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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병호목사의 교회이야기

전병호 목사의 설교



2018년 4월 1일 부활절 주일아침예배   막 14:22-25   예수의 두레 밥상


지난 목요일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마지막 성찬을 가졌던 일을 묵상하면서 한 시가 문뜩 떠올랐습니다. 그 시는 <둥근, 어머니의 두레밥상>이란 시로, 시인 정일근 (경남대교수)이 2003년 4월 7일 제18회 '소월시문학상' 대상을 탄바 있습니다. (시인 김소월을 기리기 위해 1987년 문학사상사에서 해마다 소월시문학상을 수여하고 있다.) 그 첫 시작을 이렇게 시작합니다. 
   모난 밥상을 볼 때마다 어머니의 두레밥상이 그립다.
   고향 하늘에 떠오르는 한가위 보름달처럼
   달이 뜨면 피어나는 달맞이꽃처럼
   어머니의 두레밥상은 어머니가 피우시는 사랑의 꽃밭.을 받았습니다.  

 
(***모난 밥상을 볼 때마다 어머니의 두레밥상이 그립다.
   고향 하늘에 떠오르는 한가위 보름달처럼
   달이 뜨면 피어나는 달맞이꽃처럼
   어머니의 두레밥상은 어머니가 피우시는 사랑의 꽃밭.
   내 꽃밭에 앉는 사람 누군들 귀하지 않겠느냐,
   식구들 모이는 날이면 어머니가 펼치시던 두레밥상.
   둥글게 둥글게 제비새끼처럼 앉아
   어린 시절로 돌아간 듯 밥숟가락 높이 들고
   골고루 나눠주시는 고기반찬 착하게 받아먹고 싶다.
   세상의 밥상은 이전투구의 아수라장
   한 끼 밥을 차지하기 위해
   혹은 그 밥그릇을 지키기 위해, 우리는
   이미 날카로운 발톱을 가진 짐승으로 변해 버렸다.
   밥상에서 밀리면 벼랑으로 밀리는 정글의 법칙 속에서
   나는 오랫동안 하이에나처럼 떠돌았다.
   짐승처럼 썩은 고기를 먹기도 하고, 내가 살기 위해
   남의 밥상을 엎어버렸을 때도 있었다.
   이제는 돌아가 어머니의 둥근 두레밥상에 앉고 싶다.
   어머니에게 두레는 모두를 귀히 여기는 사랑
   귀히 여기는 것이 진정한 나눔이라 가르치는
   어머니의 두레밥상에 지지배배 즐거운 제비새끼로 앉아
   어머니의 사랑 두레먹고 싶다.)

 

두레 밥상이 무엇입니까? 둥근 밥상입니다. 네모난 식탁은 서양사람들의 식탁이라면 우리나라 사람들은 둥근 밥상에서 밥을 먹었습니다.
저도 아! 옛날인가, 둥근 밥상에서 온 가족이 둘러 앉아 어머님께서 차려주신 저녁 식사 하던 그때 그 시간이 그리워집니다. 그때 그 된장찌개 맛, 그 상큼한 김치, 동생들과 서로 먹으려고 젓가락질 바빴던 꽁치 구이, 소소한 웃음과 칭얼대는 막내의 밥투정 하던 그 때를 생각하면 그때 그 시간이 참으로 행복했던 시간이었습니다.

 

박노해-둥근 밥상이란 글에 이런 글이 있습니다. ...행복은 좋은 사람들과 소박한 밥상의 웃음 속에 있다는 것이... 란 글입니다. 어느 누구나 밥상을 차립니다. 그러나 그 밥상이 행복한 밥상으로 맞이하지 못하는 이들도 많이 있습니다. 아내가 밥상을 차리고 식사하세요하고 저를 부르는 소리를 들을 때 마다 행복을 느낍니다. 아내가 밥을 준비하는 그 시간은 행복을 준비하는 시간이고 식탁에 앉아 그 밥을 먹는 시간은 행복을 먹는 시간입니다. 그래서 저는 가끔 설거지는 내가 할께 하면서 고무장갑을 끼고 설거지하는 시간이 내 안에 행복을 살찌게 하는 시간이 되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성만찬을 묵상하면서 정형근 시인의 두레밥상이란 시가 생각났는가하면 바로 예수님의 식탁은 두레 밥상이었기 때문입니다. 흔히 1498년  레오나르도 다 빈치(Leonardo da Vinci, 1452~1519)가 그린 최후의 만찬을 떠올립니다. 그 그림에서 예수님의 식탁은 직사각형으로 예수님이 중앙에 앉으시고 12제자들이 반반 예수님의 좌우에 앉아있거나 서있는 그림입니다. 물론 이 그림은 화가의 상상화입니다. 그런데 예수님 당시 식탁은 두레 밥상이었습니다.

 

예수님 당시 식사에 참여하는 사람들이 비스듬히 둥글게 누워 음식을 나누고 담소했습니다. 그런데 온갖 잡스러운 사람들이 모여 서로 비스듬히 누워 음식을 즐겼다고 상상해 보십시오. 예수님께서 전돟러 다니시다가 가끔 식사에 초대를 받으시곤 하였습니다. 예수님을 초대한 사람들은 자신의 지위와 재산을 자랑하곤 하였습니다. 식탁을 함께 한다는 것이 단순히 음식을 나누는 행위만은 아니었습니다. 같은 신분과 계급에 속한 사람들끼리 비스듬히 누워 점잖게 먹으면서 이런 얘기 저런 얘기 담소하는 일을 명예롭게 여기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당신만 그 자리에 참석하는 것이 아니라 당신들도 오시오 여러분들도 함께 식사합시다하면서 예수님을 따라왔던 주위 여러사람들을 불러 같이 식사 하시곤 하였습니다. 그 자리에는 여인들도 있었고 가난한 사람 병든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예수님을 초대한 주인은 매우 마뜩지 않았습니다.  이 같은 예수님의 행동에 대해 바리새인이나 율법사들은 예수님을 비난하였습니다.  "보라 먹기를 탐하고 포도주를 즐기는 사람이요, 세리와 죄인의 친구로다(마태 11:19)". 성경 번역이 매우 부드럽습니다만 먹기를 탐한다는 것은 NIV영어성경에 glutton으로 게걸스럽게 먹어대는 사람을 말합니다. You glutton 하면 ‘이 식중(食蟲)아’란 말입니다.  포도주를 즐기는 사람이란, drunkard 술고래라는 말입니다. 예수님을 식충이라고 술고래라고 불렀다는 것은 상종 못 할 상놈이란 말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런 비난과 조롱에 개의치 않으시고 예수님의 두레 밥상 둘레에는 늘 세리와 죄인과 고아와 가난하고 병든 이들이 함께 있었습니다.

 

한 바리새인 지도자가 예수님을 초대하였을 때 누가복음 14:11-13절에 이런 말씀을 하십니다. “또 자기를 청한 자에게 이르시되 네가 점심이나 저녁이나 베풀거든 벗이나 형제나 친척이나 부한 이웃을 청하지 말라 두렵건대 그 사람들이 너를 도로 청하여 네게 갚음이 될까 하노라.  잔치를 베풀거든 차라리 가난한 자들과 몸 불편한 자들과 저는 자들과 맹인들을 청하라. 그리하면 그들이 갚을 것이 없으므로 네게 복이 되리니 이는 의인들의 부활시에 네가 갚음을 받겠음이라 하시더라.” 이런 말씀을 하시니 함께 식사를 하던 한 사람이 “하나님 나라에서 떡을 먹는 자가 복되도다.”라고 말하니 예수님이 잔치비유 말씀을 하시었습니다. 어떤 사람이 잔치를 배설하고 사람들을 초정하였는데 이 사람 저사람 바쁘다는 핑계로 오지 않았습니다. 그러자 23절 24에서 말씀하시길, “주인이 종에게 이르되 길과 산울타리 가로 나가서 사람을 강권하여 데려다가 내 집을 채우라.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전에 청하였던 그 사람들은 하나도 내 잔치를 맛보지 못하리라 하였다 하시니라.”고 말하였다는 것입니다. 무슨 비유의 말씀입니까? 예수님의 두레 밥상에 앞으로 초대될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유대인들 바릿인들 율법사 제사장들은 자기들만이 하나님이 초대한 사람들이라고 자랑하고 교만하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세계 모든 사람들 누구든지 남녀노소빈부귀천무유식 가릴 것없이 예수님의 두레 밥상에서 함께 천국밥상을 나눌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교회는 둥근 밥상이오, 만일 제가 교회당을 짓는 다면 둥근 밥상처럼 짓고 싶습니다 . 이런 의미에서 우리 라온 코이노니아는  두레밥상이라고 하겠습니다. 

 

예수님의 최후의 만찬 제자들과 함께 나누던 두레밥상에는 무엇이 있었습니까? 떡과 포도주가 있었습니다. 우리는 가족을 食口라고 부릅니다. 함께 같은 밥상에서 음식을 먹는 가족을 식구라고 합니다. 자녀들이 먹는 음식은 압지 어머니가 피땀흘려 돈을 벌어서 자녀들에게 제공한 그야말로 부모의 살과 피같은 음식입니다. 예수님의 최후 만찬에서 함께 떡과 포도주를 먹는 제자들은 이제 예수님의 한 식구가 된 것입니다. 앞으로 우리를 죄가운뎃 구원하시려 십자가에서 찢겨진 몸과 흘러내린 피는 영원한 생명을 얻게 되는 우리의 영적 양식이라 하겠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나는 생명의 떡이라 이것을 먹고 마시는 사람은 영원히 살리라고 히셨습니다.(요6징 전체를 읽으십시오) 예수님께서 이 같은 성만찬은 앞으로 계속해서 모든 사람들이 지키라고 명령하셨습니다. 그것은 세계 모든 사람들이 다 예수님과 함께 천국 식구가 되게 하시는 하나님의 소원이시기 때문입니다.

 

요즘 먹거리에 관련된 예능 프로그램들이 마구 쏟아지고 있습니다. 본래 맛있는 음식과 음식점을 소개하는 방송들이 인기가 있습니다. 이런 ‘음식 먹는 방송’을 줄여 ‘먹방’이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최근에는 먹방들이 진화하고 있습니다. 단순히 먹는 방송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유명 연예인들이 나와서 직접 요리를 합니다. 이렇게 요리하는 과정까지 다루는 프로그램을 ‘쿡방’이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전라도의 작은 섬에서 ‘자급자족’이라는 전제하에 갖가지 요리를 만들어 보여준 ‘삼시세끼’, 집집마다 다니면서 숟가락을 들이대고 밥을 함께 먹으면서 이런얘기 저런 얘기를 나누는 ‘한끼줍쇼’,연예인들이 실제로 소유하고 있는 냉장고 속 재료들로 음식을 만드는 ‘냉장고를 부탁해’, 심지어는 다른 나라에까지 가서 식당을 차리고 그 나라 사람들을 불러다가 비빕밥도 먹이고 잡채도 먹이는 등등  최근 인기를 얻고 있는 프로그램입니다.
도대체 왜 이런 프로그램들이 인기가 있는 것일까요? 이유는 단순합니다. 먹고 마시는 것이 우리 삶의 가장 본질적인 내용이고, 또 우리 인생의 큰 즐거움 중에 하나이기 때문입니다. 먹고 마시는 일. 누구나 다 하는 일이고, 이것에 관심이 없는 사람은 하나도 없을 것입니다. 게다가 남자 연예인들이 직접 요리를 하는 것이 사람들의 호기심을 자극합니다. 강호동씨가 한끼줍쇼에서 초대받은 한 지취생과 함께 라면을 후루루 잡잡하며 먹어대는 모습을 보며 한편으론 우습고 또 한편으론 우리와 비슷하다는 동질감을 가지게 합니다. 먹는 것이 무엇입니까? 처음 만난 사람이라도 처음에는 차 한 잔 마시다가 조금 더 친해지면 밥을 함께 먹게 됩니다. 그리고 함께 밥을 먹으면 더 가까워집니다. 누군가와 친해지는 방법이 많이 있지만, 그중 하나가 음식을 함께 나누는 일입니다.

 

예수님이 제자들과 우리에게 가르쳐 주신 주기도문이 있습니다. 이 주기도문에는 여섯 개의 기도문이 있는데 세 개는 하나님께 올려드리는 기도문이고, 그 다음 세 개는 인간을 위한 간기도입니다. 그런데 인간을 위한 기도문 중 첫 번째가 ‘먹거리’입니다.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  즉 하루하루 먹고 마시는 것을 허락해 달라는 기도를 하나님께 드리라는 것입니다.

이처럼 먹고 마시는 것이 우리를 즐겁게 하고 기쁘게 하는 삶의 본질적인 생존에 관한 문제일 뿐만 아니라, 영원한 생명을 소유하게 하는 더 귀한 영적 양식이 있음을 예수님은 우리에게 가르쳐 보여주고 계시는 것입니다. 

라오디게아 교회에게 주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볼찌어다 내가 문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로 더불어 먹고 그는 나로 더불어 먹으리라”(계3:20). 여기서 ‘두드린다’고 할 때, 어느 특정 대상을 정해 놓은 것이 아니라 ‘누구에게나’ 다 두드리신다고 합니다. 지금도 주님은 계속 두드리고 계십니다. 그때 누구든지 문을 열면 주님과 함께 두레밥상에서 생명의 음식을 먹게 하신다는 말입니다. 주님은 우리와 함께하실 신령한 식탁을 이렇게 언제나 준비하고 있으십니다. 늘 이 식탁에서 먹고 마시는 체험이 있다면, 내 속에 주님이 베푸신 신령한 두레 밥상이 마련된 것입니다. “의에 주린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배부름을 얻을 것이요”라는 말씀을 체험하는 축복의 사람입니다.


주님이 주시는 영적 음식은 무엇입니까? 우리의 영을 살리고 살찌게 하고 영원한 생명을 소유하게 하고 마침내 영원한 나라 하나님나라 천국에 들어가 살게 하는 음식이 무엇입니까? 주님이 우에게 먹이시는 떡과 포도주는 곧 말씀입니다. 이것이 우리의 배고픈 영혼을 먹이고 목마른 영혼을 마시게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교회는 언제나 성도가 마음껏 먹을 수 있는 예수의 생명과 말씀의 두레 밥상이 준비돼 있어야 합니다. 예배가 끝나고 갈 때마다 새 생명을 소유하고 영적 포만감으로  세상으로 나가야 합니다.  예배란 우리가 지금까지 살고 있었던 죽음의 땅, 절망의 땅, 우리의 생명이 위협당하는 삶의 자리에서, 생명의 땅으로, 소망의 땅으로, 기쁨이 회복되고 눈물이 멈추는 자리로 예수님이 우리를 먹이시고 마시게 하는 두레밥상이 차려진 자리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과 함께 식탁에서 먹고 마시는 자리입니다. 그래서 예배는 축제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과 함께 새로운 생명을 사는 자리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먹으면서 기뻐하는 것, 이것이 바로 라온 코이노니아 신앙공동체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예배에 참석해야 합니다. 세상에서 영적으로 굶주리면 마귀의 시험을 당합니다. 영적으로 목마르면 마귀가 시험합니다. 영이 굶주리고 목말라하여 인생에 실패하고 슬피 울며 이를 가는 일이 결코 있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영이 잘되고 범사가 잘되고 육신이 강건해지기 위해서 두레밥상이 차려진 예배에 나와 주님의 살과 피 곧 생명의 말씀을 먹어야 합니다. 그래야 죽은 나의 영혼이 죽은 나의 생명이 다시 소생하는 부활을 체험하게 됩니다.

그래서 1년 52주는 모두 부활의 아침인 것입니다. 아니 1년 365일이 전부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우리와 함께 두레밥상을 맞이하는 날입니다. 그리고 주님이 주신 말씀을 가슴에 품고 살아가는 축복의 자리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은 역사적으로 보면 1회적인 사건이었습니다. 죽은 자 가운데서 사흘 만에 부활하신 1회적인 사건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셔서 부활의 식탁에 우리를 초청하시면서, 매일, 매순간 내 삶의 자리를 부활의 자리로 바꾸십니다. 일상적인 삶에서도 부활의 생명을 경험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수님이 부활하셨다는 것이 왜 기쁜 소식일까요? 모든 사람들이 죽음 앞에서 오열하고 슬픔에 멈춰 섰을 때,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의 두레밥상에 초청해 주시니 이 어찌 기쁜 일이 아니겠습니까? 
오늘 부활의 아침 우리는 성만찬 두레 밥상에 초대를 받음으로 우리의 영이 살고 배부르고 영원한 생명의 기쁨을 소유하시기를 축원합니다.
부활의 축복을 우리 모두에게 주시는 부활하신 주님께 감사와 영광을 돌리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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