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9월 9일 주일아침예배 엡 4:13-16 세반고리반같은 신앙
사람이 걷기 위해서는 균형을 잡아야 하는 데, 여기에는 세 가지의 요소가 필요합니다. 첫째로 눈으로 좌우 앞뒤를 잘 살펴보아야 합니다, 잘못 헛 디딛게 되면 몸의 균형이 흩어져 비틀거리게 됩니다. 두 번째로 몸을 똑바로 잡아주는 척추가 튼튼해야 합니다. 척추가 약하면 허리가 굽어지고 넘어지기 쉽습니다. 그래서 허리 굽은 할머니들이 보행기를 붙잡고 길을 가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세 번째는 귀안 깊숙한 곳에 세반고리반이란 작은 기관이 있는데 이 기관이 건강해야 합니다. 세반고리반 안에 림프액이란 액체가 들어 있는데 이것이 양이 적거나 많거나하게 되면 어지러워지게 되고 몸의 균형을 못 잡아 비틀거리다 쓰러지게 됩니다. 흔히 자동차나 배를 타고가다 멀미가 나는 경우가 있는데 그 원인은 이 세반고리반 안에 림프액이 차가 흔들리게 되면서 갑자기 많아지게 되기 때문입니다. 노인들이 어지러움증을 가지고 있는데 역시 우리 귀안에 세반고리반이 약해졌기 때문입니다. 흔히 멀미를 하지 않기 위해 멀미약을 먹는데 멀미약은 잠을 자게 하거나 운동신경을 둔하게 하므로 운전하는 사람은 먹지 말아야 합니다. 운전하지 않는 사람이라도 차를 타기 한 시간 전에 멀미약을 먹어야 합니다, 펫치를 귀 뒤에 붙이기도 하는데 이것도 3시간 전에 붙여야 한다고 합니다.
오늘아침 설교제목이 세반고리반 같은 신앙이라고 하였습니다. 우리가 신앙생활 하는데 세반고리반이 우리의 몸의 균형을 잡아줌으로 활동을 잘 할 수 있듯이, 신앙생활도 영적 세반고리반이 있어 균형 있는 신앙생활을 해야 만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축복의 신앙생활을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신앙이 우리의 인생의 세반고리반 같아서 우리들의 인생이 흔들리지 아니하고 어지러워 하지 아니하고 균형 있는 인생을 살게 해줍니다. 그러므로 믿음의 세반고리반을 우리는 가져야 합니다.
깊은 계곡 위에서 줄타기를 하는 곡예사가 있습니다. 계곡 사이에 줄을 매달아 놓고 그 줄 위에서 줄타기를 하였습니다. 가장 높은 곳에서 줄타기를 해서 세계 신기록을 세운 사람은 스위스 출신의 ‘프레디 노크’라는 사람입니다. ‘줄타기의 명인’이라고 불리는 그는 2009년 해발 2,934m인 독일의 쥬구스피츠 산꼭대기에 설치된 약 1km 가까이 된 로프 위에서 줄타기에 성공을 함으로, 가장 높은 곳에서 가장 긴 줄을 탄 사람으로 기네스북에 오르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2010년에는 중국 후난성 장각게에서 500m 상공에 설치된 케이불 카 밧줄을 타고 내려오는데 성공하기도 했습니다. 줄타기를 하는 곡예사는 오직 긴 장대 하나만 들고 밧줄 위에 올라갑니다. 때로는 바람이 불기도 하고, 긴 줄이 흔들리기도 하지만, 그런 위기 속에서 곡예사는, 긴 장대를 이용해서 몸의 균형을 잡고 걸어갑니다. 왜 긴 장대를 이용하는 것일까요? 바로 귀안에 있는 세잔고리반이 흔들리지 않고 균형을 잡아주도록 하기 때문입니다. 긴 장대 없이 줄을 타면 줄이 출렁거릴 때 귀안에 세반고리반이 평형을 잡아 주지 못해 어지러워지고 몸의 균형이 흩으러져서 그만 줄에서 떨어질 것입니다. 그러므로 줄타기 곡예사들은 긴 장대를 가지고 몸의 균형을 유지하므로 안전하게 곡예를 할수 있는 것입니다. 물론 고도의 훈련과 기술을 연마하는 것은 필수이고요.
우리가 신앙 생활하는 것도, 같은 이치라고 할 수 있습니다. 세상을 살아간다는 것은 세상에서 천국에 이르는 외줄타기 길을 가는 것이라 울는 늘 위태롭고 늘 어질러움을 느끼게 됩니다. 그래서 우리 인생의 세반고리반은 발 믿음입니다. 믿음이 균형을 이루어야 줄타기 인생에서 안전할 수 있습니다. 때로는 고난의 거센 바람이 불어와도, 때로는 수시로 흔들리는 세상의 풍파 앞에서도, 때로는 우리를 유혹하는 세상의 온갖 유혹의 손짓 앞에서도 오직 긴 장대 하나만을 의지한 채 줄타기를 해야 합니다. 긴 장대를 의지하지 않으면 곡예사가 몸의 균형을 잡지 못해 추락하는 것처럼, 우리도 우리 손에 긴 장대를 가지고 몸의 균형을 유지해야 합니다. 우리 신앙인들이 세상의 밧줄타기에서 손에 가져야 할 긴 장대는 다름 아닌 말씀입니다. 말씀을 손에 꼭 쥐고서 그 말씀으로 우리는 균형을 잡으며 세상을 살아가야 합니다. 말씀은 우리 귀로 들어야 합니다. 귀안에 무엇이 있다고요? 세반고리반이 있습니다. 말씀을 잘 들어 그 말씀에 순종하여 살아가게 하는 일이 바로 믿음의 세반고리반입니다. 말씀과 순종이 잘 균형을 잡지 않는다면 우리는 세상 속으로 곤두박질치고 말 것입니다. 왜 믿음생활 하던 이들이 믿음이 약해집니까? 왜 교회를 잘 다니던 사람이 교회에 나오지 않는 것입니까? 믿음의 세반고리반이 고장이 났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말씀과 순종의 균형이 잡아지지 않고, 그러니 믿음이 흔들려 천국 길에서 낙마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천국 길에서 낙마하는 것은 인생길에 넘어지는 정도가 아니라 천길 만길 인생의 골짜기에서 떨어져 그 밑은 지옥입니다. 그러므로 처음부터 이 믿음의 균형을 잘 가지지 않으면 안됩니다. 그래서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천국에 들어가지 않고 오직 말씀을 듣고 순종하여 지켜 행하는 자가 천국에 들어간다고 예수님이 말씀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세상 가운데 살면서, 신앙 생활하는 모든 삶 가운데서 듣기만하고 순종하지 않는 것을 원치 않으십니다. 그것은 하나님 보시기에 결코 아름답지 않은 일입니다. 믿음의 세반고리반이 건강하여 말씀과 순종이 균형을 이루어 바른 신앙으로 살아갈 때 우리 하나님께서 기뻐하십니다.
왜 예수님은 바리새인이나 율법사들을 비난 하셨습니까? 이 믿음의 균형이 잡혀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말씀에는 도사들입니다. 박사들입니다. 그러나 그 말씀대로 순종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예수님이 예루살렘을 방문할 때마다 으레 찾아가시어 묵으신 한 집이 있습니다. 바로 베다니의 삼남매 마르다 마리아 나사로가 사는 집입니다. 마르다와 마리아는 신앙적으로 한쪽에 치우쳐 있었습니다. 마리아는 예수님의 발아래서 말씀을 귀담아 들었습니다. 마르다는 예수님과 제자들에게 맛있는 음식을 대접하였습니다. 예수님은 말씀을 잘 듣고 있는 마리아만 사랑하신 것이 아니라 마르다도 사랑하셨습니다(요 11:5). 요한복음을 기록한 요한사도는 어느 누가 더 잘했다는 것을 알려주는 것이 아니라, 초대교회 성도들에게 마리아와 마르다의 두 사람의 신앙의 양면성을 조화를 이루고 있어야 한다는 것을 알려주고자 하는 것입니다. 말씀을 듣는 것도 중요하고 예수님과 제자들을 위해 음식을 준비하는 것도 중요한 일입니다. 그래서 초대교회에서는 예배를 드린 후 모든 교인들이 함께 애찬을 나누었는데 이 애찬을 준비할 사람 일곱 사람을 기도하고 재비뽑아 이들을 집사(διακονος)라고 하였습니다. 초대교회에서 집사는 교인들을 위해 음식을 준비하는 직분을 가진 사람을 말하였습니다.
토미 테니(Tommy Tenney) 란 분이 쓴 “균형의 영성”이란 책이 있는데, 마리아와 마르다의 조화는 하나님을 향한 열정(passion)과 인간을 향한 긍휼(compassion)의 조화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하나님을 향한 열정과, 사람을 향한 긍휼’을 가져야 한다고 말합니다. 하나님을 향한 열정을 가진 사람은, 예배를 기다리며 말씀듣기를 사모할 뿐 아니라 사람들을 향하여 긍휼의 마음을 가지고 이웃을 섬기는 일을 심히 기뻐하는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이런 신앙인이 균형있는 신앙인이라는 것입니다.
신앙의 균형을 잃어버리면 자기는 신앙생활한다고 하지만 하나님의 화를 피할 수 없는 사람이 됩니다. 하나님의 원하시는 뜻을 잘 살펴야 합니다.
그러면 왜 이런 균형잡힌 신앙생활을 잘 하지 못하는 것입니까? 다시말해서 왜 말씀을 듣고 순종하지 못합니까? 그것은 똑바로 듣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귀가 보배라'라는 속담이 있습니다. '배우지 않았으나 얻어들어서 아는 것이 많음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입니다. 속담으로 '귀가 도자전(刀子廛)이라는 말도 있습니다. 도자전이란 조선시대 서울 저자거리에서 패물을 팔던 점포를 말합니다. 이 점포에는 밀화(蜜花)단추·용잠(龍簪)·화잠(花簪)·죽절잠(竹節簪)·호두잠·나비잠·비녀·은지환·옥지환·노리개·댕기·귀주머니·굴레·조롱·염낭·봉채·은장도·석장도(錫粧刀)·참빗·얼레빗 등을 취급하였습니다. 이처럼 구로 이것 저것 많이 들어 별놈의 것을 다 알고 았다 라는 의미입니다. 어떤 사람은 세상 돌아가는 온갖 이야기들을 어디서 들었는지 잘 알아 말해주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래서 상식이 풍부한 사람입니다. 그 사람의 귀는 그럼으로 보배입니다.
코끼리귀 꽃(Elephant's ears)을 알고 있습니까? 영어로 베르게니아라는 매우 아름다운 꽃입니다. 오망졸망 다섯꽃잎이 달린 꽃들이 소담스럽게 모여져 피어있습니다. 그런데 어찌 코끼리 귀라고 이름을 붙였을까요? 그 이유는 이 꽃의 잎이 코끼리귀처럼 넓적하다고 하여 붙인 이름이라고 합니다. 여인이 시집살이하면서 이것저것 많은 말을 들어가면서 그 말들에 순종하면 살아가는 아내라는 의미인지 꽃말이 순응하는 아내라고 합니다. 아마 어여쁜 아내가 다소곳이 순종하는 모습을 꽃에 비유하였다고 하겠습니다. 돼지꿀꿀이라는 별명도 있습니다. 두 잎을 서로 문지르면 꿀꿀되는 소리가 난다고 하여 붙인 이름이기도 합니다.
이런 비유들을 소개하는 이유는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활짝 열어 들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우선 말씀을 듣지 않으면 무엇을 순종할것인가를 모르게 됩니다. 왜 말씀에 순종하지 않습니까? 말씀을 처음부터 듣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교회는 꼬박꼬박 나오지만 그냥 앉아 있고 머릿속에는 온갖 세상일로 가득하여 그의 귀에 말씀이 들리지 않고 있는 것입니다. 그냥 馬耳東風 牛耳讀經 입니다. 한귀로 듣고 한귀로 흘려 보낼 뿐 그의 가슴에 말씀이 남아있지 않으니 순종할 것도 없습니다. 순종이 없으니 항상 자기이야기 자기 주장만합니다. 그래서 교회가 시끄럽습니다. 말나온 김에 개귀라는 것이 있습니다. 영어로 dog ear입니다. 이 개귀란 책의 페지 끝이 접혀 있는 것을 말합니다. 우리가 성경을 읽다가 잠시 쉴 때 책 끝을 접어 두는경우가 있습니다. 이 접혀진 부분을 더그이어 개귀라고 말합니다. 우리가 말씀을 들으때 내 마음에 중요하다 꼭 기억하고 싶다 그 말씀대로 순종하겠다하는 말씀이 있으면, 마음에 더그이어 개귀를 접어놓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 말씀을 마음에 접어놨다가, 그것을 묵상이라고 말합니다. 그래서 나중에 그 말씀을 펴 순종하여 지켜 행하는 것입니다.
몸이 천냥이면 눈이 900냥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그만큼 보는 것이 중요하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눈보다 귀가 더 중요하다고 합니다. 성경에서 언제나 말씀을 들으라(쉐마)고 하였지 보라고 말씀하지 않았습니다. 헬렌 켈러는 청력도 시력도 없는 장애인이었습니다. 만약 눈과 귀중 하나만 가질 수있다면 무엇을 택하겠느냐고 누군가가 물었답니다. 헬렌 켈러는 귀를 택하겠다고 말했답니다. 우리나라 옛 사람들은 귀를 소중히 여겼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귀에 대한 여러가지 말들 중에 귀가 크면 부자가 되겠다. 귓부리(耳朶)가 늘어 졌으면 후덕한 사람일 것이다. 귀가 크게 잘생겼으면 장수할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런 생각이 꼭 옳은 것은 아닙니다. 왜냐하면 귀가 커도 가난하게 사는 사람들도 있고, 귓 부리가 늘어 졌어도 인색한 사람들도 있으며, 귀가 크게 잘생겼어도 단명한 사람들도 있기 때문입니다.
복받을 귀가 있고, 복받지 못할 귀가 있습니다. 복받지 못할 귀는 듣지 못하는 귀입니다. 듣지 못하니 믿음의 세반고리반이 없어 심령이 어지럽고 흔들리는 인생으로 힘들게 살아갑니다. 사람들이 흔히 대화를 하거나 상거래를 하다가 말귀를 못 알아들으면 답답하다고 가슴을 치는 경우가 있습니다. 사람의 말귀를 못 알아들어도 답답한데, 하느님의 말씀을 알아듣지 못한다고 하면 그의 심령의 답답함은 말로 할 수가 없을 것입니다.
시편 58:4절에 보면 ‘그들의 독은 뱀의 독 같으며 그들은 귀를 막은 귀머거리 독사(페덴 ㅋ헤레쉬)'같다고 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귀를 틀어막아 버린 귀머거리 독사와 같은 그런 사람들이었습니다. 귀를 막은 귀머거리 독사란? 술사가 공교한 방술을 쓴다 할지라도 전혀 그 마술에 걸려들지 않는 독사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웬만한 독사들은 술사가 방술을 쓰면 거기에 걸려들어 술사가 시키는 데로 독사가 춤도 추고 움직이기도 하지만 그런 방술에 전혀 걸려들지 않는 독사가 있는데 그런 독사를 가리켜서 귀머거리 독사(聾虺)라고 성경은 말씀하고 있습니다. 다시말하면 하나님의 말씀을 아무리 외쳐도 그 말씀이 진리요 정의요 사랑임에도 전혀 받아들이지 않고 자신의 악한 뜻만 고집하는 그런 사람들을 비꼬아서 하는 말로 영적인 귀머거리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왜 영적으로 세반고리반이 없는 것입니까? 대게 말 못하는 장애인들은 귀로 듣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영적으로 말씀을 듣지 못하여 순종하지 모하는 것은 마귀가 귀를 딱 막아 버리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배에 나와 앉아 있거나, 집에서 성경을 펴기만 해도 졸리기부터 하고 말씀을 들어도 말씀에 들을귀를 막으니 눈은 말씀을 전하는 목사님을 바라보고 입은 열어 찬송을 불러도 머릿속은 엉뚱한 세상생각으로 가득차 있게 됩니다. 마귀가 말씀들을 영적 세반고리반 딱 틀어막아 버리니까 귀가 있어도 아무 소리가 안 들리는 것입니다. 눅11:14에 예수님께서 '말 못하게 하는 귀신을 쫒아내시니“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딤후 4:3,4절에 "때가 이르니 사람이 바른 교훈을 받지 아니하며 귀가 가려워서 자기의 사욕을 따를 스승을 많이 두고 또 그 귀를 진리에서 돌이켜 허탄한 이야기를 따르리라.“고 말씀하였습니다. 사람들이 올바른 가르침을 듣기 싫어할 때가 올 것입니다. 그 때에 그들은 자기네 귀를 만족시키기 위해서 자기들 마음에 맞는 선생을 끌어들일 것입니다. 라고 하였습니다. 여기에 자기네 귀를 만족시킨다는 말은 육체의 본성을 충족시켜 주는 솔깃한 말만 듣는다는 뜻입니다.
여러분은 어떠합니까? 솔깃한 말, 가려운 데를 긁어줄 말 나에게 이로운 말만 듣기를 좋아하십니까. 그런 귀를 갖고 있는 사람은 진리의 말씀을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하며, 영적 세반고리반이 고장나 어지럽고 힘든 인생을 살아가게 됩니다. 돈많은 재벌가라고 힐들지 않은 것이 아닙니다. 요즈음 제벌가들이 얼마나 고달픈 인생을 살고 있는지 모릅니다. 왜 그렇습니까? 영적 세반고리반이 고장나 진리에 귀를 기울이지 아니하고 세상욕망에 귀를 기울렸기 때뭉에 아마도 그들은 매일 아이구 어지러워하면서 살 것입니다.
디모데오 후서 2:15절에 “너는 진리의 말씀을 옳게 분별”하라고 하였습니다. 오늘날 말세가 되어 너무도 많은 이단들이 달콤한 말로 사람들을 미혹하고 있습니다. 영적세반고리반이 고장난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진리와 비 진리 또는 달콤한 말로 우리를 꾀이는 말인지 아닌지를 분별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요사이 갖가지 이단들의 달콤한 말에 끌려서 불행해지는 사람들이 많이 있는데 그 달콤한 말에 끌려가면 이단의 소리가 진리인 줄로 생각해 죽을 때까지 끌려 다니며 비참한 생을 보내게 되는 것입니다. 일제 강점기 친일하여 젊은이들에게 학도병으로 나가라던가 정ㅅs대로 나가라고 다니면서 강연한 소위 기독교 지도자들이 있었습니다. 박정희 전두환 대통령이 정치를 잘하고 있다고 옹호하며 군사정권을 반대하고 인권투쟁을 한 사람들을 좌익이라고 매도한 목사들 장로들이 있습니다. 이들은 진리에 귀가 막혀버린 사람들인 것입니다. 아직도 우리 주변을 살펴보면 진리를 분별하지 못하는 귀를 가짐으로 이단의 미혹에 끌려가거나 하나님이 말씀한 공평과 정의에 귀를 막은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잘 들어야 합니다. 그리고 그 말씀을 제대로 순종하여 지켜 행해야 합니다. 열정으로 주님을 섬기고 긍휼로 이웃을 사랑해야 합니다. 신앙의 균형을 위해서 내가 하고 싶은 일만 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하기 싫은 일이라도 주님이 시키시는 일이라면 그 일은 나에게 복이 되는 일이기 때문에 순종해야 합니다. 예수님이 마르다에게 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버리지 말아야 한다고 말씀하였습니다.
우리 라온코이노니아는 균형있는 신앙공동체입니다. 우리는 열정과 긍휼로 말씀을 듣고 순종하는 우리 라온의 성도들은 언제나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축복인생을 살아가고 있음을 믿으시길 바랍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은혜와 평강이 우리 모두에게 함께 하시기를 축원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