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 1월 27일 주일아침예배 창 48:8-16 碩果不食의 축복
신영복선생은 '석과불식'이라는 제목의 그림사색에서 한 늦가을 감나무 꼭대기에 외롭게 남겨져 있는 붉은 감 열매 한개를 그려 표현하였습니다.
석과불식은 『주역』 64괘 가운데 23번째 괘로 산지박山地剝 괘(☶☷: 艮☶ 坤☷)의 효사에 나오는 말입니다. 석과불식은 바로 이 마지막 남은 효사에 나오는 말입니다. 이 괘는 64괘 가운데 가장 어려운 상황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한 겨울 꽁꽁 얼어붙은 땅 위에 해가 잠시 비췄다가 곧바로 서산으로 넘어가고 마는 그런 국면입니다. 음산한 기운이 너무 많아 서로 헐뜯고 깎아 내리는 형국입니다. 그러나 가장 어려운 상황에서도 희망을 말하고 있습니다. 바로 산지박괘의 마지막 대목에 나오는 구절입니다. ‘석과불식 군자득려 소인박려(碩果不食 君子得輿 小人剝廬)’ “씨 과실은 먹히지 않는다. 어진 사람은 간악한 무리들도 끝내 해치지 못한다. 군자는 오두막집에서 나와 수레를 타게 되고, 사악한 무리들은 지금까지 살던 집에서 쫓겨난다.” 여기서 유래한 성어 석과불식(碩果不食)이 많은 사람들에게 회자되고 있습니다. ‘석과 碩果’는 ‘큰 과일’, ‘마지막 과일’ 즉 ‘씨 과일’이라는 뜻입니다. 나뭇가지 끝 최후의 씨 과실은 따먹지 않고 두었다가 종자로 심는다는 뜻인데, 이 말이 욕심을 버리고 복을 후대에 넘겨준다는 의미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역경과 절망의 상황에서 한 희망이 있다면 바로 석과입니다. 마지막 남은 씨 과일 이 석과가 다시 심어지고 나무로 자라 숲을 이루게 될 것입니다.
서경배 아모레퍼시픽그룹 회장이 사재 3000억원을 출연하여 '서경배 과학재단'을 설립하여 2016년 7월11일 창립총회를 열었습니다. 이 재단은 초기초과학 연구의 중요성과 장기지속적 지원하기로하고 매년 5명의 신진과학자를 선발해서 5년간 1인당 3억-5억 우ㅏᅟᅥᆫ씩 연구비를 지원하기로 하였습니다. 지난 2018년 9월 13일 서울시 용산구 아모레퍼시픽 본사에서 '2018년 서경배과학재단 신진과학자 증서 수여식'을 가졌습니다. 여기서 수여받은 다섯 신진 관학자로, 김진홍교수(서울대 생명과학과)로 그는 '근골격계 퇴행성 재생치료 기전 규명' 과제를 제안하였습니다. 해당 연구는 근골격계 퇴행성 질환의 재생 기전에 획기적으로 새롭게 접근하려는 시도로, 고령화 사회에서 주목받는 재생 치료 분야에 기여할 것이라고 평가받았습니다. 박현우교수(연세대 생화학과)는 '세포탈부착성 재프로그래밍 연구' 를 통해 암치료에 활용하는 이 연구는 세계적으로 혁신적이고 독보적인 분야로 알려졌습니다. 우재성교수(고려대 생명과학부)는 '간극연접채널의 구조와 메커니즘 연구'를 주제로 세포 간 커뮤니케이션의 메커니즘을 이해하려는 연구를 제안하였습니다. 정인경교수(카이스트 생명과학과)는 삼차원 게놈 구조 변화의 원리를 규명하고 이를 통해 유전자의 발현 조절 기전을 밝히는 선도적인 연구를 제안하였습니다. 주영석교수(카이스트 의과학대학원)는 '암세포에서 복잡 유전체 구조 변이의 발생 기전 및 기능적 영향'을 주제로, 암세포에서 유전체의 구조 변이가 암 유전체 발현에 미치는 영향 연구를 제안하였습니다. 앞으로 세계적인 연구가 발표되어 어쩌면 노벨상을 받을 과학자가 배출될 것이라는 기대를 가지게 되었습니다.
바로 이 선정기사가 매일경제 신문에 소개되었는데 이 때에 서경배 이사장이 “석과불이”라는 말을 하였습니다. "인류 삶의 질을 높이는 데 중요한 토대가 되어줄 생명과학 기술 발전을 위해 앞으로도 석과불식(碩果不食)의 마음으로 신진 과학자들의 연구 활동을 전폭 지원하겠다"는 뜻을 밝혔던 것입니다. 얼마나 자랑스런 마음입니까? 자기만의 욕심을 버리고 미래를 위해 모든 인류의 행복을 위해 자기에게 주어진 복을 나누어 주겠다는 마음은 매우 귀하고 아름답다고 하겠습니다. 아모레회사는 화장품회사로 돈을 많이 벌고 있는데 대표적인 브랜드로 설화수, 헤라, 바이탈뷰티, 프리메라 등이 있습니다. 특히 중국인들이 난투극을 벌리며 서로 살려고 하는 설화수는 ‘눈 속에 피어나는 매화, 그 절정의 아름다움을 품다’라는 광고처럼 서정배회장의 석과불식의 정신은 요즈음 같은 대 재벌들의 폭식(暴食)으로 어지러운 우리나라 경제계에 설화수 향기와 같다고 하겠습니다.
인간 세대를 보면 한 세대는 가고 사라지지만 다가오는 새 세대가 있습니다. 우리의 전 세대 부모님들은 일제 강점기의 어렵고 힘든 세월을 견디시면서 자식들을 키워 오늘 우리 어른 세대를 이루어 주셨습니다. 오늘의 노인들은 6.25전쟁후 세계에서 가장 가난한 시대 국민소득(GNP) 100달러였습니다.(1953년 67달라. 1954년 88달러, 1955년95달러 1956년 100달러) 1961년 1,000달러, 1974년 2,000달러, 1983년 11,432달러, 1994년 21,459달러를 거쳐서 오늘 3만불 시대에 오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비약적으로 발전하는 우리나라 경제 부흥의 시대의 밑거름이 된 사람들이 오늘의 노인들입니다. 이제 우리나라는 국민소득수준으로 세계 7위 국가가 되었습니다. 아직 우리나라는 더 발전하고 부흥되어야 할 것입니다. 아마도 30년 후에는 우리나라가 세계 3대 부강국가가 될 것입니다. 이것은 세계 경제학자들의 예측한 발표입니다. 그러면 누가 우리나라를 세계일등 국가를 만들어 갈 것입니까? 적어도 현 40대 이후들은 아닙니다. 이제 우리 40대 이후의 사람들에게 큰 숙제는 더욱 발전하기 위해 가장 필요한 일은 오늘의 우리나라를 우리 다음세대들에게 맡기는 일입니다. 우리 다음세대들이 우리나라를 번성하게 하고 통일시키고 평화롭고 강성한 경제대국을 만들어 가야 할 것입니다. 만일 우리 다음세대들이 자칫 잘못된 길을 간다면 다시 우리나라는 낙동강 오리알처럼 떨어져 가난한 나라가 될 것입니다. 엄청난 환난과 곤고가 우리나라에 북풍한설처럼 몰아쳐 올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런 일이 절대로 있어서는 안 됩니다. 분명한 것은 지금 우리 다음세대들이 정신을 바짝 차려야할 세대입니다.
앞서 소개한 바대로 1974년도 우리나라 국민소득이 2000달러 이였는데 10년 후 일만 달러가 넘었고 다시 10년 후 2만 달러도 넘었습니다. 당시 우리나라 산업이 비약적으로 발전할 수 있었던 이유는 열악한 노동환경 속에 열심히 일한 오늘의 노인들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또한 정치 경제 사회 각 분야에서 우리도 할 수 있다 하면 된다는 정신이 팽배하였었던 것입니다. 우리도 잘 살수 있다는 희망과 적극적 긍정적 자세로 열심히 일을 하였습니다. 그러면 이 같은 희망과 적극적이고 긍정적인 생각을 어떻게 가지게 되었는가? 바로 교회가 가르친 믿음이었던 것입니다. 기독교의 할 수 있다는 신앙이 이 백성들의 가슴에 녹아들었던 것입니다. 그 당시 잘 부르던 복음성가가 있지요? “할 수 있다 하신 이는 나의 능력 주 하나님. 의심말라하시고 물결 위를 걸으라하시네. 할 수 있다 하신 주 할 수 있다 하신 주. 믿음만이 믿음만이 능력이라 하시네. 믿음만이 믿음만이 능력이라 하시네.”
빌립보서 4:13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 그래서 80년대 자주 부르던 복음성가가 또 있지요
“내게 능력 주시는 자안에서 내가모든 것을 할 수 있네. 어떤 형편과 환경 속에서 내가 만족의 비결을 배웠노라. 능력의 주 예수 내 맘에 계시네, 살아계신 주 예수 내 맘에 계시네. 어떤 형편과 환경 속에서 내가 만족의 비결을 배웠노라. 내게 능력 주시는 자안에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네.”
우리는 할 수 있다는 이 적극적 신앙이 기독교인들은 물론이요 비 신앙인까지 함께 힘을 모아 나가니 마침내 하나님의 축복으로 세계에서 가장 가난한 나라에서 이제는 세계 10위권 안에 들어오는 선진 국가를 이룰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 할 수 있다는 적극적 신앙으로 열심히 일하였던 세대들이 나이가 늙고 허약해지면서 뒷방으로 나 앉게 되었습니다. 장강의 앞 강물은 뒤 미쳐 밀려오는 물에 물러나기 마련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 적극적이고 긍정적인 생각과 행동마저 밀려나고 사라져가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나라 경제가 이처럼 전에처럼 발전하지 못하고 지지부진한 이유는 무엇인가요? 1994년도 국민소득이 21,459달러였는데 오늘에 겨우 3만 달러를 넘게 되었습니다. 1994년 이전에 10년 만에 1만 달러에서 2만 달러가 되었는데 1994년 이후 25년이 지난 오늘에 겨우 3만 달러에 턱걸이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나라에 오랜 잘못된 관습이 하나있습니다. 지금부터 1,000년 전 고려시대 청자는 세계적인 유물입니다. 그 고려청자를 오늘 현대기술로도 그대로 만들어내지 못하고 있습니다. 겨우 흉내만 낼 정도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우리나라의 예날 잘못된 신분제도가 있었습니다. 士農工商으로 양반들은 들어앉아 책을 읽고 정치를 하며, 일반 평민들은 농사를 지었습니다, 그러나 천민들 상놈들은 물건을 만드는 장인이거나, 물건을 팔러 다니는 장돌뱅이라고 신분이 아주 낮아 천대시 여겼던 것입니다. 그래서 장인이거나 상인들은 자식들을 자기들처럼 천대 받는 신분으로 살아가지 않기 위해 그들의 기술이나 상술을 대를 이어 전수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니 고려청자 기술이 대가 끊겨 버렸고 상공업이 발전하지 못하였던 것입니다. 오늘날 일본이 세계에 큰 소리 치는 것은 1867년 이후 명치유신이라는 혁신을 일으켜 상공업을 우리나라보다 일찍 발전시켰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일본에는 3대 5대 조상의 직업을 이어받은 직업들이 많습니다. 심지어 동경대학을 졸업한 사람이 길거리 포장마차에서 우동장사를 하고 있습니다. 그는 지금 5대째 포장마차 우동을 팔고 있다고 하며 자부심이 대단하였습니다. 그런데 우리나라에서는 대를 이어 발전하여 온 기업이 많지 않고 겨우 재벌회사들이 탐욕에 눈이 어두워 2세 3세에게 사업을 물려주지만 말썽만 일으키고 있습니다. 1952년 10월 영국 런던타임스 사설에서 '한국에서 민주주의를 기대하는 것은 쓰레기통에서 장미꽃이 피기를 열망하는 것과 같다'고 썼습니다. 또 1955년 10월 전후(戰後) 한국을 돕기 위해 방한(訪韓)한 ‘유엔한국위원회’(UNKRA)의 인도 대표 메논(Menon)은 “한국에서 경제 재건을 기대하는 것은 쓰레기통에서 장미꽃 피기를 바라는 것과 같다.”고 말하였습니다. 그런 50년 만에 쓰레기통에서 장미꽃이 만발하게 피어났습니다. 이제는 세계가 한국을 배우자고 한국으로 대표들을 보내고 학생들을 보내고 있습니다. 우리나라 반대쪽에 있는 모록코라는 나라의 한 여학생이 모록코에서 가장 유명한 의학대학을 입학하였는데 포기하고 홀로 한국으로 날아와 서울대학교에서 국제정치학을 공부하고 있습니다. 지금은 세계 어느 나라가던지 대한민국을 자랑할 수 있습니다. 세계 사람들이 한국에서 배우려고 하는 것은 무엇보다 할 수 있다하는 정신을 배우려고 젊은이들이 몰려오고 있습니다. 지금 박항서 축구감독이 베트남축구를 크게 발전시켜 베트남 사람들에게 칭송을 받고 있습니다. 박항서 감독이 베트남젊은이들에게 심어준 정신은 ‘우리도 잘 할 수 있다’ ‘우리도 세계적인 축국선수가 될 수 있다’는 자신감을 불어 넣어 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제 우리 기성세대들은 오늘의 이 대한민국을 우리 다음세대들에게도 물려주어 더욱 발전시키고 더욱 잘사는 나라가 되도록 말해주어야 합니다. 그런데 요즈음 다음세대들이 부 모대, 할아버지 할머니가 살아온 그 정신을 우리는 잘 할 수 있다는 믿음을 과연 물려받고 있는가? 하는 의심을 가지게 됩니다. 장미꽃다발을 다시 쓰레기통으로 던져버리지 않기 위해 우리의 다음세대들은 오늘의 기성세대들 보다 더 열심히 더 힘차게 도약하지 않으면 안 되는 일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우리 다음세대들이 주인공이 되어 이 나라를 이끌어 갈 30년 후 세계는 엄청난 속도로 발전하기 때문입니다. 중국이 미국을 따라 마실지 모릅니다. 달에 사람들이 가서 살고 화성에 지구기지국을 세우게 될지도 모릅니다. 우리의 50년 전보다 50년 후 과학문명은 가히 기적같이 발전할 것입니다. 로봇트가 지금 핸드폰이나 세탁기 청소기처럼 가정의 필수품이 될 것입니다. 변호사들이 길거리 다니며 변호합니다하고 소리칠 것이고 의사들이 병고칩니다고 길거리에서 홍보할 것입니다. 중국경제가 미국을 따라 마실지도 모릅니다. 남북이 통일되어 우리의 증손자 고손자들이 백두산으로 수학여행을 가게 될 것입니다. 우리나라 경제는 세계 3위로 잘사는 나라가 될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누가 그렇게 우리나라를 잘 사는 나라로 만들 것이고 누가 그 혜택을 누리며 잘 살게 될 것입니까? 우리의 다음세대들입니다. 그러나 현재 우리 다음세대들이 그런 잘사는 나라를 세워나갈 수 있을 것인가? 의심이 드는 것입니다. 물론 일부입니다만, 아니 일부를 제외한 많은 후세들이 방에 콕 박혀 컴퓨터 게임으로 날밤을 세우는 그들에게 기대할 수 수 있을까 근심하게 됩니다. 온갖 세속의 타락한 문화에 빠져 사는 일부 우리 다음세대들에게 무엇을 기대할 수 있을까 염려하게 됩니다. 그동안 우리 노인들 그리고 기성세대들이 열심히 노력하고 일하여 나라를 일으키고 가정을 세웠습니다. 그러면 우리 다음세대들은 이 시대 보다 더 열심히 노력하고, 더욱 적극적이고, 더더욱 긍정적인 믿음으로 일하지 않으면 결코 이미 이룩한 이 나라를 더 이상 발전시킬 수 없는 것입니다.
이 시대와 나라를 바로 세워나갈 주춧돌의 역할을 교회가 해야 하는데 그렇지 못하고 있다는데 한국교회의 기도의 제목입니다. 평안교회 안도익 목사의 지적한 바에 의하면, 한국교회는 2000년대에 들어와서 정체기를 맞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2015년이 넘어서면서 본격적인 침체기를 맞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런 원인보다 더 심각하고 두려운 것은 따로 있습니다. 바로 우리의 다음세대 문제입니다. 사실 우리나라의 출산율저하는 세계 최고의 수준입니다. 우리나라 출생아수 지표를 보면 실감할 수 있습니다. 1970년 한 해 동안 태어난 출생아가 100만 명이었습니다. 그러던 것이 2000년에 55만 명으로 줄었습니다. 그리고 2015년에 40만을 기록한 뒤로 지금은 30만대로 주저앉았습니다. 그러니까 50년 만에 1/3로 줄어든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나라의 미래를 어둡게 하는 결정적인 요소입니다. 인구가 감소하게 되고, 노동력이 저하되어 국력이 쇠퇴하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교회학교학생수를 감소시키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해왔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걱정하는 것은 이런 출산율저하 속도보다 교회학교 학생 수의 감소속도가 더 빠르다는 점입니다. 2007년에서 2016년까지 10년 동안 인구추세 변화를 통해서 분명하게 확인할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이 기간 동안 초등학생수의 감소를 살펴보면 30.2%입니다. 그런데 이 기간 동안 교회 출석하는 초등학생 수의 감소는 42.3%나 됩니다. 그러니까 초등학교의 학생수감소보다 교회의 어린이부 학생수감소가 10.2%나 더 크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한국교회의 미래를 어둡게 보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아도 한국교회가 침체를 겪고 있는데, 다음세대의 문제는 설상가상으로 한국교회의 쇠퇴를 가속시키고 있기 때문입니다.
한국교회의 다음세대 문제를 조금 더 자세히 살펴보겠습니다. 우선 과거와 달리 믿지 않는 가정의 아이들에 대한 전도가 잘 안 됩니다. 10년 전까지만 해도 교회학교 내에 불신 가정의 학생들이 25%정도는 됐습니다. 그러나 현재는 10%이내로 줄었습니다. 불신 가정의 부모들이 자녀들을 교회에 보내지 않기 때문입니다. 다음으로 믿는 가정의 아이들 중에도 교회출석하지 않는 비율이 점점 늘어가고 있습니다. 초등학교 고학년부터 눈이 띠게 늘어나기 시작합니다. 청소년시기에 접어들면서는 심각한 수준으로 늘어납니다. 그리고 청년이 되면 이제 교회출석하지 않는 청년들이 훨씬 더 많아집니다.
최근의 한 통계를 말씀 드려보겠습니다. 청소년들 가운데 자기가 기독교인이라고 응답한 사람이 20%정도 됐습니다. 대부분 모태신앙이거나 믿음의 가정의 청소년들일 것입니다. 그런데 현재 교회 다니느냐 그리고 예수 믿느냐고 물었을 때 그렇다고 답한 사람이 4%정도에 불과했습니다. 그러니까 믿음의 가정의 청소년들 가운데서도 교회 다니고 예수 믿는다고 답한 청소년들이 1/5정도 밖에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오늘의 한국교회 문제들 가운데 가장 심각한 것이 바로 다음세대문제입니다. 다음세대들이 교회를 등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중에 가장 심각한 것은 믿음의 가정의 다음세대가 제대로 신앙을 이어가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교회의 무한 책임이 있습니다. 70-80년대 할 수 있다 해보자라는 믿음이 어느덧 사라지고 또한 교회 내 어린이 청소년 청년들도 사라져가고 있습니다. 교회 안에 남아있는 다음세대들 중 CCM송에 심취한 듯 부르지만, 과연 그들에게 윗 세대들의 뜨거운 믿음을 찾아보기 어렵다고 하겠습니다. 교회를 통해 시대의 정신이 이어지지 못함으로 교회는 점점 그 힘을 잃어버리고 사회에 좋지 않은 소문들만 전해지고 있습니다.
여기에는 기독교 부모들의 책임도 피할 수 없습니다. 다음세대에 믿음을 물려주지 못하고 방관하거나 믿음의 본이 되지 못함으로 점점 다음세대에게서 믿는 자들을 보겠는가 찾아보기 어려워져 가고 있습니다. 이것은 다음세대에 희망이 없다는 것을 말합니다. 다음세대들이 살아갈 시대, 나라가 크게 환난을 만나게 될 것이고 그들에게 엄청난 고난과 역경이 꼬리를 물고 일어나게 될 것이고, 그것을 헤쳐 나갈 힘이 없어 예루살렘성 무너지듯 무너져 갈 것을 말합니다. 우리의 사랑하는 다음세대 후손들이 죄 가운데 방황하며 멸망의 길을 가게 될 것을 말합니다. 통일의 대한민국은 엄청난 분열과 다툼의 지옥이 될 것이라 말할 것입니다. 언제 이런 일이 일어날 것입니까? 얼마 후 일어날 우리 다음세대들의 시대에 일어 날 것입니다.
오직 이런 시대에 이길 자들은 구구일까요? 누구보다 적극적이고 긍정적인 생각으로 폭넓은 이해와 浩然之氣 신앙으로 다져진 지도력을 겸비한 사람일 것입니다. 우리의 다음세대들이 그들 시대에 패배자로 낙오자가 될 것인가 승리자로 성공자가 되어 사회를 정화시키고 가정을 바로 세우고 시대를 앞서갈 사람이 될 것인가? 이는 오늘 우리 기성세대들이 결정할 문제입니다. 무엇을 결정할 것입니까? 그리고 이일은 어렵고 가장 쉬운 일이기도 합니다. 우리 들이 지금 재물을 물려준다거나, 무슨 기술을 물려준다거나, 어떤 지식과 경험을 물려준다거나 하는 일은 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물려줄 수 있는 그리고 그들의 평생 승리자로 자신들의 시대를 살아갈 수 있게 하는 일은 다름이 아니라 석과불식 하나님의 축복을 물려주는 일입니다.
백 살이 넘어 눈도 어두워진 야곱이 아들 요셉과 손자 에브라임과 므낫세에 물려준 그 하나님의 축복을 물려주어야 합니다. 창세기 48:16에 무어라 말씀하였습니까? “나를 모든 환난에서 건지신 여호와의 사자께서 이 아이들에게 복을 주시오며 이들로 내 이름과 내 조상 아브라함과 이삭의 이름으로 칭하게 하시오며 이들이 세상에서 번식되게 하시기를 원하나이다.”라고 축복하였습니다.
이미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복을 주시기를, 창세기 17:8절 말씀에 그 땅을 아브라함과 그 후손에게 주실 것을 약속하십니다. “내가 너와 네 후손에게 너의 우거하는 이 땅 곧 가나안 일경으로 주어 영원한 기업이 되게 하고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리라.” 후손은 누구를 말합니까? 아직은 태어나지 않은 이삭과 손자 야곱과 증손자 12아들 이어 천대에까지 주시는 영원한 축복을 약속하신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충실히 아들 이삭에게 이 믿음의 축복을 물려주었습니다. 이 축복이 바로 석과불식입니다. 이삭은 하나님의 복을 백배로 받아 당대 최고의 부자가 되었습니다. 우리나라 조상들은 석과불식하지 아니하고 사색당파 싸움과 양반들의 수탈과 쌍놈들의 항쟁, 그리고 일본의 식민지와 6.25전쟁을, 이로인해 말할 수 없는 가난과 고초를 물려주었지만, 하나님은 오늘 우리 기성세대 특히 노년을 맞이한 성도들을 통해 하나님의 축복을 다음세대에 물려주시기를 하나님은 바라고 계십니다. 이삭은 자기가 아버지 아브라함이 석과불식으로 물려준 하나님의 축복을 아들 야곱에게 역식 석과불식 물려주었습니다. 창27:27이하에서 “내 아들의 향취는 여호와께서 복주신 밭의 향취로다. 하나님은 하늘의 이슬과 땅의 기름짐이며 풍성한 곡식과 포도주를 네게 주시기를 원하노라.”고 석과불식하니 야곱은 12아들을 낳고, 그 아들 중에 애급나라 총리대신까지 오르는 영화를 누리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제 야곱은 요셉과 두 손자들에게 석과불식 축복을 나누어 주고 있는 것입니다. 창 48:9 “요셉이 그 아버지에게 아뢰되 이는 하나님이 여기서 내게 주신 아들들이니이다. 아버지가 이르되, 그들을 데리고 내 앞으로 나아오라 내가 그들에게 축복하리라” 요셉은 애굽여인을 통하여 자식을 낳았습니다. 자식들은 애급에서 멀마든지 잘 살아갈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요셉은 자신의 자녀들이 하나님의 축복의 분깃과 상관없기를 원하지 않았습니다. 애급 왕실의 귀족이 되는 일보다 하나님의 축복의 자손이 되는 것을 더 중요하게 생각하였기 때문입니다. 높은 지위와 권세보다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이 더 중요했기 때문입니다. 자식들에게 명예와 권력과 부귀영화의 출세보다 중요했던 것은 하나님의 친 백성이 되어 하나님의 은혜와 축복을 받는 일이었음을 요셉은 체험을 통해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는 아버지의 석과불식 축복기도가 얼마나 중요한 것인가를 이미 맛보아 알고 있었던 것입니다.
바로 여기에 기독교 부모의 진정한 모습이 있습니다. 자녀를 위해 축복하는 아버지, 자녀의 장래를 위해 축복을 기원하는 어머니, 바로 이것이야말로 가장 다음세대를 사랑하는 부모입니다. 그래서 부모는 자녀에게 하나님의 소원을 전하는 자입니다. 또한 축복권은 하나님께서 부모에게 주신 의무요 권리입니다. 이처럼 아버지로부터 나누어 받은 석과불식의 축복은 이삭에게 그대로 이루어졌고, 야곱에게 그대로 전해 졌고, 요셉과 손자들에게 성취되었던 것입니다. 아버지의 손길을 통해 내려지는 축복은 그대로 성취되었던 것입니다.
야곱은 15절에서 “조부 아브라함과 아버지 이삭의 섬기던 하나님” 그리고 “나의 출생으로부터 지금까지 나를 기르신 하나님” 그 하나님이 16절에 “나를 모든 환난에서 건지신(학고엘 오티 미콜 라-모든 악에서부터 나를 구속하신)” 여호와 하나님이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그 하나님이 손자들에게 16절에서 “복을 주시오며(예바레크) 세상에서 번식하기를(웨이드구 레로구 뻬케레브 하아레즈-그 땅에서 많이 증가하기를)”라고 축복의 기도를 하였습니다.
이래서 이 하나님이 주시는 예바레크 복야말로 순례자의 길을 살았던 야곱에게 희망이었고 위로였습니다. 용기와 기쁨이었습니다. 낙심이 찾아올 때마다 야곱은 이 하나님을 바라보았습니다. 그의 생애는 한마디로 말해 비바람과 천둥이 내리치는 폭풍의 밤을 살아가야 했습니다. 그러나 여전히 그 모든 환난 가운데서도 하나님은 야곱과 함께 계셨습니다. 야곱은 절망이 찾아올 때마다 아버지 이삭이 나누어준 석과불식 예바레크 하나님을 기억했습니다. 좌절의 순간마다 아버지 이삭이 나누어 준 석과불식 예바레크 복의 하나님을 생각하며, 그는 외로움을 이겨냈고 시련을 참아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그를 버리지 않으셨고 그 약속을 성취해가도록 하셨습니다. 이제 야곱은 자신의 다음세대에 아버지 이삭이 나누어준 이 석과불식 예바레크 복의 하나님을 전해주고 싶었습니다. 그리고 우리도 우리의 다음세대들에게 내가 평생토록 믿어온 이 예바레크 복의 하나님, 나를 지으신 이가 하나님, 나를 부르신 이가 하나님, 나의 달려갈 길 다가도록 나의 마지막 호흡 다하도록 나로 그 십자가 품게하시니 나의 나된 것은 다 하나님의 은혜라 이 예바레크 복의 하나님을 우리의 다음세대들에게 석과불식 축복으로 전해 주어야 할 것입니다.
그래야 우리 다음세대들이 다음세대에 잘 살 것입니다. 승리할 것입니다. 행복할 것입니다. 우리 다음세대들을 불행하게 살게 하실 것입니까? 그들이 실패하여 불행하게 살기를 원하십니까? 우리 다음세대들에게 나누어 줄 나의 믿음 이것이 바로 석과불식입니다. 나에게 주신 하나님의 축복 이것이 석과불식입니다. 나에게 베풀어주신 하나님의 은혜 이것이 석과불식입니다. 이는 강권해서라도 나누어 주어야 합니다. 그들의 다음세대의 주인공이 되기 위해서 분명히 그들의 영혼에 심어 주어야 합니다.
새해들어와 여러분은 하나님의 이름으로 자녀들에게 또는 손주들에게 축복 기도를 해주었습니까? 야곱의 축복은 그대로 성취되었습니다. 우리말에도 “말이 씨가 된다.”고 합니다. 하물며 하나님의 거룩하신 이름으로 구한 축복이 어찌 전달되지 않겠습니까? 가나안 정복 초기에 요셉의 자손 에브라임과 므낫세 지파가 차지한 땅은 나머지 지파의 거의 절반에 해당되었습니다. 결과적으로 축복은 다음 세대에 영향을 미칩니다. 이 축복을 통해 하나님의 약속이 과거에서 현재로, 현재에서 미래로 이어지고 있음을 봅니다.
부모가 할 수 있는 최고의 일은 자녀들을 축복하는 일입니다. 바로 거기에 부모의 진정한 자식 사랑이 있습니다. 어느 개척교회 목사님의 일곱 살 둘째 아들의 생일을 맞이했습니다. 갈비를 먹고 싶다고 해서 식당에 가서 갈비탕을 먹게 되었습니다. 큰 아들이 동생 생일이라며 장난감을 준비했습니다. 동생은 좋아가지고 입을 다물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막상 그 자리에서 아버지는 준비한 게 없었습니다. 아무리 생각해봐도 줄게 없습니다. 순간 가장 중요한 한 가지가 생각났습니다. 그래서 남이 보던 말 던 아들의 머리에 손을 얹고 아버지가 줄 수 있는 가장 큰 선물, ‘축복기도’를 했습니다. “오, 주 하나님, 하나님이 7년 전에 세상에 보내준 우리 석이에게 은혜를 베푸시고, 평강으로 지키시며, 지혜와 총명으로 채우시고, 장차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사람이 되게 하시고 모든 사람에게 도움을 주며 세상 사람들에게 기쁨을 주는 사람이 되게 하여 주옵소서. 날마다 하나님이 이 아들에게 복을 주시어 복된 날들을 살아가도록 축복하시기를 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복하며 기도드립니다. 아멘.”보내게 도와주시옵소서.” 그 후 이 둘째 이들이 자라 훌륭한 의사가 되었는데 이 아들이 자신의 평생 받은 가장 큰 선물은 일곱 살 때 아버지가 기도해 주신 그 축복기도였다고 간증하였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평생 아버지의 축보기도가 반드시 이루어 질 것이라 믿고 열심히 살아왔다고 고백하였습니다. 여러분, 이렇게 우리 자녀 손들을 축복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하나님이 기뻐하시고 자녀 손들 평생을 책임져 주실 것이니 이보다 좋은 일이 세상에 또 어디 있겠습니까?
18세기의 패트릭 헨리(Patrick Henry)가 자기 가족에게 유산을 물려주는 대목에서 이렇게 말하는 대목이 있습니다. “나는 이제 내 모든 재산을 내 가족에게 넘겨주었습니다. 가족에게 한 가지 더 주고 싶은 게 있는데 그것은 기독교신앙입니다. 가족이 기독교신앙을 유산으로 받는다면 내가 그들에게 1실링을 주지 않는다 하더라도 그들은 부유해질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이 그 신앙을 유산으로 받지 않는다면 내가 그들에게 이 세상 전부를 준다고 하더라도 그들은 가난해질 것입니다.” 여러분, 중요한 것은 신앙유산입니다. 석과불식입니다.
이제 2019년도 한 달이 지나가고 있습니다. 그리고 구정 설 명절이 다가오고 있습니다. 이번 명절에는 여러분들의 자녀 손들에게 여러분에게 주신 하나님의 축복 석과불식의 복을 나누어주시기를 바랍니다. 우리의 다음세대들이 성공할 것이냐? 실패할 것이냐? 행복할 것이냐? 불행하게 살아갈 것이냐? 우리 부모들이 심어주는 하나님을 향한 믿음, 은혜를 갈구하는 기도, 축복을 바라는 소망의 석과불식에 있음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우리 라온코이노니아는 석과불식의 신앙공동체입니다. 나의 믿음주신 하나님께 감사하며 이 믿음을 다음세대에 전해주는 우리들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하나님의 은혜와 축복이 우리들의 가정과 자녀 손들에게 함께 하시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