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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병호목사의 교회이야기

전병호 목사의 설교



2018년 4월 22일  주일아침예배  행 22:2-21 무매적암雾霾積巖 의 죄罪(미세먼지가 쌓여 바위가 되듯 작은죄가 가장 큰죄가 된다.)

 

오늘은 세계 모든 나라가 지키는 지구의 날입니다. 1969년 지구의 환경을 보호하자는 취지로 존 맥코넬의 제안과 1970년 게일로드 넬슨, 데니스 헤이즈의 주도로 1970년 4월 22일 미국 전역에서 지구의 날 행사가 펼쳐지면서 기념일로 정해지게 되었습니다. 1990년부터는 전 세계에서 지구의 날을 기념하기 시작했으며,  20주년이 되던 1990년부터 지구의 날은 전 세계의 기념일로 141개국의 시민들이 참여했으며, 2009년에는 국제연합에서 4월 22일을 '어머니 지구의 날(International Mother Earth Day)’로 지정하였습니다. 특히 우리나라를 비롯한 중국 일본등 동아시아에서 가장 심각한 문제가 미세먼지입니다, 미세먼지는 인체에 해를 줄 뿐 아니라 자연을 병들게 하며 지구의 환경을 오염시키는 절대 주범이 되고 있습니다. 오늘 아침엔 무매적암 미세먼지가 쌓여 바위가 되듯 작은죄가 가장 큰죄가 된다는 제목으로 말씀을 전하려고 합니다. (雾 안개무 霾 흙비매)

 

눅 19: 45-46 “성전에 들어가사 장사하는 자들을 내쫓으시며 그들에게 이르시되 기록된 바 내 집은 기도하는 집이 되리라 하였거늘 너희는 강도의 소굴을 만들었도다 하시니라.”

 

당시 예루살렘성전은 성소와 뜰로 구별되어 있고 성소 앞뜰엔 유대인 남자들만 들어가 예배에 참가하고 그 밖으로 여인들이 들어가 예배에 참석하는 뜰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 밖으로 이방인들이 들어가 예배하는 뜰로 나뉘어져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그 뜰 역시 예배하는 거룩한 장소인 것입니다. 그런데 그 예배드리는 이방인 뜰이 장터가 되어버린 것입니다. 그곳에서 상인들이 희생제사를 위한 물품들인 짐승이나 필요한 기름, 포도주등을 팔았습니다. 유월절 명절 때가 되면 전 세계에 뿔뿔이 흩어진 유대인들과 유대교를 믿는 이방인들이 예루살렘 성전에서  희생제사를 드리러 모여 들게 됩니다. 이때에 사람들은 희생제사에 쓰일 제물로 소나 양 비둘기 등을 가지고 오는데 먼데서부터는 가지고 올 수 없기에 자연히 장터에서 구입을 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이방인 뜰은 이 장사꾼들로 시끌법쩍 하였습니다. 더군다나 유대인 남자는 1년에 반세겔의 성전 세금을 유월절 때에 성전에 납부해야 하기 때문에 이때 당시 통용되던 헬라, 로마 또는 시리아, 애굽의 화폐를 세겔로 바꾸어 주는 환전상들이 영업을 하였습니다. 문제는 이런 장사꾼들은 영업을 허가해 준 제사장들과 야합하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당연히 제사 드리는 짐승 매매나 환전에 폭리가 취해졌던 것입니다. 그 폭리금 중 일부가 제사장들에게 흘러갔고 성전은 그야말로 뇌물수수의 장소요 장사꾼의 강도소굴이 되고 말았던 것입니다. ( 당시의 가치로 따진다면 한 세겔은 4 데나리온에 해당하는 금액입니다. 1데나리온은 노동자의 하루 품삯입니다. 그러면 반 세겔이면 두 데나리온에 해당하는 금액이겠지요. 현재 우리나라 하루 인건비를 10만원으로 하면 반 세겔은 20만 원 가량입니다.)

 

이런 모습을 보시며 주님은 장사하는 사람들에게  “내 집은 기도하는 집”이라고 성경 말씀을 외치시며 그 장사꾼들을 쫒아 내셨습니다. 이 말씀은 이사야 56장 7절 말씀인 '내 집은 기도하는 집이 되리라'는 구절과 예레미야 7장 11절의 말씀 '너희는 강도의 소굴을 만들었도다'는 구절을 인용하셨던 것입니다. 성전은 하나님의 집입니다. 그런데 성전을 협잡꾼들이나 강도 같은 장사꾼들의 소굴이 되어버린 당시 성전의 모습을 보시고 예수님은 분노하셨던 것입니다. 그래서 채찍으로 그들을 몰아내시고 환전 책상들을 뒤 엎어버리셨던 것입니다. 이것을 예수님의 성전 청결이라고 말합니다.


고전 6:19“너희 몸은 너희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바 너희 가운데 계신 성령의 전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  너희는 너희 자신의 것이 아니라” 는 말씀이 있습니다. 구원 받은 믿음의 사람들의 몸은 성령께서 거하신 성령의 전 곧 성전과 같다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많은 예수를 믿는다는 사람들 중에 자신들의 마음을 온갖 죄가 득실거리는 도적의 소굴로 만들고 있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우리 주 예수님이 우리의 죄를 씻어 정결케 해 주셨는데 여전히 자질구레한 죄들이 마치 자갈마냥 박혀 있는 것입니다. 이 자갈돌 같은 죄를 우리 마음에서 제거해야 마음에 평안과 기쁨이 성령의 충만함이 있게 되는 것입니다.

 

요 8:3-11에 말씀을 보면 성전마당에서 예수님이 하나님나라에 대하여 가르치실 때에 사람들이 간음을 하다 잡힌 여자를 끌고 들어왔습니다. 이 여인은 얼마나 수치스러었을까요?  그리고 돌을 들고 곧 죽일 듯이 노려보는 성난 군중에 둘러 쌓여 얼마나 무서웠을까요? 당시 간음한 여인은 사람들에게 돌에 맞아 죽게 되는 법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이 여인을 예수님 앞에 끌고 온 것입니다. 이 여자를 끌고 온 목적이 따로 있습니다. 예수님을 고소할 구실을 찾기 위해서입니다. 예수님을 어떻게든 책잡아서 법정에 고발하기 위해서입니다. 만일 예수님이 죽이라고 하면 당시 사형권이 로마 총독에게 있기 때문에 로마법을 어긴 죄로 총독에게 고발할 것이고, 죽이지 말라 하면 모세의 율법을 어긴 죄가 되어 율법을 어기면 대제사장에 끌고가 고발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제 빠져 나갈 수 없다고 생각하고 의기양양하게 "모세는 이렇게 말했는데 선생은 이 여인을 죽여야 할까요 아니면 살려줘야 할까요? 어떻게 하겠나이까?" 하고 예수님을 몰아세웁니다. 예수님은 땅에 무어라고 글씨를 쓰시었습니다. 무슨 글을 쓰셨을까요? 아마도 “에인 오세 토브, 에인 감 에하드 : 선을 행하는 자 없도다. 한 사람도 없도다(시14:3)”이런 말씀을 쓰셨을 것입니다. 그리고 하신 말씀이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쳐라."하셨습니다. 그랬더니 사람들이 생각합니다. 만일 자기에게 조금이라도 죄가 있다면 예수님 말씀처럼 돌을  들 수 없는 일이고 만일 죄가 없다하여 돌을 던지면 이는 하나님을 속인 죄로 더 무서운 율법을 어기게 되어 자기가 돌에 맞아 죽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람들은 슬금슬금 하나씩 하나씩 다 돌아가고 말았습니다. 그 자리에는 여인만 남았습니다. 예수님은 여자에게 말씀하시길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우데 에고 세 카타크리노) 가서 다시는 죄를 범하지 말라." 고 말씀하십니다. 도대체 예수님이 누구이시기에 이 선언이 가능할 수 있으셨을까요? 유대인들은 오래 동안 용서는 하나님만이 하시는 일이라고 믿어 왔습니다.  예수님은 죄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죄가 없으니까 여인에게 돌로 쳐도 됩니다.  그러나 심판의 권리를 포기하시었습니다.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라." 여기에 구원이 있습니다. 여기에 놀라운 은총이 있는 것입니다. 바울 사도는 롬8:1에서 이렇게 선언합니다.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우데 아라 눈 카타크리마 토이스 크리스토 예수)"  이 여인은 회개하지도 않았는데 어떻게 예수께서 용서하실 수 있었을까요? 회개는 용서의 선행조건입니다. 그러나  이 여인이 사람들이 다 떠나간 후 도망가지 않고 예수님 앞에 엎드려 있는 바로 그 모습이 회개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지적을 받고 자취를 감춘 많은 사람들은 양심의 가책은 느꼈으나 회개할 생각은 없었던 것입니다.  "주님, 저는 죄인입니다. 퀴리애 엘레이 손 나를 불쌍히 여겨주세요."  하는 심정으로 여인은 엎드려 있었던 것입니다. 그것은 입술의 고백이상으로 중요한 회개입니다. 예수님은 이 여인의 마음의 회개를 아시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참 안타까운 것은 그 회개와 용서의 자리에서 구원받은 사람은 여인 한 사람밖에 없었다는 사실입니다. 다른 사람들도 자신의 부끄러운 죄를 깨달았으나 예수님께 용서받으려 하지 않고 모두 돌아갔습니다. 단지 그들은 여인의 죄를 더 이상 정죄하지는 않았으나 자신의 죄를 해결 받으려는 아무런 시도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그들의 죄는 그대로 있었으며 그 죄 때문에 그들은 하나님의 심판을 면할 수 없게 되었을 것입니다. 이 사람들은 어쩌면 여인처럼 큰 죄를 짖지 않았기에 회개할 필요성을 깨닫지 못하였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 속에 가득 차 있는 그 자질구레한 죄는 결코 여인의 큰 죄 보다 가볍다 할 수 없을 것입니다. 큰 바윗돌 무게나 그 바위 돌 만큼의 모아진 자갈의 무게나 똑 같기 때문입니다. 그들도 그들의 그 자갈돌 같은 죄를 회개하고 용서 받아야만 구원받을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여인의 그 다음을 성경에서 찾아보게 됩니다. 
눅 7장36-50을 보면 예수님이 시몬이라는 바리새인의 초대를 받아 식사를 하게 되었습니다. 
이 때 반갑지 않은 한 여인이 등장합니다. 39절에 보니 바리새인 시몬이 속으로 “이 여자가 누구며 어떠한 자 곧 죄인인 줄을 알았으리라”고 말합니다. 이 여인은 앞서 예수님께서 사람들에게 죽을 뻔 하였지만 주님의 용서를 받은 그 음행한 여인이었습니다. 사람들이 이미 알고 있는 죄인인 이 여인이 감히 바리새인의 식탁에 들어 올 수 없는 일입니다. 그러나 여인은 용기를 내어 예수님 앞으로 나온 것입니다. 당시 손님들이 식사를 하려고 할 때는 왼팔로 머리를 기대고 소파에 옆으로 비스듬히 누워서 오른 손으로 식사를 하였습니다. 예수님 앞으로 무작정 달려나와 예수님 발 곁에 서서 “울며 눈물로 그 발을 적시고 자기 머리털로 닦고 그 발에 입 맞추고 향유를” 부었습니다. 그녀는 눈이 퉁퉁 분채로, 회개하며, 감사하며, 겸손히 예수님의 발 앞에 무릎을 꿇었습니다. 바리새인은 눈이 휘둥그레 뜬 채 놀라움을 금할 수 없었습니다. 속으로 생각하기를 ‘이 여자가 얼마나 더러운 여자인지 알지도 못하는 것을 보니 이 예수라는 작자는 선지자인줄 알았더니 선지자가 아닌 한심한 사람이로군!’ 이때 예수님은 시몬의 마음을 읽으시고 한 가지 비유를 말씀하십니다. 빚진 자 둘이 있습니다. 하나는 오백 데나리온을 빚졌고, 다른 하나는 오십  데나리온을 빚졌습니다. 한 데나리온은 하루 노동 품삯을 말합니다. 그런데 채무자가 둘 다 탕감하여 주었습니다. 이 말씀을 하신 후 예수님께서 질문하십니다. 둘 중에 누가 그 채무자를 더 사랑하겠느냐? 이 말씀에서 누가 더 감사하겠느냐 라는 말 대신에 누가 더 사랑하겠느냐 로 바꾸어 말씀하신 것은 그 여인의 마음은 다만 감사의 마음만이 아님을 아시기 때문입니다. 시몬이 대답합니다. "많이 탕감 받은 자입니다."  예수님께서 시몬에게 말씀하십니다(44-46절).“시몬아, 너는 내가 네 집에 들어올 때에 발 씻을 물도 주지 않았다. 그러나 이 여인은 눈물로 내 발을 적시고, 그 머리털로 씻었다. 시몬아 너는 정상적인 문안 인사도 하지 않았다. 그러나 이 여인은 들어올 때부터 쉬지 않고, 내 발에 입 맞추었다. 시몬아 너는 머리에 싸구려 감람유도 붓지 않았다. 그러나 이 여인은 내 발에 그 값비싼 향유를 부었다.”  예수님께서 결론적으로 설명하십니다. "너는 나를 사랑하지 않지만,  이 여인은 나를 사랑한다. 그리고 그 이유는 죄 사함을 이미 깊게 체험하였기 때문이다. 너 시몬은 죄 사함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지만, 이 여인은 죄 사함을 알며, 그녀는 죄 사함을 깊게 체험하였기 때문에 나를 이렇게 많이 사랑하는구나! 이 여인의 나를 향한 그 지극한 사랑! 이는 바로 하나님의 용서를 깨달았기 때문에 나오는 사랑이다. 자신의 죄를 적게 사함을 받은 자는 나를 적게 사랑하고, 많이 사함을 받은 자는 나를 많이 사랑한단다. 반면에 자기 죄를 깨닫지 못하는 자는 죄 사함을 모르며, 따라서 나를 적게 사랑하는구나! 시몬아!"


예수님의 논리는 그 여인이 죄 사함을 알았기에 나에게 감사와 사랑을 표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죄 사함을 깨닫지 못하는 사람은 하나님께 감사하지 못하며 주님을 사랑하지 못는 것입니다. 곧 죄 사함은 은혜의 체험이었던 것입니다. 바리새인은 평소에 자신이 의인이라고 자랑하며 살던 사람입니다. 그러나 그는 여인의 죄에 비교하여 모래알 같은 자질구레한 죄가 있지만 그런 죄는 회개할 필요를 느끼지 못하였고 따라서 죄 사함도 받지 못하였고 은혜도 체험하지 못하고 물론 구원도 받지 못하고 예수님을 사랑하지도 않았던 것입니다.  

롬 5:20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더욱 넘쳤나니 ”

죄가 큰 곳에 은혜가 큽니다. 이것은 예수님의 가르침이기도 하고 사도 바울의 고백이기도 합니다. 죄를 탕감 받는 경우, 용서를 받는 경우 더 큰 죄를 용서받는 사람이 작은 죄를 용서받는 사람보다 은혜가 더 큽니다. 반면 작은 죄를 용서받은 사람은 감사는커녕 오히려 큰 죄를 용서받은 사람에 대해 못마땅하게 여깁니다. 공평하지 않다고 여깁니다. 그러니 감사가 있을 수가 없습니다. 자신이 큰 죄인이라고 여길 때, 그에 비례하여 더 많이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를 느낍니다. 그러니 하나님께 귀한 예물을 드리는 것이 아깝지 않습니다. 감사함이 있습니다. 기쁨이 있습니다. 평안이 있습니다. 이 땅에 사는 동안 행복한 삶을 살려면, 평안한 삶을 살려면 이 세 가지는 필요합니다. 첫째, 항상 회개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자신에게 자질구레한 아주 작은 죄라고 하여도 용서 받지 못하면 구원받을 수 없고 은혜를 체험하지도 못하고 그래서 예수님을 사랑하지도 못합니다. 작은 죄라도 회개하지 못하는 사람은 마음에 죄의 모래 한가마니가 있는 것 같다고 하겠습니다.  둘째, 항상 감사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생각해 보세요 내 안에 모래알 같은 죄가 촘촘히 박혀 있는 이상 어찌 행복할 수 있겠습니까? 그런데 주님께서 그것들을 다 씻어 주셨으니 어찌 감사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우리는 회개한번 감사한번 회개 두 번 감사 두 번 이렇게 감사와 회개는 정비례하게 됩니다. 우리가 회개 할 때 예수님의 보혈의 피 한 방울이 흘려진다고 생각하면 어찌 수 만 번의 감사한들 과하다 할 것입니까? 감사 하지 못하는 사람은 마음에 죄의 모래 열가마를 쌓아두는 것 같다고 하겠습니다.  셋째, 그러므로 우리는 항상 기뻐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은총을 체험한 사람은 자신의 죄가 사함 받고 구원 받았음을 알기에 어찌 인생을 괴롭고 슬프게 보낼 것입니까? 기쁨이 내안에 가득하여야 합니다. 그래서 내 몸이 성령의 전이라는 사실을 세상에 밝혀야 합니다. 만일 우리가 은혜받지 못하고 기뻐하지 못한다면 이는 죄의 모래 백가마가 내 마음에 가득히 쌓여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흔히 죄라면 십계명을 어기는 큰 죄만 생각하고 작은 잘못에 대해서는 가볍게 생각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일상에서 저지르는, 죄라는 의식조차 없이 양심의 가책도 느끼지 못하고 저지르는 작은 잘못들은 그 잘못 자체로 보면 대수롭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우리를 만성적인 죄의 상태에 빠뜨려 주님과 멀어지게 만든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사실 우리네  보통 사람들이 큰 죄를 짓는 일은 흔치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생활 안에서 습관적으로 수많은 잘못을 저지르고 있습니다. 흔히 알고도 지은 죄 모르고도 지은 죄가 얼마나 많을 것입니까? 만일 큰 죄를 지은 남편은 천당에 들어갔지만 큰 죄가 없었던 부인이 천당에 들어가지 못한 이유는 언제 어디서 지었는지 조차 알지 못하는 작은 모래알 같은 잘못들 때문입니다. 이런 자질구레한 죄들, 바윗돌 같이 큰 죄도 있지만, 자갈 같은 죄도 모이면 바윗돌 같은 죄가 되고, 모래알 같이 작은 죄라도 모아지면 바윗돌 마냥 큰 죄가 되기도 하는 것입니다. 더 나아가 미세 먼지 같은 죄라도 그것이 내 마음에 가득하면 오히려 큰 죄 지은 것 보다 더 무서운 심판의 대상이 되기도 하는 것입니다. 무엇이 미세먼지 같은 죄일까요? 그것은 아주 사소한 감정으로 일어난 죄입니다.

 

미세먼지가 문제가 되는 이유는 크기가 작기 때문입니다. 공기 중에 떠다니는 일반적인 먼지는 코털이나 기관지 점막에서 대부분 걸러져 배출됩니다. 하지만 미세먼지(PM10 PM이란 Particulate Matter입자상물질의 약어이며 숫자 10은 앞에서 언급된 지름 10㎛를 나타낸다.)는 지름이 머리카락 굵기의 1/10정도인 10㎛로 코, 구강, 기관지에서 걸러지지 않고 몸에 축척됩니다. 기관지에 쌓이면 가래가 생기고 기침이 잦아집다. 또 기관지 점막이 건조해지면서 세균이 쉽게 침투, 만성 폐질환이 있는 사람은 폐렴과 같은 감염성 질환에 취약해집니다. 전문가들은 “미세먼지의 크기가 작은 탓에 폐포를 통해 혈관에 침투해 염증을 일으킬 수 있는데 이 과정에서 혈관이 손상되면서 협심증, 뇌졸중의 위험을 높인다”고 말하였습니다. 또 전문가들은 “미세먼지가 쌓이면 산소 교환을 어렵게 만들어 질환을 악화시키기도 한다”고 덧붙였습니다. 피부에도 악영향을 미칩니다. 미세먼지가 모공을 막아 여드름이나 뾰루지를 유발하고 피부를 자극하면서 아토피 피부염을 악화시키기도 합니다. 알레르기 비염 환자의 경우 미세먼지가 코 점막을 자극해 증상을 악화시킨다. 또한 두피에 미세먼지가 섞인 눈을 맞으면 모낭 세포의 활동력을 떨어뜨려 모발이 가늘어지거나 쉽게 부러지고 작은 자극에도 쉽게 빠진다고 합니다. 미세먼지는 세계보건기구(WHO) 산하 국제암연구소(IARC)가 지정한 1급 발암물질입니다. 작년 8월, 덴마크 암학회 연구센터는 유럽 9개국 30만 명의 건강자료와 2095건의 암환자를 대상으로 미세먼지와 암 발병률을 연구한 논문을 발표했습니다. 내용을 살펴보면 초미세먼지 농도가 5㎍/㎥ 상승할 때마다 폐암 발생 위험은 18% 증가했습니다. 미세먼지도 10㎍/㎥ 늘어날 때마다 폐암 발생 위험이 22% 증가했는 것입니다. 조기사망위험도 커지고 있습니다. 네덜란드 위트레흐트대학 롭 비렌 박사팀이 영국 의학전문지 랜싯(Lancet)에 발표한 자료에 따르면 초미세먼지 농도가 5㎍/㎥ 증가할 때마다 조기사망 확률이 7%씩 증가하였습니다. 서유럽 13개국 36만 7000명의 건강 자료를 분석한 결과입니다.

 

루가15,11-32에 탕자의 비유의 말씀이 있습니다. 탕자는 아버지의 재산의 허랑방탕 탕진하고 거지꼴이 되어 돌아 왔습니다. 그러나 아버지는 그런 아들을 가슴에 안고 죽었던 내 아들이 돌아 왔다고 기뻐하며 큰 잔치를 열었습니다. 그런데 여기 큰아들의 태도가 마뜩지 않습니다. 큰 아들은 아버지 곁에서 묵묵히 일해 온 효자였습니다. 그런데 재산을 다 날리고 돌아온 작은 아들을 맞이하는 아버지의 마음을 이해할 수 없고 따라서 불평불만이 가슴에 가득하였습니다. 그는 돌아온 동생에 대해 전혀 반갑지 않았고 오히려 분노하고 미워하게 되었습니다. 아마도 사람들이 가지게 될 나쁜 마음 악한 생각들이 그의 마음에 가득하였습니다. 그러나 크게 큰아들의 잘못을 말하면 첫째, 사랑할 줄 몰랐습니다. 큰아들에게는 동생을 사랑하는 마음이 없었습니다. 집을 떠나 방탕하던 동생이 회개하고 돌아왔을 때 문밖에만 서 있지 말고 "사랑하는 내 동생아" 하고 부르면서 빨리 집 안으로 들어갔어야 했습니다. 그의 마음에  마치 미세먼지 뒤집어쓰듯 미움이 뿌연하게 채워져 있었습니다. 
둘째, 감사할 줄 몰랐습니다. 큰아들은 자기에게 염소 새끼조차 준 일이 없다고 불만이 가득히였습니다. 자기의 공로를 나열하면서 아무런 보상도 주어진 적이 없다고 불평했습니다. 그는 철저하게 이기주의자 였습니다. 아버지를 위한다고 하였지만 실은 자기만을 위해 사는 인생이었습니다. 그 집안의 문제가 바로 동생의 가출이요 타락생활로 아버지의 근심이 컸었습니다. 이제 동생이 돌아와 문제가 해결되었으니 감사해야 할진대 감사하지 않고 그의 마음에 분노가 미세 먼지모양 앞이 보이지 않을 정도 이었습니다.
셋째, 화해할 줄 몰랐습니다. 동생이 지금 잘못을 뉘우치고 돌아왔으면 화해하고 받아들여야 하는데, 동생을 받아들이지 않고 동생의 허물을 용서하려 하지 않았습니다.  마치 미세먼지가 그의 마음에 가득하여 동생을 정죄하는 마음으로 아버지의 잔치에 참여하지 못하였습니다.

저는 이 큰 아들에게 미세 먼지 같은 감정의 죄가 있다고 말씀드리고 있습니다.  우리는 한평생 살아가면서 가정에서나 밖에서나 많은 사람들과 관계 맺고 살고 있는데 이 관계가 어그러지고 삐걱거리고 마침내 끊어지는 경우가 얼마나 많았는지 모릅니다. 그 관계들이 각가지 감정의 상처로 불평불만 미움 시기 질투 교만 이기심 자만심 배려심 없고 모른척하거나 무관심하는 등 이런 일들로 사람들은 마음에 희뿌연한 미세먼지 같은 감정의 죄가 채워지게 됩니다.  

 

롬 1:29이하에 23가지 죄의 목록이 있습니다. 그 대부분 죄 목록들은 다 감정상 일어나는 미세 먼지 같은 죄들입니다  

종교개혁자인 루터가 이런 말을 하였습니다. “새가 내 머리 위를 날아다니는 것은 어쩔 수 없다. 그러나 내 머리에 둥지를 치는 것은 막을 수 있다.” 죄도 그렇습니다. 내 삶에 미세먼지처럼 악한 것들이 날아올 때, 머리 위를 지나가게는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내 마음에 둥지를 치는 것은 막을 수 있어야 합니다. 미세먼지 죄가 큰 바윗돌 같은 죄보다 적지 않습니다. 곧 바로 제거하지 않으면 그 미세 먼지가 내 영의 호흡을 막고 내 미음을 죽여 버릴 것입니다.

어떻게 이 미세먼지 같은 감정상의 죄를 제거 할 수 있겠습니까? 성경은 씻으라고 하였습니다. 사도 바울은 사도행전에서 자기가 예수 만나고 세례 받게 된 경험을 세 번이나 증거하였습니다(행9:1-19,22:6-16,26:12-18). 행22:16에 “너의 죄를 씻으라(아폴루오, 전부 씼다. 목욕하다) ”고 말씀하였습니다. 사도 바울이 예루살렘에서 유대인들의 박해 중에 자신의 세례 받게 된 과정을 증거합니다. 사울이 믿는 자들을 박해하기 위하여 다메섹으로 가다가 다메섹 도상에서 부활하신 예수를 만나게 되었습니다. 그는 눈이 안보여 사람들에게 이끌려 다메섹에 들어가게 되었고, 거기서 경건한 예수님의 제자 아나니아를 만나게 되었습니다. 사울은 아나니아를 통해 다시 보게 되었고, 예수님께서 자기에게 주신 예수 증인의 사명을 받게 됩니다. 아나니아의 최후의 권면은 "이제는 왜 주저하느냐 일어나 주의 이름을 불러 세례를 받고 너의 죄를 씻으라"는 말 이였습니다. 사울은 일어나 아나니아에게 세례를 받고 죄를 씻었습니다. 아폴류오 전부 다 씻어버렸습니다. 목욕하듯 씻어냈습니다,  그 후 사울은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구세주이심을 전하게 되었음을 증언하였습니다.


예수를 십자가 사형 판결을 한 빌라도는 자기는 죄가 없다고 대야에 물을 떠다 손을 씻었습니다(마27:24). 본디오 빌라도는 죄 없는 예수를 사형시킨 큰 죄인입니다. 빌라도는 예수를 십자가 형에 처하도록 판결한 후 얼마 후에 총독의 자리에서 쫓겨나게 되었습니다. 전설에 의하면 흐릿한 저녁이면 작은 못가에 나타나 예수 죽인 죄악 된 손을 씻느라 애썼다는 것입니다. 그러다가 그는 자살하였다는 것입니다. 빌라도의 죄는 어떤 물로도 씻을 수 없었습니다.

 

죄는 오직 예수의 십자가의 보혈로만 씻을 수 있습니다. 더러운 몸은 물로 씻을 수 있고, 수많은 죄는 오직 예수의 피로만 씻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죄를 씻고 용서하시기 위하여 독생자 예수님을 보내 주셨습니다.  아나니아는 죄인 사울에게 주의 이름을 불러 세례를 받고 너의 죄는 씻으라 하였습니다. 누구든지 십자가에서 인류의 죄를 씻기 위하여 피 흘리고 돌아가신 예수를 믿기만 하면 죄 씻음, 죄 용서를 받게 됩니다. 이것을 구원이라고 합니다. 우리는 죄를 씻었습니까? 나는 죄를 씻었습니까? 누가 천국에 들어가는가? 요한계시록은 "어린양의 피에 그 옷을 씻어 희게 한" 자들만 이라고 합니다(계7:14). 그렇습니다. 예수의 피로 자기 죄를 씻은 자만이 천국에 들어갑니다. 무디(Moody) 선생은  "예수께서 이 세상에 남기고 가신 것은 오직 십자가의 피 밖에 없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면 매일같이 수없이 나의 마음에 미세먼지같이 일어나는 감정의 죄들을 어떻게 씻을 겁니까? 

 

미세먼지를 막으려면 먼저 외출을 자제해야 합니다. 외출시엔 방진 마스크를 써야 합니다. 그리고 손을 자주 씻어야 합니다. 미세먼지의 죄를 막으려면 죄의 자리에 가지 말아야 합니다. 나에게 감정의 죄가 일어나기 전에 그 자리를 벗어나야 합니다. 어쩔수 없는 경우 말씀의 마스크를 써야 합니다. 말씀으로 내 안에 일어나는 감정의 죄를 제어해야 합니다. 그래도 미세먼지 같은 감정의 죄가 나의 영을 어둡게 하려 할 때 주님의 이름을 부르고 “주여 나를 불쌍히 여기시고 나의 이 더러운 감정을 씻어주옵소서”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손에 더러운 것이 묻으면 곧 씻듯이 내 마음 안에 감정의 죄가 생겨나면 곧 회개하고 예수님의 보혈로 씻음 받도록 해야 합니다.  내안에 불평이 생겨났다하면 곧 “주여 나의 불평의 죄를 예수님의 보혈로 씻어주옵소서”라고 기도 하십시오 그러면 미세먼지 같은 불평의 죄가 씻어질 것입니다. 미세먼지 같이 미움이 내 마음을 주장하면 곧 “주여 나를 불쌍히 여기시어 이 미움의 죄를 예수님의 보혈로 씻어 주옵소서”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그러면 내 영이 깨끗해지고 내 믿음이 새롭게 되면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하게 될 것입니다.

 

우리 라온코이노니아 성도 여러분, 이곳에 미세먼지가 창틈으로 새어들어 올는지 모르지만 우리들의 마음에 바위돌 같은 죄는 전혀 없고 자갈돌 같은 죄, 모래알 같은 죄, 크고 작은 죄를 방치하지 말고 곧 회개하고 주님의 보혈로 씻어버려야 합니다. 더욱이 미세먼지같이 우리의 영혼을 어둡게 하는 감정의 죄는 모양이라도 버리고 주님의 보혈로 그때그때 곧바로 회개하고 주님의 보혈로 씻어 버려야합니다.

16세기에 폴란드의 유명한 천문학자 코페르니쿠스라고 있습니다. 그가 세상을 떠날 때 자기의 묘비명을 자기 자신이 썼습니다.  "하나님이여, 나는 바울이 가졌던 특권을 구하지도 않습니다. 베드로에게 주셨던 능력을 구하지도 않습니다. 다만 예수님 십자가 지실 때 옆에 있었던 강도에게 베푸신 그 긍휼을 구할 뿐입니다." 여러분은 무엇을 구하고 있습니까? 그저 십자가 옆에 있던 강도에게 베푸신 그 긍휼을 주여 나에게 베푸시옵소서. 무슨 말입니까? 사도 바울은 스스로 죄인중의 괴수라고 스스로 고백한 것처럼 나도 강도보다 더한 큰 죄인임을 깨닫고 “주여, 나를 불쌍히 여기시고 미세먼지 같은 죄까지도 죄 사함의 은혜를 내려주옵소서.” 이것이이말로 아주 중요한 은혜입니다. 여기에 복음의 핵심이 있습니다. 
 
이 시간 우리의 모든 죄가 나사렛 예수의 십자가 보혈로 깨끗이 씻음 받아 죄 사함 받고 주님의 은혜와 넘치는 축복을 받으시길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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