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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병호목사의 교회이야기

전병호 목사의 설교



2020년 2월 23일 주일아침 예배 히 12:1-3 仰望 耶蘇

 

신약성경의 마지막 요한계시록 2장 3장에 소아시아 일곱교회에 보낸 편지가운데 두 번째 교회인 서머나 교회입니다. 주께서 일곱 교회 중 서머나교회와 빌라델피아 교회를 축복하시었는데 현재 다른 다섯 교회는 겨우 유적지나 팻말 정도만 남아 있는데 빌라델피아교회와 서머나 교회는 이스람 종교 속에 교회의 모습을 당당하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물론 옛날 초대 교회의 모습은 아니지만 여전히 예수그리스도에 대한 고백을 하며 예배를 드리고 있습니다.

 

터키의 이스탄불에서 남쪽으로 631km떨어진 지중해 항구도시로서 옛날부터 시인들이 지중해의 꽃이라, 아시아의 면류관이라고 칭송하던 아름다운 도시입니다. 지금도 인구가 450만명으로 터키에서 3번째로 큰 도시입니다. 지금은 서머나를 이즈미르라고 부릅니다. 그 도시에 폴리카르푸스(이하 폴리캅) 순교 기념성당이 있습니다. 폴리캅은 예수님의 직제자들과 교부들 사이를 이어주는 중요한 교부입니다. 그는 마르치온계 및 발렌티누스계 영지주의자들과 설전을 벌이며 이단으로부터 교회의 믿음을 지켰습니다.

바로 그 서머나에 105년경에 사도요한의 제자였던 폴리갑이 교회를 맡고 있었습니다. 폴리갑(AD.80-165)은 본래 안디옥 출신이었습니다. 구전에 의하면, 서머나의 어느 과부가 안디옥에서 폴리갑을 노예로 샀는데, 그가 너무 똑똑해서 그녀가 죽게 될 즈음에 폴리갑을 자유인으로 만들어 주었다고 합니다. 폴리갑은 젊었을 때 사도 요한의 가르침을 직접 받았습니다., 성격은 직설적이고, 정열적이었습니다. 20대의 청년 나이에 서머나 교회의 감독이 되었고, 86세 되던 165년에 순교했습니다.

당시 로마 황제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Marcus Aurelius121-180)는 로마 황제 중 가장 학식과 덕망이 있었던 황제로 그의 “명상록”은 지금도 많은 사람들을 감동시키고 있습니다. 그런 그가 처음에는 기독교에 대해 우호적이었습니다. 그러나 아첨하는 자들의 영향을 받아 기독교인들을 박해하기 시작하였습니다. 그의 박해는 참혹하였습니다. 수많은 기독교인들이 고문을 받고 죽임을 당했으며 사자의 밥으로 던져졌습니다. 그중에 폴리캅이 있습니다.

폴리갑이 체포되기 사흘 전날 밤, 기도 중에 자기가 베고 자던 베개에 갑자기 불이 붙어 타버리는 환상을 보았습니다. 꿈에서 깨어난 그는 즉시 그곳에 있는 사람들에게 자신이 화형을 당해 순교할 것이라고 말해주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그에게 피신하라고 하였지만 그는 피신하지 않고 군인들에게 체포되었습니다. 폴리갑을 본 적이 없는 그들은 놀라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들의 눈앞에 선 사람은 굳건하고 장엄한 얼굴 한 노인이었으며, 이처럼 훌륭한 노인을 체포하기 위해 자신들이 그렇게 열정적으로 폴리캅을 찾아다녔다는 사실이 그들을 놀라게 했습니다. 폴리갑은 조금도 주저하지 않고 제자들에게 그 사람들을 위해 식사를 준비하도록 하고 마음껏 먹도록 청했습니다. 그리고는 한 시간 동안만 방해받지 않고 기도하게 해 달라고 요청했습니다. 그들은 허락해 주었습니다. 폴리갑은 “자신과 관련된 모든 사람들, 즉 위대한 사람이나 평범한 사람들, 귀족이나 미천한 사람들 그리고 전 세계에 흩어져 있는 교회들을 위해서 기도했습니다. 무리들은 폴리갑을 나귀에 태우고 서머나 시로 데려왔습니다.

폴리캅은 서머나 총독 게르마니쿠스(Germanicus)의 재판정에 서게 되었습니다. 재판관은 폴리갑이 노인임을 생각하여 고문과 죽음을 당하느니 개심하도록 충고했습니다. 이때 폴리갑은 총독에게 “나는 86년 동안 그분을 섬겨 왔는데, 그동안 그분은 한 번도 나를 부당하게 대우하신 적이 없습니다. 그런데 내가 어떻게 나를 구원하신 나의 왕을 모독할 수가 있겠습니까?” 총독은 ‘나는 사나운 짐승들을 준비해 두고 있소, 만일 당신이 마음을 바꾸지 않는다면 당신을 그 짐승들에게 던져 버리겠소’ 라고 말하니 폴리갑이 “그 짐승들을 부르시오. 우리는 선을 버리고 악으로 돌이켜서는 안 되오, 오히려 악에서 돌이켜 덕을 택하는 것이 선한 일이오”라고 말하며 뜻을 굽히지 않자, 폴리갑을 향해 총독이 마지막으로 위협하기를, ‘만일 당신이 마음을 바꾸지 않는다면 당신을 화형 시키겠소’ 폴리갑이 대답하기를 “당신은 잠시 타오르다가 곧 꺼져버리는 불로 나를 위협하고 있소. 왜냐하면 당신은 장차 임할 심판과 악인을 위해 예비된 영원한 형벌을 알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요” 이렇게 대답하는 폴리갑의 얼굴은 확신과 기쁨으로 가득 차 있었습니다. 총독의 위협에 전혀 용기를 잃지 않았습니다. 마침내 장작과 밀짚을 모아다가 단을 만들고 폴리갑을 그 위에 세웠습니다.

 

그들은 폴리갑을 큰 못으로 말뚝에 고정시키려했습니다. 그때 폴리갑은 “나를 이대로 두시오. 나에게 화형을 견뎌낼 힘을 주실 그 분은 당신들이 못을 박지 않아도 장작더미 위에서 움직이지 않고 견딜 능력도 주실 것이요.”라고 말합니다. 그들은 못을 박지 않고 그냥 말뚝에 묶었습니다. 폴리캅이 마지막 기도를, 다음과 같이 기도였습니다.

 

“사랑하는 복된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우리에게 당신에 관한 지식을 주신 아버지여! 당신 앞에 살고 있는 모든 천사들과 천군들과 피조물, 그리고 모든 의인들의 하나님이시여! 당신께서 오늘 이 시간 나로 하여금 순교자의 반열, 그리스도의 잔에 참예하게 하시어 내 놈과 영혼이 성령의 썩지 않은 축복 속에서 영생의 부활을 얻기에 합당하게 여겨주심을 감사하나이다. 오늘 나는 신실하고 참되신 하나님이신 당신께서 예배하시고, 계시하시고, 이루신 풍성하고 열납 될 만한 제물로 당신 앞에 드려지기를 소원하나이다. 나는 이 모든 일을 인하여 당신의 사랑하는 독생자, 영원한 대제사장을 통해서 당신을 찬양하고, 감사드리며 영광을 돌리나이다.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 이제부터 영원토록 영광이 있을 지어다. 아멘”

 

폴리캅은 기도를 마친 후 집행인들에게 불을 붙이라고 하였습니다. 이렇게 폴리캅이 화형으로 순교를 당하였는데 그날이 바로 165년 2월 23일 이였습니다. 비로 오늘이 폴리캅교부가 황형으로 순교를 당한 그날을 기념하는 주일입니다. 많은 교회에서는 이날을 기념하면서 교인들은 폴리캅이 죽기까지 주님을 바라보며 순교한 그 믿음을 본받기를 기도하고 있습니다.

 

오늘 폴리캅의 믿음을 본 받기위해 “예수님을 바라보자”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전하려 합니다. 이 제목은 지닌 2월 두번째 주일의 설교인 “아크 엘엘로힘 뚬미야 오직 하나님만 바라라”는 말씀과 같은 주제라 하겠습니다. 그것은 최근에 우리 사회에 너무 많은 어려움들이 있어, 특히 코로나19로 인해 사람들이 매우 당황하고 있기 때문에 이때는 바로 예수님을 바라볼 때요 주님으로부터 은혜를 사모할 때임을 말씀드리고자 함입니다.

 

돼지 한 마리가 우리 안을 이리자리 돌아다니며 이것저것 열심히 주워먹고 있었습니다. 그때 무엇인가 돼지 옆에 툭 떨어졌습니다. 빠알갛게 잘 익은 홍시 하나가 떨어진 것입니다. 얼른 먹어보니 달작지근한 것이 입에 착 달라붙어 기가 막히게 맛있었습니다.

"꿀~ 어매..이거 꿀보다 더 맛있네...꿀~"

그리하여 돼지는 또 먹고 싶어서 우리 안을 다 뒤졌지만 없었습니다.

"이거 분명히 땅 속에서 나온 것 일거야 꾸울~" 하면서 돼지는 뾰쪽한 주둥이로 땅을 파기 시작하였습니다. 우리를 온통 뒤집어놓은 돼지는 지쳐 더 이상 꼼짝 못하고 벌러덩 드러누워 멍하니 하늘을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그 때에 돼지의 얼굴에 너무 익어서 곯은 홍시 하나가 철푸덕 떨어졌습니다. 그제 서야 돼지는 홍시는 땅에서 찾는 것이 아닌 높은 감나무에서 떨어진다는 것을 알았지만 몸이 너무 피곤해서 일어날 수 없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자신이 원하는 것을 찾아 돼지처럼 땅을 뒤지고 있습니다. 온톤 세상을 뒤집어 놓듯 파헤쳐 보지만 기억하세요. 이제 기력이 쇠하고 정신도 희미해져 버린 다음에야 그 맛난 감은 세상에서 얻을 수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그러므로 늦기 전에 세상을 바라보지 말고 하늘을 바라보십시오. 하나님 우편에 계신 예수님을 바라보세요. 우리의 소원이 그로 말미암아 낳는 줄 알게 될 것입니다.

 

롬 8:34“이는 그리스도 예수시니 그는 하나님 우편에 계신자요 우리를 위해 간구하시느니라”

 

복음성가 < 하늘을 바라보라>

“...모두 고개를 들고 어두운 마음을 열어 크신 주님의 능력을 바라보라

너와 나 지으신 주의 놀라운 손길 우리 다함께 주를 찬양해...”

 

오늘 히브리서 말씀은 우리에게 믿음의 경주를 하면서 믿음의 주요 온전케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라고 말씀합니다. 우리가 승리자가 되고 금메달을 목에 거는 영광을 원한다면 다른 것에 시선을 빼앗기지 말고 항상 믿음의 주요 온전케 하시는 예수를 바라보며 달려가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믿음의 주요 온전케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를 원어적으로 다시 번역하면. “믿음의 창시자(아르ㅎ케곤-아르케고스 명.목.남.단)요 완성케(텔레이온텐-텔레이오테스 명.목.남.단) 하시는 예수를 바라보자(아ㅎ포론테스-아포라오 동.분.현.능.주.남.1복)”입니다, NIV 영어성경에서도 이 부분을 ‘Jesus, the author and perfector of our faith' 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내 믿음의 주체는 바로 예수님이시고 내 믿음을 완성케 하시는 분도 예수님이기 때문에 예수님을 바라보지 않으면 믿음이란 생겨나지 않습니다. 믿음은 예수님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바라 볼 때에 우리는 새 힘을 예수님으로부터 받게 됩니다. 만일 우리가 시험에 빠지는 것은 예수님을 바라보지 않고 다른 사람을 바라보고 세상을 바라보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열심히 선한 일을 하다가 그만 낙심하게 된다면 예수님을 바라보지 않고 일을 하기 때문입니다. 예수 없는 선한일은 선한일이 아닙니다.

 

이제부터는 예수님을 향해 여러분의 시선을 고정시키기 바랍니다. 어떤 형편에 처하든지, 어떤 사람의 방해를 하든지, 사단이 뭐라고 속삭이든지 예수님만 바라보고 예수님을 본받아 믿음을 견고하게 하고 계속 전진하시기 바랍니다.

 

여기서 ‘바라보자’라는 말은 원어로 ‘아포라오’라는 말인데 이 말은 ‘열심히 바라본다, 뚫어지게 바라본다, 깜박거리지 않고 바라본다. 어떤 한 목적을 가지고 바라본다’라는 의미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바라보는데 좌로 우로 한눈팔지 말고 오로지 예수만을 바라본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아무리 눈이 좋아도 어두우면 보지 못합니다. 우리가 본다는 것은 빛이 물체에 부딪혀서 반사되어 우리 눈에 들어옴으로 보게 됩니다. 그러나 어두우면 반사되는 빛이 없기 때문에 물체를 보지 못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어두우면 불을 밝혀 사물을 봅니다. 너무 멀리 있는 것은 우리 눈의 시력밖에 있어 보지 못합니다. 이때는 망원경을 통해서 멀리 있는 물체를 봅니다. 반면에 너무 작은 것도 우리 눈은 볼 수 없습니다. 지금 내 엄지손가락에 세균이 얼마나 살고 있을까요? 대장균과,살모넬라,황색포도 상구균 등 한 사람당 손바닥 한 개에 평균 150 종류의 세균이 있는데 같은 사람이라고 해도 양 손에 있는 세균의 83%가 다른 종류라고 합니다. 요즘은 코로나19 세균도 손을 통해 감염되기 때문에 손 씻기를 권장하고 있습니다.손 씻지 않을 때 64마리 세균이 3시간 후에 24만 마리로 증가한다고 합니다. 이렇게 미세한 세균들을 우리 눈으로는 볼 수 없고 현미경을 통해서 알아보게 됩니다.

즉 우리가 무엇을 본다는 것은 우리의 눈의 능력의 한계로 제한 받게 됩니다. 그런데 예수를 바라보자라고 하였을 때 어떻게 예수님을 볼 수 있다는 말입니까? 어떤 사람이 하나님을 보게 해 주면 하나님을 믿겠다는 말을 하였습니다. 그러나 우리 인생의 눈으로 전능하신 하나님을 보겠다는 그 생각이 어리석다고 하겠습니다.

 

하나님은 영이시니 육의 눈으로는 바라볼 수 있는 분이 아닙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예수님으로 세상에 오시어 우리에게 당신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부활을 믿지 못한 도마에게 못자국난 손과 옆구리를 확인시키신 후에 하신 말씀입니다. “너는 나를 본고로 믿느냐? 보지 못하고 믿는 자들은 복되도다 (요20:29).” 라고 말씀하시니 도마는 “나의 주님이시오 나의 하나님이시니이다.”라고 말하였습니다. 도마는 부활하신 예수님을 직접 목격하였지만, 오늘의 우리는 도마의 고백을 믿음으로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게 됩니다. 즉 예수님을 믿음으로 믿음의 눈으로 바라본다는 것입니다. 이때의 눈을 믿음의 눈 다른 말로 “영안”이라고 말합니다. “육신의 눈으로는 보지 못하지만 믿음의 눈으로 본다.”입니다.

 

그래서 히11:1에서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니”라고 말씀하였습니다. 무엇이 바라는 것들의 증거가 아니라 누가 바라는 것들의 실상입니까? 누가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입니까? 많은 사람들이 바라는 것들 곧 수많은 영웅호걸 왕후장상들이 실상이라고 말합니다. 지금도 많은 사람들이 믿고 있는 보이지 않는 증거들 곧 수많은 종교와 미신들의 잡신들입니다. 아니요 진정한 실상이요 참다운 증거는, 그분, 바로 예수그리스도라는 말씀입니다. 오직 우리가 바라고 보아야하는 실상과 증거는 나의 주 예수님뿐입니다.

 

1. 괴로울 때 주님의 얼굴 보라 평화의 주님 바라보아라 세상에서 시달린 친구들아 위로의 주님 바라보아라

2. 힘이 없고 네 마음 연약할 때 능력의 주님 바라보아라 주의 이름 부르는 모든 자는 힘 주시며 늘 지켜주시리

눈을 들어 주를 보라 네 모든 염려 주께 맡겨라 슬플 때에 주 예수 얼굴 보라 사랑의 주님 안식 주리라

 

우리가 예수님을 바라본다는 것은 마치 멀리 있는 물체를 만원경을 통해서 볼 수 있듯이 아직 보이지 않은 미래를 나의 소망을 이루시는 주님을 통해 바라본다는 것을 말합니다. 주님께서 니의 미래를 바라보시니 주님을 통해 나의 소망이 이루어짐을 또한 바라보는 것입니다. 그래서 히브리서 기자는 11:6에서 ‘상을 주시는’ 하나님을 바라보아야 한다고 강조합니다.

 

믿음의 눈은 세상을 향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향하되, 하나님이 계시다는 것과 하나님은 자기를 찾는 사람들에게 상을 주시는 분이라는 것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그리고 바울은 이렇게 믿음의 눈으로 바라보면 히브리서 기자는 세상에서 믿음으로 승리한 사람들을 보게 되는데 즉 아브라함으로부터 시작하여 여러 신앙의 선조들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12장 1절에 “이러므로 우리에게 구름같이 둘러싼 허다한 증인들이 있다”고 말씀 합니다. 그러나 이제 그들이 바라본 눈은 실상 확실한 것이 못되었으니 마치 백내장 수술하듯 믿음 눈을 한 꺼풀 벗겨보니 더욱 확연히 보게 되는 것은 바로 믿음의 창시자시오 완성자이신 예수그리스도를 보게 된 것입니다. 고전 13:12에 “우리가 지금은 거울로 보는 것 같이 희미하나 그때에는 얼굴과 얼굴을 대하여 볼것이요”라 말씀하시었습니다.

 

히브리기자는 11장에서 선진들의 믿음을 바라보며 그들의 믿음을 본 받으리고 말씀하고 이렇게 그들의 믿음을 본받은 사람은 얽매이기 쉬운 죄를 벗어버리고, 인내로써 우리 각자에게 주어진 경주를 경주하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인생의 길에서 믿음이 멈추어서는 안 됩니다. 이제 믿음의 창시자시오 믿음의 완성자이신 예수님을 바라보면서 인생의 길을 달려나갈 때에 절망이란 없습니다. 절망이 무슨 말입니까? 소망 중에 즐거워하며 살게 됩니다. 왜 그렇습니까?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신 예수님을 보기 때분입니다.

 

그러므로 기독교인의 사전에는 절망(絶望)이란 단어가 없습니다. 그러나 기독교인의 사전에는 다른 절망(切望)이 있습니다. 앞에 절망(絶望)은 희망이 없어져 좌절하고 포기하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나 다음의 절망(切望)은 간절히 소망을 바라는 것을 말합니다.

 

절망(絶望)에 빠진 사람은 눈물이 마를 새 없이 가슴을 적십니다. 시 6:6에 “내가 탄식함으로 피곤하여 밤마다 눈물로 내 침상을 띄우며 내 요를 적시나이다.”라고 하였습니다.

 

절망(絶望)의 끝은 상한 심령입니다. 시109:22에서 “나는 가난하고 궁핍하여 중심이 상함이니이다.” 란 말씀이 있습니다. 중심이 상하다는 것은 상한 심령을 말합니다. “하나님의 구하시는 제사는 상한 심령이라.”(시51:17) 절망(絶望)에 빠지면 상한 심령이라. 마음에 근심이 가득하고 정신이 아득하고 눈앞이 침침하며 속상한 마음을 가눌 길이 없습니다. 한마디로 마음이 캄캄합니다.

 

그러나 절망(絶望)한 사람에게 사45:22은 복음입니다. "땅의 모든 끝이여, 내게로 돌이켜 구원을 받으라. 나는 하나님이라 다른 이가 없느니라.“는 말씀을 기억하십시오.

 

세계적으로 유명한 스펄젼 목사님이 어린 시절에 눈보라가 심하게 몰아치던 어느 주일날 가까운 교회에 나가라는 어머니의 말씀에 순종하여 가까운 교회에 갔습니다. 그 교회에 가보니 눈보라가 심하여 목사님도 못 나오고 사람들도 별로 없었습니다. 그런데 교육도 별로 받지 못한 한 평신도가 나와 "땅의 모든 끝이여, 내게로 돌이켜 구원을 받으라. 나는 하나님이라 다른이가 없느니라" 는 말씀을 읽고 “예수를 바라보라”는 제목으로 10분 정도 설교를 했습니다. 그러더니 갑자기 스펄젼을 향해 "청년이여 그대는 이 말씀에 순종하고 예수님을 바라보십시오." 하고 말하였습니다. 스펄전은 지난 6개월 동안 죄 때문에 고민하고 있었는데 이 말씀이 벼락같이 그의 마음에 꽂히었습니다. 스펄젼은 그 순간 용기가 생기고 기쁨이 생기고 확신이 생겼습니다.

스펄전 목사님은 그 때의 일을 일기장에 기록했습니다. "나는 그 순간 구원의 길을 발견했다. 그 순간에 나의 눈은 완전히 예수를 바라보았다. 구름도 안개도 사라지고 어두움은 떠나갔다. 남은 것은 밝은 태양 빛이었다. 나의 마음은 그 순간 높이 올라감을 입었다.“

 

그렇습니다. 믿는자에게는 절망(絶望)이란 단어가 없습니다. 오직 예수그리스도를 바라보지 못한 사람들에게만 있는 말입니다. 오직 기독교인들은 예수그리스도만을 ‘아포라오’ 눈 깜짝 하지 않고 간절한 마음으로 바라보아야 한다. 이런 상태를 두번째로 절망(切望)하다란 말로 표현합니다. 그러나 구별하기 위해 뒤에 나오는 절망을 갈망(渴望)이라고 하겠습니다

 

나를 바라보면 절망(絶望)이지만 예수님을 행해서는 갈망(渴望)입니다. 절망은 더 이상 바라보지 않는 것이지만 갈망은 마음을 다해 힘을 다해 계속해서 예수님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이것을 알아야 합니다. 절망과 갈망이 따로 떨어져 있지 않고 마치 종이 앞 뒤 면과 같습니다. 절망 뒤편에 갈망이 있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절망 뒤를 보려 하지 않기 때문에 결국 절망 가운데 빠져 인생의 늪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고 있습니다. 절망을 뒤집어 보십시오. 거기에 갈망이 있습니다.

 

예수님의 팔복말씀을 살펴봅니다.

심령이 가난한 사람은 복이 있나니.... 가난한 사람은 날마다 절망의 길을 가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발걸음을 뒤로 돌아서 갈망하니 그때로 부터 그에게 천국인생을 누리게 됩니다.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 날마다 눈물샘에 마를 길었던 그가 예수님의 십자가를 갈망하니 주님이 그와 함께 하고 있음을 알고 위로를 받게 됩니다.

화평케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날마다 세상 한복판에서 분쟁과 갈등가운데 살다가 부활하신 예수님을 갈망하니 그의 마음에 평화가 찾아오고 모든 사람들에게 평화를 전하는 사람이 됩니다.

 

경남 산청군 산골마을에서 태어난 주대준이란 소년이 있었습니다. 부모님의 갑작스런 사업실패로 거제도로 가게 되었고, 아버지의 병치레와 죽음으로 초등학교 때부터 고학을 해야만 하는 처지에서도 이 소년은 결코 절망하지 않았습니다. 그 이유는 “주씨 아저씨”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 주대준 소년은 처음으로 교회에 가게 되었을 때에 교회 문 위에 걸려 있는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얻으리라”는 현판을 보게 되었습니다. 이 어린 소년을 깜짝 놀랐습니다. 예수님의 성이 주씨이란 것입니다. 자기 성과 같았습니다. 그래서 주예수에 친근감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 주대준 소년은 주씨아저씨라고 부르며 예수님을 바라보며 살았습니다. 그는 군대 장교로 컴퓨터 전문가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군대 정보장교로 청와대 앞에서 근무하며 청와대를 바라보고 언젠가 저 집에 들어가 일하기를 소망하며 기도하였습니다. 마침내 때가되었습니다. 노태우대통령 때인 1989년 청와대 전산실 창설 멤버이자 프로그램 개발팀장으로 선발되었다. 이후 전산실장, 정보통신처장 및 행정본부장으로 발탁되어 승승장구하였으며 노무현, 이명박 두 대통령 때는 경호차장이 되었습니다. 청와대 근무 중 최초로 ‘청와대 기독신우회’를 창립하여 공직사회 ‘선교 사명자’로 헌신하였습니다. 다섯 분의 대통령을 모시며 20여 년 동안 청와대 근무를 마치고 연령정년 퇴직을 한 후 카이스트(KAIST) 전산학과 교수로 부임하였고, 교수로 부임한 지 7개월 만에 부총장으로 발탁되어 카이스트 최초로 국책연구소 급의 ‘사이버보안연구센터’를 설립하였습니다. 그후 선린대학교 총장을 역임하였습니다. 그는 말합니다. “나는 어리 시절부터 절망이란 말을 모르고 자랐습니다. 그것은 어리시절부터 오직 주씨 아저씨 예수님만을 바라보고 살아왔기 때문입니다.”라고 말하였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절망하지 마십시오 Don't despair!

너무 걱정하지 마십시오. Don't worry too much!

너무 축쳐져 있지 마십시오 Don't let it get you down!

그리고 십자가에 날 위해 달리신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십시오,

 

낯선 어떤 노인이 날마다 예배당에 드나들었습니다. 그래서 교회의 관리집사님이 은근히 걱정이 되었습니다. 교회 안에 비싼 비품이 많은데 혹시 훔치러 온 사람이 아닌가? 하는 의심이 생겨서 "영감님, 무슨 일로 날마다 오십니까?"하고 물어보았습니다. "나요? 기도하러 왔지요." "아니 이것 보세요. 영감님은 기도 할 만큼 오래 교회당에 머물지도 않잖아요?" "나 참, 난 교회 나온 지 얼마 안 되어 오래 기도할 줄 모른단 말이에요. 그래도 날마다 12시만 되면 여기 와서 “예수님, 나왔지요, 나를 보시지요?” 라고 말합니다. 그러다가 잠시 앉았다 그냥 간단 말이오. 그래도 주님이 나를 보시고 내 사정 알아주실 것 같은 생각이 듭니다."

얼마 후 노인이 사고를 만나 병원에 입원했습니다. 투덜대기만 하던 환자들이 이 노인이 들어옴으로 병실의 분위기가 변하였습니다. 간호사가 병실을 찾아와 노인에게 물었습니다. " 다들 그러는데 병실분위기가 이렇게 달라진 것이 할아버지 덕분이라더군요. 항상 즐거우시다 면서요?" "맞아, 내가 그렇고말고, 그것은 내 방문객 덕분이야, 날마다 그분이 찾아와 날 기쁘게 한단 말이야." "할아버지를 찾아오는 방문객이라고요?" 간호사는 이상하게 생각되었습니다. 언제나 보아도 노인을 면회하러 오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기 때문입니다. "날마다 열두시만 되면 그분이 와서는 빙긋이 웃으시면서 이렇게 말하시죠. "여보게 날일세, 나 예수라네," 하지 않겠소?"

 

성도여러분 오늘 주일은 예수님께서 고난당하시기 위해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는 고난의 길을 상기하며 예수님의 뒤를 따르는 사순절이 시작하는 사순절 첫 주일입니다.

 

그러므로 성도여러분, 우리는 지금까지 바라보던 세상에서 시선을 돌려 십자가의 예수님을 바라봅니다. 그는 그 앞에 있는 기쁨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지금까지 바라보던 세상에서 시선을 돌려 하늘 보좌에 계시는 예수그리스도를 바라봅시다. 그리고 이제껏 세상만을 바라보던 시선을 이제는 십자가상의 예수님께로 향하시기 바랍니다.

여러분, 우리가 피곤하고 절망하지 않기 위해서 자기에게 거역한 일을 참으신 예수그리스도를 바라보며 예수님의 뒤를 따릅시다.

 

우리 라온 코이노니아는 仰望耶蘇, 예수님만을 바라보며 절망하지 않고 소망 중에 참으며 예수님을 갈망하며 살아가는 신앙공동체입니다. 오직 예수님만을 바라보며 살아가는 우리 모두에게 하나님의 은혜와 축복이 함께 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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