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전병호목사의 교회이야기

전병호 목사의 설교



2019년 9월 15일 주일아침 예배 마 5:8 맑은 마음

 

 

400년 전 임진왜란 때에 선조의 측근에서 왕을 보필한 송강 정철(松江 鄭澈 1536-1593)은 조선시대 가장 유명한 시조가 이였습니다. 그의 시조 가운데 하당양야(霞堂凉夜) 하당의 서늘한 밤이란 시조가 있습니다. 그 일부만 소개하면,

 

秋夜自無寐 散步臨前楹 추야자무매하고 산보임전영이네

가을밤에 스스로 잠이 없어서 거닐어 앞 난간을 다다르니

 

明月東方來 照我胸襟淸 명월동방래하여 조아흉금청이네

밝은 달이 동쪽에서 두둥실 솟아 내 가슴에 비추어 마음이 맑아지고

 

凉風度溪水 時有松筠聲 양풍탁계수하자 시유송균성하네

선들바람 시냇물을 스쳐갈 적에 소나무 대나무는 소리를 하네.

 

저희 가정이 시골에 와서 가장 기쁜 일은 자연과 가깝게 살고 있는 것입니다. 지난 추석날 밤 하늘에 두둥실 떠있는 보름달을 바라 본 기쁨은 너무나 컸었습니다. 인생을 지금까지 살면서 이렇게 한가위 보름달을 마음 편히 바라본 때가 아마도 처음이었던 것 같습니다. 400여년전 정철선생이 보름달을 바라보며 “明月東方來 照我胸襟淸 명월동방래하여 조아흉금청이네, 밝은 달이 동쪽에서 두둥실 솟아 내 가슴에 비추어 마음이 맑아지고.”라고 읊었듯이 보름달을 바라보는 제 마음이 맑아지는 듯하였습니다. 또한 정철선생이 “ 凉風度溪水 時有松筠聲 양풍탁계수하자 시유송균성하네, 선들바람 시냇물을 스쳐갈 적에 소나무 대나무는 소리를 하네”라는 말대로, 뜰악에서 보름달을 바라보던 때에 어디로부터인가 서늘한 바람이 불어 뒷산의 소나무 대나무를 스치며 가니 나무들이 스스스 노래하듯 들려왔습니다.

 

여러분, 보름달을 바라보며 마음이 맑아지는 경험을 하신 적이 있으십니까? 바람소리에 대나무 소나무가 흔들리며 노래하는 소리를 들으신 적이 있습니까? 저는 제 집 뜰에 서서 밤하늘에 두둥실 떠있는 보름달을 바라보며 한없이 마음이 맑아지듯 하였습니다. 뒷산의 대나무와 소나무들이 흔들리며 노래하듯 하였습니다. 제 집 뜰에 있는 나무들이 제각기 악기를 연주하는 듯 하였습니다. 이 나무들의 연주를 들으며 제 마음은 한없이 맑아지게 되었습니다. 그러면서 언제나 이처럼 마음이 맑아질 수 없을까? 세상사람들이 이처럼 마음들이 맑아져 있으면 얼마나 세상이 아름다울까?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중국 당나라 시인으로 왕유(701?~761)라는 분의 시로

秋夜獨坐 추야독좌 가을밤에 홀로 앉아 라는 시가 있습니다.

 

深山欲二更 심산욕이갱 (獨坐悲雙鬢 독좌비쌍빈 空堂欲二更 공당욕이경)

雨中山果落 우중산과낙

燈下草蟲鳴 등하초충명

白髮終難變 백발종난변

黃金不可成 황금불가성

欲知除老病 욕지제노병

唯有學無生 유유학무생

 

깊은 산골 밤은 깊어 가고(홀로 앉아 양 쪽 귀밑머리 희어짐을 서글퍼 하노라니

빈 집에서 밤 이경(二更)을 맞이하네.)

빗속에 산 과일 떨어지고

등불 아래 풀 벌래 우는구나

희머리 끝내 바꾸기 어렵나니

쇠로 황금을 만들 수는 없는 법이니

늙고 병들지 않는 법 알고 싶어

오르지 무생(無生)을 배울 뿐이네.

 

이글 가운데

雨中山果落 우중산과낙 빗속에 산 과일 떨어지고

燈下草蟲鳴 등하초충명 등불 아래 풀 벌래 우는구나

라는 글이 참으로 좋습니다.

 

홀로 산중 깊은 밤에 등 밝히고 책을 일고 있는데 밖에는 가을비가 내리고 있습니다. 가만히 비 소리를 듣고 있자니 비 내리는 소리와 함께 툭 툭 과일이 떨어지는 소리가 들리고, 작은 등불이 비취는 창밖 섬돌아래 귀뚜라미 우는 소리들은 시인의 마음이 맑아있지 않으면 들을 수 없는 소리들입니다.

 

가을에 마음을 맑게 가지면 자연의 오묘한 소리들을 들을 수 있습니다. 마음이 복잡하고 어두우면 세상의 시끄러운 소리만 듣게 되고 그러자면 정신이 어지럽고 눈앞이 캄캄하여 가을밤 깊은 밤 산속을 해매이듯 인생길에서 방황하게 됩니다. 저도 조용히 추석 달빛 아래 앉아 가만히 귀 기울이며 어디선가 풀벌레 우는 소리를 들었습니다.

 

맑고 고운 마음으로 살 때에 행복도 가까이 옵니다. 맑은 마음으로 희망을 바라보면 행복이 보름달처럼 떠오르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마음이 힘들고 지쳐 있으면 맑은 마음이 사라지고 어두운 밤처럼 앞을 볼 수가 없습니다. 어떻게 맑은 마음을 가질 수 있을까요? 먼저 마음을 비워야 합니다. 욕심을 비우고, 미움을 비우고, 남 탓도 비우고, 슬픔이나 괴로움도 비우고 힘들다거나 외로움도 비우고 그리고 뜻을 곱게 가져야 합니다. 뜻이 환해지면 마음이 밝아집니다. 마치 마음 안에 태양이 들어오듯 어둠이 사라집니다. 사람들은 세상이 복잡하다고 마음이 흔들립니다. 사람들이 싫다고 미워합니다. 사는 게 괴롭다고 불평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마음이 맑지 않아서 세상이 그렇게 보이고 사람들이 그렇게 여겨집니다.

 

삼국지에 나오는 유명한 제갈공명이 아들에게 유언의 말을 남기었는데, 이런 유언이었습니다.

비담박무이명지 / 非澹泊無以明志 담박하지 못하면 원대한 뜻을 세울수 없고 – 마음이 맑아야 뜻이 밝게되고

비녕정무이치원 / 非寧靜無以致遠 마음이 평온하지 않으면 뜻을 멀리 이룰수 없다-마음이 고요해야 크게 이룰수 있다.

한마디로 너의 큰 뜻을 이루려면 먼저 마음을 맑게 가지라는 말입니다.

 

예수님은 언제나 맑은 마음을 가지셨습니다. 예수님의 마음은 텅 비었습니다. 아무 욕심도 없으셨고, 누구를 미워한 적도 없으시고, 언제나 빈 마음 이셨습니다. 그 빈 마음에 성령께서 가득히 계시니 마치 태양빛 보다 더 밝은 성령의 빛이 예수님의 마음에 가득 하였습니다. 그 밝은 빛이 오늘날 까지 그리고 세상 끝 날까지 세상 모든 사람들의 마음을 밝게 환하게 비추시는 우리 마음의 태양이 되셨습니다. 마음이 맑아야(호이 카다로이 테 카르디아) 하나님을 볼 수 있다고 예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사람은 다 깨끗한 것을 좋아 합니다. 그래서 아침저녁 세수를 하고 밖에 나갔다가 들어오면 손을 씻습니다. 옷이 더러우면 세탁을 하고 방안에 어지러우면 청소하고 물건을 정돈합니다. 곰팡이나 세균은 주로 주변이 더러운 곳에서 생깁니다. 파리나 모기도 더러운 곳에서 생겨납니다. 필리핀이나 인도 캄보디아의 가난한 동네에 가보면 더럽고 지독한 냄새가 코를 찌릅니다. 120년 전 우리 군산도 그러했습니다. 그런데 오늘 군산의 거리는 깨끗합니다. 소위 문명도시가 되었습니다. 선교사들이 가난한 나라에 가서 선교할 때 가장 먼저 할 일은 주변을 깨끗이하는 습관을 가르치는 일입니다. 그러나 선교의 근본 목적은 그들의 마음을 깨끗이 하도록 도와주는 일입니다. 구원이란 바로 마음을 깨끗이 하고 영혼을 맑게 하는 일입니다. 왜냐면 마음이 맑지 않으면 하나님을 볼 수 없기 때문입니다.

 

구약성경 민수기 5:1-4에 "1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2 이스라엘 자손에게 명령하여 모든 나병 환자와 유출증이 있는 자와 주검으로 부정하게 된 자를 다 진영 밖으로 내보내되 3 남녀를 막론하고 다 진영 밖으로 내보내어 그들이 진영을 더럽히게 하지 말라 내가 그 진영 가운데에 거하느니라 하시매 4 이스라엘 자손이 그같이 행하여 그들을 진영 밖으로 내보냈으니 곧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신 대로 이스라엘 자손이 행하였더라"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진영을 정결하게 하기 위하여, 모든 나병환자를 진밖으로 내보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왜냐하면 나병 환자는 의식법상 부정한 자로 규정 되어, 부정한 자는 하나님을 가까이 할 수 없기 때문이었습니다(레13장). 특별히 나병의 증상은 그 전염성과 파괴성에 있어, 죄의 증상과 매우 흡사합니다. 피부병의 일종인 문둥병의 증상은 보통 피부에 나타난 작은 반점으로부터 시작됩니다. 때문에 사람들은 처음에는 그것을 대수롭지 않게 여깁니다. 하지만 그 반점은 점점 커지면서 반점이 생긴 자리는 감각이 무뎌지게 되고, 마침내는 결국 그 부위부터 시작해서 온 몸이 썩게 되는 것입니다. 또 죽은 사람을 만지거나 그 옷이라도 만지면 부정하다고 해서 그런 사람은 하나님의 진 밖으로 나가야 합니다. 죄의 특징은 오염입니다. 그러므로 아무리 사소한 죄라도 만지면 죄로부터 오염됩니다. 그 죄의 오염된 사람이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 설수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죄는 모양이라도 버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가 지극히 작은 죄에도 소홀히 하지 말아야 할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사람들이 아무렇지 않게 여기는 작은 죄가 그 사람의 인생을 파멸로 이끄는 출발점이 될 것입니다. 그런데도 많은 사람들이 작은 죄에 대해서는 놀라울 정도로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것 같습니다. 즉 사람들 사이에서 하는 작은 거짓말이나, 작은 이익을 위해서 부정한 방법을 사용하는 것들, 작은 액수의 도박을 하는 것들, 순간의 위기 를 모면하기 위해 거짓말로 남을 속이는 것과 같은 죄를 짓고서는 ‘그것쯤이야 어때!’ 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도 여러분, 바로 그런 작은 죄부터 조심해야 합니다. 작은 죄는 그 죄를 감추기 위해 또 다른 죄를 짓도록 만들고, 그러다보면 그러한 범죄 행위가 습관이 되어 죄에 대해 무감각해짐으로 마침내는 돌이킬 수 없는 흉악한 죄인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아무리 작은 죄라도 사소하다고 생각되는 죄라도 바로 회개하여야 합니다. 그 작은 죄가 점점 큰 죄로 커지게 됩니다. 바늘도둑이 소도둑 된다는 속담처럼 바늘 죄가 소 죄가 된다고 하겠습니다. 그 작은 죄로 회개하지 않아 큰 죄가 되고 그래서 지옥 간다면 얼마나 억울하고 어리석은 일입니까? 그러므로 우리는 비 기독교인들이 그냥 넘어가는 지극히 작은 죄라도 우리 기독교인들은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회개하고 보지도 말고 듣지도 말고 가까이 하지도 말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언제나 맑은 마음을 가져야 하나님을 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언제나 맑은 마음을 가질 수 있습니까?.

간단한 방법이 있습니다. 더러워진 거울을 닦듯 마음을 늘 잘 닦아야합니다. 마틴 루터는 “우리가 매일 수염을 깎듯이 우리 마음을 다듬어야 된다.”고 말합니다. 신앙생활은 곧 마음을 지키는 것입니다. 우리가 마음을 바르게 지키지 못하면 순간적으로 죄의 유혹에 넘어지고, 타락합니다. 마음의 밭을 잘 가꾸지 않으면 마귀가 가라지를 뿌리고, 세상의 잡초가 우거지게 됩니다. 그러므로 마음은 양심에 어긋남이 없는가? 자신을 되돌아보고 마음의 잡초들은 뽑아내고 부서진 마음 고치고 비뚤어진 마음은 바로잡아 언제나 바른 양심을 가져야 합니다.

바른 양심이란 무엇입니까? 사도행전 23:1에 바울사도께서는 “범사에 양심을 따라 하나님을 섬겼노라(에고 파세 수네데세이 아가데)”라고 말씀하였습니다. 바울의 양심은 무엇입니까? 바로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우리에게 양심은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는 일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지 못하면 양심이 더러워집니다. 병들게 됩니다. 급기야 딱딱하게 굳어져 철판이 되어 무슨 말씀을 전해도 그의 마음 안에 들어가지 못합니다. 결국 그는 말씀을 못 들어서 멸망이 아니라 그의 철판 같은 마음 때문에 멸망에 이르게 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에 비추어 사는 사람은 어디서나 선한 양심 곧 맑은 마음으로 살기 때문에 두렵거나 겁내지 않습니다. 언제나 용기 있게 삽니다. 바울사도는 범사에 양심 따라 하나님을 섬기고 있었기 때문에 결박되어 공회 앞에서 재판을 받을 때도 당당하였고 거칠 것이 없었습니다. 마르틴 루터가 종교개혁을 한 죄로 1521년 4월 17일 웖스 국회에서 재판을 받을 때에 “나는 성경과 명백한 이성에 따라 설득되지 않는 한 내 주장은 철회할 수 없다. 내 양심은 하나님과 하나님의 말씀에 묶여 있다. 내가 양심을 어기고 행동한다면 그것이 더욱 위험한 것이다. 하나님이여! 내가 여기 섰나이다. 나를 도우소서!”라고 말하였습니다. 요한복음 8장을 보면 간음한 여인을 예수님 앞에 끌고 나와 이 여인을 돌로 쳐서 죽일까요? 아니면 살려 줄까요?라고 물었을때에 예수님이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도로 치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을 들은 사람들은 9절에“양심의 가책을 느껴” 모두 떠나갔다고 하였습니다. 왜 그들은 양심의 가책을 느꼈을까요?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대로 지키며 살지 않았기 때문에 양심의 가책을 느꼈던 것입니다. 요즈음 정치권을 바라보면서 ‘죄없는자가 먼저 돌로치라’는 주님의 말씀을 생각하게 되고 엄청 죄많은 사람들이 먼저 돌을 던지고 있는 이 죄 많고 더러운 세상 사람들은 결코 하나님을 보지 못하고 있다고 하겠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거울을 닦듯 우리의 양심을 늘 닦아 맑은 마음이 되도록 하여야 하나님을 뵐 수 있는 것입니다.

 

마음이 텅 빈 것이 맑은 마음이 아닙니다. 불교에서는 마음을 텅 비우기 위해 그것도 眞空을 만들기 위해 수행을 합니다. 우리는 마음을 비우는 것이 다가 아니라 비운 마음에 하나님의 말씀으로 채우는 것이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말씀은 천지를 창조하신 말씀이요 우리의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 되는 하나님의 거룩한 말씀이기 때문에 빈 마음에 하나님의 말씀을 가득 채우므로 맑은 마음이 되어 하나님을 뵐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 말씀이 채워지지 않는 빈 마음엔 마귀가 똬리를 피고 앉아 혀를 날름거리고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성경 66권 안에 있는 말씀을 다 지킬 수 있습니까? 이렇게 많은 말씀을 어떻게 다 마음에 채워 넣을 수 있을 것입니까? 그래서 많은 기독교인들이 실망하고 세상으로 돌아갑니다.

 

정신과 의사로 유명한 이 시형(1934.4.30.-) 박사가 넷 향기에서 한 이야기입니다.

퇴원하는 환자가 계산서를 가지고 원장에게 와서 항의조로 말했습니다.

“원장님. 제가 링게르를 반병밖에 안 맞았는데 왜 한 병 값이 계산됐습니까?”

원장님은 즉각적으로 말했습니다.

“잘못했습니다.”

동감을 표시하였습니다. 동감은 공격의 대상이 되지 않습니다. 퇴원하는 분이 미소를 짓고 있을 때 간호실에 전화를 했습니다.

“이 환자분 퇴원하실 때 남은 링게르 병 포장해 드리세요.”

이는 환자의 감정과 동감이 아니었습니다. 퇴원하는 환자는 다시 찡그리기 시작합니다.

원장님은 잠시 속은 후련했습니다. 그러나 마음은 편치 않았습니다. 동감의 감정이 아니라 이질감이기 때문입니다.

“아니지. 환자는 나의 상거래 대상이 아니지. 사랑해야지.”라고 생각하고

그래서 “링게르 값은 반병 값만 받으라”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남은 링게르 반병을 잘 포장하여 환자에게 주었습니다. 환자는 매우 미안한 얼굴로 돌아갔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을 사랑하고(아가페세이스 큐리온) 이웃을 네 몸같이 사랑하는 것(아가페세이스 톤 플레시온)이 성경의 대 강령이라.(마22:37-40)고 말씀하시었습니다. 여기서 강령이라고 번역한 헬라어 원어는 ‘크레마타이(크레만뉘미의 동직현수3단)’으로 ‘매달다, 달아매다’란 뜻입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옷깃에 새기거나 작은 곽에 기록한 말씀 종이를 너어 이마에 메고 다니며 잊어버리지 않으려고 하였습니다. 다시 말해서 언제나 기억해야할, 마음에서 잊지 말아야 할 말씀이 바로 ‘사랑(아가페)’이란 두 글자입니다. 어떻게 66권의 하나님의 거룩하신 말씀을 마음에 다 간직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단 두 글자 ‘사랑“이란 말을 마음 가득히 간직하므로 맑은 마음이 되어 하나님을 뵐 수 있습니다.

 

제가 군대에서 대한민국 가장 졸병시절인 이등병 때입니다. 당시 군대 화장실은 더럽고 구더기가 디글디글하면 냄새가 지독하여 아무도 변소청소를 하려 하지 않습니다. 분대별로 돌아가며 청소를 하는데 우리 분대에서는 내기 말단 졸자이기 때문에 나에게 변소청소를 시키고 자기들은 멀직히 앉아 담배를 피우며 잡담들을 하고 있었습니다. 저는 땀을 뻘뻘 흘리며 변소청소를 하는데 속이 뒤집어지고 내가 왜 졸병으로 입대해서 이런 더러운 일을 하는가 궁시렁궁시렁 불평을 하지만 뭐 어쩔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그러다가 그날 밤 불침번을 서면서 성경을 읽는 중에 예수님이 제자들의 더러운 발을 씻으신 말씀을 일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기도하다가 아 예수님이 더러운 제자들의 발을 씻으셨는데 내가 변소청소를 하며 불평할 것이 아니다 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 다음날 소대장에게 말했습니다. 앞으로 변소청소는 제가 다 맡아서 하겠습니다. 하고 말하니 소대장은 의아한 듯 바라보다가 “좋다, 그러면 네가 변소청소를 맡아서 하거라. 대신 그날 하루 종일 너는 막사에서 쉬거라”라는 말을 하였습니다. 저는 그때부터 일주일에 하루 변소청소를 하고 때로는 똥지게 지고서 배추밭 옆 똥구덩이에 나르기도 하며 한동안 변소청소를 하였습니다. 제가 변소청소를 하니 평소 기압도 빼주고 그날은 불침번도 빼주고 나에 대한 고참들의 태도도 좋아졌습니다. 하루는 군종참모 목사님이 똥지게를 지고 가는 저를 보고 “전이병, 너 군종부에 와서 있지 않겠니”하고 말하기도 하였지만 “사회에서 언제나 교회에서 살다 싶이 하였는데 군대에 와서도 군종부 교회에 있지 않겠습니다“ 라고 말했습니다. 그후 얼마 후 다른 이유가 있어 사단 군종부에 가서 있게 되었습니다.

 

사랑이 무엇입니까? 다른 사람들이 하기 싫어하는 것을 대신 해주는 일입니다. 다른 사람이 힘들고 어려워하는 것을 도와주고 감싸주고 함께 동행해 주는 것이 사랑입니다. 말로만 사랑이 아니라 십자가를 지는 것이 사랑입니다. 예수님의 맑은 마음안엔 온통 사랑뿐이었습니다. 그래서 우리의 조를 대속해 주기 위해서 십자가를 지신 것입니다. 십자가는 주님의 맑은 마음입니다. 우리가 사랑의 십자가를 이웃을 대신해서 짊어진다면 이는 이웃을 사랑하는 일이요 자기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르는 일입니다. 십자가 지는 마음이 맑은 마음이요, 이 맑은 마음을 가질 때 우리는 하나님을 뵐 수 있는 것입니다.

 

 

윌리엄 카우퍼(William Cowper)는 영국의 유명한 시인입니다. 그는 영국성공회 목사의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그의 나이 6살 때 어머니가 세상을 떠납니다. 어머니의 사랑을 받지 못한 쿠퍼는 정신불안 증세를 가지게 됩니다. 그는 후에 법률공부를 해서 상원의 행정관직 시험을 치르게 됩니다. 그런데 너무 걱정한 나머지 자살을 시도하여 18개월 동안 정신병원에 입원합니다. 당시 그는 종교적 회의와 두려움을 느꼈고, 자신이 지옥에 갈 것이라는 생각에 끊임없이 시달렸습니다.

그러나 독실한 캘빈주의자였던 언윈 목사 가족들의 사랑을 통하여 자신의 신앙을 회복하게 됩니다. 예수님께서 자신의 모든 죄와 허물을 용서해주셨음을 확실하게 고백하게 됩니다. 그리고 받은 은혜를 찬송의 시로 썼습니다. 그것이 바로 찬송가 258장 <샘물과 같은 보혈은>입니다.

 

1. 샘물과 같은 보혈은 주님의 피로다 보혈에 죄를 씻으면 정하게 되겠네

정하게 되겠네 정하게 되겠네 보혈에 죄를 씻으면 정하게 되겠네

2. 저 도적회개 하고서 보혈에 씻었네 저 도적같은 이 몸도 죄씻기 원하네

죄씻기 원하네 죄씻기 원하네 저 도적같은 이몸도 죄씻기 원하네

3.죄 속함받은 백성은 영생을 얻겠네 샘 솟듯하는 피 권세 한 없이 크도다

한 없이 크도다 한 없이 크도다 샘 솟듯하는 피 권세 한 없이 크드다

4.날 정케하신 피보니 그 사랑 한없네 살동안 받는 사랑을 늘 찬송하겠네

늘 찬송하겠네 늘 찬송하겠네 살 동안 받는 사랑을 늘 찬송하겠네

5.이 후에 천국 올라가 더 좋은 노래로 날 구속하신 은혜를 늘 찬송하겠네

늘 찬송하겠네 늘 찬송하겠네 날 구속하신 은혜를 늘 찬송하겠네

 

주님의 십자가 보혈로 마음을 죄사함 받으면 맑은 마음이 된다는 찬송입니다. 그렇습니다. 주님 앞에 용서받지 못할 죄는 아무것도 없습니다. 도적 같은 이 몸도 주님의 보혈에 씻으면 맑게 됩니다. 우리들이 죄를 많이 지어서 지옥 가는 것이 아닙니다. 회개하지 않아서입니다. 하나님은 아무리 악한 죄를 지어도 전심으로 주님 앞에 나와 눈물로 회개하는 자는 다 용서하십니다. 죄와 허물을 가리워 주시고 십자가의 보혈로 깨끗케 하시니 맑은 마음이 되어 하나님을 뵙게 됩니다.

 

우리가 죄를 많이 지어서 지옥가는 것이 아니라 마음이 캄캄하여 하나님을 못 뵙게 되니 지옥 가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마음이 맑은 사람은 복이 있나니 하나님을 뵐수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왜 하나님을 보는 것이 행복할까요? 여기서 본다는 것은 헬라어로 ‘호라오(horao)’인데 ‘지각한다, 인식한다, 경험 한다’는 뜻입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을 본다는 것은 시각적 이미지로 하나님을 직접 보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영이시기 때문에 직접 눈으로 하나님을 볼 수 없습니다. 예수님의 제자 중 빌립이 하나님을 보여 달라고 말 한 적이 있습니다. 그 때 예수님께서 이렇게 대답하십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빌립아 내가 이렇게 오래 너희와 함께 있으되 네가 나를 알지 못하느냐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 어찌하여 아버지를 보이라 하느냐?”(요14:9)

인간이 거룩하신 하나님을 직접 볼 수 없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예수님을 통해서 자신을 보여주십니다. 빌립이 하나님을 보여 달라고 할 때 예수님은 나를 본 자는 바로 하나님을 본 자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을 보고도 믿지 못하면 내가 행한 일을 통해서 믿으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통해서 거룩하신 하나님의 존전으로 나아갈 수 있는 새로운 길이 열린 것입니다. 이것이 은혜요 축복입니다. 우리는 아무 조건 없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은혜의 보좌 앞으로 담대히 나아가게 됐습니다(히4:16). 얼마나 큰 축복입니까? 하나님을 뵈는 축복은 곧 예수님과 함께 살아가는 은혜입니다. 예수님이 나의 주님이시오 우리 가정의 가장이시오 내 사업의 사장이십니다. 이 나라의 왕의 왕이시고 세계의 만왕의 왕이되십니다. 이 예수님이 오늘도 나와 함께하시고 내길을 인도하시고 내 손 붙잡아 일으켜 주십니다. 세상의 모든 복중의 복은 그러므로 임마누엘 복 곧 예수님이 나와 함께 하신다는 복입니다. 오늘도 이 임마누엘 복이 우리에게 허락하심을 믿으시길 바랍니다.

 

우리 라온코이노니아는 맑은 마음으로 하나님은 바라보는 복음 받은 신앙인들이 모인 신앙공동체입니다. 그러므로 위릐 마음에 구름이 끼지 않도록 우리의 마음이 더럽혀지지 않도록 늘 회개하며 말씀으로 채우며 사랑을 가득 채워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내 몸처럼 사랑하므로 언제나 예수님이 나와 우리 가정에 우리가 하는 모든 일에 함께 하시기를 축원합니다.


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