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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병호목사의 교회이야기

전병호 목사의 설교



2020년 1월 12일 히 11:13 – 16 순례자의 길

 

 

여러분, ‘오빠생각’이란 동요를 잘 아시죠?

 

뜸북 뜸북 뜸북새 논에서 울고

뻐꾹 뻐꾹 뻐국새 숲에서 울제

우리 오빠 말 타고 서울 가시며

비단 구두 사가지고 오신다더니

 

기럭 기럭 기러기 북에서 오고

귀뚤 귀뚤 귀뚜라미 슬피 울건만

서울 가신 오빠는 소식도 없고

나뭇잎만 우수수 떨어집니다.

 

어린이날을 제정한 소파 방전환 선생이 1923년 3월 잡지 <어린이>를 창간하였습니다. 방정환 선생은 이 <어린이> 잡지에 우리말로 된 창작동요, 동시, 동화 등을 실었는데...고향의 봄, 반달, 설날, 산토끼, 퐁당퐁당, 오빠생각, 따오기, 고드름...등의 주옥같은 동시들이 실렸습니다.

 

1925년 13살이던 소녀 최순애는 <어린이>지에 ‘오빠생각’이란 동시를 발표하였습니다.

“뜸북 뜸북 뜸북새 논에서 울고....”

이듬해에는 16살이던 소년 이원수가 "나의살던 고향은 꽃피는 산골~~~"로 시작하는 ‘고향의 봄’을 실었습니다.

 

이원수와 최순애는 그렇게 <어린이>지에 실린 각자의 동시를 보고 알게 되었고...펜팔 친구가 되었으며, 어른이 될 떄 까지 오랜 기간 편지를 나누다가...차츰 사랑이 싹트고, 10여년 만에 상봉을 하게 되는 자리에서...그만 이원수가 일본 경찰에게 체포되었습니다. 죄목인즉, 이원수가 독서회라는 단체를 통해 불온한 사상을 퍼트렸다는 것이었습니다. 이렇게 눈 앞에서 체포되는 안타까운 모습을 본 최순애는...그 후 틈만 나면 면회를 갔고...그 일은 두 사람의 사이를 더욱 단단하게 이어주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1년 뒤 이원수가 풀려나자, 두 사람은 결혼을 합니다. 수원의 소녀 최순애 와 마산의 소년 이원수는 1936년 이렇게 부부의 연을 맺었습니다.

 

그후 이원수와 최순애 부부는 우리나라의 아주 유명한 동시작가가 되었습니다. 경남창원에는 이원수 문학관이 있느네 이곳에 두 부부의 아름다운 이야기가 사진으로 많이 전시되어 있습니다.

 

오뻐생각 이 동시에는 슬픈 이야기가 있습니다.

 

최순애의 아버지 최경우가 방정환의 어린이 운동을 도와 협력을 하였습니다. 또 최순애의 9살 연상의 오빠가 최영주인데 그도 방정환을 도와주고 있었습니다. 최영주는 방정화의 무덤을 조성하는데 앞장을 서기도 하였습니다. 최영주는 일본에 유학을 하던 중 관동대지진이 있자 귀국하여 서울에서 도피생활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 이유는 일본에서 독립운동 단체에 활동하였기 때문에 늘 경찰이 그를 체포하려고 하였던 것입니다. 어쩌다 몰래 집에 내려 오면 선물을 사사지고 와서 최순애에게 주곤 하였습니다. 어느 해 일본 순경의 눈을 피해 몰래 집에 내려왔다가 동생 최순애에게 다음에 선물을 사가지고 오겠다고 약속하고 서울로 떠났습니다. 그런데 그만 일본 순경에게 붙잡혀 감옥엘 가게 되었고 건강이 악화되어 그만 세상을 떠났습니다. 최순애는 이런 오빠를 생각하며 과수원 언덕에 올라 ‘오빠생각’을 동시로 썼던 것입니다.

 

그러나 이 시간 ‘오빠생각’을 소개하는 것은 이 동시로 동요를 작곡한 박태준(1900~1986) 교수를 소개하기 위함입니다.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작곡가요 지휘자로 그가 태어난 생일이 바로 오늘 1월 12일입니다. 제가 연세대학을 다닐 때에 연세대 음악대학 교수였습니다. 그분에게 찬송가학을 공부하기도 하였습니다.

 

1921∼23년 마산 창신학교에서 교편을 잡으면서 <미풍> <님과 함께> <동무생각> <순례자> 등을 작곡했다. 같은 해에 계성중학교로 옮겨 1931년까지 재직했는데, 이때는 <오빠생각> <오뚜기> <하얀 밤> <맴맴> 등 동요를 작곡했다. 그의 대표적인 곡은 아마도 국민동요 ‘오빠생각’과 함께 ‘동무생각(思友)’일 것입니다.

 

< 동무생각(이은상작사 박태준작곡) >

 

봄의 교향악이 울려 퍼지는

청라 언덕 위에 백합 필 적에

나는 흰나리꽃 향내 맡으며

너를 위해 노래 노래 부른다.

청라언덕과 같은 내 맘에

백합 같은 내 동무야

네가 내게서 피어날 적에

모든 슬픔이 사라진다.

 

그러나 이 시간 박태준 작곡가를 소개하는 것은 그가 편곡한 ‘순례자’란 노래 때문입니다. 이 순례자 노래는 바그너라는 세계적인 작곡가의 대표적인 ‘탄호이저’라는 오페라의 3장 1막 서곡 ‘순례자의 노래’에 나오는 노래를 편곡한 것입니다. 이 ‘탄호이저’오페라는 13세기 독일에서 있었던 실제 이야기를 바그너가 1843년 오페라로 만들은 것입니다.

 

탄호이저라는 귀족기사가 있었습니다. 그는 잘생기고 노래와 시도 잘 부르고하여 잔연 환락생활을 합니다. 많은 여성들과 엽색행각도 벌립니다. 그러다가 엘리자베트라는 여인을 사모하며 진정한 사랑을 느끼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가 너무 난잡한 생활을 하여왔기 때문에 엘리자베트는 그의 사랑을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그러나 사실은 엘리자베트도 탄호이저를 사랑하였습니다. 탄호이저는 자신이 너무 타락하였기에 엘리자베트가 자기를 멀리하고 있다고 생각하고 새사람이 되라고 작정하고 회개하였습니다. 그리고 순례자들과 함께 로마에 가서 교황으로부터 용서를 받아오겠다고 떠났습니다. 그러나 교황은 탄호이저의 회개를 믿을 수 없었습니다. 탄호이저가 진정 회개하였다면 교황이 가지고 있는 나무지팡이에 잎이 나고 꽃이 필 것이라고 말합니다. 탄호이저는 메마른 나무지팡이에 잎이 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라 자신의 죄를 용서받을 수 없음을 비관하고 순례자들과 함께 에리자베트에게로 돌아가지 않고 다른 지방으로 떠납니다. 엘리자베트는 탄호이저가 순례자들과 함께 돌아온다면 결혼하리라 마음먹고 기다리고 있는데 탄호이저가 돌아오지 않으니 너무 상심한 나머지 병이 나고 그만 세상을 떠납니다. 그런데 탄호이저가 떠난 후 교황의 나무지팡이에 잎이 나고 꽃이 피웠습니다. 사람들은 이 기적에 놀라고 탄호이저의 회개가 진정임을 알고 그를 찾아가 교황의 용서하였음을 알려줍니다. 탄호이저는 기쁨으로 집으로 돌아오는데 길에서 에리자베트의 시신을 옮겨가는 장례행진을 만나게 됩니다. 탄호이저는 관을 붙들고 슬퍼하며 "성스러운 엘리자베트, 나를 위해 기도해 주오"라고 소리를 지르다가 그녀의 관 옆에서 그 역시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 때 합창단들이 ‘순례자의 노래’를 부릅니다. 그 순례자의 노래 가사를 소개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 그리워라 오 나의 고향 다시 보는 기쁨이요,

 

머나먼 방랑 지팡이를 잠시 쉬어가 봅니다.

우리 죄와 더러움을 내 주님의 은혜로 사함 받고

내 주님 앞에 서서 나 찬송 하리 찬송 하리 찬송 할 찌라

나의기도, 나의기도 들으셨네, 두려움 없네, 아무 겁 없도다.

나의 생명 나 살 동안 나의, 나의 주 찬양하리라.

할렐루야, 할렐루야, 영원토록영원토록 아멘

 

사막의 문을 통하여 살아계신 만군의 주 여호와 크고 두려우신 한자님이시여

주의 택하신 백성을 기억하시고 행하시는 모든 일 완전하시니

찬양과 영광을 주님 홀로 취하소서.

주의 구원에 은혜와 사랑에 감격하여 주를 송축하나이다.

주여 주께서 보시기에 저희는 잠깐 보이다 없어지는 안개이며

들에 피었다 곧 시들어져 버리는 꽃과 같은 존재입니다.

그런 우리에게 당신의 성령으로 아낌없이 기득 채워 주소서

그래서 우리의 힘으로 어찌할 수 없는 육체의 정욕과 세상을 능히 이기고

악한 행동을 이길 수 있도록 하여 주옵소서.

그리고 하나님의 의의 길로 행하여 주님의 기뻐하시는 삶을 살 수 있도록

영의 양식인 말씀으로 저희의 영혼을 강건하게 하여 주소서.

아버지의 말씀이 곧 예수 그리스도임을 성령 하나님께서 알게 하셨으니

예수 그리스도를 떠나서는 우리가 아무것도 할 수 없음을 고백합니다.

그러니 언제나 하루하루 우리의 삶이 말씀에 의하여 살아감으로

하나님의 기쁨이 되는 주의 자녀들 되게 하여 주소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간절히 기도합니다. 아멘 >

(by manga0713 2011.1.26. 망가천재의 스토리텔링에서 인용)

 

참으로 이 순례자의 노래가 경건하고 은혜가 넘치는 기도가 아닐 수 없습니다. 그리고 우리의 인생이 바로 순례자의 길임을 깨닫게 됩니다. 이 노래는 우리가 부를 수 없고 대신 우리가 잘 아는 복음성가 ‘순례자의 노래’를 함께 부르겠습니다.

 

< 저 멀리뵈는 나의 시온성 >

 

저 멀리 뵈는 나의 시온성

오 거룩한 곳 아버지 집

내 사모하는 집에 가고자 한 밤을 새웠네

저 망망한 바다 위에 이 몸이 상할지라도

오늘은 이곳 내일은 저곳 주 복음 전하리

 

아득한 나의 갈 길 다 가고

저 동산에서 편히 쉴 때

내 고생하는 모든 일들을 주께서 아시리

빈들이나 사막에서 이 몸이 곤할지라도

오 내 주 예수 날 사랑하사 늘 지켜 주시리

 

("저 멀리뵈는 나의 시온성" 또는 "시온성", "순례자의 노래"로 많은 사랑을 받아온 이 성가곡이 그동안 작사, 작곡 미상으로 우리들에게 널리 알려져 있었으나, 원곡의 작사와 작곡을 미국 로스엔젤레스에서 거주하는 이요섭 박사 (라성영락교회 장로)가 만든 것임이 알려졌습니다. 이박사는 현제 LA에서 매주 일요일 4시-6시까지 "이요섭의 뮤직월드"를 진행하고 있으며, 얼마전까지도 "로스엔젤레스 이튼칼리지 음악대학장"을 맡았고, 한국에서는 KBS-TV "노래는 즐거워"와 KBS-TV의 "삼천만의 합창" 등을 진행한 바 있었습니다. )

 

2020년 새해 들어와 아니 벌써 열흘이 지났습니다. 그야말로 인생의 가는 길은 잠깐 머물다 가는 인생 같습니다. 성경에서는 인생을 여러 가지로 비유하여 말하고 있습니다.

 

약 4:4 인생을 안개라고 했습니다.

시 102:3에서는 인생을 연기라고 했습니다.

욥 7:7에서는 인생을 호흡이라고 했습니다.

시 78:39에서는 인생을 바람이라고 했습니다.

벧전 1:24에서는 인생을 풀이라고 했습니다.

창 47:9에서는 야곱이 바로를 만나 “내 나이 얼마 못되니 우리조상의 나그네 길의 연조에 미치지 못하나 험악한 세월을 보내었나이다.”라는 말을 하였습니다. 인생의 길이 나그네의 길이라는 것입니다.

 

오늘 봉독한 히 11:13에서는 인생은 나그네(파라피데모스)라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나그네라 하는 말은 다른 의미로 볼 때에 순례자를 가리킵니다. 14절에 본향(파트리스)을 찾고, 15절에 본향을 생각하고, 16절에 본향을 사모한다고 하였습니다. 본향이란 아버지의 집 곧 하나님 아버지의집인 천국을 말합니다. 기독교인들은 언제나 이 세상에 살면서 천국을 사모하며 언젠가 천국에 가게 될 그날을 기다리며 살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기독교인의 인생은 나그네가 아니라 순례자의 인생입니다.

 

나그네(wanderer)라는 말과 순례자(pilgrim)라는 말의 의미가 다릅니다.

 

국어사전에서 나그네란 자기 고장을 떠나 다른 곳에 임시로 머무르고 있거나 여행 중에 있는 사람을 말합니다. 그리고 순례자는 성지를 찾아다니며 참배하는 사람이라고 하였습니다. 즉 종교적 의무 또는 신앙 고취의 목적으로 여행하는 사람을 말합니다.

 

나그네는 어디서 왔는지, 어디로 가는지 모르지만, 순례자 인생은 어디서 왔는지, 어디로 가는지를 분명히 아는 사람들입니다. 나그네는 오늘은 이 곳에서 유숙하다가 내일이면 또 다른 곳에 유숙합니다. 목적지가 없이 떠다닙니다. 그러나 순례자들은 멀리 성지(聖地)를 향해 떠났다가 때가 되면 자기 집으로 돌아옵니다. ‘오늘도 걷는다마는 정처 없는 이 발 길(1939년 백년설 노래)’ ...나그네의 인생길은 특별한 목적지가 없이 인생을 배회하며 이곳저곳 다니다가 어느 길 어느 집에서 세상을 떠납니다, 김병연(金炳淵1807~1863), 김삿갓을 아시죠? 죽장에 삿갓 쓰고 떠나가는 김삿갓은 방랑시인이란 말을 듣는 천재시인이었습니다. 그는 피곤하고 연약한 몸으로 전라남도 화순 동복 신석우라는 친구의 집에 머물다가 적벽강에 홀로 배를 타고 물결 따라 바람 따라 흐르며 마지막 시를 썼는데 “날짐승도 길짐승도 제 집이 있건만 나는 한평생 혼자 슬프게 살아왔노라. 짚신에 지팡이 끌고 천리 길 떠돌며 물처럼 구름처럼 가는 곳이 내 집이었다.(鳥棲獸巢皆有居 顧我平生獨自傷, 芒鞋竹杖路千里 水性雲心家中方 조소수소개유거 고아평생독자상, 망해죽장로천리 수성운심가중방 ) 라는 시를 쓰고 세상을 떠났으니 철종 14년 1863년 3월 29일 56세 이였습니다. 그야말로 떠돌다 가는 나그네 인생을 살다가 김삿갓은 그대로 죽었습니다. 나그네 인생은 어디서 왔다가 어디로 가는지 모르고 그냥 구름 따라 물결 따라 살다가 세상떠나가는 인생입니다.

 

그러나 순례자의 인생은 다릅니다. 순례자 인생은 우리 인간이 하나님께로 왔다가 하나님께로 돌아가는 자임을 분명히 알고 사는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은 죽었을 때 ‘사망(死亡)했다.’고 표현합니다. 죽어서 망했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우리 기독교인들이 죽으면 ‘하나님께로 돌아갔다.’ 혹은 ‘소천했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순례자는 어디서 왔는지, 죽어서 어디로 가는 지 분명히 아는 인생입니다. 나그네는 이 세상에서 목적 없이 살지만, 순례자는 자기가 온 목적을 압니다. 이 세상에서 하나님이 주신 사명을 이루며 열심히 목적대로 순례하다가 때가 되면 모든 것을 두고 돌아갑니다. 우리는 잠깐 지나가는 세상에서 나그네로 살면서 욕심을 부리며 살다가 지옥으로 떨어지는 나그네 인생이 아니라, 이 세상에서 하나님이 주신 사명대로 살다가 때가 되면 하나님께 돌아가 영원한 복락을 누리는 순례자의 길을 가야 합니다.

 

양희은이 부른 ‘순례자의 노래가’가 있습니다.

 

순례자의노래 / 인생은 언제나 외로움

 

1.인생은 언제나 외로움 속의 한 순례자

찬란한 꿈마저 말 없이 사라지고 언젠가 떠나리라

2.인생은 나뭇잎 바람이 부는대로 가네

잔잔한 바람아 살며시 불어다오 언젠가 떠나리라

3.인생은 들의 꽃 피었다 사라져가는 것

다시는 되돌아 오지 않는 세상을 언젠가 떠나리라

4.인생은 언제나 주님을 그리는가보다

영원한 고향을 찾고 있는 사람들 언젠가 만나리라

 

2020년 우리는 수례자로 살아가야 합니다. 오늘도 걷는다마는 정처 없이 가는 길이 아니라 분명한 목적과 사명을 가지고 매일 매일 살아야 합니다.

 

오늘 아침 우리가 눈을 뜨면 아! 오늘도 열심히 순례자의 길을 가야하겠다라는 생각을 가져야 합니다. 그러면 이제 순례자의 길을 떠나 볼까요?

 

시편 23편의 말씀을 따라 순례자의 하루를 시작하려고 합니다.

 

순례자의 아침아 밝았습니다.

시편 23:1에 보면,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하였습니다. 길고 긴 어둔 밤이 지나고 먼동이 터오자 순례자는 설레는 마음으로 오늘의 하룻길 떠날 준비를 해야 합니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라고 고백합니다. 이스라엘 땅은 척박건조瘠薄乾燥한 땅입니다. 그러나 목자들을 양떼를 데리고 푸른 초장 잔잔한 시내가로 인도합니다. 우리가 사는 세상에 산다는 것은 너무나 어렵고 힘든 괴로운 세상을 사는 일입니다. 사랑도 부족하고 정의와 공평이 턱없이 모자란 땅입니다. 우리가 행복하고 안전하게 살아가기에 너무나 척박건조한 오늘을 살아가려 하니 아침에 두려움이 앞섭니다. 아! 오늘은 얼마나 어려운 일이 많을 것인가? 두렵고 불안한 마음으로 아침을 맞이합니다. 그러나 아니요, 우리 성도들은 그런 아침을 출발하지 않습니다. 여호와 나의 목자시니 하나님 믿고 하루 첫 걸음을 걸으면 하나님이 선히 우리의 순례 길을 인도 하여 주실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신뢰하고 순종하여 정의와 공평의 밭을 갈며 사랑의 씨를 뿌립니다.

 

성도여러분, 누구든지 여호와 나의 목자 삼으면 우리의 순례의 아침 길은 평안하고 즐거운 마음으로 순례의 길을 출발한다는 것을 믿으시길 바랍니다.

 

이제 순례자의 한 낮의 길을 갑니다.

 

시 23:4에 보면,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시 나이다" 하였습니다.

 

이스라엘 땅의 한낮의 햇볕은 매우 뜨겁습니다. 풀은 메마르고 물은 말라 속이는 시내가 됩니다. 여기 저기 번뜩이는 이리와 여우들의 눈이 양떼들을 노리고 있습니다. 그러나 양떼들은 전혀 동요하지 않습니다. 목자들의 지팡이가 자기들을 보호하리라 철석같이 믿고 있기 때문입니다. 한낮의 양떼들은 아무 두려운 없이 풀을 뜯습니다.

 

이미 우리들의 순례자의 낮 세상도 예상한바가 있습니다. 결코 쉽지 않은 길이란 것을, 시련과 고난과, 어렵고, 힘들고, 괴롭고, 아픈 각가지 일들이 첩첩이 쌓여 갑니다. 그러나 양은 유순하여 아무나 따라가고 양처럼 어리석어 기만당하기 쉽고 길을 잃기도 쉽습니다. 안전한 것과 위험한 것은 구별하지 못합니다. 그러나 이리 떼들의 울음소리와 사자의 날카로운 발톱이 달려들어도 선한 목자를 따라가는 양은 안전한 것 같이, 선한 목자를 따르는 순례자는 안전합니다. 목자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보호하고 안위하기 때문입니다. 신앙의 순례길은 십자가에서 시작하여 부활에서 끝이 납니다. 그 때문인지, 시편23편을 가운데 두고, 시편22편은 "내 하나님이여, 내 하나님이여,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로 시작하는 십자가의 고난을 묘사하고, 시편 24편은 "문들아 너희 머리를 들지어다 영원한 문들아 들지어다." 부활의 영광을 묘사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시편 23편은 십자가와 부활사이의 영광스러운 삶에 이르는 순례자의 하룻길을 보여주고 있는 셈입니다. 이 사실을 보고, 알고, 믿는 순례자는 한 낮의 시련이 두렵지 않습니다. 사나운 원수들이 두렵지 않습니다. 선한 목자께서 지팡이와 막대기로 우리들을 안위하시기 때문입니다. 막대기는 말씀이요 지팡이는 교회의 가르침입니다. 한 낮의 여정에 선한 목자 하나님께서 말씀과 가르침으로 우리들을 보호하시고 안위하시니, 여러분, 우리는 안전하게 순례자의 오정의 길을 가게 된다는 것을 믿으실 바랍니다.

 

이제 순례자는 저녁을 맞이합니다.

 

시편 23:6에 보면, "내 평생에 선하심과 안자하심이 반드시 나를 따르리니 내가 여호와의 집에 영원히 살리로다" 하였습니다.

 

하루의 길을 가고 저녁의 쉼을 가지게 됩니다. 순례자의 길에는 쉼터가 있습니다. 피곤한 몸을 쉬고 긴장하였던 마음을 풀어 평안케 합니다. 저녁에 보여주시는 하나님의 은혜와 평강이 모든 순례자의 길을 걸어온 이들에게 주실 것입니다. 양떼들은 울안에서 평안을 누립니다. 목장의 문 앞에 목자가 지키고 있으니 양떼들을 따라왔던 짐승들은 더 이상 가까이 못하고 가버립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의 순례의 길은 지금 어디쯤에 이르렀습니까? 우리들의 인생길에 아무리 사는 것이 어렵고 되는 일이 없고 성과가 눈에 보이지 않아도 낙심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선한 목자 되신 주 예수님께서 물가로 초장으로 인도하여 부족함이 없게 하실 것입니다. 아무리, 사나운 이리 떼의 울음소리가 들리고, 날카로운 사자의 발톱이 덮쳐 와도 두려워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선한 목자 되신 우리 주님께서 보호와 안위가 되어 주실 것입니다.

 

아무리, 나의 일생이 험하고 허무해 보여도 겁내지 말고 안심하고 나의 달려 갈 순례의 길을 열심히 가시기 바랍니다. 포기하거나 낙오되지 마시기 바랍니다. 선한 목자 되신 우리 주님의 평강의 축복이 있습니다. 아무리, 내 육신이 늙어 쇠하고 세상을 떠날 날이 가까워 와도 흔들리지 마시기 바랍니다. 변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아무리, 높아지고 싶고, 잘 살고 싶고, 사람들에게 갈채를 받고 싶어도 조금 참으시기 바랍니다. 선줄로 생각 하는 자는 넘어질까 조심해야 합니다.(고전 10:12) 원수들 목전에서 머리에 기름을 바르고 상을 베풀어 주실 선한 목자를 바라보시기 바랍니다.

 

라온코니노니아 성도 여러분, 우리들의 인생은 연습이 없습니다. 되돌림이 없습니다. 연극도 아닙니다. 우선멈춤도 없습니다. 나그네 인생길은 더더구나 아닙니다. 우리의 인생길은 오늘도 열심히 순례자의 길을 가야하는 순례의 삶을 살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마련하여 준비한 그 천국잔치에 참석하기 위해 오늘도 열심히 순례자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2020년, 여러분, 순례자의 길을 따라 살아갈 때에 날마다 일마다 하나님의 은혜와 축복의 상을 받으시길 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다같이 복음성가 ‘나는 순례자’를 부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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