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 3월 17일 마 26:69-75 이거 왜 이래(베드로의 난 몰라 ‘우크 오이다’)
2019년 3월 11일, 광주지방법원은 취재진과 시민들로 가득 찼습니다. 고(故) 조비오 신부에 대한 사자 명예훼손 혐의로 기소돼 재판에 출석하는 전두환 씨를 보기 위해서였습니다. 전 씨가 광주 시민들 앞에 모습을 드러낸다는 것 자체가 역사에 남을 순간이었습니다. 5.18의 책임자로 지목되는 전 씨가 무슨 말을 할지가 가장 큰 관심사였습니다. 입을 열기는 열지, 혹시라도 사과의 뜻을 밝힐지. 시민들이 궁금해 했고, 기자들이 물어봐야 했습니다. 전 씨를 태운 차량이 도착할 법정 입구에서 문까지는 불과 10여 미터 거리. 전 씨를 대면할 수 있는 시간은 30초도 안 될 것 같았습니다. 궁금한 건 많았지만 질문을 추려야 했습니다. 기자 3명이 세 가지 질문을 하기로 했습니다. 사자명예훼손 혐의를 인정하느냐. 5.18 당시 발포 명령을 했느냐. 광주 시민들에게 사과할 생각 없느냐. 짧은 순간 실수하지 않도록 질문을 외우고 또 외웠습니다. 대답을 들을 거라는 기대는 크지 않았습니다. 기다림은 길지 않았습니다. 전 씨의 차량은 예상보다 일찍 도착했습니다. 낮 12시 33분, 검은색 에쿠스 승용차에서 전 씨가 내렸습니다. 경호원들에게 둘러싸인 전 씨는 기다리던 기자들을 지나쳐 계속 걸어가려고 했습니다. 상황이 급박하게 돌아갔습니다. KBS 양창희 기자를 포함한 기자들이 준비한 질문을 던졌습니다. 전 씨는 '혐의 인정하느냐'는 질문에는 대꾸 없이 걷더니, '발포 명령 부인하느냐'는 질문에 갑자기 기자 쪽을 획 돌아봤습니다.
"이거 왜 이래!"
전 씨의 입에서 터져 나온 건 고함 이었습니다. 얼굴은 심하게 찌푸려져 있었습니다. 질문을 하는 기자들과 몸이 살짝 닿은 듯, 손을 뿌리치며 외친 말이었습니다. 아흔 살을 앞둔 노인치고는 목소리와 동작에 상당한 힘이 실려 있었습니다. '이거'라는 말은 마이크에는 담기지 않았지만 현장에 있던 기자의 귀에는 똑똑히 들렸습니다. 입을 여는 순간, 전 씨는 분명히 화를 내고 있었습니다. "사과할 생각 없느냐"는 양창희 기자의 질문에는 다시 침묵했습니다. 더 묻고 싶어 마이크를 들이댔지만 경호원에게 밀리고 말았습니다. 그러는 사이 전 씨는 법정 안으로 유유히 들어갔습니다. 앞서 24년 전 내란수괴 혐의로 재판을 받던 그의 또 다른 발언이 떠오릅니다. 1995년 재판당시 전씨는 “왜 나만 갖고 그래”라며 혐의를 전적으로 회피하였던 것입니다.
‘이 거 왜 이래’ 이 말을 한 전두환씨의 얼굴은 당시 화면을 보던 많은 사람들이 어찌 사람이 저럴 수 있는가 그 뻔뻔함이 마치 철면피鐵面皮를 뒤집어 쓴 것 같이 보였습니다.
옛날 중국에 진사(進士) 양광원(楊光遠)이란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는 과장이 심하고 거리낌이 없는 성격의 소유자였습니다. 출세욕이 대단해서 항상 왕공대신의 집안을 기웃거리고 권문세가를 찾아다녔습니다. 마음에 들지 않으면 비방을 하고 다니다가 채찍질을 당하고 욕을 먹으면서도 고칠 줄을 몰랐습니다. 당시 사람들은 그를 천하게 여기며 모두들 양광원의 부끄러운 얼굴은 마치 열 겹의 철갑처럼 두껍다고 말했습니다.(進士楊光遠, 惟多矯飾. 不識忌諱, 遊謁王公之門, 干索權豪之族, 未嘗自足, 稍有不從, 便多誹謗. 常遭有勢者撻辱, 略無改悔. 時人多鄙之, 皆云楊光遠慚顔厚如十重鐵甲也.) 이 이야기는 왕인유(王仁裕)의 《개원천보유사(開元天寶遺事) 〈참안후여갑(慚顔厚如甲)〉》과 송나라 때 송광현이 지은 《북몽쇄언(北夢瑣言)》에 나오는데, 부끄러운 얼굴이 철갑과 같다는 뜻의 ‘참안후여십중철갑’이란 말에서 ‘철면피’가 유래하였습니다. 양광원이 열 겹의 철갑을 썼다고 하면 전두환씨는 아마도 百重鐵甲也라고 하겠습니다.
‘이거 왜 이래’ 전두환씨의 말을 들으며 떠 오른 노래가 있었습니다. 구자억이란 가수가 2015년에 부른 노래입니다.
“이거 왜이래 이거 왜이래
왕년엔 나도 어마 어마했었어
돈이 뭔지 사랑이
뭔지 울고 웃다보니
잠시잠깐 약해진 것뿐이야
이거 왜이래 이거 왜이래
왕년엔 나도 어마 어마했었어
세상의 모진 풍파 견뎌 내다보니
잠시잠간 움츠려든 것뿐이야
이 노래를 부른 구자억 가수는 목사입니다. 지난 2013년 감리교 중부연회에서 목사안수를 받고 전국 교회를 다니며 구수한 입담과 노래로 교인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목사입니다. 본래 그는 서울감리교신학대학을 졸업하고 거지 복색으로 전국 장터를 다니며 품바노래를 부르면서 전도하였습니다.
베드로의 이름이 세 가지로 나옵니다. 베드로, 시몬, 게바입니다. 그런데 유대 나라는 히브리어, 아람어, 희랍어 세 가지 공용어를 사용하기 때문에 이름이 여러 가지로 나오는 사람이 많습니다. 지금 복음서를 보면 사복음서가 다 열두 제자 이름을 기록할 때 언제나 베드로가 첫 번째로 나옵니다. 가룟 유다가 언제나 꼴찌로 나옵니다. 여러 가지 정황으로 봐서 베드로가 수제자 분위기를 주고 있는 것이 정확합니다. 살로메가 자기의 두 아들 야고보와 요한을 데리고 예수님을 찾아왔습니다. 살로메는 예수님의 이모요 예수님을 위해서 돈도 제일 많이 쓰고 친척간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 부탁합니다. “당신의 나라 임하실 때 나의 두 아들을 하나는 우편에, 하나는 좌편에 앉게 하소서.” 이 부탁을 예수님께 왜 하였을 까요? 베드로를 견제하기 위한 것입니다. 아무리 보아도 예수님의 마음속에 베드로가 제일 많이 들어가 있다고 짐작하였기 때문입니다. 베드로의 신앙 고백을 들으신 예수님은 매우 기뻐하셨습니다. “천국 열쇠를 네게 주겠다.” “네가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 예수님은 베드로의 고백을 칭찬하셨습니다. 베드로의 장모가 열병을 앓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말씀을 증거하시다가 베드로의 집안으로 들어가시어 고쳐주셨습니다. 아무래도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남다른 관심을 가지신 것이 분명합니다, 그러닌까 부활하신 후에 베드로를 디베랴 바닷가로 가시어 단 둘이 만나시어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물으셨습니다. 이런 기록들을 볼 때에 복음서 기자들은 베드로를 예수님이 제자들 가운데 첫 번째로 여기셨다고 이구동성 인정하는 것 같습니다. 제자 중에 베드로와 안드레가 형제이고, 야고보와 요한이 형제라서 지금 이 열두 사도 공동체는 벌써 은연중에 앞으로 있을 공로에 대한 상훈에 시시비비가 일어날 조짐을 보이고 있습니다. 이 두 거대 파벌에 신경 쓰여 질 그런 모습을 예수님이 보여 주신 것 같습니다. 어떤 중요한 일이 있으면 언제나 베드ㅗ와 요한의 형제를 부르셨습니다. 변화산 예수님 변화 사건 때에도 베드로, 요한, 야고보만 불러 가셨습니다. 야이로의 딸을 살리실 때 그 자리에도 베드로와 야고보, 요한만 데리고 들어가셨습니다. 겟세마네 동산에서 마지막 기도하실 그 때에 그 고통의 시간에 베드로와 야고보, 요한만 데리고 가셨습니다. 아마 다른 제자들이 질투할 만큼 편애를 하신 것 같습니다. 그래서 베드로와 요한은 보이지 않는 라이벌이 형성되어 있어서 어머니가 나서서 예수님께 그런 부탁까지 한 것 같습니다. 그래서 불필요한 신경전을 벌이고 있을 때 예수님이 뭐라고 말씀하십니까? “너희 중에 누구든지 크고자 하는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고(欲爲大者 當爲人役), 너희 중에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너희 종이 되어야 하리라.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함이니라.(마 20:26-28절)”
그런데 이처럼 여러 가지 면에서 제자들 누구보다도 예수님으로부터 인정받고 칭찬을 받았던 지켜오다가 베드로가 대제사장 가야바의 집 뜰에 불을 쬐고 앉았다가 그만 베드로를 알고 있는 모든 사람들에게 엄청난 실망을 주는 사건이 일어났던 것입니다.
성경에 이거 왜 이래라고 세 번이나 말한 사람이 있습니다. 바로 예수님의 수제자로 총망 받던 베드로입니다. 사순절 둘째주일엔 의례 베드로의 배신을 목사님들은 소개하고 있습니다. 과연 이럴 수 있습니까?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고백하고 예수님이 어디를 가던지 죽기까지 따르겠다고 장담하던 베드로 이였습니다. 그런데 그의 豪言壯談이 虛言壯談이 되버렸습니다.
베드로가 대제사장 앞마당에서 불안하게 그리고 다소 두려움에 쌓여 불을 쬐고 있었습니다. 그 불빛에 불안하고 두려움에 질려있는 베드로의 얼굴이 비쳤습니다. 그 때 외부인들을 안내하던 한 여자가 예리한 눈으로 사람들을 흝어 보던 중에, 아직 동트기 전 어두운 시간이지만 와짝직걸 떠들고 있는 사람들 틈에 앉아 두려움이 가득한 얼굴로 두리번거리고 있는 한 사람을 포착했습니다.
“내가 보니 당신도 갈릴리 사람 예수와 함께 있었던 그 사람 아니요?”(69절) 베드로가 화들짝 놀랐습니다. 자기 딴에는 사람들이 자기를 알아보지 못하도록 겉옷에 머리를 감추고 있었는데, “너도 예수와 한 패 맞지?” 자기의 신분을 알아본 사람이 있었으니 놀라 버렸습니다.
베드로가 돌아보며 “이거 왜 이래, 넌 무슨 말 하는거야? ” 당혹스럽고 혼란한 상황에 직면한 베드로는 공포에 휩 쌓여 크고 단호한 음성으로 “이거 왜 이래” 예수와의 관련성을 부인합니다. 지금 베드로는 큰 죄를 범한 것입니다.
이미 마 10:33절을 보면, “누구든지 사람 앞에서 나를 부인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그를 부인하리라”고 예수님이 말씀을 하신 적이 있었습니다.
여러 사람들이 있는 곳에서의 명백한 부인은 구원을 얻을 수 없는 죄입니다. 이 한 번의 부인으로도 이미 베드로는 천국에 들어갈 수 없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베드로의 말을 듣고 놀라지 않을 수 없습니다. 예수님의 수제자이자, 교회의 반석이요, 죽기까지 예수님을 따르리라 장담하던 그의 입에서 “이거 왜 이래 난 몰라” 이런 千不當萬不當(utterly unjust)한 말을 한다는 것이 이 성경 말씀을 읽는 우리들을 놀라게 하고 있습니다. 그처럼 예수님의 사랑받던 그가 이럴 수가 있는 것입니까?
베드로는 도망치듯 앞문으로 피해갑니다. 그런데 그곳에 다른 여자 안내원이 있다가 베드로를 알아보고 사람들에게 “이 사람이 나사렛 예수와 함께 있었습니다”고 큰 소리로 말하니 사람들이 와 하고 처다 보았습니다. 베드로는 손을 저래 절래 흔들며 “이거 왜 이래, 나 저사람 몰라” 그러닌까 다른 사람이 “당신 말투가 갈릴리 말투인 저 사람과 같은 걸 보니 너도 한패가 분명해?”하고 말하였습니다. 이 말을 들은 베드로는 땅에 침을 팍 뱉으면서 “이거 왜 이래, 나 저사람 모른다고 하잖아. 몰라 몰라 난 몰라(우크 오이다)” 베드로는 그냥 모른다고만 한 것이 아니라 맹세코 모른다고 하고, 내가 그를 알면 내가 저주받기로 맹세하리라(카타세레마테제인 카이 오뮤에인)고 말하였습니다. 여기서 저주하다란 말은 원어로 ‘카타나데마티조’란 말로 맹렬히 저주를 받다, 지옥 불에 던져질 것이라는 저주의 말입니다.
이렇게 해서 베드로는 “이거 왜 이래‘라는 말을 세 번이나 하였습니다. 그러고 보니 전두환씨 보다 더 큰 죄를 지었습니다. 전두환씨는 5.18광주에서 발포명령 내린바가 없다고 말했는데 베드로는 예수님에게 마치 총을 세 방 쏜 것 같은 말을 한 것입니다. 이 보다 더 큰 죄가 어디에 있겠습니까? 가룟유다 보다도 그 죄가 가볍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세상에서 가장 불행한 일은 사랑하는 사람으로부터 모른다고 배신당하는 일입니다. 어느 유명하신 목사님이 은퇴할 때 신문기자와 인터뷰를 하였습니다. 그 가자가 묻기를 “목사님은 목회에 성공하신 분인데 혹 목회할 때 슬플 때도 있었습니까?” 목사님이 대답하길 “나의 목회에서 가장 슬펐던 일은 내가 사랑하던 교우가 나를 배척할 때였습니다.” 그렇습니다. 저도 40여년간 목회하면서 가장 슬펐던 일은 나의 면전에서 사랑하던 교우가 고개를 돌려 외면할 때입니다. 바울 선생님도 로마 감옥에 갇혔을 때 사랑하던 제자인 “데마는 이 세상을 사랑하여 나를 버리고 데살로니가로 갔고 그레스게는 갈라디아로, 디도는 달마디아로 갔고(딤전4:10)” 이 말씀하실 때 바울의 가슴에 슬픔이 가득 찼을 것입니다. 바로 예수님이 대 제사장에게 심문을 받고 있을 때 수제자 베드로가 “이거 왜 이래” 세 번이나 예수님을 모른다고 하고 저주까지 하고 맹세까지 하였으니 예수님의 마음을 슬픔으로 가득 찼을 것입니다. 그때 예수님이 고개를 돌려 물끄러미 베드로를 바라보셨습니다. 이미 예수님은 간밤에 베드로가 당신을 세 번이나 부인 할 것이라는 것을 말씀하신바가 있었습니다.
마26:34-35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밤 닭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 베드로가 이르되 내가 주와 함께 죽을지언정 주를 부인하지 않겠나이다 하고 모든 제자도 그와 같이 말하니라”
베드로는 지금까지 예수님을 따르면서 훌륭한 위치를 지켜오다가 가야바 법정 아래에서 그만 그의 더럽고 나약한 죄악의 모습이 들어나게 되었던 것입니다. 베드로에게 예수님이 수차 말씀하셨습니다. “예루살렘에 가면 나는 고난을 받게 되고 죽임을 당할 것이다.” 베드로는 이 예수님의 말씀이 무슨 말씀인지 전혀 알지 못했고 알려고도 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의 진심을 파악하지 못하고 있던 베드로가 정말 그 십자가 사건이 닥쳐오니까 혼비백산하여 이거 왜 이래 하면서 얼굴에 철면피를 깐 것입니다. “너희가 다 나를 버리고 도망가고 말 것이다.” 그때에 제자들은 말했습니다. “죽을지언정 그런 일은 하지 않겠나이다.” 그렇게 말했습니다. 그러나 이 말을 새빨간 거짓말이었습니다.
베드로는 지금까지 자신이 차지했던 열 두 사도 중에서의 훌륭한 위치를 언제까지나 지켜낼 수 있을 것이라고 자신하였지만 그만 어마어마한 죄인으로 전락해 버렸습니다. 지금까지 모든 일에 앞장 서 왔던 베드로였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얼굴 감추기에 급급하였습니다. 이상한 일입니다. 3년 반 동안 예수님의 전도에 동참하여 예수님의 말씀을 듣기도 수백 번일 것이고, 오병이어의 장면을 체험하였고, 바다를 잔잔케 하신 예수님의 능력을 목도하였으며, 수많은 병자들을 고치시고, 죽은자를 살려내신 일까지 직접 목격한 제자들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어떤 위험에 처하시니 그들은 나 몰라라 하고 도망들 쳤습니다. 예수님 십자가 아래 여인들 몇 사람하고 그나마 요한 제자가 있었습니다. 평소 예수님을 따르지는 않았지만 멀찍이 존경의 눈으로 바라보고 있었던 아리마대 요셉이란 사람이 빌라도 앞에 나와 예수님을 장례 치루려 하니 예수님의 시신을 달라고 하였을 때 그 제자들은 어디로 갔는지 아무도 없었습니다. 아리마데 요셉은 몰약을 100근이나 가지고 와서 세마포로 싸서 아주 신중하게 자기의 무덤에 예수님의 시신을 모시기 위해 장례식을 다 치렀는데, 마땅히 예수님의 장례를 치루어야 할 제자들이 아무도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이 병자들을 고치 실 때에 제자들을 신들이 났었을 것입니다. 마치 자기들이 다 한 것처럼 자랑스럽게 예수님의 치유사역을 도왔을 것입니다. 예수님이 병자들을 고치실 때에 베드로는 병자들의 순서를 정하고 “다음 환자 오시오” “당신은 저 뒤로 가서 서시오, 차례를 지키시오”하면서 환자들 교통정리를 하였을 것입니다. 사람들이 제자들에게 와서 청을 합니다. “제발 예수님 좀 오늘 만나게 해주세요.” 그러면 베드로는 “지금 예수님 바쁘시닌까, 다음에 오시오”하며 퇴짜를 놓았을 것입니다. 예루살렘 성으로 예수님이 나귀를 타고 들어가실 때에 예루살렘 시민이 다 몰려나와서 종려나무 가지를 흔들며 “호산나”를 외쳤을 때 베드로는 예수님 곁에서 어깨를 펴고 예수님을 호위하여 가면서 매우 자랑스러워하였을 것입니다. 세상을 다 차지하는 기분이었을 것입니다.
그렇게 영광스럽고 자랑스럽게 뻐기던 베드로가 예수님이 고난을 당하닌까 “이거 왜 이래” 예수님을 모른다고 하니 기가 차고 코가 차고 입이 막힐 일이 아닙니까? 예수님은 이미 당신이 에루살렘에 올라가면 고난을 당하실 것이라는 것을 알고 제자들에게도 말하였습니다. 마태복음 16장 21절에 ““이때로부터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기가 예루살렘에 올라가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많은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하고 제삼 일에 살아나야 할 것을 제자들에게 비로소 나타내시니” 라고 하였습니다. 어쩌면 제자들에게 예수님이 폭탄선언을 하셨던 것입니다. 그러니 베드로가 먼저 반응을 하였습니다. 22절에 “베드로가 예수를 붙들고 항변하여 이르되 주여 그리 마옵소서. 이 일이 결코 주께 미치지 아니하리이다.” 여기서 “항변”이라는 말은 ‘에피티마오’라는 말로 ‘꾸짖다 책망하다 엄하게 말하다.’라는 의미입니다. 그러닌까 예수님의 말씀에 베드로가 달려들 듯이 강하게 “항의 하였다.” 라는 말입니다. “그러시면 안 됩니다. 절대 그렇게 하지 마십시오.” 아마도 이때 이미 그의 마음속에 ‘이거 왜 이래’라는 마음의 말을 품고 있었을 것입니다. 이 항변 속에는 주님의 고난을 생각하는 마음이 아니라 자신의 고난이 더 걱정이 된 것입니다. “만약 지금 말씀하신 그대로 주님이 죽으신다면 우리들은 어떻게 되는 것입니까? 나 같은 사람은 이제 온 나라 사람들에게 얼굴이 팔렸습니다. 예수의 수제자 명함이 얼굴에 붙었습니다. 이거 왜 이러십니까? 그런 일 하지 마십시오” 이때에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어떤 답변을 하셨습니까? “사탄아! 내 뒤로 물러가라.(휘파게 오피소 무, 사타나)”고 강하게 말씀하셨습니다. 일찍이 예수님께서 광야에서 40일간 기도하시던 중 사탄에게 시험 당하신 일이 있었습니다. 그때에 사탄이 예수님에게 “네가 나에게 절을 하면 내가 모든 것을 너에게 주리라”고 말하였습니다. 그때 예수님이 무엇이라 말씀하셨습니까? “사탄아 물러가라(휘파게 사타나)”라고 외치셨습니다. 베드로를 행해 예수님이 그 말씀을 하신 것입니다. 이 얼마나 끔찍한 말씀입니까? 예수님이 베드로에게 사탄아 물러가라고 말씀하시다니요. 자기의 유익을 구하려 예수님의 구속의 사역을 가로 막는 일은 곧 사탄의 일인 것입니다. 예수님은 가룟 유다에게 사탄이 들어간 것을 아신 것처럼 베드로의 마음에도 세상의 만족을 위해 예수님의 길을 가로막는 사탄이 들어가 있음을 아신 것입니다.
아마도 이때부터 베드로의 마음은 뒤숭숭하였을 것입니다. ‘나는 어떻게 될 것인가? 이쯤에서 그만 둘까 아니면 계속 예수님을 따를까?’ 사탄은 베드로의 마음에 낚시 바늘을 늘어뜨리고 그 낚시 바늘에 걸려들기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많은 사람이 이 사탄의 낚시에 걸려 세상으로 끌려갑니다. 믿음을 버리고 죄의 길에 서게 됩니다. 예수를 잘 믿는다는 사람도 이 사탄의 낚시에 자주 걸리고 믿음을 버릴 때가 많습니다. 저는 신문 기사에 오르내리는 기독교를 믿는 정치인들이나 경제인들을 보면서 ‘이이고 저 사람도 사탄의 낚시 바늘에 걸렸구나!’ 나는 그들을 비난하지 않습니다. 대신 안타까운 마음에 믿음을 버린 그들을 위해 슬퍼합니다.
베드로는 그때부터 차츰차츰 예수와 거리를 두는 마음을 가지고 있지 않았겠는가? 추측해 봅니다. 그러다가 오늘 말씀에 와서는 급기야 최고의 부정적 자세가 되어 버리고, 예수님을 향해 ‘이거 왜 이래 나 저 사람 몰라!’ 절교를 선언하였습니다. “나는 네가 무슨 말을 하는지 알지 못하겠노라” 영어 성경 쓰는 사람은 “I don't know. What are you talking about?” 이 말은 관용어가 되어서 영어 문화권에 있는 사람들은 아주 자주 씁니다. “무슨 말이야, 네가 하는 말 한마디도 알아듣지 못하겠다.”라는 뜻입니다. 이 말을 세 마디로 줄이면 “이거 왜 이래”입니다.
사람들은 수없이 예수님과 절교하듯 세상에서 죄를 짓습니다. 죄를 짓는 그 시간은 예수님을 모른다고 하는 시간입니다. 예수님을 알고 있다면 예수님이 그렇게 싫어하는 죄를 지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그 때마다 예수님은 슬픈 눈으로 우리를 바라보십니다. “어쩌면 좋으냐! 너 그러다가 지옥에 갈 터인데. 내가 너의 죄를 용서하려고 십자가를 졌는데 또 널 위해 십자가를 져야 하겠구나!” 우리는 이것을 믿습니다. 우리가 죄를 지으면, 예수님의 십자가 보혈로 우리의 죄를 씻어 주실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죄를 씻어주시고 용서해 주시기 위해 십자가를 지시고 골고다에 십자가에 못 박혀 고난당하시고 죽으셨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예수님의 보혈로 죄 사함 받고 용서받게 됩니다. 그런데 이것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가 죄를 지을 때 마다 예수님은 십자가를 지신다는 사실입니다. 그 때 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 못 박히시고 피를 흘리셔야 합니다. 우리가 성만찬 예식을 할 때 이것은 예수님의 피요, 이것은 예수님의 살이라고 말합니다. 우리가 죄를 지을 때마다 2000년 전 예수님이 아니라, 지금 살아계신 예수님이 십자가 고난당하시고, 피를 흘리시어, 우리의 죄를 씻어주십니다. 그러니 우리는 그동안 얼마나 많이 예수님의 손에 못을 박아왔는지 모릅니다. 그동안 우리는 얼마나 많이 예수님의 가슴에 창을 꽂게 하였는지 모릅니다. 그동안 우리의 죄를 사해주시기 위해 예수님이 얼마나 많은 피를 흘리셨는지 모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이거 왜 이래’ 예수님을 모른다고 할 때 마다,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는 죄인이 되었으니, 이 엄청난 죄를 어찌 다 감당 할 수 있겠습니까?
쿼바디스라는 소설이 있습니다. 1896년 폴란드 작가 헨리크 세엔키예비츠(Henryk Sienkiewicz 1846-1916)가 1895년 발표한 소설입니다. 이 사람은 1905년 노벨문학상을 수상하였습니다. 이 소설이 그 후 여러번 영화로 찍혀졌습니다. 그중에 1951년 로버트 테일러와 데보라카가 주연인 영화가 매우 감동적이었습니다. 옛날 로마의 네로황제때 로마군 장교와 노예로 끌려온 기독교 처녀와의 사랑을 그린 드라마입니다. 그런데 이 영화에 베드로가 등장합니다. 네로가 기독교를 극심하게 탄압을 하여 예수를 믿는 사람들을 다 잡아들여 죽이는 때 베드로가 로마를 탈출하여 산길로 도망하는데 그 때 베드로 앞에 예수님이 나타나십니다. 베드로가 깜짝 놀라 외칩니다. “쿼 바디스 도미네(Quo Vadis Domine)” 이 말은 라틴어로 “주여 어디로 가시나이까?”란 말입니다. 이 말을 한 베드로에게 예수님이 말씀하시길 “십자가에 다시 못 박히러 로마로 간다.(Venio Romam iterum crucifigi.)” 이 구절을 "네가 버린 양들을 위해서 내가 다시 로마로 돌아가 십자가를 지고 죽으러간다."라고 의역하기도 합니다. 베드로는 어찌 예수님으로 하여금 다시 십자가에 못 박히시게 할 것인가? 그럴 수 없다라고, 화개하고 로마로 되돌아가 순순히 붙잡혀서 순교합니다. 그는 십자가에 못 박히게 되는데 감히 예수와 똑같은 십자가형을 받을 수 없다하여 易 십자가형을 받길 원해 십자가에 역으로 못 박혀 순교하였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역 십자는 그대로 성 베드로의 상징이 되었습니다.
베드로는 세 번씩이나 ‘이거 왜 이래’하고 예수님을 부정하다가, 예수님께서 지난밤에 ‘너는 새벽닭이 울기 전에 세 번씩이나 나를 부정할 것이라’는 말씀이 생각났습니다. 베드로는 화들짝 놀랐습니다. 밖으로 도망치듯 나가 심히 통곡하였습니다.(마26:75). 베드로는 자기의 죄가 얼마나 큰지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는 눈물로 통곡하며 회개하였습니다. 만일 이때에 베드로가 눈물로 통곡하며 회개하지 않았다면 가룟 유다처럼 자살해 죽었거나 폐인이 되어 버렸을 것입니다. 그것이 사탄마귀의 노림수입니다. 그가 회개하였다는 것은 사탄과의 싸움에서 이겼다는 것을 말합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떠나고 세상에서 죄를 짓는 일은 마귀의 낚시 바늘에 걸려들었다는 것이고, 회개하였다는 것은 그 낚시 바늘로 부터 탈출 하였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마귀는 정죄하고, 고소하고 ,이간질하고, 배신하고, 떠나게 하며 돌아올 기회를 박탁해 버립니다. 이것이 마귀의 일입니다. 그 마귀의 일에 넘어가지 마십시오. 정죄에 무너지지 마십시오. 기회를 봉쇄하지 마십시오. 포기하면, 절망하면, 自暴自棄하면, 무너져 내리면 마귀가 기뻐서 손뼉을 칠 것입니다. TV도시어부라는 프로를 보니, 이경규씨가 낚시를 하던 중 이따만한 붕어를 잡고 박수를 치면서 좋아하였습니다. 우리가 마귀의 낚시에 걸려 마귀로 기쁘게 할 것입니까? 이것을 늘 생각해야 합니다. 우리가 어떤 작은 죄를 짓더라도, 아이구, 마귀가 기뻐하겠구나하는 생각을 해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 주 예수님은 사랑하고, 용서하고, 격려하고 새 힘을 주고, 다시 시작할 기회를 주시는 분입니다. 우리 주님은 기회의 주님입니다. 회개의 기회는 지상최대의 축복을 예정한 하나님이 주신 은총의 기회입니다. 베드로는 이 기회를 잡았습니다. 그러나 가룟 유다는 이 기회를 잡지 못해 영원한 불 못에 떨어진 죄인이 되었습니다. 바라건대 전두환씨도 ‘이거 왜 이래’ 말하지 말고 진정으로 이 회개의 기회를 꼭 잡기를 바랍니다. 이것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은총 중에 가장 큰 은총은 기회를 주시는 은총입니다.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회개할 기회를 주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사랑을 받아드릴 기회를 주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위해 끝까지 충성하다가 순교할 기회를 주셨습니다. 그래서 베드로로 하여금 교회의 반석이 되게 하셨습니다. 세계 교회의 중심으로, 천주교회에서는 베드로를 1대 교황으로 섬기고 바티칸 시에 베드로 성당을 크게 지어 그를 기념하고 있습니다. 우리 목사님들의 목사의 정통도 바로 베드로로부터 내려오는 사도권 전승에 따라 목사 안수를 받고 있습니다.
사순절 기간 베드로의 이 ‘이거 왜이래’ 배신의 이야기로부터 받게 되는 가장 큰 교훈은 무엇입니까? 베드로는 예수님을 건성으로 따랐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건성으로 들었습니다. 예수님이 당신의 수난을 예고하실 때에도 ‘설마 그런 일이 있을 라구’ 하며 건성으로 흘려들었습니다. 믿음생활에서 가장 위험한 일은 건성으로 말씀을 듣는 것입니다. 성경은 말씀은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 살아계신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하였습니다. 우리를 새롭게 하고 우리를 부요케하고 우리를 자유케 하시는 말씀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말씀을 건성으로 듣는다는 것은 자기 영혼을 파하는 일이요, 마귀로 틈타게 하는 일이요, ‘이거 왜 이래’ 예수님을 모른다고 할 일인 것입니다.
“모두 주를 버릴지라도 나는 결코 주를 버리지 않겠나이다.(마26:33)” 그리고 “내가 주와 함께 죽을지언정 주를 부인하지 않겠나이다,(마26:35)”라고 베드로는 건성으로 말하였습니다. 그러나 회개한 후에 이 말은 진심으로 베드로의 약속이 되었습니다. 이 베드로의 약속은 정말 사순절 기간 주님의 마음에 최고의 기쁨을 드리는 제자의 결단 선언인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도 이 약속을 주님께 드릴 때 주님은 “내가 십자가 고난을 당하는 보람이 충분이 있도다.” 하시면서 사순절의 은혜와 축복을 주실 것입니다.
우리 라온코이노니아는 주님을 죽도록 따르리라고 고백하는 믿음으로 모인 성도들의 신앙 공동체입니다. 늘 하나님을 바라며 지은 죄를 회개하고 새롭게 주시는 주 예수님의 구원의 은총과 허락하시는 축복을 받아 누리는 저와 여러분들이 되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