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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병호목사의 교회이야기

전병호 목사의 설교



2018년 2월 4일 주일아침 예배  민 6:22-27   立春大信 願主降福

 

오늘은 절기상 입춘입니다.  입춘(立春)은 24절기 중 첫 절기로 대한(大寒)과 우수(雨水) 사이에 있으며, 태양이 황경(黃經) 315도 위치에 있다고 합니다. 음력으로는 정월 절기이고, 양력으로는 2월 4일경이며, 이 날부터 약 15일간이 입춘절입니다. 음력으로 한 해에 입춘이 두 번 들어 있으면 ‘쌍춘년’(雙春年)이라 하여 그 해에 결혼하는 것이 길하다고 합니다. 입춘을 앞두고 입춘에 관한 자료를 모아 정리해 보았습니다.

‘立春’의 '立'은 '서다'가 아니라 '곧'이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곧 봄이다란 의미입니다. 봄이 시작되는 때라 하지만 여전히 추운 날씨가 계속됩니다. 입춘 15일간을 5일씩 3후(候)로 나누어 1) 동풍이 불어 언 땅을 녹이고, 2) 동면하던 벌레가 움직이기 시작하고, 3) 물고기가 얼음 밑을 돌아다닌다고 하였습니다.

옛날에 입춘 날 풍속으로 ‘아홉 번 차리기’란 것이 있습니다.  이 날은 각자 맡은 바에 따라 아홉 번씩 일을 되풀이하면 한 해 동안 복을 받고, 그렇지 않으면 액을 받는다고 생각했습니다. 글방에 다니는 아이는 천자문을 아홉 번 읽고, 나무꾼은 아홉 짐의 나무를 하며, 노인은 아홉 발의 새끼를 꼰다. 여자아이들은 나물 아홉 바구니를, 아낙들은 빨래 아홉 가지를, 길쌈을 해도 아홉 바디를 삼고, 실은 감더라도 아홉 꾸리를 감았습니다. 또 밥을 먹어도 아홉 번, 매를 맞아도 아홉 번을 맞았다고 합니다. 아홉 번 한다는 뜻은 우리 조상들이 ‘9’라는 숫자를 가장 좋은 양수(陽數)로 보았기 때문입니다.

입춘이나 대보름날 전날 밤에는 많은 사람에게 도움이 되는 좋은 일을 꼭 해야 1년 내내 액을 면한다는 적선공덕행(積善功德行)이란 풍속도 있었습니다. 예를 들면 밤중에 몰래 냇물에 가 건너다닐 징검다리를 놓는다든지, 거친 길을 곱게 다듬어 놓는다든지, 다리 밑 거지움막 앞에 밥을 한솥 지어 갖다놓기도 합니다.

입춘 날 먹는 음식으로는 탕평채(湯平菜)라는 것이 있습니다. 탕평채는 2백여 년 전 조선의 영조대왕이 당파싸움을 없애기 위하여 노론, 소론을 폐지하자는 탕평책을 논하였던 날 처음 선을 보여서 얻어질 이름이라고 옛 기록에 적혀 있다. 녹두묵을 젓가락 굵기로 썰어서 참기름, 소금으로 가볍게 버무려 담고 숙주, 짧게 자른 미나리, 물쑥 등은 데치고 다진 고기는 볶고, 김 부순 것, 달걀 황백 지단은 채 썰어 옆옆이 담아 달고 새콤한 초장을 뿌려서 먹는다.
냉이나물- 채소 가운데 단백질, 칼슘, 철분의 함량이 가장 풍부한 알카리성 식품입니다. 깨끗이 다듬어 봄에는 모시조개를 넣고 냉잇국을 끓이고, 끓는 물에 데쳐서 고추장이나  된장을 조금 넣고 무칩니다.
달래나물-알뿌리가 크고 둥근것이 매운 맛이 강합니다. 되도록 생것으로 조리하여야 비타민C의 손실을 막을 수 있습니다. 달래전, 달래 생무침, 달래 된장찌개 등을 해먹습니다.
죽순채-죽순을 빗살 모양으로 썰어서 볶은 나물입니다.
죽순찜-죽순을 큼직하게 썰어 갖은 양념으로 찜을 한 것입니다. 다진 고기를 양념하여 칼집을 낸 죽순에 소를 박고 채소 볶은 것을 냄비 밑에 깔고 죽순을 얹는다. 물을 자작하게 붓고 간장으로 간을 맞춰 끓이는데 이때 녹말가루를 물에 풀어 넣으면 걸쭉해집니다. 달걀 지단채와 버섯 볶은 것을 얹어냅니다.
출처: http://bonlivre.tistory.com/68 [봉리브르]

 

입춘 날이면 대문 양쪽에 입춘대길 건양다경 (立春大吉 建陽多慶)이란 글을 큼지막하게 써서 붙입니다. 입춘대길 건양다경 (立春大吉 建陽多慶)이란 ‘봄이 시작되니 크게 길하고 경사스러운 일이 많이 생기기를 기원한다’는 뜻입니다.

그밖에 여러 좋은 글들을 써서 붙입니다. 이를 태면,
< 부모천년수 자손만대영 (父母千年壽 子孫萬代榮)
     부모는 천년을 장수하시고 자식은 만대까지 번영하라.
수여산 부여해 (壽如山 富如海)
   산처럼 오래살고 바다처럼 재물이 쌓여라.
소지황금출 개문백복래 (掃地黃金出 開門百福來)
   땅을 쓸면 황금이 생기고 문을 열면 만복이 온다.
거천재 래백복 (去千災 來百福)
   온갖 재앙은 가고 모든 복은 오라.
재종춘설소 복축하운흥 (災從春雪消 福逐夏雲興)
   재앙은 봄눈처럼 녹아지고 복은 여름 구름처럼 흥하라 >


기독교에서는 이런 절기와 절기풍속을 따른다는 것은 미신이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풍속에 미신적인 요소도 있지만 그 미신적인 요소를 빼고 하나님의 은혜의 역사로 보면 매우 좋은 풍속이 됩니다. 겨울이 지나고 봄을 맞이하면서 하나님이 우리 가정에 그리고 우리나라 모든 사람들에게 평강과 기쁨이 넘치는 복을 주시기를 기도하는 것은 바람직한 믿음의 역사라고 하겠습니다. 그래서 오늘 설교 제목을 立春大信 願主降福이라고 하였습니다. ‘추운 겨울이 지나고 따뜻한 봄이 곧 오는 이때에 여러분들의 믿음이 크게 일어나기를 바라면서  하나님께서 여러분에게 복주시기를 원합니다“ 란 의미입니다.  바로 오늘 아침 봉독한 민 6장 말씀을 요약한 제목입니다. 한문성경에 24절 하나님께서 복주시기를 원하노라는 말씀을 ’원주강복‘이라 하였습니다. 

 

하나님이 모세에게 말씀하시던 때는 오랫동안 애급나라에서 노예생활하고 이제 하나님의 구원의 은총으로 탈출하여 광야에 거하던 때입니다. 지금까지 그들에게 복이란 낮 설은 단어입니다. 복을 받는다는 것은 그들에게 전혀 바랄 수 없는 말이었습니다. 그런데 이제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복(바라크)을 주신다는 것입니다. 돌이켜 말하면 하나님의 복을 받지 못하였던 이스라엘 민족은 노예생활로 비참한 세월을 살아 왔었습니다. 그러나 이제 하나님의 복을 받음으로 그 비참한 노예생활에서 벗어나 자유로운 백성으로 살아가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의 복을 받았는가 아니면 떠났는가 이것이 우리의 인생을 행복하게 사는가 아니면 불행하게 사는가를 결정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복이 머무는 집인가 떠나버린 집인가를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성경에 보면, 아브라함의 가정이 처음부터 복 받은 가정이 아니었습니다. 70세가 넘도록 자녀가 없었습니다. 땅 한 평, 집도 없이 나그네처럼 떠돌아 다녔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 복을 주시기를 자손이 하늘의 별처럼 많게 하리라.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을 주리라. 모든 사람들의 복의 근원이 되게 하리라고 축복하여 주셨습니다. 그야 말로 하나님의 복이 넝쿨째 들어 온 모양입니다. 그야말로 하나님의 복 받은 집입니다. 하나님은 더하여 천대에 이르기까지 복을 주시다고 하였습니다. 천대란 몇 년일 까요? 보통 30년을 일대라고 말합니다. 그러므로 1,000대는 곧 3만년입니다. 아브라함은 지금부터 4,000년 전 사람입니다. 그러면 이제 앞으로 26,000년 더 복을 받게 될 것입니다. 무슨 말입니까? 숫자에 의미가 아니라 영원히 복을 주신다는 의미입니다. 왜 하나님은 이런 복을 아브라함과 그의 가정에 주었습니까? 이유는 단 하나 하나님은 그의 믿음 大信 큰 믿음을 보시었습니다. 하나님 섬기는 것을 최우선으로 하여 섬기는 그 큰 믿음 때문에 아브라함은 큰 복이 머무는 집이 된 것입니다.
그런데 성경엘 보면 엘리 제사장의 집이 있습니다. 엘리의 두 아들 홉니와 비느하스가 있었는데  이들이 전쟁하다가 그만 둘 다 죽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급격히 몰락한 집이 되고 말았습니다. 왜 엘리제사장 집에 하나님의 복이 떠났을까요? 홉니와 비느하스는 하나님을 향한 예배를 더럽혔고(삼상2:17) 성막에서 수종드는 여인들을 성추행하였고(삼상2:22) 하나님 앞에 불경스런 죄를 저질러 하나님의 심판을 받았습니다.(삼상2:34, 3:14) 엘리의 집에서 하나님의 복이 떠나니 그 후손의 대가 끊어져 버렸습니다.
사울 왕의 집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들의 집은 초대 왕이었기 때문에 그의 자손들이 대대로 왕이 될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지 못하였습니다. 사울왕은 하나님께 불순종의 왕이 되었고 신접한 무당에게 점을 치도록 하므로 하나님의 복이 떠났던 것입니다. 결국 사울의 집은 망하고 다윗왕의 집이 복을 받게 되었습니다.
그러면 우리들의 집은 어떠합니까? 하나님의 복을 받은 집입니까? 아니면 하나님의 복이 떠난 집입니까? 많은 기독교인들 가운데 복을 받겠다고는 하지만 하나님의 복이 떠나 버린 그런 집이 참으로 많다고 하겠습니다. 

 

 

어떻게 우리는 하나님의 복 받는 가정이 될 것인가?
먼저 중요한 것은 복 받는 자리가 있습니다. 아무데나 하나님의 복 받는 것이 아닙니다.  천하의 모든 것은 그것이 있어야 할 자리가 있습니다. 사자는 아프리카 초원이 사자가 있어야 할 자리이고 북극곰은 북극에 있어야 살 자리입니다. 북극곰이 아프리카에서 살 수 없습니다. 사자가 아라스카에서 살수 없습니다. 귤나무는 귤나무가 있어야 할 자리가 있고, 사과나무는 사과가 자랄 자리에 있어야 열매를 맺게 됩니다. 코스모스는 가을 들녘에 있어야 하고 진달래는 봄 동산에 있어야 합니다. 학생은 학교 교실에 있어야 하고 군인은 나라를 지키는 전방에 있어야 합니다. 해는 해가 있어야 할 자리에 있어야 하고 달은 달이 있어야 할 자리에 있어야 합니다. 만일 해가 우리 지구에 1미터만 가까이 있다면 우리는 모두 타죽고 말것입니다. 지난 31일 밤에 월식이 있었습니다. 달이 지구 그림자에 어두워져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달이 없어진 것은 아닙니다. 달은 수 천 백만 년 전부터 항상 저 하늘 제 자리에 있었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창조의 원칙입니다. 흔히 우주를 영어로 cosmos 코스모스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다른 이름으로 질서라는 뜻도 있습니다. 태초에 하나님께서 혼돈chaos중에 질서를 창조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질서에 따르는 것이 곧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입니다. 요즈음 여 야당 간의 정치적인 다툼이 볼만합니다. 왜 그런 정치 다툼이 있습니까? 여야 정치인들이 제 자리를 못 지키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당 갔다가 저당 갔다가 그것도 아니면 맘대로 당을 없에기도 하고 만들기도 합니다.  요즈음 검사들의 성폭력문제로 시끄럽습니다. 무엇이 문제 입니까? 검사들이 검사로서의 자리를 지키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질서가 깨지고 하나님의 복이 떠나버린 정치 그런 세상은 마귀들의 세상이요 지옥세상인 것입니다.

우리가 세상을 살아가는 데 항상 무엇인가 선택을 하게 됩니다. 선택할 때 우리가 고민하는 것은 우선순위를 정하는 것입니다. 먼저 무엇을 선택할까? 자칫 우선순위를 잘못하면 평생 후회하게 될 일이 생길 수도 있습니다.

 

오영석이란 컴퓨터 전문가가 있습니다. 그는 서울대학 입시를 앞두고 아버지가 간암이란 판정을 받았습니다. 누가 아버지에게 간암을 이식해 주지 않으면 아버지는 죽게 될 것입니다. 오영석 군은 아버지에게 간을 이식하여야 하는가 아니면 서울대학교에 입학시험 준비를 할 것인가 선택의 기로에 섰습니다. 오영석 군은 아버지에게 간을 이식하는 것이 우선순위임을 알았습니다. 아버지는 곧 회복이 되었지만 오영석 군은 회복이 늦어 저 제대로 공부를 할 수 없었습니다. 결국 서울대 입학시험에서 낙방을 하였습니다. 그리고 재수를 하게 되었습니다. 다음해에 마침내 오영석 군은 서울대 캄퓸터공학과 합격을 하였습니다. 이 오영석 군의 소식을 들은 서울대 동창회에서 오역석 군에게 4년간 학비 장학금을 주기로 하였습니다. 지금은 우리나라 최고의 보안전문가 소프트개발자로 활동을 하고 있습니다. 오영석군에게 인생의 우선순위가 무엇이었습니까? 비록 서울대학 입학이 1년 늦추어 졌지만 결국 그는 큰 혜택을 받으며 공부를 할 수 있었습니다. 

마6:33에서 예수님께서는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우리 기독교인들의 삶에서 우선순위를 무엇에 두느냐가 중요합니다. 무엇보다 우리의 우선 순위는 하나님 잘 믿어 복받는 일이 우선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하는 것이 복을 받는 일을 우선순위로 할 수 있을까? 하나님의 복을 받는 자리가 있습니다. 성경에 자주 나오는 말씀으로 ‘하나님 앞에(리페니 야훼)‘ ’주님 앞에(르 파네이카 아도나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흔히 라틴어로 ’coramdeo 코람데오‘라고 하는데 성경원어로 보면 “하나님 얼굴 앞에”라는 의미입니다.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얼굴 앞 바로 그 지리가 우리의 삶의 자리 내 인생의 우선순위 자리인 것입니다.

아브라한의 증 손자인 요셉이 형들의 시기심으로 애급의 노예로 팔려 갔습니다. 그가 보디발이란 애급장군의 집에 노예로 있을 때에 장군의 부인으로부터 유혹을 받았습니다. 당시 요셉은 28세로 잘생긴 장부였습니다. 아마도 이런 은근한 주인 마니님의 유혹에 넘어갈 수 있는 상황입니다. 그러나 요셉은 감옥에 갈지언정 유혹을 뿌리쳤습니다. 어떻게 이 유혹을 물리칠 수 있었을까요? 바로 ‘나는 하나님 앞에 있다.’라는 코람데오 의식을 인생의 우선순위로 생각하고 살았기 때문인 것입니다. 우리도 하루에도 몇 번 씩이라도 ‘나는 하나님 얼굴 앞에 있다’라는 생각을 우선순위로 생각하면 죄의 유혹들을 이길 수 있습니다.

 

어느 교회에 지능이 좀 모자라는 장애우 청년 때문에 온 교회가 어려움을 당하고 있었습니다. 이 청년은 예배시간에 하품을 크게 하고, 침을 흘리고, 갑자기 소리를 지르기도하며 경건한 예배 분위기를 깨고 모든 사람들에게 불쾌감을 주곤 했습니다. 모든 성도들의 불만이 커지게 되자 목사님께서 이문제 해결을 위해 회의를 소집했습니다. 그러나 모든 사람들이 문제점만 지적했지 뾰족한 대안을 찿지 못하고 회의가 끝났습니다. 그런데 그 다음주일부터 예배시간에 그 청년이 조용히 예배를 잘 드리고 교회의 예배 분위기가 너무 좋아졌습니다. 그 이유를 알아보니 그 교회에 노인 권사님 한분이 주일 아침 일찍 오셔서 그 장애우 청년 옆에 앉아 침을 흘리면 자신의 손수건을 꺼내 닦아주고 졸면 살짝 두드려 깨워주고 소리를 내려하면 손을 꼭 잡아 주면서 그 청년을 예배시간 내내 섬겨준 것입니다. 이 노인 권사님의 하나님 앞자리는 바로 사랑의 자리였던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얼굴 앞에 있다면 그 자리가 바로 하나님 사랑 이웃 사랑의 자리가 되어야 합니다.

 

우리가 어디에 있던지 어느 때던지 우리는 하나님 얼굴 앞에 내 자리가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지금 나는 어디에 있습니까? 하나님 얼굴 앞에 있습니다. 그리고 그 자리에 있을 때만이 우리는 하나님의 복을 받게 됩니다. 그러면 술집에 앉아 있다면 그 자리는 하나님 얼굴 앞자리가 아닐 것입니다. 그러면 그 자리는 하나님의 복이 떠나 자리입니다. 하나님의 복이 떠난 자리는 마귀가 있는 자리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기독교인의 제 자리는 하나님의 얼굴 앞자리입니다. 지금 우리는 어디에 있습니까?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자리에 있습니다. 지금 우리가 앉아 있는 이 자리가 하나님의 얼굴 앞자리이고 하나님의 복 받는 자리입니다.  그러므로 지금 나의 예배드리는 자리를 빈자리로 만들지 말아야 합니다. 지금여러분들의 그 앉은 자리는 그냥 걸상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예배드리는 나의 자리를 통해 나에게 복을 주십니다. 지금 그 예배의 자리는 하나님이 우리 가정에 복을 주시는 자리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앞자리인 예배의 자리를 지키는 것이 나의 우선순위가 되어야 합니다.

 

그러면 언제나 하나님의 앞자리에 앉게 되는 방법을 알아야 합니다. 바꾸어 말하면 왜 사람들은 하나님 앞자리에 앉아 있지를 못합니까? 그것은 우리 인생의 우선순위가 무엇이냐는 대답에 달려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잘못된 인생을 살아가는 이유는 그들의 삶에 우선순위를 잘못 선택하였기 때문입니다. 우리에게 우선순위가 무엇입니까? 다름 아니라 하나님으로 부터 우리의 가정이 복 받는 일이 우선순위입니다. 하나님의 복 받기를 원한다면 더 우선순위가 하나님의 얼굴 앞에 있어야 됩니다.

남아메리카의 아르헨티나나 브라질 같은 나라들은 북아메리카 미국이나 카나다 보다 훨씬 경제수준이 떨어져 있습니다. 그런데 유럽 사람들이 미국땅 보다는 먼저 아르헨티나로 가서 살았습니다. 그런데 오늘날 왜 아르헨티나는 미국보다 경제수준이 떨어 저 있는 것입니까? 그것은 아르헨티나로 건너간 유럽사람들은 우선순위가 황금을 얻으려고 갔지만, 미국에 처음 온 사람들은 청교도인들의 우선순위는 하나님을 더 잘 믿으려고 자유를 찾아 온 사람들입니다. 우선순위를 황금에 두지 않고 신앙에 두었던 것입니다.

어느 주일 저녁에.. 두 청년이 도박장을 찾아갔습니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도박장 근처에 작은 교회가 하나 있었습니다. 그 교회 입구에는 '죄의 삯은 사망'이라는 그날 설교 제목이 적혀 있었습니다. 한 청년이 그 설교 제목을 보고는 마음이 찔려서 말했습니다. '얘, 도박장에 가지말고 교회에 가자.' 그러자 다른 청년이 단호하게 말했습니다. '한 번 결심했으면 가야지, 교회는 무슨 교회야.' 결국 한 청년은 교회로 가고 다른 청년은 도박장으로 갔습니다. 30년 후, 그 때 교회로 갔던 청년은..  미국의 22대(1885-1889), 24대(1893-1897) 대통령이 된 그로버 클리브랜드(Grover Cleveland) 입니다. 클리브랜드가 대통령이 되자 각 신문들은 앞다투어 발표했습니다. 이 신문은 시골 구석 구석까지 가게 되었습니다. 마침내 미국 교도소에 조그만한 감방에도 전해 졌습니다. 교도소 초라한 감방 2층 끝 방에는 얼굴에 흉칙한 칼자국이 있는 사형수가 있었습니다. 간수가 이 죄수에게 신문을 건내 주었습니다. 이 신문을 받아든 사형수는 두 눈이 휘둥그래 졌습니다. 그리고는 땅을 치며 통곡하며 후회했습니다.“그때에 올바른 선택을 했더라면..”그 사형수는 그로버 클리브랜드 대통령의 친구 '조지'였습니다.

여러분, 하나님 얼굴 앞자리에 있기를 원한다면 언제나 우선순위를 하나님께 두고 하나님께 예배드리기에 두고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는 일에 둔 사람이 하나님 앞자리에 있게  됩니다.

 

앞서 소개 한 대로 입춘 때에 대문 앞에 입춘대길 건양다경이라는 축문을 써 붙인 것은 봄날에 해 빛이 온 집에 환희 비추듯이 복이 우리 집안에 가득하기를 기원하는 말이라 하겠습니다. 그러나 저는 설교제목으로 입춘대신 원주강복(立春大信 願主降福)이라 하였습니다. 우리의 큰 믿음이 하나님의 복을 받는 이유입니다. 언제나 하나님의 얼굴 앞에 있는 그 사람이 큰 믿음의 소유자입니다. 언제나 하나님을 우선순위로 여기는 사람에게 하나님의 복이 임하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의 가정이 복받기 위하여 어떻게 하면 나의 믿음이 더욱 크게 할 것인가 이것을 늘 생각하여야 합니다.

 

오래전에 군산복음교회에 박지철 장로님이란 분이 계셨습니다. 박지철 장로님은 복음교회 창설자중의 한사람입니다. 한동안 군산복음교회 담임목사님이 안 계셔서 이리(현 익산)에 계시는 조용술 목사님이 주일이면 군산에 오시어 예배를 인도하시었습니다. 박 장로님은 주일이면 언제나 버스정류장에 나가 조 목사님을 마중하며 조 목사님의 가방을 들었습니다. 당시 조 목사님은 30대초 젊은 목사님이고 박 장로님은 60이 넘으신 분입니다. 그래서 조 목사님이 한사코 그러지 마시라고 해도 박 장로님은 주의 종이 멀리서 하나님의 복을 나누어 주시려고 오는데 이것은 수고가 아니며 이로서 하나님의 복을 받기를 원하기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비가 오면 장화와 우산을 준비하여 버스를 기다리다가 조 목사님이 차에서 내리면 장화로 바꾸어 신게 하고 당신은 옷을 젖으면서 우산을 들어 조 목사님이 비를 맞지 않게 하였습니다. 겨울 추운 날이면 털신을 준비하여 가슴에 품고 있다가 조 목사님이 버스에 내리면 바꾸어 신게 하였습니다. 박 장로님의 이런 섬김은 다만 당신에게 뿐 아니라 모든 사람들에게 나눔과 섬김의 본을 보임으로 축복의 통로가 되었던 것입니다. 박 장로님의 아들이 박전개목사님으로 신풍교회 부목사로 있다가 서울 복음교회 목사가 되었고 그 손자가 현재 서울복음교회 박선진목사입니다. 그분의 큰 사위는 천안에 호서대학교를 세워 오랫동안 총장으로 있었습니다. 박지철 장로님의 우선순위는 섬김의 큰  믿음(大信)으로 하나님께서 그의 가정에 복(降福)을 내려주셨습니다.

 

높임을 받으려면 남을 높여주어야 합니다. 칭찬을 받으려면 남을 칭찬해 주어야 합니다. 인정을 받고 싶으면 남을 먼저 인정해 주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복을 받으려고 하면 하나님의 복을 받을 큰 믿음의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선 더욱 입춘대신立春大信 오늘부터 나의 믿음을 더 크게 하여 원주강복願主降福 하나님의 복 받기를 원한다는 바람으로 우리의 우선순위를 정하여 언제나 ‘하나님 앞에서 코람데오라는 믿음으로 살아야 할 것입니다.

 

입춘대신 원주강복  올봄에 하나님이 저와 여러분의 믿음을 어여삐 여기사 福을 주시기를, 우리의 가정을 지켜 주시기 願합니다. 저와 여러분들의 자녀 손들의 직장을 지켜 주시기를 원합니다.  하나님이 그의 얼굴로 저와 여러분에게 비추시어 우리와 우리 자녀 손들에게 恩惠베풀어 주시기 願합니다, 여호와는 그 얼굴을 저와 여러분에게로 向하여 드사 우리와 우리들의 온 가족들에게 平康주시기를 祝願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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