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7월 15일 주일아침 예배 행전 7:8-15 申申夭夭 만델리온
<얼굴> 이라는 노래가 있습니다. 심봉석 작시, 신귀복 작곡의 노래입니다.
동그라미 그리려다 무심코 그린 얼굴
내 마음 따라 피어나던 하얀 그때 꿈을
풀잎에 연 이슬처럼 빛나던 눈동자
동그랗게 동그랗게 맴돌다 가는 얼굴
동그라미 그리려다 무심코 그린 얼굴
무지개 따라 올라갔던 오색빛 하늘나래
구름 속에 나비처럼 나르던 지난 날
동그랗게 동그랗게 맴돌곤 하는 얼굴
서양에서는 얼굴이란 단어를 페이스라고 합니다. 이 말은 ‘널빤지’란 뜻의 라틴어 ‘파키에스(facies)’에서 유래했습니다. 서양 사람들은 얼굴을 단순히 모양이나 형태로 파악했습니다. 그러나 우리 조상들은 얼굴을 단순히 모양새가 아닌 그 사람을 표현하는 인격으로 보았습니다.
<얼굴>에서 ‘얼’은 ‘영혼(정신)’을 의미합니다. 갑자기 큰 상처나 아픔을 당하며 사람이 멍해집니다. 그때 우리가 흔히 하는 말이 ‘얼빠진 사람같다’ 라고 합니다. 제 정신이 아닌 말을 하거나 행동을 할 때도 ‘얼빠진 사람’ 이라고 말합니다. ‘굴’은 꼴을 말합니다. 즉 얼굴은 얼을 담는 그릇이란 말입니다.
사람의 얼굴은 어디서부터 어디까지를 가리키는지 아세요? 이마는 얼굴에 들어갈까요? 안들어 갈까요? 네~ 이마는 얼굴이 아닌 머리에 속합니다. 사전적인 의미로 얼굴은 ‘눈 코 입이 있는 머리의 앞면’을 말합니다. 해부학적으로는 미간부터 턱 끝까지를 얼굴이라고 합니다. 인류학적으로 얼굴의 모양은 남방계와 북방계로 나뉩니다. 북방계는 넓은 이마, 작은 눈과 입술, 흰 피부, 초승달처럼 가는 눈썹을 가진 형태를 말합니다. 전에 한국에서는 북방계의 얼굴이 미인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족집게로 머리털을 뽑아 이마를 넓히는 것이 유행인 적이 있었습니다.
반면에 남방계는 이마가 좁고, 눈이 크고, 짙은 눈썹과 쌍꺼풀이 있습니다. 남방계는 돈을 주고 쌍꺼풀 수술을 할 필요가 없습니다. 여러분은 북방계인지 남방계인지 구분이 되십니까? 최근 들어서는 북방계 얼굴보다는 남방계 얼굴을 미인으로 선호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우리나라는 현재 북방계 33%, 남방계 23%, 나머지는 중간형에 속한다고 합니다.
얼굴에는 80개의 근육이 있는데 그 근육을 모두 사용하면 7,000가지 정도의 표정을 지을 수 있다고 합니다. 여기서 한 가지 제안을 합니다. 화가 난 표정, 심술궂은 표정, 울상 짓는 표정보다는 기왕이면 이쁜 표정, 밝은 표정, 미소 짓는 표정을 지으면 좋을 것 같습니다.
꽃미남(꽃처럼 예쁜 남자), 얼짱(얼굴이 아주 잘생긴 사람), 자연미인(얼굴을 뜯어고치지 않은 미인), 생얼(화장을 하지 않은 얼굴), 훈남(얼굴이 못생겼지만 정이 가는 남자)…. 얼굴과 관련된 신조어들이 이 시대의 세태를 반영합니다. 얼굴의 모습이 사람을 구별하는 단순한 의미를 넘어서 개인을 표현하는 힘과 능력으로 바뀌고 있습니다.
문재인 안철수 홍준표 이 세 사람 중에 국민들에게 호감을 주는 얼굴은 어떤 분이겠습니까?
그러나 여기서 우리들이 꼭 기억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얼굴을 성형하고, 외모를 아무리 아름답게 꾸며도 중요한 것은 그 사람을 통해서 풍겨나는 인격입니다. 외모는 좀 부족해도 그 사람을 통해서 들어나는 인품이 탁월하면 모든 사람이 존경하고 따릅니다. 따라서 좋은 얼굴, 좋은 표정, 좋은 인상을 풍기는 것이 중요합니다. 결국 얼굴의 모습은 내면의 상태를 보여주는 거울입니다. 얼굴은 우리의 영혼이 거하는 집이기에 내 영혼이 고요하고 평안하면 내 표정 역시 좋은 인상으로 들어납니다. 얼굴을 보면 그 사람의 인격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 우리 주변에서 보는 얼굴의 표정들이 어떻습니까? 저는 사람들의 얼굴을 쳐다보는 습관이 있습니다. 요즘 사람들의 얼굴을 보면 공통점이 있는데 무표정하다는 것입니다. 화장도 예쁘게 하고, 남자답게 생겼는데 얼굴에 표정이 없어요. 현철의 노래 “봉숭아 연정”이란 노래가 있지요? 그 가사에 ‘손대면 톡하고 터질 것만 같은 그대 봉선화라 부르리’람늠 가사 말처럼 요즈음 봉숭아 씨처럼 건드리면 금방이라도 터질 것 같은 얼굴들이 많습니다. 외국에 가면 거리의 표정이 굉장히 밝습니다. 서로 모르는 사이라도 얼굴을 보면 Hi! 인사를 하고 지나갑니다. 그러다 좀 아는 사람을 만나면 하이 파이브를 하고, 허깅을 하고, 펄떡펄떡 뛰면서 좋아합니다. 그런데 요즘 저는 군산의 길거리에서 그런 모습을 본적이 없습니다.
기왕이면 다른 사람을 기쁘게 하는 밝은 표정, 힘찬 표정, 감사하는 표정, 희망이 넘치는 표정을 지으면 좋겠습니다. 옆에 분에게 이렇게 한번 고백해 보면 어떨까요? “지금부터 내 얼굴은 당신의 희망이 되겠습니다.” “지금부터 내 얼굴은 당신의 기쁨이 되겠습니다.”
15절 말씀에 보시면 “공회 중에 앉은 사람들이 다 스데반을 주목하여 보니 그 얼굴이 천사의 얼굴과 같더라.”
스데반의 얼굴은 천사의 얼굴과 같았다고 인정을 받습니다. 물론 우리들이 천사의 얼굴을 본적이 없기에 어떤 모습인지 정확하게 알 수는 없습니다. 천사의 얼굴은 잘 생긴 얼짱일까요? 우리나라 여배우 김희선이나 김태희 보고 미인이라고 할지는 몰라도 '천사의 얼굴과 같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우리나라의 수많은 탤런트들을 보고 미남, 혹은 잘생겼다고는 할지 몰라도 천사의 얼굴이라고는 하지 않습니다.
천사의 얼굴은 마음의 고요함과 평안함에서 나오는 기쁨의 얼굴, 평화스런 얼굴입니다. 다른 사람에게 평안을 주고, 기쁨을 주고, 소망을 주는 얼굴입니다. 오늘 스데반이 바로 천사의 얼굴을 가진 주인공입니다.
공자선생님의 얼굴에 대한 말이 논어 술이편에 나옵니다. 여기서 설교제목 첫 번째 말 신신요요라는 말이 나옵니다.
子之燕居애 申申如也시며 夭夭如也ㅣ러시다
공자께서 한가로이 계실 때에는 즉 평상시의 얼굴 모습이 활찍 펴 있고 어린아이 얼굴처럼 얼굴빛이 온화하였다.
When the Master was unoccupied with business, his manner was easy, and he looked pleased.
성인 공자의 모습은 친근하고 인간적입니다. 정이 가고 여유가 있습니다. 누구라도 가까이 다가가 마음을 터놓고 대화할 수 있는 따뜻한 모습이였다고 말합니다.
스데반의 얼굴 표정이 천사 같다고 하였는데 이말은 서양적인 표현이고 동양적인 표현을 하자면 신신 요요하였다고 하겠습니다. 한가지 공자선생님과 다른 점은 공자선생님은 한가로이 계실 때 신신 요요 하였다면 스데반은 사람들에게 말씀을 전 할 때 모습이 신신요요하였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사람들은 천사의 얼굴과 같다고 말하였습니다. 말씀을 선포 할 때만 아니라 평상시에도 변함없이 신신 요요 하였다는 말입니다.
세계 역사상 가장 잘생긴 남자는 누구일까요? 석가모니 얼굴일까요? 공자선생의 얼굴일까요?
예수님이십니다. 우리 주님이 변화산에서 기도하실 때에 용모가 변화되고 그 옷이 희어져 광채가 났습니다.물론 예수님의 얼굴이 어떠신지 알 수 없습니다. 사진이나 그림에 니온 예수님의 얼굴은 모두 상상으로 그린 얼굴입니다. 어떤 화가는 자신의 얼굴을 예수님의 얼굴로 그린사람도 있습니다.
1950년 기독교 미술가 워너 살만은 폐병과 임파선 암에 걸려 앞으로 3개월밖에 살지 못한다는 의료진의 이야기를 들었을 때, 두 가지 결심을 했습니다. 첫 번째는 남은 날 동안 하나님께 날마다 감사하겠다는 것이었고, 두 번째는 하나님과, 사람과 맺은 약속을 이행하겠다는 것이었습니다. 세 번째는 죽기전에 예수님의 얼굴을 그리겠다는 것입니다. 그다음 날부터 그의 입에서는 감사가 끊이지 않았습니다. 교회에 헌금을 작정해 놓고 안 드린 것을 모두 드리고, 자녀들에게 약속한 여행을 하고, 채무 관계도 깨끗이 정리했습니다. 그리고 열심히 화실에 앉아 예수님의 초상화를 그렸습니다. 그렇게 1년이 지났습니다. 3개월 밖에 못 산다고 하였는데 1년이 지난 것입니다. 병원 다시 가서 진찰해 보니 암이 깨끗이 나아졌습니다. 그래서 그 후로 예수님의 얼굴 그림을 열심히 그리기 시작하였습니다. 우리가 흔히 시진으로 보는 예수님의 초상화입니다. 그리고 선한목자 예수님이 양을 안고 양들 가운데 계신 그림도 그가 그린 그림입니다.
그런데 사람이 그린 그림이 아닌 예수님이 직접 자신의 얼굴을 찍어 남기신 얼굴이 있습니다.
초대교회 역사가인 유세비우스의 교회사 1권 `3장에 의하면 에뎃사의 왕 아브가르가 죽을 병에 걸려 백약이 무효라 사람들이 예루살렘에 가면 예수라는 사람이 있는데 그가 무슨 병이든지 다 고친다란 소문을 듣고 마지막으로 예수를 초빙하여 병을 고쳐 보겠다는 생각으로 신하를 예수님에게 보냅니다. 신하가 왕의 편지를 가지고 예수님에게 갔습니다. 그런데 그때는 예수님의 생애 마지막 한주간이였기 때문에 에뎃사 왕의 초청을 들어 줄 수가 없었습니다. 대신 한조각의 아마포에 자신의 얼굴을 찍어 보냈닥 합니다. 왕은 이 예수님의 얼굴 찍힌 천을 머리위에 얹으니 병이 씻은 듯이 나았다는 것입니다. 이 천에 찍힌 예수님의 얼굴을 만딜리온이라고 합니다. 여기서 두 번째 설교제목이 나옵니다. 만딜리온이란 천에 새겨진 형상이란 의미입니다. 그리고 사람에 의해서 그려지지 않았다고 하여 아케이로포이에토스라고 말합니다. 이 만딜리온을 러시아 정교회에서 진귀한 보물로 간직하고 있습니다.
국보 29호 에밀레종은 12만근짜리 한국에서 가장 큰 종입니다. 그 종명(鐘銘)에 새겨진 한문(夫至道包含於形象之外 視之不能見其原 大音震動於天地之間 聽之不能聞其響)을 풀이해 보면 "지극한 도는 형상 밖에 포함되어 있어서 우리의 시력으로 능히 그 근원을 볼 수 없고, 정말로 큰 음성은 온 천지를 진동하는 것이라 우리의 청각으로 그 음향을 능히 들을 수 없느니라." 1200년 전 에밀레종을 만들었던 그 사람은 인간의 시각과 청각으로 신을 볼 수 없다는 것을 어떻게 알았을까요?
하나님이 만약 눈의 망막에 보여지는 형상이라면 이미 그것은 하나님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만약 우리의 고막을 울려서 들려지는 소리라면 이미 그것은 하나님이 아닙니다. 보여지고 들리는 것을 받아들이는 것은 과학입니다. 그것은 '믿음'이 아닙니다. 믿음은 볼 수 없고 들리지 않고 실체가 없는 것을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그래서 믿음입니다.
만딜리온은 천에 찍혀진 예수님의 얼굴이 아니라 우리들의 마음에 찍혀진 만딜리온이어야 합니다. 우리들 심령 안에 예수님의 얼굴이 새겨져 있어야 합니다. 그것이 곧 예수를 믿는 사람들의 영적 얼굴입니다. 그리고 우리들의 얼굴에 품어져 나와야 합니다. 얼굴에 그의 마음이 나오듯이 우리들의 얼굴에서 예수님의 얼굴이 나와야 합니다. 우리의 마음이 만딜리온이고 그래서 우리의 얼굴이 예수님 같은 신신 요요여야 합니다.
그러므로 이제부터 신신요요 얼굴로 가꾸어야 합니다. 아름다운 얼굴을 갖기 위해서는 아름다운 마음을 소유해야 합니다. 성도의 아름다운 얼굴은 예수님의 마음을 품는데서 출발합니다.
하나님은 인간을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하셨습니다. 우리 인간이 가진 인격과 성품은 반드시 그 얼굴에 나타나게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전 세계 인간을 하나의 기계로 찍어내서 똑같이 만드시지 않고 모두가 다른 성품과 인격으로 창조하시고 얼굴의 모양도 다르게 만드셨습니다. 얼굴은 우리 하나님이 만드셨지만 얼굴 속에 나타나는 인상, 얼굴 속에 비치는 인격은 예수님이 만들어 주십니다.
마음이 흐리게 되면 얼굴이 흐리게 되고 마음이 즐거우면 표정도 밝아질 수가 있습니다. 인생을 성실하게 살아온 사람에게는 그 얼굴에 성실한 향기가 풍겨납니다. 그러나 추한 생각과 더러운 생각을 가지고 살아가는 얼굴에서는 자연히 비열한 인상이 풍겨지게 마련입니다. 이것은 속이려야 속일 수가 없는 것이다.
그리스도인들이 가져야 하는 얼굴은 영광스러운 얼굴입니다. 외모에 있는 것이 아니고 예수님의 얼굴이 그 심령에 찍혀진 사람으로 그 얼굴에 예수님의 신신요요한 모습을 보여 주어야 합니다. 스데반이 예수님의 그 영광스런 목습을 사람들에게 보여주니 모두가 천사의 얼굴이라고 말하였던 것입니다.
그러면 기독교인의 신신요요한 얼굴 모습은 어떤 얼굴일까요?
우리는 인간으로 부끄러운 얼굴을 해서는 안됩니다. 사람이 죄악에 사로잡히고 양심에 가책을 받으면 그 얼굴은 어두워지고 부끄러운 얼굴이 되고 맙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의 얼굴은 먼저 활짝 편 밝은 얼굴이어야 합니다. 항상 기쁘고 웃음이 가득하고 온유함이 흘러야 합니다. 이 죄악 세상에 살아가지만, 우리 주님으로 인하여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로 구원의 감격을 가지고 보니 무슨 일을 하든지, 누구를 만나든지 매사에 긍정적이고, 얼굴은 해같이 빛나야 합니다.
우리들이 걸어온 발자취에 찍힌 얼굴은 어떤 얼굴인가? 그리고 지금 우리의 얼굴은 어떤 얼굴인가? 그늘진 얼굴이었는가? 빛나는 얼굴인가? 어두운 얼굴인가? 천사의 얼굴인가?
히브리서에 보면 주님을 바라볼 뿐만 아니라 늘 주님을 생각하라고 했습니다. 길을 갈 때도 주님을 생각해야 합니다. 일을 할 때도 주님을 생각해야 합니다. 말을 할 때도 주님을 생각하며 말해야 합니다. 공부를 할 때도 주님을 생각하며 해야 합니다. 장사를 할 때도 주님을 생각해야 합니다. 학생들을 가르칠 때도 주님을 생각하며 가르쳐야 합니다. 환자를 치료 할 때도 주님을 생각해야 합니다 .밥을 지을 때도 주님을 생각해야 합니다. 사무를 볼 때도 주님을 생각해야 합니다.
그래서 잠언에 뭐랬어요? "사람의 생각이 어떠하면 그 위인도 그러하다"고 했습니다.
생각하는 것이 사람에게 있어서 얼마나 중요합니까? 장사하는 사람은 언제나 장사해서 돈 버는 생각을 합니다. 도둑놈은 밤이나 낮이나 남의 물건 훔칠 생각만 합니다. 사기꾼은 거짓으로 다른 사람을 속일 생각만 합니다.
마음에 사랑이 없고, 기쁨과 평화가 없는 사람은 밤낮 다른 사람을 미워하는 생각, 원망하는 생각을 품고 있으니까 그 얼굴이 쭈그러집니다. 불평하는 사람, 원망하는 사람, 시기하는 사람의 얼굴을 보셨어요? 얼굴에서 빛이 사라집니다.
그러나 마음속에 언제나 선한 생각, 사랑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으면 어떻게 됩니까? 마음속에 기쁨과 만족과 감사와 찬송이 있는 사람의 얼굴은 어떻습니까? 그 얼굴에 광채가 납니다.
여러분, 어린애들의 눈을 보셨어요? 조용한 호수같이 잔잔하고 맑습니다. 그런데 사람이 살아가면서 나쁜 것 보고 좋지 않은 것 생각하는 동안에 이 맑은 눈이 점점 흐려지기 시작합니다. 한번 화를 내면 눈에 핏줄이 더 생깁니다. 그래서 그렇게 아름답고 깨끗하고 잔잔한 호수 같던 눈이 충혈이 됩니다. 마음에 사랑을 품으세요. 평화를 누리세요. 기쁨을 가지세요. 그때 여러분의 얼굴이 천사의 얼굴처럼 빛나게 될 줄 믿습니다.
이 세상에 제일 불쌍한 사람은 얼굴에 빛을 잃은 사람입니다. 우리가 세상에 살면 얼마나 살려고 얼굴에 핏대를 내고 빛을 잃어버린 생활을 하겠습니까? 죽은 사람의 얼굴은 빛을 잃어버린 얼굴입니다. 살아생전에도 얼굴에 빛을 일어버린다면 살았으나 죽은 인생입니다.
끝으로, 주님의 얼굴을 닮으려면 주님의 마음을 배워야 합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내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온유와 겸손은 주님의 근본 성품입니다. 그리스도를 따르는 제자라고 하는 우리가 주님의 성품을 배우는 것은 너무 당연한 일이 아닙니까? 우리는 온유와 겸손의 열매를 맺어야 합니다. 교만하고 강퍅한 사람의 얼굴에는 빛이 없습니다. 그러나 온유하고 겸손한 사람에게는 그 얼굴에 빛이 있습니다. 내 얼굴이 빛나는 것을 내가 아는 것 아니고 다른 사람이 볼 때 주님의 얼굴을 닮아야지요. '저 분을 뵈면 참 하나님을 뵌 것 같애. 저 분을 만나면 예수님 만난 것 같애.' 이렇게 되면 얼마나 복입니까?
정말 우리는 태양처럼 빛나지는 못해도, 태양 광선을 반사하는 달빛처럼 그리스도의 그 위대한 사랑의 빛, 온유의 빛, 겸손의 빛, 봉사의 빛을 이 세상에 반사할 수 있는 그리스도를 마음에 찍은 사람이어야 합니다.
미국에 살고 있는 한국 교포중에 세탁소를 경영하는 분이 있었습니다. 하나님을 잘 섬기며 정직한 분이었습니다. 어느 날 한 분이 옷을 세탁하여 달라고 가지고 왔습니다. 주머니에 돈이 들어 있어서 세어 보니 2,700불이었습니다. 잘 간직하여 두었습니다. 옷을 찾으러 왔을 때 그 돈을 주었습니다. 옷 임자가 말했습니다.
“나는 생각지도 않은 돈입니다. 가지세요.”
“아닙니다. 내 돈이 아닙니다.”
그리고 기어코 주었습니다. 알고보니 그 분은 미국 항공회사 부사장이었습니다. 직원회에서 말할 기회에 그가 말했습니다.
“한국 사람들 참 정직합니다.”
그리고 2,700 불 이야기를 하였습니다. 그리고 그 세탁소에 옷을 맡기라고 하였습니다. 세탁소가 시온의 대로를 달렸습니다. 후에 그는 700명이 일하는 회사 사장이 되었습니다. 이 사장님은 마음에 예수님의 만달리온을 가지고 있으니 늘 신신요요 마음을 활짝 펴 만나는 사람마다 편안을 전하고 무엇을 하던지 온유한 태도로 임하였기 때문에 모두가 그를 칭찬합니다. 미국사람들은 세탁회사 사장님의 얼굴이 천사의 얼굴이라고 말하였다고 합니다.
얼굴은 내 것이라도 표정은 내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표정으로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표정은 어떤 표정일가요? 스데반의 표정이 하나님이 원하시는 표정입니다. 스데반의 표정은 어떤 표정일가요? 이제부터 우리도 예수의 만딜리온을 마음에 품은자로 신신요요 한 얼굴로 살아가야 할 것입니다.
우리 라온코이노니아는 만딜리온입니다. 여기 이 안에 예수님의 얼굴이 찍혀 있습니다. 동그라미 그리려다 무심코 그린 얼굴이 내 안에 예수님의 얼굴로 그려져야 합니다. 이 모습 그대로 세상이 아무리 뒤숭숭하고 우리의 인생을 두렵게 한다하더라도 , 신신요요 마음을 활짝 피고 편안하며 얼굴빛을 온화하게 스데반의 천사얼굴이 우리 모두의 얼굴이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은혜와 축복이 우리 모두에게 있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