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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병호목사의 교회이야기

전병호 목사의 설교



2018년 3월 25일   棕櫚主日아침예배 눅 23:39-43  풀루스 울트라


오늘은 교회달력으로 종려주일입니다. 종려주일은 예수께서 나귀를 타시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실 때에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보고 종려나무 가지를 흔들며 호산나를 외치고 환영한 데서 붙여진 이름(요12:13)입니다. 사람들은 예수님에게 "호산나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요한복음 12:12~15)라고 소리쳤습니다. 다른 세 복음서에는 그냥 '나뭇가지'라고 되어 있지만 요한복음만은 '종려나무 가지(포이닉스:대추야자)'라고 구체적으로 밝히고 있습니다. 나귀를 탄 것은 겸손함의 표시입니다. 제자들은 스가랴의 예언이 실현되었다고 여겼습니다. 500년 전 스가랴 선지자는 "보라 네 왕이 네게 임하시나니 …… 겸손하여서 나귀를 타시나니"(스가랴 9:9)라는 말씀 하였습니다. 교회에서는 이 사건을 '승리의 입성'이라고 합니다. 옛날 어떤 교회는 종려주일에 종려나무 가지를 전시한 뒤, 이듬해 바싹 마른 가지를 불에 태워 '재의 수요일' 사순절 첫날행사에서 사람들의 이마에 재로 십자가를 표시를 해주기도 하였습니다. 중세에는 한 교회에서 예배를 본 다음 가까이 있는 다른 교회로 걸어가는 게 종려주일의 관습이었다고 합니다. 이때 사람들은 종려나무 가지를 흔들어 예수의 예루살렘 입성을 되새기곤 했습니다. 종려주일은 성 고난주간이 시작되는 날입니다.


교회에서는 춘분(春分)을 기점으로 보름달이 뜨는 음력 15일이 지나고 첫 번째로 돌아오는 주일을 예수님이 부활(復活) 하신 날로 정하고 있습니다. 주일날이 보름(음 15일) 날인 경우는 다음 주일을 부활주일로 정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금년 2018년은 지난 주 수요일인 3월 21일이 춘분이었고 오늘이 종려주일 그리고 보름달이 뜨는 날이 3월 31일, 따라서 돌아오는 주일이 4월 1일일 부활주일입니다. 내년에는 4월 29일이 부활주일입니다. 2020년에는 4월 12일이고 2025년에는 4월20일이고 2030년에는 4월21일이 부활주일입니다. 20년 후인 2038년의 부활주일은 4월 25일입니다. 하나님이 그때까지 저를 이 세상에 있게 하시면 그날의 부활절 아침을 맞이하고 싶습니다. 아멘.

 

1492년까지 지중해로 뻗어있는 스페인 이베리아 반도의 지브랄타 해협 끝에 헤라클레스의 기둥이라는 두 개의 바위산이 있습니다. 이 바위산에 라틴어로 세 글자가 씌어 진 작은 표지판 하나가 세워져 있었다고 합니다. 그 세 글자는 , ‘네 플루스 울트라,  Nec Plus Ultra’,  ‘더욱 더 아니다’, ‘더 이상 나가지 말라“입니다. 이 너머에는 아무것도 없기 때문에 더 멀리 나가지 말라는 것입니다. 500여 년 전 당시 스페인 사람들, 그리고 유럽의 많은 사람들은 지구는 평평하다고 믿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바로 그곳을 지구의 끝이라고 믿었던 것입니다. 지구는 여기에서 끝난다, 더 이상은 아무 것도 없다 여기가 끝이다. 그런데 이 생각도 1492년 까지 입니다. 왜 1492년 입니까? 1942년에 놀라운 세계사적인 사건이 발생합니다. 바로 콜럼부스가 이 지구의 끝을 용감하게 박차고 넘어간 것입니다. 그리고 그는 다시 돌아왔습니다. 그는 저 건너편에 아무것도 없다고 생각했든 지구의 끝, 그리고 참담한 벼랑만이 기다리고 있었던 지구의 끝을 넘어서서 거기에 미지의 새로운 대륙인 소위 아메리카가, 미 대륙이, 신대륙이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을 확인하고 돌아왔던 것입니다. 그래서 더 이상 아무것도 없다는 이 표지판은 바뀝니다. 사람들은 네 풀루스 울트라 의 첫 글자인 네어(Nec) 라는 단어를 빼버렸습니다. 그래서 풀루스 울트라만 남아 이 말은 ’더욱 더‘ ’더 멀리 나아가라‘는 말이 되어 15세기 스페인 왕이자 신성로마제국의 황제였던 카를 5세가 좌우명으로 삼았습니다. 그리고 이 말이 오늘 아침 설교제목입니다.


그러면 다시 한번 질문합니다. 삶의 마지막 그 끝 다음에는 무엇이 있습니까? 아무것도 없습니까? 인생이 죽음으로 그것으로 끝나는 것입니까?

임사(臨死)체험을 하고 다시 살아난 사람은 거의 대부분이 영혼의 불멸, 영혼이 어디론가 간다는 것, 천국과 지옥이 있다는 것을 강하게 느끼고 그때부터 신앙을 가지거나 착하게 살려고 노력한다는 것이 학계의 공통된 보고가 있습니다.

'죽기 1초 전의 느낌은?' 충격의 임 사(臨 死)실험 14단계를 지난 11월 9일 중국 정부계통의 정보 포털 사이트 중국 망(차이나 넷)은, 미국의 저명한 심리학자인 Raymond A.Moody박사가   임사(臨死)체험자 150명의 증언을 근거로 작성한   '임사(臨死)체험'을 소개하였습니다. 박사는 체험자의 대부분이 비슷한 체험을 한 것에 착안해, 임사(臨死)상태에서 다시 의식을 찾을 때까지의 과정을 순서대로 14항목으로 정리를 하였습니다.

01. 자신의 죽음의 선고가 들린다.

02. 지금껏 느껴본 적 없는 편안하고 유쾌한 기분을 느낄 수 있다.

03. 알 수 없는 목소리가 들려온다. 아름다운 음악소리가 들리기도 한다.

04. 돌연 어두운 터널 속으로 끌려들어 간다.

05. 정신이 육체로부터 벗어나, 외부로부터 자신의 신체를 관찰한다.

06. 아무리 구해 달라고 소리쳐도, 아무에게도 들리지 않는다.

07. 시간 감각이 없어진다.

08. 시각과 청각이 굉장히 민감해 진다.

09. 강한 고독감이 엄습한다.

10. 지금껏 알고 지낸 여러 사람들이 나타난다.

11. '빛의 존재'와 만난다.

12. 자신의 인생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간다.

13. 앞으로 나가는 것을 주저하게 된다.

14. 다시 살아난다. 기사에 의하면, 죽기직전 자신의 삶에 대한 평가가 내려지는데, 판단기준은 자신이 얼마나 돈을 벌고 출세를 했는지가 아니라 "한 평생 얼마나 타인과 사랑과 온정을 함께 나누었는가?" 라고 한다.(http://blog.koreadaily.com/dapark/300067  2010.9.16 가져온 글) 

 

2015년 5월 텍사스에 사는 17살의 고등학생인 잭 클레맨츠는 체육시간에 달리기를 하다가 갑자기 쓰러져서 의식을 잃었고 심장마비가 왔습니다. 20분 동안 심장박동이 없었고 그는 법적으로 의학적으로는 죽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20분 후에 기적적으로 심장이 뛰고 살아나서 다른 병원으로 옮겨지고 3일만에 아무 후유증 없이 깨어났습니다. 그런데 그가 놀라운 말을 했습니다. 의식을 잃은 동안 그는 예수님을 만났다고 말했습니다. 예수님께서 "모든 것이 잘 될 것이니 걱정마라" 고 말씀하셨고 그 이후 마음에 평강이 왔다고 간증을 했습니다. 그의 부모님은 이 사건은 의학적으로도 이성적으로도 설명될 수 없는 하나님께서 보여주신 기적(표적)이라며 아들을 살려주신 하나님께 감사했습니다. (2016년 11.21 아멘충성교회 koiru90)

 

천국은 과연 존재하는가? 둘 중에 하나입니다. 있거나 없거나 입니다. 400년 전 프랑스에 파스칼(Blaise Pascal , 1623년 6월 19일-662년 8월 19일)이란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는 지금까지도 세계적으로 알려진 유명한 수학자요, 과학자요, 철학자로 팡세라는 그의 책은 꼭 읽어보아야 하는 고전이 되었습니다. 그가 말한 유명한 말이 있습니다. ‘사람은 생각하는 갈대라’는 말입니다.  팡세에서 이런 유명한 얘기를 하였습니다. ‘천국! 이것은 포기하기에는 너무나 엄청난 도박이다! 그냥 우리가 포기해버리기에는 너무나 어마어마한 이것은 도박이다.’ 파스칼은 수학자이니까 계산을 하였습니다. 천국이 없다면, 천국을 믿고 살았든 나에게 별로 손해 볼 것은 사실은 없다. 그러나 천국이 정말 존재했다면, 준비만 하였으면 갈 수 있었던 천국, 그런데 그 천국을 내가 놓쳐버렸다면 이것은 큰일이다. 이것은 놓쳐버리기에는, 이것은 그대로 지나치기에는 너무나 어마 어마한 도박이다. 그래서 자기를 도박하고 있는 사람이라고 말했습니다. 무슨 말입니까? 만일 천국이 없다면 천국이 있다고 믿던 안 믿던 상관없지만 그러나 천국이 있는데 없다고 생각한 사람들에게는 엄청난 인생의 실패를 가져온 일이 될 것이요, 있다고 믿는 사람들에겐 대박을 친 것이니 천국이 있다고 믿고 살라는 것입니다.

 

오늘부터 한 주간 고난 주간입니다. 이 고난 주간에 근신하여 살아가는 우리들은 예수님께서 사람들의 욕설과 비아냥과 조롱을 받으신 것을 생각하면 더욱 슬퍼집니다.
마태복음 27:39-40에  “지나가는 자들은 자기 머리를 흔들며 예수를 모욕하여 이르되 성전을 헐고 사흘에 짓는 자여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자기를 구원하고 십자가에서 내려오라 하며” 누가 욕했습니까? 지나가는 자들이 예수님을 모욕했습니다. 그들이 한 욕의 내용은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면 자기를 구원하고 십자가에서 내려오라”는 것이었습니다. 즉 하나님의 아들이 어떻게 그렇게도 무능하게 십자가에서 힘없이 죽을수 있느냐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지나가는 자들만 예수님을 욕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마태복음 27:41-42에  “그와 같이 대제사장들도 서기관들과 장로들과 함께 희롱하여 이르되 그가 남은 구원하였으되 자기는 구원할 수 없도다 그가 이스라엘의 왕이로다 지금 십자가에서 내려올지어다 그리하면 우리가 믿겠노라” 이번에는 누가 욕을 했습니까? 예수님을 고발했던 유대인들인 대제사장들, 서기관들, 그리고 장로들이었습니다. 그리고 심지어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 못박힌 한 강도가 예수님에게 욕을 한 것이었습니다. 저희들도 살면서 크고 작은 욕을 먹고 살 때가 있지만 그 어느 누구도 예수님보다 더 처참하게 욕을 먹은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오늘 봉독한 말씀에서 예수님과 더불어 양쪽에 못 박힌 두 강도가 있었는데, 왼편 십자가에 있는 강도는 죽어가면서 저주하고, 욕설을 퍼붓고, 고통으로 몸부림을 치면서 예수님을 향해 “네가 그리스도가 아니냐 너와 우리를 구원하라”라고 예수님을 비방하고 조롱을 하였습니다. 그러나 오른 쪽 십자가에 못 박혔던 강도는 그를 꾸짖으면서 말합니다. 네가 동일한 정죄를 받고도 하나님을 두려워 아니하느냐? 우리는 우리의 행한 일에 상당한 보응을 받고 그 정죄를 받고 이렇게 죽는 것이 당연하거니와 우리 가운데 매달린 이 사람은 자기가 행한 것에 옳지 않은 것이 없다. 그리고 자기 곁에 못 박혀 계신 예수님을 향해서 이렇게 외칩니다. “예수님, 당신의 나라에 임할 때 저를 기억해 주십시요.(예수, 무네스데티 무 호탄  엘데스 에이스 텐 바실레이안 수 主臨爾國時 求記憶我)” 그 예수님은 역시 똑같은 십자가의 고통 속에서, 똑같은 아픔과 신음 속에서 말씀하십니다.  “진실로 당신에게 말합니다. 오늘 나와 함께 낙원에 있을 것입니다.(아멘 소이 레고 세메론 멭 에무 에세 엔 토 파라데이소 今日爾必同我在樂園)”


왼쪽편 십자가에 못 박혔던 강도는 십자가의 죽음이, 네오 플루스 울트라, 더 이상 나가지 못하는 그의 인생의 끝 이였지만 오른쪽 십자가의 강도는 마지막 인생의 끝에서 예수님을 찾음으로 십자가의 죽음이 끝이 아니라, 플루스 울트라, 더욱 더 멀리 천국에 까지 그의 삶은 뻗어나갔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스펜인국왕의 좌우명이었던 풀루스 울트라는 바로 우리의 좌우명이기도 합니다.

서양격언에 “참호 속에는 무신론자가 없다”(There are no atheists in foxholes)는 말이 있습니다. 인생이 위기에 처하면 사람들은 그 어느 인생도 의지하지 못합니다. 아버지를 불러도 선생님을 불러도 대답 없는 이름뿐입니다. 그 모든 이름들은 부르다 내가 죽을 이름들 뿐입니다. 사람들이 삶과 죽음의 기로에서 찾을 수 있는 유일한 이름은 “하나님 살려주세요!”입니다.  왜 하나님의 이름을 부릅니까? 인생의 운명을 주관하시는 분이 있으니 곧 하나님이라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평소에 단 한 번도 하나님을 불러본 적이 없는 사람이라도 그의 메마른 심령 그 끝에는 창조주 하나님의 이름이 새겨져 있기 때문에 “하나님 나를 살려주세요”라고 말합니다. 삶의 마지막 그 끝 다음에는 무엇이 있습니까? 더 이상 나갈 수 없습니까? 아니지요. 우리는 분명히 풀루스 울트라 더욱 더 멀리 하나님께로 가까이 나가게 될 것임을 믿습니다. 우리에게는 영원한 나라 천국이 있음을 믿습니다. 누구든지 주 예수를 믿으면 구원을 얻고 영생을 얻을 줄 믿습니다. 우리는 이것을 알아야 합니다. 기독교인에게는 ‘이것이 마지막이야, 여기가 끝이야’가 아니라 풀루스 울트라 더욱 더 앞으로 계속 나가는 사람들이라는 것입니다. 기독교인들의 믿음은 바로 인생에 끝이 라는 것은 없다는 것을 믿는 믿음입니다.

 

그러면 누가 이런 믿음을 가질 수 있습니까? 예수님의 오른 쪽 십자가의 강도가 다른 강도를 꾸짖으면서 말하길 “네가 동일한 정죄를 받고서도 하나님을 두려워 아니하느냐 우리는 우리가 행한 일에 상당한 보응을 받는 것이니 이에 당연하거니와 ”라고 말하였습니다.  이 두강도가 어떤 죄를 범하였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십자가의 사형을 받을 정도라면 아마도 많은 사람들의 생명을 해치는 죄를 범하였을 것입니다. 그들의 죄 값은 십자가 사형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왼쪽의 강도는 전혀 죄의식이 없지만 오른쪽 강도는 자신들의 죄를 인정하고 있습니다. 나의 죄를 인정하는 것은 구원의 첫째 조건입니다. 로마서 3장 23절에서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라고 말씀하였습니다.  모든 사람이, 예외 없이 여기 서 있는 저를 포함해서,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습니다.  로마서 3:10은에 "기록된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웈크 에스틴 디카이오스 우데 헤이스)"라고 말씀하였는데,  이는 시편 14편과 53편의 인용입니다.
시 14:2-3 여호와께서 하늘에서 인생을 굽어 살피사 지각이 있어 하나님을 찾는 자가 있는가 보려 하신즉  다 치우쳐 함께 더러운 자가 되고 선을 행하는 자가 없으니 하나도 없도다(에인 깜 에ㅋ하드).
시 53:2-3 하나님이 하늘에서 인생을 굽어 살피사 지각이 있는 자와 하나님을 찾는 자가 있는가 보려 하신즉 각기 물러가 함께 더러운 자가 되고 선을 행하는 자 없으니 한 사람도 없도다(에인 깜 에ㅋ하드).
(전7:20에서도 말씀하기를  선을 행하고 전혀 죄를 범하지 아니하는 의인은 세상에 없기 때문이로다.  키 아담 에인 차디크 빠아레츠.라 말씀하였습니다.)

세상에는 윤리적으로 좋은 사람들이 많습니다. 도덕적으로 착한 사람들도 많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믿지 않는다면 그의 윤리와 도덕이 그를 구원시키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모든 사람들의 심리 그 은밀한 곳에 가장 어두운 그곳에 웅크리고 있는 죄가 있기 때문입니다. 바로 그 웅크리고 있는 죄가 그로 하나님을 믿지 않게 하는 원흉이기도 합니다.

 

어느 은행 지점장이 중한 병에 걸려 임종에 가까이 이르렀습니다. 그의 부인은 교회 집사로 남편이 세상 떠나기 전에 예수 믿고 구원받기를 원하여 목사님을 오시라 하였습니다. “참호 속에는 무신론자가 없다”고 어쩌면 인생의 마지막에 예수님을 영접할 것이라는 희망을 가지고 목사님은 십자가상에서 마지막 순간에 회개하고 구원 받은 강도의 이야기를 하였습니다, “지점장님도 늦지 않았으니 이 강도처럼 예수 믿고 구원 받고 천국 가셔야 합니다”고 말씀을 전했습니다. 말씀을 듣고 있던 남편은 숨이 연약해지면서도 말하길 “나는 강도가 아닙니다. 나는 지금까지 누구 돈을 흠친적이 한 번도 없습니다”고 말합니다.  그래서 목사님이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그러면 제가 질문을 하겠습니다. “지점장님은 지금까지 하나님을 위해 사셨습니까? 지점장님 자신만을 위해서 살았습니까?” “아, 나는 하나님을 모르니까 나 자신을 위해서 살았겠죠.”  “그럼 지점장님은 만일 누가 은행돈을 상부나 돈의 주인과는 전혀 상관없이 마음대로 자신을 위해 썼다면 그런 사람을 무어라고 합니까?” “그런 사람은 날 강도이지요” “그러면 지점장님, 하나님은 우리 인생의 주인이십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생명을 주셨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을 위해서 살아야 하는데 하나님을 위해서 살지 아니하고 자신만을 위해서 살았다면 지점장님도 날 강도가 아니겠습니까?” 지점장님은 아무 말도 못하고 눈을 꼭 감고 있었습니다. 목사님은 기도하고 돌아갔습니다. 그 다음날 부인 집사가 목사님을 다시 초청하였습니다. 지점장은 목사님을 보고 “목사님 저도 인생의 날강도처럼 살아왔습니다. 저 같은 사람도 예수 믿을 수 있겠습니까?”  목사님은 그에게 세례식을 베풀고 성찬식도 행하였습니다. 며칠 후 지점장님은 평안히 눈을 감았습니다. 지점장님의 인생은 눈을 감음으로 끝이 아니라 풀루스 울트라 영원한 천국으로 가신 줄 믿습니다.

 

윤리적으로나 도덕적으로 흠없다 하여도 영원한 세상에 들어갈 조건이 되지 못합니다. 나는 죄인입니다. 누가 나의 사망의 길에서 나를 구원할 것인가. 내 주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kyrie eleison)  라고 자신의 어리석어 깨닫지 못하였던 자신의 죄를 인정하고 주님의 십자가 앞에 업데일 때에 주님이 말씀하십니다. “진실로 당신에게 말합니다. 오늘 나와 함께 낙원에 있을 것입니다.(아멘 소이 레고 세메론 멭 에무 에세 엔 토 파라데이소.”라고 주님의 부르심을 듣게 될 것입니다. 이렇게 자신의 죄를 인정하면 바로 ‘내 주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kyrie eleison)’라고 주님께 구원을 간청하여야 합니다. ‘불쌍히 여기소서’라는 말이 헬라어 ‘eleieson'이라는 단어인데, ‘자비를 베풀다’ ‘불쌍히 여기다’라는 뜻입니다.
이번 주간은 예수님의 고난 주간입니다. 우리의 죄를 대속해 주시기 위해 십자가를 지시고 고난당하시고 죽으시는 예수님의 공생에 마지막 주간입니다. 이 주간에 우리는 ‘ 주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의 기도를 베드로처럼 드릴 수 있어야 합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의 재찬시에 세 번씩이나 주님을 모른다고 배신하였다가 크게 통곡하며 회개하였습니다. 세계 기독교인들이 고난 주간에 꼭 듣는 음악이 있는데 바로 바하의 마태수난곡입니다. 이 수난곡 중에 예수님을 모른다고 배신하였던 베드로의 통곡의 노래가 있습니다. 예수의 존재를 3번씩이나 부인한 베드로가 통한의 눈물을 흘릴 때 나오는 바이올린과 알토의 이중주....알토를 위한 아리아는 아름다운 오블리가토 바이올린 파트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 가사는 다음과 같습니다. (잠시 음악을 감상하겠습니다.)

 

Erbarme dich, mein Gott, / um meiner Zaehren willen!
Schaue hier, Herz und Auge / weint vor dir bitterlich.
Erbarme dich, mein Gott.
아, 나의 하느님이여. / 나의 눈물로 보아 불쌍히 여기소서!
당신 앞에서 애통하게 우는 나의 마음과 눈동자를
주여, 보시옵소서. 불쌍히 여기소서
(마태수난곡 BWV244 알토아리아 " Erbarme dich mein Gott ")
 
우리는 이 고난 주간에 어떤 기도를 드려야 하겠습니까?
비겁한 나를, 예수 그리스도시여, 불쌍히 여기소서. 기쁘게 헌신하겠다며 말뿐이었던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고집불통인 나를, 주여, 불쌍히 여기소서. 나의 생각, 내주장 내 고집 때문에 불순종하였던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교만한 나를, 주여, 불쌍히 여기소서. 무슨 일이 잘 되면 내 능력인양 우쭐대고 안 되면 주님을 원망하던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불안하여 가슴 조려하는 나를, 주여, 불쌍히 여기소서. 하나님의 섭리와 계획가운데 인도하심을 믿지 못하고 여전히 불안에 떨며 고민하는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믿음 없는 나를, 주여, 불쌍히 여기소서. 주님의 목소리보다 세상의 목소리들을 신뢰하며 세상 유혹에 빠져버리는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핑계 많은 나를, 주여, 불쌍히 여기소서. 숱한 핑계들로. 변명들로 믿음을 멀리하고 세상으로 달려갔던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감사할 줄 모르는 나를, 주여, 불쌍히 여기소서. 나보다 나의 필요를 더 잘 아시고 언제나 늘 넘치도록 채워주시는데도 감사할 줄 모르는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뻔뻔하기만 한 나를, 주여, 불쌍히 여기소서. 죄인이면서도 뻔뻔하게 아닌척하는 나 임에도 불구하고 나를 감싸 안아 주시는 주님의 사랑을 오히려 시험하려 하였던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그리고 주님을 온전히 사랑하지 못하는 나를, 주여 불쌍히 여기소서. 여전히 너무나 많은 헛된 것들을 사랑하느라 나를 사랑하시는 주님의 사랑을 외면하였던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주여, 이런 나를 불쌍히 여기 소서. 퀴리에 엘레이손

 

가을에 논에 떨어진 이삭을 줍는 모습을 생각해 봅시다. 줍기 전에는 그 이삭은 쓰레기에 불과합니다. 그러나 주운 후에는 추수한 알곡과 동일합니다.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죄를 회개하며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주님 앞에 기도하는 모든 사람들을 더 이상 죄의 구렁텅이에 내버려두지 않으시고 구원하여 당신의 자녀로 삼으시며 풀루스 울트라 끝없이 펼쳐진 하나님의 세계를 향해 나아가도록 인도해 주시는 주님이심을 믿으시길 바랍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에 못 박혔던 두 강도의 이름을 소개하겠습니다.

오른 쪽 구원받은 강도의 이름이 라트로(Latro, 일명 Dismas)라고 합니다. 왼쪽의 강도 이름은 제스타스입니다. 바로 오늘 3월 25일이 천주교회에서 성 라토르 기념일로 지키고 있습니다. 라토르에대한 전설이 있습니다. 헤롯왕의 위협을 받은 요셉과 마리아가 천사의 지시대로 아기예수를 안고 이집트로 피난을 가는 도중에 강도를 만났습니다. 그 강도가 라토르였습니다. 그리고 라토르는 요셉과 마리아 그리고 아기 예수가 평안히 이집트로 가도록 길 안내자 역할을 합니다. 그리고 33년 후 다시 만난 자리가 골고다 십자가 위에서입니다. 라토르는 예수님의 처음과 나중을 함께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교회에서는 그를 성 라트로가 부르며 그를 기념하고 있습니다.

以蠡測海 이려측해라는 말이 있습니다. 표주박으로 바다를 잰다는 뜻으로, 옅은 생각으로 심대한 이치를 헤아리는 천박한 소견을 말합니다. 왼쪽의 강도처럼 어찌 예수님의 십자가의 구원의 은총을 헤아리기나 할 것입니까? 이처럼 오늘날에도 아니 기독교인들 가운데서도 예수님의 십자가의 구원의 은총을 깨닫지 못하고 여전히 표주박 만한 인간의 생각(蠡 이말은 좀벌레나 옴벌레를 의미하기도 합니다.)으로 예수님의 십자가의 신앙을 폄하貶下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 십자가의 신앙이 우리에게 무엇입니까? 풀르스 울트라입니다. 저 너머에 더 넓은 세계가 있음을 믿는 신앙입니다.


오늘 예수님은 예루살렘성으로 들어가시면서 우리를 천국의 문으로 초대하기 위하여 십자가의 고난의 길을 가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도 이 고난 주간에 예수님의 십자가의 길을 따라갑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히시어 고난당하실 때 강도 라토르를 구원하여 천국으로 인도하신 것처럼 우리 또한 예수님의 십자가 나도 지고 우리의 인생이 죽음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우리에게는 더 넒은 세상 천국이 있음을 내 이웃에게 알리고 그들을 천국으로 인도할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마음을 열어주는 101한가지 이야기(Chicken soup stories 잭 캔필드 저, 인빅투스 출판사 12014)에 이런 이야기가 소개되어 있습니다. 너무나 행복하게 살고 있는 기독교인 부부가 어느 휴일 아침에 조금 늦게 일어나 함께 찬양하고 기도하다가 갑자기 그들의 가정이 작은 천국이라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너무 감사해서 남편이 “하나님 저희 가정에 천국을 주심을 감사합니다.”라고 감사 기도를 드리는데 아내의 마음속에 이런 천국의 비밀을 알지 못하는 누군가에게 그들이 경험한 천국의 기쁨을 누군가와 나누어야 할 것 같은 생각이 들었습니다. 남편에게 이야기를 하니까 남편도 “그럼 오늘 누군가와 꼭 천국의 기쁨을 나누어야 하겠지”하고 거들더랍니다. 그래서 오늘 누군가와 이 천국의 기쁨을 나누게 해달라는 기도로 아침 기도를 마무리 했다고 합니다.

그날 점심에 부부가 식당에 가서 식사를 하는데 건너편 테이블에 한 중년의 여인이 혼자 쓸쓸히 식사하는 모습이 부인의 시선을 끌었습니다. 남편에게 그런 이야기를 하면서 오늘 천국의 기쁨을 나눌 대상이 저 여인인지 모르겠다고 하자 남편이 고개를 끄덕이더니 “어떻게 하지?”하고 묻습니다. 잠시 묵도하던 부인이 제안을 했습니다. 자기가 메모 한 장을 쓰겠으니 당신이 저 여인의 식사비를 지불했으면 좋겠다는 의견이었습니다. 부인이 오늘 하늘 나라의 기쁨을 나누고 싶어 식사비를 지불하고 간다는 내용을 적고 “하나님이 당신을 축복하시기를!”하는 인사카드와 함께 남편은 그가 이 여인의 식사비를 지불한 것을 비밀로 해달라고 부탁하고 자리에 돌아와 식사를 계속했습니다. 잠시 후 식사를 끝낸 여인이 식사비를 지불하려고 카운터로 가면서 자신의 식사비가 지불된 것과 누군가가 카드 한 장을 남겼다는 것을 알고 카드를 읽어 내려가던 그 여인은 놀라는 표정을 짓더니 카운터 옆자리에 앉아 무엇인가를 노트를 적기 시작합니다. 멀리서도 노트를 꺼내 무엇인가를 기록하던 여인이 손수건을 꺼내 눈물을 닦는 것을 볼 수가 있었습니다. 한참을 심각하게 생각하고 무엇인가를 적어 내려가던 여인이 카운터에 있는 분에게 뭔가를 부탁하며 황급하게 식당을 떠나는 모습을 지켜 볼 수가 있었습니다. 잠시 후 이 부부가 받아든 노트 쪽지에는 이런 메시지가 기록되어 있었습니다.

“누구신지 모르는 하나님의 천사에게, 저는 교회를 꽤 오래 다녔지만 요즈음 하나님도 천국도 없다는 결론을 내렸습니다. 저는 우울증으로 고생하다 남편에게 버림받은 후 사랑이 없는 세상을 떠나기로 결심한 여인입니다. 사실 오늘 마지막 근사한 식사를 이 식당에서 하고 세상을 떠나기로 했는데 나는 여기서 다시 하나님을 만났습니다. 그리고 천국의 소망을 바라보고 다시 살기로 마음을 먹었습니다. 당신은 천국에서 보낸 천사입니다. 감사합니다. 교회로 하나님의 품으로 다시 돌아가겠습니다.”

 

우리 라온 코이노니아 우리는 라토르 같이 세상에 죄인입니다. 그러나 늘 회개하며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주님께 부르짖어 기도하므로 주님의 은혜와 사랑을 받아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아직 우리 주변에 아직 구원받지 못하고 천국이 있는지조차 모르는 그러나 언제나 구원받기를 기다리고 있는 라토르 같은 사람들에게 인생의 끝이 죽음이 아니라 프루스 울트라 인생 너머 더 멀리 이어지는 천국이 있다는 것을 소개 할 수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은혜와 축복이 고난주간을 맞이한 저와 여러분에게 함께 하시길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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