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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병호목사의 교회이야기

전병호 목사의 설교



 

2015년 10월 18일 주일아침 예배 설교 요 10:14-18 라온코이노니아의 라 비타 에 벨라(인생은 아름다워)

 

 

금주 수요일 10월 20일은 지금은 거의 사라진 명절의 하나인데 바로 중양절이라고 합니다. 우리나라는 옛날부터 음력으로 3월3일 삼진 날, 이날은 제비가 오는 날이고, 5월 5일은 단오 날 이날은 창포물에 머리 감고 하루 휴가 받은 며느리들이 그네 뛰며 노는 날이고, 7월 7일은 멀리 떠났던 님과 만나는 칠석날이고, 9월 9일은 중양절이라고 하여 국화 화전을 부쳐 먹으면서 강남으로 떠나는 제비를 환송하는 날입니다. 어린 시절 중양절에 어머니께서 국화 화전을 부치는 화덕 곁에 앉아서 뜨거운 화전을 호호 불며 먹던 때를 기억합니다. 그후로 국화화전 먹던 때가 가믈가믈 기억이 안 납니다. 국화화전은 아무 국화나 다 먹을 수 있는 것이 아니고, 인터넷에서 찾아보니, 줄기가 붉으스럼하고 노랑 꽃(황국)으로 작고 도톰하고 솜털처럼 부드럽고 씨가 맺히지 않는 그리고 찬 서리를 보름정도 맞은 국화꽃이어야 한다고 합니다. 감국甘菊이라하여 다른 국화는 단맛이 나지 않습니다.

 

국화는 우리나라 옛 선비들이 매화 난초 대나무와 더불어 사군자라 하여 선비의 기상을 상징하는 꽃으로 즐겨 키웠습니다. 국화를 말할 때에 ‘오상고절(傲霜孤節)’이라 ‘서리에 굴하지 않는다’는 표현을 많아 합니다.

 

조선시대 대제학 벼슬을 지낸 이정보(1693~1766)란 분은 시조에도 뛰어나 많은 글을 남겼는데 그 가운데 오상고절과 관련된 시조가 있습니다.

 

국화야 너는 어이 삼월동풍(三月東風) 다 지내고

낙목한천(落木寒天)에 네 홀로 피었는다

아마도 오상고절(傲霜孤節)은 너뿐인가 하노라.

 

이 오상고절이란 말은 옛날중국의 시인 소동파의 〈겨울 풍경[冬景]〉이라는 시에 “연꽃은 지고 나면 비를 받칠 덮개가 없지만, 국화는 시들어도 서리를 이겨내는 가지가 있다.(荷盡已無擎雨蓋, 菊殘猶有傲霜枝. 하진이무경우개 국잔유유오상지 ‘허진이우칭위가이 쥐찬유유아오솽즈 ’)”라는 대목에서 유래한 듯합니다.

 

국화를 바라보고 있노라면 ‘무언가 할 말을 다 하지 않고 참고 있는 듯하며, 여러 역경을 견디어 낸 후 깊은 곳에서 떠오르는 은은한 미소와 기품 같은 걸 느낄 때’가 있습니다. 향기마저도 그윽한 데가 있어서 경박하거나 속되지 않고 진중하며 우아한 풍도가 있어 보입니다.

 

고려 말 대 학자인 모근 이색(李穡 : 1328~1396)의 시 에 <국화를 바라보다>라는 시가 있습니다.

 

인정이 어찌하여 무정한 물건과 같은지 人情那似物無情

요즘엔 닥치는 일마다 불평이 늘어간다 觸境年來漸不平

우연히 동쪽 울 바라보니 부끄럽기만 하네 偶向東籬羞滿面

진짜 국화가 가짜 연명을 마주하고 있으니 眞黃花對僞淵明

 

중국 진나라시대에 정절을 지킨 시인으로서 사람들의 존경을 받고 있는 도연명이란 시인이 있었습니다. 그는 귀거래사(歸去來辭)라는 시로 유명한데 그 시 중에 ‘세 오솔길은 황폐해졌지만, 소나무와 국화는 아직 남아 있네.(三徑就荒, 松菊猶存.)’라는 대목이 있는데 북송의 유학자인 주돈이(周惇頤1017년-1073년)가 ‘애련설(愛蓮說)’이란 글에서 ‘진나라 도연명은 국화를 사랑하였다’고 하면서 ‘국화는 꽃 중의 은일자’인데 ‘도연명 이후에는 그런 사람이 드물다’(菊, 花之隱逸者也 국, 화지은일자야 국화는 꽃중의 은둔하는 자와 같은데.....噫! 菊之愛 陶后鮮有聞 희!국지애 도후선유문 아! 국화를 사랑하는 이는 도연명 이후로 들어본 일이 드물다)라고 하였습니다. 고려 말 유학이 크게 성행하면서 학자들이 도연명 흉내내듯 집안에 국화를 심어 놓고 감상하며 선비의 은은한 기상을 나타내고자 하였는데 이색은 당시 나라의 형편을 돌아보며 불평만하고 있는 자신의 모습이 국화꽃을 바라보면서 도연명을 생각하니 자신이 꽃을 보기가 부끄럽다고 자신의 심정을 말하고 있습니다.

 

저 자신도 오늘날 나라 돌아가는 형편을 보면서 마음에 불평과 억하심정이 가득한데 길을 가다 문뜩 길옆에 단아하게 피어있는 국화를 한참이나 바라보며 마음에 부끄러움을 가지게 괴었습니다.

그리고 서정주의 “국화 옆에서”라는 시가 떠 올랐습니다.

 

한 송이의 국화꽃을 피우기 위해

봄부터 소쩍새는 그렇게 울었나 보다

 

한 송이의 국화꽃을 피우기 위해

천둥은 먹구름 속에서 또 그렇게 울었나 보다

 

그립고 아쉬움에 가슴 조이던

머언 먼 젊음의 뒤안길에서

인제는 돌아와 거울 앞에 선

내 누님같이 생긴 꽃이여

 

노오란 네 꽃잎 피려고

간밤엔 무서리가 저리 내리고

내게는 잠도 오지 않았나 보다.

 

국화꽃 앞에서 예수님을 생각합니다.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님을 국화꽃에 비유하여 봅니다. 우리 죄인들을 구원하시기 위하여 세상에 태어나 온갖 풍상을 겪으시었던 예수님, 한 방울의 피로 나의 더러운 죄를 씻어 주시기 위해 십자가에 못 박혀 고난당하신 예수님의 모습 앞에 오늘도 죄 가운데 살아온 나인 것을 생각하니 부끄럽기가 한이 없습니다.

그러나 “국화는 시들어도 서리를 이겨내는 가지가 있다” 소동파의 말에서 보듯, 예수님은 비록 못 박혀 고난당하시지만 그 십자가는 승리의 십자가입니다. 우리 기독교는 십자가를 상징적으로 바라봅니다, 무슨 상징입니까? “내 뜻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옵소서”말씀하시고 그 흉측한 골고다 십자가에 고난당하시었지만 국화꽃 보다 더 진한 향기를, 더 찬란히 빛나는 아름다운 예수님을 바라봅니다.

사람들은 누가 자기를 아름답게 봐 주기를 원해 여러 치장을 합니다. 미인성형수술까지 합니다. 그러나 꽃은 누가 봐 주지 않아도 꽃을 피우고 향기를 풍깁니다. 그 향기가 벌을 부르고 그 향기에 취해 나비가 날아옵니다. 아마도 사람들 중에 꽃을 미워하는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꽃을 보면 향기를 맡아 보고 기뻐합니다. 예수님은 나는 꽃이다 라고 말씀하시지 않으셨지만 예수님은 세상사람 중에 가장 아름다운 꽃이요 그 아름다움은 2000년이 지나도 그대로요 그 향기는 온 지구 땅에 가득히 번져 나가고 있습니다. 누가 예수님을 미워 할 것입니까? 누가 예수님을 아름답다 말 하지 않을 것입니까? 석가모니는 참으로 훌륭한 사람이십니다. 그러나 꽃처럼 아름답다고 말들 하지 않습니다. 공자 선생님은 참으로 훌륭한 선생이십니다. 그러나 그를 꽃처럼 향기롭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민인박명이라 미인을 일찍 세상을 떠난다는 말이 있는데 예수님은 설은 세 살에 세상을 떠나셨지만 역사 이래 그보다 더 아름다운 사람은 없었습니다. 그는 오상고절의 국화꽃처럼 역사상 가장 아름다운 인생을 사시였습니다.

 

예수님은 수치스러운 저주의 십자가를 자랑스런 영광의 십자가로 바꾸시었습니다.

갈3:13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 사람이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습니다. 기록된바 ‘나무에 달린 자마다 저주아래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하였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모욕당하고 조롱 받으셨습니다. 하나님의 아들로 놀라운 능력과 교훈을 선포하셨던 예수님이 아무 저항도 없이 순한 양처럼 끌려 가 나무에 못 박히셨다는 그것이 예수님의 수치요 하나님의 수치입니다. 1919년 전주에서 있었던 삼일운동 당시 만세운동에 참여하였던 기전여학교 어린 소녀들을 일본 경찰들은 옷을 벗기고 조롱을 하였습니다. 꽃다운 소녀들에게 얼마나 부끄러운 일이었겠습니까? 그러나 당시 기전 소녀들은 당당했습니다. 소녀들은 일본 경찰들에게 이 더럽고 추악한 야만인들이라고 호통을 쳐 오히려 일본 경찰들이 부끄러워하였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부끄러운 십자가는 오히려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았던 당시 제사장 바리새인들을 비롯한 예수님을 못 박아 죽이라고 소리쳤던 유대인들과 로마인들이 지난 2000년 동안 역사 앞에 부끄러움을 당하였고 예수님은 그 고난의 십자가를 자랑하시므로 누구든지 십자가를 바라보는 자들에게 구원의 상징이 되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 저주의 십자가가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아름다운 십자가가 된 것입니다.

 

기독교인에게서 믿음을 지키다가 겪게 되는 실패는 부끄러움이 아닙니다. 고난 당 하는 일은 창피스런 일이 아닙니다. 그것은 보다 더 아름다운 꽃을 피우기 위한 아픔입니다. 더 진한 인생의 향기를 내 뿜기 위한 싸움입니다. 고난과 역경가운데 흘리는 눈물은 “한 송이의 국화꽃을 피우기 위해 천둥은 먹구름 속에서 또 그렇게 울었나 보다” 서정주의 시어처럼 보다 아름다운 삶을 위한 눈물입니다.

 

최근에 크게 히트한 외국영화 중에 역대 최고의 흥행기록을 한 어벤져스2라는 영화가 있습니다. 우리나라 서울 여러 곳에서도 촬영을 한 영화입니다. 이 영화의 주인공 중 한 사람이 마크 러팔로(47)라는 배우입니다. 그는 10년 넘게 바텐더, 페인트공, 요리사 등 여러 직업을 전전하며 배우 오디션을 보러 다녔지만 ‘평범한 인상’이라는 이유로 800번을 넘게 본 오디션에서 탈락의 고배를 마셔야만 했습니다. 그러다 연극 ‘우리들의 청춘 This is our Youth'에서 실감나는 길거리 폐인 연기로 주목을 받고 배우로서 이제 막 꽃을 피우던 그는 뇌종양 판단을 받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10시간이 넘는 대수술을 받았지만 그는 왼쪽 귀의 청각을 잃었고, 배우에게 있어서 필수적인 표정 연기가 불가능한 ‘안면마비’라는 치명적인 후유증이 있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마크 러팔로는 배우의 길을 포기하지 않고 끝임 없는 재활치료 끝에 안면근육을 움직이는 데 성공했습니다. 그가 2014년 출연한 영화 ‘비긴 어게인’처럼 ‘다시 시작하는’ 데 성공하였습니다. 한국인들이 가장 좋아하는 외국영화 음악가운데 이 ‘비긴 어게인’의 주제곡인 “잃어버린 별들. Lost stars”인데 이 음악 가사 중에 “하나님....우리들은 어둠을 밝히려는 길잏은 별들인가요? (God, But are we all lost stars, trying to light up the dark?)처럼 10년 이상 이어진 백수 생활에, 800번이 넘는 오디션 탈락, 갑작스런 안면 마비와 청력 상실로 인생의 길을 잃어버렸던 버펄러는 다시 자신의 인생을 찾아 이제 성공한 배우로서 우뚝 섰습니다. 금년에 다시 어벤져스 후속 영화로 한국인의 이야기가 전개되는 ‘아주 멋진 헐크 Totall Awesome Hulk’라는 영화를 찍을 예정이라고 합니다.

 

누가 인생은 불행의 연속이라고 합니까? 누가 인생은 저주라고 말합니까? 800번의 저주가 있었다 해도 아니요 아름다운 예수님을 바라보는 사람들에게는 다만 아름다운 인생만 있을 뿐이니 801번째 꽃을 피우는 사람이 바로 신앙인입니다.

 

성도 여러분 기독교인 된다는 것은 아름다운 인생을 살아가는 사람을 말합니다. 단순히 성공적인 인생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세상적인 성공을 한 분이 아니십니다. 오히려 세상적인 성공을 버리신 분입니다. 예수님의 인생을 한마디로 말한다면, 버려진 별 Lost Star Jesus 입니다. Super Star Jesus가 아닙니다. 스타이기를 버렸습니다. 그는 십자가를 지기 위해 능력도 버렸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란 지위도 버렸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 위에서 모든 것을 버렸습니다. 부요함도 지위도 체면도 평안도, 살과 피와 물도, 생명도 모두 다 버렸습니다. 왜 버렸습니까? 오늘의 말씀. 요 10:15에 “나는 양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노라(텐 퓨켄 무 티세미)”라고 말씀하였습니다. 누구를 위한다고요? 저와 여러분을 위하여 다 버렸다고 하였습니다. 십자가는 곧 자기를 버리는 것입니다. 베드로는 처음 자기 직업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랐습니다. 요13:37에 베드로가 주님을 위하여 목숨까지도 버리겠다고 장담하여 말했습니다. 그러나 닭 울기 전 세 번씩이나 예수님을 모른다고 하였습니다. 십자가는 자기를 버리지 못하는 사람은 짊어질 수 없습니다. 십자가를 지지 못하면 예수님의 제자가 될 수 없습니다. 예수님은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믿음은 버리는데서 부터 출발합니다. 자기 시간을 버리지 아니하고 예수님을 믿을 수 없습니다. 어떤 분에게 왜 교회 안 나오셨는가 물으니 바빠서 못 나왔다고 합니다. 그 대답은 믿는 자의 대답이 아닙니다. 자기의 물질을 움켜쥐고 예수님을 따를 수 없습니다. 어떤 분에게 왜 교회를 안 나오시는가 물으니 돈 벌기 위해 못 나왔다고 합니다. 그 대답은 믿는 자의 대답이 아닙니다. 자기의 지식과 판단을 그대로 쥐고 앉아서 예수님을 믿을 수 없습니다. 어떤 분에게 왜 말씀에 순종하지 않는가하고 물으니 성경을 보다가 의심이 생겨서 그렇다고 합니다. 그 대답은 믿는 자의 대답이 아닙니다. 믿음은 기꺼이 버리는데서 부터 시작됩니다. 버리는 믿음 생활이 아름다운 십자가의 삶입니다. 가지고자 하면 잃을 것이요, 버리고자 하면 얻을 것입니다. 믿음으로 버리는 자가 믿음으로 채움을 얻습니다. 버린 만큼 채워집니다. 십자가는 고통과 저주로 그치지 않고 즐거움과 행복으로 이어집니다. "그는 그 앞에 있는 기쁨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히12:2) 십자가는 아름다운 인생으로 가는 길입니다. 아름다운 인생에 이르는 관문입니다. 이것이 십자가의 비밀이오 기독교 신앙의 신비입니다.

 

그리고 마침내 주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면 영생을 얻게 됩니다. 누구든지 저를 믿으면 영생을 얻는다고 요한복음 3:16절에 말씀하셨는데 영생을 얻기 위한 믿음은 어떤 믿음입니까? 요한 1서 3:16에서 답을 말해 주십니다. “그가 우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셨으니 우리가 이로써 사랑을 알고 우리도 형제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것이 마땅하니라” 형제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믿음이 바로 영생을 얻는 믿음입니다. 이 버리는 십자가의 믿음이 국화꽃 보다 가장 아름다운 인생입니다.

 

‘인생은 아름다워’ (이탈리아어: La vita è bella, Life the Beautiful)라는 영화가 있습니다. 바로 오늘의 설교 제목입니다. 귀도(Guido Orefice 감독이자, 공동 집필자인 로베르토 베니니가 역할을 맡았다)라는 이탈리아계 유태인이 풍부한 상상력으로 나치의 유태인 수용소에서 가족을 구하는 내용을 담고 있는 영화입니다. 인생은 아름다워는 71번째 아카데미상 수상식에서, 주인공이자 감독인 베니니가 남우주연상을 탔으며, 음악상과 외국어 영화상을 수상하였습니다. 그런데 이 영화는 유대인들의 수용소의 죽음과 고통을 그린 매우 슬픈 영화입니다. 밝고 행복함만 가득한 것이 아니라, 인생의 존엄성이 무참히 짓밟히던 시기, 그럼에도 불구하고 더없이 아름다웠던 주인공 귀도를 보고 있노라면 사람이 아름다운 사람으로 산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느끼게 됩니다. 잔혹한 포로수용소 상황 속에 일어난 일이지만 그 속에서 누군가 사랑하고 누구를 지켜내고 누군가를 위해 자기의 목숨을 버리는 사람 그래서 인생은 아름답습니다. 힘들고 불행마저도 받아들이고 함께 할 때 진정한 '아름다운 인생'이란 걸 <인생은 아름다워>를 보고 있노라면 깨닫게 됩니다.

 

라온 코이노니아 성도 여러분, 여러분의 인생은 어떠합니까? 아름다운 사람들은 부끄러움이 자랑이 됩니다. 저주가 행복이 됩니다. 슬픔이 기쁨이 됩니다. 아름다운 인생을 사는 사람들은 예수 안에 살기 때문에 언제나 아름답습니다. 생각하는 것이 아름답고 행동하는 것이 아름답습니다. 아름다운 부인, 아름다운 남편, 아름다운 직장인, 아름다운 학생, 어디서나 아름다운 기독교인의 향기를 나타냅니다. 고린도후서 2: 15절 “우리는 구원 받는 자들에게나 망하는 자들에게나 하나님 앞에서 그리스도의 향기라”고 하였습니다.

여기 라온 코이노니아에는 아름다운 사람들만 모인 공동체입니다. 그렇게 되어야 합니다. 성도여러분, 이 가을에 국화 화전을 먹으며 가을의 향기를 맡아봄직도 합니다. 사람들은 중양절에 국화화전을 먹습니다만, 그러나 더 중요한 일은 우리는 매 주일 국화꽃 보다 더 아름다운 예수님의 향기로운 말씀을 먹어야 하는 줄 믿습니다.

 

이것을 알아야 합니다. 예수님의 아름다운 인생이 오늘 저와 여러분을 통해서 나타나야 할 것입니다. 사람들은 이 십자가를 보고 예수님을 아름답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를 지고 가는 우리를 보고 사람들은 예수님이 아름답다고 할 것입니다. ‘한 송이 국화 ’꽃을 피우기 위해 봄부터 소쩍새는 그렇게 울었나보듯이‘ 한 송이 국화 꽃 보다 아름다운 저와 여러분들을 피우기 위해 예수님은 그렇게 십자가를 지고 비아 돌로사 골고다 십자가의 길을 올라 가셨으니, 바로 우리는 예수님의 아름다움을 나타내는 국화송이보다 더 아름다움 십자가를 지고 갈 때 우리의 인생도 ‘라 비타 에 베라’ 아름다운 인생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이 아름다운 인생을 살아가는 여러분과 가정에 함께 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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