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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병호목사의 교회이야기

전병호 목사의 설교



2015년 11월 22일 주일아침 예배 설교  역대하 15:15 라온코이노니아의 헬로(Hello)

 

잠시 음악 한 곡을 잠간 들어 보겠습니다.............................................

 

무슨 곡인지 아시겠습니까? 1980년,90년대 KBS Tv  토요일 밤 명화극장의 시그널 음악으로 널리 알려진 멜로디입니다. 이 곡의 이름을 아신다면 매우 수준 높은 사람이라고 하겠습니다. 이곡의 이름은 “아란후에즈 협주곡concierto de aranjuez”이라고 하는데  기타와 함께 연주합니다. 저는 이곡을 알기 전엔 기타가 다만 대중가요 악기로만 알고 있었습니다. 오늘날 클래식기타리스트로 세계적인 거장인 나르시스 에페스가 10줄의 기타로 이 곡을 연주 하는데 큰 감동 이였습니다.  이 “아란후에즈의 협주곡”의 작곡자가 누구인지 아십니까? 작곡자를 아신다면 참으로 수준 높은 사람입니다. 바로 스펜인 작곡가 호아킨 로드리고(1901.11.22.일-1999.7.6.)가 1939년에 작곡하여 1940년11월 9일에 초연을 하였는데(바르셀로나의 팔라우 데 라 무지카 카탈라냐에서 세자스 멘도자 라살르의 지휘와 바르셀로나 필하모니 오케스트라의 연주와 당대 최고의 스페인 기타리스트인 레히노 세인스 데 라 마사Regino sainz de la Maza, 1897-1982의 협연으로 이루어졌습니다.세고비아가 자기와 협연안한 것에 질투를 하였다고 합니다)   이곡이 연주되자 세계의 모든 음악인들이 찬사를 돌렸고 모차르트 베토벤 슈베르트에 버금가는 20세기 세계최고의 작곡가로 명성을 날리게 되었습니다. 스페인 왕은 그에게 후작지휘를 주었습니다. 아란후에즈 협주곡은 모두 4악장으로 20세기의 최고의 음악이라고 하겠습니다. 로드리고의 기타곡들을 듣고 있노라면 기타를 작은 오케스트라라고 칭송하는 이유를 깨닫게 됩니다. 그의 기타 협주곡들은 어느 악기보다도 부드럽고 어느 악기보다도 강렬한 힘으로 청중들을 매혹시키고 있습니다. 한동안 기타하면 세고비아를 떠올립니다. 세고비아(Andrés Segovia)가 기타연주의 대명사라면 기타음악 작곡의 대명사는 로드리고입니다.(로드리고는 1954년 ‘어느 신사를 위한 환상곡’을 작곡하여 세고비아에게 헌정하므로 세고비아와 화해하였습니다. 이후 로드리고는 스페인을 대표하는 기타리스트들에게 공평하게 기타 협주곡 하나씩을 작곡하여 헌정하였다. 프레스티-라고야 듀오를 위해 <마드리갈 협주곡>(1966)을, 로메로스 일가로 구성된 기타 4중주단인 로스 로메로스를 위해 넉 대의 기타를 위한 협주곡인 <안달루시아 협주곡>(1967)을, 페페 로메로를 위해 <축제 협주곡>(1982), 앙셀 로메로를 위해 <스페인의 길모퉁이>(1991) 등이 그것으로서 일련의 위대한 스페인 기타 협주곡군(群)이 로드리고에 의해 탄생했다. 이러한 일군의 기타 협주곡의 시발점이자 20세기 스페인 기타 음악의 부활을 알린 작품으로서 <아랑후에스 협주곡>이 갖고 있는 역사적인 의의는 너무나 크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그는 유명한 피아니스트요 바이올리니스트이지만 기타는 전혀 할 줄 모른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기타가 만들어내는 선율과 리듬, 화음을 자유롭게 놀라운 정도로 표현하고 있는 것입니다. 특히 그의  4대의 기타와 오케스트라를 위한 ‘안달루스협주곡은 감동 백배 그 자체입니다.  그런데 더욱 놀라운 것은 로드리고가 3살 때 디프테리아로 눈이 멀게 된 장애인 이였습니다. 따라서 그의 작곡은 정상적인 작곡가에 비해 엄청난 노력과 인내와 고통이 따르는 일이였습니다. 점자로 악보는 읽을 수 있어도 오선지에 연주자가 볼수 있는 악보를 기보한다는 것은 불가능 하였습니다. 결혼 전에는 라파엘 이바네스라는 가정교사가 헌신적으로 도왔는데, 결혼 후에는 그의 아내가 로드리고의 방대한 악보를 옮기는데 음악적인 열정과 초인적인 인내로 감당을 하였습니다.  그의 아내 이름은 빅토리아 캄히victoria kamhi 였습니다. 캄히는 터키계 유대인으로 피아니스였습니다. 어느 날 우연히 로드리고의 피아노곡을 치다가 그 작곡자를 만나고 싶은 생각이 났습니다. 두 사람은 만나 사랑을 하게 되었고 결혼을 하였습니다.


우리가 듣고 알고 있는 곡은 “아란후에즈 협주곡” 2악장으로 이 곡을 작곡할 때 이야기가 있습니다. 당시 스페인 내전으로 생활이 매우 곤궁한 때였고 무엇보다 아내 캄히가 임신 중독증으로 생명이 위급한 상태에 있었습니다. 로드리고는 하나님께 매달리다시피 하였습니다.

그는 기도하기를 “하나님, 당신은 저에게서 두 눈을 앗아 가 버리고 이젠 제 아내와 자식을 앗아가려 하시나이까?”그의 기도는 절규였습니다. 2악장 마지막 부분에 아이의 영혼을 하나님께 맡기는 기원을 담고 있습니다. 그는 말하기를 이 곡은 “하나님과의 대화”를 통해서 작곡되었다고 고백을 하였습니다. 그는 이 곡을 작곡하면서 마음의 평정을 얻었고 비록 아이는 유산이 되었지만 아내 캄히는 건강을 회복하였습니다. 요즈음 불안 장애로 고생하는 사람들에게 음악치료 요법이 있는데 그 음악 중에 아란후에즈 협주곡이 있습니다. 캄히는 제 2악장의 주제곡에 가사를 붙였는데 호세카레라이스, 플라시오 도밍고 같은 수많은 성악가들이 이 노래를 불렀습니다. 그러나 더 감동적인 것은 이태리 성악가 안들레아 보첼리가  부른 노래인데 왜냐하면 보첼리 역시 맹인 성악가이기 때문입니다. (나나무스꾸리가 부른 노래가 더욱 제 심금을 울립니다 Nana Mouskouri / En Aranjuez Con Tu Amor. - In Aranjuez With Your Love.) 

 

아랑후에즈, 사랑과 꿈의 장소
정원에서 놀고있는
크리스털 분수가
장미에게 낮게 속삭이는 곳

아랑후에즈, 바싹 마르고 색 바랜 잎사귀들이
이제 바람에 휩쓸려 나간
그대와 내게 한 때 시작한 후
아무 이유없이 잊혀진 로망스의 기억이다.

아마도 그 사랑은 여명의 그늘에
산들 바람에 혹은 꽃 속에
그대가 돌아오기를 기다리며
숨어 있나보다.

아랑후에즈, 바싹 마르고 색 바랜 잎사귀들이
아랑후에즈 내 사랑
그대와 나
'
빅토리아 카미는 1997년 7월 21일에 세상을 떠났고 로드리고는 꼭 2년 후인 1999년 7월 6일에 세상을 떠나 두 사람은 아란후에즈 묘지에 합장되었습니다. 바로 오늘이 로드리고가 115년 전에 태어난 생일입니다. 그래서 그의 음악을 소개하였는데, 그보다 그의 파란만장한 음악인생을 통해 하나님과 꾸준히 대화를 나누며 그 어렵고 힘들었던 장애를 극복한 그 배경에는 그의 믿음과 사랑이 있었다라는 것을 말씀드리려는 것입니다. 그리고 오늘 우리가 어떤 인생을 살던지 간에 우리의 인생을 더욱 품위 있고 보람 있는 그리고 평화를 향한 인생의 발걸음을 위해 가장 필요한 것은 하나님을 향한 믿음과 이웃을 향한 사랑이라는 것을 말씀드리려는 것입니다.


지난 11월 13일 프랑스 현재시간 밤 9시 16분에 프랑스 파리 시내 7곳에 동시 다발적으로 연쇄 테러 사건이 발생하였습니다. 이슬람 과격테러단체인 IS의 소행으로 130여명이 사망했고 350여명의 중상자가 발생하였습니다. 그들은 무차별 사람들에게 총을 난사하였습니다. 그들은 “신은 위대하다 알라후 아크바르”를 외치며 사람들을 죽였습니다. 프랑스의 테러사건으로 전 세계가 경악하며 슬퍼하고 있을 때 또 지난  20일 서 아프리카 말리라는 나라의 수도 바마코의 한 고급 호텔에서 이슬람 무장단체가 난입하여 170여명을 붙잡고 인질극을 벌렸는데 결국 이들은 말리 특수부대에게 진압당했지만 이 테러로 27명이 죽어습니다. 이와같은 이슬람 과격 테러단체들로 인해 지금 전 세계는 공포심에 사로 잡혀 있습니다.
세계 162개국을 대상으로 조사한 세계테러리즘 지수 보고서에 의하면 2014년 전 세계에 테러로 희생된 사망자의 수가 전년보다 80%가 증가한 3만 2천 658명이라고 합니다. 이 테러사건으로 손실된 경제 비용인 약 61조 9천억원(529억달라)으로 우리나라 1년 국방예산의 2배가 넘습니다.

13일(현지시간) 파리 중심에 위치한 바타클랑 콘서트홀에서 발생한 IS의 테러로 100여명이 사망하였습니다. 이 콘서트홀에서는 한 미국 록밴드의 공연이 예정돼 있었습니다. 칼리슈니코프 소총으로 무장한 IS 괴한들이 들이닥쳐 총기를 난사하였습니다. 89명이 사망하였습니다. 극장의 참혹한 테러현장을 수습하던 구급대원들은 중년과 노년 여성의 시체 아래 깔려 있던 피투성이 5살배기 남자 아이를 발견하고 급히 병원으로 옮겼습니다. 아이가 뒤집어쓰고 있던 피는 그러나 아이의 것이 아니었습니다. 최후의 순간까지 아들을 지키려 한 어머니와 할머니가 흘린 피였습니다. 테러범들이 총기를 난사했을 때 칠레 국적의 엄마 엘사 델플라스(35)는 5살 난 아들 루이, 할머니 파트리시아 산 마르틴(61)과 함께 그곳에 있었습니다. 피할 새도 없이 총알이 그들에게 덮쳐오자 델플라스와 산 마르틴은 달아나는 대신 모성의 본능으로 어린 루이를 감싸 안았던 것입니다. 엄마 델플라스와 할머니 산 마르틴은 그 자리에서 숨졌고, 루이는 어머니와 할머니의 품 속에서 살아남을 수 있었습니다.


전 세계를 공포 속으로 몰아 넣고 있는 이 IS 이슬람 무장 조직 지도부는 대원들에게 중독성이 매우 강한 캡타곤이라는 마약을 먹이고 있습니다. 이 약 한 알만 먹어도 며칠씩 밤을 새다시피 하며 전투를 벌여도 피곤한 줄 모르게 된다는 것입니다. 사람을 죽여도 전혀 죄의식이 없고 오히려 희열을 느끼게 된다는 것입니다. 파리 테러범들이 이 마약을 복용하고 테러를 저질렀다는 것이 죽은 테러범의 옷에서 그 약을 발견 하였던 것입니다.  왜 이런 마약을 먹습니까? 그들도 두려운 것입니다. 그들은 자기들이 얼마나 나약한지를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총을 마구 쏴댑니다. 바로 두려움은 나약함과 사악함의 상징입니다. (힌두교 개혁자 비베카난다 1863-1902) 북한 김정은의 공포정치도 자기의 나약함을 감추기 위한 사악함의 발로입니다. 그래서 자기가 강하다는 것을 보여주려 하지만 참으로 김정은은 불쌍하기 그지없는 허약한 존재임을 보여 줄 뿐입니다. 마침내 그의 공포 뒤에 감춰진 그의 허약함이 들어날 때가 올 것 입다.

 

우리나라는 안전합니까? 며칠 전 테러단이라고 생각되는 인도네시아 한 청년을 붙잡았지만 아직은 안전합니다. 아직은 밤거리를 큰 두려움 없이 다닐 수 있는 세계에서 몇 안 되는 나라로 치안 안전지수는 세계 1위입니다. (해외 전문 사이트인 NUMBEO는 2015년 세계 치안 순위 중간 결산 Crime Index for Country 2015 Mid Year 에서 대한민국을 1위에 올려놨습니다. 안전지수가 80%를 넘은 국가는 대한민국(83.1%), 싱가포르(82.9%), 카타르(80.0%)뿐입니다. ) 그러나 전체적인 국가 평화지수는 독일이 1위이고 우리나라는 47위입니다. 북한은 110위입니다. 시리아가 마지막 143위입니다. 그러나 우리나라의 군사 외교적인 평화수준은 129위로 세계에서 군사적으로 가장 위험한 나라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세계 사람들이 우리나라를 바라보면서 놀라워하고 신비스럽게 여기는 것은 그렇게 위험한 나라에 살면서 한국 사람들은 전혀 위험을 모르는 사람들 같다는 것입니다. 자신들이 지금 언제 터질지 모르는 화약고 위에 앉아 있으면서 그 위험성을 모르고 놀고 있는 어린아이들 같다는 것입니다. 만일 사람들이 지뢰를 밟고 있다면 어쩔 것입니까? 두려워 오줌을 질질 쌀 것입니다. 너무 두려운 나머지 기절해 죽고 말 것 입니다. 그런데 지뢰를 밟고 있다는 것을 모르고 있으니 한국 사람들은 대단한 사람들이라고 외국인들이 놀라워하고 있는 것입니다. 정말 모르고 있는 것입니까? 오늘 우리나라 사람들은 거의 불안 공포증에 사로 잡혀 있습니다. 애써 그 두려움을 감추고 그 공포를 모른척하고 있을 뿐입니다. 지금 우리들의 모든 공포와 두려움의 근본적인 원인은 바로 남북 분단입니다. 지금 정부와 여당이 계속 종북 이니 친북이니 죄익 이니 하면서 야당과 노동계 사람들을 매도하는 것은 바로 국민들의 공포심을 정치적으로 이용하는 고도의 정치술책입니다. 우리나라 정치가 어지럽고 경제가 오르락내리락 하고 사회가 온갖 부정부패 불의 타락과 횡포가 만연한 것의 근본 이유는 바로 공포심에 근거하고 있습니다. 왜 사람들은 그렇게 술을 마셔댑니까? 공포심 때문입니다. 왜 도박에 미칩니까? 공포심 때문입니다. 사는 게 두렵습니다. 세상이 무섭습니다. 아침에 눈을 뜨면 오늘은 어찌 살 것인가 걱정이 앞섭니다. 그래서 인사말이 밤새 안녕하십니까? 입니다. 여러분은 안녕하십니까?  安寧은 평안할 安, 평안할 寧 인데 안은 아니다란 안과 평안할 녕이라고 하면 안녕은 평안하지 않다 라는 말이 됩니다. 그러닌까  밤새 안녕하십니까를 염려하는 마음으로 밤새 평안하지 않으셨습니까? 이렇게 부정적으로 인사하는 시대가 되었습니다.  오늘 새벽 김영삼 전 대 통령이 세상의 떠나셨습니다. 참으로 한때 우리나라의 민주화운동을 몸바쳐 이룩하였던 분입니다. 그분에게 유감도 많지만 그분에게 우리는 많은 공이 있음을 기억합니다.  밤새 무슨 해괴한 일들이 일어날는지 공포스런 소식을 듣지나 않을까, 그 두려움이 우리에게 언제 닥치게 될는지,  오늘은 우리를 불안케 하는 그 어떤 소식을 듣게 될는지 하루하루 사람들은 두려움으로 하루해를 바라봅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오늘 우리는 또 하루 불안한 세상을 살아가서는 안 됩니다. 그 모든 우리를 불안케 하고 두렵게 하고 공포에 몰아넣는 그 어떤 일이란 것이 다 사람들로 인한 죄적 현상들입니다. 우리에게 공포를 가져다주는 것은 다 사람들의 짓입니다. 사람들이 하는 일이란 두려움의 대상이 아니라 그것은 넉넉히 이길 수 있는 대상입니다.  옛날 이스라엘 사람들이 가나안을 정탐하고 돌아와서 하는 말이 가나안 땅에는 무서운 거인들이 살고 있어 우리가 올라가면 모두 메뚜기처럼 밟혀 죽을 것입니다고, 너무 무섭다고 벌벌 떨었습니다. 그러나 여호수아와 갈렙은 아니라. 우리는 그들을 이길 수 있다. 그들은 우리의 밥덩이다라고 말하였습니다. 그 근거가 무엇입니까? 하나님이 함께 하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보호하시고 앞장서 주시는데 무엇을 두려워 할 것입니까? 세상은 두려움의 대상이 아닙니다. 우리가 정복할 대상입니다. 하나님이 태초에 아담에게 땅을 정복하라고 명령하셨습니다. 물런 여기서 정복하라는 말씀은 힘으로 때려 잡으라는 말씀이 아닙니다. 세상은 우리가 다스리고 돌보고 지켜줄 대상일 뿐입니다. 이 세상의 그 어떤 누구도 그 어떤 테러단이라도 그들은 우리가 정복할 대상이 아니라 함께 평화를 누릴 이웃이 되도록 하는 것이 바로 하나님의 뜻입니다.


우리는 이것을 분명히 해야 합니다.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은 세상을 두려워하는 사람이 아니요 세상을 이기는 자들입니다. 예수님은 말씀하시길 나는 세상을 이겼노라 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은 사람들을 무서워하는 사람이 아니요 사람들을 죄악에서 구원해 낼 당당한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들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에게는 공포가 없습니다. 다만 평안만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 안에 두려움이 없고, 공포가 없기 때문에 하나님 안에 거하는 사람들은 세상을 두려워하지 아니하고 사람들을 무서워하지 않습니다. 어디서나 당당하고 용기충천 합니다.  이런 믿음의 용기가 있는 사람이 세상을 이기고 사랑할 줄 아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믿음 있는 사람은 자신의 완력에 의지하여 눈알을 굴리지 아니하고 술에 자신을 의탁하지 아니하고 도박에 인생을 맡기지 아니합니다.  이런 믿음 있는 사람에게는 매일매일 안녕입니다. ‘안녕하십니까? 예 안녕합니다.’ 라고 말합니다.

어제가 무슨 날인지 아십니까? 어제 11월 21일은 세계 헬로 데이(World Hello Day) 이였습니다. 브라이언 맥코맥 박사에 의해 1973년부터 세계의 평화 세계인들의 안녕을 바라는 마음으로 세계 헬로 데이를 제창하여 지금 전 세계 150여 나라에서 실시되고 있고 노벨 평화상 수상자들의 지지와 수많은 세계지도자, 작가 연예인들이 동참하고 있습니다. 이날에 사람들은 적어도 열사람 이상 각기 헬로를 말하며 인사를 나누는 것입니다. “헬로” “안녕하세요?”


1단계 우리 여기에 있는 20명 우리들이 각기 10명에게 “안녕하세요?”라고 인사하면 200명이됩니다. 2단계 200명이 또 10명에게 “헬로”인사하면 2000명이 됩니다. 이렇게 8단계까지 가면 20억명이 “헬로”인사를 하게 됩니다. 그리고 9단계에 이르면 세상모든 사람들 그리고 산천초목에 이르기 까지 “안녕”하게 됩니다. 테러가 끝이고 폭력이 멈추고 공포가 사라진 평화의 세계는 이 “안녕하십니까?”인사를 서로 나눔으로 시작됩니다.
한번 서로 인사들 하겠습니다. “안녕하십니까?” 옆에 있는 분들과 인사를 나눕시다.  아주 즐겁죠? 인사는 서로 기쁨을 나누는 일입니다. 서로 평화가 교감됩니다. 
그런데 왜 사람들은 이런 평화의 인사를 나누지 못하는 것입니까? 앞서 말씀 드린대로 마음에 안녕이 없기 때문입니다. 평안이 그의 심령 안에 없는 것입니다.  그 심령 안에 죄가 가득하고 두려움이 가득하고 공포가 넘치고 있으니 이웃에게 ‘헬로’ 이 말 한마디 못하고 ‘안녕하세요?’ 이 말 한마디 나누지 못합니다. 어린아이들은 잘 합니다. 어른이 될수록 나이가 들어갈수록 이 인사를 못합니다. 어린아이가 어느 동리 할아버지에게 “안녕하세요” 배꼽인사를 하닌까? 그 할아버지가 퉁명스런 말로“ 야 임마 시끄러 너의 할애비한테나 가서 하라”고 말합니다. 그 할아버지 속엔 온갖 불만 불평이 가득하기에 어린아이의 인사를 못받아 주는 것입니다. 다시한번 인사를 나눌까요? “안녕하세요?” 여기 김용섭집사는 오다가다 열 번을 만나도 안녕하세요라고 인사를 합니다. 그 마음에 평안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가요? 맞아요? 

 

2차 세계 대전 시절에 독일 나치스에게 붙잡혀 가스실에 언제 죽을지 모르며 죽을 날만 기다리고 있었던 유대인들이 강제 수용소에서 그들이 부른 노래는 이런 노래 였습니다.


샬롬 하베림(히브리성가)
 Shalom chaverim shalom chaverim shalom shalom
   Le hit ra-ot le hit ra-ot shalom shalom
샬롬 하베림 샬롬 하베림 샬롬 샬-롬 레히트라옷 레히트라옷 샬롬 샬-롬
헬로 하벨림 ‘’  , 헬로  헬로, 헬로 씨 어게인  헬로 씨어게인  헬로 헬로
안녕 친구여 안녕 친구여 안녕 안녕,  다시 만나리 다시 만나리, 안녕 안녕
(shalom (샬롬): 평화chaverim(하베림) : 친구lehitraot(레힛라옷) : 다시만나자)

 

여기서 ‘안녕 친구여’는 헤어질 때하는 인사가 아닙니다. “친구여, 평안하세요”라는 기원하는 인사말입니다. 다시 만날 그 때까지 ‘친구여 평안하기를 바랍니다’는 말입니다. 여기 샬롬은 그냥 안녕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함께하시는, 하나님이 보호하시는, 하나님이 당신과 하시니 두려워 말고 걱정하지 말고 마음에 평안이 가득하기를 바란다는 말입니다.

이 평안은 세상이 주는 평안이 아닙니다. 대통령이 주는 평안도 아니고 돈이 주는 평안도 아니고 남편이 주는 평안도 아닙니다. 자식이 주는 평안도 아닙니다. 그런 평안은 곧 사라지는 신기루 같은 평안입니다. 돈이 나를 평안하게 합니까? 권력이 나에게 평안하게 해 줍니까? 가족이 나를 평안케 합니까? 그런 것들은 나에게 거정과 실망과 저주만을 가져다 줄뿐입니다.

시편 25편 12-13절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 누구냐. 그의 택할 길을 그에게 가르치시리로다 그의 영혼은 평안히 살고 그의 자손은 땅을 상속하리로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에게 하나님께서 평안을 주십니다. 하나님을 잘 믿어야 합니다. 하나님을 영화롭게 해야 됩니다. 평안은 하나님이 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손에 있습니다. 그 나라의 평안을 하나님이 주시는 것입니다.

 

요 14:27에서 예수님이 무엇이라 말씀하셨습니까?

“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 같지 아니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

예수님은 십자가를 지고 가실 때에 당시 지도자들에게 온갖 모함과 핍박을 받았습니다. 사람들에게 멸시와 조롱을 받았습니다. 제자들에게 배신을 당했습니다. 그러면 예수님의 마음은 부글부글 끓고 내 가만두지 않겠다 다 망하게 할 것이다 이렇게 말씀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의 마음은 샬롬으로 가득 찼습니다. 그러므로 원망도 없었고 두려워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들을 용서하시고 그들을 위해 기도하셨습니다.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심을 믿는 임마누엘 신앙을 가진 사람은 어떤 경우에도 샬롬 평안합니다.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에서도 평안합니다. 샬롬 입니다. 예수님이 이 예수님의 평안을 우리에게 주신다는 것입니다. 어떻게 받습니까? “주세요”하면서 두 손 내밀어 받습니까? 아니요. 예수님의 평안을 받으려면 예수님 안에 들어가야 합니다. 예수님이 내안에 들어오셔야 합니다. 그래야 예수님 평안 내 평안이 됩니다. 예수님, 내안에 들어와 계시옵소서.  그래서 망령된 행실도 끊고 세상 욕심도 버리고 온갖 죄의 길에서 돌아서서 변하여 새사람 되니 주님께서  내안에 들어오심을 믿으시길 바랍니다.

 

289 “주 에수 내 맘에 들어와 계신후 변하여 새사람 되고 내가 늘 바라던 참 빛을 찾음도 주예수 내맘에 오심 (다같이) 주 에수 내 맘에 오심 주 예수 내 맘에 오심  물밀 듯 내 맘에 기쁨이 넘침은 주 예수 내 맘에 오심”

 

주님이 누리신 평안은 십자가를 눈앞에 두고서도 누리는 평안입니다. 죽음을 전혀 두려워하지 않는 평안입니다. 예수님의 마음은 샬롬 평안으로 가득하셨습니다. 제자들이 수천 명을 먹여야 한다는 의무감 때문에 초조해할 때도 예수님은 샬롬 평안이셨습니다. 예수님은 오히려 하나님께 감사하셨습니다. 제자들이 풍랑을 맞아 두려워하며 소리를 지를 때에도 예수님은 샬롬평안 이셨습니다. 오히려 풍랑 속에서 배의 고물을 배고 주무셨습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을 잡으러 온 군사들과 싸우기 위해 칼을 뽑았지만, 예수님은 말고의 귀를 치료해 주셨습니다. 예수님의 마음은 언제나 샬롬 평안 이셨습니다. 위기 앞에서도 그 샬롬 평안은 흔들리지 않으셨습니다. 위험 앞에서도 예수님은 마음의 샬롬 평안을 빼앗기지 않으셨습니다. 위협 앞에서도 예수님은 샬롬 평안을 잃고 근심하거나 두려워하지 않으셨습니다. 부활하신 첫날 두려워 집밖에도 못나가고 숨죽이며 숨어있던 제자들 앞에 부활하신 예수님이 오셨습니다. 그리고 그 첫마디가 “평안하냐”라는 인사말이셨습니다. 영어로 말하면 “헬로”라고 하신 것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이 제자들 앞에 공식적으로 첫 마디 말씀하신 것이 “헬로”입니다. 좀 의역해서 말씀 드리면, “자, 보아라 나는 죽음을 이기고 부활하였다 그러니 너희는 두려워 말라 이제부터 너희는 평안하라 내가 너희에게 이 평안을 준다”라는 의미가 예수님의 “헬로” 이 한마디 말씀 속에 들어 있습니다.  죽음을 이기고 마귀를 이기고 세상을 이기고 부활하신 예수님이 주신 평안이기에 이 평안은 참 평안이요 영원한 평안입니다.  이 평안을 주님은 우리에게 선물로 주신다는 것입니다. 예수님 안에 거한 사람들만이 이 부활하신 예수님의 평안이 그의 마음속에 강물같이 넘치게 될 것입니다.

 

지금 세상은 테러 공포로 난리입니다. 지금 우리나라는 남북 분단으로 인한 북한의 침략 도발이 있을까 전전긍긍합니다. 사람들은 무엇이 두려운지 염려스런 눈으로 사방을 힐끔거립니다. 공포에 짓눌려 술에 취해보고 도박에 빠지고 폭력을 휘두르며 색욕에 정신을 잃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헬로”“안녕”이란 이 간단한 인사도 못하고 오히려 서로 힐끔거리며 삐죽거리고 다툼과 분쟁이 도처에 널려 있는 세상입니다.

 

라온코이노니아 성도 여러분,  아란후에즈의 작곡가 호야킨 로드리고가 가졌던 하나님을 향한 믿음과 이웃을 향한 사랑으로 우리가 어떤 인생을 살던지 간에 우리인생을 더욱 품위 있고 보람 있는 그리고 평화를 위한 우리의 발걸음으로 하루하루 걸어간다면, 우리에게는 11월21일 이 하루만 헬로 데이가 아니라 매 주일 날이 헬로 데이요, 매일 주안에서 헬로 데이가 되는 줄 믿습니다. 그러므로 언제나 주안에서 샬롬 평안하시기를 바랍니다. 라온코이노니아 ‘샬롬 하베림,  헬로 샤베림, 안녕 안녕 다시 만나리, 언제요? 내일, 다음주일에? 어디서요? 라온코이노니아에서, 샬롬 헬로” 서로 안녕 인사하며 주님의 평안을 기원합시다. 언제나 어디서나 평안하시고 세상의 그 어떤 두려움과 공포로부터 자유하시고 주님 주시는 기쁨으로만 감사하며 살아가시기를 바랍니다.
오늘 주신 말씀을 기억합시다.


역대하15:15
 “온 유다가 이 맹세를 기뻐한지라 무리가 마음을 다하여 맹세하고 뜻을 다하여 여호와를 찾았으므로

 여호와께서도 그들을 만나 주시고 그들의 사방에 평안을 주셨더라 (와야나흐 야훼 라헴 밋싸비브)”

이 축복의 말씀이 여러분의 삶속에 그대로 이루어지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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