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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병호목사의 교회이야기

전병호 목사의 설교



2019년 11월 11일 주일아침예배  갈 6:11-18  主之傷痕

 

 

요즈음 아침에 늘 하는 일은 마당에 떨어진 낙엽을 쓰는일입니다. 낙엽을 쓸면서 인생의 무계를 달아봅니다. 인생도 바람에 흔들려 세월의 마당에 떨어지는 낙엽의 무계 같은 게 아닌가하는 생각을 가져봅니다. 낙엽을 쓸면서 가을이면 늘 잔잔히 부르는 노래가 있습니다. 차중락이 부른 낙엽 따라 가버린 사랑입니다.  사모께서 이 곡을 한번 쳐주시겠습니까? 저는 가사를 읽겠습니다.

 

찬바람이 싸늘하게 얼굴을 스치면
따스하던 너의 두 뺨이 몹시도 그리웁구나

푸르던 잎 단풍으로 곱게곱게 물들어
그 잎새에 사랑의 꿈,
고이 간직 하렸더니...

아아아아 그 옛날이 너무도 그리워라
낙엽이 지면 꿈도 따라 가는 줄 왜 몰랐던가
사랑하는 이 마음을 어찌하오 어찌하오
너와 나의 낙엽따라 가버렸으니...

아아아아 그 옛날이 너무도 그리워라
낙엽이 지면 꿈도 따라 가는 줄 왜 몰랐던가 

사랑하는 이 마음을 어찌하오 어찌하오
너와 나의 사랑의 꿈,
낙엽따라 가버렸으니...


이 노래에는 슬픈 사연이 있습니다.

가수 차중락은 사랑하는 여인이 있었습니다. 이 여인은 이화여대 오월의 퀸으로 미모의 여학생이었습니다. 두 사람은 서로 사랑하던 사이였지만 이 여인은 차중락에게서 떠나 미국으로 가버렸습니다. 시련의 아픔을 가지고 있었는데 당시 한참 유행하던 미국유행가로 엘비스프레스리가 부른 노래 곡에 강찬호 작사가가 “낙엽 따라 가버린 사랑”이란 우리말 작사로 바꿔 부르게 하였습니다.(편곡은 정민섭선생) 그리고 처음엔 쟈니 리에게 부르게 하였는데 차중락이 시련의 아픔에 괴로워하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이 노래를 차중락에게 부르게 하였던 것입니다. 이때가 1966년 11월 10일이였습니다. 이 노래로 차중락은 우리나라 최고의 가수로 사람들에게 인기를 끓었습니다. 2년이 지난 1968년 9월 29일 서울 청량리 동보극장에서 이 노래를 부르다가 급성 뇌막염으로 쓸어져 혼수상태에 빠졌습니다. 그리고 이 노래를 처음 불렀던 날인 11월10일에 세상을 떠났습니다. 이때 그의 나이는 27세 였습니다. 그는 영화감독이 되는 꿈을 키우고 있었던 젊은이였습니다. 그런데 홀연히 낙엽따라 가버리고 말았습니다. 서울 망우리 공원묘지에 그의 무덤이 있는데 그 비문에 시인 조병화 선생이 지은  “세월은 흘러서 사라짐에 소리 없고, 나무 잎 때마다 떨어짐에 소리 없고....사람가고 잎 지고 갈림에 소리 없다”...이런  ‘낙엽의 뜻’이란 시가 새겨져 있습니다. 조병화선생은 “낙엽”이란 시를 썼는데 이런 시였습니다.


 “세월의 패잔병처럼 보도위에 낙엽이 깔려 뒹굴고 있습니다. / 나는 낙엽을 밟기가 안쓰러워 조심조심 길을 걷고 있습니다./ 낙엽은 나를 보고 말을 하고 있습니다. me today you tomorrow 바람이 불고 있습니다.”
차중락은 낙엽처럼 떨어져 갔습니다. 그러나 가을이 되면 그는 모든 사람들의 가슴에 낙엽과 함께 되살아나고 있습니다.

그런데 차중락이 부른 ‘낙엽 따라 가버린 사랑’ 이 노래의 원곡은 엘비스 프레스리의 Anything That`s Part Of You란 노래였습니다. 이 노래가사의 첫 부분은 이렇게 시작됩니다. 


 I memorize the note you sent   당신이 나에게 보낸 글을 기억하여
 Go all the places that we went  우리가 함께 거닐던 곳들을 다 가보았어요
I seem to search the whole day through 온종일 찾아 다녔지요
For anything that's part of you 당신이 남긴 무슨 흔적이 없는가하고..............

 

이 노래는 헤어졌지만 잊지 못해 연인의 흔적을 찾아다닙니다. 그에게 연인이 남겨 준 흔적은 달랑 머리 리본하나 뿐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리본에게서 연인의 냄세를 맡으며 너무 가슴이 아파 살아갈 이유 까지 없다고 슬퍼하는 노래입니다.

 

낙엽은 세월의 흔적입니다. 모든 살아있는 생명들이건 무생물이던지 저마다 흔적을 남깁니다. 소설가는 그가 쓴 소설이 흔적이고 작곡가는 그가 작곡한 음악이 흔적입니다. 누구는 등산 갔다가 바위에 자기의 흔적을 남기고 관광지에 가면 그곳에 갔었다는 인증샷 사진으로 흔적을 남깁니다. 사람들의 인생은 흔적을 남기는 인생입니다. 흔적 없는 인생은 없습니다. 고속도로 남자화장실에 가면 소변기 앞에 이런 글이 붙여 있습니다. “아름다운 사람은 머문 자리도 아름답습니다.”왜 이런 글을 소변기 앞에 써 붙였을까요?

걸레스님이라고 알려진 중광(1934-2002.3.9)이란 스님이 있었습니다. 그는 그의 묘비명에 “괜히 왔다 간다”라고 써넣었습니다. 자기가 왜 세상에 살고 있는가를 평생 생각하다가 마지막 한 말이 괜히 왔던 인생이라고 한마디 하였습니다. 그러나 그것도 그가 살았었다는 흔적을 남긴 것입니다.
미국의 링컨대통령은 늘 자신의 흔적을 남기고 싶어 하였습니다. 과연 자기가 죽은 다음에 사람들이 자기 시신을 보고 무엇이라 말 할 것인가? 그래서 누가 “링컨, 당신은 잡초를 뽑아내고 그곳에 꽃을 심다 세상을 떠난 사람이다.” 라는 말을 하는 그런 흔적을 남기고 싶어 하였습니다. 결국 링컨은 위대한 대통령이란 흔적을 미국역사에 남기고 있습니다.

우리에게는 어떤 흔적이 있습니까? 어떤 흔적을 남기고 싶습니까? 걸레스님처럼 괜히 왔다 간다는 말 한마디 남기고 싶습니까? 아니면 사람들이 꽃을 심으로 세상에 살다가 간 사람이라는 말을 듣고 싶습니까?

 

오늘 성경에서 사도 바울도 흔적을 남긴다고 말씀하고 잇습니다.
17절 “이후로는 누구든지 나를 괴롭게 하지 말라 내가 내 몸에 예수의 흔적을 지니고 있노라”(에고 가르 타 스티그마타 투 예순 엔 토 소마티 무 바스타조)
바을사도께서 복음을 전하러 다니시다가 엄청난 핍박을 받고 고난을 당하였습니다. 
고후11:23-27 “그들이 그리스도의 일꾼이냐 정신없는 말을 하거니와 나는 더욱 그러하도다 내가 수고를 넘치도록 하고 옥에 갇히기도 더 많이 하고 매도 수없이 맞고 여러 번 죽을 뻔하였으니 유대인들에게 사십에서 하나 감한 매를 다섯 번 맞았으며 세 번 태장으로 맞고 한 번 돌로 맞고 세 번 파선하고 일 주야를 깊은 바다에서 지냈으며 여러 번 여행하면서 강의 위험과 강도의 위험과 동족의 위험과 이방인의 위험과 시내의 위험과 광야의 위험과 바다의 위험과 거짓 형제 중의 위험을 당하고 또 수고하며 애쓰고 여러 번 자지 못하고 주리며 목마르고 여러 번 굶고 춥고 헐벗었노라”


흔적이라고 한 헬라어 본문은 스티그마타란 말인데 복수명사입니다. 그러닌까 흔적이 하나만 있는 아니라 온몸에 흔적 투성이라는 것입니다. 아마도 바울사도의 온 몸에는 수많은 상처의 흔적들이 남겨져 있을 것입니다. 그 하나하나 상처들은 오직 예수의 복음을 전하기 위해 당한 흔적들입니다. 그 흔적은 예수님이 십자가상에 당하셨던 못자국과 창자국 흔적과 같이 수많은 사람들을 구원하기 위한 영광의 흔적들이라 하겠습니다. 그래서 바울사도는 자신의 흔적들을 예수의 흔적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120년전 대야에 만자산이란 동리가 있었습니다. 지금의 지경입니다. 이 만자산에 살고 이는 일곱 사람에게 복음이 처음 전해져서 그들에 의해서 오늘의 지경교회가 세워졌습니다. 당시 그 일곱 사람 중에 최관보라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이 분은 일찍이 조실부모하여 작은 숙부의 집에 양자로 들어가 성장하였습니다. 결혼을 하고 살던 중에 군산 수덕산에 서양선교사들이 왔다는 말을 듣고 찾아가 복음을 듣고 예수님을 믿게 되었습니다. 그는 지경에서 신흥동 수덕산까지 매주일 빠짐없이 예배에 참석하였습니다. 그리고 철야기도하기를 밥 먹듯이 하였습니다. 이런 최관보를 보고 숙부가 노발대발하여 집에서 쫒아냈습니다. 이때 최관보의 부인도 역시 예수를 믿고 있었던 터라 숙부에게 자기도 예수를 믿으니 쫒아내 달라고 말합니다. 그러지 않아도 화가 나있던 숙부는 지게 작대기로 이 부인을 마구 때리기 시작하여 죽기직전에 이르렀습니다. 사람들이 말려 더 이상은 매질은 하지 않았지만 온몸이 피투성이 된 최관보 부인을 길바닥에 내동댕이쳤습니다. 최관보와 부인은 교인들이 마련해준 허름한 초가 한 칸을 빌어 살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이 부인은 매를 맞은 후유증이 깊어져 세상을 떠나게 되었습니다. 조카며느리가 자기에게 맞아 죽게 되었다는 소식을 들은 숙부는 혹시 살인죄에 잡혀가지나 않을까 염려하여 최관보의 집을 찾아 왔습니다. 최관보 부인은 숙부에게 “숙부님 염려 마십시오. 저에 있었던 일로 하나님께 숙부님을 용서해 달라고 기도하였습니다. 제 기도를 하나님이 들으신 줄 믿습니다. 그러니 숙부님은 마음을 놓으십시오. 하나님이 용서하셨다면 저 또한 용서한일입니다. 그러므로 숙부님은 이제 제 대신 교회에 나가 예수님을 믿으십시오” 그리고 이 부인은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 후 숙부는 마음을 고쳐먹고 교회를 다니기 시작하였습니다. 이 최관보의 부인의 친정아버지가 자기 딸을 죽도록 때려 죽게 되었다는 것을 알자 술을 잔뜩 마시고 낫을 들고 숙부를 찾아갔습니다. 가는 도중에 마침 전킨선교사를 만났습니다. 전킨선교사가 그에게 당신의 딸이 용서하였는데 아버지의 이런 모습을 보면 눈을 감을 수 없을 것이라고 말해 주었습니다. 그리고 아버지에게 딸의 유언이라고 하여 교회에 나오라고 하니 아버지는 대성통곡을 한 다음 숙부와 나란히 교회당에 앉아 예배를 드렸습니다. 이 최관보 부인에게는 예수의 흔적이 있었고 이 흔적을 가지고 천국에 들어갔습니다.

   

기독교를 믿는 다는 것은 예수의 흔적을 가진다는 말입니다. 예수의흔적이 없다면 아직 믿음이 더 여물었거나 아주 믿음이 없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흔적을 가진 사람들의 공통점이 있습니다. 십자가를 자랑한다는 것입니다. 예수 자랑입니다. 당시에 십자가를 자랑한다는 것은 이해하기 어려운 일이었습니다. 왜냐하면 십자가는 끔찍한 징벌의 상징이에요. 수치의 대명사였기 때문입니다. 너무 잔인한 형벌이라 로마시민권자는 아무리 죽을죄를 저도 십자가 형벌을 하지 않는다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로마 사람들은 아무리 중한 죄를 지어도 십자가를 지지 않았고 십자가와는 상관없는 사람들이 되었습니다. 사도바울은 로마시민권을 가진 사람입니다. 그런 바울이 십자가를 자랑하는 겁니다.
14절에서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라고 말합니다.
바울이 십자가를 자랑하는 이유는 자랑할 것이 없어서 자랑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에겐 세상적이 많은 자랑거리가 있지만 그것들은 다 분토로 여겨버리고 날 구원하신 예수님의 십자가만을 자랑하고 십자가만을 사랑한다는 것입니다.
그는 다메섹 도상에서 십자가에서 피를 흘려 고난당하시고 죽으시고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만난 거룩한 흥분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 거룩한 흥분을 그는 평생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 날을 생각할 때만다 새록새록 흥분이 더하여 하나님의 은혜가 넘치도록 받음을 체험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여러분, 여러분에게 처음 구원받았던 그날의 감격을 기억하고 있습니까? 그 감격이 수십년전이라 해도 바로 지금같이 느껴진다면 새로운 감격과 흥분이 온 몸을 전율시킬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내게 강같이 넘친다는 것을 체험하게 됩니다. 나의 구원 사건은 과거지사가 아닙니다. 언제나 현재적 체험입니다. 지금 여기 다시 그 감격을 되새길 수 있어야 합니다. 왜 믿음이 약해지고 떨어집니까? 그 구원의 감격을 잊어버렸거나 애당초 없었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늘 구원의 감격을 체험하고 있음으로 뜨거운 감격과 열정으로 수많은 억압과 고난중에도 상처투성이 몸을 다시 일으켜 복음을 전하러 다니셨던 것입니다. 그에게 그 수많은 흔적들이 바로 예수의 흔적으로 그는 오히려 감사하고 그 흔적들에 기뻐하였던 것입니다.

여러분에게는 어떤 예수의 흔적이 있습니까?


예수의 흔적이란 복음성가가 있습니다.

“내 삶에 예수의 흔적 남기길 원해요, 사랑하는 주님만나는 그 말에
그 흔적이 내 자랑되겠죠.“로 시작되는 복음성가입니다.

 

그러면 예수의 흔적은 매 맞고 터지고 다친 상처투성이만 흔적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가 예수로 인하여 고난당하고 순교당한다면 이보다 더큰 상처는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일상생활 속에서 우리는 그때마다 예수님의 흔적을 몸에 새기면서 살아가야 합니다. 한마디로 매일매일 순종하며 사는 일 그때 마다 예수의 흔적이 여러분의 심령에 새겨지게 됩니다. 쉽게 말하면 사랑하라 하셨으니 사랑할 수 없는 사람을 사랑한다면 이때 예수의 흔적이 여러분의 몸에 새겨지게 됩니다. 기뻐하라하셨으니 기뻐할 수 없는 그 때 기뻐한다면 이로서 예수의 흔적을 몸에 새기게 됩니다. 사람들과 화평하라 하셨으니 도무지 원수 같아 화평할 수 없는데도 먼저 손 내밀고 화평하면 이때 예수의 흔적을 몸에 새기게 됩니다. 이런 예수의 흔적을 마귀가 보고 범접하지 못하게 됩니다. 세상이 아무리 힘들고 사악한 무리들이 우굴 거려도 인내와 자비와 선한생활을 한다면 예수의 아름다운 흔적이 온몸에 아름답게 수놓아질 것입니다.

 

초대 교회 교부인 터툴리안이 말씀하길 “햇빛은 하수구까지 고르게 비처도 햇빛 자신은 더러워지지 않는다”린 말을 하였습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시길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마 5:14)하셨습니다. 우리가 세상의 빛으로 살아간다는 것은 세상이 아무리 더럽고 썩고 지독한 냄새가 난다고 하더라도 예수의 흔적을 가지면서 얼마든지 올바르게 선하게 아름답게 진실되게 살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백조가 닭의 무리 속에 있다고 해도 닭이 되는 것이 아니라 백조그대로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은 그만 예수의 흔적을 잃어버리는 사람이 있습니다. 같이 더러워지고 함께 썩어가는 기독교인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이것을 알아야 합니다. 예수의 흔적을 잃어버린다면 가장 먼저 더러워지고 썩어버린다는 것입니다. 깨끗한 두부를 시궁창에 집어넣으면 어떻게 됩니까?
 
예수님은 우리에게 빛의 흔적을 주셨는데 우리가 그 흔적을 잃어버린다면 아무것도 밝힐 수 없습니다. 손전등에 전지약이 떨어지는 것처럼 영성이 떨어지고 믿음이 떨어지고 사랑도 식어지고 소망도 사라지고 축복도 누리지 못하고 단지 삼킬 자를 찾아다니던 사탄마귀들이 파리 떼처럼 달려들고 천국에 들어갈 아무런 예수의 흔적 없으니 천구에 들어가 자격도 상실하게 되어버립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크신 사랑의 증거, 십자가에서 흘리셨던 피로 내 죄를 씻어주신 예수님을 만났던 그 날의 감격을 기억하며 드러내며 살아야 합니다. 받은 은혜를 늘 감사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선 짊어 져야 할 사랑의 짐이 있습니다. 누군가와 함께 기쁘게 걸어야 할 길이 있고, 어울려 품어가야 할 이웃이 있으며, 아무리 억울한 일을 당해도 참고 견디어야 할 일이 있고, 어려운 사람들을 바쁘게 돌아보는 손길이 있으며, 아무리 악이 성하다할 지라도 오늘 나는 착한 일을 한 가지라도 해야 하며, 이를 악물고 버티며 헌신 할 때가 있습니다. 오리를 가자면 십리도 가주는 배려의 마음도 있고 아무리 가지고 싶고 마음에 흡족하다해도 나누고 양보할 줄 알아야 합니다. 갈라디아 5:24에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은 육체와 함께 그 정욕과 탐심을 십자가에 못 박았느니라”고 말씀하였습니다. 예수의 흔적을 가진 사람은 이처럼 자신을 십자가에 못 박을 줄 알아야 합니다. 그러면 그 흔적이 결단코 지워지지 아니하고 아무리 마귀가 지우려 해도 지워지지 안을 것입니다.

 

작은 중소기업에 김주임이라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무슨 잔정이 그리 많은지 후배들 뒤치다꺼리나 하기 일쑤였고, 아무도 손도 안대는 서류함을 거의 날마다 정리하느라 퇴근 시간을 넘겼으며, 어김없이 오후가 되면 커다란 쟁반에 커피 여러 잔을 들고는 「즐거운 오후 되십시오.」 하며 설탕 대신에 미소 한 숟가락을 더 넣어 책상에 놓아주었습니다. 그러던 그가 휴직계를 냈습니다. 아내가 병에 걸렸기 때문이었습니다. 병간호를 위해 그는 그렇게 떠나갔습니다. 사람들은 그를 좋아했지만 한심하고 남자답지 못하고 무능하여, 있으나마나 한 사람으로 생각했기 때문에 그가 회사에 없다고 해서 크게 달라질 것은 없을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그게 아니었습니다. 그가 남기고 간 빈자리는 사람들에게 너무 큰 것이었습니다. 아침마다 마실 수 있었던 향긋한 커피는 기대할 수 없었을 뿐더러 책상 위의 컵들엔 커피 자국이 그대로 남은 채 먼지만 쌓여 갔고 향기 나던 화장실은 들어가고 싶지 않을 만큼 더러워졌으며, 휴지통에서는 늘 휴지가 넘쳤고, 서류들은 어디 있는지 서류철끼리 뒤죽박죽 섞여 쉽게 찾을 수가 없었습니다. 부서내 사람들은 점점 짜증난 얼굴로 변해갔고, 서로에게 화를 냈으며, 시간이 갈수록 큰소리가 오가기 시작했습니다. 사무실에 가득했던 화평은 어느새 조금씩 떠나가고 있었습니다. 하루는 같은 동료였던 박주임이 상사의 짜증을 다 받아내느라 기분이 몹시 안 좋은 오후를 보내고 있었습니다. 문득 김주임이 끓여다 준 커피가 그리워졌습니다. 김주임이 생각나자 아직 남아있는 그의 책상 앞에 무심코 갔을 때 작은 메모가 그의 눈에 들어왔습니다.
「내가 편할 때 그 누군가가 불편함을 견디고 있으며, 내가 조금 불편할 때 누군가는 편안할 것이다」

 

나를 통해서 다른 사람에게 유익을 줄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일까요? 내 평생에 하나님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나를 따라야 하고, 내가 어디로 가든지 다른 사람에게 선과 인자를 남겨야 합니다. 창세기 12장에 보면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축복하시면서 「복의 근원이 되라」고 했습니다.
김주임은 자신의 회사에서 좋은 흔적을 남겼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여기저기 자신의 흔적을 남깁니다. 그러면 내가 가는 곳에 어떤 흔적을 남겼습니까? 기쁨의 흔적을 남겼습니까, 슬픔의 흔적을 남겼습니까? 사랑의 흔적을 남깁니까? 화평의 흔적을 남깁니까? 아니면 불화의 흔적을 남깁니까? 다른 사람들이 나에게 선하심과 인자하심을 기대할까? 아니면 나를 차라리 잊어버리고 싶을까? 우리는 우리 뒤에 축복을 남겨두는가? 아니면 다른 사람에게 해독을 남겨 두는가? 우리가 가는 것이 다른 사람들에게 도움이 되기에 우리가 기다려지는 사람인가? 아니면 우리가 가는 것이 귀찮고 그들에게 고통스러운 일일까?

 

우리 라온코이노니아는 예수의 흔적을 가졌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모두에게 예수의 흔적들이 있습니다. 이 예수의 흔적을 지워지지 않도록 성령충만하시길 축원합니다. 갈5:25에 “만일 우리가 성령으로 살면 또한 성령으로 행할지니”라고 말씀하였습니다.
낙엽이 다 떨어지고 겨울이 오고 있는 이 계절에 많은 사람들이 바쁘게 살고 어지럽게 생활하며 죄 가운데 벗어나지 못해 슬퍼하고 낙엽 따라 죽어가고 있는 이런 세상에서, 우리들의 모든 삶속에서 모든 사람들에게 예수의 흔적을 보여주어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와 축복이 언제나 여러분의 가정에 충만하시길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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