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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병호목사의 교회이야기

전병호 목사의 설교



2020년 5월 10일  주일아침 예배   막 10:46-52  예수, 엘레에손 메

 


막10:47에 바디메오가 “다윗의 자손 예수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휘에 다위드 예수 엘레에손 메)”라는 말을 합니다. 여기서 “예수, 엘레에손 메,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라는 헬라어를 라틴어로 “퀴리에 엘레이손”으로 말합니다. 그래서 모든 교회는 “주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퀴리에 엘레이손”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초대교회 시절부터 특히 중세기 교회는 ‘퀴리에 엘레이손’이란 찬송을 예배 때에 항상 불렀습니다. 로마교회나 그리스정교회는 물론 성공회 루터교회에서도 지금도 “퀴리에 엘리이손” 찬송을 부르고 있습니다. 특히 영성을 추구하는 개신교 예배 때 이 찬송을 부르곤 합니다. 가장 전통적인 기독교 장송찬송곡(鎭魂曲)이<레퀴엠>입니다. 모차르트와 같은 많은 서양 작곡가들이 레퀴엠을 작곡했습니다. 저는 베르디의 레퀴엠을 인상 깊게 들었습니다. 거기서 반복적으로 나오는 노래가 바로 ‘퀴리에 엘레이손’입니다. 우리 찬송가 632장에 한가람감리교회 이보철목사님의 작곡 ‘주여, 주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찬송이 있습니다.(464장도 작곡하였습니다)

***< Κύριε ἐλέησον, Χριστὲ ἐλέησον, Κύριε ἐλέησον.
(로마자 전사) Kyrie eleison, Christe eleison, Kyrie eleison
(영어 번역) Lord have mercy, Christ have mercy, Lord have mercy
(프랑스어번역) Seigneur, prends pitié, O Christ, prends pitié, Seigneur, prends pitié.
(한국어 천주교 번역) 주님 자비를 베푸소서, 그리스도님 자비를 베푸소서, 주님 자비를 베푸소서.
(한국어 정교회 번역) 주님 저희를 불쌍히 여기소서, 그리스도님 저희를 불쌍히 여기소서, 주님 저희를 불쌍히 여기소서.
(한국어 성공회 번역) 주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그리스도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주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나무위키-자비송)

그런데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라고 번역된 말씀을 보면 큰 죄를 지은 후 잘못을 비는 모습이 하나님의 심판을 피할 양으로 거짓된 꾸밈을 보이는 듯한 부정적인 이미지처럼 들립니다. 아버지가 매우 애지중지한 고려청자기를 깨고 아버지에게 매를 맞을 까 눈물 콧물 흘리며 자신을 불쌍하게 보여 아버지의 꾸지람을 모면하려는 모양새를 보는 것 같습니다. 하나님의 용서는 내가 불쌍히 보임으로 불쌍히 여겨 용서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용서는 전적으로 아버지 하나님의 긍휼하심 곧 자비로우신 하나님의 사랑의 은총인 것이지 우리가 불쌍히 보여짐으로 용서받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라고 번역한 말은 오해 살만한 번역이라 하겠습니다. 본래 헬라어 엘레에손은 ‘엘레오‘의 ’동 명 1과 능 2단‘으로 ’자비, 긍휼‘이란 의미이지 ’불쌍히 여기다‘란 이미는 없습니다.

(필자미상. ‘만법통일’. 한국. 종이에 색. 74×46㎝. 가회민화박물관)

 

주간조선([2605호] 2020.04.27. [조정육의 그림 속 사람여행])에 조정육 미술칼럼니스트가 <석가와 예수와 공자가 만났을 때>라는 글을 썼는데, 이 글에서 ‘예수, 석가, 공자’가 함께 이야기하고 있는 작자미상의 그림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세 성인이 주창하는 말씀의 주제로 공자는 仁義, 석가는 慈悲 그리고 예수는 博愛라고 소개하고 있습니다. 慈悲는 불교적인 용어입니다.
불교에서는 모든 중생에게 즐거움을 주고 괴로움과 미혹을 없애주는 자(慈)·비(悲)·희(喜)·사(捨)의 네 가지 무량심을 말합니다. 자무량심(慈無量心)은 모든 중생에게 즐거움을 베풀어 주는 마음가짐이며, 비무량심(悲無量心)은 중생을 불쌍히 여기는 마음으로 고통의 세계로부터 구해내어 깨달음의 해탈락(解脫樂)을 주려는 마음가짐이라고 합니다. 희무량심(喜無量心)은 중생으로 하여금 고통을 버리고 낙을 얻어 희열하게 하려는 마음가짐이며, 사무량심(捨無量心)은 탐욕이 없음을 근본으로 하여 모든 중생을 평등하게 보고 미움과 가까움에 대한 구별을 두지 않는 마음가짐을 말합니다.(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여기서 자비慈悲란 말이 나왔습니다. 그리고 부처님을 大慈大悲하신 관세움보살이라고 섬기고 있습니다. 예수님께 해당되는 博愛는 모든 사람을 평등하게 사랑한다는 말입니다. 고통당하는 사람의 아픔을 함께 나누고 그 아픔을 당신이 대신 짊어지려는 사랑 곧 아가페사랑을 말합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자비를 베푸소서.”라고 하는 말은 마치 부처님에게 염불 외는 것 같은 느낌입니다.
 
그러므로 엘레에손을 굳이 번역한다면 하나님의 사랑이라고 번역함이 좋겠습니다. “예수님, 나에게 하나님의 사랑을 베푸소서.”라고 바디메오가 예수님께 매달리다 시피 하며 외쳐댔던 것입니다. 우리의 삶의 온갖 문제는 오직 하나님이 사랑이 아니면 우리가 아무리 자신을 불쌍한 모습으로 치장을 하고 땅바닥에 머리를 조아리며 용서를 구한다 해도 해결될 문제가 아닙니다. 어떤 정치인은 사람들에게 자신의 잘못을 용서받고 표를 구걸하듯이 큰절을 하거나 머리를 깍고 단식을 하거나 부산에서 서울까지 뜀박질을 하므로 유권자의 동정과 감동을 주고자하지만 유권자들은 그 사람의 속셈을 빤히 들여다보고 있기 때문에 그를 외면하고 한 표의 동정도 마다하였던 것입니다. 이럴진데 만군의 하나님께서 우리가 아무리 불쌍히 여겨달라고 소리치고 애걸복걸해도 하나님은 우리의 속속 깊이를 다 들여다 보고게십니다. 오직 우리가 용서받고 구원받는 일은 오로지 하나님의 사랑의 은총 아니면 불가능한 것입니다.

 

(성라테란성당의 계단)

 

그러므로 루터의 종교개혁도 여기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루터는 하나님께 자신이 무한한 죄인임을 깨닫고 용서를 구하고저 로마의 성라테란 성당의 계단(Scala Sancta)을 무릎으로 기어서 올라가며 회개의 기도를 하였지만, 오로지 의인은 하나님의 사랑의 은총을 믿음으로만 의롭다함을 얻는 다는 사실을 깨닫고 분연히 일어나 종교개혁의 깃발을 올린 것입니다.
 
바디매오는 어떻게 되었습니까?. 예수님은 바디매오에게 이제 고침 받았으니(구원으로 번역하기 보다는 회복하다. 고침받다. 세소켄:소조-동 직 1완 능 3단) ‘가라(휘파게!)’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는 이제 보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그에게 임함으로 그가 건강을 회복하게 되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는 가지 않고 오히려 예수님을 따랐다고 합니다. 그는 하나님의 사랑을 받았으니 예수님을 떠날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따랐습니다. 예수님의 제자가 되었습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은 하나님의 사랑으로 자신의 인생이 변화되었음을 체험한 사람들인 것입니다.

 

1971년 12월, 90세의 할아버지가 인도에 있었습니다. 그는 갑자기, 중풍으로 쓰러져 혼자서 아무것도 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그의 눈은, 초점이 흐려져 글을 읽을 수가 없었고, 오른손은 마비되어 글을 쓸 수도 없었습니다. 또, 누군가의 부축이 없이는, 혼자서 걸을 수도 없었습니다. 비록 중풍이라는 절망에 빠저버린 그였지만, “하나님, 저를 왜 이렇게 만드셨습니까?”라고 불평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변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 참으로 감사한 사실은 나의 믿음은 조금도 흔들리지 않았다는 것이다. 하나님께 모든 것을 맡기고 기도하는 것, 그것이 바로 승리다”라고만 했습니다. 그는, 주변의 도움으로 급히, 미국 보스턴의 병원으로 후송되었습니다. 그의 상태를 진료하던 의료진들은, 그가 노령임을 감안하여, 이구동성으로 “더 이상 걸을 수가 없습니다”라는 절망의 진단을 내렸습니다. 하지만, 6개월 후에, 완쾌되어 1km이상을 걸었고, 오르막과 내리막도 다녔고, 14개월 동안, 50번이나 설교를 했습니다. 그는, “만일 당신의 삶이 조각조각 부서졌다면, 그 조각들을 모두 모아 하나님께 드리세요. 그러면 하나님께서 그 조각들로 아름다운 무엇인가를 만들어내실 것입니다. 갑자기 나를 엄습한 뇌졸중 발작은 장애와 슬픔을 견디는 것이 어떤 것인지 알려주었을 뿐만 아니라, 장애와 슬픔을 긍정적으로 이용하는 것을 삶으로 보여줄 기회가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해질녘을 새벽녘으로 바꾸십니다”라고 했습니다. 이러한 그를, 곁에서 지켜보던 사위는, “그 분의 노년은, 에녹처럼 하나님과 함께 걷고 있었고, 하나님께서 그를 데려가셨다”라고 했습니다. 이렇게, 그의 삶을 통해 명백하게 입증된 메시지를 통해, 그가 남긴 마지막 하나님의 이야기는, “하나님의 예스”입니다. 그의 이름은, “스탠리 존스(E. Stanley Jones, 1884년∼1972년 미감리교회 감독. 인도선교사)목사”입니다.

 

그가 보스턴의 병원에 입원했을 때, 그리고, 모두가 그에게 불가능이라고 했을 때, 그는, 의료진들에게, “한 가지 부탁이 있습니다. 저를 보실 때마다, ‘스탠리 존스,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명하노니, 일어나 걸어라’고 외쳐주십시오”라며, 부탁했습니다. 물론, 이 말에, 의료진들은, 웃었습니다. “선교사님, 저는 베드로도 아니고, 요한도 아닙니다. 그런데. 어떻게? 그런 말을 할 수 있겠습니까?”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그가 강권함으로, 어쩔 수 없이, 의료진들은, 그를 볼 때마다, 그렇게 외쳐 주었습니다. 그때마다, 그는 침상에 누워, 큰소리로 “아멘”으로 화답 했습니다. 의료진들은, 그의 부탁대로 그를 볼 때마다, 거듭, 거듭 외쳐주었습니다. 그 결과, 들것에 실려 들어왔던 그가, 6개월 후에는, 자신의 발로 퇴원하였습니다. 그가 의료진들에게 부탁을 할 때, 주변은 비웃었습니다. 주변 사람들은 이렇게 웃지만, 우리는 웃을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무한하신 사랑이 그를 회복시켜줄 것을 믿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그렇게 한다고 무슨 병이 나을까? 심리적 안정이고, 의지이겠지”라며, 어리석은 일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스텐리 존스는, 살아계신 하나님의 능력을 믿고, 전능하신 하나님이 나의 아버지가 되심을 믿었으며, 하나님의 그 크신 사랑이 자신에게 주고 계신다는 믿음을 가지었기에  “아멘”이라며, 이렇게 입으로 고백하는 것이, 얼마나 놀라운 은혜인지를 잘 알고 있었던 겁니다. 타임지는, 스텐리 존스목사를 “세계에서 가장 위대한 선교사”로 선정하였고, 20세기 최고의 선교사로 불림으로, 사도바울 이후, 가장 위대한 기독교 선교사로 존경받았습니다. 그는 회복한 후, 그의 나이를 생각하여, 고향에서 편히 쉬라는 주변의 권고에도 불구하고, 다시 선교지인 인도로 돌아가서, “건강한 몸”으로, 하나님께서 주신 사명에 충성했습니다.

 

또 한 장면을 마 15:21-28에서 보게 됩니다. 한 가나안 여인이 예수님을 쫒아오면서 자신의 딸이 흉악한 귀신에 사로잡혔으니 딸을 고쳐달라고 소리칩니다. 이 여인도 “주 다윗의 자손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엘레에손 메 퀴리에)"라고 말합니다.

 

2세기말, “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트”는, 가나안 여인의 이름은, “유스타”이며, 그의 딸은 “베레니케”라고 했습니다. 이 여인에 대해, 막 7: 26을 보시면, “그 여자는 헬라인이요 수로보니게 족속이라 자기 딸에게서 귀신 쫓아내 주시기를 간구하거늘”이라고 합니다. 이 여인이, 혈통적으로는, 가나안의 수로보니게 사람이지만, 헬라인 이라는 겁니다. 이런 이방 여인이이 어떤 연유로 예수님을 알았는지 “주 다윗의 자손이여”라고 말한 것입니다. 이 말은 예수님을 메시야로 알고 있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엘레이손 메 퀴리에”라고 외친 것입니다.  메시야만이 절대적인 하나님의 사랑을 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말 성경은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라고 하였는데 이 말은 “나에게 하나님의 사랑을 베풀어 주소서, 하나님의 사랑만이 내 딸을 귀신으로부터 자유와 평안을 얻을 수 있습니다”라는 신앙고백적인 말인 것입니다. 이 이방여인의 외침은, 놀라운 말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래서 28절에서, “여자여, 네 믿음이 크도다(오 귀나이, 메갈레수 헤 피스티스)”라고 말씀을 하셨던 겁니다. ‘여자여’라 함은 헬라어로 ‘귀나이’란 말로 아주 귀한 여인에 대한 호칭입니다. 그러므로 이 이방여인에게 “귀부인이시여, 당신의 믿음이 매우 크십니다.”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흔히 성경에 예수님의 대화를 보면, 반말로 표시되어 있는데, 아닙니다. 예수님은 사람들을 지극히 존경하셨으니 사랑이 가득한 “존댓말‘로 말씀하셨을 것입니다.
그런데 처음엔 예수님은 이 여인의 말을 들은숭만숭 하시었습니다. 모들은 척 하시었습니다. 제자들이 듣고 시끄럽다고 할 정도로 큰 소리 치는 여인을 외면하시었습니다. 우리가 기도할 때, 아무런 응답이 없으면 “하나님이 내 기도를 안 들으신다.” “하나님이 내 기도를 무시하신다.”라는 생각을 하기도 합니다. 분명히 렘 33: 3 “너는 내게 부르짖으라 내가 네게 응답하겠고 네가 알지 못하는 크고 은밀한 일을 네게 보이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니, 기도하면, 하나님이 가타부타 무엇이라도 보여주시어야 하는데, 아무런 응답도 없으니, 이런 생각을 하는 것은 당연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보십시오.  예수님은 가나안 여인의 간절한 외침을 듣지 못한 것이 아닙니다. 제자들이 요청하는 말을 하는 것을 보니, 예수님도 들었습니다. 하지만, 못 들은 척 했습니다. 예수님이 사람들의 간청을 무시한 적이 있습니까? 가버나움 회당장의 요청을 안 들어 주셨습니까? 백부장의 하인이 아프다고 고쳐달라고 요청할 때 즉각적으로 대답하셨습니다. 앞에서 소개한 바디매오가 소리침으로, 주변 사람들이 꾸짖었지만, 예수님이 그를 불렀습니다. 그런데, 가나안 여인의 외침에 대해서는 예수님은 침묵하십니다.
우리가 기도하는 가운데, 답답할 때가 있다면, 하나님의 침묵입니다.  시 116: 1을 보시면, “여호와께서 내 음성과 내 간구를 들으시므로 내가 그를 사랑하는도다”라며, 시편시인은 고백합니다. 하나님은 분명히, 우리의 간구를 듣는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아무리 기도해도, 하나님이 침묵하신다면, 그것으로 인해, 우리는 기도를 포기하게 되고, 믿음을 상실하게 됩니다. 그러나 가나안 여인은 상실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이 누구이신 줄 분명히 알기 때문에 예수님의 침묵에 목적이 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왜 예수님은 침묵하셨을까요? 침묵이 아니라 기다리셨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받을 가나안 여인의 믿음의 분량을 기다리셨습니다. 그래서 마침내 그 여인의 믿음이 “크도다(메갈레)”에 도달 했을 때 놀라운 하나님의 사랑의 은총을 폭포수 같이 부어주신 것입니다.

 

우리에게도 각가지 문제가 있습니다. 그 문제들을 가지고 기도합니다. 우리의 기도의 제목들이 우리들에게는 그 무엇보다 중요한 간절한 기도입니다. 이 보다 더 중요한 문제는 내 인생에 없는듯합니다. 그러나 그 기도에 우리의 믿음의 분량을 저울로 달아 본다면 얼마나 될까요?  ‘메갈레, 크도다’라고 주님이 말씀하실 정도에 이르고 있는지요?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믿음이 작은 자들아 ”(마8:26)라고 말씀 하신 적이 있습니다. 그 믿음의 분량은 기도의 소리에 담겨있거나, 기도의 시간에 담겨있기만 한 것이 아닙니다. 우리들의 일상생활 속에 간절한 믿음이 녹아 저 있느냐가 문제입니다. 우리가 어디를 가거나 누구를 만나거나 무엇을 하거나 거기서 하나님을 만나고 있는가? 거기서 믿음을 볼 수 있는가? 집에서, 식당에서 장터에서 버스 간에서 길거리에서 친구와 만나서 그 어떤 경우에 나의 간절한 믿음이 녹아 저 있는가? 입니다. 다만 기도소리가 크다거나 기도시간이 몇 시간이다거나 그것이 아니라, 나의 생각 속에 맘속에 말 속에 행동 속에 믿음이 녹아 저 있는가? 입니다. 얼마나 하나님을 찾고 있으면 얼마나 하나님께 예배하고 있으며 얼마나 하나님께 감사하고 있는가? 입니다.


학생이 공부하는데 시험 때만 반짝하여 다음날 시험에 100점이었지만 평소에는 비디오게임에만 하고 있다면 그 학생의 학업능력은 결코 크다고 말 할 수 없습니다. 우리들의 모든 사람이 믿음의 주머니가 되어 여기저기서 우리의 믿음들이 주어 담겨져야 합니다. 그래서 묵직한 나의 믿음의 분량을 보시고 예수님께서 “메갈레. 네 믿음이 크도다. 네 소원대로 되리라.(게네데토 소이 호스 델레이스: 네가 원하는 대로) 하나님의 풍성한 사랑이 이 가나안 여인에게 임하니 그녀의 딸이 나았다고 하였습니다.

 

흔히 사람들은 우리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하나님의 능력을 받고자 합니다. 그 힘을 얻는 유일한 방법은 믿음입니다. 그리고 그 믿음으로 하나님의 풍성한 사랑의 은총을 받게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기도의 제목은 ‘퀴리에 엘레이손 메’ 나를 불쌍히 여기소라기 보다, ‘주여, 나에게 하나님의 풍성한 사랑을 베풀어 주소서’라고 늘 기도할 수 있어야 합니다.

종로에 있는 어떤 중국집에는 “맛이 없으면 돈을 안 받습니다.” 라는 문구가 입구에 걸려 있었습니다. 그 집에 어느 날, 할아버지와 초등학교 3학년쯤 되어 보이는 아이가 왔습니다. 할아버지와 손자 아이는 자장면 두 그릇을 시켰습니다. 할아버지의 손은 그가 험한 일을 얼마나 많이 했는지를 드러내 보이고 있었습니다. 가난에 찌든 그의 모습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아이는 자장면을 맛있게 먹었습니다. 할아버지는 입가에 자장을 묻혀가며 부지런히 먹는 손자를 안쓰러운 마음과 흐뭇한 마음으로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아이가 자장면을 거의 다 먹어가자, 할아버지는 아이의 그릇에 자기 몫의 일부를 덜어 옮겼습니다. 할아버지와 아이가 나누는 얘기가 들려왔습니다. 부모 없이 할아버지와 단 둘이 사는 모양이었습니다. 손자가 하도 자장면을 먹고 싶어 해, 큰맘 먹고 데리고 나온 것 같았습니다.
두 사람이 자장면을 거의 먹었을 때, 주인이 주방 쪽을 향해 말했습니다. “오늘 자장면 맛을 못 봤네. 조금만 줘 봐.” 자장면 반 그릇이 금세 나왔습니다. 주인은 한 젓가락 입에 대더니 주방장을 불렀습니다. “기름이 너무 많이 들어간 거 같지 않나? 그리고 간도 잘 안 맞는 것 같아. 이래 가지고 손님들한테 돈을 받을 수 있겠나.” 주방장을 들여보내고 주인은 아이가 막 식사를 끝낸 탁자로 갔습니다. 할아버지가 주인을 쳐다보자, 그는 허리를 깊숙이 숙이며 말했습니다. “오늘 자장면이 맛이 별로 없습니다. 다음에 오시면 꼭 맛있는 자장면을 드실 수 있도록 하겠습니다. 저희 가게는 맛이 없으면 돈을 받지 않습니다.” 할아버지가 어찌 해야 할지를 몰라 머뭇거리고 있자, 주인은 재차 그냥 가시라고 말했습니다. 손자의 손을 잡고 문을 열고 나가던 할아버지가 뒤를 한 번 돌아보았습니다. 주인이 다시 인사를 했습니다. 주인의 따스하고 깊은 뜻을 헤아린 할아버지는 더듬거리는 목소리로 말했습니다. “고, 고맙구려.” 주인은 말없이 환하게 웃었습니다.

하나님의 풍성한 사랑을 받은 성도는 그 사랑을 이웃에게도 나눌 수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 사랑을 받기만하는 욕심장이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광야에 내린 만나처럼 그날 나누지 않으면 사라집니다.  하나님의 풍성한 사랑은 나눌 때에 더 큰 풍성한 사랑응 우리는 받게 됩니다. 짜장면 집 주인은 분명히 더 큰 풍성한 사랑을 받을 것입니다.

‘퀴리에 엘레에손“이라 기도 하는 성도는 길을 가다 뒤집어진 채 무력하게 발버둥이지는 풍뎅에를 보고 걸음을 멈추고 작은 나뭇가지로 바로 세워 주어야 합니다. 왜냐면 그 풍뎅이도 ’퀴리에 엘레에손’이라 외치고 있을지 모르기 때문입니다. 배고픈 길냥이에게 양이 밥을 주는 일도 풍성한 하나님의 사랑을 나누는 일입니다. 하물며 우리의 이웃들 중에 그리고 북한동포와 먼 아프리카의 가난한 사람들이 어디에선가 ”퀴리에 엘레에손 메“라고 외치고 있을 것입니다. 우리가 우리의 믿음의 분량을 그들에게 나누어 준다면 주님은 우리에게 나누고도 남을만한 넘치는 하나님의 풍성한 사랑을 주실 것입니다.   

 

우리가 밤을 새가며 기도하는 것도 좋습니다. 며칠씩 금식하며 기도하는 것도 좋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우리의 일상생활 속에 “퀴리에 엘레에손” “주님 저에게 풍성한 하나님의 사랑의 은총을 베풀어 주소서”라고 기도한다면, 하나님은 기뻐하시고 “네 소원대로 되리라”고 말씀해 주실 것입니다.

 

우리 라온코이노니아는 하나님의 풍성한 사랑의 은총을 받는 사람들의 공동체입니다. 잊지 맙시다. 하나님의 사랑을 잃어버리지 말고 그 사랑을 더욱 사모하는 우리들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퀴리에 엘레에손 하나님의 풍성한 사랑의 은총이 우리 모두에게 충만히 임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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