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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병호목사의 교회이야기

전병호 목사의 설교



2018년 7월 8일 주일아침 예배  딤전 5:21-22  편견 우상

 

태국 동굴에 갇힌 아이들

지난 6월 23일 오후 훈련을 마친 태국의 12명의 어린 축구 선수 소년들이 코치와 함께 더위를 피하러 태국 치앙라이 ‘탐 루엉’ 동굴에 들어갔었습니다. 그런데 갑작스런 폭우가 쏟아져 동굴 통로가 물에 잠기면서 동굴 속에 갇히게 되었습니다. 이 아이들의 생사를 밖에서 알수 가 없었습니다. 태국 당국은 물론 이 소식이 뉴스로 전 세계에 알려지자 세계 각국에서 구조대원 1,000여 명이 달려왔습니다. 시간은 흘러 열흘이 지났습니다. 아이들의 생사가 걱정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영국의 동굴 구조대원인  존 불랜던과 리처드 스탠던 이들은 다이버들인데 그동안 세계 각 처에서 400명이상을 구조한 경력이 있는 베테랑 동굴 구조대원들로 지난 7월 2일 마침내 굴속 깊이 피신하여 있는 코치와 아이들을 발견 할 수 있었습니다.  아이들은 대체로 건강한 편이나 오래 동안 먹지 못하고 물이라고 해야 천정에서 방울방울 떨어지는 물을 받아 마시어 약간의 탈수 현상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이 아이들이 살아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초조하게 기다리던 아이들의 부모들과 많은 사람들에게 큰 감동과 기쁨을 주었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이제부터입니다.
동굴 속 아이들의 모습

태국 정부는 비가 더 내려 수위가 더 높아지기 전에 구출한다는 방침을 밝혔지만, 5㎞ 이상의 긴 동굴 속은 곳곳이 물에 잠겨 있어 잠수와 수영을 해야 나올 수 있습니다. 더구나 좁은 물길과 시야를 가로 막는 흙탕물로 구조가 난감한 일이라는 것입니다. 배수 펌프로 물을 빼내지만 물이 빠지는 동시에 그보다 더 많은 물이 채워진다는 것입니다. 잠수하거나 헤엄처 나올수도 없는 것은 아이들 중에 수영할 줄 아는 아이도 없고 아이들이 극도로 쇄약해진 상태로 스스로 나올 수도 없는 일입니다. 태국 당국은 구조일을 최소한 4개월을 생각하고 식량 공급을 한다고 하지만 어둡고 습기가 가득찬 동굴속에 아이들이 과연 버텨낼 수 있을 것인가가 염려 스러운 일입니다. 


벌써 며칠 전 자원봉사자로 구조 활동을 하던 한 사람이 산소통 설치작업하러 들어갔다가 산소 부족으로 사망하는 일도 일어났습니다. 곧 비가 내릴 거라고 하는데 태국인들과 세계의 많은 사람들이 기적처럼 아이들이 동굴에서 무사히 구출되기를 기도하고 있습니다.

우리나라에도 많은 동굴들이 있습니다. 제일 유명한 곳이 제주도의 만장굴입니다. 삼척의 환선굴 정선에 화암동굴 영월에 고씨동굴 평창에 백룡동굴 등  무수히 많습니다. 여름에 동굴안은 시원하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찾아가고 있습니다. 대체로 동굴내 시설이 잘 되어 있어 위험하지는 않지만 간혹 질서를 지키지 않는 사람들이 사고를 내는 경우가 있습니다.

이제 이렇게 자연이 만들어낸 동굴이 있지만 사람들 마음속에도 깊은 동굴이 있음을 말씀드리려 합니다.

 

베이콘(Francis Bacon)이란 영국의 철학자가 사람들에게는 4가지 우상이 있다고 말하였습니다.


ㆍ종족의 우상(Idola tribus) : 모든 사물을 인간 본위로 해석하려는 본편적인 편견. 맹목적인 습관, 감정, 신앙에서 오는 편견을 말한다. (예 : 아리스토텔레스의 목적론적 세계관, 새가 노래를 하고 나비가 춤을 춘다.)
ㆍ시장의 우상(Idola fon) : 인간의 접촉, 언어에 의하여 나타나는 편견 (예 : 귀신이나 도깨비가 있다고 믿음)
ㆍ극장의 우상(Idola theatn) : 전통, 역사, 권위를 무비판적으로 믿는 편견, 독단적 해설 (예 : 유명인의 말을 무조건 믿음)
ㆍ동굴의 우상(Idola specus) : 개인적인 취미, 성격, 환경, 교육, 습관에서 오는 편견 (예 : 우물 안의 개구리(井底之蛙) <장자> <추수>에 나오는 이야기다. 황하의 신인 하백이 강물을 따라 처음으로 북해와 동해를 보게 되었다. 바다의 크기와 넓이가 강과는 비교가 되지 않았다. 하백이 놀라워하며 북해의 신인 약에게 물으니 다음과 같이 말했다. "우물 안 개구리가 바다에 대해 모르는 것은 사는 곳에 구속된 까닭이며, 여름 벌레가 얼음을 모르는 것은 한 계절에 고정되어 산 까닭이다. 비뚤어진 선비가 도에 대해서 모르는 것은 세속적인 가르침에 구속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대는 좁은 개울에서 나와 큰 바다를 보고서야 자신이 보잘 것 없는 존재라는 것을 알았으니, 이제 그대와 함께 천하의 진리를 논 할만하다. 보잘 것 없는 식견을 가진 사람도 더 나은 것을 받아들일 자세를 갖춘다면 얼마든지 바다처럼 넓은 식견을 기를 수 있다.)


베이컨은 소크라테스의 비유(프라톤의 국가론 제 7권에 나오는)에서 동굴에 갖혀 있는 인간은 지금까지 자신의 그림자를 보아 그것이 세계의 참된 모습이라고 착각하고 있다는 말에 영향을 받아 베이콘은 사람들은 마음속에 동굴을 가지고 있는데 그 동굴 속에 갇혀 살고 있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말하면 선보로 나가서 뚱뚱한 여자를 보면 둔한 사람이라고 생각하여 다시 마날 생각을 안 하거나, 길을 가다가 얼굴이 험상궂게 생긴 사람을 보면 그를 난폭한 사람이라고 두려워하여 그를 피하거나, 공부 안하고 놀기만 하는 아이를 보면 그 아이의 미래가 암담하다고 말하는 선생 이들은 다 자기의 마음 속 동굴에 갇혀 사는 사람들입니다. 

\흔히 경기도 자린고비 강원도 감자바위 충청도 양반 경상도 문둥이 전라도 개똥새라고 말합니다. 때로는 이 말이 비아냥하는 말이나 얍 잡아 부르는 말로 쓰여지기도 합니다. 그러나 알고 보면 다 좋은 말입니다. 경기도 자린고비는 열심히 돈을 벌어 저축하는 낭비하지 않는 성실한 사람이란 의미입니다.  감자바위는 강원도가 감자의 주 생산지로서 사람들의 성격이 듬직하고 무게가 있어 생긴 말입니다. 충청도 양반은 말과 행동이 점잖은 사람이란 말입니다.


경상도 '문둥이'의 어원을 알아보면, 원래 '문둥이'는 '나병환자'를 가리키는 말입니다. 경상도 사람들은 자기 아들이나 친한 친구 사이에도 곧잘 "야, 이 문둥이같은 자식아."라는 등의 표현을 합니다. 그러나 세상의 어떤 부모나 지인이 자기의 아들이나 지기에게 "나병환자 같은 자식"이라는 저주스런 표현을 쓰겠는가! 그럼 문둥이는 무엇을 의미하는 단어란 말인가! 결론적으로 문둥이는 글공부를 하는 어린이라는 뜻의 '문동(文童)이'가 변해서 된 말입니다. 서당. 서원에서 글 공부를 하는 어린이가 사랑스러워 '문동(文童)이'라고 부르는데 경상도 사투리 발음이 문둥이라고 말에서 생겨난 오해입니다. 그러므로 경상도에 문둥이들이 한센씨 병에 걸린 사람들이 많다고 비아냥하듯 말한다면 잘못된 말입니다.
전라도 '개똥새'는 도대체 어떤 새란 말인가! 이것도 결론적으로 말하면 '갯땅쇠'가 변한 단어입니다. 전라도에는 갯벌이 많습니다. '갯땅'은 갯물이 드나드는 지역, 곧 갯벌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쇠'는 '마당쇠' '돌쇠' '병강쇠'처럼 건강하고 성실하게 사는 젊은이를 뜻합니다. 그런면에서 볼 때 '개똥새'는 개똥 먹는 새가 아니라, '갯벌에서 열심히 살아가는 건강한 젊은이를 말합니다.
이렇게 지역마다 그 지역의 좋은 의미로 불려진 별칭을 사람들은 자기의 마음속 동굴에서 어떤 비뚤어진 생각으로 비아냥하는 말로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런 생각을 편견(prejudice) 또는 선입견이라고 말합니다. 우리들 마음속 동굴 우상은 편견이란 것입니다.

 

2009년 4월 중순부터 인터넷을 통해 전 세계 1억 명 이상의 가슴에 뜨거운 감동의 물결로 파도 친 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수잔 보일(Susan Boyle)이란 47세 여성입니다.
영국에  ‘Britain's Got Talent ' 쇼는라는 TV프로가 있는데 나이 제한 없이 춤, 노래 등 재능 있는 이들을 선발하는 아마추어 장기자랑 대회입니다. 4월에 수잔이란 여인이 이 대회에 참가하였습니다. 수잔이 무대에 소개되는 순간 심사위원들과 관객들은 크게 실망하였습니다. 그 실망하는 눈빛들이 카메라에 잡혀 영상으로 보여주었습니다. 머리는 빗지도 않은 것처럼 멋대로 헝클어져 있고, 몸매는 뚱뚱하며 옷은 촌스럽게 걸음은 남자처럼, 얼굴은 여성으로서의 매력(?)을 찾아볼 수 없는 모습이었습니다. 심사윈원들이 질문하고 대답하는 인터뷰에서 보여주는 수잔의 촌스럽고 품위 없는(?) 몸짓에 심사위원도 한심하다는 듯한 표정을 감추지 않고 관객들의 표정도 입을 삐죽거리며 멸시하는 눈초리도 보여주었습니다. 이러한 수잔이 노래를 시작하자마자 천상의 소리로 들려왔을 때 심사위원들과 관객들은 노래를 부르는 몇 분 동안 박수와 환호를 멈추지 않았습니다. 무엇보다 그의 노래, 가창력과 아름답고 섬세한 음색이었습니다. 그러나 노래의 한 소절도 지나지 않았는데 기립박수가 터져나온 배경은 그 자리에 참석한 청중과 심사위원들이 가졌던 수잔에 대한 편견을 뒤집은 아름다운 배반(?) 때문이었습니다. 장난기 어린 미소와 함께 수잔이 노래를 시작하는 순간 드넓은 극장을 가득 메운 관중들과 심사위원들은 사정없이 뒤통수(?)를 맞고 정신을 잃을 정도였습니다. 물론 시청자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저도 인터넷으로 보았는데 아니 이럴수가 이런 노래 처음이야하는 생각이 들어 몇 번이나 반복해서 들었습니다.  그 감동은 인터넷 동영상 사이트 유튜브(YouTube)를 타고 전 세계로 1억 이상의 사람들에게 파도처럼 몰려갔던 것입니다. 
노래가 끝나고 세 명의 심사위원들이 평을 할 때 그들은 마치 고해성사를 하는 것처럼 들렸습니다. 수잔이 무대에 오를 때부터 노래를 시작하기 전까지 심사위원이나 관객 모두 한 마음으로 멸시하고 무시했던 것입니다. 오직 외모 한 가지로… 오직 노래를 하기 위해 올라온 사람에게, 노래를 부르기도 전에 얼굴과 옷차림새로 무시해버린 것입니다. 그러나 불과 몇 분 사이에 자신들의 편견이 얼마나 여지 없이 부서져버렸는지 그들은 정신을 잃을 정도였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이내 자신들의 미안함, 죄책감을 환호와 박수와 기립의 예절로 씻으며 수잔에게 용서를 구했습니다. 심사위원들은 자신들이 가졌던 편견을 부끄러워한 만큼 수잔을 극찬했습니다. 심사위원들만 아니라 방청객들과 화면을 통해 수잔의 아름다운 노래를 들은 수많은 시청자들이 6분도 안 돼 회개의 눈물을 흘렸습니다.
수잔은 2년 전, 그녀의 어머니가 91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날 때까지, 결혼도 안하고 줄곧 어머니를 봉양하며 외롭게 살아온 시골 노처녀였습니다. 다만 수잔은 시골 교회의 찬양대원으로 찬양을 부르는 일이 가장 기뻐하던 일이었습니다.

 

편견이란 무엇인가? 편견은 사실을 잘 알지 못한 채 좋지 않은 말이나 행동이나 판단을 하는 것을 말합니다. 보기도 전에, 만나기도 전에 듣기도 전에 마음으로 결정하고 거부하는 행위입니다. 제인 오스틴이 쓴 ‘오만과 편견’(Pride and Prejudice)은 남녀 사이의 편견의 문제를, ‘종달새를 죽여라’(To Kill A Mockingbird)는 흑인에 관한 편견의 문제를 다루고 있는 책입니다. 그밖에도 이념적 편견, 철학적 편견, 여성에 관한 편견 등, 편견은 여러 분야에 여러 모양으로 존재합니다. 여러분과 저는 하나님의 백성들로서 이 편견으로부터 자유로워야 할 책임이 있고,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편견에서 해방되기를 원하십니다.

 

편견은 사람에 따라 취향, 성격, 기질, 문화, 습관, 환경 등에서 자연스럽게 형성되기도 합니다. 어떤 사람이 "나는 초록색을 좋아한다."라고 말하면 이것은 그 사람의 취향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더 나가서 "너는 왜 빨간 색을 좋아하니? 참 이해가 안 된다."라고 말하면 이것은 편견입니다. 유재석이 지난 총선 때 투표하러 가면서 파랑색 운동모자를 썼습니다. 이 모습을 sns 인증 샷한 사진을 보고 종북이라고 북으로 가라는 비난한 게시글을 한국당 민경욱 국회의원이 자신의 페이스북에 공유하였습니다. 왜 유재석이 파란색 모자를 썼다고 종북이라고 비난 합니까? 그것은 민주당의 당색깔이 푸른색이기 때문에 그런 편견이란 우상에 빠져 버렸기 때문입니다. 유감스럽게도 민병욱 의원은 인천의 한 감리교회 집사입니다. 

사람들은 자신만의 동굴의 우상 편견과 선입견을 가지고 사람을 판단하고 세상을 바라봅니다. 그런데 조금만 더 생각해 보면 세상에 나쁜 사람은 없고 미운사람 없고 싫은 사람 없고 세상은 여전히 아름답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하나님이 창조하신 세상이요 하나님이 당신의 형상대로 만드신 인간이기 때문입니다. 누가 누구를 나쁘다고 할 것입니까? 모두 동굴 우상 편견이란 것을 섬기고 있기 때문입니다.

사무엘이 하나님의 명령을 받아 사울왕 대신 다른 사람에게 왕의 기름을 부을 사람을 찾아 베드레헴 다윗의 집에 왔습니다. 사무엘은 다윗의 첫번 째 형인 ‘엘리압’의 용모가 준수함을 보자 이 사람이 왕이 될 사람이라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사무엘에게 이렇게 말씀하신다. "그의 용모와 키를 보지 말라, 내가 이미 그를 버렸노라, 내가 보는 것은 사람과 같지 아니하니 사람은 외모를 보거니와 여호와는 중심을 보느니라.(삼상16:7)“ 사람은 자신의 편견으로 사람을 보지만 하나님은 그런 사람의 편견으로 보지 않으신다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1:46에 빌립이 자기 친구 나다나엘에게 예수님을 만나보라고 말하자 나다나엘이 하는 말이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날수 있느냐”라는 말을 하였습니다. 당시 예수님의 고향인 나사렛은 가난한 사람들이 모여 사는 빈민촌과 같은 곳 이였던 것입니다. 그런 가난뱅이 마을에 무슨 메시야가 태어나겠느냐는 나다나엘의 편견이었던 것입니다.


예수님의 선한 사마리아 사람 비유에서도 당시 유대사람들은 사마리아 사람들을 천히여기고 예의도 없고 자비심도 없는 막대먹은 인간들이라고 비난하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사마리아 사람이 유대인들이 모르척한 강도 맞아 게에 쓰러진 사람을 돌보고 치료해준 고마운 이웃이라고 말씀하므로서 유대인들의 편견의 우상을 깨트려 버렸습니다.
사마리아 수가성 우물가에서 한 여인을 만났습니다. 이 여인은 사람들이 남편을 다섯이나 보았다고 멸시하고 비난하던 한 여인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 여인에게 복음을 전하였습니다. 아주 중요한 말씀 “아버지께 참되게 예배하는 자들은 영과 진리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곧 이때라 아버지께서는 자기에게 이렇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느니라.(요4:23)”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공생애서 사람들을 향해 아무런 편견 없이 한마디로 동굴의 우상을 깨트리신 모습을 보게 됩니다. 심지어 율법에 대한 편견도 깨트리셨습니다. 제자들이 안식일 날 밀밭을 지나다가 밀알들을 흝어 먹었습니다. 이런 모습을 본 바리새인들이 안식일 날 추수하는 율법을 어기었다고 비난 하였습니다. 이때에 예수님이 무엇이라 말씀하였습니까? 사람이 안식일을 위해 있지 아니하고 안식일이 사람을 위해 있다고 말씀하시면 인자가 안식일의 주인이라(막2:27.28) 고 하였습니다. 

왜 제사장 율법사 바리새인들 예수님 당시의 상류층사람들이 예수님을 반대하고 심지어 십자가에 죽이도록 미워하였습니까? 그것은  동굴의 우상 편견을 숭상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 메시야로 인정하고 싶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들은 메시야가 자기들 같은 바리세인들 중에 오실 것이라 믿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가난뱅이 마을 목수의 아들이 메시야라니 있을 수 없는 일이고 있어서도 안 되는 일이라고 생각하였던 것입니다. 그러니 예수를 내버려 두었다간 자기들의 편견이 파괴될 것이라 지레 겁을 먹고 예수를 제거하자는 음모를 계획하였던 것입니다. 어찌 바리세인들 뿐입니까?  제자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예수님을 혁명의 투사로 또는 이스라엘의 왕이 될 사람으로 그런 편견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시는 것을 보고 그들은 다 숨어 버렸습니다. 가룟유다는 예수님을 배신하였고 베드로까지 예수님을 세번이나 모른다고 하였습니다.  편견은 죄입니다. 편견을 가지고 믿음생활 한다면 이는 예수님을 잘못 믿는 일입니다.   

 

왜 기독교인이 편견을 가져서는 안되는 것입니까?

우리가 편견을 가지게 되면 마음이 어두워져 버립니다. 마음이 어두워지면 진실을 진실이라고 보지 못합니다. 지옥이 어떤 곳인가? 바로 진리를 진리로 보지 못하는 것입니다. 사실을 사실로 인정하지 못합니다. 우리가 편견을 가지게 되면 가정과 교회와 사회에 이런 지옥 같은 세상이 되어 버립니다. 진실이 어둠에 묻히고 거짓된 마음이 온 세상에 가득하게 됩니다.

영국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영국의 비평가 버나드 쇼가 영국 사회를 관찰해보며 사회가 잘못된 것을 비평해 나가는데 한 가지 사실을 발견했습니다. 그것은 미켈란젤로의 작품을 좋아하는 사람들은 로뎅의 작품을 굉장히 싫어한다는 것이었어요. 그래서 이 버나드 쇼가 그 사람들의 편견을 교정하기 위해서 한 계획을 갖습니다. 집에 큰 파티를 열었어요. 미켈란젤로의 작품을 좋아하는 사람들을 골라서 초청을 했어요. 만찬이 무르익어 갑니다. 만찬을 마칠 때쯤에 버나드 쇼가 나와서 마이크를 잡았습니다. "잠시만 기다리십시오. 제가 여러분에게 아주 귀한 그림을 보여드리겠습니다." 그리고 방에 들어가서 조각을 하나 가지고 왔습니다. "여러분, 이 조각을 보십시오 멋있지요? 이것이 로뎅의 작품입니다." 장내가 조용해지더니 웅성웅성 합니다. 이어서 편견에 사로잡힌 혹독한 비평들이 쏟아집니다. "야, 모양이 왜 저 모양이냐!" "그래, 맞지? 규격이 맞지 않아" "어떻게 구도가 저 모양이냐?" 급기야는 "저것도 조각이라고 조가하였나?" 이러한 난도질이 거의 끝나갈 무렵에 버나드 쇼가 다시 마이크 앞에 나아와 당황한 표정을 지으며 사과를 합니다. "아! 여러분, 제가 실수를 했습니다. 그만 그림을 잘못 갖고 나왔네요. 이 그림은 로뎅의 작품이 아니라 미켈란젤로의 작품입니다." 그러자 장내가 숙연해졌어요.

여러분, 편견이 얼마나 어리석은지 아십니까? 그것이 로뎅의 작품인 줄 알았을 때는 그 조각이 형편없어 보였던 겁니다. 왜? 그들은 미켈란젤로의 팬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사실 미켈란젤로의 작품이었습니다. 이처럼 편견은 사실을 사실되게 바라보지 못하게 합니다. 편견은 참으로 무서운 것입니다. 편견이 왜 무서운가? 마음에 진리를 받아들이지 못하고 마음이 어두우니 거짓이 가득하게 됩니다. 그러니 그의 생각이 거짓되고 그의 말이 거짓이요 그의 행동이 거짓이 됩니다. 그의 인생이 거짓이니 헛되고 헛된 인생을 사는 것입니다. 편견은 자기의 인생을 헛되게 만드는 무서운 우상입니다,

 

여호와 증인들은 전쟁을 반대한다고 하여 군대나가는 것을 반대합니다. 그게 자기들의 양심이라고 합니다, 그러면 성경에 수많은 전쟁이야기가 있고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다윗은 전쟁에 나가 골리앗을 죽였는데 어찌 여호와 증인이라고 합니까? 군대 반대가 자기들의 양심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면 하나님을 믿지 말던가 이 나라를 떠나던가 하여야 합니다. 그것은 그들의 편견이요 거짓된 마음으로 양심을 팔고 있는 우상숭배자들이라고 하겠습니다.

 

편견을 고치는 일이 쉽지 않습니다. 편견은 마치 큰 바위 돌 같아 쉽게 깨트릴 수 없습니다. 사람들은 자신들의 마음 안에 편견이란 동굴을 만들어 편견이란 우상을 섬기므로 스스로 그 동굴에서 벗어나올 수 없습니다.  방법이 있습니다. 모세가 시내산에서 내려오다가 금송아지를 만들어 놓고 춤을 추며 경배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보고 십계명 판을 내 던져 금송아지 상을 깨뜰어 버렸듯이, 우리 신앙인들은 내안의 동굴에 모셔 둔 편견우상을 성령으로 깨뜰어 버려야 합니다. 


베드로와 제자들이 예수님에 대한 편견이 어떻게 깨트려졌습니까? 오순절 날 기도에 힘쓰는 중 성령을 받아 깨트려 졌습니다. 우리 스스로 나의 편견의 우상을 깨트릴 수 없습니다. 성령의 능력이 아니고는 불가능한 일입니다. 그러므로 성령 받은 사람은 편견을 가지지 말아야 합니다. 그런데 성령 받았다는 사람이 더 편견에 사로잡히는 것을 많이 봅니다. 왜 그렇습니까? 성령받은 사람은 마음에 성령이 충만한 사람이요 그러면 그의 눈과 그의 입과 그의 귀를 통해 성령의 기운이 나아야 합니다, 눈에 성령의 기운이 나오면 성령의 눈으로 세상을 봅니다. 사람을 봅니다. 세상이 아름답게 보입니다. 성령받기 전엔 그렇게 밉던 사람이 성령 받은 후에 보니 그렇게 예쁠 수 없습니다. 성령 받기 전에 입에서 불평불만 원망 원성이 흘러 나왔는데 성령의 기운이 입을 통해 나오니 찬송이 흘러나온 입이요 하나님을 향한 기도를 하는 입이라 그 입에서 말하는 말이 사랑과 감사뿐이어야 합니다. 

로마서 15장 7절에서 사도 바울은 이렇게 선포합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받아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심과 같이 너희도 서로 받으라" 고 말씀하였습니다. 오늘 하나님께서 명령하십니다. '너희도 서로 받으라!(프로슬람바네스데 알렐루스)' 이 말씀에서 ‘받으라’는 말씀은 서로 ‘영접하라, 환영하라’는 명령의 말씀입니다. 어떻게 영접하였습니까? 예수그리스도께서 우리를 환영하여주셨듯이 우리도 서로 서로 기뻐 맞이하라는 말씀입니다.


저는 통일을 염려합니다. 그것은 남과 북이 지난 70여 년 동안 적대적 관계로 살아 와는데 만일 통일이 되면 엄청난 사회적 혼란이 야기 될까 걱정입니다. 지금 우리나라에 지역감정이 아직도 존재하고 있습니다. 영남사람들과 호남 사람들 간에 보이지 않는 깊은 골이 파여 있습니다. 그런데 남북이 통일되면 유대사람과 사마리아 사람들처럼 더 큰 갈등이 있지 않겠습니까? 그러므로 우리 기독교인들 특히 성령 받은 성도들이 먼저 편견 우상을 깨트리고 앞장서 서로서로 사랑하고 용납하고 화합하고 용서하는 믿음을 나타내어야 합니다. 편견 없읏ㄴ 예수님을 따르는 우리는 역시 편견 없이 세상을 살아야 합니다. 편견 없는 사랑이 진정한 사랑이요 화합이요 통일입니다. 그것이 성령받은 사람들의 확실한 증거입니다.

 

예수님이 우리를 받으신 것과 같이 너희도 서로 받으라! 우리 부모님이 나에게 편견을 심어 주었든 아니든, 정치인들이 보수냐 진보냐 어떤 생각을 심어주었든지, 신앙생활하면서 가졌던 편견이 어떠하였던지 간에  예수님의 마음으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편견 우상을 버리고 성령의 마음으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사회에 편견만 버릴 수 있다면 얼마나 많은 평화가 우리에게 찾아올지, 얼마나 많은 기쁨이 그 가정을 샘솟게 할는지요. 그런데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편견에 사로잡혀서, 회복해야 할 관계를 회복하지 못하고 단절된 채로 이 세상을 살아갑니다. 불편한 채로 살아갑니다. 그 사람의 마음속에 상처를 심어줍니다. 억울한 마음을 생기게 합니다. 사실을 사실되게 하지 못하고, 진리가 거짓에 묻혀버렸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심으로 말미암아 중간에 막힌 담을 이미 허물어 버리셨다는 사실을 아십니까?(엡2:14). 그리고 원수 된 것을 십자가로 소멸하시고 가까운데 있는 자들이나 먼데 있는 자들에게 평안을 전하셨다는 사실을 아십니까? 이제 주님 안에 있는 모든 사람들 그들은 외인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시민입니다. 주님을 믿음으로 말미암아 더 이상 나그네가 아니라, 하나님의 권속, 즉 하나님의 가족이 되었습니다(엡2:19).
그러므로 바리새인들처럼 편견의 눈으로 세상을 보거나 사람들을 보지 않아야 합니다. 2,000년 전 주님께서 이미 무너뜨리신 편견 우상을 다시 마음 동굴 속에 두는 어리석음을 범하지 않아야 합니다.

 

링컨 대통령 시절, 노예해방문제로 일어난 남북전쟁이 끝나고 노예해방을 반대한 남부군 총 사령관인 로버트 리 장군이 워싱턴에 있는 아주 잘 지은 교회에서 예배를 드리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기도 시간이 되자 그 장군은 앞으로 나와 흑인 옆에 앉아서 기도를 드리는 것입니다. 같이 예배를 드리던 남부에서 온 사람들이 그 모습을 보고 깜짝 놀라 물었습니다. “우리 남부의 최고 사령관인 장군께서 어떻게 흑인 옆에서 기도를 드릴 수 있습니까?” 장군은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형제여, 십자가 앞의 모든 지면은 다 똑같습니다.”
편견 우상을 깨뜰어 버린 장군입니다. 이런 지도자들이 사회 곳곳에 있을 때 그 사회는 새로운 사회, 편견 없는 사회, 공평한 사회, 아름다운 사회가 될 것입니다.

 

오늘 봉독한 딤전 5:21에 무엇이라 말씀하였습니까? “내가 엄히 명하노니 너는 편견 없이하라(디아마르튀로마이...코리스 프로크리마토스)”라고 말씀하였습니다.
우리 라온코이노니아는 편견우상을 깨뜰어 버린 성령 충만한 사람들의 신앙공동체입니다. 편견은 내 마음에 동굴을 만들어 놓고 편견이란 우상을 만들어 섬기는 일입니다. 편견우상을 내 마음에서 제거하므로 우리의 마음은 환하고 깨끗합니다, 우리는 편견 없는 세상을 지향하고 편견 없는 가정에서 행복하게 살아갑니다.  하나님이 그러한 우리에게 평화를 주시고 성공적인 인생을 살아가도록 축복해 주십니다. 

하나님의 은혜와 평강의 축복이 우리 모두에게 있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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