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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병호목사의 교회이야기

전병호 목사의 설교



2020년 1월 19일 주일아침예배   수 18:1-10   신앙의 烏瞰圖

 

영화에 빠지지 않는 장면이 있습니다. 도시 전체를 하늘에서 촬영한 장면입니다. 그리고 천천히 어느 시골동네로 화면이 옮겨가 어느 집 스라브 지붕이 보이고 그 옆의 큰 목련 나무가 서있고 잔디 정원에 개두마리가 뛰어 놀고 현관문이 열리며 한 노인이 나오는 장면이 화면에 비추어 집니다. 비행기나 드론으로 찍은 이른바 ‘버드 아이 뷰 숏(bird’s eye view shot)’ 조감도(鳥瞰圖)로 보여준 장면입니다. 조감도란 공중 나는 새가 내려다보는 모양을 말합니다. 우리나라 옛날 정조대왕 시절에 김홍도라는 유명한 화가가 있습니다. 그는 많은 국보급의 그림을 남겼는데 저는 그의 그림 중에 최고를 ‘환어행렬도(1795년경. 156.5 x 65.3cm, 용인 호암미술관 소장)’라고 생각됩니다. 이 환어행렬도는 정조의 어머니인 해경궁 홍씨의 환갑을 기념하면서도, 정조의 아버지에 대한 효심을 지극히 보여주는 사업의 일환으로 사도세자의 릉이 있는 화성에서 홍씨의 환갑잔치를 열고 거기에 대해 남긴 기록화입니다. 그 동안의 기록화가 상당히 까다로운 격식하게 제작되어서 매우 경직된 화면을 보여줬던 것에 비해, 이 그림은 매우 율동적인 행렬장면을 보여줍니다. 행렬장면은 조감도방식으로 그려 변화무쌍하고, 장렬합니다.

 

신윤복 정선 같은 이들이 그린 그림들을 보면 원근법을 무시하지만 나름대로 조감도 또 한 그림 우리나라에서 가장 유명한 조선시대 그림이 있는데 추사 김정희가 그린‘세한도’입니다. 추사 선생이 59세인 1844년 제주도에서 유배생활을 할 때 제자인 우선 이상적(李尙迪)이 보내준 책을 받고 그 정성에 감격하여 그려준 그림입니다. 송백(松柏) 같은 선비의 절조(節操)와 제주도에 유배 중인 자신의 처지를 표현한 작품입니다. 이 그림은 오른쪽 위에서 내려다보는 전형적인 조감도 방식으로 그렸습니다.

 

주택을 새로이 건축할 때 설계사는 앞으로 지을 집의 조감도를 그립니다. 방 3개 거실 부엌 화장실 집의 모양을 그림으로 그립니다. 집에 살 주인은 조감도를 보고 여기에 다락을 저기에 베란다를 하면서 다시 조감도에 그려 넣도록 주문을 합니다.

 

그러나 최근에 새롭게 집 모양을 보여주는 방식이 있습니다. MBCTV에서 방영하고 있는 ‘구해줘 홈즈’라는 프로가 있습니다. 바쁜 현대인들의 집 찾기를 도와 주기위해 박나래 김숙 양세형 장동민 김광규 노홍철 등 인기 연예인들이 직접 나서서 발품을 팔며 부동산 중개인 역할을 하는 프로그램입니다. 이들이 나서서 집을 보여주는데 전체 집 모양만 아니라 집아 구석구석을 보여주는데 마치 시청자가 직접 그 집을 돌아다니며 집안을 들여다보는 것 같습니다. 이런 장면을 오감도(烏瞰圖)라고 합니다. 조감도의 새鳥에서 –를 뺀 까마귀 오烏입니다. 감은 굽어볼 瞰입니다. 까마귀가 집안 구석구석을 날아다니며 본다는 살펴본다는 것입니다. 조감도가 자기중심적이라면 오감도는 대상 중심적입니다. 조감도는 보여주고 싶은 것만 보여주는데, 오감도는 속속들이 세세하게 보여줍니다. 일제 시대 이상이란 천재시인의 시로 오감도烏瞰圖라는 시가 있습니다. 대체로 시인들이 현상의 겉을 보며 표현한다면 이상은 현상의 내면 깊숙하게 파헤쳐 마치 해부 집도하듯 조각내어 살펴 표현합니다. 그래서 일반적으로 이상의 시를 이해하기란 매우 어렵습니다. 건축무한육면체라는 難解한시가 있습니다. 시인이 화신백화점을 돌아다니면서 살펴 본 모습을 시로 작성하였는데 도무지 무슨 소리인지 이해하기가 어렵습니다. 한번조금만들어보실까요?

< 建築無限六面角體

부제: 신기한 것들이 있는 상점에서

- 이 상 (李 箱) -

사각형의 내부의 사각형의 내부의 사각형의 내부의 사각형의 내부의 사각형.

사각이 난 원운동의 사각이 난 원운동의 사각이 난 원.

비누가 통과하는 혈관의 비눗내를 투시하는 사람.

지구를 모형으로 만들어진 지구의를 모형으로 만들어진 지구.

거세된 양말. (그 여인의 이름은 워어즈였다)

빈혈면포. 당신의 얼굴빛깔도 참새다리 같습네다.

평행사변형 대각선 방향을 추진하는 막대한 중량.

마르세이유의 봄을 해람한 코티향수가 맞이한 동양의 가을.

쾌청의 하늘에 봉유하는 Z백호. 회충양약이라고 쓰어져 있다.

옥상정원. 원후를 흉내내고 있는 마드무아젤. >

 

길가에 커다란 아파트가 짓다 만 체 흉물스럽게 세워져 있습니다. 그 앞에는 그 아파트의 조감도가 커다랗게 그려져 있습니다. 참 아름다운 조감도입니다. 그러나 언제 그런 모습으로 완공될 것인가 아마도 불가능할 것 같습니다. 건설업자가 부도를 낸 체 도망가 버렸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조감도가 아름답지만 그대로 지어 질런지는 다 완공을 본 후에야 알게 될 것입니다.

 

오늘 아침 봉독한 성경말씀은 여호수아가 가나안 땅을 정복하고 이스라엘 12지파에게 땅을 분배하기 위해 자세하게 가나안 땅이 어떤 형태인가 그 모습을 알고자 한 말씀입니다. 그래서 일곱 지파에서 세 사람씩 12명을 선발하여 가나안 땅 구석구석을 돌아보고 자세히 그려가지고 오라고 명령하였습니다. 이스라엘 역사가인 요세푸스는 그 기간을 7개월가량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들은 최선을 다해 그 땅을 살펴 그려가지고 돌아 왔습니다. 이 그린 것을 기초로 제비를 뽑아 여호수아는 땅을 분배하였던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기독교의 신앙을 조감도적으로 말하고 있습니다. ‘신앙은 이래야 한다, 저래야 한다, 새로워져야 하자, 변화되어야 한다.’라고 말합니다. 교인들은 “그래 세헤가 되었으니 우리는 변화되고 새로워져야하지 그러려면 열심히 신앙생활 해야지” 하며 고개를 끄덕거리지만 교회 문을 나서면 설교의 내용은 다 잊어버리고 예배시간 때에 다짐은 사라지고 여전히 예전의 내 모습 그대로 살아갑니다. 내 신앙의 조감도를 열심히 들여다보지만 시간이 지나면 잊어버립니다.

새해에 나는 새사람이 될 거야 하고 다짐하고 새로운 계획도 세우고 결단을 하며 신앙의 조감도를 잘 그려보지만 그대로 실천하지 않으면 아무 소용없는 일입니다. 여전히 옛 사람으로 살아갈 뿐입니다. 그에게는 새해란 없습니다.

 

새로워지자 변화되자 우리는 다짐을 하기 이전에, 나 자신의 신앙생활의 속속 들이를 들여다보고 무엇을 고치고, 무엇을 새롭게 할 것인가를 살펴보아야 합니다. 현재의 내 신앙의 모습이 바로 세워져 있는가? 내 신앙의 오감도를 따라 살펴보려고 합니다. 장판이 뜯겨져 있지는 않은지, 벽에 물이 새어 들어와 곰팡이가 쓸 어 있지는 않은지, 기둥은 틀어져 기울어져 있지 않은지. 내 영의 집이 허물어져가고 있지는 않는지. 바울사도는 내 몸을 성령의 전이라고 말씀하였습니다. 성령이 거하시는 집이 바로 내 몸입니다. 그런데 내 안에 성령이 머물만한 집인지를 살펴보아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선 다만 조감도가 아니라 오감도를 그려야 합니다. 여호수아가 파송한 21명은 가나안 땅 구석구석을 마치 드론이 날아다니며 사진 찍듯이 그림을 그려 왔는데, 이는 다만 조감도를 그린 것이 아니라 오감도를 그렸다고 하겠습니다.

 

인디언 우화 중에 이런 얘기가 있습니다. 한 인디언 추장이 손자에게 재미있는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사람의 마음속에는 언제나 늑대 두 마리가 있단다. 그런데 한 마리 늑대는 아주 악한 늑대로서, 화를 잘 내고 질투하고 시기하고 거만하고 거짓말하고 교만하고 아주 못된 것만 가지고 있단다. 또 한 마리의 늑대는, 기뻐하고 평안하고 사랑하고 소망을 주고 인내하고 온유 겸손하고 믿음을 가지고 있단다. 이 두 마리가 항상 싸운단다."

“할아버지 그럼 그 늑대들이 싸우면 누가 이기나요?” “힘센 늑대가 이기지”

“어떤 늑대가 힘이 센데요?” “그거야 당연히 내가 먹이를 많이 주는 늑대가 힘이 세지”

 

사랑하는 여러분, 그렇습니다. 우리의 마음에는 항상 두 마음이 싸우고 있습니다. 주님을 믿는 믿음대로 살자라는 생각과, 내 생각대로 살자는 생각, 항상 영적인 생각과 그에 반대되는 육적인 생각이 서로 싸우고 있습니다. 그럴 때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항상 된다는 생각에, 긍정적인 생각에, 영적인 생각에 물을 주고 그 쪽으로 우리의 마음과 생각을 발전시켜야 합니다. 안 된다는 생각, 못한다는 생각, 부정적인 생각들이 우리의 믿음을 허물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히11:1에서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다”라고 말씀하였습니다. 우리가 세상을 살아가는 힘 에너지가 어디에서 나온다고 생각하십니까? 배부르면 살 수 있습니다. 그런데 얼마 지나지 않으면 그 다시 배고파집니다. 또 걱정과 근심이 많으면, 마치 밥 먹는 것이 돌을 씹는 것이 될 수도 있습니다. 정말 사람이 살 수 있게 만드는 힘은, 음식을 먹는 것으로 해결되지 않습니다. 어디에서 나옵니까? 인생에 대한 하나님을 믿는 믿음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지금의 나의 상황이 아무리 어렵고 힘들고 답답하고 괴로운 일들이 있다하더라도 아니요 하나님이 나의 인생을 안전히 지켜주시고 인도하여 주신다는 믿음이 있으면 소망이 있습니다. 행복의 꽃을 피울 수 있습니다. 문제는 상황이 아니라 내안에 믿음의 방이 있는가 그 방안에 믿음이 아름답게 장식되어 있는가를 살펴보십시오.

 

1914년 8월 영국의 탐험가인 어니스트 섀클턴(Ernest Henry Shackleton)은 27명의 대원들을 데리고 최초의 남극탐험에 도전합니다. 탐험대는 항해한지 한 달만에 큰 빙산에 포위당하여 배가 난파됩니다. 침몰하는 배에서 필사적으로 탈출한 탐험대는, 구조되기까지인 634일 동안 상상을 초월한 극한 상황과의 싸움을 합니다. 약 1년 9개월 동안 빙산에 갖혀 있으면서, 그들은 살기 위하여 고생한 것은 말로 다할 수 없습니다. 살을 에는 혹독한 추위, 수 개월간 계속되는 칠흑 같은 어둠, 바다표범에게 물려 죽을 뻔 한 위험, 장갑이 다 떨어져서 맨손으로 그 차가운 물속에 손을 넣기도 하였고, 동상에 걸려 발이 썩어 들어가는 위험에 처하기도 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언제 구조된다는 보장조차 없는 막연한 불안감과 공포감이것이야 말로 사람을 완전히 절망시킬만한 것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결국은 한사람도 희생됨이 없이 그 긴 시간의 모든 최악의 조건을 초인적인 힘으로 극복하고 마침내 28명 전원이 구조됩니다. 어떻게 해서 인간의 한계상황을 극복하고 다시 살아날 수 있었을까요?

첫째는, 대장인 새클턴의 믿음의 리더십이었고, 또 하나는 전 대원들의 절대적인 믿음이었습니다. 이 사람들의 이야기가, 지난 2000년 “새클턴의 위대한 항해”라는 제목의 책으로 출판되었습니다. 이 책에 붙은 소제목은 “살아있는 한 우리는 절망하지 않는다” 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살아 있다는 것은 기적입니다. 우리는 한 평생 수많은 굴곡을 넘고 거사덤불을 헤치고 벼랑을 기어오르고 때로는 뛰어내리기도 하면서 여기까지 왔습니다. 그동안 많은 동반자들이 우리 곁을 스쳐 어디론가 갔습니다. 그러나 오늘 우리는 여기에 살아있어 예배를 드리고 있습니다. 우리가 지금 살아있다는 것 이것은 기적입니다. 산다는 것은 기적을 이루는 일입니다.

 

여러분, 기독교는 기적의 종교입니다. 성 어거스틴은, “기적이 없다면 나는 크리스천이 되지 않았을 것이다.”라고 하였습니다. 이 기적이 무엇입니까? 바로 한계상황을 뛰어넘는 것이지요. 그렇다면 이 기적은 어디에서 나옵니까? 바로 믿음에서 나오는 것이지요. 내 안에 믿음의 방이 마련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오감도를 통해 내 믿음의 방을 들여다보니 참 아름답게 꾸며져 있습니다. 그 믿음의 방에 앉아 하나님이 나를 위해 베풀어주신 은혜와 복이 얼마나 많을 것인가를 상상해 보십시오. 하나님이 나를 보시며 기뻐하시고 애 아들아 내 딸아 하시며 복을 주시는 장면을 상상하십시오. 지금 나의 삶이 고달프고 힘들다 해도 이 하나님의 위로하심을 듣는다면 살맛나는 힘이 에너지가 생겨날 것입니다. 지금 여러분들이 어떤 상황에 있습니까? 어떤 역경 속에 있습니까? 믿음을 가지십시오, 그 믿음의 힘을 소유하십시오, 그 믿음이 여러분을 세워주실 것입니다. 앞으로 여러분들에게 베풀어주실 하나님의 은혜를 생각하면 신이나지 않습니까? 그 모습을 믿음으로 보고 살아야 합니다.

 

시81:11-13에 “내 백성이 내 소리를 듣지 아니하며 이스라엘이 나를 원하지 아니하였도다. 그러므로 내가 그의 마음을 완악한 대로 버려 두어 그의 임의대로 행하게 하였도다. 내 백성아 내 말을 들으라 이스라엘아 내 도를 따르라.”

 

우리의 신앙생활의 오감도를 살펴보니 믿음의 방 옆에 말씀을 들을 귀의 방이 있습니다. 사람들은 애써 이 말씀을 들을 귀의 방을 지나치거나 들어가려 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내안에 말씀을 들을 귀의 방이 있음을 알고 그 방안으로 들어가 봐야 합니다. 그 방안의 벽과 천장이 말씀으로 도배되어 있고, 바닥도 말씀으로 도배되어 있습니다. 말씀들이 그 방안 벽에서 천장에서 바닥에서 들려나오는 데 입체적으로 공간으로 튀어나오는 것을 보게 됩니다. 그 방 한 가운데 큰 잔치 상이 놓여 있는데, 말씀들이 튀어나와 그 잔치 상위에 턱턱 차려지고 있습니다. 정말 희안하고 놀라운 장면입니다. “내 백성아 내 말을 들으라, 이스라엘아 내 도를 따르라” “아무개야 내 말을 들으라, 아무개야 내 말을 먹으라”는 말씀을 눈으로 보게 됩니다.

왜 사람들이 말씀을 듣고 순종하지 못하는지. 안하는 것이 아니라 못하는 것입니다. 요즈음 교인들이라고 불려지는 자들 중에 또 목사라는 사람들도 하나님의 말씀이 무엇인지 분별을 못하고 저주와 심판을 자초하고 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들의 심령에 들을 귀의 방이 없거나 들어가 보지 못하였기 때문입니다. 그 방안에 들어가 맛있는 말씀의 맛을 맛보지 못하였기 때문입니다. 시119:103에 “주의 말씀의 맛이 내게 어찌 그리 단지요 내 입에 꿀보다 더 다니이다.” 라고 말씀하였습니다. 그런데 그들의 입에서 쓴물이 나오고 구정물이 쏟아지고 있습니다. 마 4:4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기록되었으되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라 하였느니라 하시니"하였습니다. 그런데 말씀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입에서 독설을 배타내고 있습니다.

 

일본에서 대표적인 교육자이자 사회사업가로 잘 알려져 있는 "도모다까 시모지"란 사람은 한때 사형수였습니다. 매서운 추위와 혹독한 환경 탓에 홋카이도 탄광촌에서 선뜻 일을 하려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그래서 일본 정부에서는 사형수들을 그곳 탄광촌으로 보내 일하는 동안만큼 사형집행을 연기해 주도록 하였습니다. 수많은 사형수들이 홋카이도로 가게 되었고, 시모지도 예외 없이 탄광촌에 가서 일을 하게 되었습니다. 이 탄광촌에는 주말이 되면 사형수들의 가족 면회객이 줄을 이었습니다. 그러나 악질중의 악질로 알려진 시모지를 찾는 사람은 단 한사람도 없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숙소에서 잠을 청하려던 시모지에게 누군가 그를 찾아왔다는 소식을 받았습니다. 반가운 마음에 면회실에 달려가 보니 굽은 허리의 호호백발 노인이 지팡이를 의지하고 그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홋카이도에서 3천리나 떨어진 곳에서 아들을 만나기 위해 그를 찾아온 팔순 노령의 어머니였습니다. 반가운 마음이 앞섰지만 악질 시모지는 어머니에게 무엇 하러 먼 길을 찾아왔냐고 고함을 치고 면박을 주었습니다. 무정한 아들에게 미소를 보이던 노모는 말없이 보따리 하나를 건넸습니다. 돌아서는 어머니의 뒷모습을 아쉬운 마음에 바라보던 시모지는 어머니가 주신 보따리를 풀어 보았습니다. 옷가지 안에는 정성스럽게 싸여진 성경책이 있었습니다. 쓴웃음을 지으며 성경책을 한쪽 구석에 처박아놓고 담배 말이 종이로도 사용하고 휴지로도 사용했습니다. 하루는 대체 어떤 책일까 하는 궁금증에 무료함도 달랠 겸 어머니가 주신 성경책을 한 장 한 장 읽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이상한 일입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종이 말이 휴지조각에 불과했던 성경책이 달고 오묘한 말씀으로 다가왔습니다. 그는 성경책을 읽기 시작하면서부터 책에서 눈을 뗄 수 없었습니다. 마치 자석에 붙은 쇠붙이 마냥 성경책을 품에 끼고 다니며 밤낮으로, 식사시간에도, 심지어는 탄광 속에도 읽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탄광에서 일을 하다가 밖에 나와 잠시 쉬면서 성경을 읽고 있는 시모지의 귓전에 요란한 폭발음이 들려왔습니다. 잠시 전까지도 자신이 일을 했던 탄광촌 갱도가 무너져 그곳에서 함께 일을 하던 37명의 동료가 모두 목숨을 잃었습니다. 망연자실해하는 시모지의 손에는 여전히 헤어진 성경책이 들려 있었습니다. 그는 기독교인으로서 일본 사회에서 훌륭한 모범이 되어 77세로 세상을 마칠 때까지 중•고등학교 6개와 고아원 6개를 세웠으며, 일본교육자 대상, 사회사업 대상을 받았습니다. 하나님께서 자신을 살려주셨다는 사실에 시모지는 출소하여 평생을 빚진 자로서 이웃을 돕고 사랑을 실천하는 일을 게을리 하지 않았습니다. 시모지는 비록 사형수였고 뒤늦게 하나님을 알았지만 자신의 생명을 구한 성경말씀을 의지하며 평생 행복을 누리며 살았습니다. 하나님과의 만남에는 때와 기한이 없습니다.

 

신앙생활을 오래 하고도 말씀의 들을 귀의 방에 들어가 보지 못하는 사람도 있지만 그러나 시모지처럼 문을 열고 들어가면 펼쳐진 말씀의 맛을 보고 심령이 새로워지고 인생의 큰 힘을 받아 성공적인 인생을 살아가게 됩니다. 여러분의 심령 안에 있는 말씀의 들을 귀방으로 들어가 보시기 바랍니다.

 

심령의 오감도는 거실로 나옵니다. 그곳은 사랑의 방으로 온갖 보석으로 꾸며진 세상의 어는 왕실보다도 아름다운 거실입니다.

요한일서4;7-11에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서로 사랑하자 사랑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니 사랑하는 자마다 하나님으로부터 나서 하나님을 알고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나니 이는 하나님은 사랑이심이라.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이렇게 나타난바 되었으니 하나님이 자기의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심은 그로 말미암아 우리를 살리려 하심이라.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속하기 위하여 화목제물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라. 사랑하는 자들아 하나님이 이같이 우리를 사랑하셨은 즉 우리도 서로 사랑하는 것이 마땅하도다.”

 

캐나다에 훼더스톤이라는 분이 혀 암에 걸렸습니다. 의사가 혀를 자르지 아니하면 생명에 위험이 있어 혀를 자르게 된 것입니다. 의사 선생님은 “마지막으로 말씀이 있으면 하십시오'라고 했습니다. 그때 훼더스톤은 '주님! 제가 주님을 더욱 사랑합니다. 주님! 제가 주님을 더욱 사랑합니다.'라고 하고 수술실에 들어갔습니다. 이분이 지은 찬송이 우리 찬송가 315장입니다. “내 주 되신 주를 참 사랑하고 곧 그에게 죄를 다 고하리라. 큰 은혜를 주신 내 예수시니 이전 보다 더욱 사랑합니다.”

남다른 고통이 찾아 왔을 때, 우리는 불평할 수 있습니다. 원망도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불평과 원망은 우리를 더 병들게 할 뿐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과도 사랑할 수 있다면, 혀가 없어도 팔이 없고 다리가 없어진다고 해도 주를 위해 쓰임을 받는 신실한 성도가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 심령 안에 사랑의 거실이 있습니다. 이 거실 안에 얼마나 많은 사람이 있는냐가 아니라 단 몇 사람이라도 서로 사랑하고 있느냐를 하나님이 축복하십니다. 우리나라에 교인이 수천 수 만 명의 교회들이 있습니다. 그러데 만일 그 교회의 성도 간에 비록 몇 사람이라도 사랑이 없다면 그래서 서로 미워하고 분쟁한다면 어찌 하나님이 그 교회를 축복하실 것입니까? 왜 그렇습니까? 분쟁하는 곳에 마귀가 있습니다(cf.눅11:17-18). 분쟁하는 교회 안에는 마귀들이 들어 앉아 있습니다. 마귀들이 춤추는 교회라면 어찌 하나님이 기뻐하실 것입니까? 성령의 전이라는 우리의 심령 안 거실에 마귀가 춤추고 있다면 어찌 성령께서 그 곳에 머물 수 있겠습니까? 성도여러분, 우리의 심령 오감도를 들여다보니 아름다운 사랑의 거실이 있어 많은 사람들과 사랑을 나누고 있으니 이 얼마나 기쁘고 즐거운 일이 아닐 것입니까?

 

거실에서 다시 심령의 오감도를 따라 가다보니 어느 방에서 찬송소리가 들려왔습니다. 그 방은 찬송의 방입니다. 우리의 심령의 찬송의 방이 있습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의 찬송의 방에서 하루 온 종일 지나도록 찬송이 들려 나오지 않습니다. 이것을 알아야 합니다. 찬송을 부르는 일은 죄 사함 받은 사람의 신앙 고백입니다. 죄 사함 받지 못한 사람은 찬송을 부르지 못합니다. 찬송은 그 마음이 깨끗한 사람들이 부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찬송은 깨끗한 영혼들이 부르는 천국노래입니다. 천국백성들은 항상 찬송을 부릅니다.

 

‘성령이 계시네, 할렐루야 내게 계시네’라고 하는 책을 쓴 ‘황의성’이라는 분이 있습니다. 이분은 소년 시절부터 절도와 폭력, 강도, 강간 등 닥치는 대로 죄를 저질렀던 사람입니다. 그래서 교도소도 여러 번 다녀왔습니다. 그런데, 지난 1970년 12월, 복역해야 할 기간을 7개월 앞두고서 안양 교도소로 이송되었습니다. 새롭게 지정된 감방에 들어가니, 고참들이 그에게 고통을 주기 시작했습니다. 분노가 치민 황의성 씨도 육탄전으로 맞섰지만, 그때마다 그는 거의 녹초가 될 정도로 실컷 얻어맞아야만 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그는 감방 안에 있는 변기통 옆에서 한 죄수가 그들의 싸움을 지켜보면서 눈물로 하나님께 기도하고 있는 모습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기도하기를 마친 그 사람은 눈물도 닦지 않은 채 황 씨의 피를 닦아주면서 간호했습니다. 그 순간 황씨의 가슴은 마치 불덩이가 날아와서 불을 붙이는 것처럼 아주 뜨거워졌다고 합니다. 그때부터, 황씨는 그 사람과 친하게 지내는 동안에 자연스레 예수를 믿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성경을 열심히 읽으면서 뜨거운 성령의 은혜를 체험하게 되었습니다. 황의성씨가 변화되는 모습을 지켜본 교도소 측에서는 예정보다 3개월을 앞당겨서 그를 출소시켜 주었습니다. 이후, 그는 날마다 찬송을 불렀는데, 그 찬송이 바로 ‘내가 매일 기쁘게 순례의 길 행함은 주의 팔이 나를 안보함이요, 내가 주의 큰 복을 받는 참된 비결은 주의 영이 함께 함이라’ 는 191장 찬송입니다. 그 후렴구가 바로‘성령이 계시네, 할렐루야 함께 계시네. 좁은 길을 걸으며 밤낮 기뻐하는 것, 주의 영이 함께 함이라’입니다. 성령이 심령의 찬송의 방에 들어가 찬송을 부르는 그와 함께 하심으로써, 그는 새로운 인생을 살게 되었던 것입니다. ( 「예수, 내 인생의 산 소망」/ 임해식 / 2005.7.25)

 

황의성씨가 예수를 믿기 이전까지는 악한 영의 지배를 받음으로써 절도와 폭행과 같은 악행을 저질렀습니다. 그러던 그가 예수를 믿음으로써 하나님의 도구가 되어 거룩하게 사용되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는 다시금 그의 몸이 죄의 도구가 되는 것을 막아내기 위해서, 그가 위암으로 세상을 떠날 때까지, 그는 날마다 심령의 찬송의 방에 들어가 191장을 세 번 내지 다섯 번씩 불렀다는 것입니다. 오랜 세월 동안 죄악세상에서 살았던 그였으니, 그의 몸에 배어 있는 악한 습관과 못된 습성이 그리 쉽게 사라질 리가 있겠습니까? 그래서 그가 그처럼 찬송을 열심히 불렀던 것입니다.

 

이미 무너져 가던 심령의 집을 믿음으로 리모델링하려고 해도 옛집에 묻어있던 여러 가지 죄악 투성이 더러움들이 남아 있습니다. 심령의 찬송의 방에 들어가 찬송을 부를 때 이 더러운 죄의 찌꺼기들이 부스러지고 가후가 되어 찬송의 바람에 날아가 버립니다. “성령이 계시네 할렐루야 함께 계시네” 찬송을 부를 때 하늘의 문이 열리고 천사들이 “주의 영이 함께 함이라”고 화답하는 찬송을 듣게 될 것입니다. 이 찬송의 문을 하루에도 몇 번씩 들어갈 때 우리들의 심령은 기쁨과 감사로 채워질 것입니다.

 

이제 심령의 오감도를 따라 다락으로 올라갔습니다. 그곳은 기도의 다락방으로 낮이면 해 빛이 찾아들고 밤이면 밤하늘 별들이 반짝이는 것을 볼 수 있는 창이 열려 있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과 120명의 사람들이 마가의 다락방에 올라 기도를 하였습니다. 예수님이 승천하신 후 그들은 예루살렘의 마가의 집에 모였습니다. 그 다락방은 예수님과 최후의 만찬을 열었던 장소입니다. 그 마가의 다락방에서 기도하던 중 그들은 성령체험을 하게 됩니다. 바로 이 다락방이 세계 최초의 교회가 됩니다. 다니엘은 왕이 하나님께 기도하면 다 사자 굴에 던져 사자의 먹이가 되게 하겠다고 하였지만 두려워 하지 않고 다락에 올라 창문을 활짝 열고 기도하였습니다. 그로인해 사자굴에 던져졌지만 천사가 다니엘을 보호하여주었습니다. 다니엘은 그 나라의 총리대신이 되었습니다.

 

우리 심령 안에 기도의 다락방이 있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이 기도의 다락방을 빈방으로 내버려 둡니다. 일 년 열두 달 기도의 방문도 안 열어 봅니다. 그 기도의 방은 하나님을 만나는 방입니다. 그 기도의 방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응답을 받습니다. 때로 기적을 체험하기도 합니다. 우리가 살아가기 힘들다고 하면 이 기도의 다락방에 올라가야 합니다. 우리가 억울하고 슬프고 답답하고 괴롭고 짜증날 때 이 기도의 다락방에 들어가야 합니다. 병들어 아프고 죽을 지경이라 다른 방도가 없다고 절망할 때 마지막으로 찾아가는 내 심령의 기도의 방이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세상에 인생을 비관하고 스스로 목숨을 끊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러나 만일 그가 기도의 다락방에 올라 창문을 열고 하나님께 기도하였다면 그는 죽지 않을뿐 아니리 인생의 성공이 있을 것입니다. 우리는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내 심령의 기도의 다락방에 들어가 하나님께 호소하면 하나님은 내 모든 기도를 들어 주신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위로해 주시고 용기도 주시고 새 힘도 주시고 만 가지 축복을 주신다는 것을 믿어야 합니다. 그야말로 우리의 삶의 비밀 보물 창고repositorium입니다. 이 비밀 보물 창고가 바로 여러분의 심령 안에 있음을 여러분 알고 계셨습니까?

 

심령의 오감도록 우리의 심령의 집안 구석구석을 살펴보면 어느 한 곳도 쓸모없는 곳이 없습니다. 그 어느 곳도 하나님의 은혜가 가득 들어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어느 방은 찬송의 방이요, 희락의 방이요, 화평의 방이요, 어느 방은 오래참음 자비 양선의 방이요, 어느 방을 가면 충성 온유 절제의 방입니다. 다 천국의 방들의 축소한 방들입니다. 이 방마다 하나님의 은혜와 축복이 가득가득 들어 있습니다.

사람들이 이 방안에 들어가 그 은혜와 축복을 받을 생각은 하지 않고, 마치 조감도를 들여다보듯이, 여기는 기도의 다락방이고, 이곳은 찬송의 방이고, 오 이곳이 사랑의 거실이구나, 여기는 말씀 들을 귀의 방이고, 그리고 이곳은 무슨 방인가 믿음의 방이구나 라고 보고 스쳐 지나가 버린다면 이는 신앙생활의 큰 불행입니다. 그러나 직접 그 방들에 들어가서 찬송을 부르고 기도도하고 말씀도 듣고 이웃들과 사랑도 나누면 이는 믿음생활의 큰 행복입니다.

 

우리 라온코이노니아는 오감도에 따라 일 년 열두 달 열심히 우리의 심령의 방들을 사용하는 성도들의 신앙공동체입니다. 우리들의 심령 안에 있는 방들을 빈방으로 놔두지 맙시다. 저는 기도하며 기다리는 것이 바로 올해에 여러분과 가정에 어떤 기적이 일어날 것인가? 그것이 궁금합니다. 반드시 무슨 기적을 만나게 될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 여러분의 심령의 각 방마다 하나님이 주시는 은혜와 축복을 받는 2020년, 올해는 기적을 만나는 한해가 될 것입니다.

오늘 우리들의 심령의 방에 사랑으로 채워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와 축복이 충만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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