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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병호목사의 교회이야기

전병호 목사의 설교



2015년 1월 25일 주일아침 예배

전병호 by  조회 수:80 2015.01.25 13:05

2015125일 주일아침 예배 빌 2:12-18 라온 코이노니아의 환희

 

 

구름엔 여러 종류가 있습니다. 새털구름 비늘구름 비단구름 몽실구름 베일구름 차양구름 쌘비구름 먹구름 층층구름 등입니다. 이 중에 쌘비구름을 한문으로 적란운積亂雲이라고 합니다. 적란운은 아주 크고 솜털같이 크고 부풀어져 하늘 높이 올라간 구름입니다. 흔히 우리는 뭉게 구름이라고도 합니다. 미국의 기상청에 이 적란운이 9번째로 불려져 아홉 번 째 구름(cloud nine=a state of extreme happiness)이라고 부릅니다. 미국사람들의 말 중에 나는 기분이 아홉 번째 구름같아’(Be on clud nine)라고 말하면 이 말은 기분이 날아갈 듯 해라는 뜻입니다. 다른 영어로는 I'm floaing on air이라고 하는데 이말은 우리말로 번역할 때는 기분이 째지게 좋아라고 말합니다. 또다른 영어로 ‘hilarious’라는 단어도 있습니다. 웃음이 넘쳐 싱글벙글 그 기쁨을 참아내지 못한 상태를 말합니다. 클린턴 대통령의 아내 이름이 힐러리입니다. 같은 어원에서 나왔습니다. 아마도 크린톤이 대통령이 되었을 때 그의 아내 힐러리는 기쁨이 하늘을 나는 것 같았을 것입니다. 여러분 이런 기분 좋은 날이 그런 때가 있었습니까? 그런데 우리가 歡喜를 말할 때 이런 기분이 가장 올라간 상태 중국어로는 快感達到高潮라고 합니다. 기분이 좋아 앤돌핀이 콸콸(渢渢) 쏫아져 나오는 상태를 말합니다. 그런 상태가 계속 지속되는 그런 상태를 환희라고 말합니다.

 

농부가 가을에 풍성한 수확을 거둘 때에 얼마나 기쁨이 크겠습니까 일년 내내 땀 흘려 수고한 보람으로 기분이 날아갈 듯할 것입니다. 그런데 시편 기자는 이런 기분보다 더 큰 기쁨이 있는데 하나님이 주신 기쁨이라는 것입니다.

 

4:7 주께서 내 마음에 두신 기쁨(쉬므카)은 저희의 곡식과 새 포도주의 풍성할 때보다 더하니이다. 그래서 옛날 이스라엘 사람들은 하나님 앞에 기념으로 예배드리는 날들을 희락의 날(10:10 베이욤 쉬므카트켐)이라고, 즉 환희가 넘치는 날이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의 기본 자세는 기쁨이 충만한 상태입니다. 이 상태를 환희라고 말합니다.

 

환희(歡喜 gaudium)라는 말을 어느 백과 사전에서 정의 내리기를 선한 것을 기대하거나 획득함으로써 일어나는 기쁨이나 즐거움의 감정을 말한다라고 하였습니다. 좀 더 분석하여 말한다면 은 몸의 즐거움을, 는 마음의 기쁨을 말합니다. 그러므로 사람이 환희를 느낄 때 몸과 마음이 날아갈 듯하고 기분이 째지듯 좋은 상태가 계속 지속되는 것을 환희라고 말합니다. 그러닌까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은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환희가 계속 뭉게구름처럼 그 마음에 일어나야 합니다.

 

언제 그런 마음이 일어납니까? 복음으로 말미암아 일어나야합니다. 이것을 복음의 기쁨(Evangelii Gaudium)이라고 말합니다. 우리가 복음을 들을 때 환희가 가슴 밑바닥에서 뭉게구름처럼 몽실몽실 일어나야 합니다. 예배 중에 말씀 듣는 중에 찬송 부르는 중에 ! 기쁘다, 너무 기뻐 숨이 멎고 가슴이 터질듯하다. 이런 경험 처음이야!’라는 그런 환희를 맛본 적 있으십니까? 복음의 기쁨이 예배시간에 맛본다면 여러분은 하나님이 주신 환희를 경험한 것입니다. 이는 내 영혼이 예수님을 그 시간에 만나고 예수님이 그 시간에 우리에게 이 복음의 기쁨을 주시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런 환희를 예배 때마다 말씀들을 때마다 경험한다면 여러분은 진정 하늘의 사람이라고 하겠습니다. 왜냐하면 천국 백성들은 이런 환희를 영원히 맛보며 살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곳이 천국입니다.

 

예수님의 공생애는 이 복음의 기쁨으로 계속되었으니 날마다 이르는 곳마다 만나는 사람마다 이 환희가 전해졌고 이 환희로 기적의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예수님의 발자국 디딛는 그곳마다 환희 핀 희망의 꽃들이 피어났습니다.

 

15:11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내 기쁨이 너희 안에 있어 너희 기쁨을 충만하게 하려 함이니라

예수님 안에는 언제나 복음의 기쁨이 넘쳐 있었고 이 예수님의 환희를 우리에게 넘치게 주시려 하였습니다. 이런 삶이 바로 예수님의 공생애였습니다.

예수님이 희망으로 피운 환희는 매일같이 고난과 역경 세상의 모진 풍파 속을 헤쳐 피어 오른 꽃 이였습니다. 마치 동백꽃 같습니다. 농촌 진흥청에서 1월의 꽃을 동백꽃으로 지정하였습니다. 동백꽃을 생각해 보세요. 한겨울 모진 한파 속에 동백 꽃은 꽃망울을 터트립니다. 동백은 나비나 벌이 활동하지 못하는 한겨울에 꽃을 피웁니다, 그러면 어떻게 꽃가루받이를 할 것입니까? 동박새가 꿀이 귀한 겨울철에 동백꽃을 찾아 와 꿀을 먹습니다. 동박새는 동백꽃으로부터 꿀을 먹고 동백꽃은 동박새로 부터 꽃가루받이를 하니 누이 좋고 매부 좋은 공생 관계입니다. 동백꽃의 꽃말이 희망입니다. 희망을 가진 다는 것은 가장 큰 기쁨입니다. 그래서 예수님 탄생할 때 하늘의 천사가 세상에 미치는 큰 기쁨의 소식을 전한다고 하였습니다. 예수님은 한 겨울같이 매서운 찬바람이 부는 이 세상에 희망의 동백꽃을 피우셨다고 하겠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그 동백꽃은 십자가의 고난의 나무에 피가 터져 붉게 피어났습니다. 예수님의 환희는 세상에서 쉽게 얻을 수 있는 그런 기쁨이 아닙니다. 십자가의 고통을 당하여 본 아픔과 그 슬픔을 모른다면 환희를 모릅니다. 예수님의 환희 뒤에 바로 십자가가 있습니다. 십자가 없는 환희는 없습니다. 그래서 너희도 너희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고 예수님이 말씀하시였습니다.

 

남자는 여자하기 나름이예요모 가전제품 CF로 그 이름을 알린 여 배우가 있지요. 누구입니까? 바로 최 신실 씨 입니다. 최 신실 씨는 각종 드라마에서 최고의 인기를 누리며 만인의 여인이라고 불려졌습니다. 그런데 2008101일 뜻밖의 죽음으로 많은 사람들의 마음을 너무나 아프게 하였습니다. 더욱이 그녀의 남편이었던 조 성민씨가 그 뒤를 이어 그리고 그녀 남동생 최 진영씨가 그 뒤를 이어 세상을 떠났습니다. 너무나 화려한 모습으로 언제나 싱글 생글 웃으며 사람들의 마음을 쥐락펴락하였던 최 신실씨의 가정에 일어난 너무나 슬픈 이야기들이 더욱 듣는 사람들의 가슴에 아련한 아픔이 전해주었습니다. 자녀의 성씨가 아버지의 성이 아닌 어머니의 성씨를 따라 최 씨로 해서 아들 딸 이름을 최 환희, 최 준희로 하였습니다. 이 이야기를 하는 것은 바로 최 진실씨가 아들의 이름을 환희라고 지은 이야기를 소개하기 위해서 였습니다. 최 신실 씨가 한창 이름을 날리던 때 그야 말로 환희 날개를 펴 하늘을 오르는 그때에 아들을 낳아 이름을 환희라고 지었습니다. 그러나 그 환희 뒤에 얼마나 슬픈 이야기들이 있는지, 환희가 성장하면서 어머니 아버지를 기억할 때마다 환희는 깊은 슬픔이 가슴속에 남아 있게 될 것입니다. 환희 뒤에는 슬픔이, 환희 뒤에는 아픔이 있기 마련입니다. 고 최 진실씨는 환희는 있었는데 희망이 없었습니다. 희망이 없으니 삶의 용기를 상실한 것입니다. 최 환희 군이 이제 미래의 희망을 가지고 살아간다면 어머니가 누렸던 진정한 환희로 인생을 살아가기를 기대합니다.

 

저는 이 라온 코이노니아를 개원하면서 말할 수 없는 깊은 비애를 가졌습니다. 네 안해 역시 그 비애를 가슴에 안고 마치 그 비애를 잊기 위해서인 냥 열심히 이 라온 코이노니아를 개원하기 위해 뛰어 다녔습니다. 말씀은 안하시지만 여러분들도 똑 같은 비애를 삼키고 계신 줄 압니다. 그런 여러분을 보며 저는 마음이 아픕니다. 너무나 아파 소리라도 콱 지르고 싶습니다. 너무나 분통이 터져 누구와 실컷 싸움이라도 하고 싶습니다. 그러면서 하나님께 어찌하여 아직 저로 하여금 십자가를 더 지라 하십니까?하며 기도하였습니다. 어제 개원예배를 드리면서 제 마음은 그야말로 날아갈 듯 기뻤습니다. 하나님께서 나에게 새로운 희망을 안겨 주셨습니다. 어제 양 태윤 목사님께서 설교하실 때 나이 많은 제사장 시므온과 안나 할머니를 말씀하였습니다. 나이 늙도록 희망을 가지고 메시야를 기다리다가 마침내 아기 예수를 품에 안은 저들은 그야말로 환희의 송가를 불렀습니다. 저도 이 나이에 여러분과 함께 무엇을 할 수 있을 까? 숫한 생각을 하였습니다. 이 나이에 무슨 희망을 가질 것인가? 사람들은 말 합니다 지금은 인생을 접을 때라고 그냥 모든 것 놓고 쉬라고 합니다. 저도 그러한가 그렇지 그냥 세월 따라 살다가 가는거지 그것이 인생이지라고 생각도 해 보았습니다. 그러나 어제 저는 다시 동백꽃을 피울 용기를 가지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 나이에 여러분과 함께 새로운 희망의 꽃 환희를 피워볼 용기를 가지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예수님이 주신 복음의 기쁨이 제안에 충만하게 뭉게구름처럼 일어났기 때문입니다. 저는 어제 환희를 경험하였습니다. 그리고 이 환희가 날마다 저와 여러분과 함께 계속되기를 기도합니다. 그것은 저에게 주신 복음의 기쁨을 예수님을 여러분에게도 주셨음을 믿기 때문입니다. 환희와 희망(Gaudium et spes). 이것은 우리 라온 코이노니아의 두 날개입니다. 환희와 희망의 날개를 활짝 펴서 힘차게 날아 갈 것입니다.

 

이제 이 환희가 지속되기 위해서 무엇이 필요 합니까? 라온은 코이노니아가 있어야 합니다. 알고 계시듯 라온은 우리말로 기쁘다란 뜻입니다. 코이노니아는 성경의 용어로 성령 안에서의 사귐을 말합니다. 기쁨은 희망과 함께 하는 사귐을 가질 때에 환희로 나타납니다. 무슨 사귐입니까?

 

우리는 과거로부터 함께 아픔을 나누고 괴로운 마음을 함께 가지고 여기에 모인 우리로 사귐입니다. 여기에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셨고(With Being), 하나님과 더불어 우리가 여기 함께 있는 것(with being)입니다. 그런데 이것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가 결코 잘난 것이 아닙니다.

 

에베소서 23절에

전에는 우리도 다 그가운데서 우리 육체의의 욕심을 따라 지내며.....본질상 진노의 자녀이었더라라고 말씀하였습니다. 우리는 이것을 인정하여야 합니다. 전에는 우리는 본질상 진노의 자녀였습니다. 그런데 이것이 하나님의 은혜로 새로운 신분 라온 코이노니아로 하나님의 자녀가 된 것입니다. 이 새 신분으로 변화되지 않았다면 우리는 여전히 본질상 마귀와의 사귐으로 지노의 자녀속에 여전히 있었을 것입니다.

 

코이노니아란 함께 어떤일 Somthing 참여하는 사람들Someone의 사귐을 말합니다. 우리와 함께하지 않는 자는 버리운 자들이요 하나님의 진노의 자식들이라고 예수님은 말씀하시였습니다.

 

아이들에게 티아라 놀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왕따 놀이라는 것입니다. 몇몇 아이들이 어느 아이에게 문자 메시지를 보냅니다. 내일 나의 책가방을 가지고 가라라고 합니다. 만일 그 아이가 그런 메시지를 받고 하지 않으면 그 아이를 왕따 시키는 것입니다. 반면에 그런 티아라 놀이에 가담하지 않으면 그 런 아이를 또 왕 따 시킵니다. 어떤 때는 아이들이 왕따 아이에게 온갖 욕설을 문자로 보냅니다. 만일 여기에 동참하지 않으면 그 아이도 왕따 욕을 받아야 합니다. 그러닌까 욕먹지 않기 위해서 티아라 놀이에 가담하게 됩니다. 이런 티아라 놀이가 초등학교에 유행한다고 합니다. 이 티아라 놀이는 마귀의 집단 따돌림놀이입니다. 이 티아라 놀이에는 기쁨이 없습니다. 환희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예수님까지 집단 따돌림을 한 마귀의 놀이이기 때문입니다.

 

바로 이런 티아라 놀이를 저도 여러분도 경험하지 않았는가 봅니다. 왕따 당하지 않기 위해서 장로도 목사도 권사도 여기에 끼어들었습니다. 마귀의 놀이에 참여하지 않은 사람들이 여기에 모였습니다. 여기 진정 십자가를 함께 지고 따른 여러분들이 모임이 바로 코이노니아 사귐입니다.

 

몇일 전 귀농하기 위해 시골에 새 집을 지은 사십대 부부가 이사온지 이틀만에 시체로 발견되었습니다. 경찰이 시신검시를 해 보니 일산화탄소 중독이라는 것입니다. 새 집의 기름 보일라에 호수에 틈이 생겨 그 틈으로 일산화탄소가 방안에 가득히 들어온 것입니다. 부부는 그것도 모르고 잠을 자다가 참변을 단한 것입니다.

 

우리는 이것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 라온 코이노니아는 예수님과 함께 우리와 함께 환희의 공동체로 모였습니다. 여기에 틈이 생기면 안 됩니다. 물론 공동체 안에 티아라 놀이가 다시는 없어야 합니다. 다시는 나를 위한 나만을 위하여 다른 사람을 멀리하는 일이 있다면 공동체는 무너지게 됩니다. 일산화탄소처럼 좌악의 독소로 기쁨이 우리 라온에서 사라지면 아픔과 슬픔이 새어 들어 옵니다. 모두가 아프고 모두가 슬퍼집니다. 성령께서 탄식하십니다. 더 이상 환희의 꽃을 피울 수 없게 됩니다. 그러므로 라온 코이노니아는 예수님과 함께 복음의 기쁨을 누리며 우리 모두 함께 기뻐하는 라온 코이노니아가 되도록 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그러나 우리 라온 코이노니아는 단지 과거에서 벗어난 사람들의 모임이 아닙니다. 우리는 성령님께서 우리를 과거의 우리를 하나 되게 하실 뿐 아니라 우리의 미래의 모든 것을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하도록 하십니다. 우리가 예수님과 함께 한다면 예수님의 은혜와 복도 함께 하게 될 것입니다. 우리의 미래는 확실하지 않습니다. 거울의 보는 것처럼 희미합니다. 그러나 확실하게 보기 위해서 우리가 해야 할 첫 번째 일은 생각을 바꾸는 일입니다. 우리 머릿속에 있는 죄악 요소들을 다 지워 버려야 합니다. 미움도 지우고 억울함도 지우고 교만도 지우고 욕심도 지우고 불평도 지우고 거짓도 하얗게 비워야 합니다.

 

불교에서도 마음을 비우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기독교의 비움은 불교의 비움과는 다릅니다. 불교의 비움은 마치 우물에서 구멍 난 두레박을 계속 내렸다 올렸다 하는 것과 같습니다. 물을 길어 올리지만 여전히 물은 다 새어버려 또다시 두레박을 내립니다. 그러나 구멍난 빈 두레박을 올릴 뿐입니다. 그러나 기독교의 비움은 마음이란 우물에서 온갖 더러운 물을 길어 오리고 내려갈 때 빈 두레박이 아니라 진실을 가득 담고 의로움을 가득답고 아름다운 마음들을 가득 담아 내립니다. 그리고 마지막 예수의 보혈을 우물 안에 뿌립니다. 그러면 마침내 마음이 정화됩니다. 그래서 약한 것이 강해지고 천한 것이 귀해지고 가난한 것이 부요하게 됩니다. 예수님이 그렇게 하여 주십니다. 사랑을 빈 가슴에 가득 채우고 겸손으로 뭉쳐지고 협력하여 선을 이루어 가야 합니다. 여기에 희망이 있습니다. 예수님이 우리의 찬란한 미래를 확실하게 보여 주십니다. 여기에 환희를 경험하게 됩니다. 환희와 희망은 우리 라온 코이노니아의 두 날개입니다.

 

좀 어려운 말입니다만 라온 코이노니아 공동체가 경험할 세 가지 환희와 희망을 세 가지 한문글자로 소개하려 합니다.

 

첫째로 유도집허(唯道集虛)란 말이 있습니다. 즉 마음을 비워 말씀으로 채우면 환희와 희망을 경험하게 됩니다.

 

둘째로 위이불시(爲而不恃)란 말이 있습니다. 우리가 비록 하나님이 원하시는 일을 하였다 하더라도 그것으로 교만해지지 않으면 환희와 희망을 경험하게 됩니다.

 

세 번째로 용지불근(用之不勤)이란 말이 있습니다. 우리가 환희와 희망으로 살아간다면 하나님의 은혜는 끝없이 계속된다는 말씀입니다.

 

제가 100년 전 교회들을 탐방하며 감격한 것은 옛 신앙 선배들이 복음의 기쁨을 가지게 될 때 자신들의 시간도 재물도 그리고 심지어 생명까지 바쳐 믿음 생활함은 그들 속에 환희와 희망이 가득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들의 환희는 오늘 까지도 교회와 그들의 후손들에게 계속 희망으로 넘치도록 이어지고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과 함께 한 오늘 이 시간 저는 넘치는 환희와 희망을 경험하며 하나님께 감사와 영광을 돌립니다. 이 넘치는 환희와 희망으로 하나 된 우리 모두에게 하나님의 은혜와 축복이 날마다 부어주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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