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9월 16일 주일아침 예배 눅 19:1-10 삭개오의 우나 푸르티바 라그리마
흔히 가을은 독서의 계절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음악을 좋아하는 사람들에게는 가을은 오페라의 계절이라고 말합니다. 모차르트의 피가로의 결혼, 베르디의 가면무도회, 라 트라비아타, 푸치니의 라보엠, 우리나라 작곡가인 현제명의 오페라 춘향전 등 다양한 다채로운 오페라들이 여기저기 공연장에서 공연을 합니다. 그러나 요즈음 같이 세상이 어수선한 이 가을에는 오페라 부파(오페라 희극-비극은 세리아)에 속한 오페라로, 도니제티(Gaetano Donizetti)가 36세 때 작곡한 2막짜리 ‘사랑의 묘약’이 즐겁게 감상할 오페라입니다.
사랑의 묘약의 이야기를 간단히 소개 하겠습니다. 네모리노라는 가난하지만 순진한 농부가마을에 애교가 살살 넘치는 아가씨 아디나를 사랑하고 있습니다. 한편 이웃에 살고 있는 군 하사관인 벨코레도 아디나를 사랑합니다. 이런 삼각관계 연애사가 마을의 화제거리가 되었습니다. 그 마을에 떠돌이 돌파리 약장수 둘카마리가 나타납니다. 이 약장수는 ‘사랑의 묘약’이라는 약을 팔고 있는데 사실이 이약은 싸구려 포도주인 것입니다. 그러나 어벙벙한 네모리노는 아디나의 사랑을 얻어 보겠다고 이 사랑의 묘약을 사서 마십니다. 싸구려 포도주라 매우 독해 금파 취해 버립니다. 그리고 마을의 여인들이 모두 아디나 같이 보여 이 여자 저 여자 쫒아 다닙니다. 이런 모습을 본 아디나는 네모리노에게 매우 실망합니다. 벨코레상사는 이때다 싶어 아디나에게 결혼청원을 합니다. 네모리노에게 실망한 아디나는 그 청원을 받아들입니다. 이 소식을 들은 네모리노는 약장수에게 엉터리 약을 판다고 항의를 하니 한 병 가지고 안되니 한 병 더 마셔야 한다고 유혹합니다. 그래서 한 병 더 마시니 엄청 취해 화김에 군대 입대신청을 합니다. 마침 네모리노의 부자 숙부가 죽어 그의 유산을 상속받게 되었다는 소식이 전해집니다. 그러나 술 취한 네모리노는 이런 사실을 전혀 모릅니다. 많은 여자들이 부자 상속인이 된 네모리노에게 추파를 던지자 아디나는 자기가 네모리노를 사랑하고 있음을 알고 홀로 눈물을 흘립니다. 이 모습을 본 네모리노는 그 유명한 노래인 “우나 푸르티바 라그리마-남몰래 흐르는 눈물”이란 노래를 부릅니다. 아디나는 벨코레상사와 전격 결혼식을 올립니다. 결혼식날 네모리노를 사랑하고있으니 이 결혼식을 할 수 없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네모리노와 결혼을 합니다. 벨코레상사는 쿨하게 좋아 세상에 여자는 많이 있다고 말합니다. 사랑의 묘약이 효과가 있다는 소문이 나자 돌팔이 의사 둘카마리는 대박을 치고 마을을 떠납니다.
‘남몰래 흐르는 눈물’ 이 노래는 파바로티란 성악가가 불러 세계적인 선풍을 가져왔습니다. 저도 학생 때 이 노래를 무척 좋아하여 곧 잘 흥얼거리곤 하였습니다.
이 노래의 처음 시작은 이런 가사입니다.
Una furtiva lagrima 남몰래 흐르는 눈물이
negli occhi suoi spunto... 그녀의 두 눈에서 흘렀소...
quelle festose giovani 유쾌한 젊은이들이
invidiar sembro... 질투하는 듯해요...
Che piu cercando io vo? 내가 더 이상 무엇을 바라겠어
예수님 시대 남 몰래 눈물을 흘리던 한 사내가 있었습니다. 그의 이름은 삭개오입니다. 아마도 복음서에서 가장 흥미로운 사람 중 한 사람이 삭개오입니다. 삭개오에 대한 이야기는 아마 기독교인치고 모르는 사람이 없을 것입니다. 삭개오는 어떤 사람입니까?
삭개오는 여리고의 세리의 장이고 부자이며, 키가 작은 사람입니다. 어느 날 여리고에 예수님이 지나가신다는 사람들의 떠드는 소리를 듣고 돌무화과 나무위로 올라가 지나가시는 예수님을 바라보았습니다. 예수님이 나무위에 있는 삭개오를 보고 오늘 삭개오의 집에서 묵겠다고 말씀하십니다. 삭개오는 너무나 기뻐 예수님을 모시고 성대한 잔치를 벌렸습니다. 사람들은 예수님이 죄인의 집에 들어갔다고 수군덕거리며 비난하였습니다. 예수님은 병자에게 의원이 필요한 것처럼 나는 죄인을 구하러 왔다는 말씀을 하십니다. 다음날 아침 예수님의 가르침을 받았는지 자기의 죄를 회개하고 “주님, 제 재산의 절반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주겠습니다. 그리고 제가 남의 것을 속여 뺏은 것이 있으면 4배로 갚겠습니다.” 라는 말을 합니다. 예수님께서 “오늘 이 집에 구원이 찾아왔다. 이 사람도 아브라함의 자손이기 때문이다. 나는 잃어버린 사람들을 찾아 구원하러 왔다.”고 말씀하십니다. 아마도 그 후 삭개오는 자기의 직업을 버리고 예수님의 제자가 되었다고 합니다. 교회역사에 알려지기는 초대교회의 12제자가운데 가룟유다 대신 맛디아란 사람이 제자로 보충이 되었는데 이 마디아가 삭개오의 개명한 이름이라고 전해지고 있습니다. 이 같은 이야기가 일반적으로 삭개오에 대한 소개입니다. 그런데 오늘 설교 제목이 삭개오의 우나 푸르티바 라그리마-남몰래 흐르는 눈물입니다, 이제 좀 더 삭개오의 마음 속으로 한걸음 깊이 들어가려고 합니다.
삭개오는 세리였고, 그것도 세리장으로 여리고성의 세무서장이라 하겠습니다. 여리고는 예루살렘에 가려는 사람들이 반드시 거쳐야할 교통의 요충지입니다 북쪽 그리스나 흑해연안지방에서 오는 사람들, 남쪽 이집트 지방에서 오는 사람들 또 동쪽 아라비아지방에서 오는 사람들이 반드시 지나는 교통의 중심지였습니다. 많은 외국 여행객들과 상인들이 여리고에서 머물게 됩니다. 그것은 여리고에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려면 800미터의 산을 오르듯 힘들게 올라가야 하므로 오후에 올라가다가 자칫 늦어 예루살렘 성문이 닫혀버리면 들어갈 수 없게 됩니다. 그래서 여행객들은 대부분 오전에 올라가는 사람들이 많게 됩니다. 그래서 여리고에 하루이상 머물러야 합니다. 그러다 보니 여행객들로 인하여 상거래가 활발하게 이루어지고, 특히 여리고는 고급향료(발삼향)의 주산지였으며, '종려의 성'이라고 할 만큼 대추야자 열매의 생산지이기도 하였습니다. 당시 로마는 이렇게 풍성한 물질적인 요소를 지닌 여리고성을 유대의 과세 중심지로 삼았던 것입니다. 따라서 세리들은 로마의 권세를 등에 업고 온갖 부정한 수법을 통하여 백성들의 고혈을 짜내 자신의 탐욕을 채우고 있었던 것입니다. (눅3:12-14) 그러므로 당시 세리의 직책을 맡아 로마 정부의 세무 하청업에 종사하는 사람들은 동족들로부터 매국노, 배교자, 반역자로 낙인찍혀 죄인의 대명사로 여기게끔 되었던 것입니다. 세리들은 일정한 급료를 받지 않습니다. 다만 걷어들인 세금액중 로마에서 활당한 일정액을 상납하고 나머지는 모두 세리들이 착복합니다. 그러므로 더 많은 착복을 위해 더 많은 세금을 걷어 들이니 백성들의 원성과 비난을 바는 사람들이 바로 세리입니다. 그중에 세라들의 우두머리가 삭개오니 얼마나 많은 욕바가지를 먹었겠습니까? 그런 세리장과 예수님이 함께 식사를 한다는 것은 대통령이 부정축재자와 식사를 한다는 격이니 예수님도 사람들에게 비난받지 않겠습니까? (눅5:30-32)
우리는 삭개오의 인생이 어떤 이유로 하나님과 동족과 그리고 자기 양심을 외면하고, 불의한 세리의 길로 운명을 선택했는지 알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확실한 것은 망국의 동포들과 고난의 삶을 같이 하기보다는 불의와 타협해서라도 세상의 행복과 영화를 누려 보겠다는 욕망이 그에게 있었습니다. 삭개오라는 이름은 당시 바리새교인들이 흔히 사용하는 것으로서 '깨끗하다'는 의미입니다. 그러나 그는 그 이름과는 정반대의 부정한 욕심으로 자신의 인격과 운명을 더럽혔습니다. 오늘날도 고상한 사회적 직함과는 달리 수많은 자기 이웃들의 땀과 눈물로 사욕을 채우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누가는 삭개오가 부자라고 기록했습니다. 이는 모두 '뇌물을 사랑하며 사례물을 구하며'(사1:23), 또 '가련한 자의 권리를 박탈하며, 과부에게 토색하고, 고아의 것을 약탈(사10:2)하여 얻은 것일 것입니다. 삭개오는 아마도 물질만 풍족하면 자신의 명예도 이웃의 사랑과 관심 도 모두 얻을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었는지도 모릅니다.
Tvn TV의 주말 9시 미스터션샤인이란 드라마가 요즈음 최고 인기를 얻고 있습니다. 그 드라마중 한 인물이 나옵니다. 이 사람은 함경도에서 가난한 소작농의 다섯째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위로 누나 둘, 아래로 동생 하나가 굶어 죽었습니다. 지주의 눈 밖에 나 소작 붙이던 손바닥만 한 땅도 빼앗긴 탓이었습니다. 이 사람은 부모에게 더 이상 희망이 없음을 깨달았습니다. 그는 어린 누이를 지주의 소실로 주고 받은 돈을 미국 선교사에게 갖다 바쳐 영어를 배우기 시작했습니다. 그는 머리가 좋았습니다. 영어를 알아듣고 제법 떠듬거리기까지 몇 해 안 걸렸습니다. 그 덕에 미국 선교사의 추천으로 신미년 미국 제독의 통변 자리까지 얻어냈습니다. 미군의 고래등 같은 함선에서 건너다 본 조선은 약한 나라였습니다. 앞으로의 대세는 일본이었습니다. 조선의 위기는 그에겐 기회였습니다. 그는 일본으로 건너갔습니다. 일본어는 영어보다 배우기가 훨씬 수월했습니다. 삼개국어에 능통한 그를 권세자들이 찾기 시작했습니다. 언어는 가난한 소작농의 아들에게 큰 광명을 안겨주었습니다. 일본인이 미국인이 조선인이 모두 그의 말 한마디 한마디에 귀를 기울였습니다. 그 순간 그는 깨달았습니다. 아무 것도 갖고 태어난 게 없다고 생각한 자신이 아주 커다란 것을 갖고 태어났다는 것을. 팔면 아주 큰돈이 될 거라는 것을. 그가 손에 쥐고 있는 건 다름 아닌, 조선(朝鮮)이었습니다. 그는 조선을 일본에게 팔아버릴 생각을 한 것입니다. 그래서 매국노가 되었습니다. 일본의 앞잡이 개노릇을 서슴치 않고 의병들을 잡아 죽였습니다. 심지오 고종임금님에게 막말을 퍼부어되며 곧 망한나라 왕이라고 비아냥을 하였습니다. 그러나 결국 그는 고애신이란 여인의 총에 맞아 죽습니다. 아무도 그의 시신을 거들떠보지 않았습니다, 가마니에 덮여 어디론가 버려집니다. 그의 이름은 이완익이란 사람입니다. 물론 극중의 가상인물이지만 일제 강점기 나라를 팔아먹고 동족을 억압하여 재산을 모은 친일파들이 엄청 많이 있었습니다.
삭개오가 그런 이완익 같은 사람 이였습니다. 삭개오는 아마도 물질만 풍족하면 자신의 명예도 이웃의 사랑과 관심 도 모두 얻을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었는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그의 물질 제일주의적 가치관은 잘못된 것이었습니다. 이웃들은 뒤에서 수근 거리며 그와 가까이 하는 것을 쥐벼룩 피하듯 피하였습니다. 당시 열심당이라는 유대의병들이 있었는데 그는 살해명단 1순위에 있었습니다. 언제 열심당원들에게 암살을 당할지 삭개오는 늘 주위를 살폈고 그 주변에는 돈으로 매수한 보디가드들이 그를 보호하였습니다.
그가 동족들의 비난을 받으면 받을수록 동족에 대한 증오감이 점점 깊어져 가장 악랄한 세리 중의 하나로 자기 자신을 키워갔습니다. 그에 대한 보상 심리로 더욱더 돈에 대한 집착은 심해져 갔습니다. 그도 아브라함의 자손이요 하나님의 선택 백성이였지만 지금은 하나님 없는 아니 하나님의 적대적인 사람을 살고 있는 것입니다. 아무도 자신을 인정해주지 않는 분위기 속에서 그는 점점 더 자신의 삶 속에 ‘하나님이 없음’을 실감해 가며 또 당연시 여겼습니다. 가족과의 관계 속에서, 친구들의 놀림 속에서, 자신을 바라보는 동포들의 눈길 속에서 점점 삭개오는 하나님이라는 존재를 잃어갔습니다. 그래서 그는 외로운 사람이 되었습니다. 아무도 그를 끼워주지 않는, 그가 좋은 옷입고 좋은 집에서 살고 거들먹거리며 길을 가더라도 사람들은 그를 업는 듯이 취급했습니다. 무슨 똥개 한마리 지나가는 취급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밤이면 벽을 바라보고 남몰래 흐르는 눈물을 소매끝으로 닦았습니다. 내가 잃게 살자고 그렇게 매국노소리를 들으며 악착같이 돈을 모았단 말인가? 자신의 인생에 깊은 회오의 눈물이 그의 뺨을 타고 흘러내리곤 한 날들이 몇 밤이었는지 헤아릴 수 없이 많았습니다. 그는 불행한 사람이었습니다. 불상한 죄인이었습니다. 아무도 그를 구원하려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이런 외로운 사나이 삭개오의 가슴을 흥분시키는 소문이 유대 땅에 퍼지기 시작합니다. 그것은 나사렛 출신 예수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그는 유대인은 물론 이방인들과도 잘 어울리며, 창녀와 세리들 그리고 죄인들까지 친구라 칭하며, 곳곳에서 기적을 행하며, 병든 자들 고쳐주며, 전하는 말씀도 힘이 있고, 모든 사람이 우러러보는 그야말로 이스라엘이 고대하고 고대하던 메시아라는 소문이었습니다. 더군다나 심지어 예수의 제자 중 한 명은 자신과도 같은 세리출신도 섞여있다고 합니다. 그런 소문을 접한 후 삭개오는 이전에는 느껴볼 수 없었던 흥분과 긴장으로 이전보다 더 많은 날을 뜬눈으로 지새우게 됩니다. 그가 들은 소식가운데 그를 놀라게 한 것은 그가 잘아는 가버나움의 세리 마테가 예수의 제자가 되었다는 소식입니다. 세리들 모임에 가끔 만났던 선배 세리였습니다. 그도 악랄한 소문을 들었던 세리였는데 어떻게 예수님의 제자가 디었단 말인가?
“사람들이 그렇게 비난하며 틈만 나면 죽일 것 같이 험악하게 달려들던 세리를 제자로 삼았다니 그 예수라는 사람은 도대체 어떤 사람인가? 그 사람 나도 보고싶다.” 라는 생각이 점점 삭개오의 머리에서 떠나질 않았습니다.
삭개오는 점점 예수라는 사람이 보고싶었습니다. 예수를 생각하면 할수록 예수에대한 마음이 사모하는 마음으로 바뀌어갔습니다. 그 동안 동족에게 놀림을 당하고 그러면 그는 앙갚음으로 동족을 괴롭히며 살았던 자신만의 고민이 눈물로 흘러내린 적이 어마인가 생각할수록 예수라는 분으로 인해 수 없는 밤을 지새우게 도었습니다.
‘그가 누구인가? 도대체 그가 누구인데 나를 이처럼 잠 못 이루게 하는 건가?’
삭개오가 예수라는 사람을 생각할수록 그동안 잊혀졌던 하나님을 생각하게 되고 그에게는 까마득히 잊혔던 사란들, 가족, 친구, 이웃, 그리고 민족 등과 같은 단어들이 새삼 그의 머릿속에 떠오르곤 하였습니다. 그런 어느날 드디어 예수라는 사람이 여리고를 지나가신다는 소식을 듣게 됩니다. 그것은 사람들이 와와하며 예수라는 이름을 불러되는 것을 듣고 알게 된 것이비낟. 더 이상 무엇을 지체할 것인가 그는 맨발로 길거리로 뛰쳐 나갔습니다. 그를 늘 호위하던 호위무사들도 없이 그는 마구 길을 달려 나갔습니다. 그러나 그는 키가 작았습니다. 그는 어릴 때부터 이웃 치구들에게 키가 작은 것에 놀림을 받았습니다. 난장이는 아니지만 사람들에게 난장이 취급을 받았습니다. 그는 어린시절 키가 작은 것에 대한 트라우마가 너무나 컷던 것입니다. 이런 자격지심이 사람의 마음을 병들게 하는 것입니다. 그래 장차 키 큰 너희들이 내 앞에 고개숙일 날이 올 것이다 이런 다짐으로 그는 더더욱 악랄해지기 시작하였던 것입니다. 이제 예수님을 만나려는 일념으로 뛰어 갔지만 사람들이 들러있어 도저히 예수님 얼굴을 볼 수 없었습니다. 사람들은 이내 자신을 발견하고 수군거리기 시작합니다. 삭개오는 군중의 동요를 금시 깨닫게 됩니다. 그리고 곧이어 쏟아질 자신에 대한 비난과 질시, 조롱 등을 떠올렸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조롱이 이내 성난 군중들의 폭력으로 자신을 위해할지도 모른다는 불안감 또한 엄습했을 것입니다.
“그래도 난 예수를 만나야겠다!” 어디 올라설 곳이 없나하고 둘러보니 거기 돌감남나무가 있었습니다. 그래 저곳에 올라가자
그가 팔을 걷어붙이고 나무를 타자 동시에 모여 있던 군중들은 웅성거립니다.
“아니 저거 삭개오 아냐? 저 도적놈이 여기는 왜 나타나 가지고 기웃거리지? 사람들이 많이 모여 있을 때 세금이라도 거두려고 그러나? 예수에게 여리고 입성세받으러 왔나? 아니 그런데 왜 나무에 올라가고 난리야…”
나무위로 올라가는 삭개오에게 군중들의 야유와 조롱이 쏟아졌습니다. 그렇게도 많은 사람들이 모여 있었지만 아무도 자신을 인간이라, 자신들과 같은 동포라, 친구라 여기지 않았습니다. 아무도 자신을 사람으로서 대접해주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러나 삭개오에게도 이번은 거의 마지막입니다. 밤마다 남몰래 눈물을 흘리며 기다려오던 예수가 아닌가? 정말 예수가 죄인들의 친구이며 세리마저 제자로 삼은 사람인가를 내가 직접 확인해볼 수 있는 마지막 기회라고 삭개오는 생각하고 나무위로 올라가니 사람들의 비난과 조롱에는 귀가 멀었고 오직 눈을 크게 떠 예수님을 바라보았습니다. 삭개오는 자신의 귀를 의심할 그런 말씀이 예수에게서부터 들려 왔습니다.
“삭개오 씨, 어서 내려오십시오. 오늘은 당신 집에서 하루 묶고 싶군요.”
차분한 예수의 한마디가 삭개오를 비롯한 당시 모여 있던 모든 사람들에게는 마치 천둥소리처럼 들렸을 것입니다.
“예수께서 삭개오의 집에?”
예수의 말씀을 들은 삭개오의 심장은 사정없이 쿵캉거렸습니다. 생전 처음 들어보는, 자신을 사람으로서, 이웃으로서, 친구로서, 가족으로서 인정해주는 말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예수는 계속해서 말씀하기를,
“이 사람 집에도 하나님의 구원이 임했습니다. 왜냐하면 삭개오 역시 아브라함의 백성이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예수님이 말씀하신 구원의 이미를 깨달아야 합니다.
구원은 잊었던 하나님을 다시 찾는 일입니다.
구원은 잊었던 이웃을 다시 만나는 일입니다.
하나님을 찾는 사람이 구원을 받은 사람입니다. 이웃을 만나는 사람이 구원 받은 사람입니다. 오늘날 교회다닌다는 사람들 중에 진정 하나님을 찾고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요? 왜냐하면 예수님 당시 바리새인 울법사들도 하나님을 믿는 다고 하였지만 찾지는 않았습니다. 그들은 강도 맞은 사람을 그냥 내버려 둔채 가버렸습니다. 예수님은 삭개오에게 잊었던 동족을 찾게 해주었습니다. 삭개오 역시 아브라함의 백성이라고 그래서 하나님이 선택하신 백성이라고 확신시켜 준 것입니다. 여러분은 누구입니까?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요 우리를 십자가의 보혈로 죄로부터 권하신 예수님의 제자들인 것입니다. 우리가 교회에 나와 예배드리는 일이 바로 우리가 하나님의 백성이기 때문에 예수님으로부터 구원받은 백성임을 확인하게하는 일인것입니다.
삭개오는 예수를 만나기 전까지는 아브라함의 자손이 아니었습니다. 왜냐하면 그는 친구도, 이웃도 없었기 때문입니다. 있었다면 오로지 그에게는 물질 즉 돈뿐이었습니다. 그러나 오늘 예수는 선포하십니다.
“삭개오 당신도 아브라함의 후손입니다. 잃어버린 친구와 이웃을 회복하십시오. 여기 당신의 가족이 있습니다.”
구원은 잃어버린 사람들 즉 버림받은 사람들에게 가족을 회복시키는 일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를 안다 하면서 여전히 혼자인 사람은 구원받은 사람이 아닙니다. 구원받은 이는 그의 가족을 찾은 사람입니다. 구원받은 사람은 그의 이웃을 회복한 사람입니다. 구원받은 사람은 가족과 이웃에 대한 책임을 느끼는 사람입니다. 우리라온코이노니아는 믿음안에 그리스도의 한 가족입니다.
Jtbc Tv프로그램 중에 ‘한끼줍쇼’라는 프로를 보셔습니까? 이경규와 강호동이 어는 동리를 찾아가 저녁 한 끼를 얻어먹는 프로그램입니다. 어는 집 초인종을 누르고 강호동이 하는 말이 함께 식사를 하면 식구라고 하지요 오늘저녁 저와 한 식구가 되 주시겠습니까? 하고 묻습니다. 그렇습니다. 한솥밥을 먹는 사람이 식구라 하듯이 하나님의 한 솥밥 마씀을 듣는 사람이 영적으로 한 식구 하나님이 아버지 되시는 믿음의 가족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로 우리 라온 코이노니아 우리는 하나님의 한 가족입니다. 어느 집은 대가족도 있지만 어느 집은 가족 수가 작은 소가족도 있습니다. 그러나 소가족이라도 우리는 아브라함의 믿음의 후손이요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의 피로 구원받은 하나님이 사랑하시는 천국가족임을 믿으시길 바랍니다.
다음날 아침 삭개오가 예수님에게 말합니다.
'주여 보시옵소서 내 소유의 절반을 가난한 자들에게 주겠사오며 만일 뉘 것을 토색한 일이 있으면 4배나 갚겠나이다'(8절)
여기서 삭개오의 예수님에 대한 호칭이 바꿔졌습니다. 예수님을 주여!라고 부른 것입니다. 이것이 구원받은 증표입니다. 구원받은 사람은 예수님을 자신의 구주로 못게 됩니다. 당시 사람들은 예수님을 랍비라고 불렀습니다. 이 말은 선생님이란 말입니다. 예수님을 선생님으로 부른 것도 세상적으로 매우 중요한 일이지만 주여라고 부른다는 것은 이미 예수님을 신적존재로 숭앙한다는 것을 말합니다. 우리가 기도할 때에 예수님을 주여라고 부릅니다. 그것은 예수님을 하나님으로 승격해서 부르는 일입니다. 그는 간밤에 예수님으로부터 어떤 진리의 말씀을 듣고 회개하였고 회심하여 새 사람이 된 것입니다. 새 사람된 삭개오에게 더 이상 욕심은 없습니다. 욕심은 죄있을 때의 모습입니다. 지금은 이전 것은 다 지나갔으니 물질의 욕심은 터럭만큼도 없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삭개오의 말은 올바른 회개가 아닙니다. 재산의 절반을 가난한 자들에게 나누어 줄 것과 토색한 것은 4배를 쳐서 보상하겠다고 한 것입니다. 참 통큰 회개를 하였다고 사람들은 이구동성 삭개오를 칭찬합니다. 그러나 삭개오가 ‘보시옵소서’ 마치 당당한기세로 한 이 말은 잘못된 회개입니다. 왜 잘못된 회개일까요?
삭개오의 재산은 다 어떻게 해서 생겨난 것입니까? 정당한 노력의 대가였습니까? 삭개오의 모든 재산은 모두 토색지하고 빼앗아 모은 재산입니다. 그러니 재산의 절반이 아니라 전부를 가난한자에게 나누어 주어야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탓하지 않으셨습니다. 왜 예수님은 삭개오에게 구원이 이르렀다고 하였을까요? 삭개오가 한말이 토색한 것의 4배를 갚겠다고 하였습니다. 재산의 절반은 가난한자에게 주고 나머지 반은 토색하였던 사람들에게 4배나 갚는데 다 써버린다는 말입니다. 그러면 삭개오에게 남는 재산은 아무것도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삭개오의 회개는 결코 틀리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자기 자신을 위하여 인간을 만드셨기 때문에 우리가 하나님 안에서 안식을 찾기전까지 우리 마음에 평안이 없다."--"God created man for Himself and our hearts are restless until we find rest in Him." 인간이 하나님을 떠나서는 그 어떤 곳에서도 참만족과 참기쁨을 누릴수 없습니다!
삭개오가 외로웠던 것은 궁극적으로 그가 하나님을 떠나 하나님 없이 살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과 상관없이 그저 돈 버는 일에만 몰두했을 때 그의 영혼은 점점 더 외로워져 갔던 것입니다. 삭막햐져가고 병들어가고 그의 심장을 마귀가 차지하고 있었습니다. 내 영혼아 네가 나와 무슨 상관이 있느냐, 그저 먹고 마시고, 부자 되는 일에만 관심 가지다 보니까 하나님은 물론이고 이웃과도 멀어지게 되었던 것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을 떠난 인생은 언제나 외로울 수밖에 없음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그러면서 남몰래 흘리는 눈물이 영혼을 적시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궁극적 목적이 되지 않는 인생은 제아무리 세상 적으로 큰 성공을 거둔다고 해도 삭개오의 눈물을 흘릴 수밖에 없습니다!
시각장애인 전도자 백사겸은 ‘조선의 삭개오’라고 불렸던 인물입니다. 1860년 평안남도 평원군에서 출생했는데 두 살 때 아버지를 여의고 아홉 살 때 눈병이 악화돼 시각장애인이 됐습니다. 설상가상으로 어머니마저 세상을 떠났습니다.
생계가 막막했던 그는 점쟁이가 됩니다. 뛰어난 화술로 점쟁이 세계에서 명성과 부를 얻었지만 돈을 벌면 벌수록 남을 속인다는 게 괴로웠습니다. 1897년 1월 김제옥이라는 전도자가 찾아와 그에게 전도소책자를 전했습니다. ‘인가귀도(引家歸道)’라는 책이었는데, 훗날 그는 “체면 때문에 받기는 했지만 독한 벌레가 손에 닿는 듯해 섬뜩했다”고 회고했습니다.
그날 밤 백사겸은 이상한 꿈을 꿉니다. 점치는 일도 예전 같지 않았습니다. 주변 도움으로 인가귀도를 읽다가 “잡신을 버리고 하나님을 구하라”는 부분에서 회심합니다. 그는 곧바로 23년 점쟁이 생활을 청산하고 온 가족과 함께 고양읍교회에서 세례를 받습니다. 사복음서를 암송하고 개성남부교회를 설립했던 백사겸은 40년간 전도자로 살다가 하나님의 부름을 받습니다. 아들 백남석은 미국 유학 후 연희전문학교 교수가 됐습니다.
아무리 재산이 많아도 아무리 권력이 크다 해도 아무리 지식이 높다해도 그는 밤에 남몰래 눈물을 흘릴 때가 있습니다. 삭개오의 눈물은 영혼이 흘리는 눈물입니다. 우리의 영혼을 슬프게 해서는 마음이 편안할 수 없고 육신이 건강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처음 삭개오는 외로운 눈물을 흘렸다면 이제는 예수님 만나 기쁨의 눈물을 흘리게 되었습니다. 전에는 우나 푸르티바 라그리마 이었지만 지금은 많은 사람들과 함께 구원의 기쁨을 나누게 되었습니다. 이제 믿음을 하나님을 만날 때 비로서 영혼은 눈물을 멈춤니다. 믿음 안에서 이웃을 만날 때 영혼은 즐거워합니다. 우리가 믿음의 공동체 안에 한 식구가 될 때 내 영혼은 노래를 부릅니다. 우리가 예배드리며 부르는 찬송은 나의 영혼을 춤추게 하는 일입니다.
우리 라온코이노니아는 남몰래 흘리는 눈물을 멈추게 하는 예수님을 만나는 구원의 자리입니다. 오늘도 기쁨과 감사로 해복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