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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병호목사의 교회이야기

전병호 목사의 설교



2019년 9월 29일 주일아침예배 요 2:13-22 예수님의 분노

 

 

지금부터 218년 전 1791년 9월 30일 모차르트작곡 <마술피리>(혹은 마적(魔笛), 독일어: Die Zauberflöte, K. 620)라는 오페라가 모차르트 자신이 지휘로 초연되고 그후 100회가 넘게 상영되는 대 성공을 거두었습니다. 그러나 모차르트는 그해 12월 5일 세상을 떠납니다. 이 오페라 중에 밤의 여왕 아리아(Arie der Königin der Nacht)가 2막에서 불려 지는데 밤의 여왕이 복수심에 분노하며 딸에게 복수하라고 가압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그 부분의 가사를 잠시 소개하면 독일어 가사입니다. 아래와 같습니다.

 

Der Hölle Rache kocht in meinem Herzen,

Tod und Verzweiflung flammet um mich her!

Fühlt nicht durch dich Sarastro Todesschmerzen,

so bist du meine Tochter nimmermehr.

 

Verstoßen sei auf ewig,

verlassen sei auf ewig,

zertrümmert sei'n auf ewig

alle Bande der Natur.

wenn nicht durch dich Sarastro wird erblassen!

Hört, hört, hört, Rachegötter, hört, der Mutter Schwur!

 

지옥의 복수심이 내 마음에 끓어오르고,

죽음과 절망이 내 주위에 불타오르네!

네가 자라스트로가 죽음의 고통을 느끼게 하지 않는다면,

그러면 너는 더이상 나의 딸이 아니다.

 

영원히 의절하고,

영원히 저버리고,

영원히 부수리라

자연의 모든 인연을.

네가 자라스트로가 죽게 만들지 않는다면!

들어라, 들어라, 들어라, 복수의 신들이여, 들어라, 어미의 맹세를!

 

이 노래 중에 세계에서 이 아리아를 부를 수 있는 소프라노는 몇 손가락으로 꼽을 정도로 높은 옥타브의 노래입니다. 아 아 아 아하며 “고도의 테크닉을 자유자재로 구사하는 노래 실력을 발휘하여, 마치 플루트처럼 투명한 음색이 돋보이듯, 하늘을 찌를 듯이 높이 올라가는 여성 소프라노 '콜로라투라'의 매력 을 가장 잘 살릴 수 있는 곡으로, 세계적인 성악가인 조수미씨가 불러 더욱 유명한 멜로디가 있습니다. '콜로라투라'란 구슬 구르듯 맑은 음색으로 퍼짐 없이 최고 공명점에 도달하는 소프라노를 말합니다.

조수미씨는 '밤의 여왕의 아리아'를 전혀 어렵지 않은 것처럼 자연스럽게, 거침없는 기교로 부르고 있어 감탄을 자아냅니다. 복수에 불타는 잔인한 밤이 여왕이 아니라 그 잔인함과 동시에 딸을 유괴당한 어머니의 슬픔을 지닌 밤의 여왕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조수미씨가 부르는 아리아는 마치 불꽃과도 같은 모차르트의 고음의 사슬을 뚫고 솟아나옵니다. 그 현란함 속에 잔인함과 슬픔을 함께 담아내고 있습니다. 들어보면 아시겠지만 소프라노의 한계음이라는 하이 F음이 세 번이나 나오고, 콜로라투라의 초절기교까지 요구하고 있어 정말 부르기 어렵기로 소문난 곡입니다. 초절기교로 부르는 밤의 여왕 아리아는 선율이 아름답지만 가사 내용은 끔찍한 복수를 싣고 있습니다. '지옥의 복수가 내 마음 속에 끓어오르고'와 '오 떨지 말아라' 등 모두 자신의 딸을 납치해간 사제 '자라스트로'를 향한 불같은 분노를 내지르고 있습니다.“(인용출처: https://dominhopizza.tistory.com/734 [1588-3082])

 

이 노래를 잠간 들어 보겠습니다. 여기서 아아아아하며 고음으로 오르락 내리락하는 이 소리는 분노에 치를 떨며 내지르는 소리입니다. 귀로 듣기만 하면 노래 음이 너무나 아름다워서 분노의 소리라고는 느끼지 못합니다. 그러나 실제 오페라를 보면, 조수미씨의 노래 연기가 엄청난 분노가 폭발하는 듯한 장면을 보여 주고 있습니다.

 

오늘 아침에는 분노에 대한 말씀을 전하려고 합니다. 요즈음 세상 돌아가는 일들을 보고 들으면서 아마도 우리 국민들의 가슴에 분노가 부글부글 끓어 마침내 화산 폭발 직전에 가 있지 않겠는가? 검찰에 대한 개혁을 부르짖는 촛불시위가 어제 밤 서초동 대로에 150만 명 이상이 모여 시위를 하였다고 합니다. 요즈음 우리나라 돌아가는 사건들을 보니 다른 사람은 몰라도 제 가슴 안에 분노가 치밀어 너무나 생각이 아프다고 하겠습니다. 예수님처럼 채찍으로 이 세상을 모조리 치고 박고 뒤집어엎고 하고 싶지만 그러지 못한 무능력에 더욱 화가 납니다. 화를 참고 분노를 마음에 삭킨다는 것은 기독교인으로 마땅한 일입니다. 그러나 믿음으로 분노를 통제하고 화를 참아내는 것은 매우 힘들다고 하겠습니다. 그래서 화나는 일에 차라리 빨리 잊어버리자하는 생각을 하지만, "빨리 잊어버려야지" 하면 할수록 그 장면이 더 생생하게 떠오르게 됩니다. 이는 심리학에서 말하는 리바운드 효과의 한 형태라고 말합니다. 하버드 대학교의 실험에 의하면, 사람들이 흰곰을 떠올리지 않으려고 거부하면 거부 할수록 흰곰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는다고 합니다. 이것을 흰곰 효과라고도 부릅니다. 분노를 떨치고 화내지 않으려고 문제를 객관화시켜 나하고는 상관없는 일이라고 한걸음 떨어 저 보기도 합니다.(이것을 인지적 재평가 cognitive reappraisn라고 합니다.) 그래서 T.V에서 뉴스가 나오면 저는 보지 않고 다른 방에 가서 컴퓨터를 하거나 책을 봅니다. 그러나 귀는 거실에서 들려오는 뉴스를 듣고 있습니다. 저 뉴스는 먼 나라 이야기야라고 생각하지만 마음에 분노와 슬픔은 여전히 우리의 이야기입니다. 그러니 이런 객관화 방법은 현명한 분노조절방법이 아닙니다. 또 때로는 분노가 일어나면 다른 일에 바쁘게 관심을 가집니다. 그것을 승화(sublimation)라고 합니다. 제 사모는 TV뉴스 내용에 화가 나면 막 야단을 치거나 욕을 해됩니다. 욕이라야 ‘저 나쁨 놈!’ 정도입니다만. 그러나 저는 분노를 삭힐만한 다른 관심거리를 찾습니다. 책을 봅니다. 책에 집중하면 사방이 고요합니다. 왕 왕 거리는 TV소리도 들리지 않습니다. 저는 아무리 시끄러운 곳에서도 책에 집중할 수 있습니다. 저에게 분노는 오히려 새로운 에너지 새로운 원동력으로 새로운 이상과 생각을 가져오게 하는 Trigger(방아쇠)가 되기도 합니다. 저에게 분노는 새로운 기운을 일으키게 되는 촉발제요 스위치 역할이기도 합니다. 조수미의 분노의 노래처럼 저에게 분노는 아름답습니다. 저는 분노하게 되면 오히려 마음이 차분해 지고, 생각이 맑은 가을 하늘처럼 드높아지게 됩니다. 요즈음 조국법무장관 문제로 여야 간에, 국민들 간에 난장판세상을 만들고 있는데, 저는 이런 난장판이 마치 비바람 치고 노도광풍이 일어나는 것처럼 보이면서, ‘감 제 야보르, 이것 또한 지나가리라!’ 그 너머에 오는 맑은 하늘 고요한 바다를 바라봅니다. 왜냐하면 이 모든 일 배후에는 하나님의 섭리의 역사가 있음을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제가 최근에 전킨선교사 기념사업에 깊은 관심을 가지고 참여하고 있는 것을 잘 아십니다.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은퇴 후 할 일이 없으니 전킨선교사기념사업을 만들어 하고 있다고 하면서 현명한 일이라고 칭찬인지 뭔지 모를 말을 합니다. 그러나 제가 할 일없어 일거리 만들어 하는 일이 아닙니다. 저는 화가 나서 하는 일입니다. 제가 26년 전 군산에 와서 군산에 처음 복음을 전한 선교사가 누구인가에 궁금해서 여기저기 자료를 찾아보니 전킨이란 선교사가 처음으로 복음을 전하였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게 다였습니다. 전킨선교사가 누구인지 어떻게 군산에 오게 되었는지 그가 어떻게 이곳에서 복음을 전했는지 알 수 없었습니다. 군산에 오래 목회하셨다는 목사님들도 몰랐습니다. 군산 토백이 장로님도 별로 아는바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흥미를 가지고 찾아보기 시작했습니다. 요즈음은 자료들이 많이 있지만 2여 년 전엔 거의 자료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나마 찾아보며 전킨선교사를 알아가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런데 알아갈수록 놀랍고 또 화가 났습니다. 놀라운 것은 오늘의 군산이 있기 100여 년 전에 전킨선교사가 군산에 교회를 세우고 학교를 세우고 병원도 세우고 민주주의가 무엇인지 세계에 어떤 나라들이 있었는지 각가지 문명에 대해 가르쳤습니다. 어린이와 여성들에게 한글과 음악을 가르치고 특히 여성들에게 필요한 건강 상식을 가르쳤습니다. 우리나라 최초로 야구, 축구, 정구를 보급하였고, 호남최초 자전거를 타고 전도를 다녔습니다. 오늘의 군산 그리고 오늘의 호남의 문명개화가 바로 전킨선교사와 그의 동료 선교사들에 의해 시작되었음을 알게 되어 저는 매우 놀랐습니다. 그리고 그의 어린 세 아들이 풍토병에 걸려 죽어 구암 동산에 묻었습니다. 그리고 본인자신도 너무나 힘들고 쇠약해져서 군산에 온지 13년 만에 죽어 아들이 묻힌 그 구암 동산에 묻혔습니다. 비록 병으로 세상을 떠났지만 저는 그분을 군산 선교를 위한 순교자라고 부르고 싶습니다. 그의 아버지는 미국 버지니아 주 주 검사였고 할아버지는 유명한 목사님이셨고 작은 할아버지는 대학총장인 금수저 가문출신이 가난한 군산사람들이 사는 작은 초가집에 들어와 살았던 전킨선교사를 기억하면서 참으로 놀라왔습니다. 그런데 그가 세상을 떠난 이후 120년이 지난 지금까지 아무도 그를 기억하지 않고 있었다는데 더욱 놀랐습니다. 한 번도 그를 추모하는 추모예배를 드린바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이 놀라운 전킨선교사를 사람들에게 알려야 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때가 1999년 때의 일입니다. 저는 단순히 군산을 위해 희생적으로 선교활동을 하다가 순교적 삶을 사신 한 미국 선교사를 아직 그분에 대해 모르는 이들에게 알려야 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생각뿐 행동에 옮기지는 못했습니다. 그런데 점점 화가 났습니다. 어찌 그분에 대해 군산 교회가 이처럼 무심할 수 있단 말인가. 한 알의 밀알처럼 땅에 떨어진 그 첫 밀알 전킨선교사에 군산의 기독교가 자신의 뿌리도 모르고 근본도 잊은 채 그 열매만 따먹기에 급급하고 있는 군산의 교회들, 목사님들을 보면서 화가 나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리고 더 엄청난 화가 났습니다. 그것은 구암 동산에 세 아들과 함께 나란히 묻힌 그분의 가족무덤들이 사라진 것입니다. 사라졌다기 보다는 없어졌습니다. 군산시가 개발하면서 무연고 묘라고하여 마구 파서 없에 버렸다는 것입니다. 어찌 무연고 묘일수 있습니까? 바로 전킨선교사가 세운 구암교회가 묘 옆에 있었고, 개복교회와 다른 교회들이 군산에 엄연히 있었는데 어찌 전킨선교사의 묘가 무연고라고 시청에서 마구 파헤쳐 없에 버렸다는 것을 알았는지 몰랐는지 어찌되었든 자신들의 부모와 조상 묘는 끔직히 생각하여 보존하면서 전킨선교사의 묘는 나 몰라라 하고 방치하여 없어진 줄도 모른다니 말도 안 되는 일입니다. 그래서 이사람 저사람 교회 지도자들 되는 분들에게 물어봐도 모른다는 것입니다. 화가 났습니다. 이래서는 안 되겠다. 다시 그분의 선교정신을 군산에 일깨우고 초대 군산기독교인들의 뜨거운 신앙을 오늘의 군산에 다시 회복하는 일을 해야겠다는 마음을 먹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함께 동감하는 이들을 찾았습니다. 전킨선교사는 장로교 선교사입니다. 그러나 저는 중동교회 성경교회 사종표목사님에게 뜻을 전하고 함께 이일을 하자고 하니 흔쾌이 제 손을 붙잡아 주었습니다. 어떤 장로교 목사님이 전킨선교사는 장로교선교산인데 왜 복음교회목사와 성결교 목사가 이 일을 하는가하고 힐난조로 말을 하였습니다. 그래서 더 화가 났습니다. 당신들이 안하니 길가의 돌맹이 같은 우리가 이일을 하는 겁니다라고 말을 하였습니다. 그래서 이야기전킨 책도 한달 동안 써내려 출판을 하였습니다. 오늘 오후 3시부터 군산기독교연합회주최로 연합부흥성회를 합니다. 그런데 그 주제가 전킨선교사를 기억하지는 것입니다. 부산포도원교화 김문훈목사님, 대전중문교회 장경동목사님 전주바울교회 원팡연목사님 새에덴교회 소강석목사님이 하루씩 맡아 말씀을 주십니다. 그 주제는 전킨선교사에 대한 선교정신을 말씀하실 것 같습니다. 그리고 전킨기념사업회 회원모집과 아울러 전킨선교사 사진전이 열리고 이야기전킨 책을 판매할 예정입니다.

저의 분노가 전킨기념사업회가 발족하여 법인을 설립하고, 저의 화를 새김질하여 앞으로 전킨기념관을 세울 목적을 가지고 여러 목사님과 장로님들 그리고 군산의 모든 교회들이 연합하여 이 일을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합하여 선한 일을 하시는 분이십니다. 우리가 분노를 파괴적이고 부정적인 방법으로 사용하면 죄를 만들지만 선한 분노는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는 줄 믿습니다.

 

예수님이 바로 선한 분노를 보이셨습니다.

본문 말씀에서도 예수님이 분노하시는 모습이 나와 있습니다. 사람들은 예수님의 분노하심을 보고 예수님도 보통 인간과 별다르지 않다고 말하기도 합니다. 예수님이 분노하신 곳은 유월절 기간 중 예루살렘 성전 마당이었습니다. 유대인의 유월절은 이스라엘 사람들이 그 옛날 모세의 인도 하에 이집트에서 해방된 것을 기념하는 날입니다. 신 16장에서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유월절 제사는 자기가 사는 성에서 드리지 말고 꼭 예루살렘으로 와서 지키라고 하셨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세계 각처에 사는 유대인들은 유월절만 되면 예루살렘으로 모여 왔습니다. 그래서 보통 예루살렘에 상주하는 인구가 당시에 5만쯤인데, 유월절이 되면 20만으로 불어났다고 합니다.

그때 예수님이 성전에 가셔서 그만 분노하시었습니다. 왜냐하면 성전 안이 온통 오일 장날보다 더 요란 법석한 장터가 형성되어 있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유월절을 예루살렘에 와서 지키라고 명령하시면서, 올 때에는 빈손으로 오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 앞에 바치게 될 제물로 소나 양 비둘기를 능력에 따라 드리게 되는데 사람들이 먼데서 이런 짐승들을 끌고 오기가 힘들기 때문에 성전에서 현지 조달하려고 하였던 것입니다. 그러닌까 수요 공급의 장소로 성전을 장터로 삼은 것입니다. 당시 성전은 우리처럼 실내가 아니라 실외 마당에서 사람들이 모여 예배를 드렸습니다. 시내는 성소라 하여 특별히 허가 받은 제사장이나 대제사장만 들어갈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사람들은 세 구분으로 마당을 구분하여 성소 앞마당은 유대인 남자들, 그 뒤 마당은 유대인 여자들 그리고 맨 바깥쪽 마당은 하나님을 섬기는 이방인들이 서서 예배에 동참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 장터가 이방인 뜰에서 이루어진 것입니다. 이방인 뜰도 엄연히 성전구내입니다. 또 이스라엘 남자들은 19세가 넘으면 성전에 올 때마다 세금을 바쳐야 했습니다. 일 년에 반 세겔을 바치는 성전 세인데(마17:24), 반 세겔의 화폐 가치는 두 데나리온 정도였습니다. 지금 돈으로 얼마일지는 확실치 않습니다만 보통 하루 품삯정도라 할까요?

반 세겔은 대략 2센티미터 조금 더 되고 그 무게는 6그램이 넘습니다. 한 세겔은 대략 2.5센티미터 정도 크기에 12~14그램 안팎입니다. 이 돈에 그려진 인물은 두로의 신 말까르트로 로마식으로 표현하면 헤라클레스 신에 해당합니다. 성전세용 세겔은 로마 정부에 국세를 내거나 지역 정부나 통치자에게 지방세를 내는 데 사용하던 돈이 아닙니다. 그것은 전적으로 성전 유지 보수 관리 및 날마다 아침에 드리던 진설병(떡) 비용으로 충당되던 것입니다. 반 세겔 또는 세겔은 로마 정부나 지역 정부가 만든 돈이 아닙니다. 그 돈은 두로에서 왔습니다.

출애굽기 30:13에 나오는 것과 같이, 유대인 성인 남자들은 성소의 세겔대로 10게라의 은을 바치도록 규정하고 있습니다. 10게라는 대략 6그램 안팎입니다. 예수님 시대 이전부터 제사장들은 당시 유통되던 돈 가운데 (물론 로마 정부가 만든 돈이 아니었지만) 6그램 안팎의 돈을 찾았습니다. 그것이 바로 두로에서 만든 말까르트가 그려진 반 세겔 또는 세겔이었습니다.

 

따라서 성전 세를 내기위해서 사람들은 자기들의 돈을 세겔로 환전해야만 했습니다. 원래는 이런 장사하는 장소가 공회에서 결정하기를, 감람산에 있는 어떤 작은 마을에서 그렇게 하도록 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 대제사장 가야바라는 사람이 돈을 벌기 위해서 성전 안에서 이런 일을 할 수 있도록 허락한 것입니다. 돈을 바꾸러 오면 보통 6분의 1을 차지한다고 합니다. 그러면 이자율이 16%인 셈입니다. 그런데 그것도 꼭 정해진 것이 아니라 부르는 게 값이었습니다. 어떤 때는 50%를 차지하기도 하면서 성전을 완전히 돈 버는 도구로 사용했던 것입니다. 그러다보니 이 이권 넘치는 장사 뒤에 성전당국자의 검은손 거래가 물론 있었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성전을 이렇게 돈 버는 장소로 쓰는 이런 대제사장과 유대인들에 대해서 분노하신 것입니다. 성전은 하나님에게 예배하고 그를 배우고 만인이 기도하는 곳으로 쓰여야 합니다. 그런데 성전을 자기 이익을 위한 수단으로 사용하고 있으니 주님은 분노하셨던 것입니다. 성전은 거룩한 하나님의 집입니다. 그런데 요즈음 어떤 교회들은 예배드리는 장소를 놀이터로 체육관으로 세상 사람들의 유흥장으로 사용하면서 지역선교의 방법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잘못된 생각입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지 않으십니다.

 

이렇게 예수님은 이방인들이 와서 예배드리는 장소를 무시하고 시장으로 사용하고 있는 데에 분노하신 것입니다. 만인이 기도드리는 장소를 장터로 만든 사람들에게 화를 내시었습니다.

15-16에 에 보면 “노끈으로 채찍을 만드사 양이나 소를 다 성전에서 내쫓으시고, 돈 바꾸는 사람들의 돈을 쏟으시며 상을 엎으시고, 비둘기파는 사람들에게 이르시되 ‘이것을 여기서 가져가라. 내 아버지의 집으로 장사하는 집을 만들지 말라.’하고 말씀하셨습니다.” 소나 양은 다시 데리고 오면 그만이고, 엎어진 돈은 다시 주으면 됩니다. 그러나 비둘기는 놓아주면 다 날아가니까 이것을 가져가라고만 말하셨습니다.

여기서 예수님이 분노하시어 채찍을 사용하시었는데 그 채찍은 노끈 가닥으로 만든 것입니다. 말이 채찍이지 전혀 쓸데없는 모양일 뿐입니다. 또 비둘기 장사꾼에게는 다만 가져가라고 말씀하셨을 뿐입니다. 그러닌까 예수님의 진노는 우리가 생각하는 격정을 이기지 못하는 진노가 아닙니다. 여당과 야당이 정치 싸울 때에 서로 못 잡아먹어서 으르렁 거리며 분노하는 그런 분노와는 차원이 다릅니다. 예수님의 진노는 어떤 선한 목적이 있었습니다. 그것을 하나님을 향한 본질적인 경건함입니다. 하나님 앞에선 우리의 기본자세는 흐트러짐 없는 경건함입니다. 그러나 장사꾼들은 다만 이익을 많이 남기겠다는 것 욕심뿐이요 하나님 섬김은 아예 없었습니다. 이것을 예수님은 분노하신 것입니다. 옛날 예루살렘이 바벨론에게 망한 이유 중 하나가 성전을 우상으로 더럽혔기 때문입니다. 지금은 성전을 장사꾼 곧 맘몬 우상으로 더럽히니 돌 위에 돌 하나 남지 않고 무너질 날이 올 것이라고 예수님은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화가 나신 것입니다. 너희가 이래서 망할려고 그러냐?

 

본문 18절에 유대 사람들이 예수께 물었습니다. ‘당신이 이런 일을 하다니, 무슨 표적을 우리에게 보여 주겠느냐?’ 매우 기분 나뿐 얼굴로 예수님에게 따지듯 물었습니다. 예수님은 “이 성전을 헐라. 내가 사흘 동안에 일으키리라.” 이것은 바로 예수님의 십자가상의 죽음과 부활 사건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이 말씀의 의미를 전혀 알지 못하였습니다. 그래서 20절에 ‘이 성전을 사십육 년 동안에 지었거늘 네가 삼일 동안에 일으키겠느냐?’라고 말했습니다.

이 말씀에서 우리는 예수님의 현재 나이를 짐작할 수 있습니다. 예루살렘 성전이 기공된 것은 헤롯왕에 의해서 기원전 19년의 일입니다. 그런데 지금 여기서 성전을 지은 지 46년이 되었다고 하니까, 46에서 19를 빼면 28이 나오고, 예수님이 태어나신 해는 엄격히 말하면 기원전 4년이므로 28에서 4를 합하면 32가 나옵니다. 예수님의 당시 나이가 32세였습니다.

 

어쨌든 이 사람들은 예수님이 말씀하신, 성전을 허물면 사흘 만에 세운다는 의미를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제자들도 당시는 몰랐지만, 나중에야 깨달았습니다.

이처럼 예수님의 분노는 하나님의 사랑과 구원 곧 십자가와 부활의 전주곡이었습니다.

 

일반적으로 말하면 우리들의 분노라고 하는 것들은 대부분이 다 나의 고약한 성격, 나의 욕심, 질투와 시기심이 신경질적으로 발화되어 발생됩니다. 대부분 화냄의 원인이 시시한 이유로 인할 때가 많습니다. 자기의 자존심, 자신의 감정이 손상되었다고 느낄 때 이런 화나는 성질이 튀어 나옵니다. 다른 사람들로부터 업신여김을 받거나 터무니없는 중상모량을 받았거나 짙투심 시기심이 발동될 때 발끈하며 화가나 씩씩거리게 됩니다. 누가 우리 아이들을 비난하거나 구박을 하였다면 마치 살인이 난 것처럼 복수심으로 달려갑니다. 선생님이라도 다짜고짜 따귀를 올려 부칩니다. 그래서 대부분 분노는 악으로 채워지게 됩니다. 복수심으로 가슴속에 지옥불이 활활 타오릅니다.

 

그런데 성경에 보면 예수님의 분노는 달랐습니다. 예수님은 누구로부터 모욕을 받거나 괴롭힘을 받아도 분노하지 않으셨습니다. 얼굴에 침을 받고 이마에 가시관이 씌워졌어도 사람들이 조롱하고 심지어 옆 십자가형틀에 달린 한 강도로부터 비난을 받아도 화를 내지 아니 하셨습니다. 한마디의 복수의 말씀을 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아버지,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파테르, 아페스 아우토이스- 아페스를 용서하다라고 번역하였는데 원뜻은 가만두다란 말입니다.cf 마 27:49.- 아버지여, 저들을 가만 내버려 두세요). 자기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라고 말씀하셨을 뿐입니다.

원래 ‘모욕감’이란, 당하는 사람의 신분이 높을수록 더해지는 법입니다. 고 노무현대통령이 검찰에 불려가 얼마나 모욕감을 가졌을까하는 짐작을 합니다. 조국법무부장관이 이번 국회에서 인사할 때 한국당 국회의원들 모두 뒤돌아 앉아버렸고 고성과 야유를 퍼부었으니 얼마나 모욕감을 받았으랴? 하는 생각을 가져봅니다.

 

우리 주님은 어떠한 분이십니까? 보이지 아니하는 하나님이 우리 인간으로 하여금 볼 수 있도록 나타나주신 하나님의 형상이시며,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시며, 능력의 말씀에 의해 만물을 창조하시며 또한 섭리하시며, 그래서 우주만물 모두가 다 그 발 앞에 무릎을 꿇게 되는 만유의 ‘주’가 되시는 ‘주님’이시지 않습니까? 그런데도 사람들에게 야유와 조롱과 모욕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분노의 숨소리조차 예수님은 내시지를 않으셨습니다.

성경에서 예수님이 화를 내셨을 때에는 누가 개인으로서 예수님에게 잘못했기 때문에 분노하신 적이 없으셨습니다. 오로지 예수님께서는 모든 ‘악’에 대항하여 분노하셨을 뿐입니다. 안식일에 사람을 고치는 것을 반대하는 바리새인들의 그 강퍅한 마음을 인해, 예수님은 분노하시면서 손 마른 사람을 고쳐주셨습니다. 아이들을 막는 제자들에게 화를 내시고 어린 이이들이 내게 오는 것을 막지 말라 하시며 그 아이들을 팔에 안으시고 축복해 주셨습니다. 잡히시기 전 마지막 유월절 만찬을 나누는 그 순간에도노는, 가룟유다의 배신을 아시면서도 무릎을 꿇고 허리를 굽혀, 가룟유다의 발을 씻기시는 ‘섬김’을 보여 주셨습니다. 나사로가 죽어 무덤에 묻힌 것을 보시고 예수님은 통분하시면서, 나사로를 다시 살리시고 모든 인간들을 죄로 얽매어 두는 그 사망의 권세를 깨뜨리실 것을 맹세하셨으니 마침내 십자가와 부활을 통하여 우리 인류를 구원하셨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심은 하나님의 마귀에 대한 분노 때문입니다. 마귀가 죄의 사슬로 하나님의 형상 닮은 인간을 지옥으로 끌어가는 것을 보신 하나님이 분노하시고 반드시 인간들을 마귀에게서 구원해내리라 결정하시고 독생성자 예수그리스도를 세상에 보내시고 십자가의 죽으시기까지 하여 우리를 죄에서 구원해 내신 것입니다. 십자가는 예수님의 분노로 짊어지셨습니다. 만일 십자가를 내려놓으면 마귀가 이길 것이니 그럴 수 없다 마귀에게 져서는 안 된다는 분노로 끝까지 십자가를 지시고 고난당하시고 죽으신 것입니다. 그리고 삼일 만에 부활하시어 마귀에게 완전한 승리를 이루시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주일에 하나님 앞에 예배를 드림을 예수님의 이 거룩하시고 온전하신 분노로 인해 우리가 마귀로부터 구원받았음을 감사하며 드리는 예배인 것입니다. 이 십자가는 마귀에 분노하신 예수님의 분노하심을 상지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지금도 하나님의 백성을 죄의 사슬로 얽어매고 있는 마귀에게 분노하시고 십자가를 지고가십니다. 피 흘리시고 고난당하시고 죽으십니다. 바로 내가 죄를 지음으로 예수님은 분노하십니다. 우리가 죄를 지을 때 마다 예수님은 분노하십니다. 그리고 십자가를 지십니다. 여러분에게 혹 어떤 분노가 있습니까? 그러므로 에수님의 십자가를 바라보십시오, 십자가는 예수님께서 분노를 의와 사랑과 구원으로 승화시키셨습니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 십자가를 바라보는 사람들은 그의 분노가 십자가 아래서 봄눈 녹듯이 녹아지게 되는 것입니다. 분노가 일어납니까? 자기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라가십시오. 우리들의 분노의 표식은 십자가로 증거 되어야 합니다.

 

에베소서 4장 26절, 27절 말씀을 여러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분을 내어도 죄를 짓지 말며(오르기제스데 카이 메 하마르타네테) 해가 지도록 분을 품지 말고, 마귀에게 틈을 주지 말라.(메데 디도테 토폰 토 디아볼로)” 마귀에게 틈을 내 주지 말라고 하였는데 여기서 틈이란 그 어떤 자리에서도 어디에 있던지 마구가 모기처럼 날아들지 못하게 하라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분을 내어도 죄를 짓지 말라’고 하신 말씀을 헬라어 원어로 직역하면 “화를 내시오, 그러나 죄를 짓지는 마십시오.” 죄 안 지을 자신 있으면 화를 내라는 말입니다. 분노가 죄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예수님의 분노에는 죄가 없으셨습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화내셔도 좋습니다, 그러나 죄 짓는 화는 내서는 안 됩니다. 죄 짓는 화는 나의 영혼을 마귀에게 넘겨버리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어떻게 죄 없는 분노를 낼 것입니까?

아브라함 링컨은 젊은 시절에 어느 날, 한 흑인 여자가 남편과 어린 아이로부터 강제로 때어져서 팔려가면서 울부짖는 그 소리를 듣고는, 피가 나도록 자기의 손가락을 깨물면서 “이것은 분명히 잘못되었다”고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시장 한복판에서 분노를 터뜨렸습니다. 이 링컨의 분노는, 마침내 노예해방을 가져왔습니다.

사랑에 동기를 두고, 공의에 목적을 둔 분노를 낼 줄 알아야 합니다. 예수님처럼 사랑하기 때문에 분노하고 분노하기 때문에 스스로 십자가를 지시었습니다. 결국 예수님의 분노는 사랑이었습니다. 기독교인들의 분노는 사랑이어야 합니다. 그럴 때 선하신 하나님의 은혜와 새로운 역사가 나타나게 됩니다.

모차르트의 마술피리 오페라에서 조수미의 분노하는 노래가 그토록 아름다운 것은 모차르트의 사람들에 대한 사랑이 그 노래 속에 담겨져 있었기 때문입니다. 제가 분노하여 전킨선교사 기념사업을 시작하였지만 이는 하나님에 대한 사랑과 군산 교회에 대한 사랑 때문 이었습니다.

 

우리 라온코이노니아는 바로 우리 모두 분노를 삭히면서 시작한 사랑의 공동체입니다. 비록 세상이 우리를 분노케 하고, 들려오는 정치적 혼란으로 화가 난다고 하더라도 아니요, 이 또한 지나가리라(감 제 야보르, This, too, shall pass away. Ceci passera aussi. Auch das geht vorbei)), 언제나 하나님의 선하신 목적과 은혜 안에서 모든 사람들을 사랑하고 그들을 위한 헌신 때문에 분노를 믿음으로 제하고, 화를 사랑으로 삭히는 우리들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하나님의 사랑과 허락하시는 축복이 우리 모두에게 함께 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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