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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병호목사의 교회이야기

전병호 목사의 설교



2020년 5월 3일 주일아침예배  요 1:43-51  用與不用 聽與不聽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이라 하지만 과연 모두 하나님의 쓰임 받을 사람들인가에는 의문입니다. 쓰임 받음 사람이 있고 쓰임 받지 않을 사람이 있습니다. 그러면 어떤 사람이 쓰임 받고 누구는 쓰임 받지 못하는 가? 그 기준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느냐 아니 듣느냐에 결정에 됩니다. 오늘 설교 제목이 ‘용여불용 청여불청(用與不用 聽與不聽)’이라하였습니다. 이 말은 중국 한나라를 세운 유방의 신하인 한신의 고사에 얽힌 이야기에서 나온 말이지만, 그 고사 이야기는 생략하고 다만 한신이 말한  ‘용여불용 청여불청’이란 말을 채택하여 설교제목으로 삼았습니다. 이 말은 ‘쓰는 것과 쓰지 않는 것, 듣는 것과 듣지 않는 것’이란 의미입니다. 누구에게 쓰임 받느냐 쓰임 받지 못하느냐, 누구의 말을 듣느냐 듣지 않느냐, 이것이 인생이 좌우되고, 나라가 좌우되고, 세계와 역사가 좌우됩니다.

 

빌립보(개역성경에는 빌립이라고 하였지만 원어 이름은 필맆포스입니다. 여기 말씀에서 빌립보라고 부르려고 합니다.)는 예수의 부름을 받을 당시 세례 요한의 제자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세례요한에게 세례 받은 후 빌립을 만나 “나를 따르라(아콜루데이 모이)” 부르시는 말씀을 따라 예수님의 제자가 되었습니다. 예수님의 부르심을 듣고 예수님의 제자가 되었습니다. 빌립은 안드레와 베드로와 같은 벳세다 출신이었습니다.(요1:43,44)


오늘 봉독한 본문 말씀에서  친구 나다나엘을 예수에게 데리고 가 그도 사도가 되게 하였습니다. 나다나엘은 예수님의 12사도 중 바돌로메입니다. 나다나엘은 자주 커다란 무화과나무 아래에서 묵상의 시간을 가졌습니다. 아마도 나라와 민족을 위해서 그리고 이제나 저제나 메시야가 오시지나 않을까 메시야를 기다리며 기도하곤 하였습니다. 예수님도 나다나엘이 그처럼 기도하는 모습을 오며 가면 그를 눈 여겨 보시었습니다. 그에게 거짓이 없는 진실함이 있다는 것을 아시었습니다. 마침내 빌립보의 소개로 예수님을 그를 만나게 되었습니다. 나다나엘도 예수님의 말씀을 듣게 된 나다나엘은 그가 그처럼 기다리던 메시야가 예수님이심을 깨닫고 12사도 중에 최초로 신앙고백을 하였습니다. “당신은 하나님의 아들이시오, 당신은 이스라엘의 임금이로소이다.(수 에이 호 휘오스 투 데우, 수 바실류스 에이 투 이스라엘)” 나다나엘 역시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예수님의 제자가 되었습니다. 나다나엘의 고향 가나에 그를 기념하는 교회가 있습니다. 십여 년 전 성지순례 중 잠시 바돌로메 기념교회를 방문하여 예배드린 적이 있습니다.

 

가나 바돌로매기념교회

 

마태, 마가, 누가복음서에는 단지 12사도 중 빌립보 이름을 소개하는 것으로 그에 대해 어떤 이야기도 전해있지 않습니다. 그러나 요한복음서에서는 매우 중요한 장면 중에 빌립보 사도가 연관되어 있는 것을 알게 됩니다. 오는 본문말씀에서 나다나엘을 제자로 삼으신 장면과 요6장 1절-15절에 있는 오병이어의 기적 역사의 시작이 빌립보로부터 시작되는 것을 보게 됩니다.

벳새다 들판에 수많은 사람들이 몰려와 예수님으로부터 복음을 듣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가난과 병고 속에 소망을 일어버린 사람들, 로마의 식민지 통치에 시달리며 갈 바를 알지 못한채 나라 잃어버린 한 서린 마음을 풀길 없어 방황하는 사람들, 율법적인 신앙에 얽매어 희망도 사랑도 모으고 삶의 의욕도 상실한 백성들(오클로스ὄχλος)에게 복음을 전하셨습니다. 희망과 사랑을 품게 하셨습니다. 이 병들고 썩어가는 식민지 땅에서 무엇을 기다려야 하는가를 분명히 알려 주셨습니다. 그런데 금강산도 식후경이라는 말이 있듯이 아침부터 이제 해가 주천을 지나 서쪽으로 기울어져 가는 지금까지 사람들은 쫄쫄 굶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말씀에 배불러 배고픈 줄도 모르고 시간 가는 줄도 모르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제자 중 한사람인 빌립보는 사람들의 배에서 꼬루륵 하는 소리를 들으며 그들이 아침부터 아무것도 먹은 것이 없다는 것을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에게 사람들의 사정을 말합니다. “예수님 저들을 마을로 보내어 무엇을 먹게 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이 말씀을 들으신 예수님이 너희들이 먹을 것을 주어라(도테 아우토이스 휘메이스 ㅎ파게인)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 그들을 다 먹이려면 2천만 원이 있어도 모자랄 것입니다.” 예수님이 이 말씀을 하신 이유는 빌립보를 시험하고자 하이라고 요6:6에서 말씀하시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미 사람들을 어떻게 먹이실 것인가를 생각하고 계셨습니다. 그러나 육신의 문제를 해결하는 데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께서 해결하시리라는 믿음을 가지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을 깨우치시려는 빌립보에게 믿음을 가르치시었던 것입니다. 여기서 시험(페이라조)은 빌립보가 사람들의 배고파하는 모습을 보고 동정심을 가지었는가에 대한 시험이 아니라 그의 믿음을 더 높이어 절대적인 믿음을 가지게 하려는 예수님의 가르침이셨던 것입니다(F. W. Grosheide). 그리고 오병이어로 오천 명을 먹이고 12광주리가 남아지는 기적사건이 있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창조하신 모든 동식물에게 가장 기본적 욕구는 것은 먹을 것에 대한 문제입니다. 아이가 태어나 제일 먼저 찾는 것은 엄마의 젖입니다. 송아지가 태어나 멘 먼저 달려간 곳은 바로 암소의 젖입니다. 사람들은 살기위해서 먹느냐, 먹기 위해 사느냐란 문제로 논쟁합니다. 소크라테스는 악인은 먹고 마시기 위해서 살고, 선인은 살기 위해 먹고 마신다고 말하였습니다. 어떤 대답이 정답이라고 할수 없습니다. 그러나 먹지 않으면 죽는다는 것은 사실입니다. 요즈음 TV를 보면 두 가지 상반된 장면이 나옵니다. 하나는 맛있는 음식을 배부르게 먹는 예능 프로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 프로가 끝나면 아프리카의 가난한 아이들, 우유 한 컵 없어 말라 죽어가는 아이들을 돕자는 구호단체의 호소가 나옵니다. 먹는게 인생 문제의 기본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빌립보에게 네가 해결하라고 말씀합니다. 어떻게요 2백 데나리온이 아니라 단 2데나리온도 없는데.   

 

우리는 흔히 우리나라가 큰 일 났다고 모두 걱정합니다. 부정과 부패, 그리고 불신의 풍조가 날로 더해간다고 합니다. 정치가 혼돈을 거듭하고 경제가 흑암에 묻힌 듯 앞길이 캄캄하고, 사람들의 정신은 공허한 가운데 갈 길을 잃어버려 술에 취하고 쾌락에 세월을 묻어버립니다. 그렇게 가지 말라고 정부가 말하고 제주도 사람들도 제발 오지 말라고 심지어 유채밭을 갈아엎었는데 가지 않으면 인생의 기쁨이 없다는 듯 어제에도 20만 명이 제주도 가는 비행기를 탔다고 합니다. 그러면서도 이것을 나 혼자서야 세상을 밝힐 수 있겠는가? 우리 몇 사람이 어떻게 나라를 잘 살게 하겠느가?  그래서 잘못된 것을 보긴 보면서도, 안되는 줄 알긴 알면서도, 이러다가는 큰 일 나겠다고 세상을 염려하면서도 할 수 없다고 그날그날 시간을 허송세월 보내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5천 명을 먹인 것이 빵을 많이 사다가 나눠주어서가 아닙니다.


예수님은 너희가 먹을 것을 주라고 말씀합니다. 가난은 나랏님도 해결 못한다고 하지만 예수님은 교회를 향해 너희가해결하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우릴 시험하십니다. 그럴 믿음이 있는가? 우리가 시작하면 예수님이 움직이신다는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모세는 지팡이를 들엄ㅁㅆ을 뿐이지만 믿음으로 들으니 홍해바다가 갈라졌습니다. 여호수아는 믿음으로 첫 걸음을 요단강 물에 담갔을 뿐인데 요단강이 흐름을 멈추었습니다. 다윗은 믿음으로 조약돌 하나를 던졌는데 골리앗이 죽었습니다. 제자들이 물고기 두 마리와 떡 다섯 덩이를 예수님께 가져왔는데 5천명을 먹이고도 12광주리가 남았습니다.  
빌립보가 믿음으로 쓰임 받으니 벳세다 광의 배고픈 사람들 오클로스들이 배불리 먹을 수 잇었습니다. 우리들이 주님으로부터 쓰임 받으면 내 작은 쓰임이라도 수 많은 사람들에게 큰 하나님의 은혜를 나눌 수 있게 됩니다. 용여불용 청여불청입니다.


요12:20절 이하에 보면 예수님이 십자가 지시기 전날 헬라인 몇 사람이 예수님을 만나러 왔습니다. 아르메니아 정교회에 의하면, 당시 아르메니아왕 업크르가 중한 병에 걸려 백약이 들지 않아 죽을 날만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세계 여러나라에 물건을 팔러다니는 상인들에 의해서 전해지길 유대 땅에 예수라는 선생이 온갖 병자들을 고친다는 소문을 들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모시고 오라고 신하 몇 사람을 보내었던 것입니다. 바로 그 사람들이 예수님을 찾으러 와 먼저 만난 사람이 바로 빌립보이였다는 것입니다. 아마도 빌립보는 외부인들이 오면 가장 먼저 만나 예수님께 안내하는 안내자 역할을 하였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 외국인이 에수님을 만나러 오셨다고 말씀드리니, 예수님이 하시는 말씀이 “ ”인자가 영광을 얻을 때가 왔도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 저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고 말씀 하십니다. 무슨 동문서답하듯이 불교식으로 말하면 禪問答처럼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나 동문서답도 아니고 선문답도 아닙니다.

 

예수님은 지금 십자가를 지시기위한 준비기간입니다. 어찌 먼 북쪽의 나라 아르메니아를 갈 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제자 중에 다대오를 그곳으로 가게 하였습니다. 제자가 그 곳에 가서 업크르왕의 병을 예수님의 이름으로 고치었습니다. 왕은 다대오에게 복음을 듣고 세례를 받고 최초의 기독교 국가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 후 예수님을 모르는 왕으로 복음이 사라졌었지만 301년 아사시드 왕조의 트리다테스 3세 때 성 그레고리가 복음을 다시 전하니 영왕이 동식으로 기독교를 국교로 정하였습니다. 아직 기독교를 박해하여 수많은 교인들이 순교하던 때였습니다. 그 후 12년 후에 콘스탄틴 황제로 기독교가 공식적으로 로마의 국교가 되었던 것입니다.  지금도 아르메니안 나라는 주변 터키 이란 아제르바이잔 조지아등 이슬람 국가들에 둘러싸여 있지만 여전히 인구의 99%가 기독교의 신앙을 이어오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 지시기 전날 예수님을 찾아온 그들로 말미암아 지난 2000년 동안 기독교 국가로 있습니다.  아르메니아 정교회는 2013년 10월 30일 부산에서 열린 세계교회협의회(WCC) 제10차 총회에서 아르메니아정교회 수장인 카레킨 2세 총대주교가 개막 설교를 하므로 아르메니어교회의 위상을 세계교회에 보여주기도 하였습니다. 그 시작은 역시 빌리보로부터 출발하였던 것입니다. 이처럼 2000년 전 주님으로부터 쓰임 받은 아르메니아 백성들 지금도 이교국가들 가운데 당당하게 주님의 영광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용여불용 청여불청입니다.

 

빌립보사도가 마지막으로 성경에 소개 된 장면은 요14장 8절-15절에서입니다.
요14:6,7에서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너희가 나를 알았더라면 내 아버지도 알았으리로다 이제부터는 너희가 그를 알았고 또 보았느니라.” 라고 말씀하시니 빌립보가 “ 주여 아버지를 우리에게 보여 주옵소서 그리하면 족하겠나이다.”라고 묻습니다. 이 빌립보의 말에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다.”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10절,11절에서 “내가 아버지 안에 거하고 아버지는 내 안에 계신 것을 네가 믿지 아니하느냐? 내가 너희에게 이르는 말은 스스로 하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셔서 그의 일을 하시는 것이라. 내가 아버지 안에 거하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심을 믿으라 그렇지 못하겠거든 행하는 그 일로 말미암아 나를 믿으라.”고 말씀하시었습니다. 그리고 계속해서 기독교의 핵심이 되는 마지막 설교말씀을 제자들에게 하시었습니다. 이렇게 예수님의 중대한 설교의 시작은 바로 빌립에 의해서 시작된 질문 때문이었습니다.

사람들은 확실한 것에 대한 것을 믿으려고 합니다. 그러나 무엇이 확실하냐에 대해서는 자신있게 말하지 못합니다.  김정은이 죽었다고 확신하다고 중장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신문에서도 방송에서도 이구동성 김정은이 죽었다고 확신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몇일전 제 한 친구가 카톡으로 김정은이 죽었다는데 문재인은 안 죽었다고 하니 무엇이 진실이냐? 아무래도 우리 정부가 북한 정권을 보호하는 것 같다고 말하였습니다. 그런데 김정은이 어제 TV에 나타나 살아있음을 보여 주었습니다. 그러닌까? 하는 말이 두고봐야 안다고 말합니다. 물론 두고 보면 알겠죠. 모든 사람은 다 죽으니 언제 죽느냐가 문제입니다. 그리고 가짜뉴스를  문재인대통령 보다 더 확신하는 사람들의 확신은 실은 그들이 불확실한 인생을 살기 때문입니다.
빌립보가 예수님에게 하나님아버지를 보여 달라고 질문을 합니다. 아마도 모든 세계 사람들을 대신해서 질문하고 있다고 하겠습니다.  고등학교 다닐 때 친구가 나에게 하나님을 보여 다고 그러면 하나님을 믿겠다고 말하던 친구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후 그는 교회 집사가 되었습니다.  

왜 사람들은 가짜뉴스를 따르고. 전광훈목사의 말에 아멘하며, 신천지이만희에게 맹종합니까? 사람들은 진실을 들을 기가 없으면 진실한 설교를 들을 귀가 없으며 진실한 가르침을 들을 귀가 없으니 그 이유가 무엇이 입니까? 예수님도 일곱교회에 말씀하시면서 들을 귀가 있는 자들을 들을 지어다라고 말씀하시었습니다. 그렇게 초대교회에도 들을 귀 없는 사람들이 많았다는 말씀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하나님이 눈에 보인다면 어찌 그런 말들을 할 것입니까? 어차피 보이지 않으니 아무 말이나 마구잡이로 하면 따를 사람은 따르라고 큰 소리 치는 것입니다. 
글을 모르면 문맹이라고 말합니다. 색을 구별 못하면 색맹이라고 말합니다. 믿음이 있다고 말하면서 진리를 모르는 사람을 진맹이라하고, 성경을 보면서 마치 거꾸러 보듯하는 사람을 영맹이라고 말할 것입니다. 하나님을 믿지 못하는 것은 하나님에게 문제가 있어서가 아니라 그의 눈이 멀었기 때문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이 말씀하시기를 너는 보는 고로 믿느냐 보지 못하고 밌는자가 복되도다라고 의심하였던 도마에게 당신의 허리 창자국을 보여주시면서 예수님이 말씀하시었습니다. 
몇일 전 도올 김용옥됴수가 쓴 예수 전을 읽었습니다. 그리고 책장을 덮으면서 그가 참으로 불쌍하였습니다.  글은 유려하고 온갖 동서양 지식을 자랑하듯 퍼 날랐지만 마치 신학교 1학년 성경개론을 공부하고 난 다음 열심히 예수전을 썼듯, 생명의 예수는 그의 책에 없었습니다. 그는 빌립보처럼 아버지를 보여 달라고 질문을 하였지만 예수님이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다라는 예수님의 말씀은 듣지 못하였습니다. 그러니 저는 세상에서 가장 잘난 하바드박사님 김용옥교수가 얼마나 불쌍한지 눈물을 흘렸습니다. 언제, 그의 눈먼 영이 눈을 뜰 수 있을 까요?라고 그를 위해 기도하였습니다.

요14:11 "내가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심을 믿으라 그렇지 못하겠거든 행하는 그 일을 인하여 나를 믿으라"

헤롯왕에게 죽임을 당하던 세례요한이 예수님이 하신 일과 말씀을 보고 안신하고 평안히 죽었습니다. 수많은 순교자들이 예수님을 나의 구주요 부활하신 하나님의 아들이시오 영존하시는 하나님이심을 고백하며 순교하였습니다. 지금도 세계 수십억 사람들이 주기도문을 외우며 사도신경을 고백하며 예배를 드리고 있습니다.  그들이 김용옥박사보다 어리석어서 올라서 바보라서 예수그리스도를 고백하고 있는 것일까요?

용여불요 청여불청 用與不用 聽與不聽 쓰임 받는 자와 쓰임 받지 못하는 자, 듣는 자와 듣지 못하는 자.
사람들을 이 둘로 분류하게 됩니다, 우리는 쓰임받는 자인가? 아니면 끄임 받지 못한 자인가? 우리는 말씀을 잘 듣는 자인가? 아니면 듣지 못한 자인가?

라온코이노니아 우리는 예수님의 12 사도 중에 잘 알려져 있지 않은 빌립보 사도를 통해서 주님의 말씀을 잘 듣고 주님으로부터 올게 쓰임 받는 자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오늘 빌립보 사도를 특히 말씀드리는 이유가 있습니다. 오늘 5월3일이 빌립보 사도 기념주일입니다.

우리 주 예수그리스도의 은혜와 평강이 우리 모두위에 함께 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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