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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병호목사의 교회이야기

전병호 목사의 설교



2019년 10월 13일 주일아침 예배 욥 13:20-28 秋聲復禱

 

 

220여 년 전에 활동 하였던 조선 최대 화가인 단원 김홍도(1745-1806?)가 그린 <추성부도(秋聲賦圖)>라는 그림이 있습니다. 아마도 세상 떠나기 1년 전 그러닌까 김홍도가 마지막으로 그린 그림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추성부도(秋聲賦圖)〉 그림에는 산속에 작은 초가집이 그려져 있고 그 집 달창을 사이로 두고 밖에 서 있는 동자가 팔을 펼쳐 안에 앉아있는 선비에게 뭔가를 설명하는 모습이 그려져 있습니다. 〈추성부도〉 그린 오른쪽에 그 내용이 적혀 있습니다. 선비와 동자가 문답을 주고받게 된 시초는 이렇습니다. 밤이 되어 책을 읽으려는데 서남쪽에서 소리가 들립니다. 두려운 마음으로 귀 기울이는데 들을수록 이상했습니다. 처음에는 빗소리이다가 바람 소리더니, 갑자기 폭풍우로 쏟아지는 듯하다가 뭐에 부딪치는지 쇠붙이들이 한꺼번에 울리는 소리가 났습니다. 동자를 불러 무슨 소린지 알아보라고 하자 나갔다 돌아온 동자의 답은 이러했습니다. “별과 달이 밝고요. 하늘에는 은하수가 걸려 있고요. 어디서도 사람 소리는 안 들려요. 그러니 이 소리는 나무숲에서 나는 것이지요.”그 말에 선비는 깨닫습니다. 자신을 그토록 놀라게 한 것은 가을의 소리였던 것입니다. 그러고 보니 집 주변의 많은 나무에는 가랑잎 몇 개만 달려 있을 뿐입니다. 본래 이 글은 중국 북송대의 문인 구양수가 지은 <추성부>의 글을 적은 글입니다. 가을밤 소리에 대한 묘사가 하도 수려하고 생생해서 중국뿐 아니라 조선에서도 명문으로 꼽힙니다. 〈추성부〉는 ‘어허! 슬프도다! 이는 가을의 소리구나. 어이하여 왔는가?(噫嘻悲哉!此秋聲也 胡爲而來哉?억희비재 차추성야 호위이래재)’라는 自問으로 끝을 맺는데요. 그 가을의 소리를 묘사한 구절이 絶唱입니다. 저는 이 추성부도라는 한자에서 ‘부도 賦圖’가 아닌 ‘부도 復禱’로 ‘기도를 회복하다, 다시 기도하다’란 의미로 가을은 기도하는 계절이란 의미로 오늘의 말씀의 제목을 정하였습니다.

 

김현승시인에게서 가을의 기도의 기도소리를 듣습니다. “가을에는 / 기도하게 하소서 / 낙엽들이 지는 때를 기다려 내게 주신 / 겸허한 모국어로 나를 채우소서 / 가을에는 / 사랑하게 하소서 / 오직 한 사람을 택하게 하소서 / 가장 아름다운 열매를 위하여 / 이 비옥시간을 가꾸게 하소서 / 가을에는 / 호올로 있게 하소서 / 나의 영혼 / 굽이치는 바다와 / 백합의 골짜기를 지나 / 마른 나뭇가지 위에 다다른 까마귀같이.

이 시는 가을을 맞이하여 하나님 앞에 홀로 서있는 단독자로서 엄숙하고 경건하게 기도하는 자신을 고백하고 있습니다. 1연에서 시인은 가을이 인생의 저무는 시간으로 이제 남은 시간에 할 수밖에 없는 일은 기도하는 일임을 말하고 있습니다. 2연에는 인생의 마지막 시간에 남은 일은 사랑밖에 없음을 말하고 있습니다. 3연에는 가을에는 조용히 인생의 마지막을 바라보며 조용히 홀로 남은 시간을 맞이하는 일임을 말하고 있습니다. 시인은 오랫동안 역경을 헤쳐와 하나님의 영광의 시간에 이르게 되었음을 말하고 있습니다. 기도하게 하소서. 사랑하게 하소서, 조용히 홀로 있어 지난 시련의 세월을 지나 평화롭게 인생의 마지막을 맞이하게 하소서라고 기도하고 있습니다.

저는 아침에 일어나면 먼저 하는 일은 바로 낙엽을 쓰는 일입니다. 붉게 물든 그런 낙엽이 아닙니다. 벌레가 숭숭 먹은 누렇게 병색이 완연한 결국 나무에서 떨어질 수밖에 없어 더 이상 나무에 매달릴 힘이 없어 떨어진 낙엽들입니다. 어느 봄날 멋진 꿈을 키우듯 나무 가지에 파릇파릇 솟아났던 나뭇잎이었습니다. 여름 한때는 무성한 잎을 바람에 휘날리며 멋지게 춤을 추었습니다. 그러나 어디선가 벌레들이 공격해 오면서 나무 잎을 갉아먹기 시작하였습니다. 나뭇잎들은 속절없이 당하기만 하였습니다. 가끔 제가 벌레들을 잡아주었지만 결국 저는 손을 들었습니다. 나뭇잎은 점점 병들어가고 누렇게 변색되어 갔습니다. 그러나 가을이 오기까지 버티었습니다. 그리고 가을 어느 날 밤비가 내리는 한 밤중에 나뭇잎들은 힘없이 떨어져 내렸습니다. 아침에 마당에 나가보니 빗물에 젖은 나뭇잎들이 땅바닥에 젖은 채 붙어 있었습니다. 모든 게 제 탓이라, 제가 제대로 지켜주지 못하였기 때문이라, 이처럼 낙엽들이 벌레먹어 떨어졌구나 자책하였습니다. 저는 빗자루로 그들을 쓸어 내며 인생도 이와 같다고 생각하였습니다. 우리가 어린 시절에 얼마나 인생의 아름다운 꿈에 부풀어 있었는지 모릅니다. 돌이켜 보면 울긋불긋 봄 동산의 꽃들처럼 꿈들을 피웠습니다. 그러나 여름 인생은 다만 풍성하지만은 않았습니다. 온갖 비바람에 시달리며. 돈에 시달리고, 질병에 시달리고, 인간관계에 시달리고, 미움과 시기와 다툼과 분쟁에 시달리며 몸과 마음이 시들어 갔습니다. 때로는 낙심과 절망에 몸이 지치고 마음이 녹아내린 때도 있었지요. 너무나 마음이 아파 더 이상 살 희망을 잃어버린 때도 있었지요. 희망을 말하는 사람들의 말이 아련히 멀리서 모기소리처럼 드려올 뿐이요 일어서기조차 힘들어 삶의 줄을 놓고 싶었던 때도 있었지요. 그리고 아니 벌써, 인생의 가을이 깊어졌구나! ‘噫嘻悲哉라!’ 탄식하며 낙엽 따라 가버리는 인생을 슬퍼하기도 하였지요. 저는 마당에 떨어진 낙엽을 쓸어 내며 이처럼 가을의 소리를 들었습니다.

벧전 2:24에 “모든 육체는 풀과 같고 그 모든 영광은 풀의 꽃과 같으니 풀은 마르고 꽃은 떨어지되”라고 말씀하였습니다. 이 말씀은 이사야 40:6을 인용한 말씀입니다. “모든 육체는 풀이요, 그의 모든 아름다움은 들의 꽃과 같으니”라고 말씀하였습니다. 시103:15에도 “인생은 그 날이 풀과 같으며 그 영화가 들의 꽃과 같도다”라고 말씀 하였습니다. 이 말씀들은 한마디로 줄이면 ‘인생은 낙엽이다.’란 말씀입니다. 가을이 우리에게 들려주는 추성부 소리는 ‘인생은 낙엽이다’란 말입니다.

 

그런데 우리인생이 낙엽이라고 말하니 인생의 덧없음을 허무한 인생을 말씀드리려는 것이 아닙니다. 다만 인생의 한계를 말씀드리려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인생이 영원한 것처럼 생각합니다. 자신의 부귀가 영원하리라고 착각합니다. 자기의 권력이 무한하리라고 자만합니다. 자기가 낙엽 되리라는 것을 잊고 삽니다. 지금 정치권이 요동을 치고 국민들도 패가 갈려 논쟁들을 합니다. 언제까지 이런 혼란이 있을까요? 자신이 낙엽임을 망각한 사람들이 지금 치고 박고합니다. 아니 그들은 알고 있습니다. 그들의 논쟁의 시한이 내년 4월이면 끝난다는 것을. 그런데 내년 4월 그들의 정치생명이 끝나지 않고 계속되려는 욕망 때문에 나라가 어찌되던 민생이 어찌되던 상관하지 않습니다. 오직 조국한테 자신들의 정치생명줄이 달려 있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조국을 넘어트려야 다시 국회의원도 되고, 대통령도 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또 조국을 붙들고 있어야 정권을 계속 이어갈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내년 4월 총선에 자신들의 시한부 정치생명을 걸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동안 수많은 정치적인 풍랑을 헤쳐 왔습니다. 그리고 이 또한 지나갈 것입니다. This too,shall pass away...‘감 제 야보르(히)’ 오동잎 떨어지듯, 우수수 낙엽들이처럼 떨어질 이들을 우리는 볼 것입니다.

낙엽은 우리에게 인생은 유한하지 않다는 교훈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이 또한 가을의 소리입니다. 우리가 이 소리를 듣는 다면 우리는 인생 앞에 겸손해 질 것입니다. 겸손은 머리를 굽히는 것이 아닙니다. 나의 한계를 깨닫는 것입니다. 정치인들이 자신의 한계를 안다면 그렇게 머리털을 깍지 않을 것이고, 목사라는 사람이 태극기를 흔들며 헌금을 강요하지도 않을 것입니다. 서로 자신의 한계를 깨달은 사람들이 서로의 의견을 조율하고 양보하고 협의하여 더 좋은 세상을, 살맛나는 인생을 만들어 갈 것입니다. 그런데 아쉽지만 지금의 누구에게 그런 기대를 걸 수 있을까요? 전혀 할 수 없음은 병든 낙엽들을 보기 때문입니다. 병든 낙엽들은 빗자루로 쓸어 아궁이에 던져 태울 뿐입니다. 마3:12에 “쭉정이는 꺼지지 않는 불에 태우시리라”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시었습니다.

 

19세기 미국의 저명한 자연주의자인 헨리 D. 소로(Henry David Thoreau 1817생-1862 ‘시민불복종’)는 그의 명저 <월든>(전행선 역, 더클래시출판 2013 ‘Walden, or Life in the Woods 1854’ - Minimal Life 최소한의 것만으로 살아가는 삶. 불필요한 것을 버리며 사는 삶을 주장)에 이렇게 썼습니다. ‘오늘날 철학교수는 있어도 철학자는 없다. 철학을 가르치는 것도 존경할 일이지만 거기에 그쳐서는 안 된다. 철학자란 난해한 사상을 주장하는 것이 아니라, 지혜를 사랑하고 그 가르침에 따라 소박하고 독립적인 삶, 관용과 신뢰의 삶을 살아가는 것을 뜻한다. 그것은 인생의 문제를 이론적으로 또한 실천적으로 해결하는 것이다.’ 저는 이 말에서 정치인은 많이 있어도 정치가는 드물다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정치인은 자신의 명예와 권력을 탐하여 정치를 하는 권력지향자이고, 정치가는 국민들을 위해 섬기며 희생하며 servant reader 로서 보다 좋은 세상을 가꾸는 정원사 같은 사람입니다. 그런 정치가를 찾아보는데 제 눈이 근시라 잘 보이지 않습니다. 좀 더 말씀드리면 기독교인은 많이 있는데, 예수님의 제자는 별로 없다라고 하겠습니다. 주일이면 교회 나와 예배드리는 사람은 많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말씀 따라 순종하며 살아가는 사람은 많지 않습니다. 이 많은 사람들이 낙엽 따라 가버리고 이 적은 사람들이 겨울을 이겨 나갈 수 있다면 내년 4월에는 보다 아름다운 봄 동산을 맞이할 수 있을 것인데 과연 내년 봄에 그 아름다운 봄 동산을 볼 수 있을 런지요.

 

저는 낙엽을 쓸 면서 저에게 물어오는 가을의 소리에 귀를 기우렸습니다. 너는 과연 하나님의 말씀에 온전히 순종하면서 살고 있느냐? 너는 얼마나 열심히 하나님께 충성하며 살았느냐? 하나님이 나에게 준 하루하루 시간들을 얼마나 충실하게 살았는가? 네가 도와준 사람은 얼마나 되고 마땅히 도와야 할 사람들을 외면하지 않았는가? 사람들에게 아픔을 준일은 없는가? 얼마나 마음 아픈 사람들을 위로해 주고 그들을 일으켜 세워 준 일이 있었느냐? 사랑하며 살았는가? 겸손히 살았는가? 하나님의 말씀을 전한다고 하면서 공허한 말씀을 전하지 않았는가? 수많은 질문을 스스로 하면서 낙엽에 쓸어내듯 이 모든 부정한 나의 모습들을 함께 버려지기를 기도하였습니다. 저는 이런 기도를 하면서 일제 강점기 민족시인인 윤동주시인(1917-1945)의 “내 인생의 가을이 오면”이란 시가 생각났습니다. 이 시를 소개합니다.

 

< 내 인생에 가을이 오면 / 나는 나에게 / 물어 볼 이야기들이 있습니다.

내 인생에 가을이 오면 / 나는 나에게 / 사람들을 사랑했느냐고 물을 것입니다.

그때 가벼운 마음으로 말할수 있도록 / 나는 지금 많은 사람들을 사랑하겠습니다.

내 인생에 가을이 오면 / 나는 나에게 / 열심히 살았느냐고 물을 것입니다.

그때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도록 / 나는 지금 맞이하고 있는 하루하루를 /

최선을 다하며 살겠습니다.

내 인생에 가을이 오면 / 나는 나에게 / 사람들에게 상처를 준 일이 /

없었냐고 물을 것입니다. / 그때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도록 /

사람들을 상처 주는 말과 / 행동을 하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내 인생에 갸ㅏ을이 오면 / 나는 나에게 / 삶이 아름다웠느냐고 물을 것입니다.

그때 기쁘게 대답할 수 있도록 / 내 삶의 날들을 기쁨으로 아름답게

가꾸어 가야겠습니다.

내 인생에 가을이 오면 / 나는 나에게 / 가족에게 부끄러운 일이 없었냐고

물을 것입니다. / 그때 반갑게 말할 수 있도록 지금 좋은 가족의 일원이 되도록

가족을 사랑하고 효도하겠습니다.

내 인생에 가을이 오면 / 나는 나에게 / 이웃과 사회와 국가를 위해 /

무엇을 했느냐고 물을 것입니다. / 나는 그때 힘주어 대답하기 위해

지금 이웃에 관심을 가지고 / 좋은 사회인으로 살아가야겠습니다.

내 인생에 가을이 오면 / 나는 나에게 / 어떤 열매를 얼만큼 맺었느냐고

물을 것입니다./ 내 마음 밭에 좋은 생각의 씨를 뿌려 / 좋은 말과 좋은 행동의 열매를

부지런히 키워야 하겠습니다.

 

윤동주 시인은 27세 때 일본군에게 붙잡혀 생체실험의 희생자로 죽었습니다. 윤동주 시인은 그렇게 인생의 가을을 맞이하지 못 한 채 아니 인생여름도 못 본채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났습니다.

 

오늘아침 봉독한 욥기서 13:25에 “주께서 어찌하여 날리는 낙엽(헤알레 닉다프)을 놀라게 하시며”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욥은 스스로를 낙엽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원어는 ‘바람에 날리는 잎’입니다. 그것을 낙엽이라고 번역하였습니다. 그런데 어찌하여 낙엽 같은 나를 놀라게 하십니까? 하고, 하나님께 항의 하면서 간절히 두 가지를 기도합니다. 하나는 21절에서 ‘주의 손을 대지 마옵소서’이고, 두 번째는 22절에서 ‘나를 부르소서’입니다. ‘주의 손을 대지 말라’고 하였는데 원어는 ‘당신의 손을 나로부터 멀리하게 하옵소서!(캎페카 메알라이 하르하크; 힢 명령 2남 단)’입니다. 이 욥의 기도는 성숙한 신앙인의 기도는 아닙니다. 왜냐하면 그가 하나님을 믿었다면 하나님의 거룩하시고 의로우시고 진실하시고 사랑이 풍성하신 하나님이심을 확신했어야 합니다. 확신하였다면 이런 기도를 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욥은 지금 자기가 당한 고통이 순전히 하나님이 손을 데어 일어난 사건이라고 생각하였던 것입니다. 이것은 오해요 착각이요 불신앙입니다. 사람들은 자기에게 일어난 어려운 일들, 괴로운 일들을 하나님이 준 징벌이라고 생각을 합니다. 그런데 자기는 징벌 받을 만한 죄가 없다고 하면서, 왜 나에게 이런 징벌을 주십니까하고 하나님께 항의를 하고, 그래서 어떤 사람은 하나님을 떠나버립니다. 우리는 이것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벌주시는 분이 아니십니다. 벌주시는 하나님이라면 예수님으로 하여금 십자가를 지시도록 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하나님의 한량없는 은혜요 사랑의 증거입니다. 하나님은 독생성자를 아낌없이 세상에 내어주신 사랑의 하나님이십니다. 그 어떤 죄도 용서하시는 하나님 아버지이십니다. 그런 아버지 하나님을 의심하고 아버지 하나님께 불평한다면 이는 확실히 욥의 잘못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손을 나에게 치워주옵소서라는 망령된 기도를 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손은 어떤 손입니까? 하나님의 손은 구원의 손입니다. 사랑의 손입니다. 내가 넘어졌을 때 붙잡아 일으켜주시는 손입니다. 내가 병 들었을 때 나를 치료하시는 약손이십니다. 내가 실패하고 울고 있을 때 나의 눈물을 씻어주시고 위로와 용기를 북돋아 주시는 손입니다. 그런 손을 치워 달라고요? 이런 기도하는 욥은 지금 제정신이 아닙니다. 오히려 이럴 때 일수록 주의 손이 나를 붙들어 주옵소서라고 기도할 것입니다. 우리는 세상의 온갖 소리가운데, 이 가을에 드리는 ‘추성부도’ 하나님께 조용히 기도해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 나의 하나님 나를 불쌍히 여기시고 나를 붙들어 주소서. 내가 낙심하여 정신이 어지러우니 나에게 신선한 가을바람 같은 성령의 바람을 불어 새롭게 하옵소서”라고 기도 할 것입니다.

 

욥의 두 번째 기도는 “나를 부르소서. 내가 대답하리이다” 그리고 이어서 만일 나로 말하게 하시면 주께서 대답해주옵소서라고 기도합니다. 욥이 가슴 아픈 일은 터무니없이 친구들이 와서 위로를 한다고 하면서 오히려 욥의 마음을 바늘로 찌르듯이 더 아프게 하였습니다. 그래서 답답하여 미칠 것 같은 일은 하나님이 한 말씀도 하지 않으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내 병든 몸을 보시고 내 곤고한 심령을 아신다면 무어라고 한마디 하셔야 할 것 아닙니까? 위로의 말씀이라도, 힘내라는 격려의 말씀이라도 하실만 한데 이렇게 잠잠히 계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어디 먼데로 출타 하셨는가? 낮잠 주무시고 계신가? 아니면 나의 형편을 외면하고 모른척하고 계시는가? 욥은 왜 자기가 이런 고통을 당하고 있는지 하나님과 속 시원하게 대화를 하고 싶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으로부터 “욥아 나와 이야기 하자”라는 말씀주시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하박국서 1:2을 보면 하박국도 “여호와여 내가 부르짖어도 주께서 듣지 않으시니 어느 때까지리이까?”라고 말합니다. 'When God Doesn't Answer Our Prayer' 우리도 때로는 하나님의 침묵을 의아하게 생각할 때가 있습니다. 유태인들이 독일 포로수용소에서 온갖 고난을 당하고 죽임을 당할 때 많은 유태인들이 왜 하나님이 침묵하시는가? 하고 소리친 적이 있습니다. 일본 제국주의 시대 많은 애국지사들이 억압을 당하고 죽임을 당할 때 어째서 저 무도한 일본을 벌주시지 않으시고 침묵하십니까?하고 하나님께 불평하는 기독교인들의 기도도 있었습니다. 2차 세계대전 당시 나치독일의 포로수용소에 600만명의 유태인들이 학살되었을 때, 그들이 수감되었던 지하 감옥 벽에 손톱으로 그린 ‘다윗의 별’이 그려져 있었고 그 그림 밑에는 아래와 같은 글이 삭여져 있었습니다.

< 비록 태양이 우리에게 비쳐오지 않지만, / 저기 태양이 있는 것을 믿노라.

비록 사랑이 내게 느껴지지 않지만, / 저기 진실된 사랑이 있는 것을 나는 믿노라.

비록 하나님이 침묵 가운데 계시지만, / 나는 하나님이 살아 계심을 믿노라.

 

그렇습니다. 결론부터 말씀드리면, 1. 하나님은 창조 이래 침묵하신 적이 없으셨습니다. 2. 하나님은 침묵도 하지 않으실 뿐 아니라 오히려 전적으로 간섭하고 계십니다. 3. 천국의 문과 지옥문은 언제나 열려있다는 것입니다. 문제는 왜 하나님이 침묵하신다고 생각합니까? 이는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귀가 없다는 것을 말합니다. 주님은 언제나 들을 귀 있는 자가 들으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은 마치 수다스러울 정도 많은 말씀을 하시었는데 사람들은 자기 좋은 말씀만 골라 듣거나 아예 귀문을 막아 버리고 하나님은 침묵하신다고 하나님께 원망의 화살을 돌리는 것입니다. 이것을 알아야합니다. 성경은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 되는 하나님의 영원한 말씀입니다. 성경 안에는 수천 년 동안 들어도 못다 들을 하나님의 말씀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어디서나 언제나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수 있습니다. 전 세계에 수십만의 교회에서 수십만의 주의 종들이 말씀을 전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침묵하신다고요?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싶다면 당장 성경을 펴 보세요. 그리고 지금 당장 교회를 찾아가세요. 그러면 당신이 원하는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바로 당신 앞에 있는데 하루 온종일 주께서 나와 함께 계시는데 하나님이 침묵하신다고 원망하십니까? 오해입니다. 오해도 자주하면 죄입니다. 지금 하나님은 문재인 대통령의 말도 들으시고, 김정은 북한위원장의 말도 듣고 계십니다. 오늘의 남북간의 한국정세와 한일간의 무역분쟁과 미국중국간의 세력 다툼이 하나님의 코앞에서 벌어지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촛불시위냐 태극기부대의 시위냐 하나님은 이미 결론을 내리시고 계십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침묵하신다고 생각한다면 하나님을 무시하는 말입니다. 누가 의인이고 악인입니까? 의인을 모른 척 하신다고 원망합니까? 아니요 하나님은 그들의 길을 예비하고 계십니다. 악인을 내버려두신다고 생각합니까? 아니요? 하나님은 그들의 회개를 기다리고 계실 뿐입니다. 죤 낙스(스코틀랜드종교개혁자 1407-1572)는 “하나님의 수레바퀴는 천천히 돈다. 그러나 언제나 그 가루는 곱다”란 말을 하였습니다. 그러나 저는 ‘천천히slowly 돈다’라는 말을 ‘여전히always 돈다’라고 고치고 싶습니다. 하나님의 수레바퀴는 결코 천천히 도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수레바퀴는 천지창조 이래 언제나 제 속도로 돌고 있습니다. 사람들이 느리다 빠르다라고 생각하는 것은 사람들의 착각일 뿐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말씀은 어제나 들을 수 있고 우리 또한 언제나 하나님께 기도로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 가을에 우리는 ‘추성부도’ 하나님께 기도할 수 있어야 합니다. “시몬 너는 좋으냐? 낙엽 밟는 소리가(레미 드 구르몽 1892)”이란 시 구절이 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추성부도’, 여러분은 좋으십니까? 가을의 기도 소리가” 이 가을의 소리는 낙엽 밟는 소리가 아니라 바로 우리들의 기도 소리 이어야 하겠습니다.

 

우리 집 뜰에 있는 국화꽃들이 이제 꽃봉오리를 맺고 있습니다. 저는 이 국화꽃 봉우리들을 보면서 한 가지 의문을 가졌습니다. 다른 꽃들은 가을이면 다 져 버리는데 어째서 국화만은 아름다운 꽃을 피우는가? 벌 나비도 가을 추위에 몸을 움츠리고 날 기를 주저할 때, 오히려 한입 두입 낙옆이 떨어지는 그 나무 밑에서 오히려 국화는 더욱 푸르러 활짝 꽃을 피우다니. 봄부터 소쩍새가 울었다고 했던가요? 가을 향기를 맡을 수 있는 유일한 꽃향기가 바로 국화향기입니다. 인생의 고난과 역경을 지나오면서 온갖 풍상 속에 가을을 맞이한 가을인생들에게서 인생의 가장 아름답고 진한 향기를 맡게 됩니다.

 

우리 라온코이노니아는 특히 가을을 맞이한 성도들에게 가을의 향기가 납니다. 하나님이 그 향기를 기뻐하시어 ‘추성부도’ 우리의 가을의 기도를 들어주시니, 그 어느 때보다 지금은 기도할 때요 지금은 은혜 받을 때인 줄 알고 열심히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이 우리 모두에게 함께 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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