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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병호목사의 교회이야기

전병호 목사의 설교



2018년 2월 3일 주일아침예배 눅2:22-35 Nunc Dimittis 시므온의 노래

 

 

초대교회에서 불렀던 찬송은 주로 시편 찬송이었습니다, 그러나 마그니피카트(Magnificat)라고 부르는 마리아의 노래 “내 영혼이 주를 찬양하며···”(눅 1:46-55), 베네딕투스(Benedictus)라고 부르는 사가랴 노래 “찬송하리로다 주 이스라엘의 하나님···”(눅 1:68-79), 영광송(The Gloria in Excelsis)이라고 부르는 찬사의 노래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눅 2:14), 눈크 디미티스(Nunc Dimittis)라고 부르는 시므온의 노래 “주재여 이제 말씀하신 대로 종을 평안히 놓아 주시는도다···”(눅 2:29)를 자주 예배 때에 불렀고 그 전통이 로마 카토릭교회, 그리스정교회, 성공회 그리고 루터교회에서 지금까지 불러오고 있습니다. 이 찬송을 4세기부터 예배를 마칠 때 부르거나· 저녁기도(Vespers)· 밤기도(Evensong) 같은 저녁예배 때 사용되고 있습니다. 우리 개신교회에서는 이 찬송을 왜 부르고 있지 않은지 매우 안타까운 일입니다.

 

오늘 봉독한 누가복음 말씀은 예루살렘 제사장 시므온이 아기 예수를 안고 말씀하신 장면인데 이때 29절부터 32절까지를 시므온이 찬송한 내용입니다. 로마교회 때 부터 이 찬송을 눈크 디미티스(Nunc dimittis)라고 불렀습니다. 눈크 디미티스는 2:29 첫 구절 “이제는 놓아주소서”의 헬라어 “눈 아폴류에이스”를 라틴어로 옮긴 말입니다.

 

예루살렘에 시므온(Συμεών)이라는 사람이 있었습니다.(25절) 시므온은 전승에 따르면 당시 최고의 율법학자 대 랍비 힐렐(Hillel)의 아들이요, 대 율법학자 가말리엘(Gamaliel)의 아버지라고 합니다. 가말리엘은 예수님 복음선교 활동에 대해 호의적인 생각을 가졌었고, 사도 바울의 선생이기도 하였습니다. 이처럼 시므온은 전통적 유대교의 지도자로서 의롭고 경건한 사람이었습니다. ‘의롭다’(디카이오스 δίκαιος, righteous)라 함은 하나님의 마음에 합당한 것을 의미합니다. ‘경건하다’(율라베스 εὐλαβής, devout)라 함은 신앙이 깊어서 하나님께 자신의 삶을 투명하게 보이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는 이스라엘이 받을 위로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눅2:25). 위로를 기다린다란 말은 무슨 의미입니까? ‘위로’(파라클레신 παράκλησιν, consolation이란 말로 유대교전통에서는 ‘위로자’와 메시야(חישמ)를 같은 동의어로 사용하였습니다. 시므온은 메시야, 즉 그리스도(Χριστός)를 기다리는 사람이었습니다. 경건한 사람은 돈, 명예, 권력을 기다리는 사람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기다리는 사람입니다. 하이덱거가 들길의 소리를 따라서 들길을 걸어가듯이, 그리스도의 소리를 따라서 인생의 길을 걸어가는 사람입니다. 25절에 성령이 그에게 임하여 계셨다고 하였습니다. 성령은(프뉴마 엔 하기온 Πνεῦμα ἦν Ἅγιον), ‘하나님의 영’입니다. 그리스도를 기다리는 경건한 그의 영혼에 하나님의 영이 임했습니다. 하나님의 마음이 그의 마음을 채웠습니다. 그는 언제나 하나님의 소리에 귀 기울이며, 그의 마음에 하나님의 영이 채워졌습니다. 성령은 그에게 ‘그리스도를 보기 전에는 죽지 아니할 것이다.’라고 지시하셨습니다.(26절) 27절에 그는 성령의 감동으로 자신의 의지로가 아닌 하나님의 영의 인도를 받아 성전에 들어갔습니다. 그리고 거기서 요셉과 마리아가 안고 온 아기 예수를 만나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시므온이 아기에수를 만나게 된 것은 오로지 하나님의 영 곧 성령의 역사였던 것입니다.

 

를 따라 성전으로 들어갔습니다. 그는 성령의 소리를 따르고 있었습니다. 그가 성령의 인도로 성전에 들어갔을 때에, 마침 아기의 부모가 율법이 정한 대로 행하고자 하여, 아기 예수를 데리고 들어왔습니다.(27절) 율법이 정한 것은 두 가지입니다. 첫째, 아기를 낳은 후, 남자 아기의 경우, 출생 40일 후에 하는 어머니의 정결의식입니다.(레위기 12.2-8) 둘째, 장자의 속전의식입니다.(출애굽기 13.1-2) 유대인들은 지금도 집안에 처음 난 아들을 하나님께 드리는 대신 일정한 액수의 돈을 ‘속전’의 의미로 드리고 있습니다. 이것을 ‘피디욘 하벤’(ןבה ןוידפ), Pidyon HaBen)이라고 부릅니다.

 

예수님 탄생 40일 후 모세의 법을 따라서 요셉과 마리아가 아기 예수와 함께 예루살렘 성전으로 갔습니다. 여기에는 2가지 목적이 있습니다. 첫째는 레12:2-4에서 “이스라엘 자손에게 말하여 이르되, 여인이 임신하여 남자를 낳으면 그는 이레 동안 부정하리니 곧 월경할 때와 같이 부정할 것이요, 여덟째 날에는 그 아이 포피를 밸 것이요, 그 여인은 아직도 삼십삼일을 지내야 깨끗하리니 정결케 되는 기한이 차기 전에는 성물을 만지지도 말며 들어가지도 말 것이요”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그러닌까 아들을 낳으면 40일후 성전에 가서 정결 의식을 가져야 비로소 대외활동을 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마리아가 예루살렘성전엘 올라갔던 것입니다. 그리고 두 번째는 출 13:2 “이스라엘 자손 중에서 사람이나 짐승을 막론하고 태에서 처음 난 모든 것은 다 거룩히 구별하여 내게 돌리라 이는 내 것이니라 하시니라”는 말씀에 따라 첫 번 아들을 하나님께 드리는 봉헌의식을 하게 되어 아기 예수를 안고 요셉과 마리아는 예루살렘 성전에 갔던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지금도 집안에 처음 난 아들을 하나님께 드리는 대신 일정한 액수의 돈을 ‘속전’의 의미로 드리고 있습니다. 이것을 ‘피디욘 하벤’(ןבה ןוידפ), Pidyon HaBen)이라고 부릅니다.

 

시므온이 아기를 자기 팔로 받아서 안고, 하나님을 찬양하여 말했습니다.(28절) 그는 성령의 인도함을 따라 성전에서 그리스도를 만났습니다. 그는 그리스도를 만난 감격을 노래했습니다. 하나님을 찬양했습니다. 앞에서 말씀드린대로 ‘눈크 디미티스’(Nunc Dimittis)라고 부르는 ‘시므온의 찬가’(Canticle of Simeon)입니다. 29절 “주재여 이제는...놓아주시는 도다”의 헬라어 성경에서 “이제는 놓아주소서”로 ‘뉜 아폴뤼에이스’(Νῦν ἀπολύεις, Now let depart)로 시작된 헬라어를 라틴어로 번역한 말이 ‘눈크 디미티스’입니다.

눈크 디미티스의 라틴어 가사는 아래와 같습니다.

 

이 시므온의 노래 눈크 디미티스는 초대 교회 시절부터 기독교 예배에서 부른 찬송입니다. 찬양의 가사내용입니다. ‘종을 평안히 놓아주시는 도다.’ 이 말은 이제 메시야 예수 그리스도를 만났으니 죽어도 좋습니다!‘ 이제는 여한이 없습니다. 이런 의미입니다. 그는 그리스도를 만났으니, 이제 세상을 떠나도 상관이 없다는 것입니다. 더 이상 바랄 것이 없다는 것입니다. “10월의 어느 멋진 날에(한경혜작사)라는 노래가 있습니다. 이 노래 가사에 ”널 만난 세상 더는 소원 없어 바램은 죄가 될테니까“라는 가사처럼, “내 눈이 주님의 구원을 보았습니다.”(30절) 평생소원이 메시야를 만났으니 더 이상 소원이 없어 바램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만나는 것 자체가 구원이었다는 것입니다. 전에는 절망만 보았습니다. 현실은 그야말로 좌절의 연속만 보였습니다. 도대체 구원이란 눈 씻고 보아도 보이지 않았던 암담한 현실이었습니다. 그런데 오늘 성령의 인도하심 따라 성전에 들어가니 뜻밖에 메시야를 만나게 되고 구원을 보게 되었습니다. 희망이 보였습니다. 의롭고 경건한 사람의 눈에는 아기 예수만 보아도 구원을 보게 되는 것입니다. 더 이상 절망이나 좌절을 사라져버렸습니다. 그래서 시므온은 소리 높혀 찬양을 합니다. “이는 만민 앞에 예비한 것이요 이방을 비추는 빛이요 주의 백성 이스라엘의 영광이니이다.”(31,32)

 

시므온은 그의 노래를 통해서, 예수님은 메시야이심을 분명하게 증언했습니다. 그러나 그의 노래는 그것으로 끝나지 않았습니다. 그의 노래는 예수님의 탄생과 관련된 다른 노래에서는 볼 수 없는 새로운 사실을 밝히고 있습니다.

 

눅2:31,32 “이는 만민 앞에 예비하신 것이요, 이방을 비추는 빛이요, 주의 백성 이스라엘의 영광이니이다.”

 

여기서 “만민(라오스)”이라는 단어와 “이방(에드노스)”이라는 단어에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유대인들은 이방인들을 미워했습니다. 왜냐하면 이방인들은 하나님을 믿지 않고, 사신우상(야웬 트라핌 삼상15:23)들을 섬겼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 역사를 보면, 이방인들은 그들이 섬기는 우상으로 이스라엘을 타락시켰습니다. 그 때문에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심판하셨습니다. 그래서 북방 이스라엘은 앗수르에 의해 멸망했습니다. 아울러 남방 유다도 바벨론에 포로로 끌려갔습니다. 그래서 유대인들은 이방인들을 원수처럼 간주했습니다. 그러면서 메시야가 오시면, 메시야가 자기들을 원수의 손에서 구원하실 것이라고 여겼습니다. 그런데 시므온은 놀랍게도 메시야의 구원은 이방도 포함되는 만민을 위한 것이라고 밝혔습니다. 물론 이와 같은 사실이 시므온을 통하여 처음으로 계시된 것은 아니었습니다. 선지자 이사야는 이미 이와 같은 사실을 여러 번 밝혔습니다. 예컨대 사9:2 말씀을 보면, “흑암에 행하던 백성이 큰 빛을 보고, 사망의 그늘진 땅에 거주하던 자에게 빛이 비치도다.”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흑암, 사망의 그늘진 땅에 행하던 백성은 이방을 가리킵니다. 장차 이방은 큰 빛, 곧 메시야가 비추는 구원의 빛을 보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이사야는 메시야를 가리켜서 종종 “이방의 빛” 또는 “만민의 빛”이라고 불렀습니다. 예컨대 사42:6 이방의 빛, 49:6 만민의 빛, 51:4 만민의 빛이란 말씀을 하였습니다. 물론 메시야는 ‘주의 백성 이스라엘의 영광(독산 라우 수 이스라엘)’이시기도 합니다. 여기서의 영광은 앞에 나오는 “이방의 빛”에 사용된 “빛”과 대칭을 이루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이때의 영광은 쉐키나의 영광, 곧 하나님의 임재로 말미암은 영광의 빛을 가리킵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는 그 백성 이스라엘도 구원하시는 영광의 빛이실 뿐 아니라 더 중요한 것은 이방을 비추시는 구원의 빛이시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시므온의 찬송은 메시야 아기 예수를 만나 온 세계 모든 민족을 대신하여 하나님께 구원의 은총을 바라며 하나님께 영광과 찬송을 올리고 있었던 것입니다.

 

따라서 시므온은 메시야이신 예수님이 온 세상의 구주이심을 최초로 밝힌 사람이었습니다. 이 세상에 구원받지 못할 죄인은 아무도 없습니다. 나 같은 죄인도 예수님을 믿어 구원을 받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시므온과 함께 하나님께 영광과 찬송을 돌려야 할 것입니다.

 

다시 본문 25절의 말씀을 보면, 시므온을 “위로를 기다리는 자(프로스데코메노스 파라클레신)”라고 하였습니다. 본래 ‘기다리다’는 ‘프로스데코마이’로 이말은 ‘받아들이다. 용납하다 영접하다’란 의미로 쓰이는 말입니다. 그런데 막 15:43에서도 아리마데 요셉을 ‘하나님 나라를 기다리는 자’라고 하였습니다. 인생은 무엇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밤이오면 아침을 기다리고 집을 떠나면 집에 돌아갈 날을 기다리고, 학교입학 시험을 치룬 학생은 합격 통지서를 기다리고 우리는 지금 이나라의 평화를 기다리고 통일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이 기다리는 시간은 때로는 지루하고 힘들고 그래서 기다리다 지쳐서 하도 지쳐서 목이 빠질 지경이 되기도 합니다.

 

사무엘 벡케트가 1952년도에 "고도를 기다리며(En Attendant Godot)"라는 희곡을 발표하였습니다. 이 "고도를 기다리며"라는 희곡은 1969년 노벨 문학상을 받았는데, 이 작품 내용은 제목처럼 무엇을 기다린다는 "기다림"이 그 주제입니다. 작가가 보기에 이 세상 사람들은 무엇을 기다리며 사는 것 같기는 한데 무엇을 기다려야 하고 누구를 기다려야 하는지 또 어떻게 기다려야 하는지도 모른 채. 그저 막연히 기다리기만 하며 사는, 그저 그렇게, 기다리기만 하며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의 삶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 막연한 무엇이 바로 ‘고도’라는 것인비다. 그러면 고도란 무엇인가? 벡케트는 2차 세계대전때 나치스에 항거하는 레지스탕스에 가담하였다가 발각이 되어 독일 나치스에 쫒겨 숨어 지내고 있었습니다. 그는 전쟁이 끝나기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는 해방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딱 이것이다 라고 말할 수 없는 막연한 그 무엇을 작가는 기다리고 있었는데 그 무엇을 ‘고도’라고 말하였던 것입니다. 그러나 실상작가가 말한 고도는 “Gott” 하나님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위로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입니다. 시므온이 위로를 기다리듯 벡케트도 하나님의 위로 즉 메시야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 누구든지 메시야를 자신을 구원할 메시야를 기다리고 있는 것입니다. 불교의 가장 중요한 신앙이 미륵신앙인데 앞으로 세상을 구원할 부처님을 미륵불이라고 말합니다. 은진미륵이 잘 알려져 있습니다. 김제 금산사에 거대한 미륵불상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미륵신앙아 기독교의 메시야신앙에서 유래하였다는 것입니다. 메시야 신앙이 소승불교였던 불교에 영향을 주어 우리나라에서 원효대사가 대중화시켰던 것입니다. 미륵의 인도 산스클트어로 ‘메티아 Metteyya’라고 합니다. 우리나라는 오래 옛날부터 메시야를 기다리고 있었는데 아직은 잘 알지 못 하였던 때라 불교를 통해 메시야신앙을 키워왔던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나라에 복음이 전해진 후에 우리가 그토록 기다리던 메시야가 바로 예수그리스도임을 깨닫고 그동안 잘 못 믿어온 것을 알고 미륵 불교를 떠나 기독교에 귀의한 사람들이 많아 오늘에 이르렀다고 하겠습니다. 기독교가 부흥한 원인이 되기도 한 일입니다. 만일 기독교가 우리나라에 전해지지 않았다면 아직도 많은 사람들이 금산사 미륵불이 오기만을 기다리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면 어떤 사람이 하나님의 위로 곧 메시야를 만날 수 있을 것입니까? 시므온은 어떤 사람이었습니까? 성령의 사람이었습니다. 본문 25-35절에 성령이란 단어가 총 3번 나타나는데 그 3번이 다 시므온과 관련되어 나타나고 있습니다.

25절에서 "성령이 그 위에 계시더라" 이렇게 되어 있고

26절에서 "성령의 지시를 받았더니" 이렇게 되어 있으며

27절에서 "성령의 감동으로 성전에 들어가매.."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그는 율법학자였습니다. 그는 경건하고 의로운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그는 성령의 사람이었습니다. 성령께서 시므온의 모든 생각과 모든 삶을 통제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는 성령의 지시대로 움직이고 어쩌면 지금 성전에 들어갈 아무런 이유도 없고 그런 계획도 없었지만 성령의 감동으로 성전에 들어갔던 것입니다. 그런데 더 중요한 것은 어떻게 그가 늘 성령과 함께 있을 수 있었던 것인가? 그 까닭은 오직 그리스도를 보기 전에는 죽지 아니하리라!는 확고한 믿음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메시야는 꼭 오실 것이다 내 생전에 메시야는 꼭 오실 것이니 그때까지 죽지 않고 기다릴 것이다란 확고한 기다림의 믿음이 있었기 때문에 그는 성령으로 성령과 함께 살면서 성령 충만한 가운데 기다리고 있었던 것입니다. 예수님의 비유말씀가운데 등불을 켜고 신랑오기를 기다리는 슬기로운 열 처녀와 같았습니다.

기다림이 없는 사람은 성령과 함께 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기다림이 있는 사람은 언제나 성령과 함께 살며 성령에 의해 활동하게 됩니다. 왜? 서영께서 그 기다림을 이루어 주실것임을 믿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바라는 일은 사람마다 다 다르다고 하겠습니다. 그러나 그 바라는 것이 하나님이 이루워 주실 것이라는 믿음을 가지고 늘 성령충만한 가운데 성령의 인도하심 따라 기다리면 마침내 하나님의 위로를 받게 될 것입니다. 구원을 얻게 될 것입니다. 은혜와 축복을 받게 될 것입니다. 소원을 이루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마침내 그 소원이 성추되는 날 난 이제 죽어도 여한이 없습니다. ‘눈크 디미티스’라고 말하게 되는 그 날이 있을 것입니다.

 

존 콜트레인이란 재즈 색소폰 연주자가 있습니다. 그는 한때 마약에 취하여 타락한 생활을 하다가 예수님을 만난후 새로운 삶을 살게 되었습니다. 회심한 그는 최대의 째즈연주가로 사람들에게 알려지게 되었는데 그의 최고의 대표곡이 ‘최고의 사랑(A Love Supreme)’을 연주할 때 수많은 청중들이 그에게 환호성과 박수를 보냈습니다. 이때 콘트레인은 무대에서 내려오면서 큰 소리로 ‘눈크 디미티스’ ‘주여 이제는 나를 놓아 주소서, 죽어도 여한이 없습니다.’라고 외쳤다고 합니다. 콜트레인이 자신의 영혼을 다 쏟아 최고의 연주를 한 후에 시므온과 같은 고백을 하였습니다. 그것은 생명보다 더 소중한 진리를 발견한 사람만이 말할 수 있는 감사의 고백인 것입니다. 이처럼 성령과 함께 믿음으로 산 사람만이 메시야를 만나고 주님으로부터 놀라운 은혜를 체험하고 나의 달려갈 길 다간 사람이 말할 수 있는 고백 헬라어로 ‘아폴뤼오! 라틴어로 디미티스! 우리말로 놓아주소서! 이제야 인생이 무엇인지 진리를 보았다라고 고백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 고백이 저와 여러분의 고백이 되기를 바랍니다.

 

오늘 이처럼 시므온의 노래 눈크 디미티스에 대해 말씀드린 이유가 있습니다.

우리 일반적으로 개신교회에서는 지키지 아니합니다만, 세계 기독교회 3분의 2가 지키는 절기로서 오늘이 예수님의 봉헌 주일(Feast of the Presentation of the Lord)인 것입니다. 성공회에서는 그리스도의 성전 봉헌절로, 그리스 교회에서는 예수가 시므온과 성전에서 만난 것과 관련하여 히파판테(만남절)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4세기 후반 순례자 에테리아가 예수공현 축일 후 40일째인 2월 14일 주님 봉헌 축일 축제에 참가하고 〈에테리아 순례기〉에 기록한 것이 첫 기록이었습니다. 542년 유스티니아누스 1세는 주님 봉헌 축일을 크리스마스로부터 요셉과 마리아가 예루살렘 성전에 올라가서 아기 예수님을 하나님께 바친 그 40일째 날인 2월 2일로 지정하였고. 서방교회는 교황 세르기우스 1세(687~701 재위)가 로마에서 이 축일을 제정하였습니다. 이처럼 2월 첫 주일을 세계의 많은 교회들이 이날에 예수님을 봉헌한 것처럼 오늘 우리도 우리 자신을 하나님께 드리는 주일로 지킬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또한 시므온이 아기 예수님을 안고 “이 방을 비추는 빛이요”라는 말씀에 따라 천주교인들, 정교회신도들, 성공회와 루터교 교인들이 일년동안 집안에서 킬 초를 가지고 와서 축복기도를 받는 봉촉일입니다. 이 봉촉일에 교인들은 우리도 세상을 비추는 빛이 되자는 다짐을 함께 한다고 합니다. 우리가 따라야할 교회의식이기도 합니다.

우리 라온 코이노니아는 예수님을 만나 세상의 빛으로 살아가기를 원합니다. 우리도 성령충만하여 시므온 제사장처럼 언제나 예수님과 함께 살아가는 복된 인생이 되기를 바랍니다.

이번 설날에 하나님의 은헤와 축복이 우리 모든 가정 가족들 위에 함께 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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