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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병호목사의 교회이야기

전병호 목사의 설교



2019년 4월 7일 주일아침 예배   고후 6:11-13  예수 큰 마음

 

 

어린이 동요에 <우리들 마음에 빛이 있다면 여름엔 여름엔 파랄 거예요.산도 들도 나무도 파란 잎으로 파랗게 파랗게 덮인 속에서 파아란 하늘 보고 자라니까요.(어효선 작사/한용희 작곡)>이란 노래가 있습니다. 어린아이들이 이 노래를 율동을 할 때에 “우리의 마음….에서 항상 가슴에 두 손을 얹어 표현합니다. 머리를 가리켜 마음을 표현하지는 않습니다. 선생님들이 학생의 잘못을 지적하면서 “가슴에 손을 얹고 생각해봐!”라고 말하기도 하지만 거기에는 심장 뛰는 것 외에는 느낌이 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여기에 마음이 있다고 생각해 왔고,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양심이라고 생각해 왔기 때문에 그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또 골치 아픈 일을 만난 사람이 자신의 머리를 가리키면서 “요즘 마음이 아파서 괴롭다!”고 말한다면 어색한 표현입니다. 그러면 과연 우리의 마음은 어디인가? 의사들이 방사선 X레이 (X-Ray)사진을 촬영하고, 인간을 해부해 보아도 마음은 발견할 수 없습니다. 심장은 마음을 상징하는 장기일 뿐, 마음 자체는 아닙니다. 이는 심장 속에 생각하는 기능이 있는 것이 아니라 긴장, 불안, 공포 등을 느끼게 되면 뇌가 지각하여 호흡이 가빠지고 혈류량이 많아지거나 빨라지고, 혈압이 상승하고, 심박 항진이 감지될 뿐입니다. 그러므로 의학적으로 말하면 마음은 심장이 아니라, 뇌일 것입니다. 따라서 마음의 병은 뇌 그리고 뇌의 활동인 정신 적인 병입니다. 마음이 우리 몸의 어디에 있는가? 하는 문제로 논란이 있었던 로마시대의 의사 갤런(Galen 130~200 A.D.)은 플라톤(Platon)이 주장한 가슴이라는 설을 뒤엎고 그야말로 해부학적으로 뇌라는 것을 주장하였습니다.

 

마음이 있는 곳은 도대체 어디인가? 머리인가? 가슴 어디인가? 심장이 마음인가?

 

롬12:2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 爾心維新”

이 말씀에서 변화를 받는다는 용어는 헬라어의 μεταμορφουσθε(메타모르푸스데)인데 이 말은 μεταμορφομαι(메타모르포마이)에서 비롯된 말로서 “형태의 변화를 받는 것(be changed in form)”을 의미합니다. 즉 인간의 외형적 변화가 아니라 마음의 구조적 변화가 발생한다는 뜻입니다. 여기서 변화( μεταμορφομαι)는 마태복음 17장 2절, 마가복음 9장 2절에서도 사용되는데 “예수께서 저희 앞에서 변형되사…” 누가는 이 말을 “용모가 변화되고”(눅9:29)라고 표현했습니다. 즉 얼굴이 완전히 다른 사람이 아니라, 똑같은 얼굴이면서 인식하기에 똑같은 것이 아닌 상태를 뜻합니다. 이처럼 성령에 의해 마음도 변화될 수 있는데 이는 “사고방식”의 변화로서 동일한 사람이지만 충동과 유혹에 대한 태도에 있어서는 더 이상 과거의 그 마음이 아닌 상태로의 변화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모든 지식, 감정, 의지, 상상, 동기, 야망 등에 대해서 거룩한 생각과 관련을 맺는 것을 진정한 변화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 같은 심리구조의 변화는 그리스도와 성경에 초점을 맞추어야 합니다. 아담스(Jay E. Adams)는 에베소서 4장22-24절(...옛사람을 벗어 버리고 오직 너희의 심령이 새롭게 되어 ...새사람을 입으라)의 변화를 성경적 사고로의 변화에 두었는데 그것은 25절 이하의 내용과 연관을 맺고 있다고 전제하고 도적질하는 사람이 도적질하지 않는 변화가 아니라 도적질이 변하여 선을 행할 때 진정한 마음의 변화로 이해하였습니다. 욕하던 사람은 다시는 욕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욕하던 입이 변하여 선한 것을 말할 때 비로소 마음의 변화로 보았습니다. (전요섭 성결대 교수 최근의 신약설교 고린도후서 2003년 9월8일참고)

 

어떻게 우리 마음을 변화 시킬 수 있습니까? 어떤 마음으로 변화하여야 합니까? 누구의 마음을 본받아야 할 것입니까?

괴짜 심리학’이란 책에 재미있는 설문조사의 결과가 나와 있습니다. 미국인들에게 누가 천국에 들어갈 수 있는지 물었습니다. 당시 미국 대통령이 빌 크린톤이었습니다. 그가 물음에 52%가 천국에 들어갈 것이라고 대답을 해서 4위가 되었습니다. 3위는 영국의 왕세자로 교통사고로 죽은 다이애나로 60%가 대답을 하였습니다. 2위는 79%로 인도 캘커타에서 빈민 구제할동을 한 테레사 수녀였습니다. 그러면 1위는 누구일까요? 87%가 그는 천국에 들어갈 것이라고 대답한 사람은 바로 자기 자신 나 였습니다. 자기는 분명히 천국에 들어갈 수 있다고 자신하였던 것입니다. 이것이 사람의 마음입니다. 사람들은 자기가 가장 옳고 자기가 가장 선하고 자기같이 좋은 사람은 어디에도 없다고 생각하는 그 자기 중심적인 마음을 가지고 있습니다.

 

여러분들은 저를 잘 알고 계십니다. 저의 이름도 알고 저의 가족 사항도 알고 저기 생활도 아십니다. 아마도 저에 대해서 많이 알고 게실 것입니다. 그러나 저에 대해 전혀 모르는 것이 있습니다. 바로 저의 마음입니다. 제 몸 깊은 것에 웅크리고 있는 저의 마음을 우리 사모님도 모르는 것이 많을 것입니다. 아니 나 자신도 내 마음 나도 모르는 것이 많이 있습니다. 하나님 만이 제 마음을 온전히 아실 것입니다. 그런데 나 스스로 저의 마음을 객관적으로 들여다 보면 마음이 활짝 열려 있지 않고 어느 정도는 닫혀 있습니다. 또 축구운동장은 못 되어도 배구 코트장만은 하리라 하지만 그보다 작은 마음을 가질 때가 많습니다. 그래서 스스로 때때로 스스로 반성하고 회개하며 예수님을 바라보게 됩니다. 예수님 마음을 닮아가게 하옵소서라고 기도합니다. 고전2:16 “우리가 그리스도의 마음을 가졌느니라 我儕耶心” 그러나 아직 나의 중심에 뭉쳐있는 이 작은 마음을 슬퍼할 때가 많이 있습니다.

 

오늘 아침 봉독한 고후 6:11-13에서 우리는 어떤 에수님의 마음을 가져야 하는가에 대해서 새롭게 깨닫고 우리 마음이 변화되기를 바랍니다.

먼저 열린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11절에 “너희를 향하여 우리의 입이 열리고 우리의 마음이 넓었으니” 라고 말씀하였습니다.

요즈음은 결혼식이 너무 야박합니다. 축의금을 낸 사람에 한하여 식당표를 주어 점심을 먹게 하지만, 제가 대학 다닐 때만 해도 그렇지 않았습니다. 서울 종로에 가면 예식장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배가 출출하면 친구들과 그 예식장을 한 바퀴 돕니다. 점심때면 잔치국수를 얻어먹고, 점심때가 지나면 카스텔라 한 상자씩 선물을 받았습니다. 그렇게 몇 군데를 다니다 보며 카스텔라가 몇 통씩 얻어 일주 일 내내 군것질로 먹었습니다. 옛날 시골에서 잔치가 열리면 대문을 활짝 열어 누구나 그 잔치에 참석할 수 있었습니다. 동리사람은 물론이요 지나가던 나그네 심지어 걸인들까지도 그 잔치에 참석하여 잔치 상에 앉을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걸인들은 누구네 집이 어느 날 잔치를 연다는 것을 알아 찾아다니곤 하였습니다.

예수님의 마음은 열린 잔치 집 같으십니다. 누구나 예수님 마음에 들어오고 나라고하면 하늘의 잔치를 맛보게 됩니다. 예수님은 누구에게나 마음 문을 활짝 열으셨습니다. 예수님의 마음 문안에 누구나 들어오고 나갈 수 있었습니다. 사람들이 죄인이라고 싫어하였던 마태나 삭개오같은 세리들도 예수님의 마음 문으로 들어왔습니다. 돌에 맞아 죽을뻔 한 음행한 여인도 에수님의 넓은 마음문안으로 들어 왔습니다. 사람들이 보기만 하면 돌팔매질로 내쫒았던 나병환자들도 예수님 마음 안에 들어 올 수 있었습니다. 심지어 나사로 같은 죽은 사람도 예수님 문안에 들어와 살아 날 수 있었습니다. 가난한자가 예수님 문안에 들어오면 부요한자가 되었습니다. 병든 자가 마음 문안으로 들어오면 고침을 받았습니다. 죽을죄를 지어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혀 죽게 된 강도도 마지막으로 예수님 마음문 안으로 들어오니 낙원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의 마음 문은 생명의 문입니다. 그래서 누구든지 그 생명의 문안으로 들어오면 구원을 얻고 새 생명을 얻게 됩니다. 이미 예수님의 마음 문 안으로 들어간 우리들은 결코 마음문이 닫혀 있어서는 안됩니다. 항상 우리의 마음 문도 열어놓아야 합니다. 좋아하는 사람에게만 열어주는 마음이 아니라 미워하는 사람에게도 열어 줄 수 있어야 합니다. 마음 문을 열을 때 하나님의 은혜와 축복이 들어오게 되고 나의 마음의 문이 닫혀 있으면 우리가 아무리 기도한다고 하여도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받을 수 없게 됩니다. 내 마음 문을 열어야 예수님의 새 생명의 역사가 내 안에 들어오게 됩니다.

 

이것을 알아야 합니다. 갈릴리 호수는 열린 마음입니다. 그래서 그 호수에는 153종류의 물고기들이 살고 있는 생명의 바다입니다. 그러나 사해는 닫힌 바다입니다. 이 사해에는 단 한 마리의 물고기도 살수 없는 죽음의 바다입니다. 닫힌 마음은 사해 바다처럼 죽은 마음입니다.

살아있는 사람의 집은 아무리 작고 초라해도 출입문이 있고 햇빛과 바람이 드나드는 창문이 있습니다. 그러나 죽은 자들의 무덤에는 문이 없습니다. 웅대한 경주의 신라 왕릉이나 이집트의 피라밋에는 밖의 세계와 교통할 수 있는 문이 하나도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마음의 문이 닫힌 사람은 스스로 어둠 속에 사는 것이며 하나님의 은혜에서 멀리 떠나 사는 것입니다. 사람들 중에 상대방의 마음이 닫혀져 있다고, 대화가 안 된다고 비난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상대방의 마음이 닫혀 있다면 반대로 내 마음의 문도 닫혀 있기 때문입니다. 닫혀 있는 상대방의 마음까지도 나의 열린 마음 안에 들어오게 한다면 그의 닫혀진 마음의 문도 열려지게 될 것입니다. 물론 전혀 말이 안 통한 벽창호같은 사람이 있습니다. 옛날 평안북도 압록강 연안에 벽동군과 창성군이 붙어 있는데 여기서 기르는 소가 다른 곳의 소보다 크고 억세고 고집이 세다고 하여 碧昌牛라고 불렀는데, 이 말이 창문이 없이 벽으로 꽉 마혔다는 碧窓戶로 바꿔 졌다고 합니다. 어떴든 마음이 벽창호 같은 사람은 공기흐름도 막아버려 꽉막힌 방안에 갇혀 사는 사람이라고 하겠습니다. 어찌 산 사람이라고 하겠습니까? 믿음은 자신의 닫혀 있는 마음의 문을 여는 것으로부터 시작합니다. 그렇게 해야 하나님의 생명의 바람 성령의 바람이 나의 심령 안에 불어와 에스겔서 38장의 마른뼈 골자기에 흩어져 있는 뼈들 같이, 죽어가고 병들어가던 내 영혼이 다시 소생하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나사로 무덤 입구를 막은 큰 돌이 먼저 제거되고 무덤이 열렸을 때 죽은 나사로가 살아 나왔듯이 내 마음을 막고 있는 여러 가지 세상의 돌들이 벗겨 질 때 우리를 썩게 하는 죽은 죄의 냄새는 다 사라지고 생명의 향기 곧 예수의 향기를 맡을 수 있게 됩니다. 사람들이 여러분에게서 생명의 향기 예수의 향기를 맡을 수 있도록 마음의 문을 활짝 열어야 합니다.

 

12절에서 말씀합니다. “너희가 우리 안에서 좁아진 것이 아니라 오직 너희 심정에서 좁아진 것이니라”. 나의 좁은 마음을 속히 내 던저 버려야 합니다. 예수님의 마음의 문은 열린문 일뿐 아니라 앞서 말씀 드린대로 넓게 열린 문입니다. 예수 믿는 사람들 중에 믿음으로 마음의 문은 열었는데 아주 좁게 연 사람들이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개구멍이나 쥐 구멍만큼 열고서 열었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기왕 열려면 통 크게 활짝 열어야 합니다. 어째서 미국트럼프와 북한의 김정은 의 대화가 지지부진하고 있습니까? 통크게 마음을 열지 않기 때문입니다. 북한의 김정은 위원장이 “좋쉬다. 모든 북한의 핵시설 다 파괴하겠쉬다. 미사일 모두 파괴할 거외다”라고 통크게 말하고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OK 유엔제제 달 풀고 남 북간 평화조약 맺고 경제 협력하도록 하리다.” 하면 오늘도 다 문제는 끝날 터인데 너도 너도 다 쥐구멍 만하게 문을 열고 서로 눈치 보려 하니 문재인 대통령은 애간장이 타고 있다고 하겠습니다. 아니 남북한 국민들만 어려움을 당하고 있습니다. 닫힌 마음을 열었으면 널찍하게 역어야 합니다. 마음이 좁은 사람은 아직 육신에 속한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이런 사람은 오해 잘하고 불평 많이 하고 시기심 많고 자기 욕심 차리기에 바쁜 사람들입니다. 마음이 좁을 뿐 아니라 마음을 들여다보면 어둠 컴컴하고 미로같이 이리저리 비뚜러지고 꼬브라져 있어 늘 불안하고 괴로운 인생길 고생고생하며 살아가게 됩니다.

 

어느 부흥강사 목사님께서 광주의 연합 부흥성회를 인도하러 가게 되었습니다. 터미날에서 고속버스를 탔습니다. 차가 떠날 시간이 되었는데 떠나지 못하고 소동이 일어났습니다. 나환자 옆에 있던 젊은 청년이 나환자와 함께 앉아 갈 수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자리는 만원인데 자리를 바꿔 달라는 것이었습니다. 결국 목사님과 청년이 바꿔 앉았습니다. 옆에 앉은 나환자는 너무 부끄러워 차창 밖만 쳐다보고 있었습니다. 한참 후 나환자는 자기가 먹고 있던 찹쌀떡을 목사님에게 드렸습니다. 목사님은 마음에 내키지 않지만 억지로 받아먹었습니다. 목사님이 맛있게 드시는 것 같으니까 떡을 또 하나 주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면서 하는 말이 저는 음성 나환자이기에 겉모양은 흉해도 전염이 되지 않는다는 것이었습니다. 광주에 도착하여 첫날 저녁 부흥회를 인도하는데 설교 전에 특별 찬송하는 청년의 찬양이 너무 은혜로웠습니다. 그런데 그 청년을 보니 어디서 본 것 같았습니다. 잘 생각해보니 고속버스에서 나환자 옆에는 못 앉겠다고 소동을 벌였던 바로 그 청년이었습니다. 입술로 찬양은 잘하나 마음이 문제였습니다. 진정한 성도는 나만을 생각하는 마음이 좁은 사람들이 아닙니다. 좁은 마음은 돌짝 밭 같고 가시떨기와 같은 마음이 되어 좋은 씨가 뿌려져도 온전한 열매를 맺지 못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넓은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13절에 “내가 자녀에게 말하듯 하노니 보답하는 양으로 너희도 마음을 넓히라”고 말씀합니다. 예수님의 마음이 얼마나 넓으신가? 자신을 배반하고 은 30냥에 제사장들에게 예수님을 팔아먹을 계획을 짜고 있는 가룟유다를 이미 알고 계시면서 예수님은 가룟유다의 발을 씻겨주셨습니다. 그에게도 떡과 잔을 나누어 주셨습니다. 그리고 네가 하고자 하는 일을 하라고 마름하시기도 하였습니다. 이와 같은 예수님의 마음은 얼마나 넣으신 것일까요? 예수님을 3번씩이 모른다고 하며 저주를 퍼붓던 베드로를 역시 이미 그 배반의 시간을 알고 계시면서도 전혀 꾸짖지 않으시고 부활하신 후 베드로를 찾아와 내 양을 먹이라고 사명을 주시었습니다. 생각해 보세요. 우리가 예수님으로부터 사랑받을만한 자격이 있을까요? 예수님의 친구라고 불려질만한 자격이 있을 까요? 과연 예수님의 십자가의 보혈로 죄 씼음 받고 천국에 들어갈 만한 공로가 있을까요? 전혀 없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나를 사랑하시고 우리를 친구라 부르시고 천국에서 살 곳도 마련해 놓으셨다고 하였습니다. 우리는 나 같은 조인 살리시고 구원해 주신 예수님의 마음이 지구보다 우주 보다 더 넓으시다고 찬양을 올릴 수밖에 없습니다.

한 무신론 철학자가 길에서 한 가난한 사람을 만났습니다. 평소에 오다가다 만나는 사이라 물었습니다. ‘지금 당신은 어디를 가고 있습니까?’ 물으니 그 가난한 사람이 대답을 하기를 ‘교회로 예배드리러 갑니다.’ 이 무신론 철학자는 조롱하는 말투로 ‘당신이 믿는 하나님은 얼마나 크신 분입니까?’ 이 가난한 사람이 분명히 말하기를 “우리 하나님은 확실히 우주만한 보자기가 있더라도 하나님을 덮을 수 없이 크십니다. 또한 제 작은 마음 에 들어와 계실 만큼 작기도 하십니다.”라고 대답하였습니다. 이 무신론자는 내가 수많은 신학자들에게 듣던 말보다 더 확실하게 하나님에 대해 들었다고 그의 책에 기록을 하였습니다.

 

나의 이 작은 마음 안에 들어오신 우주보다 크신 하나님, 그 하나님을 믿는 우리 마음이 좁아서야 되겠습니까? 넓을 수 있을 만큼 넓어야 합니다. 작은 연못에 돈을 던지면 풍덩하고 즉각적으로 물 파장이 생깁니다. 그러나 넓은 바다에 돌이 던져지면 거의 파장은 일어나지 않습니다. 왜 세상에 살고 있는 우리 마음에 수업이 파장이 일어나고 있습니까? 각가지 세상에서 던져지는 도들이 내 마음에 풍덩풍덩 떨어집니다. 그 때마다 파장이 일어납니다. 괴롭고 아프고 슬프고 만 가지 근심 걱정 염려의 파장들이 일어납니다. 분노의 파장, 미움의 파장, 공포의 파장 등등 연이어 내 마음가운데 세상에서 던져진 파장들이 일어납니다. 무엇을 증거 합니까? 마음이 작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마음 좁아 온갖 돌덩이들이 떨어질 때마다 물기둥이 솟구치니 정신이 아득하고 마음이 찢어질 듯합니다. 그러나 예수님 마음을 담은 사람은 전혀 게의치 않습니다.

 

퐁당퐁당돌을던저라,내마음에 돌을던저라

분 노야 꺼 저라 멀리멀리 꺼져라.

내 마음에 계셔서 기뻐하 시 는

우리주님 마음이 내마음이어 라.

 

어느 교회 장로님이 담임 목사님께 가난으로 어려움을 겪고 있는 이웃에 대한 이야기를 하였습니다.

"목사님, 제가 알고 있는 어떤 부인이 있는데 그 부인은 남편과 사별하여 홀로 살고 있습니다. 또 졸망 졸앙한 어린 아이들 4명을 부양해야 하는 어려움까지 겪고 있습니다. 아이들이 아파도 병원에 제대로 데려 갈 수 없는 형편으로 집세도 벌써 석 달 치나 밀려 있는데 설상가상으로 다음 달부터는 집세도 오른다고 합니다. 그러니 목사님, 교회에서 어떻게 좀 도와줄 방법이 없을까요?"하고 말하였습니다. 그러자 목사님이 "그런 분이 계신다면 마땅히 도와 드려야하지 않을까요? 장로님, 그 부인을 도울 방법을 의론해 보겠습니다. 그런데 장로님은 그 부인을 어떻게 아십니까?"하고 물었습니다. 그 장로님 "예! 잘 알고 있습니다. 바로 제가 그 부인이 사는 집의 집 주인입니다."하고 대답했다고 합니다. (빛두레 923호 인용교정)

 

과연 이 장로님의 마음은 얼마나 크고 넓을까요? 마음은 열었는데 아마도 개구멍만한 마음의 문정도가 아닐런지요.

 

예수님의 마음 큰 마음이셨기에 오히려 닫혀진 사람들로 인하여 좁고 작은 마음의 사람들로부터 고난을 당하시고 결국 십자가를 지시게 되었습니다. 십자가야 말로 예수님의 크고 넓은 마음을 보여주신 일이었습니다. 십자가로 인한 주님의 아픔이 우리 안에 생명으로 영원히 숨 쉬고 있습니다. 그 저주의 십자가 고통의 그 자리 고난과 아픔의 그 자리를 우릴 향한 사랑으로 채우셨습니다. 예수님 마음은 곧 십자가 마음입니다. 십자가를 짊어지고 가시는 그 좁고 험한 골고다의 길이 예수님이 십자가 마음으로 인하여 활짝 넓게 열려, 아무나 오게, 온 세계 사람들을 향하여 이 구원과 영원한 생명 문으로 들어오도록 그 열린 길이 되었습니다. 그 열린 길은 활짝 열린 사랑의 문으로 통합니다. 온 세상 사람들의 희망의 문을 열으셨습니다. 그래서 우리 또 그 사랑의 마음으로 이 십자가의 길을 가고 나에게 희망의 문이 넓게 열려있어 인생을 보람과 기쁨으로 살아가게 되었습니다.

 

우리 라온코이노니아는 예수의 큰마음, 십자가 마음을 배우고 닮아가는 신앙공동체입니다. 이번 사순절 기간에 우리의 닫힌 마음을 열고, 좁은 마음을 크게 벌려 넓은 마음으로 살아갑시다. 그리할 때 우리들의 삶 속에 어둠의 그림자가 사라지게 되며 언제나 기쁨과 감사가 떠나지 않게 됩니다. 어리석은 고집과 편견과 욕심을 버리고 아름다운 마음들을 마음 안에 가득 담아갑시다. 그래서 사람들에게 주의 사랑과 은혜를 나누어 줍시다.

 

시인 안도연씨가 <봄날 사랑의 기도>라는 시를 썼습니다. 그 시 가운데 한 대목을 소개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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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봄날이 다 가기 전에

당신을 사랑하게 해 주소서

한 사람이 한 사람을 사랑하는 일로 해서

이 세상 전체가 따뜻해질 수 있도록 도와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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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봄날이 다 가기 전에

남의 허물을 함부로 가리키던 손가락과

남의 멱살을 무턱대고 잡던 손바닥을 부끄럽게 하소서

남을 위해 한 번도 열려본 적이 없는 지갑과

끼니때마다 흘러 넘쳐 버리던 밥이며 국물과

그리고 인간에 대한 모든 무례와 무지와 무관심을 부끄럽게 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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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하여 이 봄날이 다 가기 전에

얼음장을 뚫고 바다에 당도한 저 푸른 강물과 같이

당신에게 닿게 하소서

이 기도가 사순절 기간 우리의 기도가 되기를 바라며 하나님의 은혜와 축복이 함께 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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