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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병호목사의 교회이야기

전병호 목사의 설교



2019년 10월 20일  주일아침예배  눅 8:40-50   The House Of The Rising Sun

 

 

영국에서 비틀스라는 록그룹이 한창 인기를 끌던 시절, 그들과 못지않게 인기를 끌었던 The Animals 라는 록밴드 그룹이 있었습니다. 그들의 가장 유명한 노래가 1964년 발표된 The house of the rising sun 이란 노래를 발표하였습니다. 저도 대학시절 이 노래를 흥얼거리고 다닌 적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가사가 퇴폐적이란 이유로 한때 미국에서도 금지곡이되었어고 1970년대 우리나라에서도 금지곡이 되었던 노래입니다. 그러나 가사에 이런 내용이 있다고 하지만 ‘해 뜨는 집“이란 긍정적 제목을 보아 해석하기 나름입니다. 가사를 보겠습니다.

 

(There is a house in New Orleans,

they call it Rising Sun.

And it's been the ruin of many a poor boy,

and God, I know I'm one.

 

My mother was a tailores

sewed my new blue jeans.

My father was a gamblin' man

down in New Orleans.

 

Now the only thing a gambler needs

is a suitcase and a trunk.

And the only time he'll be satisfied

is when he's down and drunk.

 

Oh mother tell your children

not to do what I have done

spend your lives in sin and misery

in the House of the Rising sun.

 

Well I've got one foot on the platform

the other foot on the train.

I'm going back to New Orleans

to wear that ball and chain.

 

There is a house in New Orleans,

they call it Rising Sun.

And it's been the ruin of many a poor boy,

and God, I know I'm one.

 

 

뉴올리언스에 집이 한 채 있어요. / 사람들은 해 뜨는 집이라 불렀어요.

그 집은 수많은 불쌍한 소년들이 / 파멸하게 된 곳이었어요.

하나님, 나도 그 소년들 중 한 사람인걸 알아요.

나의 어머니는 재단사였고, / 내게 새 청바지를 만들어 주셨어요.

뉴올리언스에서 나의 아버지는 도박꾼이었어요.

지금 아버지에게 필요한 것은 / 단지 슛케이스와 트렁크 뿐.

그리고 그가 유일하게 만족했었던 때는 / 술에 만취했을 때이었어요.

오..어머니 당신의 자식들에게 말해주세요. / 해 뜨는 집에서 죄를 저지르며

비참하게 살아왔던 나와 같은 삶을 살지 말라고.

한쪽 발은 플랫폼에 다른 한쪽 발은 기차에 딛고서.

그 속박과 굴레의 뉴올리언스로 돌아가고 있어요.

뉴올리언스에 집이 한 채 있어요. / 사람들은 해 뜨는 집이라 불렀어요.

그 집은 수많은 불쌍한 소년들이 / 몰락하게 된 곳이었어요.

하나님. 나도 그 소년들 중 한 사람인걸 알아요.)

 

 

“뉴올리언스에 집이 한 채 있어요. / 사람들은 해 뜨는 집이라 불렀어요.

그 집은 수많은 불쌍한 소년들이 / 파멸하게 된 곳이었어요.

하나님, 나도 그 소년들 중 한 사람인걸 알아요.“

 

어떤 사람들은 노래 가사에 나오는 해 뜨는 집이 교도소라고도 말하고, 창녀들의 집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애니멀스들이 어떤 의미로 불렀는지 모르지만, 저는 노래 가사에 나오는 주인공이 살고 싶은, 결코 몰락의 집이 아닌 해 뜨는 집에 살고 싶은 이상향의 집을 그리워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가난하고 비참한 불우하였던 어린 시절을 보낸 주인공이 해 뜨는 집을 그리워하며 하나님께 기도하는 내용이라고 노래 가사를 해석해 봅니다. God, I know I’m one. “하나님 나는 그들 중 한 사람이예요,”는 “하나님, 나는 진정 해 뜨는 집에 살고 싶은 아이들 중의 한사람입니다.”라고 해석해 보고 싶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생각하고 있는 그런 퇴폐적인 노래는 아니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저는 이 가사를 이렇게 바꿔 부릅니다.

군산시 나포에 가면 신성리에 집이 한 채 있어요

사람들은 그 집을 해뜨는 집이라고 불러요

그 집에 많은 새들이 날라와요, 많은 꽃들이 철마다 피어요,

가을이면 발갛게 익어가는 감들이 주렁주렁 열리는 감나무도 몇구루 있어요.

하나님, 아내와 딸과 함께 저도 살고 있어요.

 

그리고 저는 우리 라온코이노니아 성도들의 모든 집이 다 해 뜨는 집이 되기를 바라며, 그래서 오늘 설교제목을 해 뜨는 집이라고 정하였습니다.

 

고종황제의 손자인 이석(李錫 1941- 고종황제의 아들 의친왕의 10번째 아들 전주대학교 사학과 객원교수)씨가 1969년 부른 ‘비들기 집’이란 노래가 있습니다. 역시 제가 좋아하던 유행가입니다. 그 가사가 맘에 쏙 들었기 때문입니다.

 

(비둘기처럼 다정한 사람들이라면/ 장미꽃 넝쿨 우거진/ 그런 집을 지어요

메아리 소리 해맑은/ 오솔길을 따라/ 산새들 노래 즐거운 옹달샘터에

비둘기처럼 다정한 사람들이라면 / 포근한 사랑 엮어갈/ 그런 집을 지어요

 

비둘기처럼 다정한 사람들이라면/ 장미꽃 넝쿨 우거진/ 그런 집을 지어요

메아리 소리 해맑은 / 오솔길을 따라/ 산새들 노래 즐거운 옹달샘터에

비둘기처럼 다정한 사람들이라면 / 포근한 사랑 엮어갈 / 그런 집을 지어요

 

비둘기처럼 다정한 사람들이라면 / 장미꽃 넝쿨 우거진 / 그런 집을 지어요

메아리 소리 해맑은 / 오솔길을 따라 / 산새들 노래 즐거운 옹달샘터에

비둘기처럼 다정한 사람들이라면 / 포근한 사랑 엮어갈 / 그런 집을 지어요

그런 집을 지어요)

 

비둘기처럼 다정한 사람들이라면/ 장미꽃 넝쿨 우거진/ 그런 집을 지어요

메아리 소리 해맑은/ 오솔길을 따라/ 산새들 노래 즐거운 옹달샘터에

비둘기처럼 다정한 사람들이라면 / 포근한 사랑 엮어갈/ 그런 집을 지어요

 

제가 이 노래를 즐겨 부르며 장차 이런 집에서 살리라는 꿈을 가졌었습니다. 그리고 그 꿈이 50년 만에 이루진 집이 지금 살고 있는 신성2길 20번지 해 뜨는 집입니다.

어째 저의 집 뿐 이겠습니까? 사람들은 자신들의 집이 비들기 집처럼, 평화롭고 행복한 해뜨는 집이길 바랍니다. 그러나 많은 집들은 어둠에 휩싸여 슬프고 가슴 아픈 사연들로 가득한 집들 또한 많이 있습니다.

 

그중의 한집이 오늘 봉독한 누가복음의 회당장 야이로의 집입니다.

가버나움의 야이로 회당장이 예수님을 찾아와 예수님의 발아래 엎드려 자신의 12살 난 딸이 죽어가니 제발 자기 집에 오셔서 고쳐달라고 부탁을 합니다. 얼마나 간절하였으면 회당장이 예수님 발아래 엎드렸겠습니까? 당시 회당장은 유다사회에서 신분이 높은 사람입니다. 가버나움 회당을 맡아 주관하는 유대교의 지도자 일 뿐아니라 사람들의 재판을 주도하고 일상생활을 자문해주는 존경받는 위치에 있었던 사람입니다. 그런 사람이 자신의 하나 뿐이 딸이 병들어 죽어가자 예수님께 달려와 체면불구 사정을 하고 있습니다.

 

7장 1절 이하를 보면, 가버나움의 백부장이 사랑하는 종이 죽어갈 때, 예수님에 대한 소문을 듣고 마을 유지인 장로 몇 사람을 예수님께 보내었습니다. 장로들은 예수님께 백부장에대해 소개하기를 유대인들을 매우 사랑하고 회당을 지어주었다고 말합니다. 예수님이 그들의 말을 듣고 백부장의 집으로 가던 중에 백부장은 사람을 보내어 직접 오실 것이 없이 말씀만하시면 내 종이 나을 줄 믿는다는 말을 합니다. 그리고 갈릴리 지역 여러 곳을 다니면 복음을 전하시고 다시 가버나움으로 들어오실 때 회당장 야이로가 찾아 온 것입니다. 그러닌까 7장에서 말씀하였듯이 백부장이 지어준 회당을 책임맡은 장로로 아마도 백부장의 부탁을 받아 예수님을 찾아온 장로중의 한 사람이였던 것입니다. 당시 예수님이 말씀만으로 백부장의 하인을 고쳐주신 장면을 목격한 터이기에 회당장 야이로는 이번에는 자신의 병든 딸을 구해달라고 예수님 앞에 엎드려 부탁을 하였던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기꺼이 야이로의 집으로 가시었습니다. 야이로에게는 금이야 옥이야 사랑받는 12살 외동딸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어느날 부터인가 이 딸이 시름시름 아프기 시작하였습니다. 처음에는 가벼운 병이라 생각하고 동리 의원에게 보여 치료를 받아 왔는데 이젠 더 이상 손 쓸 틈이 없이 급격히 병세가 나빠지기 시작하였습니다. 그야말로 어둠이 온 집안에 가득하게 되었습니다. 어느 구석에도 기쁨이란 찾아 볼 수 없게 되었습니다. 슬픔과 절망으로 야이로와 딸의 엄마는 어찌할 주 모르던 중에 야이로의 가슴에 섬광같이 한 희망의 빛이 번쩍 비추어진 것입니다. “그래 예수님이 계시지 그분이라면 내 딸을 고쳐 주실 것이야. 지난번에 백부장의 하인도 말씀으로 고쳐주시지 않았는가 내 딸로 고쳐주실 것이다.” 그런데 예수님이 어디 게시지? 알아보니 예수님이 이곳저곳 다니시는데 지금은 어디에 계시는지 알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애간장을 태우며 예수님을 찾던 중에 아! 예수님이 가버나움으로 들오고 계신다는 소식을 듣고 하시가 급한 야이로는 예수님에게로 달려 갔던 것입니다. 캄캄한 어둠 가득한 집이 해뜨는 집이 되기 위해 해뜨기만을 기다려서는 안됩니다. 동쪽의 산위로 태양은 매일 같이 떠오르지만, 어둠이 가득한 우리들의 인생을 환하게 비출 태양은 우리가 마음을 열고 그 해를 내 마음으로 맞아 들여야 하는 것입니다. 내 가슴을 덮고 있는 검은 휘장을 걷어내고 해감이 밝은 예수님을 맞이해야 하는 것입니다. 제가 초등학교 2학년 겨울 어느 날 급성폐렴으로 죽어가고 있었습니다. 의사가 왕진하여 진찰했지만 열이 42도를 오르락내리락 하며 치료할 때가지나 아마도 오늘 밤을 넘기기 어려울 것이라는 말을 하고 의사는 돌아갔습니다. 이제 우리 집은 캄캄한 장마그로 덮여있게 되었습니다. 이제 마지막 희망은 오직 예수님께 병호를 맡기는 것뿐임을 아신 부모님은 아보님은 교회에서 어머님은 제 옆에서 꿇어 엎디어 하나님께 기도하시기 시작하였습니다. 눈물을 흘리시며 밤새 기도하시던 어머니께서 죽은 듯이 누워 있던 병호의 입에서 ‘엄마 물’ 하는 소리를 듣게 되었습니다. 그 순간 우리 집에 해가 떠오르기 시작한 것입니다. 해 뜨는 집이 된 것입니다.

그런데 야이로 회당장은 엄청난 슬픈 소식을 듣게 되었습니다. 예수님 모시고 희망에 찬 발걸음으로 집으로 가는 도중에 한 사람이 집으로부터 달려오더니 당신 딸이 방금 죽었으니 예수님이 오실 필요가 없다는 말을 하는 것입니다. 그야말로 청천벽력도 유분수지 이럴 수가 한순간에 희망은 날아가 버리고 죽음의 슬픔이 야이로의 가슴에 가득하였습니다. 아! 예수님이 조금만 빨리 가시었다면 딸이 죽지 않았을 것인데, 그만 예수님이 12년 혈루증 걸린 여인을 고치신다고 지체하시다가 그만 시간이 늦게 되었으니 이 야속한 마음 어찌할꼬, 야이로는 탄식한들 아이는 죽고 말았으니 아픔이 가슴을 에이는듯 하였습니다.

회당장 야이로의 집은 이제 초상집이 되어 울음소리가 가득하였습니다. 큰 슬픔이 온 집안에 가득하였습니다. 영원히 해가 뜨지 않을 것 같은 어둠이 가득하였습니다. 온 동리에 소문이 퍼져 사람들이 회당 집으로 조문을 오고 함께 슬픔의 눈물을 흘리고 있었습니다.

이제 예수님은 필요 없게 되었습니다. 이제 초상집에 조문하러 가실지언정 병자는 이미 죽어버렸으니 예수님인들 어찌할 수 없게 된 것 아닌가 회당장 야이로는 예수님에게 그만 돌아가시죠?하고 말하였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뜻밖이 말씀을 하시었습니다. “두려워하지 말고 믿기만 하라. 그리하면 딸이 구원을 얻으리라.(메 포부, 모논 피스튜손, 카이. 소데세타이 勿懼 惟信 則女必得生)” 누가는 마가에는 없는(막 5:36) '구원을 얻으리라(소데세타이: 병에서 회복될것이다)'는 약속을 첨가시키고 있습니다. 야이로는 “딸아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으니 평안히 가라(눅8:48)”고 말씀하신 예수님에 의해 혈루증 여인이 치유되는 것을 목격했을 때만 해도 자신의 딸이 고침 받을 수 있을 것이라는 희망을 가졌었습니다. 그러나 딸이 죽었다는 소식을 듣게 되자 희망은 사라지고 깊은 절망의 나락으로 떨어져 버렸습니다. 그의 믿음 또한 함께 사라져버렸습니다. 그러나 “두려워하지 말고 믿기만 하라.”는 예수님의 말씀은 어떤 경우에라도 희망을 잃지 말라는 것입니다. 희망을 잃어버리지 않을 능력은 오로지 믿음(惟信)에 있다는 것을 말씀해 주십니다. 야이로가 처음 예수님을 찾아왔을 때 가졌던, 예수님 발 앞에 엎드려 딸의 치유를 바랐을 때 가졌던 그 믿음, 그 첫 믿음을 가지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모든 기독교인들이 가져야할 그 믿음인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세월이 지나갈수록 그 첫 믿음을 잃어버립니다. 다만 형식적인 믿음만 있을 뿐입니다. 최태용목사님은 이런 믿음을 古木化된 믿음, 死殼化된 믿음이라고 말하였습니다. 예수님이 원하시는 믿음은 始終如一한 믿음입니다. 이랬다저랬다 變化無雙한 그런 믿음은 기독교의 믿음이 아닙니다. 만화경(kaleidosope)이란 것을 아시죠? 눈에 되고 돌려7 보면 모양이 이리저리 변화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처럼 사정에 따라 환경에 따라 장소와 시간에 따라 바뀌어 지는 믿음을 kaleidoscopic faith라고 합니다. 그런 믿음은 기독교의 믿음입니다. 기독교의 믿음은 ‘오로지 믿음’입니다. 기독교의 역사를 보더라도 우리는 모든 것을 잃어버린 것같이 뵈는 상황에서도 믿는 자들이 하나님을 믿음으로써 구원을 받았던 사실을 수없이 발견할 수 있습니다.

 

사26:4에 “너희는 여호와를 영원히 신뢰하라(爾當賴主 至於永遠) 주 여호와는 영원히 반석이심이로다.”라고 말씀하였습니다. 이는 상한 갈대도 꺾지 않으시며 꺼져가는 심지도 끄지 않으시는 하나님이심을 믿는 믿음입니다.(사 42:3). 해 뜨는 집에는 비밀의 방이 있습니다. 무슨 방입니까? 바로 오로지 믿음이란 방, 惟信之房입니다. ‘오로지 믿음’의 방이 없는 방은 언제나 슬픔과 고통의 장막이 처져 있는 깊고 어두움이 가득한 방이 되어 있을 뿐입니다. 지금 방금 야이로가 자신의 가슴에 치려하였던 절망의 커틴을 예수님은 무슨 말이냐 ‘믿기만 하라(惟信)’ 하시며 한 말씀으로 거두어 버리시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앞장서시어 야이로의 집안으로 들어가시었습니다. 울고 있는 사람들에게 “아이는 죽은 것이 아니라 잔다.”라고 말씀하시니 사람들이 무슨 소리냐 하며 예수님의 말씀에 비웃었습니다.

 

마9:23,24의 말씀을 보면 “예수께서 그 관리의 집에 가사 피리 부는 자들과 떠드는 무리를 보시고 이르시되 물러가라 이 소녀가 죽은 것이 아니라 잔다(非死寢耳) 하시니 그들이 비웃더라 ” 예수님의 죽음에 대한 견해는 “죽음은 인생의 끝이 아니라, 다시 일깨워지는 것이다.”는 것을 의미하여 잔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이 예수님의 말씀을 당시 사람들은 알아듣지 못하고 비웃었다. 우리는 이것을 알아야 합니다. 믿음의 역사는 사람들에게 비웃음을 받을 때가 있습니다. 그것을 탓할 이유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믿음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사탄은 항상 예수님 주변에 모인 사람들에게 들어가 예수님을 비웃도록 하였듯이 지금도 사단은 여전히 믿는 자들을 비웃도록 획책(劃策)하고 있으니 그러므로 사람들이 비웃는 다고 우리의 믿음이 위축(萎縮)되어서는 아니 됩니다. 예수님은 베드로와 요한과 야고보를 데리고 아이가 죽어 누워있는 방으로 들어갔습니다. 그 방은 햇빛이 들어오지 못하도록 검정 커틴을 처서 방안이 매우 어두웠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아이를 향하여 “헤 파이스 에게이레(소녀여, 일어나라).” 그런데 막5:41에는 “탈리다 쿰”이라고 말씀하시었습니다. 누가복음의 말은 헬라어입니다. 마가복음의 말은 아람어입니다. 예수님 시대 이스라엘 사람들은 아람어를 썼기 때문에 예수님은 “탈리다 쿰”이라고 말씀하셨을 것입니다. 누가복음은 비 유대인들 즉 헬라어를 말하는 이방 사람들에게 복음을 알려 주기 위해 기록한 말씀이기 때문에 아람어를 헬라어로 번역하여 “헤 파이스 에게이레”라고 썼다고 하겠습니다. 소녀는 일어났습니다. 마가복음에서는 아이가 걸었다고 하였습니다. 사람들에게 아이에게 먹을 것을 주라고 말씀하시었습니다. 죽음이 생명에 삼킴바 되었습니다. 빛이 어둠을 삼켜버렸습니다. 절망과 슬픔이 가득한 야이로 회당장의 초상집이 잔치집으로, 해뜨는 집으로 예수님께서 바꿔주셨습니다.

 

성경을 보면 하나님을 믿었던 사람들의 집들이 모두 해 뜨는 집으로 바꿔진 모습들을 보게 됩니다. 구십 살이 되도록 자식을 못 보던 사라의집에 경사가 났습니다. 이삭이 태어났던 것입니다. 죽었다고 슬픔으로 세월을 보내던 야곱이 아들 요셉이 애급의 총리대신으로 나타날 때 그 기쁨은 말로다 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슬픔을 가득안고 고향으로 돌아온 나오미는 며느리 룻이 보아스와 결혼하고 오벳이란 손자를 품에 않았을 때에 그 기쁨은 하늘을 날아가듯 하였습니다. 모든 재산을 다 잃고 자식마저 죽어버려 인생의 절망 끝에 앉았 있었던 욥은 몇 배의 축복을 받게 되었습니다. 복음서에 예수님을 만났던 수많은 병자들이 모두 치유 받고 회복되어 집으로 돌아갔습니다. 기독교는 무엇을 우리에게 전해줍니까? 누든지 예수를 나의 구주로 영접하면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된다는 것입니다. 무엇을 우리에게 알려 줍니까? 예수를 믿으면 어둠이 사라지고 해 뜨는 집으로 변화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기독교는 무엇을 깨닫게 해줍니까? 행복은 저 산 너머에 있는 것이 아니라 오늘 예수님을 믿으면 이미 우리에게 행복이 여기에 와 있다는 것을 깨닫게 해 줍니다. “두려워 마십시오. 믿기만 하십시오. 그러면 우리들의 집이 모두 해 뜨는 집이 될 것입니다.”

 

라온코이노니아 가족여러분의 집에 그 어떤 근심이 있다면 이 시간 주님을 통해서 해 뜨는 집이 되시기 바랍니다. 어둠이 사라지고 집안에 드려진 장막이 벗겨지고 사랑과 기쁨이 가득한해 뜨는 집이 되시기 바랍니다. 탈리다 쿰일고 말씀하신 우리 주님이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그 고난의 자리에서 일어나라, 그 슬픔의 자리에서 일어나라, 그 아픔의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라.”

 

저와 여러분의 집이 언제나 하나님이 복주시는 ‘해 뜨는 집’이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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