더하여졌습니다. 전킨 선교사의 선교 반경은 점점 넓어져 군산 인근 주변의 촌락들을 찾아다니며 전도하므로 만지산 남차문 송지동 등 점점 선교활동 지역을 넓혀 갔습니다.

1899년 군산이 개항이 되자 수덕산 주변이 조계지역으로 지정되어 일본인들이 몰려 들어와 마치 포위나 하듯 선교부를 둘러싸게 되었습니다. 그러니 조선인들이 수덕산에 있는 교회와 병원에 오는 것이 매우 거북스러웠습니다. 더 이상 수덕산에 있을 수 없어 군산 선교부를 옮기게 되었습니다. 여러 곳을 물색하다 궁멀 지금 구암동산으로 옮겨 새로 선교부 건물을 짓고 예수병원도 세우게 되었습니다.

 

전킨선교사는 스스로 궁멀전씨라고 말하면서 지역민들과 동거동락하여 밤낮을 가리지 않고 열정을 쏟아 군산을 비롯해 익산 김제 또 다른 지역까지 선교활동을 하였습니다. 그러다보니 그의 몸은 지칠대로 지쳐 갔습니다. 특히 궁멀에 서구식 선교부 건물을 건축할 때 그의 건강은 바닥을 쳤습니다. 당시 전킨선교사의 기록을 보면 언젠가는 다리를 건너다 말에서 떨어져 갈비뼈가 부러져 고통을 당하기도 하고 특히 해마다 겨울이면 여지없이 찾아오는 편도선염으로 고생을 하였다고 합니다. 수술도 두 번씩이나 해도 계속 편도선염으로 고생하였습니다.

 

그 뿐만 아니라 그의 큰아들 조지와 둘째 시드니 셋째 프란시스가 태어났는데 이 아이들은 태어나 얼마 안 되어 아직 면연력이 지극히 미약하다보니 페렴과 여러 풍토병으로 죽고 말았습니다. 그와 부인 선교사의 마음이 얼마나 비통하였겠습니까? 그러나 그는 군산 주민들을 사랑하고 이 지역을 향한 하나님의 구원의 복음을 전파하는 일에 비통해 할 시간도 없었습니다. 그는 마음을 추슬러 다시일어나 전보다 더 뜨겁게 복음을 전파하였던 것입니다.

 

그래서 선교부는 미국으로 돌아가 1년간 휴식을 취하라고 휴가를 주었습니다. 그러나 미국에 가서도 쉴 틈이 없었습니다. 그것은 군산에 세울 병원을 짓기 위하여 미국 각지를 돌아다니며 “군산 사람들이 죽어가고 있습니다. 위생시설이 미약합니다, 군산의 조선인들을 살려주십시오. 군산에 병원을 지으려 하니 도와주십시오”라고 호소하였습니다. 그렇게 몸을 사리지 않고 다니며 모금한 돈을 모아 1896년 군산예수병원을 세워 호남 최초의 근대 병원이 세워지게 되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전킨과 그의 부인 레이번 선교사는 지역아동들을 데려다가 공부를 시키면서 1899년 12월 21일 제일고등학교 전신인 영명학교와 1902년 영광중 여고의 전신인 멜볼딘 여학교를 시작하여 호남최초의 근대교육을 실시하였습니다.

 

1902년 9월 전주 은송리교회 레이놀즈선교사가 서울 구리개(아현)교회(서울 중앙교회)로 옮겨감으로 1904년 전킨 선교사가 군산에서 은송리교회로 오게 되었습니다. 실은 전킨 선교사가 군산선교에 너무 지쳐 있어 휴식한다는 의미로 전주교회로 오게 되었지만 어디 그냥 가만히 앉아 있을 전킨이 아니 였습니다. 일이 없으면 일을 만들게 하시는 이가 바로 성령이십니다. 성령의 태풍이 항상 전킨과 함께 불어가니, 전킨 선교사는 20리 밖으로 순회전도를 하지 말라는 선교회의 엄명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전주를 중심으로 주변의 장터선교 노방전도 축호전도에 열심을 다했습니다. 이로인해 교인수가 날로 늘어갔습니다 1905년 9월 완산 은송리에서 교회를 옮기게 되었습니다. 여기에는 재미난 이야기가 있지만 시간상 약 하겠습니다.

전킨 선교사는 군산에서도 그렇고 가는 곳 마다 교회를 옮겨 새 교회당을 건축하는 은사를 받은 것 같습니다. 전주 서문에서 가까운, 전주 천을 건너 전주 부중으로 들어가는 문턱 서문 밖 현 위치에 780평 기지를 구입하고 건평 50평의 벽돌 기와지붕 한양절충식 예배당을 건축하여 서문밖 교회를 세우게 되었습니다. 전킨 선교사의 진두지휘로 새로 지은 예배당 안에는 남자반과 여자반으로 좌석을 구분하고 가운데에 휘장을 전후로 길게 쳐서 남녀반이 서로 마주볼 수 없게 하였습니다. 총 공사비는 3,500냥이 들었는데 2,300냥을 교인들의 헌금으로 충당하고 완산의 선교사 사택 한 채를 헐어 자재를 보충하여 소요경비를 충당하였습니다. 은송리에 있을 때 은송리 예배당으로 부르다가, 1905년 전주부내로 교회를 지어 옮기니 전주교회로 불렀고 전주 서문밖 교회로 통칭 불려지다가 1955년 12월 14일 전주서문교회로 개칭되었습니다. 앞서 말씀 드린대로 전킨선교사는 다만 서문밖교회 안에만 있지 않았습니다. 전주를 벗어나 인근에 6개 교회를 개척하고 포사이드 선교사와 함께 고아원도 설립하는 등 그의 선교 열정을 가실길이 없었습니다.

 

1907년 7월 일본은 헤이그 특사사건을 구실로 고종황제를 강제 퇴위시키고 정미 7조약을 맺어 행정권을 빼앗고 조선군대를 해산시키는 등 노골적으로 우리나라를 식민지로 만드는 정치적인 소용돌이 속에 한국백성은 나라의 성쇠존망(盛衰存亡)의 혼탁지세(渾濁之世)에 울분을 감추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우리나라 초대 기독교인들은 하나님이 이 나라를 보존해주시기를 구하는 기도와 나라가 이 지경에 이른 것은 우리 백성들의 죄 값이니 하나님께 돌아가야만이 그래서 오직 믿음으로 나라를 지켜나갈 수 있다는 예레미야의 통곡의 마음들이 모여 모여 1907년 대 부흥운동이 일어났던 것입니다. 이런 회개와 부흥의 불길은 전국교회로 번져 나갔습니다. 전킨 선교사의 지도하에 전주 서문밖 교회에서는 500명이 자진해서 나와 전도대원이 되었고 5,000권이 넘는 단편복음서를 마련하여 사람들에게 나누어주었습니다. 교인들이 “날연보”를 바치기로 서약한 총 날 수가 3,349일이나 되었습니다. 이러한 대 부흥 전도운동에 전킨 선교사가 앞장을 서 열정을 쏟아 부으니 그의 육신은 점점 쇠약해져 갔습니다.

 

1908년 1월 15일 “예수교신보” 교회 통신란에 다음과 같은 보도가 났습니다.

 

“ 전라도 전주 전 목사가 세상을 떠남”이란 제목으로 다음과 같은 기사가 났습니다.

 

“본월 2일에 전주 전목사가 세상을 떠났으니 그 목사를 아시는 형제자매는 육신의 섭섭한 정회를 금하기 어렵도다. 이 목사는 교중 사무 보는 중 제일이더니 불행히 세상을 떠났으니 장차 그 자리에 대신 사무 보실 이가 그와 같이 잘 보리라고 하기가 어렵겠도다. 이목사가 우리나라에 오신지 16년에 전라도에서만 교중사무를 주관하셨으나 사경할 때에는 항상 다른 곳으로 다니며 많이 인도하셨고 어디가든지 하나님의 은총을 많이 받았으며 그 집안 식구는 부인과 아들 3형제와 딸 하나이더라. 슬프다. 이 목사가 육신의 고락을 다 버리고 세상을 떠나서 낙원으로 간 것을 생각하면 가쁘다고도 할 수 있지마는 그 외로운 부인과 어린 자매들의 정경을 생각하면 눈이 어둡고 기운이 막혀서 기도할 수밖에는 다른 도리가 없도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항상 돌아 보사 잘 보호하실 줄로 믿삽나이다.“(전주서문교회100년사 177쪽)

 

1908년 1월 2일 급성 장티부스 폐렴으로 43세 아직은 젊은 나이에 전킨 선교사가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를 알고 있는 선교사들과 서문밖교회 교인들 그리고 군산 익산 김제 등 그를 통해 전도 받고 시작된 교회 교인들에게 큰 슬픔을 가져다주었습니다. 그러나 죽음은 이김에 사킨바 되었습니다. 에너벨 니스벳 여 선교사는 회고록에서 전킨 선교사의 장례식 때의 에피소드 한 장면을 다음과 같이 소개하였습니다.

 

“전킨 선교사 장례식 때 마지막으로 전킨의 얼굴을 한국인들에게 보여주는 것이 존경심이 아닌 호기심으로 볼 수도 있다는 말에 어느 선교사가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전위렴 목사는 살아있는 동안 한국인 만나는 것을 지겨워하지 않았으며 바빠서 안 만나 준 적이 거의 없다. 그런데 이제 와서 그와 만나지 못하게 한다는 것이 말이나 되는 소리인가?’ 에너벨은 슬픔에 젖어 있는 한국인들을 쳐다보면서 몇 주 전 전킨이 그녀에게 보낸 편지의 뜻을 되새겨 보았습니다. 그 편지에서 전킨은 선교사의 삶이 희생의 삶이라고 하는데에 격렬하게 반대를 하면서 “선교사의 삶은 사랑이 넘치는 삶이며, 행복이 넘치는 삶이다.”라고한 말을 이해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호남선교초기역사 58-59쪽)

 

전킨과 함께한 성령의 태풍은 여기 까지였습니다. 그러나 전킨 선교사가 한 알의 밀알이 되어 전라도 땅에 뿌린 믿음과 사랑과 소망의 씨앗들이 크게 자라 120년이 지난 오늘 전국적으로 가장 복음화율(30%이상)이 높은 지역이 되었습니다.

 

7인의 선발대로 전킨과 함께 한국에 온 매리 레이번 전킨(Mary Leyburn,Junckin) 부인은 미국으로 돌아갔습니다. 그리고 미국의 교우들에게 전킨 선교사가 생전에 서문밖 교회를 새로 건축하였지만 종이 없음을 안타까워하였다고 말하니, 서로 연보들을 하여 직경 90cm나 되는 큰 종을 마련하였습니다. 미국의 해외선교신문의 편집장 윌리엄(H F William)목사는 직접 이 종을 큰 기선에 실어 한국으로 왔습니다. 제물포에 도착한 이 종은 다시 범선 편으로 만경강 포구를 거슬러 올라와 전주에서 40리 거리인 김제의 회포면 쌍강포에 내렸습니다. 다시 인근에 난산교회와 쇠평리교회 성도들이 이 종을 쇠달구지에 실어 서문밖교회 까지 오게 되었습니다. 종각을 세우기 위해 교인들이 헌금을 하고 인근 교회들도 협력하였으니 김제 번드리 교회에서는 5원을 보내 왔습니다. 종각 건축위원으로 김필수 장로, 전영칠 집사 그리고 목수 김학수에게 맡겨 종각을 세우니 1908년 12월 10일 오후 4시 헌종예배를 드리게 되었습니다. 예배 후에 윌리엄 레이놀즈, 니스벳 선교사와 전영칠 집사 그리고 앞으로 종을 관리하며 타종 책임을 맡은 안경오가 차례로 타종을 하였습니다. 이때의 감격을 김필수 장로가 12월 30일자 “예수교 신보”에 다음과 같은 글을 발표하였습니다.(전주서문교회100년사 179쪽)

“....한번 씩 종을 쳐 보는데 뗑 뗑 뗑. 사랑하는 전 목사의 기념종소리로다. 예수께서는 천당에 오르신 후 보혜사를 우리를 외로운 자식같이 버리시지 아니하시고 보호하심 같이 전 목사는 종을 보내게 하여 이곳 교우와 다른 친구들을 경성하게 하셨도다.”

비록 전킨 선교사는 세상을 떠나 하나님 나라로 가셨지만 그 후 그 종소리가 울릴 때 마다 그의 신앙과 선교정신도 함께 서문밖 교회와 호남 모든 교회들에게 울려 퍼졌습니다.

 

확실히 전킨은 하나님이 군산과 호남지역에 보내주신 성령의 사도였습니다. 그는 한 알의 밀알로 이 땅에 떨어졌지만 성령께서는 그 씨앗이 발아 되어 수 천 수만 배로 열매를 맺게 하셨으니 오늘날 이 지역이 전국에서 인구비례로 가장 많은 30%이상 복음화를 이루게 하셨습니다.

 

우리는 종교개혁 500주년이라 하여 다시 교회의 개혁을 말하고 있습니다. 한국교회의 정체성을 다시 회복하고 군산과 호남 복음화를 이루기 위해 무엇이 요구되는 것입니까? 전킨선교사와 당시 이 지역에 활동하시던 많은 선교사들의 열정과 헌신과 땀과 눈물 그리고 죽음을 각오한 순교의 믿음을 회복하는 것이 오늘 전킨 선교사 110주년 추모를 맞이하여 하나님께서 다시 우리들에게 주시는 높으신 뜻을 깨달아야 되지 않겠습니까?

 

이 또한 2000년 전 우리 주 예수그리스도께서 주신 땅 끝 사명이 우리에게 여전히 유여하다고 하겠습니다. 그것은 전킨과 함께하시던 성령님은 오늘 우리와도 함께하시고 우리를 통해서 일하시며 성령의 태풍이 오늘 우리에게도 불어오고 있다는 것을 깨달아 우리가 있는 사역지에서 한 알의 밀알이 되기를 바랍니다. 오늘도 성령의 태풍은 여전히 불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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