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8월 5일 주일아침 예배 눅 21: 5-9, 20-24, 34-36 돌 하나 돌 위에 남지 않으리라.
눅 20장에 예수님이 성전에서 대제사장 서기관들 장로들 그리고 일반 유대인들에게 여러 가지 말씀을 전하십니다. 포도원 농부의 비유 이야기를 하십니다. 포도원 주인이 외국에 가있는 동안 소작인들이 행패에 대해서 말씀하신 다음 로마 황제에게 세금을 바쳐야 하는가 바치지 말아야 하는가 하는 질문을 받으시고 로마 황제의 것은 황제에게 주고,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에게 바치라는 말씀을 하십니다. 그리고 부활한 다음에 가족들과의 관계에 대해서도 말씀하십니다. 21장에 와서 가난한 과부의 헌금과 부자들의 헌금을 비교하면서 예수님은 가난한 과부의 헌금을 칭찬하십니다. 마 24장 1.2절 말씀을 보면, 이때에 예수님이 여러 말씀을 마치시고 성전을 나가시면서 사람들이 이 성전이 참 아름답다고 말하는 것을 들으시고 하시는 말씀이 “날이 이르면 돌 위에 돌 하나도 남지 않고 다 무너지리라”는 말씀을 하십니다.
이 성전 건물은 원래 B.C.19년에 유대인의 환심을 살 목적으로 에돔 사람 헤롯대왕에(2:1) 의해 착공되었습니다. 솔로몬 왕에 의해 처음 세운 성전(왕상 6:1-8:11, B.C. 959-586)이 기원전 586년 바벨론의 침략으로 무너지고 많은 예루살렘 백성들이 포로로 끌려갔다가 페르시아의 고레스왕이 바벨론을 멸망시킨 다음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예루살렘으로 돌아가라는 명령을 내립니다. 이때가 기원전 538년입니다. 요시아 왕의 6대후손인 스룹바벨이란 사람이 예루살렘 총독으로 임명을 받고 예루살렘에 돌아와서 파괴된 성전을 재건하여 516년에 준공하게 됩니다. 이 성전을 스룹바벨의 성전 또는 제2의 성전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이 제2의 성전이 BC 169년경 시리아의 안티오커스 에피파네스 4세의 침략으로 무너지게 되었습니다. 헤롯왕은 이 무너진 성전을 개축할 목적으로 시작하였다가 아예 신축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헤롯왕에 의해서 시작되었기 때문에 헤롯의 성전 또는 제 3의 성전이라고 합니다. 이 제 3성전은 기원전 19년에 시작하여 기원후 63년경 알비누스(Albinus)총독에 의해 완공되기까지 근 80여년의 기나긴 공사 기간이 소요되었으며 그 중간에 봉헌식(착공 9년만에)을 하는 등 나름대로는 화려(華麗)한 외모로 치장되기도 하였습니다. 예수님의 선교 초기인 요 2:20에 예루살렘 성전이 ‘46년 동안 지어졌다’는 유대인들의 증언이 있습니다. 이때를 환산해 보면 기원후 27년 경이라 하겠습니다. 예수님이 기원 전 4년경에 탄생하셨기 때문에 당시 예수님의 나이가 30세에서 31세라고 하겠습니다. 오랜 기간 건축된 제 3성전은 유대 사람들에게는 자랑스럽고 장엄한 것이었으며 마치 눈 덮인 산처럼 아름다움 것이었습니다(요세푸스 : 유대인 전쟁사 5, 6). 그도 그럴 것이 이 성전은 거대한 대리석으로 둘려졌으며 지붕과 같은 특별한 부분들에는 금으로 꾸며졌다고 합니다. 어떤 돌은 높이가 3m 길이가 20미터나 되고 600톤이 나가는 큰 돌도 사용하여 지었는데 어떻게 이 무거운 돌들을 743미터(시온산 높이 765m)나 되는 산 위에 세워진 예루살렘으로 운반했는지 매우 불가사의한 일입니다. 솔로몬 성전이 무너졌고, 스룹바벨의 성전도 무너졌지만 이제 이 헤롯의 성전은 절대로 다시 무너지지 않을 것이라는 자부심을 이스라엘 사라들은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돌 위에 돌 하나도 남지 않고 모두 무너질 것이다”락 말씀하십니다. 놀라운 말씀이 아닙니까?
예수님 말씀에 놀란 사람들이 도대체 그때가 언제 입니까? 거의 화난 목소리로 예수님에게 따지듯 묻습니다. 그러나 그 때가 언제 인지는 확실하게 말씀하지 않으시고 다만 때가 가까이 왔다(카이로스 엥기켄)고만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신지 36년 만에 그리고 이 성전이 80년 만에 완공을 본지 7년 만에 그 때가 온 것입니다. 예루살렘성이 무너지고 성전이 파괴되어 돌 위에 돌 하나 남지 않게 된 것입니다.
주후 66년경 지방 총독 플로루스가 성전 금고에서 17달란트를 강탈한 사건이 벌어집니다. 이로 인하여 유대 백성과 로마군 사이에 긴장이 고조됩니다. 그런데 총독 플로루스는 유대인들에게 예루살렘을 향해 입성하는 로마군을 열렬히 환영할 것을 요구합니다. 이 환영 행렬 도중에 유대인들이 항거하여 총독은 가이사랴로 후퇴하고, 성전과 로마군의 요새인 안토니오 성이 유대인들에게 점령당하게 됩니다. 이에 네로 황제는 로마의 가장 뛰어난 명장인 베스파시안을 파견하는데, 그는 그의 아들 티투스와 함께 67년경 모든 갈릴리 지방을 점령하게 됩니다. 포위망을 치고 예루살렘 성을 주시하던 베스파시안이 네로 황제의 갑작스러운 죽음으로 황제로 추대되어 로마로 돌아갑니다.
지휘권을 위임받은 티투스는 주후 70년 유월절 기간에 수많은 순례자들이 모여든 예루살렘 성을 5개월 동안 완전 봉쇄한 후 무차별로 살육하게 됩니다. 이 5개월은 “징벌의 날(22절)”이 되고, 임산부와 젖먹이는 자들은 환난 중에 빨리 피신하지 못하는 처지였으므로 화를 당하였습니다. 큰 환난과 진노가 이 백성에게 임하였습니다. 이때에 약 110만 명이 학살되고 97,000명이 포로로 잡힙니다(22∼24절). 바로 그날이 주후 70년 8월 4일이었습니다. 그리고 지금부터 1948년 전 일어난 일입니다.
다시 성경 본문으로 돌아가겠습니다.
예루살렘성과 성전이 무너지기 36년 전에 예수님이 사람들에게 “날이 이르면 돌 하나도 돌 위에 남지 않고 다 무너뜨려지리라”고 말씀하였습니다.
이 때 사람들이 예수님에게 두 가지 질문을 하였습니다. 첫째 질문은 “어느 때(포테)에 이런 일(일들 타우타)이 있겠사오며”였습니다. 그리고 둘째 질문은 “이 모든 일(일들 타우타)이 이루어지려 할 때에 무슨(티) 징조가 있사오리이까”였습니다. “어느 때에 이런 일이 있겠사오며.” 우리말 성경은 “이런 일”이라고 하니까, 마치 한 가지 일을 가리키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실제 원어성경은 “이런 일들” 곧 복수형입니다. 그러니까 여러 가지 일들을 가리킵니다.
인류 역사를 보면 사람들은 끊임없이 바벨탑들을 세워왔습니다. 지금은 거대한 돌무더기가 되어 있는 이집트의 피라미드. 중국의 말리장성도 일종의 바벨탑입니다. 그런 보이는 건축물만 아니라 고대로부터 지금까지 강대국이라는 나라들 자기들은 결코 망하지 않으리라는 나라들도 때가 되매 다 무너져 버렸습니다. 고대 이집트나라, 앗시리아나라, 바벨론나라, 페르시아나라, 로마나라, 중국의 진나라, 징기스칸의 원나라, 나폴레옹의 프랑스나라, 히틀러의 독일나라, 스타린의 쏘련나라, 일본천황의 나라, 해가지지 않는다고 떵떵거리며 전 세계에 수많은 식민지를 세웠던 영국나라, 다 베벨탑을 세운 나라들로 망하였거나 그 세력이 크게 작아졌음을 보게 됩니다. 역사가 그렇다면, 지금도 미국이나 중국이나 강대국이라고 하는 나라들도 언젠가는 무너지는 날이 오게 될 것입니다. 정권도 그렇습니다. 철권을 휘 들렀던 왕이나 수많은 독재자들 또한 돌 위에 돌 하나 남지 않고 다 무너져 내렸습니다. 무너지지 않은 정권은 없습니다. 우리나라 역사만 보아도 고구려의 연개소문, 고려시대의 최충헌의 무신정권, 조선시대의 권력을 쥐려고 수많은 사람들을 죽인 사색당파의 권신들, 이승만 박정희 전두환 박근혜에 이르기 까지 화무는 십일홍이요 하루아침에 권력이 떨어지고 돌 위에 돌 하나 남지 않는 모습들을 보였습니다. 북한도 예외가 아닐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우리는 이것을 알아야 합니다. 역사는 하나님의 심판대이기 때문입니다. 누가 하나님의 심판대를 피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오늘 세계의 강대국이라 자랑하는 나라들 그리고 자기의 정권이 영원하리라는 독재자들 날이 이르면 돌 위에 돌 하나도 남지 않을 그날이 오게 돨 것입니다. 그날이 언제 입니까? 곧 올 것입니다. 하나님의 심판은 멀지 않았고 하나님은 지체치 아니하고 응할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가 있습니다. 나라가 망하게 될 때에 많은 백성들이 엄청난 고통을 당한다는 것입니다. 권력자만 망하는 것이 아니라 백성들도 한꺼번에 망하게 되니 억울한 일입니다. 예루살렘성이 로마군에 의해 멸망을 당하고 성전에 무너져 내리고 수많은 예루살렘 사람들이 학살을 당했습니다. 그런데 당시 예루살렘 기독교인들은 단 한사람도 피해를 당하지 않았습니다. 왜 그랬을 까요?
오늘 읽은 눅21:20-21에 “너희가 예루살렘이 군대들에게 에워싸이는 것을 보거든 그 멸망이 가까운 줄 알라. 그 때에 유대에 있는 자들은 산으로 도망갈 것이며 성내에 있는 자들은 나갈 것이며 촌에 있는 자들은 그리로 들어가지 말지어다.” 라고 말씀하신 예수님 말씀을 초대 교인들은 순종하여 따랐기 때문입니다. 이때에 예루살렘교회의 지도자는 예수님의 친 동생인 시몬이었습니다. 시몬은 베스파시안 로마 장군이 예루살렘으로 진격해 들어온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긴급히 교인들에게 예수님의 말씀을 전달하였습니다. 이 전달을 받은 기독교인들은 예루살렘 성을 벗어나 베뢰아의 펠라 지방으로 피신하여 한 사람도 해를 당하지 않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피신하였던 기독교인들이 산지사방으로 퍼져 나가 복음을 전하여 전 세계에 교회들을 세워 나갔습니다.
그런데 한 가지 이해하기 어려운 점이 있습니다. 예수님 당시 바리새인들은 참으로 믿음이 좋은 경건한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철저히 말씀에 순종하고 물론 이때 말씀은 율법입니다. 십일조 생활도 철저히 합니다. 하루에 세 번씩 기도합니다. 기도시간이 되면 길을 가다가도 그 자리에 서서 기도합니다. 세 시간씩 서서 기도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얼마나 대단한 믿음입니까?
그런데 예수님은 그들의 믿음을 옳게 보시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기본적으로 그들의 믿음 행위를 “휘포크리타이”-즉 외식(外飾)하는 일로 보았습니다. 즉 이 말은 예수님은 바리새인이나 율법사나 서기관들을 다 위선자라고 보았던 것입니다,(마6:2,5,16. 7:5. 22:18, 23:13,23,25,27,29)
마15:7,8절에 이사야서 29:13을 인용하시면서“ 외식하는 자들아 이사야가 너희에게 대하여 잘 예언하였도다 일렀으되 이 백성이 입술로는 나를 존경하되 마음은 내게서 멀도다 사람의 계명으로 교훈을 삼아 가르치니 나를 헛되이 경배하는도다 하였느니라 ”
마23:23,24에 ““화 있을찐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가 박하와 회향과 근채의 십일조를 드리되 율법의 더 중한바 정의와 긍휼과 믿음은 버렸도다 그러나 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버리지 말아야 할지니라. 맹인 된 인도자여 하루살이는 걸러내고 낙타는 삼키는도다”
마태복음 23:27-28 “화 있을찐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회칠한 무덤 같으니 겉으로는 아름답게 보이나 그 안에는 죽은 사람의 뼈와 모든 더러운 것이 가득하도다 이와 같이 너희도 겉으로는 사람에게 옳게 보이되 안으로는 외식과 불법이 가득하도다 ”
이처럼 당시 사람들은 그들을 믿음 좋은 사람들로 보았으나 예수님의 눈은 속일 수 없어던 것입니다. 예수님의 그들에 대한 인식은 한마디로 겉은 살았다고 하나 속은 썩어 문들어 진 죽은 자들 이였던 것입니다. (계3:1)
그래서 마24:28에 “주검이 있는 곳에는 독수리가 모일 것 이니라” 여기서 독수리 표현이 의미심장합니다. 바로 로마 군대의 기가 독수리 기였습니다. 로마 군대들은 전쟁터로 나갈 때 독수리 깃발을 앞세워 나갔던 것입니다. 로마의 독수리는 그들의 최고 숭배 신이 주피터 신을 상징한다고 합니다.
로마의 상징인 독수리와 SPQR이 새겨진 문장이 있는데, SPQR은 ‘로마 원로원과 시민(Senatus Populusque Romanus)’을 의미합니다.
예수님은 바리새인 사두게인 율법사 제사장 그리고 서기관들 당시 가장 믿음이 좋다고 하는 그들이 지만 그들의 외식 때문에 이미 그들의 믿음은 죽은 믿음이라 그들은 구원 받을 대상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결국 로마의 침략 앞에 돌 위에 돌 하나도 남기지 않고 멸망당할 사람들이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어찌 그 옛날 그들 뿐입니까? 오늘 날 우리에게도 그대로 적용되는 말씀입니다.
눅21:34.35에“너희는 스스로 조심하라 그렇지않으면 방탕함과 술취함과 생활의 염려로 마음이 둔하여지고 뜻밖에 그 날이 덫과 같이 너희에게 임하리라. 이 날은 온 지구상에 거하는 모든 사람에게 임하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때나 지금이나 예루살렘이나 대한민국 군산에서나 온 지구상 모든 인간들에게 똑같이 그 망하는 날이 임한다는 말씀입니다.
오늘 이 말씀을 읽는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이런 일이 일어난다는 성경 말씀이 믿어집니까? 아니면,”에이, 설마 그런 일이 일어날라고?” 이렇게 생각하십니까?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이 있을 것을 염려해서 예수님은 한 말씀을 더 하셨습니다. 33절에 “천지는 업어지겠으나 내 말은 없어지지 아니하리라.” (팔레류손타이...우 메 파렐류손타이)
그러면 누가 이런 일을 피할 수 있을 것입니까? 로마군의 침입에 초대교인들에게는 산으로 도망을 가라고 미리 알려주신 예수님이 오늘 우리들에게는 무엇을 어떻게 하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까?
36절에 그 답을 말씀하셨습니다. “이러므로 너희는 장차 올 이 모든 일을 능히 피하고 인자 앞에 서도록 항상 기도하며 깨어 있으라 하시니라.(아그맆네이테 데 엔 판티 데오메노이)” 성경 원어로는 깨어 있으라 그러나 항상 기도하고 있으라 이 명령의 말씀이 문장 처음에 나옵니다. 그리고 이것은 이 모든 일을 피하고 인자 앞에 서기위하여 이기려면(카티스ㅎ퀴세테 우리말 성경은 이 말을 능히라는 말로 번역하였습니다)
돌 위에 돌 하나도 남지 않고 심판 받을 날을 피하고 예수 그리스도 앞에 바로 서려면 그 위험을 이겨야 하는데 그 이기는 두 가지 방법이 하나는 깨어 있는 일이고 또 하나는 항상 기도하는 일이라고 예수님이 가르쳐 주십니다.
‘깨어 있으라’는 말씀은 정신을 차리고 있으라는 말씀인데 영어로 Keep alert라고 합니다, 엘러트는 경고발령을 말합니다. 요즈음 날씨가 뜨겁다고 경계경보가 핸드폰으로 울려옵니다. 날씨가 뜨거우니 방에 콕 백혀 있고 나다니거나 일하지 말라 라는 경고입니다. 예수님은 무슨 경고를 하셨습니까? 34절에 “방탕함과 술 취함과 생활의 염려로 마음이 둔해지지 말라“고 경계경보를 발령하신 것입니다. 요즈음 우리 사회에 주시는 예수님의 경보발령입니다. 방탕함도 문제이고 술 취함도 문제이고 생활의 염려도 문제입니다만 왜 이런 것들이 문제인가하면 마음이 둔해지기 때문입니다. 방탕하면 마음이 둔해집니다. 옳고 그름을 분별 못합니다. 술취하면 선과 악을 구별하지 못합니다. 생활의 염려로 진실과 거짓을 판단하지 못합니다. 결국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하고 세상과 짝하여 살다가 어느덧 돌 위에 돌 하나 남지 않는 인생의 종말이 그의 앞에 이르게 됩니다. 그러면 깨어있으라는 말씀은 무슨 의미입니까? 영성으로 바로 서라 입니다. 바울선생님은 욱을 위하여 살지 말고 영을 위하여 살라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세상에 취하여 올바른 영성을 회복하지 않으면 결국 마음이 둔해지고 돌 위에 돌 하나 남지 않는 종말을 보게 될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회개하라는 말씀은 결국 세상을 이기기 위해서 마음을 둔해지지 말고 그날에 이기기 위해서 성령으로 자신의 영성을 회복하라는 말씀입니다. renewal? restoration? recovery? 영어 단어 “re-”로 시작하는 말은 “다시 (again)”라는 뜻도 있지만 “back” or “backward”의 뜻이 있습니다. 우리말로 회복(回復)이라고 하면 본래 상태로 복구되는 것을 말합니다. 지금 믿음을 바로 세워나가지 않으면 자신의 인생도 바로 세워나갈 수 없다는 말씀입니다.
영성을 회복하기 위해 우리에게 반드시 중요한 일은 무엇입니까? 예수님은 분명히 명령하셨습니다. “항상 기도하라”입니다.
27년간 자동차회사 ‘제너럴 모터스’를 이끌었던 찰스 케터링(Charles F. Kettering 1876.8. 29-1958. 11. 24 미국 오하이오 주 라우던빌 출생의 농업, 교수, 메카닉, 엔지니어, 과학자, 발명가, 사회철학가이다. )은 빈틈없는 최고의 기술자였습니다. 자동차 업계에는 물론 사회적으로도 널리 알려져 있는 인물이었습니다. 어느 날 모임에서 사회자가 신화를 이룬 그의 손을 높이 쳐들며 “케터링 씨, 지금까지 이 손으로 한 일 중에서 가장 중요한 일은 무엇이었습니까?” 라고 물었습니다. 사회자는 물론 모임에 참석한 사람들 모두가 “자동차를 만드는 일입니다” 라는 대답을 예상했습니다. 하지만 그는 잠시 생각하더니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이 손으로 한 일 중 가장 중요한 일은 두 손을 잡고 하나님께 기도한 일이었습니다.” 훌륭한 신앙인의 대답입니다.
세상에서 이루어진 위대한 일들은 기도하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이 주신 영감의 산물입니다. 하나님은 무릎 꿇고 두 손을 모아 기도하는 사람에게 신비한 지혜를 주십니다. 그러므로 무엇보다 기도의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기도를 잃어버리면 모든 것을 다 잃을 것이고 기도가 무너지면 모든 것은 다 무너집니다.
“이러므로 너희는 장차 올 이 모든 일을 능히 피하고 인자 앞에 서도록 항상 기도하며 깨어 있으라 하시니라” 장차 올 혹독한 환난과 혼란 속에서도 믿음의 도를 잃어버리지 않도록 항상 기도하라는 것입니다. 환난을 이기는 유일한 무기는 기도입니다. 깨어있는 사람이 항상 기도하고 항상 기도하는 사람이 깨어있는 것입니다. 방탕하면 기도하고 깨어 있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기도하면 방탕과 술 취하지 않습니다. 생활의 염려로 기도하지 않으면 영원히 그 염려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기도 외에 사탄을 이길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기도하지 아니하고 세상을 이길 수 있다고 생각하면 착각입니다. 기도 없이 돌 위에 돌 하나 남지 않는 그날을 피할수 있다고 생각한다면 인생 최대의 실수입니다. 무엇으로도 기도의 자리를 대신 채울 수 없습니다.
그러기에 누구라도 기도해야 합니다. 예외는 없습니다. 그러므로 모든 것이 기도하는 이유가 되어야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도해야 합니다. 다니엘처럼 사자굴 앞에서도 기도해야 합니다. 반드시 하나님이 사자의 입을 막아 주시고 높이 올려 주십니다. 예수님처럼 땀이 피가 되도록 기도에 힘써야 합니다. 기도 안 하는 사람이 어떻게 순종하고 충성할 수 있습니까? 자나 깨나 항상 기도해야 합니다, 앉으나 서나 항상 기도해야 합니다. 들어가나 나가나 항상 기도해야 합니다. 어디를 가든지 무엇을 하던지 누구를 만나던지 기도해야 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혹시 그 시간이 돌 위에 돌 하나 남지 않는 그날이 될지도 모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주님의 경보발령을 무시해서는 안 됩니다. 깨어있어라 항상 기도하라
여름 한낮에 날씨 경보발령이 났습니다. 이 경보를 무심히 듣고 밭에 나가 일하는 농부가 있다면 그는 열사병에 쓰러져 생명이 위험할 수 있습니다. 지금 사회 도처에 돌위에 돌하나도 남지 않고 무너지는 많은 인생들을 봅니다. 왕년에 권력자들이 그렇게 무너져 내리고 있습니다. 그러나 수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인생에서 무너져 내리고 있음에도 이러저러한 이유로 하나님을 향한 발걸음이 무디어지고 세상을 향해 바벨탑을 쌓으려는 사람들을 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창조 이래 꼭 하나의 유일한 법칙이 돌 위에 돌 하나 남지 아니하는 날 심판 날이 있다는 것입니다.
사악한 스코틀랜드 변호사가 있었습니다. 한번은 말을 빌렸는데 사고로 그 말이 죽고 말았습니다. 자연히 주인은 자기가 입게 된 손해보상과 함께 말 값을 지불하라고 주장하였습니다. 변호사는 자신의 책임을 인정하면서, 손해배상은 기꺼이 지불하겠지만 당장 현금이 없으니 현금대신 약속어음을 받겠냐고 말 주인에게 묻자, 그 말 주인은 기꺼이 승낙하였습니다. 그러자 변호사는 지불할 기한이 필요하다고 했습니다. “시간은 마음대로 하시죠?”라고 채권자가 말했습니다. 그러자 사악한 그는 심판의 날에 지불하도록 어음을 발행하였습니다. 그 후 변호사가 약속어음을 계속 지불하지 않자 결국 채권자는 그 문제를 법정으로 가져갔고, 거기에서 변호사는 판사에게 어음을 보라고 말했습니다. 그러자 판사는 어음을 보고 나서 이렇게 대답하였습니다.
“약속어음은 완전히 유효합니다. 그리고 오늘은 심판 날이므로 내일 지불할 것을 판결합니다.”
세상이 어떻게 가더라도 그 날은 옵니다. 심판의 날이 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우리를 부르시면 가야 하는 그 날도 옵니다. 그 날에 탄식하는 자가 있고 "아멘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하며 기뻐하는 자도 있을 것입니다. 그 날은 준비된 자에게는 기쁨의 날이 될 것입니다.
오늘 우리 라온코이노니아 성도들에게 예수님의 경보발령을 보내십니다. 깨어있어 항상 기도하라. 이 경보를 받은 우리는 말씀에 순종하고 방탕하거나 술 취하거나 생활의 염려로 우리의 마음을 둔하게 하지 아니하고 우리의 믿음을 언제나 바로 지켜나가야 하겠습니다.
하나님의 은혜와 축복이 우리 모두에게 항상 함께 하시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