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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병호목사의 교회이야기

전병호 목사의 설교



2018년 10월 14일 지경교회 창립주일 오후예배 요 12:24-25 전킨선교사

 

오늘 이 시간에는 군산과 호남에 최초로 교회를 세운 전킨에 대해 간략하게 소개하려 합니다. 아마 여러분들은 귀에 못이 박히도록 그분에 대해 들으셨을 것입니다. 그러나 다시 여러분에게 소개하는 것은 아직 전킨을 모르고 있는 군산 기독교인들이 9만9천명은 넘을 것이기 때문에 여러분들이 그분들에게 전킨 선교사에 대해서 알려 주시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말씀을 드립니다.

 

1885년 조선에 최초로 선교사로 파송받아 온 북장로교 소속 선교사인 언더우드목사가 1891년 안식년을 맞이하여 귀국하여서 9월 메코믹신학교에서 조선선교보고회를 가졌습니다. 이때에 이 학교 졸업생으로 루이스 테이트가 그의 강연을 듣고 큰 감명을 받았습니다. 이어서 10월에는 테네시주 네시빌(Nashville)에서 신학교선교동맹(Inter-Seminary Missionary Alliance)의 제 12차 연례대회가 개최되었습니다. 이 신학교선교동맹은 1880년에 조직으로 젊은이들에게 선교열정을 불어넣어주어 선교사의 길을 가도록하였습니다.

 

언더우드선교사의 당시 연설의 한 대목을 소개하면 이렇습니다.

“여러분, 조선(Korea)은 이제 서양인을 배척하고 문을 잠가버린 은둔의 나라가 아닙니다. 임금께서 알렌의사의 의료 활동을 치하하여 병원을 하사하시어 치료받으려는 사람으로 문전성시를 이루고 있습니다. 우리들에게 의료선교와 교육선교의 윤허장을 주었으며 복음을 고대하는 민중들은 우리를 뜨겁게 환영하여 따라주고 있습니다. 여러분! 이 기름진 옥토에 씨를 뿌릴 일꾼들을 주님께서는 부르시고 계십니다.”

 

언더우드가 이처럼 뜨겁게 조선선교의 필요성을 역설하자 이 소리를 들은 일곱 명의 남 여학생들의 가슴에 조선선교에 대한 뜨거운 열망이 끓어오르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서로 알지 못하였던 사이였지만 그 후 조선선교의 열렬한 동지들이 되었습니다. 이들은 앞서 소개한 루이스 테이트 외에 유니온신학교의 전킨, 레이놀즈, 존슨, 그리고 테이트의 동생 메티 테이트, 버지니아 주의 아빙돈 출신 린니 데이비스, 버지니아주 렉싱톤 출신 메리 레이번, 그리고 역시 버지니아주의 펠시 볼링 일곱 사람 이였습니다.

 

이 일곱사람중에 레이놀즈는 중국선교를, 볼링은 아프리카선교를 희망하고 있었는데 조선선교의 뜻을 모으고 부부가 되었습니다. 이어서 1892년 6월 전킨과 메리 레이번도 결혼을 하였습니다. 전킨과 선교의 뜻에 하나가 되기로 하였으니 레이번은 “당신이 가는 곳이면 나도 가겠다”고 하여 몸과 마음 뿐 아니라 선교도 하나 되었던 것입니다.

 

언더우드의 강연을 들은 존슨은 아저씨집에서 조선에 대한 희귀본 역사책을 발견하여 이 책을 가져와 친구들에게 보여 주었습니다. 이 책을 돌려 읽은 젊은이들은 가슴이 뜨거워지면서 지금이라도 당장 조선으로 달려가고픈 열망에 사로 잡혔습니다. 앞서 북장로교의 맥코믹신학교 졸업반인 루이스 테이트는 남장로교 외지선교부 실행위원회에 조선선교신청서를 제출하였었습니다. 그러나 당시 조선이란 나라가 잘 알려지지 않은 미지의 나라로 선교사를 보낼 의도가 전혀 없다는 통고를 받게 됩니다. 당시 선교회는 그리스선교에 관심을 가지고 있었던 터였습니다.

 

그러나 그런 통보를 받고 주저앉을 그들은 아니었습니다. 레이놀즈 존슨 전킨은 다시 조선선교신청서를 제출하였지만 역시 돌아온 통고는 여전히 “새로운 선교지를 개척할 계획이 없다”는 것 이였습니다. 이제 포기할 것인가. 아닙니다. 길은 항상 열려 있습니다. 그들이 찾은 길이 무엇 이었겠습니까? 바로 직접 하나님께 기도하는 일이였습니다. 그들은 조선선교를 위한 뜨거운 합심기도를 하였습니다. 얼마나 오래 동안 하였을까요. 그들은 2년을 작정하고 기도하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리고 여기저기 각 선교부를 찾아다니며 조선선교사파송을 호소하기 시작 하였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조선선교의 열망을 가지고 여기저기 선교부를 찾아다니던 이 젊은이들의 당시의 열정과 수고가 결코 그들만의 의지만 가지고 된 일이 아니요 여기에는 분명히 하나님의 섭리와 성령님의 놀라운 계획이 있지 아니하고는 어찌 모두가 반대하는 조선선교를 마치 골리앗 앞을 달려 나가던 다윗처럼 그처럼 무모 할 수 있었겠습니까? 우리는 당시 그처럼 조선선교를 열망하며 기도하던 그 젊은이들에게 고마운 마음과 하나님께 감사의 기도를 드리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특히 그들은 언더우드목사를 모시고 버지니아주 노스케롤이나주 테네시주 등 미국의 각 주의 여러 도시들의 교회들을 순방하면서 조선 선교의 필요성을 역설하고 그들의 도움을 청하였습니다. 그리고 여러 기독교 잡지들을 통하여 논문을 투고하여 선교를 상기하는 글을 올리기도 하였습니다.

1892년 2월에 <선교 The Mission> 잡지에 “왜 우리는 조선에 가기를 원하는가?”라는 글을 발표하였습니다. 이 글에서 “지금 조선왕실은 기독교에 대한 호의적입니다. 현재 조선에서는 기독교에 대한 강한 반대할만한 조직화된 종교도 없습니다. 현지의 선교사들만 가지고는 빠른 성장을 하고 있는 선교역량을 감당하기에 부적절합니다. 조선선교는 우리와 쉽게 협동할 수 있는 북 장로교회에 의해 시작되었습니다”라는 글을 발표 하였습니다.

 

하나님의 응답은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습니다. 기도하고 각 방면에 호소한지 2개월여 지났을까? 1892년 1월 22일 외지선교부 실행위원회로부터 “8월에 항해할 준비를 하시오” 이런 전보를 받았습니다. 할렐루야. 마태복음 18:19의 약속이 성취된 것입니다. “진실로 다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중의 두 사람이 땅에서 합심하여 무엇이든지 구하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그들을 위하여 이루게 하시리라.”이 말씀이 성취되었습니다.

 

조선선교에 대한 회의적인 미 남장로교외지선교회는 예기치 않은 일로 인하여 조선선교에 대한 그들의 부정적인 생각을 바꾸게 되었습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조선선교에 열망을 가진 청년들의 기도를 들으시고 섭리하신 뜻 이였음을 깨닫게 됩니다. 남 장로교가 선교사를 파송한 파송국의 하나인 그리스정부가 선교활동을 방해하므로 부득이 그리스선교를 중단 할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따라서 그리스에 활동하고 있는 선교사들을 철수하게 되었습니다.

 

한편 북장로교 소속인 언더우드목사의 형인 존 언더우드가 2만 5천 달러를 기부하였고 언더우드 목사도 500달러를 이 젊은이들의 조선선교를 위해 헌금을 하였습니다. 그래서 남장로교외지선교부 실행위원회는 7명을 조선에 선교사로 파송 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테이트와 그의 여동생 메티 테이트, 리니 데이비스 레이놀즈와 펫시 볼링부부 그리고 전킨과 레이번부부였습니다. 존슨이 일곱 명 선교단에 들지 못하게 된 것은 이미 그는 한 달 전 조선에 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는 다시 미국으로 돌아와 조선의 선교사 후원을 위한 활동을 벌이게 되었습니다.

전킨은 신학교를 졸업하면서 고향 크리스천스버그에 있는 남장로교의 몽고메리노회에서 목사안수를 받았습니다.

 

전킨은 어떤 분인가를 먼저 소개하겠습니다.

전킨(1865-1908)의 조상 가문은 기록에 의하면, 스카치-아이리시 계통과 위그노 계통을 기원으로 보고 있습니다. 스카치-아이리시는 스코틀랜드인으로 북 아일랜드로 건너온 장로교교인들입니다. 닉슨, 카터, 레이건, 클린턴 등 미국 역대 대통령 중 18명이 스카치-아이리시인의 후손이라 하겠습니다. 위그노계통은 칼빈의 영향을 받은 프랑스 장로교인들로 루이14세가 카톨릭을 프랑스의 국교로 삼으려 하자 이에 반대한 수많은 위그노인들 2만 여명이 학살을 당하였습니다. 이로인하여 프랑스의 위그노 장로교사람들이 네덜란드, 영국 그리고 미국으로 옮겨가게 되었습니다. 이들은 여러가지 기술을 지녔던지라 이들이 프랑스에서 떠나자 프랑스경제가 몰락하게 되고 후에 프랑스 대혁명이 일어나는 원인 중의 하나가 되기도 하였습니다.

지난 9월2일 위그노후예들 1만여 명이 프랑스 남부 앙뒤즈(Anduze)의 언덕에서 ‘사막집회’를 열어 자신의 선조들이 겼었던 핍박을 되새기는 집회를 열었습니다.

 

이런 전통적인 장로교의 신앙을 이어 받은 전킨은 1865년 12월 13일 미국 버지니아 크리스천버그에서 태어났습니다. 아마도 그 마을은 온통 기독교인들로 이름자체가 기독교인마을이라 하였습니다. 할아버지는 디 피 전킨으로 펜실바니아주 뉴케슬의 목사였습니다. 아버지 조지 전킨은 남북전쟁 당시 남부 군인으로 참전하여 용감히 싸운 크리스천버그의 판사였습니다. 어머니는 베티 전킨이었습니다. 이처럼 전킨선교사는 미국 남부의 전형적 보수 장로교기독교인의 가정이었고 남부 인으로의 긍지와 도덕률에 충실한 가정에서 태어나 가문의 전통과 관습을 이어 받으며 자랐습니다.

 

전킨은 스므살 때 버지니아주 렉싱톤시에 있는 워싱톤엔리대학에 입학하였습니다. 이 대학은 1749년에 설립되었고 조지 워싱톤대통령이 많은 돈을 이 대학에 기부하여 워싱톤대학으로 불려지다가, 또 남부동맹 총 사령관이었던 리(Robert Edward Lee, 1807.1.19.-1870.10.12)장군의 이름을 따서 워싱톤엔리대학이 되었습니다. 리장군은 이 대학의 총장으로 역임하였습니다. 이 대학은 미국에서 9번째로 오랜 역사를 가지고 ‘히든 아이비(Hidden Ivies)’로 손꼽히는 존스홉킨스대학교, 스탠포드대학, 애머스트대학 등과 함께 유명한 사립대학입니다. 오늘날 교양대학 순위에서 매년 미국 상위 1%의 상위 그룹에, 로스쿨도 상위순위에 들어가 있습니다. 또한 다수의 미국 하원의원과 주지사를 배출하고 노벨의학상 수상자도 배출하였다고 합니다. 그러나 이제 이 대학출신으로 가장 자랑하는 동문 한사람을 소개하받게 되는데 바로 전킨선교사입니다. 전킨의 작은 할아버지가 이 대학의 총장을 지냈고, 또 아버지도 이 대학을 졸업하였습니다. 전킨은 영문과에 입학하여 전반적인 어학 구문에 대한 공부를 하므로 후에 한국 선교사로 일하게 될 때 그 어느 선교사보다 먼저 한국어를 능숙하게 구사할 수 있었습니다.

 

그는 대학 재학 중에 이미 해외 선교사를 희망하였습니다. 그래서 1889년 9월 남장로교의 목회자양성기관으로 1812년에 설립된 버지니아주 유니온신학교에 들어가 1892년 6월 졸업 시 까지 3년 동안 공부를 하였습니다. 미국 남장로교는 1861년 남북전쟁이 일어나자 1864년 북장로교와 분열 되어 세워진 교단입니다. 따라서 남장로교는 성경에서 노예제도를 죄악시하지 않는다하여 노예제도폐지를 반대하였습니다. 남장로교가 목회자 배출을 위한 신학교육 기관으로 유니온신학교, 콜롬비아신학교와 캔터키루이빌신학교가 있습니다. 남장로교 한국선교사들 중 상당수가 유니온신학교 출신이었습니다.

 

신학생 전킨은 신학교 들어오기 전부터 선교사를 지망하고 있었기 때문에 일요일에는 지역에 거주하는 흑인들에게 성경을 가르치고 방학 때에는 여러 곳을 다니며 선교활동을 펼치었습니다. 특히 ‘학생자원운동(SVM)’에 참여하였습니다. 1886년 창설된 SVM은 선교사 지망생을 모집하여 각 교단 선교부에 연결해 주는 일종의 선교운동기관이었습니다. SVM은 “세계를 이 세대가 가기 전에(World in This Generation)”이라는 구호로 세계 선교사를 파송하였습니다. 1905년부터 1909년까지 한국에 입국한 선교사는 135명중에 SVM 출신이 81명이었습니다. 전킨은 이 운동에 참여하면서 평생 선교 동지가 될 레이놀즈와 카메론 존슨(Cameron Johnson)을 만났습니다. 1890년 가을 유니온신학교에 2학년으로 편입한 레이놀즈는 먼저 입학한 전킨의 영향을 받아 전킨을 만난지 3개월 만에 선교사가 되기를 결심하였던 것입니다. 그리고 국외 파송을 위해 SVM에 참여하였던 것입니다. 여기서부터 한국선교를 위한 하나님의 선택이 진행되었던 것입니다.

 

미국 장로교의 해외선교사 출신 신학교는 두 주류가 있었는데 하나는 시카고의 멕코믹신학교와 버지니아의 유니언신학교 이였습니다. 맥코믹신학교는 북장로교신학교로 매 수업시간마다 찬송과 성경통독과 기도로 시작하였습니다. 맥코믹신학교는 철저한 보수주의 학교로서 청교도적 경건성을 유지하는 킬빈주의 요람이었습니다. 구 칼빈주의의 전통과 부흥운동과 복음주의를 계승한 멕코믹신학교는 조선에 14명의 선교사를 파송하였습니다. 뿐만 아니라 동양복음의 성지로 불렸던 평양에 설립한 “평양신학교”의 “마펫선교사(1890년 내한), 크락크선교사(1902년 내한), 리선교사(Lee 1892년 내한), 스왈렌선교사(1894년 내한)”등의 교수들이 모두 맥코믹 신학교 출신으로 평양신학교를 “한국의 맥코믹신학교”(크락크선교사)라고 불렀습니다. 한편 유니온신학교는 남장로교신학교로 1812년 설립되어, 보수주의 신학교로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을 주요교리로 채택하고 있습니다. 한국에서는 한철하박사와 평택대학교 류원렬박사, 장로회신학대학교의 김운용교수, 박상진교수 그리고 김도일교수, 한일장신대 차기벽교수와 같은 여러 신학자들이 배출되었습니다.

1892년 9월 7일 테이트와 그의 여동생 메티, 데이비스 양, 레이놀즈와 전킨 부부 등 7인의 선발대가 서부로 가는 관문인 테이트 남매의 고향인 세인트루이스에 모였습니다, 남장로교외지선교부 실행위원회가 주관하는 파송예배를 드리고자 함이였습니다. 센트럴장로교회와 에비뉴장로교회에서 파송예배를 마친 그들은 힘차게 조선을 향해 출발을 하였습니다. 이들의 선교의 장도에 하나님의 은혜와 능력이 함께하시기를 모든 사람들이 기도하였습니다. 당시 알려지기는 한국이 미개국가요 선교사들을 죽인다는 소문이 퍼져있었던 때입니다. 이미 영국의 토마스 목사가 한국에 선교하러 았다가 대동강변에서 참수된 사건을 그들은 이미 알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니 한국으로 보내는 사람들의 심정은 매우 걱정반 기대반으로 가득차 있었던 것입니다.

 

이들이 이후에 조선 선교를 위해 땀과 눈물과 피를 흘리며 생명을 다 바쳐 뿌린 복음의 씨앗이 오늘날 우리 군산과 호남지방에 엄청난 열매로 나타났으니 그들에 대한 호남의 모든 교회들 그리고 그들의 미래인 오늘날의 우리들은 박수를 치며 그들의 장도를 환영하고 그들에게 진 선교의 빚을 어찌 다 갚을 것인가를 생각해 보아야 할 것입니다.

 

일곱 남장로교 선교사들 중 먼저 한국에 도착한 이는 린니 데이비스였습니다.

린니 데비스(? -1903.6.20.)여선교사는 마침 워싱톤 초대 주미한국공사관이었던 이채연(李菜淵)서기관이 부인과 함께 귀국하는 일행을 만나게 됩니다. 데이비스는 1892년 9월 7일 센인트루이스 센트럴 장로교회에서 환송예배를 드린 후 곧바로 이채연 부인과 함께 동행하여 배를 타고 일본에 도착하고, 10월 7일 요꼬하마를 출발하여 한국으로 오는 또 다른 선교사 일행들과 함께 10월 17일 인천제물포에 도착하였습니다. 이 부인과의 사귐은 그 후에도 계속되어 낮 설은 땅에서의 선교 활동에 많은 도움을 받게 되었고 마침내 그 부부는 기독교인이 되었습니다. 이채연은 귀국 후 전우국방판(電郵局幇判)이 되었다가 1894년(고종31년) 참의교섭통상사무(參議交涉通商事務)를 거쳐 그해 제2차 김홍집 내각의 농상공부협판(農商工部協瓣)이 되어 개화정책 수행에 참가하였습니다. 1896년에는 한성부윤으로 독립협회창립에도 참가하게 됩니다. 이 처럼 그는 조선의 개화에 앞장섰던 인물이었습니다.

 

제물포에 도착하여 이채연부인과 헤어진 데이비스는 다른 선교사 일행과 더불어 제물포에서 하룻밤을 보내었습니다. 그곳은 중국인 상인이 경영하여 외국인 전용 여관에 머물게 됩니다. 데이비스와 여행길을 동행한 다른 선교사 일행은 감리교 선교사인 노블선교사와 부인 매티 그리고 테프트 선교사 였습니다. 그리고 이들을 제물포 항으로 마중 나온 선교사로서 감리교의 스크랜턴선교사부부, 올링거 감리교목사, 그리고 장로교 마펫선교사와 더불어 여관에 머물었습니다.

다음날 이들은 배를 타고 한강을 거슬러 올라가다가 서울에서 5킬로미터 쯤 떨어진 나루터에 내려 다시 가마로 옮겨 탔는데, 가마가 모자라 메티와 데이비스가 번갈아 타기도 하였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서울에 도착해보니 시간이 늦어서 이미 성문이 닫혀 있었습니다. 그러나 성벽 앞에 멈춰 설 데이비스가 아이었습니다. 6m 남대문 성벽 앞에선 데이비스는 마을에서 빌려온 나무 사닥다리를 걸치고, 다시 마펫선교사가 준비해온 밧줄을 성벽 끝에 걸었습니다. 밧줄을 타고 올라간 데이비스는 이렇게 성벽을 넘어 서울로 입성하였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어린나귀새끼를 타고 예루살렘 성을 입성하셨는데, 데이비스 여선교사는 밧줄을 타고 성벽을 넘어 서울에 입성하였으니 그녀가 앞으로 만나게 될 군산과 전주를 향한 선교 열정이 여기서부터 시작하였던 것입니다.

 

그러면 이 열혈처녀 여선교사 데이비스(1861?-1903)는 누구인가? 데이비스는 미국 버지니아주 아빙돈에서 출생하여 어려서 부친을 여의고 홀어머니를 따라 자주 가난한자, 병든 자들을 돌보는 봉사 일을 하던 중에 우연히 외국선교에 관한 문서를 읽고 해외선교사의 꿈을 키웠습니다. 데이비스는 처음엔 아프리카나 멕시코선교를 생각하였지만 앞서 소개한 바처럼 조선 선교의 강연을 듣고 생각을 바꾸게 되었습니다. 조선으로 떠날 무렵에 어머니는 중병에 걸려 사경을 헤매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딸에게 지체말고 조선으로 떠날 것을 강권하였습니다.

데이비스가 서울에 도착한지 9일 만에 어머니의 소천소식을 듣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눈물을 흘리며 슬픔에 오열하였지만 어머니의 선교유지(遺志)를 기억하며, 지금 막 시작한 나날이 바쁜 선교활동으로 인하여 어머니 장례식에 참석하는 것을 포기하였습니다. 이처럼 홀어머니의 임종도 보지 못한 그녀는 오히려 더 열심을 다하여 조선에 들어온지 1년 만에 1,885명을 전도하였고 80여 가정을 주님께 인도하였습니다.

 

특히 멕시코 선교보다는 더욱 힘든 조선선교를 자청하여 온 데이비스는 뒤에 들어 온 메티 테이트와 함께 선교를 활발하게 전개하였습니다. 서양여인들을 처음 본 조선의 여인들이 흥미를 가지고 그녀들을 찾아오면 서양사람들의 안살림을 보여주고 성경과 찬송을 가르쳐 주었습니다. 얼마 후에 이들의 입에서 “예수 사랑하심은 거룩하신 말일세”찬송이 힘차게 불려 지게 되었습니다. 그 후 데이비스는 군산에 내려와서도 부녀들과 아이들에게도 이 찬송을 가르쳐 아이들이 돌아다니면서 찬송을 부르면서 놀기도 하였습니다.

 

지금 우리가 부르는 “예수 사랑하심은” 대구에서 선교활동을 한 북 장로교회 윌리엄 베어드선교사의 부인 애니 로리 아담스가 번역한 찬송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예수사랑 하심은” 찬송에 대해 조금 설명을 하겠습니다. 이 찬송이 우리나라 찬송가에 처음 채택 된 것은 <찬양가,1894> 21장으로 거기에는 6절까지 있었습니다. 지금 우리가 사용하고 있는 번역은 <찬숑가,1908> 8장에 실린 선교사 배위량 목사 부인 안애리의 번역곡입니다.

본래 애니는 언어학자로서 한국어와 한국음악에 조예가 깊어 많은 찬송을 한글로 번역하여 보급을 하였습니다. “인애하신 구세주여” “멀리멀리 갔더니” 이 찬송도 애니의 번역 찬송입니다.

 

“예수 사랑하심은” 이 찬송은 1860년에 발표된 찬송으로 본래 안나와 그녀의 여동생 수잔이 함께 쓴 “넓고 넓은 세상”이란 소설에 나오는 노래입니다.

 

이 소설에서 병약한 조니가 숨을 거두기 몇 시간 전에 주일학교 교사인 린덴에게 노래를 불러달라고 요청을 합니다. 린덴은 요 15:9을 바탕으로 “주님이 날 사랑하십니다. 성경 말씀이 네게 그것을 알려주십니다. 어리고 약한 이들 주님께 속하였으니 이들은 약하지만 주님은 강하십니다”라는 노래를 불러 줍니다. 이 노래를 들으며 조니는 세상을 떠난다는 내용입니다.

 

데이비스가 가르쳐 당시 우리 아이들이 부르고 다닌 “예수사랑하심은”은 이런 가사였습니다.

 

예수 나ᄅᆞᆯ ᄉᆞ랑ᄒᆞ오 셩경에 말ᄉᆞᆷ일세

어린ᄋᆞ해 임쟈요 예수가 피로삿네

예수날 ᄉᆞ랑ᄒᆞ오 예수날 ᄉᆞ랑ᄒᆞ오

예수날 ᄉᆞ랑ᄒᆞ오 셩경말ᄉᆞᆷ일세

 

데이비스가 가르쳐 준데로 아이들이 ‘예수 나를 사랑하오’를 부르며 다니던 백여 년 전 군산의 골목길을 생각해 볼 때 괜스리 콧등이 근실거리며 감격의 눈물을 흘리게 됩니다.

 

 

한편 이미 군산을 한차레 방문한 바 있던 레이놀즈선교사는 드루의료선교사와 함께 호남의 선교지역을 자세히 살피기 위하여 군산을 찾았습니다. 한국인 어학선생 소씨와 음식을 해 줄 옥선이, 그리고 250전(錢)에 마부와 말을 임대하여 전라도를 향해 떠났습니다. 호남지방으로 가는 배를 타고 제물포에서 군산까지 이동하였는데, 일기가 좋으면 20시간 정도 걸리기 때문에 육로로 가는 것 보다 훨씬 빨리 갈 것입니다. 배 삯은 2불이었으나 한국인들은 1불씩을 받았습니다.

이들은 네 명의 선원이 움직이는 정부미 운반선을 세내어 약과 책 그리고 몇 가지 생필품과 함께, 1894년 3월 27일 화요일 아침 7시 30분에 서울을 출발하였습니다. 29일 아침 8시 30분에 제물포를 떠나, 30일 200km 떨어진 아직은 작은 어촌인 군산선창에 도착을 하였던 것입니다.

선창에서 군산땅을 바라보며 레이놀즈선교사는“참으로 아름다운 땅 이구나”감개무량한 표정을 지으며 그 첫 발을 내려 땅을 밟았습니다. 군산의 봄눈 녹은 언덕바지에서 나물 캐던 아낙네들이 지금 막 배에서 내리는 이상한 옷차림의 두 서양 사람을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레이놀즈선교사와 드루의료선교사 이었습니다.

 

어째서 이들은 이처럼 탁류가 부딪치는 낯설고 물 설은 군산 땅까지 오게 되었는가? 성령께서 가라 하시지 않았다면 도무지 생각지도 못한 이 머나먼 땅까지 올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오직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라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명령을 듣고 해 돋는 땅 끝의 나라, 거기서도 아직 복음의 미답지인 호남지방으로, 복음을 전하려는 그 일념만으로 심한 풍랑에 흔들거리는 그 작은 목선을 타고 배멀미를 해가면서 이곳까지 오게 된 것입니다.

 

군산에 도착한 레이놀즈와 드루는 배에서 내려 죽성리(죽성동, 영화동) 죽성포구 째보선창을 지나 서래(설애)장터 주막에 머물었을 것입니다. 서래장터는 400년 전통의 장터였습니다. 서래장터는 많은 사람들이 오고가기 때문에 전도하기에 좋고 지역 정보도 듣게 되었을 것입니다.

 

레이놀즈와 드루는 아침 9시에서 밤 10시 반까지 복음을 전하고 병자들을 돌보았습니다. 사람들은 선교사들이 전하는 전도지를 잘 받았고 전하는 복음 또한 귀담아 들었습니다. 당시 레이놀즈는 익숙하게 한국어로 말씀을 전할 수 있었습니다. 또한 드루는 하루에 50명이 넘는 환자들을 돌보기도 하였습니다. 사람들은 답례로 생선, 굴, 미역, 달걀 같은 것을 가져와 감사를 표했습니다. 군산에서 그들의 소식을 듣고 온 임피현 첨사도 만났습니다. 며칠을 군산에서 보낸 그들은 임피로 향해 갈 때에 사람들은 매우 호의를 가지고 그들을 따랐습니다. 당시 임피는 군산을 관할하는 현감이 살았던 규모가 큰 읍 이였고 여행자들이 쉬어갈 수 있는 숙박시설이 있었습니다.

 

이분들의 선교일지를 보면 임피에서 다시 현감을 만나 여행 목적을 이야기 하고 그에게 기독교를 전하였습니다. 임피에서 하룻밤을 묵었는데 빈대와 벼룩들이 어찌나 달려드는지 한 잠도 잠을 잘 수가 없었습니다.

 

다음날 일찍이 전주로 향해 떠나 전주 성안으로는 들어가지 못하고 성 밖의 가난한 사람들이 모여 사는 은송리로 찾아 갔습니다. 그곳에는 이미 2월 달에 레이놀즈와 함께 내려왔던 정해원조사가 마련해 놓은 작은 초가집이 있었던 것입니다.

 

4월 9일부터 두 선교사는 김제 금구 태인으로, 정읍, 흥덕, 줄포, 곰소, 고창으로, 영광, 함평, 18일에 무안에서 점심을 먹은 후 목포에 도착하였습니다. 무안 어느 주막에서 점심을 먹었는데 한 사람 식사비로 200전을 요구 하였습니다. 그런데 6명이 식사 했으니 활인해서 400전만 내라고 합니다, 레이놀즈는 너무 비싸다고 하였지만 어쩔 수 없이 지불하고 주모에게 ‘철면피 같으니’ 라고 말해주었습니다.

목포에 온 두 선교사는 며칠간 머물면서 선창가 장터의 상인들에게 복음을 전한 것이 목포에 교회가 설립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그 후 1897년 3월 5일 목포 양동에서 유진 벨선교사가 변창연조사와 함께 첫 교회를 설립하였던 것입니다. 다시 답사여행은 계속되어, 해남 우수영, 흥양, 진도를, 27일에는 고흥, 녹동으로, 벌교를 지나 좌수영(여수), 순천으로 그리고 현지 배를 이용하여 부산으로 가는 대 선교장정(大 宣敎長征)을 하였던 것입니다. 부산에서 북장로교선교사앞에서 예수사랑하심을 번역한 애니의 남편 베어드선교사 부부의 환영을 받으며 며칠간 휴식을 취하고 5월 7일 부산을 떠나 9일에 제물포에 도착하여 12일 서울집에 도착하였습니다. 47일간의 남도선교의 대 장정 여행길이었습니다. 드루선교사는 오랫동안 육로의 험한 길을 걷다보니 발에 물집이 생겨 고생이 이만 저만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가는 곳마다 전도지를 나누어 주며 전도를 하는 기쁨이 너무나 커서 물집 잡힌 발의 아픔을 느낄 수 없었을 정도였습니다.

 

선교 여행을 마치고 드루선교사는 서울 선교회의에서 호남선교부로 가장 합당한 장소는 인구의 밀집도시 보다는 해상로를 통한 교통의 편리성을 보아 군산이 선교부지로 적격일 뿐 아니라 나아가 앞으로 군산이 큰 도시로 발전할 것이라는 확신을 가지고 군산에 호남선교부를 세우자고 주장을 하게 되었습니다.

 

선교의 대 장정을 마치고 돌아 온 레이놀즈는 ‘호남 탐사기’에서 다음과 같이 기록을 하였습니다.

“군산에서 우리 선교부가 거점을 가져야 하는 세 가지 이유가 있다.

1. 근접성: 해안에 접해 있고 좋은 항구가 있으며 제물포로부터 배로 14-20시간 이내의 거리에 있다.

2. 전주에 물자를 공급하는 선교본부로서의 중요성: 500리길의 육로를 이용하는 과도한 경비와 운송의 위험대신에 오직 그 거리가 백리길이고 혹은 수로로 현지 배를 이용하여 작은 강을 통해 물품이 육지에 운반할 수 있는 거리는 오직 50리도 안됩니다.

3. 인근 지역의 많은 인구: 두 명의 선교사들이 충분히 관장할 수 있는 정도의 인구이다. 우리는 다음 가을에 군산에서 사역이 시작되어 1895년 봄이나 가을에 설립되는 걸 보면 좋겠다.“

 

이 레이놀즈 선교사의 희망은 그대로 이루어졌습니다.

예수님께서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되라 하셨는데 바야흐로 아시아의 땅 끝나라 우리나라에 그리고 이미 하나님께서 점찍어 두셨던 군산땅에 호남선교부가 세워져 바야흐로 복음의 씨앗이 뿌려지는 그 아름다운 성령의 계절이 이제야 막 시작되게 되었으니 여기에 기막힌 하나님의 섭리가 계획되어 있었음을 그 누가 짐작이나 하였을까요.

 

마침내 전킨은 군산을 향해 선교의 진군나팔을 불게 되었습니다. 1895년 3월 전킨선교사와 드루의료선교사는 조사 한명, 요리사 2명과 함께 4명의 선원들을 태운 목조선을 전세 내어 여러 가지 약품, 책 그리고 다른 선교용품들을 잔뜩 싣고 인천을 출발하여 480리 바닷길을 여행하게 되었습니다. 보통 3,4일이면 도착할 바닷길을 무려 열하루나 걸려 도착하였으니, 어찌나 바다가 흉흉하고 파도가 드높은지 전킨과 드루는 이리저리 몸을 가누기조차 힘들었습니다. 그 와중에도 쉴 새 없이 배안으로 넘쳐 들어 온 바닷물을 퍼내면서도 하나님이 그들을 지켜주시리라는 믿음을 가졌기에 두려움 없이 찬송을 불렀습니다.

아마도 이 찬송을 불렀을 것 같습니다. 388장 찬송입니다.

 

“비바람이 칠 때와 물결 높이 일 때에

사랑하는 우리 주 나를 품어 주소서

풍파 지나가도록 나를 숨겨 주시고

안식 얻는 곳으로 주여 인도 하소서”

 

안개가 자욱하여 앞을 바라보아도 바닷길을 알 수 없으니 사공은 이리저리 노를 저으며 며칠 동안 헤매다가 마침내 군산포항에 도착하게 되었습니다.

군산포는 본래 조선의 해군이 주둔하는 군산진이었습니다. 이곳은 주로 관용이나 외부 선박들이 사용하고 있었습니다. 당시 군산진에는 최건수첨사와 550여명의 수군이 있었습니다.

 

군산포에 도착한 전킨일행이 배에서 내릴 때 모든 사람들이 녹초가 되어 버렸습니다. 그러나 금강하구 군산포 항에 도착하니 다시금 선교의 열정이 솟아올라 그들의 얼굴은 붉게 상기된 채 군산에 선교의 첫 발을 내디디었습니다. 아직은 군산에 살고 있는 분들은 아십니다만, 봄이라 하지만 군산은 아직도 한겨울처럼 춥고 찬바람이 옷 속을 파고들어 체감온도가 영하 10도는 되는 그런 날씨입니다. 당시 군산은 아직 개항 이전이라 여기저기 70여 호의 초가집들이 쳐기 저기에 올망졸망 모여있는 전형적인 어촌이었습니다. 길은 구불구불하고 더럽고 먼지가 뽀얗게 일어나 길가집들은 먼지로 뒤덮여 있었습니다. 남자들은 술에 취하고 이곳저곳에 도박판이 벌어져 사람들이 소리를 지르다가 도박판이 싸움판으로 바뀌곤 하였습니다.

여인들은 미신과 우상숭배에 빠져 있어 덩그렁뎅그렁 굿하는 소리가 여기저기서 들려 왔습니다. 당시 서양인들에 대한 감정이 좋지 않은 사람들이 많아 돌팔매질로 노골적 반감을 드러내기도 하였습니다. 그러나 한편 호감을 가지고 있던 사람들은 기쁜 마음으로 맞이하고 먹을 것을 나누어 주기도 하였습니다.

 

전키선교사와 드루의료선교사는 선창가에서 멀지 않은 곳에 예배처소와 진료소를 차리기 위해 찾던 중 당시 군산 진영이 있던 수덕산 기슭에서 초가집 두 채를 발견하고 각 50 달러에 구입을 하였습니다.

 

드루의 집은 후에 들어선 우체국 앞산 수덕산기슭에 마당에 우물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전킨의 집은 거기서 서너 집 건너 동남 편에 있었습니다. 당시 환률 시세로는 상당히 비싸게 샀다고 하겠습니다. 왜냐하면 10센트면 엽전 100개입니다. 그러니 50달러면 엽전을 지게로 지어야할 엄청난 돈이었습니다.

 

매일 아침 9시부터 10시 반까지 전킨은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고 드루 선교사는 환자를 치료하였는데, 어떤 때는 50명에 달하는 환자를 돌보기도 하였습니다. 사람들은 두 선교사를 찾아와 말씀도 듣고 치료도 받으니 찾아오는 사람들로 그야말로 문전성시를 이루었습니다.

사람들은 감사의 표시로 생선 굴 달걀과 미역을 가져 왔습니다. 전킨과 드루선교사는 금강을 따라 올라가 강경까지 그리고 고군산열도의 여러 섬들을 돌아보며 선교의 가능성을 타진해 보기도 하였습니다. 수덕산기슭에서 한 달 여 동안 생활하면서 마을 사람들과 어느 정도 안면도 익힌 전킨선교사와 드루선교사는 가족들을 데려 오기로 하였습니다.

그 때 마침 미국영사의 긴급 지시를 받게 되었습니다. 미국영사는 지방에 있는 선교사들에게 동학혁명으로 신상이 위험하니 속히 철수하라고 지시하였던 것입니다. 군산의 전킨과 드루선교사는 그러지 않아도 가족들을 데리고 오려고 계획하던 참이라 두 선교사는 잠시 후 다시 오리라고 주민들에게 약속하고 배를 타고 서울로 올라갔습니다. 당시 전킨 선교사는 동학을 연구하여 선교사들에 강연을 하기도 하였습니다.

 

동학혁명이 끝나게 되자 전킨은 더 이상 지체할 수 없어 1995년 여름이 지난 후 9월 드루와 함께 군산에 내려 왔습니다. 지난 번 구입한 집을 돌아보고 동학혁명후의 군산환경을 살펴보았습니다. 드루는 한 달 동안 머무르다가 상경하였지만 전킨은 계속하여 1896년 1월 까지 머물어 한편으론 전도를 계속하면서 가족들과 함께 군산에서 살아 갈 여러 가지 준비를 점검한 후에 서울로 올라갔습니다.

 

마침내 1896년 4월 초 전킨과 드루 두 선교사 가족들은 인천에서 해룡이라는 증기선을 세를 내어 타고 군산으로 내려가기로 하였습니다. 그러나 그 증기선은 갑자기 고장이 나 수선소에 들어가 버리니 할 수 없이 한 작은 미곡 운반선인 돛배를 전세를 내어 타게 되었습니다. 그 배는 매우 작았습니다. 이사짐들은 작은 화물칸에 쑤셔 넣고 겨우 네 명의 어른들이 앉을 정도의 작은 방안에 쭈그리고 앉아 여행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들의 고생은 이루 말 할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드디어 나흘간 여행 끝에 4월 5일 안전하게 군산에 도착을 하였습니다.

전킨은 이때의 여행을 “닭장 속의 4일”이라고 표현하였습니다. 와서 보니 전킨의 집은 홍수의 피해로 방 두 개가 물에 잠겨 있었습니다. 그나마 드루의 집은 조금 높이 있어 피해를 덜 입었지만 비가 들이쳐 매우 더러워져 있었습니다. 더러워진 방과 마루를 정리하고 의료선교사역을 시작 하였습니다.

 

이때로부터 거슬러 11년 전 1885년 4월 5일 언더우드 아펜젤러 두 선교사가 4월 5일 공식적으로 조선선교를 위해 인천항에 도착을 하였는데 10년후 전킨과 두루선교사 부부 역시 4월 5일 군산에 도착을 하였으니 동일한 날자가 주는 의미를 생각해 봅니다.

이리해서 미국 남장로교의 최초 호남선교의 교두보로 군산선교부가 시작되게 되었습니다.

 

1896년, 드디어 군산 땅에 여호와 이레로 교회의 문이 활짝 열리게 되었습니다. 군산진교회 또는 군창교회로 불려지기도하고 후에 군산교회라 불려 진 교회가 세워짐을 시작으로 바야흐로 자갈밭을 걷어내고 옥토로 만들어 복음의 씨앗을 뿌리기 시작하였습니다. 누군가 이런 말을 하였습니다. 사과 속에 씨를 셀수 있지만 씨 속에 사과가 몇 개가 있을지 세어볼 수 있겠는가? 앞으로 수덕산 군산교회라는 사과 씨 속에 얼마나 많은 사과가 들어 있을 것인가? 오늘날 우리는 계속 그 사과들을 세고 있지 않습니까?

 

그러나 낯설고 물 설은 이국의 한 어촌마을에서 젊은 선교사부부들이 생활한다는 것은 그야말로 고난의 행군이라 할 것입니다. 집 주변에는 그늘이 될 만한 나무 한그루도 없고 삭막하기까지 하였으며, 사리 때가 되면 바닷물이 범람하여 마당이고 길이고 질퍽하여 걸어 다니기가 힘들었습니다. 정기적으로 선교부에서 보낸 배가 온다고 하지만 말이 정기선이지 선장 마음대로이니 서울선교부에서 보내는 생활용품이나 선교용품들이 제때 공급되지 않아 불편하기가 말로다 할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때때로 주민들이 쌀, 계란, 채소, 생선 등을 선물로 가져다주어 주민들과의 친밀함은 오히려 더 깊어만 갔습니다. 키가 큰 전교사가 작은 초가집 안방에서 자려하면 발은 창밖으로 내밀고 자야 했습니다. 책을 보고나 설교준비를 할때는 아이들은 밖에 있거나 좁은 방구석에 쪼구리고 앉아 있어야만했습니다. 미국 좋은 집에 살던 전킨과 레이번은 군산의 작은 초가집살이를 하자니 얼마나 고단한 일이었겠습니까?

 

전킨선교사와 드루선교사는 복음전도와 의료선교를 유기적으로 결합하여 주민들의 인심을 얻는데 성공을 하였습니다. 당시 전킨의 초가집은 주일날엔 예배실이 되었습니다. 큰 방은 가운데를 장지문으로 나누어 한쪽은 남자석, 다른 한쪽은 여자석으로 구분하여 전면 제단을 향해 양쪽이 서로 보이지 않게 하였습니다. 온돌방 바닥에 멍석 5매가 깔려 있고, 출입문은 남녀가 따로 따로 들어와 신을 벗되 남자들 갓은 쓴 채로 제단을 향하여 앉았습니다.

 

마침내 수덕산 군산교회에 첫 세례교인이 태어났습니다. 김봉래와 송영도 그리고 차일선이라는 분이 교육을 받았는데 김봉래와 송영도가 문답에 합격을 하여 1896년 7월 20일 세례를 받음으로 군산과 호남 선교의 첫 수확을 얻게 되었습니다.

 

이때에 서천군 종천면 신검리에 사는 강규형(당시 54세)과 강주희(당시 32세)가 예배에 참석하였습니다. 강규형은 1894년도에 매서인을 통해 우리나라 최초 한글성경인 로스역 “예수셩교젼서(1887)”가 어떤 책인가 궁금해서 사서 읽게 되었습니다. 읽는 중에 믿음이 들어가기 시작하였습니다. 이듬해 군산에 기독교선교사들이 와 있다는 풍문을 듣고 전킨의 집을 찾아 와 전킨에게 기독교의 복음을 자세히 듣게 되었던 것입니다. 전킨의 지도를 받아 강규형은 서천 신검리 랑평마을서 신검교회를 세웠습니다. 이때에 전킨이 이 동네를 방문하여 지도하였습니다.

그 후 두 선교사가 서울로 올라갔다가 다시 군산으로 돌아 왔다는 소식을 들은 강규형은 전킨에게 교리를 배우고 문답을 받아 군산선교부 두 번째로 그리고 충청남도 사람으로는 최초로, 강주희와 함께 세례를 받았습니다. 1901년 강규형은 동리청년 조종록(당시 26세)의 집으로 예배처소를 옮겨 전도를 하니 1905년 전킨 선교사의 집례로 강창희, 강인희, 조종록 등이 세례를 받았습니다. 1915년 전라노회명단을 보니 조종록과 강인희가 영수로 되어 있고 충남노회사는 후에 조종록이 장로가 되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드루는 하루종일 작은 초가집의 진료실과 수술실에서 1896년에서 1897년의 2년 동안 무려 4,000명의 환자를 돌보았으니 지금 어느 병원도 이보다 더하지는 못할 것입니다.

 

1897년 5월 어느 주일날 입니다. 아침 9시에 시작종을 치면 반장 김봉래의 인도로 찬송 64장 “예수의 놉흔 일흠이 내 귀에 들리네...(Jesus, Thy Name I Heard)”를 함께 부르며 예배를 시작하였습니다.

반장이 출석을 부른 후에 결석자는 인근에 사는 사람이 다음에 심방하도록 하였습니다. 등록된 교인 40여 명 중 20 여명은 지난 1년 동안 잘 출석하고 있었습니다. 예배 전에 장년부 성경공과시간이 있게 됩니다. 당일공과는 ‘아나니아와 삽비라’였습니다. 약 1시간으로 마치고 10분 정도 휴식한 후 주일예배가 시작되었습니다.

당시 교인들이 읽을 수 있는 성경이 마련되어 있지 않아 4복음과 사도행전을 합본한 성경을 사용하였습니다. 후에 이 소 성경책이 많이 보급되기도 하였습니다.

아마도 이 시절에 만자산 일곱 성도들이 찾아와 예배에 동참하였던 것입니다.

성경공부가 끝나고 예배가 시작되었는데 전킨선교사가 ‘주님께 드리는 것’이란 제목으로 설교를 하였습니다. 헌금시간에 헌금을 하였는데 1불 6세트와 엽전이 무려 530전이었습니다. 놀라운 것은 군산의 첫 교인들이 헌금을 하였다는 것입니다. 달러는 선교사와 가족들이 헌금한 것이고 530전은 40명 한국인 교인들이 내었으니 한사람당 13전씩 헌금을 하였습니다. 지금 해외에 나가 처음 선교하는 한국선교사들의 말을 들으면 헌금은 고사하고 주민들에게 먹여주고 재워주고 차비까지 준다는 것입니다. 군산의 첫 번 교인들은 하나님께 헌금을 드리는 것으로부터 신앙생활을 시작하였다는 것은 하나님이 이 땅에 풍요로운 축복으로 내려 주시리라는 아브라함의 제단을 쌓았던 것이라 하겠습니다.

 

1899년 군산이 개항하면서 일본인들이 군산으로 몰려들어와 수덕산 아래를 일본인 조차지로 만들었습니다. 우리 조선인들 수덕산 교회까지 오기가 어려워지게 되자 궁멀지역으로 교회를 옮기게 되었습니다. 당시 궁멀은 궁포귀범이라 하여 궁포모퉁이를 돌아 내려오는 돗단배들이 아름답다고 하여 군산 8경의 하나로 손꼽히는 명승지였습니다.

여러분은 군산팔경을 아십니까?

소개한 궁포귀범 외에 째보선창, 죽성리 빨간 무인등대가 있는 그곳에 봄아지랑이가 피어오르니 죽성춘로(竹城春露)요, 월명공원에서 건너다보이는 장항에 이슬비 내리는 정경 또한 볼만하니 용담야우(龍潭夜雨)라, 장안제련소 돌산쪽으로 지는 해 멋지다 장암낙조(長岩落照)이고, 해망령 우거진 소나무 사이로 보이는 가을달밤, 지금은 월명공원에서 바라보는 가을 달빛이 조요하도다 해망추월(海望秋月)이라, 측후소에서 강 앞으로 돌출한 산기슭에서 고기 낚는 태공들의 정경 또한 볼만하니 흑기조어(黑磯釣魚)이고, 오성산 동쪽 끝 서포갯벌 갈대밭으로 내려앉는 가창오리떼와 고니가 날아오르는 광경에 탄성을 지르게 하는 서포낙안(西浦落雁)이요, 정방산 봉수대의 불꽃이 피어오르고, 눈 덮인 풍경 또한 신선의 세계 방불하다 봉화모설(烽火慕雪)입니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이 군산 8경을 지금은 찾아보기가 어렵습니다. 시장님께서 새로운 군산 8경을 찾아 지정해 주셨으면 합니다.

 

1899년 4월부터 전킨은 자전거를 타고 오고가며 궁멀 언덕 중턱에 선교부를 겸하여 주택을 짓기 시작하였습니다.(전킨은 호남 최초로 자전거를 타고 다녔습니다.) 그러나 당시 한국에 서양식주택을 짓는 일은 만만치가 않았습니다.

일꾼들이 일을하다 말고 가버리기가 일수이고, 어느때는 일하러 나오지도 않을뿐더러, 어떤 일꾼들은 자재들을 훔쳐 도망가기도 하고, 일당을 더 달라고 시위를하기도 하였습니다. 그런 우여곡절 끝에 궁멀에 선교사 사택겸 교회가 지어져 12월 21일 첫 예배를 드리게 되었습니다. 이로인해 궁멀교회 지금의 구암교회가 출발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전킨선교사는 사택에서 영명학교를 시작하고 부인인 레이번선교사는 멜본딘여학교를 시작하였습니다. 전킨선교사는 우리나라 최초로 영명학교학생들에게 야구를 가르쳤습니다. 지경교회 박정흠교수가 시의 위탁을 받아 군산상고 앞 거리에 야구의 거리를 지금 조성하고 있습니다. 박교수는 우리군산의 참 보배로운 교수님이십니다. 레이번여선교사는 멜본딘 여학생들에게 정구를 가르쳤습니다.

 

영명학교와 멜본딘 여학교가 세워짐으로 우리나라의 우국충정의 많은 애국인사들이 배출되었습니다. 호남지역 최초의 삼일만세운동인3.5독립만세운동이 영명학교와 멜본딘여학교 그리고 구암교회성도들과 구암병원 의료종사자들이 주축이되어 많은 군산시민들이 설애장터에서 시작하였던 것입니다. 많은 교사와 학생들이 그리고 기독교 교인들이 붙잡혀 고문을 당하고 감옥에 갇이는 일들이 있게 되었습니다. 지금 구아교회 앞 삼일만세운동 기념관을 가보면, 이 기념관은 영명학교건물을 복원한것인데, 삼오 만세운동에대한 여러 가지 모습들을 볼수 있습니다. 아직 가보지 못하신분들은 꼭 가보시기 바랍니다.

 

수덕산에서 옥구면 궁멀로 교회가 옮겨지니 군산지역에 남아있는 일부 교인들이 자체적으로 모여 기도회를 가지고 있던 중에 1905년 만자산교회 최흥서님과 군산의 홍종익님에 의해서 개복동에서 교회를 신축하고 개복교회를 시작하였습니다. 당시 개복동은 군산에서 가장 가난한 주민들이 살고 있었습니다. 개복교회는 이 가난한 이웃들의 친구가되어 주면서 성장하기 시작하였습니다. 구암교회는 선교부와 영명학교 멜본딘여학교 구암병원에 속한 교인들이 주축이 되어 성장하였습니다. 만자산교회는 일본인들에게 수탈당한 농민들의 위로자가 되면서 성장하였습니다. 당시 최흥서장로님은 일본인들이 아무리 땅을 팔라해도 절대로 땅을 그들에게 팔아서는 안된다고 강조하여 지경교회 속한 대부분의 농민들은 일본인들에게서 땅을 지키었다고 합니다.

전킨선교사는 안식년에 미국에 돌아가서 주일마다 교회를 순회하면서 구암병원과 학교를 위해 모금활동을 벌렸습니다. ‘지금 군산의 수많은 주민들이 질병으로 죽어가고 있습니다. 그들을 살립시다’라고 외쳤습니다.

 

전킨선교사는 군산을 비롯해서 익산, 옥구, 김제, 서천, 부여 등지를 배편과 말을 타고 순회하며 열심히 전도하여 남전교회, 서포교회, 송지동교회, 대장리교회, 월성교회, 학천리교회, 부여 오량교회 등을 설립하여 나갔습니다. 그러다보니 너무 몸이 쇠약해져 곧 쓰러질 것만 같았습니다.

 

그래서 선교부에서는 군산에서 전주로 선교지를 옮겨주었습니다. 전주 서문밖교회에 가서 몸을 쉬라고 하는 것이었습니다. 전주에는 많은 선교사들이 일하고 있기 때문에 휴식을 취할 수 있다는 취지 였습니다. 그리고 십리 밖으로 전도 나가지 말라고 약조를 하였습니다. 그러나 이 약조는 지켜지지 않았습니다. 전도나가지 않고 편히 쉰다고 해서 쉬는 것이 아닙니다. 더 마음이 답담하고 괴롭습니다. 그래서 떨치고 일어나 군산에 있을 때보다 더 열심히 교회와 전도에 열정을 쏟아냈습니다. 서문밖교회도 새로 건축을 하였습니다. 전주 주변에 여러 교회들을 세웠습니다. 특히 1907년 대부흥운동이 전국적을 일어날 때 전킨선교사는 전주의 대 부흥운동을 이끌었습니다. 더욱 전주에 있는 신흥학교와 기전여학교를 도맡아 헌신하였습니다. 그의 수고와 헌신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일이었습니다만 그의 육신은 너무나 쇄약해져 갔습니다.

 

1907년 12월 25일 성탄절 날이었습니다. 그 날 오후 주택 지하의 저장고에 얼음을 가득 들이는 일을 하였습니다. 이 일은 군산에 있을 때부터 하던 일이었습니다. 마치 석빙고 같습니다. 그래야 다음해 봄이 지나도록 신선한 음식을 먹을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날 밤 부인 레이번과 이이들과 함께 가족 간에 밤늦게 까지 성탄절 기쁨을 나누었습니다.

다음 날 아침 전킨은 몸이 오슬오슬 춥다고 느끼고 아마 급체가 아닌가하고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였는데 오후에는 점점 더 오한이 일어났습니다. 급히 잉골드의료선교사가 와서 진료를 하였습니다. 다음날 주일이 되자 혈압이 160으로 올라가고 장티부스로 짐작이 갔습니다. 오긍선의사가 군산에서 달려왔습니다. 화요일 밤에는 전보를 받고 다니엘이 왔습니다. 훈련된 간호선교사 코델과 테이트 그리고 레이번이 전킨을 간호하였습니다. 다니엘의사는 계속 전킨의 병세를 살피고 있었습니다.

 

1907년 12월 31일 월요일 전킨은 그가 곧 떠나 갈 것을 알았듯이 자녀들을 불러 기도하고 “나는 집으로 간다. 나는 행복하다 I am going home, I am Happy”라는 말을 하였습니다. 1908년 1월 1일 새해가 밝았습니다. 그러나 전킨의 병실은 아직 어두웠습니다. 그의 병은 급성 폐렴으로 발전된 것입니다. 그리고 다음날 수요일 1월 2일 아침 9시 그는 그를 사랑하는 이들을 남겨둔 채 세상을 떠나, 아니 군산, 전주, 그가 몸 바쳐 이처럼 사랑하던 한국을 떠나 하나님 나라로 갔습니다.

 

에너벨 니스벳은 그의 회고록에서 전킨 선교사의 장례식의 한 장면을 다음과 같이 소개하였습니다.

 

“전킨선교사 장례식 때 마지막으로 전킨의 얼굴을 한국인들에게 보여주는 것이 존경심이 아닌 호기심으로 볼 수도 있다는 말에 어느 선교사가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전킨목사는 살아있는 동안 한국인 만나는 것을 지겨워하지 않았으며 바빠서 안 만나 준 적이 거의 없다. 그런데 이제 와서 그와 만나지 못하게 한다는 것이 말이나 되는 소리인가?” 에너벨은 슬픔에 젖어 있는 한국인들을 쳐다보면서 몇 주 전 전킨이 그녀에게 보낸 편지의 뜻을 되새겨 보았습니다. 그 편지에서 전킨은 선교사의 삶이 희생의 삶이라고 하는 데에 격렬하게 반대를 하면서 “선교사의 삶은 사랑이 넘치는 삶이며, 행복이 넘치는 삶이다.”라고 말하였던 것입니다.

 

1908년 1월 2일 오후 4시 전킨의 집에서 숙연한 가운데 영어로 임종예배가 진행되었습니다. 그리고 밤에는 서문밖교회에서 모든 교인들과 함께 한국어 장례예배를 드렸습니다. 그리고 1월 3일에는 그의 시신을 군산으로 옮겨졌고 1월 4일 그의 3명의 아들 곁에 묻혔습니다. 회색 화강암 비문에는 “여기 전킨 목사는 예수를 믿음으로 영생을 소유하였노라”고 새기었습니다.

 

1893년 4월 23일 큰아들 전킨(George Garnett Junkin)이 서울에서 태어나 1894년 1월 30일 두 살에 세상을 떠났고, 1899년 1월 8일 아들 시드니(Sydney Moreland Junkin)가 군산에서 태어났으나 3월 17일 두 달 만에 하나님 나라로 갔으며, 1903년 4월 3일 아들 프란시스(Francis Wood Junkin)도 군산에서 태어났으나 그달 23일에 하나님이 불러 갔고 이제 그들의 아버지 전킨 목사가 구암동산 그들 곁에 눕게 되었습니다.

 

전킨부인 레이번은 굳굳하게 모든 장례절차를 지켜보았습니다. 그녀는 3명의 의사와 1명의 간호사가 전킨곁에 있었으면서도 속수무책이었던 것은 이미 하나님께서 그를 부르셨기 때문이라고 믿고 있었습니다. 유족으로 부인 레이번과 아들 에드워드, 윌리엄, 마리온과 1907년 3월에 태어난 매리 그리고 아직 세상에 태어나 아버지 얼굴을 보지 못했던 유복자 알프레드(Alfred C. Junkin 1908년 미국에서 태어남)가 있었습니다.

 

전킨의 가족들은 1908년 늦 봄 전주를 떠나 군산에서 배를 타고 일본을 거처 미국으로 귀국하였습니다. 이때 맥커첸선교사가 안식년을 맞아 목적지까지 그들과 동행하였습니다.

 

매리 레이번 전킨(Mary Leyburn, Junckin)부인은 미국으로 돌아갔어도 남편과 함께 섬겼던 교회들을 잊을 수 없었습니다. 특히 남편이 생전에 서문밖교회를 새로 건축하였지만 종소리가 나지 않는 교회라고 안타까와하였던 일을 기억하여 미국 교우들에게 모금운동을 벌렸습니다. 미국 교인들은 종을 위한 헌금을 하여 주었습니다. 마침내 직경 90cm나 되는 큰 종을 마련하였습니다. 미국의 해외선교신문의 편집장 윌리엄(H F William)목사는 직접 이 종을 큰 기선에 실어 한국으로 가지고 왔습니다. 제물포에 도착한 이 종은 다시 범선 편으로 만경강 포구를 거슬러 올라와 전주에서 40리 거리인 김제의 회포면 쌍강포에 내렸습니다.

 

다시 인근에 난산교회와 쇠평리교회 신자들이 이 종을 쇠달구지에 실어 서문밖교회까지 가지고 왔습니다. 종각을 세우기 위해 교인들이 헌금을 하고 인근 교회들도 협력하였는데 김제 번드리 교회에서는 5원을 보내 왔습니다.

종각 건축위원으로 김필수장로, 전영칠집사 그리고 목수 김학수에게 맡겨 종각을 세우니 마침내 1908년 12월 10일(목요일) 오후 4시 헌종예배를 드리게 되었습니다. 예배 후에 윌리엄 레이놀즈, 니스벳선교사와 전영칠집사 그리고 앞으로 종을 관리하며 타종 책임을 맡게 되는 안경오가 차례로 타종을 하였습니다. 이때의 감격을 김필수장로가 12월 30일자 <예수교 신보>에 다음과 같이 발표하였습니다.

 

“한 번씩 종을 쳐 보는데 뗑 뗑 뗑 사랑하는 전 목사의 기념종소리로다. 예수께서는 천당에 오르신 후 보혜사를 우리를 외로운 자식같이 버리시지 아니하시고 보호하심 같이 전 목사는 종을 보내게 하여 이곳 교우와 다른 친구들을 경성하게 하셨도다.”

 

비록 전킨선교사는 세상을 떠나 하나님 나라로 가셨지만 그 후 전킨의 종소리가 울릴 때 마다 그의 신앙과 선교정신도 함께 서문밖교회와 호남 모든 교회들에게 울려 퍼졌습니다.

사람들은 이 종을 전킨의 종이라고 불렀습니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1944년 일본제국주의의 공출로 전킨 종을 빼앗기고 현재 있는 서문교회 종은 해방 후 대구에서 새로 제작하여 새웠습니다.

참으로 전킨의 종소리가 듣고 싶습니다. 이 종이 한번 울리면 20 리 밖에서도 들을 수 있었습니다. 이 종소리를 들으면서 수많은 죽은 영혼들이 깨어나고 죽은 민족혼이 되 살아났으며 이 종소리가 퍼져 나가는 곳 마다 하나님의 사랑의 복음이 퍼져 났갔습니다.

 

2015년 인구주택총조사 종교인구 통계에서 개신교기독교인이 967만 6천명(불교 761만9천명, 천주교 389만명)으로 인구비례 19.7%라고 하였습니다. 전국 240여 시.군.구 가운데 개신교인 인구비율이 20%가 넘는 곳이 20곳이 있습니다.

한반도 지도 위에 개신교인 비율이 높은 지역을 표시해보면 하나의 뚜렷한 경향이 나타납니다. 개신교인 비율이 인구의 25%를 넘는 지역은 서해안을 따라 분포하고 있습니다. 맨 위에 인천광역시 강화군이 위치해 있고 옹진군 백령도, 충청남도 서천, 전라북도 군산(32%)과 익산(31%), 김제(30%)로 이어지며, 전라남도 광주 목포 여수에 이르게 됩니다. 한국교회역사연구실이 발표한 ‘100년 이상 된 한국교회 자료집’에 따르면 예장 통합 319곳, 예장 합동 232곳, 기감 223곳, 기장 98곳 등 국내 9개 교단 소속 925곳의 교회가 설립 된 지 100년이 넘은 것으로 조사됐습니다. 그중의 한 교회가 지경교회입니다.

 

흔히 선교사들이 미 제국주의 팽창의 일환으로 한국에 들어왔다는 논리를 말하는 사람도 있지만 19세기 말은 아직 미국의 제국주의 근성이 크게 나타나지 않았던 때입니다. 당시 한국에 온 수 많은 초기 선교사들은 오직 땅 끝까지 복음을 전하라는 순수한 선교 사명을 받아 건너와 생명을 내던지듯 선교의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로 올랐던 사람들입니다. 그중의 한 사람이 바로 전킨선교사 이었습니다.

 

전킨의 군산을 비롯한 호남선교사역은 다만 기독교복음전파만이 아닙니다. 그는 이 지역에 미쇼 데이(Missio Dei), 하나님의 선교의 일환으로 새로운 근대문화를 전수하여 주었던 것입니다. 새로운 서구식 학문들을 두루 가르치기 위해 영명학교, 멜보딘여학교를 시작하였고, 전주에서는 신흥학교와 기전학교를 일으키며, 기전학교란 이름은 전킨을 기념하자는 의미로 지은 이름입니다. 드루선교사와 함께 세운 구암병원으로 수많은 환자들을 치료하고 그들의 생명을 죽음에서 건저 주었습니다. 그리고 가장 문맹률이 높았던 군산 지역을 한글교육으로 눈을 뜨게 해주고, 한국의 고유음악만 들었던 주민들에게 찬송가와 서양음악들을 가르쳐 주었습니다. 여성들의 의식을 깨우치고 축첩이나 전근대적인 가부장 양반상놈 계급문화를 타파하도록 일깨워 주었습니다.

 

전킨 선교사는 우리나라에서 최초로 야구와 축구를 알려 주었습니다. 그러나 더욱 중요한 것은 다만 사회 문화 예술 체육 분야만이 아니라, 당시 암울한 시대 속에 쇄락하여 가는 사람들의 정신을 바로 세워주기 위하여 민주주의정신과 민족의 개혁의식을 고취하고 독립심을 가지도록 가르치는데 그는 심혈을 기울였습니다. 특히 남 녀 학교에 애국심이 투철한 한국인 교사들로 하여금 학생들을 가르치게 하니 후에 군산의 3.5독립만세운동의 주역들이 대부분 구암교회를 비롯한 개복교회 지경교회 등 교회 교인들과 영명학교 멜본딘 여학교의 학생들 이였습니다. 그 외 도시 익산 전주 함라 등지에서 계속적으로 일어난 3.1운동의 주역들이 대부분 전킨과 그 외 선교사들을 통해 이미 익혀진 민주정신 민족애와 나라의 독립심의 발로였다고 하겠습니다.

 

그러나 지금 군산과 전주에서 전킨을 기억할 만한 흔적은 그리 많지 않습니다. 구암교회, 지경교회, 남전교회, 서문교회 등의 작은 선교사기념관이 있고, 그를 위해 세운 전주서문교회의 전킨기념종각, 기전여중고의 교명이 있으며, 전주선교사묘역에 있는 그와 세 아들의 묘비가 있을 뿐입니다. 그런데 그 묘비 뒤엔 1954년 8월 20일 “영명중고등학교 동창회가 세우다”라는 글귀가 새겨 있습니다. 원래 묘비가 아닌 것입니다. 증언에 의하면 군산 선교부지일대가 재개발 될 때 선교사 묘역에 관심을 가진 교회나 교인들이 전혀 없었습니다. 그래서 당시 전주예수병원에 있던 선교사 가족들이 묘비만 전주로 옮겨갔다는 것입니다. 아마 묘비만 옮긴 후 시에서 무연고자 사체 처리규정에 따라 처리하였을 것이라고 추측하고 있습니다. 어떤 이의 말에 의하면 시당국에서 무연고 묘에 있던 시신들을 거두어 화장하였다고 합니다. 전킨의 묘비는 6.125 전쟁당시 어떤 이유인지 모르지만 깨어져 있음으로 1954년 영명중고등학교 동창들이 군산에 다시 만들어 세웠던 것입니다. 그런데 1959년 이후 전주 선교사 묘역으로 옮기었습니다. 이제 다시 묘비만이라도 군산으로 다시 옮겨와야 할 것입니다.

 

어찌 군산기독교회들은 군산선교와 군산 근대화의 아버지라할 수 있는 전킨의 사후관심이 이처럼 무심할 수 있었단 말인가?

전킨과 자녀들의 유골은 어디로 갔는가? 예수님의 무덤이 공묘 이었던 것처럼 전킨의 묘도 공묘입니다. 그러나 군산과 그를 기억하는 많은 사람들의 가슴에 그의 믿음, 그의 열정, 그의 헌신, 한 알의 밀알이 되어 전킨은 우리 곁에 살아 있습니다. 또 레이번여선교사의 미국의 묘도 군산으로 이장하여 모셔 와야 할 것입니다.

 

이제부터라도 전킨과 레이번 이 두 분의 이름을 우리는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자신을 궁멀 전씨라고 소개하면서 군산의 골목 골목을 자전거를 타고다니며 전도하던 전킨, 황포돗배를 타고 금강 만경강 동진강 그리고 고군산도를 다니며 전도하던 전킨, 영명학교와 멜본딘학교 그리고 신흥학교와 기전학교에서 열정을 다하여 말씀을 가르치던 전킨, 구암병원 예수병원에서 환자들을 위로하고 치유의 기도를 하던 전킨을 그가 누구인지를 우리 군산의 기독교인들은 알아야 합니다. 우리가 예수님 이름도 알고 바울도 알고 루터와 칼빈도 알고 있듯이 우리 군산과 호남의 기독교인들은 전킨의 이름을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것은 전킨과 레이번이 군산 땅에 하나님이 택하여 뿌리신 한 알의 생명의 밀알 이였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이 밀알을 기억할 때 우리도 이 땅에 한 알의 생명의 씨앗이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2017년 8월 초 군산에서 군산기독교연합회 내 전킨기념사업위원회(위원장: 중동교회 서종표목사)가 조직되었습니다. 그리고 동위원회에서 11월 25일 군산시의 협조로 수덕산 중턱에 전킨 드루선교사 선교기념비 제막예배를 가졌습니다. 또 선교사들이 배를 타고 군산항에 처음 내린 곳을 기념하여 도착지 표지석도 세웠습니다. 2018년 1월 2일에는 동 위원회 주관으로 이곳 지경교회에서 전킨선교사 110주기 추모예배를 개최하였습니다. 지난 110년 동안 한 번도 그의 추모예배를 드려 본적이 없어 더욱 뜻깊은 예배였습니다.

 

2018년도 현재 전킨기념사업위원회에서는 전킨기념관을 건립하기 위해 준비를 진행하고 있습니다. 이미 여러분들에게 박정흠교수님이 만든 윌리엄전킨선교사 일대기 동화책을 발간하였습니다. 또 제가 이야기전킨이라는 전킨 전기를 10월 말중에 출판을 하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앞으로 전킨에 관한 단편영화도 제작하려고 합니다.

 

한편 군산시에서는 전킨과 드루선교사가 세운 구암교회, 개복교회, 지경교회와 제일중고등학교, 영광중.여고(멜볼딘학교)와 몇몇 기독교 유적지를 기독교성지순례코스로 지정하여 군산에 방문한 관광객들에게 시청 공인 해설사들을 통해 안내하도록 하였습니다. 그 해설사들을 제가 한달동안 성지순례 교육을 하였습니다. 군산시의 협조로 CTS기독교 TV에서는 군산 성지순례단 80여명을 모집하여 11월 12일 우리 군산성지순례를 하기위하여 오게 될 것입니다. 물론 지경교회도 방문할 것입니다.

앞으로 전킨기념사업회를 위해 지경교회 성도들의 뜨거운 기도가 필요합니다. 꼭 기도해 주시기를 재삼 부탁을 드립니다.

 

지경교회 성도들은 전킨의 믿음의 직계후손이라 할 것입니다. 전킨의 그 뜨거운 선교열정을 이미 받았으니 이제 지경교회의 지경이 더욱 넓어지고 더 깊어지고 더 높아지기를 기도합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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