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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병호목사의 교회이야기

전병호 목사의 설교



2020년 2월 2일 주일아침예배  눅 2:22-33  기다림

 

 

아기 예수가 태어나 40일되는 때 율법대로 결례를 행하기 위해 예루살렘성전에 갔습니다. 이 예루살렘 성전에 두 사람이 있었습니다. 한사람은 시므온이란 제사장과 다른 한 사람은 성전에서 밤낮으로 기도 하던 할머니 안나였습니다. 그런데 이 시므온제사장과 안나할머니는 똑 같이 메시야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안나라는 할머니는 결혼해서 남편과 7년을 살고 사별했습니다. 그리고 혼자 된지 84년 동안 기도하며 메시야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결례를 행하기 위해서 성전에 온 아기 예수를 품에 안아보게 되었습니다. 시므온은 성경을 오랫동안 연구하며 메시야가 오실 때가 이 때련가 저 때련가 역시 밤낮 기도하면서 메시야의 오실 것을 고대하고 있었던 사람입니다. 그러던 어느 날 오늘 읽은 말씀에서 마침내 결례예식을 받기 위해서 성전에 온 어린 예수를 품에 안아보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러니 얼마나 감격스러웠겠습니까. 그때 시므온은 어린 예수를 품에 안고 눈물을 흘리며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하나님이시여 이제는 말씀하신 대로 종을 평안히 놓아 주시는 도다.” 이 말은 “이제는 죽어도 여한이 없습니다.”란 말입니다. 시므온과 안나가 이렇게 여러 해 동안 기도할 수 있었던 것은 오직 한 가지 이유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바로 하나님의 약속 때문입니다.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할 것임이라” 하나님이 이사야선지자를 통해 주신 약속입니다. 다니엘 7:25 “그가 장차 지극히 높으신 이를 말로 대적하며 지극히 높으신 이의 성도를 괴롭게 할 것이며 그가 또 때와 법을 고치고자 할 것이며 성도들은 그의 손에 붙인바 되어 한때와 두 때와 반 때를 지내리라” 단8:14에 “이천삼백 주야까지니 그때에 성소가 정결하게 되리라 하리라.”는 말씀에 따라 유대나라의 신실한 성도들은 메시야의 탄생이 가까워졌다고 생각하고 메시야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입니다. 마침내 그 기다림의 날이 이르렀으니 “때가 차매 하나님이 그 아들을 보내사”(갈4:4), 드디어 안나와 시므온 제사장이 메시야 아기 예수를 만나게 되었으니 그 감격은 이루 말 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들의 기다림은 행복으로 마치게 되었습니다.

 

오늘 2월 2일은 예수님께서 예루살렘 성전에서 결례를 받으시는 날로 천주교회, 성공회, 루터교회에서는 교회의 특별한 절기로 축하예배를 드리는 날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통과의례로 성탄절과 종려주일, 십자가의 고난일, 부활절을 기념하여 예배를 드리지만, 그 외에 2월2일 결례일, 1월 첫 주일 다음월요일은 예수님이 세례요한으로부터 세례 받은 날인 세례주일 그리고 부활절로부터 40일후 승천주일이 있습니다. 이와같은 여러 기념주일을 지킨다는 것은 예수그리스도의 사랑과 구원의 은총을 기억하기 위함인 것입니다.

“기다리다 지쳐서 울다 지쳐서, 꽃잎은 빨갛게 멍이 들었네”(동백아가씨) 이런 가사로 된 대중가요가 대단한 인기를 차지했던 때가 있었습니다. 사랑하는 사람을 가슴 아프게 기다리는 여인의 모습이 떠오릅니다. 이처럼 속이 타서 멍이 드는 일이 아니라도, 사람의 생애는 기다림의 연속이라고도 하겠습니다. 그리고 이 기다림 속에서 희망과 기쁨을 맞이하기도 하고 때로는 오랜 기다림으로 절망과 한숨의 긴 밤을 지새우기도 합니다. 그러나 기다림은 곧 희망입니다. 희망이 없다면 기다림이란 없습니다.  기다림이 있는 사람은 때로 어떠한 고난도 기쁘게 극복할 수 있는 힘이 주어집니다. 기다림이 있는 한 고난을 이기고 기쁨을 얻을 날을 희망해 봅니다. 

 

하워드 휘트만(Howard Whitman)는 "인생은 기다리는 기간이다"(waiting period)라고 하면서 "어린아이들은 자전거 탈 때를 기다리고, 청소년은 자동차 몰 때를 기다리고, 의학도는 면허 받을 때를 기다리고, 젊은 부부는 자기들의 새 집을 살 때까지 기다려야합니다. 기다림의 예술은 단번에 배워지지 않는다(The art of waiting is not learned at once.)"고 했습니다. 에멀슨(Emerson)은 "사람이 영웅이 되는 것은 타인보다 용감해서가 아니라 타인보다 10분 더 기다리기 때문이다."라고 했습니다. 인생도 기다리는 기간이고, 신앙생활도 기도하며 기다리는 생활입니다.(양산시민신문 2014.9.2.  평산교회 강진상목사)

 

빅톨 플랭클(Viktor Emil Frankl, 1905년 3월 26일 빈 – 1997년 9월 2일 빈 의미요법 창시자 logotherapy) 이라는 정신분석학자가 있습니다. 그는 "인간의 의미 탐구"(MAN'S SEARCH for MEANING)라는 책에서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라는 질문을 하고 있습니다. 그는 자신이 유대인 의사로서 2차 세계 대전시 독일 나찌 치하의 수용소에서의 경험을 말하고 있습니다. 독일의 패전 분위기가 무르익었을 때, 1944년 겨울 아우슈비츠 수용소에서 많은 사람들이 소망하기를 이번 크리스마스만큼은 가족과 함께 지내리라고 굳게 믿었습니다. 그러나 그 해를 아무런 소식 없이 넘기자 많은 사람들이 절망하고 그 해 겨울에 목숨을 잃었습니다. 도저히 사람이 살아갈 수 없는 환경에서 끝까지 살아남은 사람은 어떤 사람인가 플랭클은 묻습니다. 마음에 분명한 희망을 가진 사람, 분명한 기다림이 있는 사람, 사랑하는 애인이나 아내, 가족이 기다리고 있는 사람, 돌아가서 자신이 꼭 이룩해야할 일이 남아있는 사람들은 죽지 않고 살아서 해방을 맞이하게 되는 것을 그는 목격하였습니다. 그는 “사람은 먹는 것으로 사는 것도 아니요 오직 희망으로 삽니다. 오직 기다림으로 삽니다” 고 말하였습니다.

 

과연 우리는 무엇을 기다리며 살고 있습니까? 평화를 기다립니다. 통일을 기다립니다. 경제부흥을 기다립니다. 정치의 안정을 기다립니다. 그러나 우리는 압니다. 이 기다림은 오래 기다려야 한다는 것을..., 그러나 많은 한국인들은 그리고 정치인들 중에는 너무 조급하게 빨리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 
‘지금 한국인들이 앓고 있는 큰 병이 하나 있는데 도무지 참지 못하는 조급증입니다. 차재호 교수(서울대 심리학과)는 구한말(舊韓末) 외국인의 눈에 비친 한국인의 모습은 '끈기가 있고 고통과 억압을 잘 견딘다'는 것이었다고 했습니다. 사실, 예전 한국 분들은 참는 데는 도사였습니다. 어느 때는 무지렁이처럼 얼마나 참기를 잘하는 지요? 기차나 버스를 타기 위해 3-4 시간을 길가에 앉아 기다립니다. 모진 시어머니의 시집살이나 바람을 피우는 남편을 눈물의 밤을 밝히면서 수십 년을 참으며 기다립니다. 우리 민족의 심성의 특징을 은근과 끈기라고 하였는데 지금 그런 심성을 찾아 볼 수 있는지요.


오늘 날, 한국인의 모습은 그런 은근과 끈기는 사라지고 조급하고 성급한 사람들을보게 됩니다. 버스나 지하철이 오분만 늦어도 발을 동동 구르고, 공중전화를 걸려는 데 앞에 두 서너 사람만 있어도 참지 못하고 가버리고 맙니다. 엘리베이터의 문이 저절로 닫히는데도 몇 초를 못 참아 '닫힘' 단추를 너무 누르니 고장이 잦고 음식점에서는 음식을 빨리 안 준다고 독촉이 대단합니다.
언젠가 어느 글에서 보니까, 해외여행 시 한국인이나 중국인, 일본인은 비슷하여 구분하기 어려운데 한국인을 알아보는 법은 세 가지 식별 법이 있다고 합니다. (1)관광 안내원이 한창 설명을 하고 있는데 중간에 말을 끓고 질문을 하거나 아는 체 하는 사람 (2)식당에서 음식을 재촉하고 10분 내에 먹어 버리는 사람 (3)버스나 비행기가 목적지에 도착하자마자 안전벨트를 풀고 자리에서 일어나는 사람은 틀림없이 한국인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외국 사람들이 한국인들에게서 배우는 첫말은 '빨리 빨리'라고 합니다. ’(power massge internet:www.imr.co.kr)

우리가 사는 이 시대는 스피드 시대인 것만은 틀림없습니다. 광속의 시대입니다. 오늘을 살아가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조급증에 사로잡혀 있는 것 같습니다. 기다리는 것을 못 견딥니다. 패스트푸드 문화, 인스턴트 문화에 길들여진 우리들이 인내심을 가지고 기다리는 것이 쉽지 않습니다.


이제 우리는 다시 은근과 끈기의 심성을 회복해야 합니다. 기다릴 주 알아야 합니다. 그것은 질서요 그것이 민주주의 정신입니다. 기다림은 내일의 희망이요 꿈입니다. 기다림은 우리 인생을 성숙시키고, 풍요롭게 합니다. 기다림은 오늘의 현실을 넘어 내일로 다가가게 하는 힘입니다. 그런 점에서 기다릴 줄 아는 사람은 지혜로운 사람입니다. 서양 속담에는 ‘서두르면 망친다(Haste makes waste)’는 말이 있습니다. 서둘러서 성공하기보다는 실패하는 경우가 훨씬 더 많습니다. 그래서 느긋함이 범사를 아름답게 합니다. 아브라함이 기다림이 부족해서 하갈을 통해 이스마엘을 낳음으로써 가문의 비극만이 아니라, 세계역사의 비극의 시작되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기다리는 자에게 힘주시고 축복하십니다. 

 

이사야 선지자의 말씀을 마음에 새겨봅니다.
사 40:31 “오직 여호와를 앙망하는 자(코베이)는 새 힘을 얻으리니 독수리가 날개치며 올라감 같을 것이요 달음박질하여도 곤비하지 아니하겠고 걸어가도 피곤하지 아니 하리로다”

믿음은 여호와를 앙망‘하는 일입니다. 仰望이 무엇입니까? ’우러러 간절히 바라다‘라는 말입니다. ‘앙망’은 히브리어로 ‘카베’란 말인데, ‘기다림’(wait upon)을 의미합니다. 단순한 기다림이 아니라 최고의 우선순위를 둔 전적인 신뢰의 기다림입니다. 그래서 ‘앙망’은 ‘희망’(hope)이란 말과 통합니다. ‘히브리어 ‘카베’는 ‘선’(線line)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렘 31:39에서 ‘측량줄’이라고 했습니다. 슥 1:16에서는 ‘먹줄’이라고 했습니다. ‘희망’은 ‘선線’ ‘줄’로 설명할 수 있습니다. ’선‘은 점點과 점點을 이어놓은 것입니다. 점은 홀로 존재하나, 그런 점이 다른 점과 만나서 한 방향의 선이 됩니다. 선은 방향과 지향점을 갖고 있기에 선은 희망의 끈입니다. 의미 없는 한 점이었던 우리가 하나님을 향하여 소망의 선을 이어가는 것, 하나님께 나의 인생의 줄을 매는 것, 이것이 희망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하나님으로부터 응답을 기다립니다. 희망은 기다림이고 기다림이 없는 희망은 희망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을 향한 우리의 희망은 반드시 하나님으로부터 응답이 오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앙망하는 자는 하나님을 향한 희망의 줄을 결코 놓지 않습니다. 그것이 기다림입니다.

 

기원전 586년 유대 시드기야왕 시절, 바벨론의 침략으로 나라가 멸망한 뒤에 2500여년이 지난 1948년 5월 14일에 이스라엘라가 세워졌습니다. 그리고 이날 유대인들은 한 사람을 기억하고 있습니다. 그는 1904년 44세로 죽은 테오도르 허츨(Theodor Herzl 1860,5.2-1904,7.3)이라는 사람입니다. 그는 파리에서 언론인으로 활동했습니다. 그는 유대인이면서도 유대인이 아닌 현대 유럽인이라고 생각하면 생활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는 유대인이 믿는 하나님도 믿지 않고 유대인단체의 모임에도 참여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허츨이 존경하는 유대인이자 프랑스군의 장교인 드레퓌스(Dreyfus)가 반역자로 처형당하게 되었습니다. 드레퓌스는 유대인이지만 그도 유대인이기를 포기한 사람이어서 자신과 여러 가지 면에서 생각이 일치했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허츨은 드레퓌스가 사형 당하는 현장에서 군중들이 외치는 소리에 충격을 받았습니다. ‘반역자를 죽이시오. 유대인을 죽이시오!’ 허츨은 드레퓌스가 처형당하는 이유가 반역자라는 사실보다 유대인이기 때문인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이 사건 후에 허츨은 자신이 유대인인 이라는 사실을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유럽인들은 유대인을 멸종시킬 것이라고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유대인이 살 길은 국가로 독립하는 길밖에 없다고 허츨은 생각하고, 전 세계 유대인들을 향해 유대인의 나라를 세우자고 호소하였습니다. 그러나 그의 꿈은 전혀 이루어질 것 같지 않았습니다. 신문에도 ‘절망에서 나온 허황된 꿈’이라고 평했습니다. 유대인 친구들조차도 정신 나갔다고 조롱했습니다. 그러나 포기할 수 없는 강력한 희망이 허츨을 독립할 그 날을 미치도록 기다리게 만들었습니다. 그는 가는 곳 마다 이스라엘의 독립을 외쳤습니다.  그렇게 불가능해보이기만 했던 희망은 허츨이 세상을 떠난 지 44년 만에 마침내 이루어 졌습니다. 그의 기다림은 희망이었고, 결국 현실이 되었던 것입니다.

우리는 이것을 믿어야 합니다. 우리가 믿는다면 기다려야 합니다.  기다린다면 희망을 가져야 합니다. 우리가 희망을 잃어버리지 않는다면 마침내 우리의 기다림은 기쁨의 날을 맞이하게 될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기다리는 자에게 복을 주시는 하나님이시기 때문 입니다.

 

기다림은 인내입니다.
마태복음 25장을 보면 신랑을 맞이하기 위해 등불을 준비하는 열 처녀 비유가 있습니다. 이 비유에서 신랑은 재림하실 예수님이고, 열 처녀는 성도들을 가리킵니다. 유대인들은 밤에 결혼식을 합니다. 유대인들의 하루는 밤(오후6시)부터 시작합니다. 그런데 신랑의 도착 시간이 늦어지자 모두 졸다가 밤중에 신랑이 온다는 소리에 깨어 황급히 준비하게 됩니다. 이 때 미련한 다섯 처녀는 기름을 충분히 준비하지 못함으로 인해 그만 버림을 받게 되었습니다. 비유의 핵심은 언제 주님이 다시 오시더라도 맞이할 수 있도록 항상 깨어서 기다리고 준비하고 있으라는 것입니다.  기다린다는 것은 그날이 올 때까지 인내하며 기다리는 것입니다.


시므온은 영적으로 어두움이 짙게 깔린 때에도 전 생애를 통하여 조용히 이스라엘의 위로를 기다렸습니다. 그러다가 예수님을 만나는 복을 받았습니다. 기다림에는 인내가 필요합니다.

살후3:5 “주께서 너희 마음을 인도하여 하나님의 사랑과 그리스도의 인내에 들어가게 하시기를 원하노라.”
이 말씀에서 ‘인내’로 번역된 헬라어 ‘휘포모네’(ὑπομονή)는 ‘확고함, 불변성, 충실, 인내, 참을성 있는 인내, 변치 않는 기다림, 유지, 즐겁고 희망찬 인내’의 뜻을 가지고 있으며, ‘밑에 머무르다, 여전히 있다, 머무르다, 지키다, 견디다, 꿋꿋함을 지니다’의 뜻을 가진 동사 ‘휘포메노’(ὑπομένω)에서 파생된 단어입니다. 그리고 ‘휘포메노’(ὑπομένω)라는 단어는 소유격과 목적격과 함께 쓰일 때 ‘아래, 아래에’라는 뜻으로 사용되며 합성어에서도 동일한 의미와 함께 특히 ‘열등한, 은밀하게, 적당하게’의 뜻으로 사용되는 전치사 ‘휘포’(ὑπο)와 주어진 장소, 상황, 관계 또는 기대 속에서 ‘머물다’, 거하다, 출발하지 않다, 계속해서 있다, 기다리다, 참다’의 뜻을 가진 ‘메노’(μένω)의 합성어에서 유래 되었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휘포모네’(ὑπομονή)가 뜻하는 ‘인내’란 국어사전이 정의하고 있는 단순히 ‘괴로움이나 어려움을 참고 견딤’의 뜻을 가진 의미보다는 예수님의 십자가를 나도 지고 예수님의 뒤를 따르며 구원과 영광을 참고 기다리는 믿음을 말합니다. 그러므로 이 인내는 성령의 열매중의 하나인 것입니다.

 

성도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지키어 인내(ὑπομονή)로 결실하는 자입니다(눅8:15). 이 말씀을 다른 말로 말하면 기다림으로 약속을 받는 자란 말입니다. 우리가 말씀에 순종해야 하는 이유는 바로 기다림의 인내의 결실이 있음을 믿기 때문입니다. 기다림은 인내를 요구하고 인내하면 마침내 기다림의 축복을 받게 됩니다. 이것을 알아야 합니다. 기다리는 자에게 천국의 문이 열리게 됩니다. 누가 지옥엘 갑니까? 기다림이 없는 사람입니다. 감이 읶을 때까지 기다리지 못한 사람은 땡감을 먹게 되고, 기다리는 자는 달콤한 홍시 감을 맛보게 되듯이, 천국을 참고 기다리지 못해 먼저 지옥부터 가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왜 비 기독교인들은 지옥엘 갑니까? 그 나라와 그 의를 기다리지 못하였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나라를 기다리지 않는 사람들이 바로 믿음 없는 사람이요 천국에 들어갈 수 없습니다.

서울에 사는 사람이 지옥에 간다는 것은 대단히 성공적인 사람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군산에 600여개 교회가 있습니다. 그 많은 교회를 요리조리 피해 다닌다는 것이 얼마나 성공적인가요? 지옥 가는 것이 오히려 기적입니다. 80세가 넘도록 교회를 가보지 못한 노인이 월명산에 올라가 붉은 십자가를 그렇게 많이 보고도 <저 붉은 것이 뭐야, 나는 안 봤어>라는 말을 80년 동안 성공적으로 해야 지옥에 가게 됩니다.


군산은 예수를 믿는 사람들이 인구의 1/3입니다. 어느 곳을 가더라도 예수 믿는 사람을 만나게 됩니다. 그런데 만나서 전도를 받아도 <나는 안 들었어, 나와 상관없어> 그래야 지옥가게 됩니다. 라디오를 틀 더라도 어쩌다가 한 번씩 잡혀지는 CBS, CTS 기독교방송과 극동방송이 나오면 얼른 다른 방송으로 돌려야만 합니다. 길을 가다가도 누군가가 손에 전도지를 주면 <이딴 것 안 봐>라고 해야 지옥가게 됩니다. 전도 집회에 초청받더라도 <안 가, 절대로 못 가. 죽여 봐라, 내가 가나>라고 해야 비로소 무사히 지옥까지 갈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군산에 살면서 70-80세가 되기까지 예수를 못 믿고 죽는다는 것은 아주 지옥가려는 각오가 없이는 갈수 없는 일입니다. (할렐루야교회 김상복목사님의 설교예화 중 서울을 군산으로 바꿈)

우리 기독교들은 하나님의 날이 임하기를 간절히 사모하며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날은 어떤 날인가요? 한없이 참으시는 하나님이 참음을 끝내시는 날입니다. 밖에서 이를 갈며 슬피 울 수밖에 없는 날이 올 것입니다.

 

2020년 1월 달이 벌써 지나고 이제 2월 달에 접어들었습니다. 이제 남은 11개월을 천천히 느긋하게 하나님의 축복을 기다리며 믿음생활 해야 합니다. 반드시 하나님은 금년 우리들의 가정에 복을 주십니다. 구원의 은총을 주실 줄 믿습니다. 그러므로 조급하여 믿음을 버리고 세상에 빠지는 일이 없어야 합니다. 이것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응답은 천천히 오지만 그 축복은 급속히 주어질 것입니다. 안나할머니가 83년을 기다리고 시므온 제0사장이 밤낮으로 기도하며 기다렸던 메시야 아기 예수님을 만났듯이 우리도 기도하며 올해에 주실 하나님의 큰 축복을 기다리시기를 바랍니다.

 

잠8:34.35절에 “누구든지 내말을 들으며 날마다 내 문 곁에서 기다리며 문설주 옆에서 기다리는 자는 복이 있나니 대저 나를 얻는 자는 생명을 얻고 여호와께 은총을 얻을 것임이니라.”고 말씀하였습니다.

우리 라온코이노니아는 축복을 기다리는 성도들의 신앙 공동체입니다. 기다리는 자에게 주시는 생명과 여호와 은총의 복을 우리 모두 받으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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