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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병호목사의 교회이야기

전병호 목사의 설교



2020년 5월 17일 부부주일아침예배  마 19:1-9    부부에게 축복 있으라!


1995년부터 ‘건강한 부부와 행복한 가정은 밝고 희망찬 사회를 만드는 디딤돌’이라는 표어를 내걸고 가정의 달 5월에 둘(2)이 하나(1)가 되자는 의미에서 탄생한 ‘부부의 날’(5월 21일)을 현재 가정의 달에 추가하자는 의견들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2001년 4월, 민간단체인 ‘부부의 날 위원회’(공동대표 권영상·송길원·하충식)가 국회에 ‘부부의 날 국가 기념일 제정에 관한 청원’을 한 이후 2003년 국회 본회의를 통과하여 법정기념일(공휴일은 아님)로 제정되었습니다. 그리고 교회에서는 5월 3째 주일을 부부주일로 정하여 부부의 행복을 기원해 주는 예배를 드리고 있습니다. 그러나 저는 1980년 초부터 가정의 달에 어린이주일 어버이주일 경로 주일이 있는데 부부주일이 없다는 것이 이는 하나님의 뜻이 아니라 생각하고 5월 3번째 주일을 나름대로 지켜 왔습니다. 그러므로 일반적으로 정해진 훨씬 그 이전부터 가정의 행복을 위해서는 먼저 부부가 하나님의 축복을 받아야 한다고 믿고 부부주일을 정하였던 것입니다.

오늘은 부부주일입니다.


어떤 사람이 결혼생활을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한 여인이 결혼을 하면 신혼 3주간은 행복하고, 3개월간은 회의하고, 그 다음 3년간 서로 싸우고, 그리고 30년간 참고 견디며 산다고 합니다.”
아마도 결혼생활이 결코 쉬운 일이 아니라는 말을 하고자 하는 것 같습니다.

잠언 18장 22절에 “아내를 얻는 자는 복을 얻고 여호와께 은총을 받는 자니라.”라고 말씀하십니다. (마차 잇솨 마차 토브 와야페크 라촌 메야웨 아내를 얻는 일은 좋은 일이고 여호와로부터 기쁨을 얻게 되는 일이다.)


결혼은 하나님의 은혜이고 축복입니다. 만일 결혼생활이 그렇게 비참한 것이라면 하나님께서 아담에게 하와를 짝 지어 주지 않으셨을 것입니다. 한 남자와 한 여자가 한 몸이 되어 한 가정을 이루고 사는 일은 신비한 기적 같은 일입니다. 그러므로 결혼은 매일 매일 신비한 삶의 연속이요, 신비한 일이기에 기대와 흥분과 즐거움이 있는 일입니다. 결혼의 신비를 알아가는 일이 결혼생활이요 인생을 기쁘게 살아가는 일입니다.

 

처음 아담이 에덴동산에서 하나도 재미난 일이 없었습니다. 아름다운 꽃동산이 결코 아름답게 보아지지 않았습니다. 맛있는 과실이 한입 먹을 때 마다 어찌 그리 떫은지 금방 뱉아버립니다. 토끼와 장난치고 노루와 달리기를 해도 금방 시들해지고 재미가 없어 어깨를 축 늘어뜨리고 벌렁 풀밭에 누워 버렸습니다. 그러다가 꿈을 꾸면 어떤 모를 아름다운 사람이 나타났습니다, 온 세상에 자기밖에 없는데, 자기와 비슷한데 어딘가 다른 그가 누굴까? 그래서 그 꿈을 꾸고자 자주 풀밭에 누워 잠을 청했습니다. 비몽사몽인지 어느 날 눈을 떠보니 자기 옆에 그렇게 꿈속에 그리던 아름다운 신비한 사람이 있는 것을 보게 되었습니다. 비몽사몽이 아니라 진짜로 꿈에 본 그 사람이 자기 앞에 있지 않겠어요? 아담은 어리둥절하여 하나님께 물었습니다. 이....누구입니까? 하나님이 말씀하십니다. “내가 네가 잠 들었을 때 너의 갈비뼈 하나를 뽑아 만든 여자 하와이니라. 이는 너의 배우자 네 아내 하와이니라”고 말씀하십니다. 아담은 하와의 손을 붙잡고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 그 때부터 아! 꽃이 너무나 아름답습니다. 종달새의 울음이 어찌 그리 듣기가 좋은지요. 하늘의 뭉게구름이 마치 새털같이 폭신한 것이 거기에 하와와 함께 뒹굴고 싶은 생각입니다. 에덴동산이 진짜 아름다운 동산인 걸 처음 알게 되었습니다. 모든 것이 새롭게 보였습니다. 무슨 일을 하여도 즐겁고 매일 매일 일들이 심비롭고 놀라움뿐입니다. 아담과 하와는 그렇게 에덴동산에서 행복하게 살았습니다.


이 세상에 여자가 있고 남자가 있다는 것이 얼마나 좋은지 모릅니다. 그래서 여자는 남자에게 복이고, 남자는 여자에게 복입니다. 아내는 나의 인생에게 주신 최고의 하나님의 축복입니다. 남편은 나의 인생에게 주신 최고의 하나님의 은총입니다.

남녀가 만나 한 몸을 이루고 가정을 이루는 것은 하나님의 복이고 은총입니다. 그래서 그 가정에서 따뜻한 행복을 주고받는 것이 이 광야 같은 세상을 이기는 하나의 큰 비결입니다. 세상을 이기는 두 가지 힘을 하나님이 주셨는데, 하나는 교회에서 하나님을 믿는 믿음이요, 또 하나는 가정에 부부간의 사랑입니다. 이 믿음과 사랑이 없으면 그의 인생엔 아무런 소망이 없게 되는 것입니다.

 

「즐거운 곳에서는 날 오라 하여도
내 쉴 곳은 작은 집 내 집뿐이리」
세상에 아무리 즐거운 곳이 있다 해도 내 집보다 더 좋은 곳은 없습니다. 전에 서울 호텔에서 하룻밤 잠을 자는데,  하룻밤에 60만원하는 호텔방에서 잔 적이 있습니다. 밤 11시에 들어가서 새벽 5시에 일어나, 6시 고속버스를 타고 군산에 내려왔습니다. 그 60만 원 짜리 방의 푹신한 침대가 내 작은 욧대기 보다 편하지 않았습니다. 호텔 음식점에서 용봉탕을 먹었는데 쌍화차 잔 같은데 담아 주었습니다. 그 한 탕기에 15만원 하는 그 맛은 결코  아내가 끓여주는 된장찌개를 먹는 것보다 못 하였습니다. 세상에 내 집보다 더 좋은 곳은 없습니다. 내 쉴 곳은 작은 내 집뿐입니다.  그런데 그 집에 아내가 없으면 사막보다 더 삭막합니다. 그 집에 남편이 없으면 가을 나무같이 쓸쓸합니다.

 

(***유대땅. 사해 동북쪽 베레아지방. 베레아 끝부분 사해 동편에 마케루스가 있습니다. )

1절에 예수님께서 갈릴리에서 사마리아지방으로 가시다가 다시 요단강을 건너 베레아지방으로 내려가시어 예루살렘으로 가시기 위해 다시 요단강을 건너 유대지역으로 들어가시려는 길이었습니다. 아직은 베레아지방 헤롯 안티파스 왕의 여름 궁전이 있는 마케루스 인근에 머물고 계실 때에 병자들이 찾아 와 그들을 고치셨습니다. 그런데 바리새인들(아마도 샴마이파?)이 예수님을 골탕 먹이려고 질문을 합니다. ‘어떤 이유로 아내를 버리는 것이 옳습니까?’라는 질문을 했습니다. 이때는 예수께서 십자가에 달려 죽으시기 약 한달 전으로서 대략 A.D. 29년 2-3월경의 일로 추정됩니다. 이곳 베레아 지방은 행정적으로 헤롯 안티파스가 통치하는 땅입니다. 왜 하필이면 뜬금없이 이곳에서 결혼과 이혼증서에 대한 질문을 했을까? 이유가 있습니다.

(  *** 헤롯의 마케루스 여름 궁전터. 현재 요르단 왕국에 속하고 있는 마케루스는 요르단 왕국의 수도 암만에서 남쪽으로 32킬로미터 지점에 있는 모자이크 지도로 유명한 마다바에서 왕의 도로를 따라 남서쪽으로 약 33키로 정도 가면 유적지가 나온다. 사해 북단에서는 남쪽으로 약 21km 그리고 사해에서 동쪽으로 7km정도 떨어져 있다. 마케루스에 오르면 서쪽으로는 눈 아래 사해의 절경이 바라보이고, 사해 건너로 유대 지역이 훤하게 보이며, 그리고 동쪽으로 약 40미터에 깊이의 계곡이 뻗어있고 계곡의 능선은 동쪽 맞은편 산으로 이어져 있다.
사해 동쪽의 천연적인 지형을 이용하여 산 정상에 만들어진 요새로 해발 700m정도이어서 사해 해수면에서는 약 1100미터 높이에 있으며 언덕 주위로는 사방이 깊은 계곡으로 둘러싸여 있는 천연 요새이다. 세례 요한이 투옥되고 참수된 순교 성지이다.  출처: https://anny47.tistory.com/422 여백회/대전대흥장로교회)

 

세례요한이 헤롯 안티파스 왕에게 죽임을 당하였는데 그 이유는 그들의 결혼에 대해 세례요한이 가만있지를 않고 틀렸다고 말했기 때문입니다. 왕이라도 당신의 이혼과 결혼은 잘못 되었다고 비난하였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인정하시는 결혼이 아니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 앞에 죄라고 세례요한이 마케루스 여름궁전까지 와서 왕을 심하게 힐책詰責하였습니다. 왕은 크게 분노하여 세례요한을 옥에 가두었습니다. 마침 생일잔치에 의붓딸 살로메의 춤의 댓가로 세례요한의 목을 달라고 하니 헤롯은 세례요한을 죽이고 가져다주었습니다. 왜 그 결혼이 잘 못 되었는가? 헤롯 안티파스 왕이 자신의 제수씨인 헤로디아를 자기 아내로 삼았기 때문입니다. 본디 헤로디아는 이복동생 빌립보2세의 아내였습니다. 그런데 이 빌립의 부부와 자기 부부가 함께 로마로 여행을 가게 되었는데 그때에 보니 제수씨가 너무 미인이었습니다. 그래서 제수씨에게 반해버렸습니다. 헤로디아는 또 다른 이복동생 아리스토불루스4세의 딸이었으니 그러닌까 조카딸입니다. 침으로 막대 먹은 집안입니다. 안티파스는 동생 빌립을 억지로 이혼시키고, 자기도 자기 부인인 나바테아의 공주 파샬리스와 이혼하고 제수씨를 아내로 삼은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 앞에 불의입니다. 그러니 세례요한이 가만히 입 다물고만 있을 수 없었습니다. 왕은 잘못하였다고 외치니 듣기 싫어 헤롯 안티파스는 세례요한을 죽여 버린 것입니다. 그 후 로마의 칼리굴라 황제가 안티파스와 헤로디아를 갈리아(프랑스)로 추방했고 두 사람은 그 곳에서 죽었습니다.

 

그런데 바리새인들이 이 헤롯 안티파스의 궁전이 있는 마케루스가 가까운 이곳에서 어떤 이유로 아내에게 이혼증서를 써주느냐고 질문을 하였던 것입니다. 예수님의 대답이 이혼하면 안 된다고 말하게 되면 헤롯왕이 듣고 노발대발하여 세례요한처럼 예수를 죽일 것이고, 만일 예수님이 이혼할 만한 하면 이혼장을 써 주어도 좋다고 하면 사소한 이유로 이혼증서를 써서 여자를 버렸다고 예수님을 비난 하려하였던 것입니다. 이도 저도 대답하기가 곤란한 문제입니다. 과연 예수께서 이 계략을 어떻게 돌파할 것인가?

 

예수님은 이 바리새인들의 질문에 확실하게 말해 주었습니다. 

그 당시 모든 유대인들 특히 바리새인 율법주의자들까지도 모세오경을 들어 이혼 증서를 써서 주는 것을 당연시 여겨 이혼들을 하였습니다. 그런데 왜 예수님은 이혼증서를 쓰는 것을 못 마땅히 여기시고 심지어 모세의 말도 다르게 해석하시면서 까지(8절) “본래는 그렇지 않다. 하나님이 짝 지어 주신 것을 사람이 나누지 못한다.”(호 운 호 데오스 쉬네즄센 안드로포스 메 ㅎ코리제토: 여기서 쉬네즄센은 쉬쥬그뉘미의 동 직 1과 능 3단으로 함께 멍에를 메다란 의미입니다. 부부는 인생이라는 멍에를 함께 짊어지고 살아가야 합니다.)고 말씀하시었습니다.

예수님은 언제나 누구에게나 이해심이 크시고 관용을 보여주셨습니다. 그런데 결혼제도에 대해서는 매우 보수적인 견해를 가지셨습니다. 왜 이렇게 결혼관에 대해서는 유연한 자세를 보이지 못하시고 보수적인 입장을 나타내셨을까? 결혼은 하나님의 창조역사로 인간의 제도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태초에 하나님이 두 남 녀를 짝지어(레제르: 돕는 배필) 부부되게 하시고 가정을 이루어주신 것은 하나님의 거룩하신 창조의 역사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헤어지라, 이혼 하라, 아내를 버리라하는 이런 인간의 제도는 하나님의 뜻에 반대되는 일입니다.

하나님께서 태초에 우주만물을 창조하실 때 한 가지 질서를 세우셨으니, 바로 모든 동식물을 암 수로 나누어 창조하시고, 그 둘이 합하여 번성하라고 하시었습니다. 사람을 만드시고 부부를 짝지어주실 때 부부의 원리를 세워진 것입니다.

 

창2:24 “이러므로 남자가 부모를 떠나 그의 아내와 합하여 둘이 한 몸을 이룰 지로다.”
이 말씀이 인간을 창조하시고 내리신 결혼의 원리요 명령입니다. 그러면서 남자와 여자가 서로 차이가 있도록 창조하셨습니다. 남녀의 차이差異는 있을지언정 차별差別은 없는 것입니다. 

야구경기를 TV로 보면서 남자는 힘으로 게임에 이기고 지는 것에 관심을 갖고 있는 반면, 여자는 게임에 관심을 두기보다는, 사람에 관심이 있습니다. 따뜻한 정서와 감성에 더 관심을 갖습니다. 이렇게 똑같은 운동장에 있어도 시각이 완전히 다릅니다. 야구선수가 공을 받으려고 달려오다가 그만 넘어져서 공을 놓쳤습니다. 한동안 일어나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 바람에 상대방 선수가 홈으로 들어와 게임에 졌습니다. 남자들은 화들이 나서 넘어진 선수를 비난하고 저런게 무슨 선수냐고 욕을 합니다. 그런데 여자는 그 넘어진 선수가 많이 다치지 않았을까? 염려하고 동정을 보냅니다. 이렇게 하나님께서는 남자와 여자를 다르게 창조하셨습니다. 그래서 사람을 구성하는 세포 속에 염색체(染色體, chromosome는 세포 분열 시 핵 속에서 관찰되는 DNA와 단백질로 구성된 물질을 의미한다.)가 있는데, 사람의 모든 성질 성격을 형성합니다. 만일 머리가 빨리 희게 되는 것은 염색체 안에 그런 유전자가 있기 때문입니다. 염색체가 모든 사람들에게 모양과 크기가 같은 염색체가 둘씩 짝을 이루어 46개가 있는데 남녀의 44개는 똑 같은데 남은 두 개가 성을 결정하는 염색체로 여성은 XX인데 남자는 XY입니다. 그러므로 여성이 남성으로 성전환 수술을 하였다 해도 본질상 XX가 XY로 바꿀 수 없기 때문에 여전히 여성인 것입니다.  남성이 여성으로 성전환 하는 것도 마찬 가지입니다. 남성은 일반적으로 왼쪽 뇌가 발전이 되었고 여성은 오른쪽 뇌가 발전이 되었다고 합니다.

 

신경정신과전문의 손석한씨는 “일반적으로 남성과 여성의 특징을 살펴보면 남성은 대개는 공간지각능력 이런 쪽이 많이 발달되어 있습니다. 논리적 사고 능력도 많이 발달되어 있고요. 그것과 연관된 뇌 부위가 많이 활성화 돼 있는 반면에 여성은 언어적 학습능력 그리고 다른 사람의 마음과 감정을 읽는 공감 능력 부분에 뇌 부위가 많이 활성화되어 있습니다. 그러니까 남성과 여성의 뇌 발달에 있어서 다소 차이가 있습니다.”라고 설명했습니다. 남성과 여성의 생각하는 방식이 서로 다름이 가장 확실하게 드러나는 것이 운전습관입니다. 예를 들어 운전할 때 남자들은 머리에 지도를 그리고 어떤 이름의 도로에서 좌회전이나 우회전을 한다고 생각하는 반면 여자들은 건물이나 특정한 지점을 기억하고 어떤 가게 앞에서 회전한다는 식으로 길을 찾는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각각 다른 달란트를 주셨습니다. 여성보다 남성에게 체력과 힘을 더 주셨고, 남성보다는 여성에게 감성과 정서情緖를 더 주셨습니다. 남성과 여성에게 서로 다른 달란트를 주셨다면 이것을 어떻게 해야 하는가? 부부가 된다는 것은 다만 육체적으로 하나가 된다는 것만이 아니라, 서로 다른 성정이 조화를 이루어 하나가 되어야 합니다. 왜 이혼을 하는가? 많은 경우에 이 차이를 극복하지 못하고, 조화를 이루어 살아가지 못하였기 때문에 서로 헤어지고 원수로 헤어지는 일이 많습니다.  남자의 힘은 유약한 여자를 지키고 보호하고 섬기는 일에 쓰여 지고, 여자의 감성은 따뜻한 마음으로 남자의 피로와 힘든 마음들을 보듬어 안아주어야 합니다. 그런데 어떤 남자는 자신의 힘으로 여자에게 폭력을 행사하고, 어떤 여자는 자기의 감정을 찔레와 엉겅퀴가 되어 남자의 가슴을 후벼 파는 아픔을 준다고 하면 어찌 즐거운 나의 집을 이루어 갈 수 있겠습니까? 요즈음 가정문제, 부부문제들이 이 차이를 조절하고 조정하지 못해 일어나 가정의 부부간의 비극적이 현상들이 일어나곤 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짝 지워 주신 부부관계는 조화(調和  harmony)의 관계입니다.
남녀는 서로 하나님이 주신 달란트로 섬기며 보호하며 온유함과 부드러움과 사랑으로 서로 섬기고 봉사하고 헌신하며 돕고 희생하는 부부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이렇게 될 때 하나님께서 짝 지워 주신 아름다운 부부가 되어 가정에서 하나님의 나라를 세워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됩니다.

하나님이 짝지어주신 부부 관계는 나눌 수 없고 버릴 수 없습니다. 그래서 부자관계는 1촌이지만 부부관계는 촌수가 없습니다. 당신이 나고 내가 당신인 自己입니다. 그러니 자기 몸을 나누거나 베어버릴 수 없는 것 아닙니까?

 

동양사상의 핵심은 태과(太過)와 불급(不及)입니다. 태과는 너무 지나치는 것이고, 불급은 기준에 미치지 못하는 것을 말하는데, 태과와 불급의 중간을 조율하는 것이 곧 음양의 화합(和合)이고 조화입니다. 그러나 기독교의 조화는 십자가 조화입니다. 부부가 함께 십자가를 질때 조화가 일어납니다. 기독교인의 조화는 중간을 취하는 것이 아니라 성령의 불같은 역사로 서로 엉키어 새로운 부부가 되는 것입니다.

히브리어로 성경에서는 “켈룰라”로 사용하고 있는 데, 유대의 문화적인 언어로는 결혼을 ‘키두쉰’이라고 말합니다. 이 말은 “聖化(sanctification).‘를 뜻합니다. 聖別, 獻身, 절대적 바치는 것이 결혼입니다. 결혼은 부부가 서로에게 헌신하는 것, 십자가를 지는 희생하는 것이 결혼입니다. 결혼은 부부가 사랑으로 연합하여 짝지어주신 하나님께 한 몸 되어 절대적 헌신으로 바쳐진 희생의 제물이 부부입니다. 그래서 결혼은 신성하며 거룩하며 하나님께서 짝지어 주신 것으로 사람이 나눌 수가 없는 것입니다. 만일 부부가 서로 나뉘어져 하나님 앞에 따로따로 서는 것은 죄입니다. 갈라서는 것이 죄입니다. 이혼하는 것이 죄이며 아내를 버리는 것이 죄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바리새인들이 주장하는 이혼증서를 창조의 질서 안에 있는 하나님의 뜻이 아니라고 일축해버리셨습니다. 부부는 헤어지지 말라, 나누어지지 말라, 무슨 이유로도 이혼하지 말라. 이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그래서 부부관계의 조화는 주께서 십자가의 사랑으로 우리를 사랑하셨듯이 절대적으로 사랑의 헌신이 요구됩니다. 조화는 곧 사랑입니다. 조화를 이루지 못하면 사랑은 실패합니다.

그래서 부부의 의무는 서로 사랑하는 것입니다.

 

잠언 5 :15-21에 “ 너는 네 우물에서 물을 마시며 네 샘에서 흐르는 물을 마시라. 어찌하여 네 샘물을 집 밖으로 넘치게 하며 네 도랑물을 거리로 흘러가게 하겠느냐? 그 물이 네게만 있게 하고 타인과 더불어 그것을 나누지 말라.. 네 샘으로 복되게 하라. 네가 젊어서 취한 아내를 즐거워하라. 그는 사랑스러운 암사슴 같고 아름다운 암노루 같으니 너는 그의 품을 항상 족하게 여기며 그의 사랑을 항상 연모하라. 내 아들아 어찌하여 음녀를 연모하겠으며 어찌하여 이방 계집의 가슴을 안겠느냐.  대저 사람의 길은 여호와의 눈앞에 있나니, 그가 그 사람의 모든 길을 평탄하게 하시느니라.”

이 말씀을 보면 젊어서 취한 아내를 나누지 말라.  복되게 하라. 즐거워하라고. 연모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말은 귀히 여기라는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 중에 연모하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戀慕란 사랑하며 그리워하라는 낱말의 뜻이 있습니다. 다른 말로 언제나 첫사랑을 하듯 연애하는 마음으로 살아라는 말씀입니다. 평생 연애하라는 말씀입니다.

‘마누라’라는 말은 ‘마주보고 누우라’는 뜻이랍니다. 또 경상도 사람들의 해석에 의하면 ‘마(그냥) 누라’입니다. 이것은 ‘그냥 누워라, 그냥 쉬어라, 누워서 쉬어라.’라는 뜻입니다.
“아내를 쉬게 하라.” 이 말을 기억해야 합니다.
남자는 강해서 하루 종일 일해도 견디는데 여자는 약해서 몇 시간만 일해도 지칩니다. 그러니 아내는 자주 쉬게 해 주어야 하는 것입니다. 아내가 쉬는 모습은 아름답습니다. 아내가 쉬어야 가정이 건강하게 됩니다. 일만하는 아내가 있는 가정은 병든가정입니다.ㅡ

도라라는 사람이 동창회 모임에 참석했습니다. 그런데 해가 지니 갑자기 일어서며 “친구들, 나는 지금 가 보아야 돼.”라고 말했습니다.
“아니, 왜 그래?”
“아내와 산책해야 돼.”
“이 사람아, 우리가 얼마 만에 만났는데, 아내와 산책하기 위해 이렇게 일찍 간단 말인가? 산책은 다른 날 하게.”
“안 돼. 나는 결혼식 날 아내와 약속을 했어. 해 지는 오후에는 항상 함께 산책하기로. 그 약속은 내게 아주 소중하다네.”
그리고 그는 친구들의 만류를 뿌리치고 집으로 돌아갔습니다. 아내를 얼마나 귀히 여기는 남편입니까?
또한 아내도 하나님께서 귀히 여기시는 남편을 귀히 여겨야 합니다.
에베소서 5장 33절에 『아내도 그 남편을 경외하라』라고 말씀하십니다.
아내에게 남편을 경외하라고 말씀하십니다. 남편에게 존경할 부분이 없어도 말씀 때문에라도 아내는 남편을 존경해야 하는 것입니다.


베전 3:7에 “ 남편들아 이와 같이 지식을 따라 너희 아내와 동거하고 그를 더 연약한 그릇이요 또 생명의 은혜를 함께 이어받을 자로 알아 귀히 여기라 이는 너희 기도가 막히지 아니하게 하려 함이라 .”
부부는 서로 귀히 여기기 때문에 무슨 일을 하던지 함께 하며 사랑으로 참아야 합니다.

성경적 부부는 모든 것을 함께 해야 합니다. 고린도전서 7:5에는 부부가 “서로 분방하지 말라”고 합니다. 기도할 틈을 얻기 위해서 잠시만 방을 따로 쓰라고 합니다. 성경이 가르치는 부부란 방도 따로 쓰지 않고 모든 것을 함께 하는 관계를 의미합니다.

 

부부란 무엇입니까? 부부는 두 개의 반쪽이 되는 것이 아니고 하나의 전체가 되는 것입니다. 한 몸이 된다는 결혼서약은 두 개의 물방울이 모여 한 개가 되는 것입니다. 부부는 가위와 같다고 합니다. 두 개의 날이 똑같이 움직여야 가위질이 됩니다. 가위의 날이 하나만 움직이면 가위질이 될 수 없습니다. 부부란 호수와 같다고 합니다. 호수와 같이 피차의 실수를 한없이 흡수하는 것이 부부입니다. 그래서 좋은 남편은 귀머거리이고 좋은 아내는 소경이라고 합니다. 남편은 못 들은 척 하는 것이 많아야 하고, 아내는 못 본 척 하는 것이 많아야 합니다.
부부생활은 곰 다섯 마리(five bears)가 있어야 합니다. 우선 곰 한 마리(a bear)가 있어야 합니다. 곰 bear는 참는다는 다른 뜻이 있습니다. 그리고 다시 곰 네 마리(forbear)가 있어야 합니다. forbear(forebear가 아닙니다. 이 말은 선조 조상이란 말입니다.)도 참는다는 뜻입니다. 이 말과 곰 네 마리(four bear)는 발음이 같기 때문에 이런 말이 생겨난 것입니다. 그래서 한 마리와 네 마리가 합쳐서 곰 다섯 마리가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부부생활은 참고 또 참는 것이 최선입니다.
고린도전서 13장은 사랑장입니다. 바울은 사랑을 “오래 참고”, “모든 것을 참으며”, “모든 것을 견디느니라.”라고 합니다. ‘참는다’는 말은 사람에 대한 인내를 말하고 있고, ‘견디다’는 환경에 대한 인내를 말합니다. 사랑이란 사람과 환경에 대하여 인내해야 합니다.

 

사람을 사랑하지 않으면 환경에 인내하지 못합니다. 성경에 나오는 욥의 아내를 보세요. 욥이 엄청난 환난을 당하였을 때에 “하나님을 욕하고 죽으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사랑하지 않았기 때문에 최악의 상태를 함께 하지 못했습니다. 사랑이 부족해도 좋은 환경에서는 크게 문제가 들어나지 않지만 상황이 나빠지면 가장의 근본이 흔들리게 됩니다.

전도서 9장 7절에서 9절에 말씀하십니다.
“ 너는 가서 기쁨으로 네 음식물을 먹고 즐거운 마음으로 네 포도주를 마실지어다. 이는 하나님이 네가 하는 일들을 벌써 기쁘게 받으셨음이니라. 네 의복을 항상 희게 하며 네 머리에 향 기름을 그치지 아니하도록 할지니라. 네 헛된 평생의 모든 날 곧 하나님이 해 아래에서 네게 주신 모든 헛된 날에 네가 사랑하는 아내와 함께 즐겁게 살지어다. 그것이 네가 평생에 해 아래에서 수고하고 얻은 네 몫이니라.”

하나님 명령하십니다. 이 허망한 세상 속에 네 아내와 그리고 네 남편과 즐겁게 살아라. 왜 부부싸움 합니까? 왜 부부간에 미워하고 비난합니까?  벌써 계절이 여름으로 치닫고 있는데 이 빠르게 지나가는 세월 속에 즐겁게 살 시간이 얼마나 있겠습니까? 가는세월 즐겁게 살아야 합니다.

오래전에 가수 서유석씨가 <가는 세월>이란 노래를 불렀습니다. 그 가사에
가는 세월 그 누구가 막을 수가 있~나요
흘러가는 시냇물을 잡을 수가 있~나요.....
하지만 이것~만은 변할 수 없~어요.........
달이 가고 해가 가고 산천초목 다 바뀌어도
이 내 몸이 흙이 되도 내 마음은 영원하리

 

하나님의 은혜와 축복을 받은 부부간의 사랑하는 마음은 가는 세월 그 누가 막을 수 없듯이 달이 가고 해가 가고 산천초목 다 바뀌어도 영원히 변함이 없어야 합니다.

우리 라온코이노니아는 아름다운 부부의 사랑으로 하나 된 신앙공동체입니다. 여러분, 부부에게 하나님이 축복이 있으라! 또 그렇게 되기를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우리 성도들의 가정에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가 가득하시길 축원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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