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5월 6일 주일아침 예배 히11:1-3 우리의 믿음
기독교인들이 가장 많이 쓰는 말은 ‘믿음’이라는 단어입니다. 누구 누구는 ‘믿음이 좋다 혹은 약하다’라고 말합니다. 또 성경은‘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못하나니(히11:6)’라든가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롬1:17)’고 합니다. “나는 하나님을 믿는다” “나는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아들이시오 우리들의 구세주이심을 믿는다” 전 세계 기독교인들은 이렇게 똑같은 믿음을 고백합니다. 그런데 왜 많은 기독교인들이 때로는 절망하고 때로는 인생을 한탄하고 때로는 부정하고 불의하고 불법을 행하기도 하는가? 왜 그럴까요? 바른 믿음이 무엇인지 모르기 때문입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믿음’이란 무엇일까요? 그 답이 히브리서 11장 1절에 있습니다. 말씀하기를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니”라고 하였습니다.
2차 세계 대전 이후 유대인들은 유월절이 되면 꼭 아니아민이란 노래를 부릅니다.
노래 제목인 ‘아니 아민’은 히브리어로 "나는 믿는다"라는 뜻 입니다. 이 노래는 본래 2차 세계 대전 독일의 아우슈비츠 수용소에 갇혔던 유대인들에 의해서 불려졌던 노래였습니다. "나는 믿는다. 나의 메시아가 나를 돕기 위해서 반드시 나를 찾아오리라는 사실을." 그런데 그들은 자기의 동료들이 비참하게 가스실로 불려나가 죽어가는 모습을 보면서 다음절을 이렇게 슬프게 불렀습니다. "그런데 때때로 그 메시아는 너무 늦게 오신다."
그러나 그 수용소 안에 있던 젊은 외과 의사 출신의 한 유대인은 이 노래 부르기를 거절했습니다. 왜냐하면 그의 마음에는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내가 하늘에 올라갈지라도 거기 계시며 음부에 내 자리를 펼지라도 거기 계시나이다. 내가 새벽 날개를 치며 바다 끝에 가서 거할지라도 곧 거기서도 주의 손이 나를 인도하시며 주의 오른손이 나를 붙드시리이다.(시139:8-10)"라는 다윗의 고백이 그의 믿음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는 자신의 삶에 대한 하나님의 뜻이 있기에 절대로 죽지 않는다는 확신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수용소에 갇혀 죽을 수밖에 없고 언제 가스실로 데려갈지 모르는 상황 가운데서도 자신의 추한 모습을 다듬기 시작했습니다. 다른 동료들은 죽음을 받아들인 듯 체념하고 깊이 잠들어버린 한밤중에도 그는 홀로 일어나 어느 날 우연히 줍게 된 유리 파편 조각 하나를 날카롭게 갈아서 피가 날 정도로 면도를 했습니다. 그 다음 날 아침, 또다시 죽음의 사자처럼 나치 군병들이 그들의 방을 찾아옵니다. 그런데 나치 군병들은 수염하나 없는 창백한 청년의 모습을 보고는 차마 그를 죽음의 가스실로 데려 가지 못하고 매번 다른 사람을 데리고 갔답니다. 왜냐하면 깨끗한 청년의 모습에서 삶의 강렬한 의지가 보여 죽이기에는 너무 아까웠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얼마 지나지 않아 전쟁이 끝나고 그는 적은 수의 생존자들 중에 하나가 되어 풀려나게 되었습니다. 그는 자신을 향해 활짝 열려 있는 수용소의 문을 빠져 나오면서 아니아민의 노래를 이렇게 고쳐 불렀습니다. "나는 믿는다. 나의 메시아가 나를 돕기 위해 반드시 나를 찾아오리라는 사실을. 그런데 사람들은 너무 서두른다. 사람들은 너무 서둘러 믿음을 포기한다." 그 후 그의 일기가 세상에 공개되었는데 그 일기 속에는 이런 글귀가 쓰여있었습니다. "고통 속에서 죽음을 택하는 것은 가장 쉽고 가장 나태한 방법이다. 죽음은 이렇게 서두를 것이 못된다. 죽음 앞에서 살아 보려는 부활의 의지, 이것이 새로운 창조이다."
이렇게 살아난 그는 바로 세계적인 정신과 의사로 ‘의미요법(logotherapy) ’의 창시자인 빅터 프랭클(Viktor Frankl. 1905년 3월 26일 - 1997년 9월 26일 오스트리아 출신) 이였습니다.
사람들은 흔히 아프거나 돈이 없으면 낙심합니다. 살아갈 의지를 일어버립니다. 명예나 권세를 잃어버리면 절망해서 자신의 인생까지 포기해 버리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를 믿는 사람은 그렇지 않습니다. 자신에게 닥쳐온 엄청난 비극이 있다 할지라도 그 자리에서 하나님을 바라보고 소망을 가집니다. 이것이 믿음입니다.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에서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을 믿는 믿음을 가진 사람들이 기독교인입니다.
어렵고 힘든 일이 있을 때에 나갈 길이 보이지 않습니다. 마음에 어둡고 긴 굴을 걷듯 좌절감이 가득합니다. 어찌하면 좋을까 온갖 궁리를 해도 갈 길을 못 찾는 첩첩산중이요 천길 낭떨어지 앞에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믿음의 눈으로 보면 앞길이 보입니다. 마치 구름낀 하늘이 열리고 환한 빛이 쏮아져 들어오듯 인생에 기쁨이 찾아옵니다. 세상 사람들은 눈으로 보고 손으로 만질 수 있어야 믿습니다. 이것을 감각의 세계라고 합니다. 그러나 믿음의 사람들은 보이지 않고 만질 수 없어도 믿습니다. 즉 믿으면 보여지고 만져진다고 여깁니다. 이것을 영적 세계라고 말합니다. 우리는 비록 육적인 세계에 살고 있지만 모든 판단과 결정은 영적 세계에 살고 있는 사람들로 믿음으로 판단하고 결정합니다. 그러므로 바라는 것들을 보고 보이지 않는 것들을 증거합니다.
아브라함을 우리는 믿음의 조상이라고 부릅니다. 아브라함은 75세에 갈대아 우르에서 하나님의 부름을 받고 ‘너는 네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 내가 네게 지시할 땅으로 가라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케 하리니 너는 복의 근원이 될지라(창12:1-2)’는 말씀을 믿고 무작정 길을 떠났습니다. 99세까지 약속하신 아들을 낳지 못했지만 그는 하나님의 약속을 믿었습니다. 결국 100세에 아브라함의 아내인 사라가 아들 이삭을 낳습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의 믿음을 시험하기 위해 독자 이삭을 제물로 바치라고 합니다. 백세에 얻은 아들인데 제물로 바치라는 하나님의 명령에 불복할만한데도 주신분도 하나님이시오 데려갈 분도 하나님이시라 그는 아들 이삭을 모리아산에서 하나님께 제물로 바치려 하였습니다. 바라는 것의 확신이 없는 사람은 순종할 수 없습니다. 보지 못하는 일에 증거 없으면 불순종하게 됩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그러하지 않았습니다. 그에게는 확실한 믿음이 있었고 하나님은 그의 믿음을 아시고 대신 양을 예비해 두신 여호와 이레의 축복으로 아브라함과 이삭에게 복을 내려 주셨습니다. 성경 66권에 소개된 모든 신앙의 선진들도 똑 같았습니다. 그래서 2절에서 “선진들이 이로써 증거를 얻었느니라” 그러면 우리들도 이로써 증거를 얻어야 할 것입니다.
여러분들에게는 어떠한 믿음의 증거가 있습니까?
언제나 믿음의 사람들에게도 시험이 옵니다. 믿음이 클수록 시험의 강도도 높아집니다. 그러나 아무리 시험이 우리를 아프게 하고 슬프게 하고 괴롭게 하여도 염려하지 말아야 합니다. 오히려 맞서 싸워 이겨야 합니다. 믿음을 지키기 위해 환란을 당하면서도 참아내는 사람은 히 11:38에 말씀하기를 세상이 감당하지 못한다고 하였습니다. 요일5:4에 ‘하나님께로서 난 자마다 세상을 이기느니라 세상을 이긴 이김은 이것이니 우리의 믿음이니라’ 우리는 세상을 이기었다는 증거를 하는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안젤라라는 열한 살 소녀가 있었습니다. 이 소녀는 신경계통을 포함한 신체무력증에 걸리게 되었습니다. 걸을 수도 없었고 겨우 말만 할 수 있었습니다. 의사들도 별로 희망을 갖지 않았습니다. 안젤라는 평생 휠체어에서 보내야하는 처지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열한 살의 소녀는 의지를 잃지 않고 병원 침대에 누워 자기 말을 들어주는 사람이면 누구에게나 "나는 언젠가는 반드시 다시 걷게 되리라"는 이야기를 하곤 했습니다. 그는 시각화 요법을 실시했습니다. 자신이 걸어다니는 모습을 머리 속으로 그려보고 상상해 보는 방법입니다. 치료에 도움이 된다기 보다는 적어도 상상하는 그 시간 동안만큼은 어떤 긍정적인 효과를 줄 수 있다는 기대를 할 수 있었습니다. 안젤라는 열심히 상상 속에서 걷고 걷고 또 달리는 꿈을 매일 꾸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안젤라가 침대에 누워 최선을 다해 자신의 두발을 움직이고 있는 생각을 하는데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침대가 움직이기 시작했습니다. 침대가 이리저리 그 방을 움직여 다녔습니다. 안젤라는 소리쳤습니다. "이것 좀 봐요. 드디어 해냈어요. 난 해냈다구요. 내 몸이 움직였여요." 그런데 이 순간 병원에 있던 다른 사람들이 소리를 지르며 대피소로 갔고, 사람들은 비명을 질렀습니다. 장비들은 바닥에 굴러다니고, 유리제품들은 산산조각이 났습니다. 바로 그 날이 1906년 4월 18일 오전 5시 12분 도심지 80%가 붕괴된 샌프란시스코 대지진이 일어난 날이었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절대로 이 사실을 안젤라에게 말하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안젤라는 자신이 해내고야 말았다고 굳게 믿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두 해가 지난 다음에 안젤라는 다시 학교에 다니게 되었습니다. 물론 자신의 두 다리로 걸어서, 목발이나 휠체어 따위는 필요 없게 되었습니다. 이 이야기의 후기에는 이렇게 기록되어 있었습니다. “생각해 보라 샌프란시스코와 오클랜드 일대의 대지를 뒤흔들 만큼 강한 믿음을 가진 사람이 하찮은 병 따위를 정복할 수 없겠는가?”
(***시각화-칼 사이몬튼 요법-칼 사이몬튼Carl Simonton과 그의 부인이며 정신과의사인 스테파니 마튜에 의해 개발된 이미지요법을 말한다.)
시각화는 마음뿐 만 아니라 어느 정도는 신체까지 다시 프로그램하기 위해 상상력을 사용하는 것이다. 시각화는 생각하고 말하는 뇌를 뛰어 넘어 이미지를 통해서 이뤄진다. 이미지들은 꿈에서 만나는 것들과 같이 정신의 깊은 영역에서 나온다. 말하자면, 시각화의 목적은 우리가 성취하고자 하는, 즉 병마와 싸워 이겨 건강을 되찾고 회복하여 완전한 삶을 누리는 것을 미리 마음 속에 그리는 것이다. 1970년대 미국 방사선 종양학자 칼 사이몬튼이 암 환자에게 시각화를 사용하는 방법을 처음 개발했다. 당시 그의 부인이었던 심리 학자 스테파니 매튜 사이몬튼 과 함께 쓴 책인 ‘다시 건강해지기’ (Getting Well Again)은 여러 번 되풀이 하여 재판되고 여러 언어로 번역되었다.
사이몬튼 기법의 핵심은 질병에 해당하는 한 가지 이미지를 정하고, 치료에 대한 또 다른 이미지를 정해 치료의 이미지가 질병 이미지를 서서히 없애도록 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 위에서 설명했던 깊은 안정의 상태에서 거슨요법(Dr.Max Gerson에 의하여 창안) 을 행하는 환자는 자신의 종양을 큰 검은 진흙 덩어리로 시각화한다. 그리고 주스는 그 진흙을 공격하여 서서히 깨끗하게 없애는 강력한 능력을 지닌 귀중한 음료로 시각화 한다. 문자로 이 글을 읽기만 하면, 이상하게 느껴지지만, 진지하게 열심히 연습한다면, 놀라운 결과를 경험할 수 있을 것이다.
일상 생활 중에 실행 가능한 간단한 시각화 연습을 살펴보자. 실제로 존재하거나 아니면 상상으로 존재하는 완벽하게 아름다운 장소에 있는 자신을 그려보라. 자신이 안전하고 행복하다고 느끼는 장소이면 된다. 상상 속에서 자신에게 알맞은 방법으로 스스로를 편안한 상태로 한다. 예를 들어, 부드러운 그물침대에 누워 천천히 흔들리고 있거나, 아름다운 정원을 거닐거나, 사랑하는 이와 함께 행복하게 앉아있는 상태 등이다. 상상 속에서 시간과 장소를 벗어나 자신에게 맞는 환경을 정하고, 평화로움과 아름다움을 만끽하며 원기를 회복한다.
자신이 바라는 모습을 그려보라. 건강하고, 강하며, 활동적이고, 가장 즐기고 싶은 것을 하고, 사랑을 주고 받으며, 평화롭게 모습으로 그려본다. 이런 이미지를 마음과 정신에 담아둔다. 그리고 천천히 현재의 현실로 되돌아온다. 이런 기억은 삶에 좋은 결과를가져다 줄 것이다. 실제로, 성공한 운동 선수들은 중요한 경기를 앞두고 비슷한 기술을 사용한다. 그들은 자신의 종목에서 멋진 플레이를 해내고 있는 자신의 모습을 시각화 한다.
상상력은 강력하다. 잘만 사용한다면, 신체 기능을 촉진하고 정상으로 돌아오게 할 수 있다. 비용이 들지 않고, 신체에 부작용이나 해독이 전혀 없다. 시각화는 거슨요법을 따르는 환자들에게 훌륭한 치료의 보조 수단이다)
하나님은 우리 인간에게 사람의 경험에서 얻은 것보다 더 놀라운 힘을 주시었습니다. 미처 사람들은 그것을 깨닫지 못하였을 뿐입니다. 오히려 옛날사람들은 과학이 발달하지 않았기 때문에 초자연적인 힘을 기대하였지만 오늘의 사람들은 자신들의 경험과 과학의 힘에 의지하여 하나님이 나에게 주신 그 큰 능력을 알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믿음은 바로 이 큰 능력을 알고 또 이용 할 줄 아는 일입니다.
믿음은 우리가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장차 바라는 것들이 반드시 이루어질 것이라고 확신하는 것입니다. 언제 이루어질지 모릅니다. 그러나 보이지 않는다고 이루지지 않는다고 누가 장담할 것입니까? 하나님이 주신 은혜와 능력으로 이루 질 것을 믿는 믿음이 기독교인의 믿음입니다.
복음성가<예수의 이름으로 나는 일어서리라>에 이런 가사가 있습니다.
"예수의 이름으로 나는 일어서리라
주가 주신 능력으로 나는 일어서리라.
원수가 날 향해와도 쓰러지지 않으리
주가 주신 능력으로 주가 주신 능력으로 주가주신 능력으로 일어서리"
아브라함은 25년을 기다려서야 겨우 이삭을 얻었습니다. 어떻게 아브라함의 자손들이 하늘의 별과 같이 많게 해 주겠다는 약속을 믿을 수 있습니까? 노아는 홍수로 세상을 심판하겠으니 방주를 지으라고 했습니다. 노아는 그 말씀을 믿고 무려 120년 동안 방주를 지은 후에 홍수심판이 내려졌습니다.
믿음에는 오래 참음이 필요합니다. 모든 염려와 걱정은 오래 참는 믿음이 없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염려함으로 키를 한 자나 크게 할 수 있느냐(마6:27)’라고 꾸짖으시며, 먹을 것과 마실 것과 입을 것을 위하여 염려하지 말라고 합니다마6:31). ‘너희는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먼저 구하라(마6:33)’고 하십니다. 믿음은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믿는 것입니다. 믿음을 온전히 이루기 위해서는 반드시 오래 참는 시간이 필요합니다.
약 1:3,4 “이는 너희 믿음의 시련이 인내를 만들어 내는 줄 너희가 앎이라. 인내를 온전히 이루라 이는 너희로 온전하고 구비하여 조금도 부족함이 없게 하려 함이라.”
세상은 너무 급변하고 빠르게 바뀌어져 가고 있기 때문에 ‘믿음’으로 살아간다는 것이 어리석은 일이라 하겠습니다.
젊은이들이 오늘 빠르게 지나가는 시대의 주인공이라 그들이 보기에 믿음으로 산다는 것은 바보같은 일이라 볼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젊은이들이 교회를 떠납니다. 물론 땅에것만 생각하는 사람들에게는 그렇게 보일 것입니다. 그렇게 보기 때문에 주일날 교회로 오지 않고 등산하러 가고 낚시하러 갑니다. 그러나 기독교인들은 세상을 바라고 사는 사람들이 아니고 하나님의 나라를 바라보며, 이 땅에 사는 100년의 세월을 바라보지 아니하고 영원한 시간을 바라보며 살아갑니다. 그러므로 기독교인들은 세상에 살면서 오래 참음의 믿음이 필요 한 것입니다. 그래서 갈라디아에서 성령의 아롭가지 열매 중에 4번째 열매로 오래 참음을 말씀하고 잇습니다.
바울 사도는 기독교의 핵심적인 믿음을 “믿음으로 의롭게 된다”에 중점을 둡니다. 이것을 의인론(義認論)이라고 말합니다. 하나님께서 오래 참고 보이지 않는 증거를 말하는 우리들의 믿음을 보시고 아브라함에게서처럼 의롭다고 인정해 주신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바라는 것들과 보이지 않는 것들에 대해 은혜를 주신다는 것입니다.
유명한 화가가 벽화를 그리고 있었습니다. 그는 그것을 걸작으로 만들 셈이었습니다. 그가 벽화를 그리고 있는 동안 그의 친구가 스튜디오 뒤에서 그것을 보고 있었습니다. 화가는 짙은 청색과 회색으로 벽화의 배경을 깔고 있었습니다. 화가는 좀 더 좋은 각도에서 그림을 보기 위해서 사다리에서 내려와 친구를 향해서 몇 걸음 다가갔습니다. 화가는 흥분한 상태에서 “이것은 내 일생일대의 걸작이 될 것 일세 ! 자네는 어떻게 생각하는가 ?” 하고 친구에게 말을 건넸습니다. 그 때 친구는 “내가 보고 있는 것은 크기는 하지만 멋이 없이 권태로운 그림뿐인 걸.” 하고 대꾸했습니다. 이 말을 들은 화가는 금방 이렇게 응수했습니다. “아, 내가 잊었군. 자네가 그림을 볼 때는 그림의 현재 상태만 볼뿐이지. 내가 그림을 볼 때는 그림의 완성될 상태를 본다고 !”
우리는 현재 상태의 시련만 보고 실망하고 낙담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시련은 하나님이 준비하신 상급이라는 완성된 작품을 향해 진행하는 과정에 불과합니다. 완성된 작품을 향해서 나아가는 과정에서 점점 더 아름다워져 가는 것입니다.
어느 대기업의 임원인 장로님의 고백입니다. 사업상 장관을 모시고 대접하는데 장관이 자꾸 술을 권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장로님은“장관님, 저는 크리스챤입니다. 술을 못합니다."하니 장관이 정색을 하며 얼굴색이 변합니다. "그래요, 크리스챤은 술을 먹지 않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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