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년 8월 21일 복음교회 교단 정책 발전 위원회 주제 종교개혁과 복음교회
장소 유성 계룡 스파텔
주제발표 루터의 탁상담화와 최태용 총회신학교 총장 목사 전 병 호
1517년 비텐베르크의 성당문 앞에 95개조의 신앙 논제를 내 걸은 이후부터 루터(1483-1546)에 의해서 로마 카토릭교회로부터 분리 된 교회를 흔히 푸로테스탄트라고 부른다. 푸로테스탄트라고 하는 뜻은 본래 중세 라틴어의 법적용어로서 “고백하다” “공적으로 증언한다”라는 뜻이지만 1529년 2월에 열린 제 2차 스파이어(Speyer)회의의 결정에 반대하면서 종교개혁을 지지하는 제후들과 독일의 14개 도시의 대표들이 모여서 항의서를 작성하여 신성로마제국의 황제와 또 앞으로 열릴 종교회의에 제출키로 한 사건이 있었는데 이 때 이 선언서를 지지한 사람들에게 적용되는 변혁과 부정적인 의미의 표현을 푸로테스탄트(라틴어protestatio 영어로는 17세기 중반부터 씌여졌다)라 부르게 되었다. 이러한 명칭에서 종교개혁의 기본 성격이 곧 “부정”이라는 사실을 인정하게 된다. 우리는 부정이라는 개혁적 언어 표현으로 루터의 로마교회에 대한 부정과 도전 그리고 새로운 성경해석과 교회의 방향 제시를 보게 된다.
우리는 루터의 종교개혁의 출발점을 그의 부정적 개념 사상에서부터 찾아 볼 수 있다.
1925년 12월 6일 서울 YMCA강당에서 18세 최태용은 “아! 조선교회여 ...이제 그 신앙은 죽은 껍질이 되었다... 아! 하나님이여 이 백성을 긍휼히 여기소서, 죽은 껍질을 깨트리며 부패를 청산하는 당신의 말씀이 임하여 주옵소서. 그리하여 교회의 俗化 부패에도 불구하고 조선 사람의 영혼의 구원이 있게 하옵소서”라고 기도하며 “신앙혁명선언”을 선포하였다. 그리고 1929년 2월 6일 “영과 진리” 창간호에서 “우리가 1920년대 당시의 교회에 대하여 어떻게 할까”라는 제목으로 최태용은 세 가지 취할 태도를 설명한다. 첫 번째 태도는 참음이다. 교회는 부패하고 생명이 없으나 “살아남아 있는 시온의 딸”이 되기를 힘쓰는 참음이다. 두 번째 태도는 다스림이다. 성령께서 고무하시는 용기로 저희의 죄를 책망하며 그 잘못된 것을 바로잡는 일이다. 그리고 세 번째 태도는 “푸로테스탄트”이다. 교회는 부패하여 死殼化 되고 고목이 되어 말라 비트러졌다. 따라서 치료한다는 것은 시간낭비일 뿐이다. 그러므로 다시금 푸로테스탄트를 푸로테스탄트 하지 않으면 아니 된다. 최태용은 자기의 새로운 신앙운동을 ‘넌 non’이 아니고 ‘안티 anti’라고 하면서 무교회주의가 아니고 비교회주의라고 공언하였다. 그는 당시 조선 교회는 진리를 올바로 밣히지 못하는 깊은 암흑 속에 빠져 있어서 증인된 사명을 잃어 버렸기에 “우리는 조선의 구원을 위하여 우리가 내세우는 입장이 비교회주의(당시 타락한 교회에를 부정하는 입장에서)”라고 말하였다.
우리는 최태용이 당시 부패한 기성교회를 부정함으로서 새로운 개혁을 시도하였던 것처럼, 16세기 초 로마교회를 부정하여 개혁의지를 불태운 루터에게서 이 “부정의 개념”을 개혁의 출발점으로 삼고 있음을 볼 수 있다. 더욱이 로마교회를 부정하여 나타난 독일교회 운동과 부패한 조선교회를 부정하여 나온 기독교조선복음교회의 신앙적 출발점이 일치하고 있다고 하겠다. 즉 초기의 복음교회는 루터의 종교개혁의 정신을 계승하고 이 땅에 하나님의 말씀을 통한 새로운 구원의 역사를 일으킬 역사적 사명을 가지고 있었다고 생각된다.
그러면 먼저 루터의 교회에 대한 부정의 개념으로서 그의 신앙적 입장을 살핀 다음 최태용의 조선의 기성교회에 대한 부정의 개념으로서 그의 신앙적 입장을 살펴 복음교회의 교회사적 위치와 사명을 말하고저 한다.
(1) 먼저 루터의 부정의 개념으로서 그의 신앙적 입장을 살피기 위하여 우리는 그의 초기 작품인 3대 개혁 논문과 탁상담화를 주의 하게 된다.
그의 초기작으로 다음과 같다.
독일크리스챤 귀족에게 보내는 글(To the Christian Nobility of the German Nation)
교회의 바벨론 포로(Babylonish Captivity of the Church).
크리스찬의 자유(On Christian Liberty)
“독일 귀족에게 보내는 글(1520년 7월 20일 완성 8월 18일 출판)에서 그는 로마교회의 기존 교리와 잘못된 제도를 부정하고 만인 제사설을 주장하였다. 당시 로마 교회는 사람의 신분을 ”영적 구분“ ”세속적 구분“으로 나누어 사제직의 우월성을 강조하였는데 이는 로마교회가 만들어 낸 기만이요 날조라고 공박한다. 벧전 2:8 “오직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의 말씀처럼 누구든지 세례와 복음 그리고 신앙을 가진 기독교인은 모두 다 영적 신분에 속한다는 것이다. 평신도와 사제직의 신분상의 차이란 단지 직무상의 차이일 뿐이며 만일 어떤 사제가 그 직책을 은퇴하면 그는 더 이상 사제가 아니며 평신도가 된다는 것이다. 루터는 사제란 본질상 구별되는 것이 아니고 말씀 선포와 성례의 집행이라는 직책을 수행하기 위하여 뽑혀진 사람일 뿐이라고 말한다. 따라서 종례의 로마교회의 사제 개념을 전면 부정하였다. 또한 성서해설의 권위에서 로마교회는 교황과 사제들만이 가지는 결코 잘못이 있을 수 없다고 하는데 있어서 루터는 교황무오설은 이단이며 비기독교적이라고 공박하였다. 성서해석의 권위는 복음과 성례 및 신앙을 통하여 사제된 기독교인이면 누구라도 권위를 가진다고 보며 로마교회는 성경보다 그들의 교서를 더 중요시 하는데 잘못을 범하고 있다고 말한다.
“교회의 바벨론 포로”(1520년 10월6일 발표)에서 유대인들이 바벨론 포로생활 하던 것처럼 기독교인들이 로마교회에 감금되어 교회는 자신의 자유를 유린당하고 있다고 주장하며 카토릭의 7성례 중 세례와 성만찬 참회만이 인정된다고 말하였다. 루터는 오직 믿음을 외치는데 “사람으로 하여금 그리스도의 상속자가 되도록 하는 것은 오직 믿음뿐이며 더구나 이제 미사가 인간 행위나 선행이 아니고 하나님의 말씀이므로 이에 요구 되는 것은 오직 믿음(Sola fide)뿐이라”고 말하였다.
“크리스찬의 자유”(1520년 파문 후 11월에 발표)에서 당시 레오 10세 교황에게 보내는 공개장으로서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만 의롭다함을 얻는다’라는 말을 다시한번 강조하면서 의를 획득하기 위한 혹은 구원의 수단으로서 행위를 부정하였다.
다음은 루터의 탁상담화를 소개하려는데 그 전에 로마교회에 대한 루터의 부정의 개념을 몸소 실천한 사건이 바로 루터의 결혼 사건이라 하겠다. 루터의 결혼 에피소드를 잠시 소개하고자 한다,
루터의 아내가 될 폰 보라(1499-1552)는 10살이라는 어린 나이에 수녀원에 들어갔으며, 16세에는 수녀 서원을 하고 수녀의 길을 걸어가게 된다. 그런데 수녀가 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종교개혁이 일어났고, 그녀가 머물던 님브센(Nimbschen)수녀원에는 몰래 들여온 루터의 책이 읽히기 시작하였다.
폰 보라를 포함한 많은 수녀(9명~12명)가 루터의 개혁 사상이 담긴 글을 통해 자신의 오류를 깨닫게 되었고, 루터와 서신을 주고받으면서 그리스도 안에서 누리는 참 자유를 되찾기 위해 수녀원을 탈출할 생각을 품게 되었다(당시 수녀원 탈출 시도는 사형에 처할 정도로 엄하게 다스리던 죄였다).
그러자 1523년 루터는 토르가우 지역의 시의원이자 상인이었던 레온하르트 코페에게 부탁하여 ‘수녀 탈출 작전’을 실행에 옮기었다. 코페는 평소에 수녀원에 생선을 납품하고 있었는데 이 날 구운 청어를 담는 큰 통을 여러 개 준비한 다음 한밤중에 수녀원을 찾아갔다. 그리고 그가 수녀원 문을 다시 나설 때 그 통 안에는 그리스도 안에서 자유를 되찾기를 갈망하던 그의 딸과 11명의 수년들이 한껏 숨을 죽이고 있었다.
그렇게 ‘거룩한 강도 행각’을 벌인 루터는 탈출한 수녀의 의식주 문제를 적극적으로 해결해주면서 그리스도 안에서 행복한 가정을 꾸릴 수 있도록 결혼을 주선해주었다. 그러자 탈출한 수녀들이 결혼하여 각자 행복한 가정을 꾸렸다. 단 한 사람, 폰 보라는 아직 혼자 였다. 그 까닭은 그의 남다른 성격 때문에 인기가 없었을까? 폰 보라가 끝까지 남은 데에는 그녀의 당당하고 강인한 성품이 한몫을 하였던 것이다. 폰 보라는 루터가 소개해준 남성들에게 당당하게 하고 싶은 말을 다하였던 것이다. 또 그것도 매력이라 하여 남자들이 그런 그녀에게 청혼하기도 했지만, 그녀는 자신의 성에 차지 않는 그 남자들의 구애를 끝까지 받아들이지 않았다(물론 그중에는 남자 쪽 부모의 반대로 결혼이 이루어지지 않은 적도 있었습니다). 그렇게 그녀가 계속 가정을 꾸리지 못하자, 루터는 막중한 책임감 속에서 많은 생각과 고뇌를 하였다. 그러다가 결국 루터 자신이 폰 보라의 남편이 되어주기로 하였다. 사실은 폰 보라는 그동안 내심 루터와 결혼하게 되기를 바라고 있었던 것이다. 그렇게 전혀 예상치 못했던 두 사람이 1523년 6월 13일 하나님의 은혜와 섭리 가운데 결국 부부의 인연을 맺게 되었다. 42세의 신부와 16세 연하의 수녀가 결혼하였다는 이 소식을 들은 많은 사람들이 놀라고 어떤 사람은 비난도 하였다. 그러나 루터는 결혼은 하나님의 명령이다라고 말하였다. 루터의 결혼 이야기는 폰 보라의 삶을 소개한 “눈속에 피는 장미” (우즐라 코흐 저, 이은자 옮김, 솔라피데출판사에서 발간)에서 흥미롭게 읽어 볼 수 있다.
루터의 결혼 사건은 지금까지 남자를 원죄로 몰아간 악마적 존재로 비난받거나(테르툴리아누스) 재생산을 위한 수동적 도구로 간주되던(아우구스티누스) 여성을 남자의 파트너로 인식하기 시작하도록 한 사건이었다. 창세기의 “돕는 배필”이라는 단어가 이때만큼 중요하게 강조된 적이 또 있었던가! 개신교 목회자들과 개혁 신앙을 옹호하는 이들이 여자는 “필요악이 아니라 필요선”(존 코튼)이라고, 아내는 “방해물이 아니라 돕는 배필”(로버트 클리버)이라고, “당신만을 사랑하는 신실한 친구”요 “당신의 영혼에 힘을 주는 조력자”(리처드 백스터)라고, “하나님의 선물”(헨리 스미스)이라고 ‘격찬’하기 시작하였다. 루터 역시 전직 수녀 출신인 아내 카타리나를 “박사님” “비텐베르그의 샛별”이라고 칭할 만큼 존중했다고 한다.
1626년 카스파르 반 슈파르(Casparus Van Sparr)가 낡은 집을 헐고 세 집을 지으려고 집터를 파내려 가던 중 린넨 천을 둘둘 마린 채 밀납으로 단단히 봉인된 한권의 책을 발견하였다 놀랍게도 이 책은 루터의 ‘탁상담화(Colloquia Mensalia)’ 였다.
루터의 「탁상담화」는 보통 저녁 식사들 마친 후 루터가 친지들과 식탁에서 나눈 이야기들을 약 12명의 친구들과 제자들과 나누었던 이야기들을 루터의 말년까지 그의 곁에서 동고동락한 안토니 라우터바흐(Antony Lauterbach)와 요한 아우리파버(John Aurifaber)가 근 20년 동안의 간격을 두고 모아놓은 책이다. 이 루터의 식객 중에는 멜링히톤 같은 학자들이 끼어 있었으므로 단순히 식사 후의 사담을 기록해 놓은 책이라기보다는 루터의 사상을 엿볼 수 있는 자료라고 할 수 있겠다. 「탁상담화」의 내용에 있어서는 듣는 사람들을 영적으로 격려하고, 은혜가 되는 말씀들이며, 형식으로는 문답식, 권고, 교훈, 지시 등의 형식뿐만 아니라 인물평, 예언, 농담 같은 형식으로 되어 있는 것들도 있다. 「탁상담화」의 원문은 유감스럽게도 다 분실되어 루터 저작의 초기 판에는 「탁상담화」는 포함되지 않았으나, 1566년 루터의 집에 유숙한 일이 있는 Johannes Aurifaber가 루터의 여러 가지 담화문 사본과 그 자신이 기록한 것을 합하여 출판한 것이 「탁상담화」출판의 시작이 되었다. 첫 독일어로 출판이 된 이래 이 책은 종교개혁의 기름을 붓듯 교황의 권력에 엄청난 타격을 주게 되었다. 당시 그레고리 13세는 출판된 모든 책을 수거하도록 명령하였고 만일 이 책을 소지한 사람이 발각되면 화형에 처한다고 공포하였다. 그래서 모든 “탁상담화”책은 사라지게 되었는데 하나님의 섭리로 슈파르 집 땅속에서 마치 신명기서가 예루살렘 성전 연보궤 속에서 발견되듯 다시 햇빛을 보게 되었던 것이다.
평범하면서도 다양한 내용은 500년을 지나오는 동안 독일 개신교도들 뿐 만 아니라 다양한 교단의 기독교인들에게도 호응을 얻었다. 독일에서는 물론이요 오늘날 전 세계 기독교인들에게 성경에 버금갈 정도로 많이 읽혀지고 있다. 나도 이 책을 읽으며 마치 루터가 400년 후에 최태용으로 다시 태어난 것이 아닌가하는 착각이 들 정도로 천래지성과 영과 진리에서 루터의 주장을 반추(反芻)하게 되었다,(탁상담화 이길상 옮김 크리스찬 다이제스트 2014년)
루터는 당시 비텐베르크 어거스틴 수도원이었던 이곳에서 생활을 시작해 세상을 떠날 때까지 이곳에만 머물렀다(물론 중간 중간 이리저리 불려 다니기는 했다). 특히 루터는 이 수도원 탑에 있는 작은 방(혹은 서재)에서 회심했다고 전해진다. 그래서 사람들은 루터의 회심을 가리켜 ‘탑 체험(Turmerlebnis: Tower experience)’이라고도 한다. 어떤 책에서는 루터가 그때 화장실에서 큰일을 보는 중이었다고 말한다.
물론, 루터가 회심한 정확한 시기와 정황은 알기 어렵다. 그러나 탁상담화에서 루터가 언제 회심했는지를 추정할 수 있는 대목이 있다. 그 책에서 루터는 1519년에 복음적인 ‘하나님의 의’에 대한 개념과 칭의 교리를 확고히 하였다고 한다. 그가 그때를 설명한 대목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바울의 로마서를 이해하려고 몹시 애쓰는 나에게 가장 큰 장애물은 “하나님의 의” 였습니다. 그것은 내가 이 의(義)라는 말을 하나님께서는 의로운 분이요, 따라서 불의한 사람들을 공정하게 처벌하신다는 뜻으로 받아들이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때 나의 상황으로 말하면 수도사로서는 털끝만치도 흠잡을 데가 없었지만, 하나님 앞에서는 여전히 마음이 괴로운 죄인이었기에 도무지 나의 공로를 가지고는 그분을 누그러뜨릴 자신이 없었습니다. 그러므로 나는 공정하고 성난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았으며 오히려 증오하고 그분께 투덜댔습니다. 그러면서도 여전히 나는 바울을 붙잡고 늘어지면서, 그의 말에 무슨 뜻이 담겨 있을까 하고 계속 묵상하며 생각하였습니다. 밤낮을 가리지 않고 곰곰이 생각하던 어느 날, 나는 하나님의 의와 ‘의인은 믿음으로 산다’는 말 사이에 관련이 있다는 걸 깨달았습니다. 그때 나는 하나님의 의란 하나님께서 은혜와 순수한 자비를 발휘하신 나머지 우리의 믿음을 보시고 우리에게 죄가 없는 것으로 취급하는 그 의(Righteousness)라는 걸 터득하였습니다. 그 순간 나는 새로 태어나서 활짝 열린 문을 통해 낙원에 이른 기분이었습니다. 성경 전체가 새로운 의미를 지녔으며, 전에는 “하나님의 정의” 때문에 내 속은 증오로 꽉 차 있었지만 이제는 그것이 이루 말할 수 없이 소중하게 되었으며 더 큰 사랑을 불러일으켰던 것입니다. 바울 서신의 이 대목이 나에게 있어서 하늘로 통하는 하나의 문이었습니다. …(중략)…그리스도께서 자신의 구주시라는 사실을 참으로 믿는 순간 당신 곁에는 은혜로운 하나님께서 계십니다. 그것은 당신을 데리고 들어가서 하나님의 마음과 뜻을 활짝 열어 제치고 당신에게 순수한 은혜와 넘치는 사랑을 보게 하는 것이 바로 믿음이기 때문입니다. 믿음 안에서 하나님을 뵙는다는 것은 다름이 아니라 더 이상 노여움이나 불친절을 찾아볼 수 없는 그분의 아버지로서의 마음, 다정한 마음을 우리가 대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성난 분으로 보는 사람은 그분을 제대로 보는 것이 아니라 마치 그분의 얼굴에 검은 구름이 덮였을 때처럼 하나의 커튼을 대하고 있을 뿐이라 하겠습니다.”
그 누가 하나님의 얼굴을 제대로 보지 못하고 있는가?
루터는 교황권에 대해서 완강히 부정한다. “교황주의자들은 ‘교회는 오류를 범할 수 없다’고 외칩니다. 바로 이런 막무가내 주장에 맞서서 선지자들과 사도들이 싸웠습니다. ... 교황주의자들은 이렇게 말합니다. ‘하나님께서 당신의 교회를 버리신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친히 말씀하시기를 내가 세상 끝 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고 하셨기 때문이다.’ 그런데 문제는 주께서 이 말씀을 누구에게 하셨느냐는 것입니다. 교황주의자들입니까? 아니면 로마 교회입니까? 마음이 상하고 통회하는 자들입니까? 아니면 로마 종교 귀족들과 그들의 신복들입니까?”(668 이길상 옮김 탁상담화)라고 묻는다. “불경건한 교황주의자들은 하나님의 말씀보다 교회의 권위를 크게 높입니다. 이러한 가증하고 참람한 태도를 그냥 두어서는 안 됩니다. 그들은 이런 태도로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하나님의 면전에 침을 뱉습니다. 하나님의 인내가 워낙 커서 그들이 당장 멸망하지 않고 항상 그런 상태로 있는 것입니다.“(58) 루터는 교황들의 탐욕을 지적한다. “교황들의 탐욕은 아무도 따를 자가 없습니다. 이는 마귀가 로마를 자신의 특별한 거처로 삼은 까닭입니다. 옛 성도들은 로마가 탐욕의 소굴이요 온갖 악의 뿌리라고 말했습니다. 나도 옛날 책에서 다음과 같은 시를 읽었습니다. Versus Amor, Mundi caput est, et bestia terrae – 전도된 사랑은 세속의 머리요 땅의 짐승이다.- Amor 라는 단어를 뒤집어 읽으면 Roma가 됩니다. 로마가 세상의 머리요, 온 땅을 집어 삼키는 짐승이라는 뜻입니다.”(492) 루터는 교황을 뻐꾸기에 비유한다. “뻐꾸기는 홍방울새의 둥지에서 그 새의 알들을 밖으로 떨어트린 다음 자기 알들을 그곳에 둡니다. 그리고 새끼 뻐꾸기들은 몸집이 커지면 홍방울새를 잡아먹습니다. 뻐꾸기는 나이팅게일도 적대시합니다. 교황은 뻐꾸기 같습니다. 교회에서 참된 알들을 밀어내고 그곳에 자신의 탐욕스러운 추기경들을 심어 놓으면, 그들은 자신들을 키워준 어머니를 집어 삼켜버립니다. 또한 교황은 참된 교리를 전하고 찬송하는 나이팅게일도 곁에 두지 못합니다.”(443) “교황은 머지않아 꺼지게 될 등불의 마지막 불꽃이며 그 권세가 강할 것이나 자기 힘으로 말미암은 것이 아니며(단8:24)라고 말한 다니엘의 말처럼 다른 사람들의 권력을 이용하여 전쟁을 벌여가며 칼과 대칙서로 철권을 행사하는 마귀의 마지막 도구입니다.”(430)라고 맹렬하게 로마 교황청을 비난하였다, 루터의 말을 들으며 소름이 끼치도록 무서움을 느끼게 된다. “그들이 진리를 가르치지 않는 것을 나는 직접 간접으로 지적합니다. 이일을 위해 나는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나는 거위의 목을 잡고 칼로 숨통을 땁니다....교황은 순수한 말씀과 교리를 제거하고 다른 교훈과 교리를 교회에 매달아 놓았습니다. 나는 하나님의 말씀을 바르게 가르치고 거기에 다른 교훈을 섞지 않는 이 한 가지 점으로 교황의 영토 전체를 뒤 흔들었습니다. 우리는 바른 교리를 선양해야 합니다. 그것이 교황의 숨통을 끊는 것입니다.”(415)
흔히 루터는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얻는다고 말함으로 행위는 부정하는 거처럼 알려졌다. 임태수 박사는 어느 모임에서 어거스틴의 믿음과 행함을 소개 하면서 “이제 우리는 (믿음만이 우리를 의롭게 한다고 하면 행함을 부정하는) 루터의 잘못된 구원론을 바로잡지 않으면 안 된다. 그렇지 않으면 위기에 처한 한국교회와 세계교회를 다시 살릴 수 없다. ”라고 주장하였는데 이는 아주 잘못된 편견이 아닐 수 없습니다.(제2종교개혁연구소 주최 '제2기 제2종교개혁 신학강좌 2015년 10월 16일)' 루터는 탁상담화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다. “우리가 하나님의 교회에서 힘써 가르쳐야 할 것은 하나님께서 친히 가르치신 선행을 그 백성들에게 받으신다는 것입니다.” 이런 말은 교황과 그 추종자들이 선행을 자의적으로 행하고 있기 때문에 그런 행위는 하나님이 받으시지 않으신다는 것이다.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얻는 교리는 힘써 가르쳐야 하지만 선행도 힘써 가르쳐야 한다고 말한다. 왜냐하면 누구든 예수그리스도를 믿기만 하면 구원을 얻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계명을 짓밟으면서 믿는다고 하면 그 믿음은 가짜이고 위선이라는 것이다. 그러면서 루터는 “베푸십시오”라고 말하면서 이런 이야기를 한다. “오스트리아에 한 수도원이 있는데, 과거에 그 수도원은 매우 부유했고 가난한 사람들에게 많이 베푸는 동안에는 부를 유지 했습니다. 그런데 구제를 대폭 줄인 다음부터는 궁핍하게 되어 오늘날 까지 그 상태로 나마 있습니다. 얼마 전에 가난한 사람이 그곳에 가서 구제를 청하였다가 거절당했습니다. 그 사람은 하나님을 위한 구제를 왜 거절하느냐고 따졌지요. 수도원 문지기는 수도원이 가난해 졌기 때문이다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러자 탁발수사가 이렇게 말했습니다. ‘당신들이 가난해진 이유가 바로 그겁니다. 과거에 이 수도원에는 두 형제가 있었는데 한 사람의 이름은 다테(주다)였고, 다른 한사람의 이름은 다비투르(네게 주어질 것이다)였습니다. 그런데 당신들이 다테를 쫒아내자 다비투르가 제 발로 걸어 나간 것입니다.’....여러분, 무엇을 얻고자 하면 베풀어야 합니다. 후히 베풀고서 빈손으로 전락하는 일이 없습니다.“(316)
이처럼 루터는 하나님 말씀으로 살아가는 것이 얼마나 영광스러운 일인가를 말하면서 ”하나님말씀이 있으면 언제든 기쁨과 안전을 누릴 수 있습니다. 앞에 정결하고 밝은 길이 환하게 놓여 있으므로 구태여 다른 사람에게 위로를 기다리지 않아도 됩니다. 하나님 말씀이 눈에 보이지 않는 사람은 절망에 떨어지게 됩니다.“(20)고 말한다.
탁상담화에서 루터가 면면히 주장하는 것은 바로 부정의 개념인 것이다. 그러나 부정은 부정으로 끝나지 않았다 부정의 개념은 바로 긍정으로 가는 길목이었던 것이다. 타락한 로마교회(-)를 부정(-)하니 진정한 참 교회(+)의 모습이 나타나게 되었다. 바로 이 교회가 프로테스탄트였다. 나는 이 루터의 탁상담화를 읽으면서 최태용이 천래지성과 영과 진리에서 설파한 논조를 상기하였다.
(2) 우리는 최태용의 부정의 개념 역시 루터의 그것과 같은 맥락에서 살펴 볼 수 있다.1924년 신생명지에 기고된 최태용의 글로부터 천래지성, 영과 진리에 이르기 까지 최태용이 누누이 강조하는 것은 선교사들과 그들이 이 땅에 심으려한 고정주의적 신학과 제도 그리고 말라빠진 교리만 붙들고 있던 기성교회에 대한 철저한 부정 이였다. “천래지성”을 통하여 우선 교회를 제도적으로 잘못되었음을 비판하고 이 제도 하에 조선인의 영혼과 그 신앙을 예속 시키려 하는 선교사들에 대하여 맹공을 퍼부었다. 몸은 일본인에 의하여 노예화 상태이고 정신은 선교사의 지배하에 있으니 이는 오도된 교리로 정신의 자유를 억압하는 것으로서 저들로부터 독립하라고 외친다. 루터가 바벨론 포로에서 말하였듯이 로마교회로부터의 지배에서 벗어 날것을 외쳤던 것처럼 최태용도 그랬다. 조선인에게 우선 필요한 것은 저들의 교회가 아니라 복음이라는 것이다. 마치 교통사고로 수혈을 해야 할 응급환자를 길에 그대로 방치한 채 각 병원 의사들이 달려와서 자기 병원으로 데려갈려고 환자의 사지를 붙들고 서로 잡아 다니는 꼴처럼 당시 선교사들에게서 그와 같은 모습을 최태용은 보았던 것이다. 환자에게 수혈이 필요하듯이 조선교회와 교인들에게 외국의 교파적 교회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따뜻한 말씀과 손길이라 하겠다. 그러므로 선교사들의 교파적 지배 하에서 는 조선교회는 예수그리스도와 전혀 별개라고 선언하고 “거기는 사람의 사상이 선전되고 사람의 방법이 행하는 곳이요 예수 그리스도의 영과 그 일체를 주장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저들은 사람의 영혼과 관계없는 기독교를 만들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지금 조선교회는 그리스도와는 관계가 없다는 것이다. 그리스도에게서 떨어 저 나가고 세상에 화한 그 본의를 잊어 버렸으니 조선 사람의 영혼은 어디 가서 구원의 복음을 들으며 어떻게 구원을 얻을수 있다는 말인가? ”아- 이 나라가 어찌할꼬, 이 백성이 어찌 할꼬, 아- 통탄의 극이로다“라고 최태용은 통탄의 눈물을 흘렸다.(천래지선 14호 아! 하나님이여 조선을 구원하소서) 그래서 그는 신앙혁명을 선언하고 생명신앙이 살아 꿈틀거리는 시퍼렇게 날선 신앙을 일으키고자 하였다.
“영과 진리”지를 통해서 그는 그를 이단시하는 기성교회를 향하여 신학적 논쟁을 펼치면서 그 신학적 대안으로 ‘영적 기독교론’을 주장하며 이에 입각한 조선기독교 신학을 제창하였다. 조선신학의 재창이야 말로 당시의 그의 예언자적 개혁가적 안목을 오늘날 후대인들에게 보여주었고 따르게 하였다. 그는 당시 풍미하는 근본주의 신학은 과거의 그 생명이 다한 신경의 되풀이에 지나지 않기 때문에 이제 새로운 시대의 왕성한 신앙생명을 일으킬 수 없다는 것이다. 또한 신비주의도 말씀을 도외시한 오직 감정에 불 부친 광희적 황홀상태로 그것은 그리스도와 전혀 별개라고 지적하였다. 그의 대안적 입장인 “영적 기독교론”을 다르게 바꾸어 말하면 “십자가 신학”이다. 그것은 철저한 자기 부정이다.“육은 죽이고 영으로 사는”일이다.
당시까지만 해도 절대 기피의 신학인 칼 바르트 신학을 최태용은 채용한다. 뿐만 아니라 성경의 문서비평 자료비평 등을 받아들이면서 성경말씀의 현대적 의미를 찾고자 하였다. 흔히 한국 신학의 현대적 기초로서 기독교장로회의 김재준 박사와 감리교회의 정경옥 박사를 말합니다.(주재용박사 견해) 그러나 이는 아직 최태용을 만나지 못한 설이라고 하겠다. 최태용의 현대 신학적 이해는 한국 신학사에 간과 할 수 없다. 그런데 최태용은 그 부정의 개념을 통해서 바르트의 신학까지 이 땅의 신학으로써 합당하지 않는다고 보며 바르트에게는 실제 역동적인 생명성이 약하다고 지적하고 삶의 신학을 주장하였다. 그러나 자칫 개인주의적 경험이 우선되기 쉽기 때문에 십자가를 경험하는 공동체로서 교회의 필요성을 강조하고 복음교회를 창립하였던 것이다. 따라서 복음교회는 “조선인 기독인의 당위적 양심”이라는 것이다. 영과 진리 103호(1938년 1월 31일)에서 “조선에는 조선인교회가 서지 아니하면 아니 된다. 신학적으로나 재정적으로나 정치적으로나 조선인 자신의 교회가 서지 아니하면 아니 된다. 이것이 우리 조선인 기독자의 양심이다.... 조선인 기독자가 이 양심이 없으면 그것은 조선인 신자로서 자각이 없음이다. ... 우리는 우리의 양심을 지키고 최후까지 나아가련다. 가령 조선에 복음교회가 성공하지 못하고 없어지는 일이 있을지라도 조선인 중에는 그 조선인 신자로서의 양심을 가지고 행위 한 자들이 있다는 일이 조선의 정신사에는 끼여 있으리라고 우리는 믿는다. 그런데 이 조선 복음교회가 바로서지 못하고 즉 영과 진리에 바로 서서 십자가 신앙을 따르지 못하고 다시 기성화 되면 조선 복음교회는 자칫 걸려 넘어질 돌이 되고 말 것이다.”라고 말하였다. ‘영과 진리’100호 기념강연(1937년 10월 28일)에서 그는 이렇게 결론 맺었다. “우리는 신앙을 영원히 생명적인 것으로 하여 가지지 아니하면 아니 된다. 신앙이 생명이려면 그것은 생활하는 신앙이지 아니하면 아니 된다. 그래서 영의 심판으로 말미암는 육의 부정의 행위로써 진리 행위로의 신앙생활은 그것이 영원히 신앙을 생명적인 것으로 하리라.”
루터는 부정의 개념을 통하여 로마교회로부터 푸로테스탄트 교회를 세웠다. 그리고 최태용은 역시 부정의 개념으로 부패한 조선의 교회로부터 1935년 복음교회를 세웠다. 복음은 메마르고 신경만 있고 생명 말씀은 없으며, 고목화된 교리만 붙잡고 있고, 조선인 자신의 고백적 교회는 없고, 선교사의 자선적 교회만 있는데서 부터 신앙은 복음적이요 생명적이어라. 신학은 학문적이어라. 교회는 조선인 자신의 교회이어라고 선언하며 최태용은 한국인 자생의 교회를 세웠던 것이다.
(3) 최태용과 그의 신앙동지들에 의해서 이루어진 신앙생명운동은 시대적 사회적으로 어떤 의미를 가지는가? 과연 복음교회의 창립은 불가피한 일이였으며 복음교회의 한국교회사적 위치는 무엇인가?
나는 스멜서(Neil Joseph Smelser)가 말하는 집합행동가운데 “가치지향적 운동(value-oriented movements)”을 통해 설명하고자 한다.(1963년에 발간한 ‘집합행동의 이론’ Theory of Collective Behavior) 이 가치지향 운동이란 특정의 일반화된 신념 하에서 여러 가치를 회복, 보호, 수정 혹은 창조하고자 하는 집합시도를 말한다. 가치는 행위의 구성요소 가운데 가장 높은 수준의 것이므로 이러한 운동에서 가치의 제 구성뿐 아니라 규범을 다시금 정하고 규정하려는 것이다. 최태용의 생명신앙운동 역시 기성의 교리와 제도하에 있는 교회의 신앙과 조직을 수정 창조하려는 집합적 시도로 볼 수 있다. 성경말씀에 입각한 신앙의 재구성뿐만 아니라 새로운 조직 가운데 살아갈 것을 요구하고 전혀 새롭고 변화된 교회를 제시하려 하였던 것이다. 가치지향 운동은 그에 따른 “구조적 유인성”과 “구조적 긴장”에 의해서 비롯된다. 일제하에 있어서 정치구조 경제구조 계층구조는 대다수의 한국 백성에게 대단하게 불리한 상황이었다. 따라서 스멜서가 말 한대로 최태용의 생명신앙운동은 “구조적 유인성”에 있어서 충분한 가능성을 가졌던 것이다. 먼저 정치구조를 살펴보면 3.1운동이후 4배에 가까운 경찰력 증가, 정치 행정면에서 한국인에 대한 폐쇄정책, 참정권 확대나 자치 결사의 억압으로 힘에 의한 한국민의 정치의 참여를 극심하게 통제하였다. 경제구조를 보면 “식민지상업자본주의”체제로서 농민과 영세한 소상공업자들이 파탄지경 이었으며 계층구조에 있어서도 한국민은 영세한 소 생산층과 노동자들로 구성되었고 일본인은 다수의 화이트칼라와 고급 기술자로 되어 있어 수탈과 착취가 심화되어 있는 상태였다. 이러한 때에 사회주의와 공산주의가 지식인들 사이에 번져 져 가고 교회는 선교사들에 의한 어용종교가 되어 가고 있었다. 이러한 시대에 한국 백성들은 심한 가치의 몰락과 혼돈 속에 빠져 스멜서의 용어대로 “구조적 긴장”이 팽대한 상태였던 것이다. 절대적 궁핍, 민족적 소외감, 사회 각 부분의 긴장 상태 등으로 일제하의 한국사회는 無規範 상태의 모습이 여러 측면에서 나타났는데 절망에 빠진 지식인들은 퇴폐적인 생활에 빠져 있고, 생활고와 도덕적 파탄으로 생겨난 절도 및 강도행위, 자살의 급증, 도박, 미신과 사교의 亂舞 등이 이 땅의 어두운 사회의 내용들이라 하겠다. 더욱이 급작스런 서구 문명의 유입으로 기존의 유교문화는 깊은 沈潛에 빠져 들었다. 이러한 각계각층의 의미 체계의 혼돈은 종교운동을 통한 가치지향적 운동이 태어 날 좋은 토양이 되었던 것이다. 이러한 토양에 최태용의 생명신앙 운동은 이 시대에 있어서 “상황돌파기능(breakthrough)”을 수행하였다고 하겠다. 상황돌파기능이란 사회 제 가치가 혼돈에 빠지고 교회역시 그 빛을 발하고 있지 못하고 있는 때에 그야말로 이 시대는 답답하고 암울한 커틴이 모든 민족에 드려져 있을 때에 마치 강렬한 빛이 커틴 사이로 뚫고 들어오듯이 최태용의 신앙생명운동은 상황을 부정하고 상황을 돌파 하였던 것이다. 바로 부정을 긍정으로 바꾸는 일 이것이 최태용의 상황돌파 였다. ‘예히 오르’ 빛이 있으라 하니 빛이 있었다는 말씀처럼 복음교회는 시대의 빛으로 상황돌파기능의 교회였던 것이다. 교권주의와 두꺼운 교의의 장막이 드리워 중세의 민중들을 억눌러 숨도 제대로 멋 쉬고 있을 때에 루터의 종교 개혁운동은 새로운 시대로의 상황돌파 하였듯이, 도저히 누구도 뚫을 수 없었던 선교사들의 치리 하에 그리고 사각화 되고 고목화 된 교조주의 신학 울담으로 둘러쳐 있던 일제 치하의 당시 한국교회에 최태용의 생명신앙운동은 하나님이 원하시고 조선 백성들이 간절히 바라는 바른 교회로 훌쩍 뚫고 나갔던 것이다. 그러므로 최태용과 그의 신앙동지들의 이 생명운동은 하나님의 조선 구원사에서 한 굵은 획을 긋는 일이 아닐 수 없으며 그러므로 이 시대 속에 복음교회는 한국의 역사에 가장 적합한 시기에 하나님께서 이 민족을 이처럼 사랑하사 세우신 카이로스 교회이며, 지난 80년 동안 복음교회는 어둠을 밝히는 한 빛으로 한국 역사 한복판에 그 사명을 감당하여 왔다고 하겠다.
(4) 최태용은 다만 눈앞에 있는 교회울타리와 그 울타리 안에 있는 교인들만이 아니라 한국민 전체를 선교의 대상으로 한국의 땅 구석구석이 복음교회의 선교의 자리로 여겼다. 그가 해방 후 농민 훈련원을 세우고 3000 여명의 농민들을 훈련시킨 일은 바로 이 해방의 땅이 하나님의 금수강산으로 만들고자하는 사명감의 발로였다. 그것은 새 시대 새 국가에 가장 필요한 일이 무엇인가? 최태용의 눈은 낮은 곳을 향하였고 당시 가장 낮은 곳은 일제 35년 동안 온갖 수탈에 굶주렸던 농민들이었다.
오늘 우리는 종교개혁 500주년을 맞이하여 복음교회가 그 개혁에 어떻게 동참하며 새로운 선교의 방향을 설정할 것인가를 논의하려 이곳에 모였다고 생각한다.
그러므로 나는 3가지 논지를 여러분에게 제시하려고 한다.
첫째는 마틴루터와 최태용이 그 시대의 부정의 개념을 통해 개혁을 시작하였던 것처럼 오늘날 우리가 살고 있는 국가와 사회에 우리가 정의로운 부정해야할 일이 무엇일까? 여기서부터 21세기 새로운 종교 개혁이 출발할 것이다.
둘째는 부정의 개념을 통해 우리는 어떻게 하나님이 원하시고 21세기 새로운 한국 교회를 지향하는 긍적적인 것들이 무엇인가? 여기서부터 개혁의 내용들이 담아질 것이다.
세 번째는 복음교회가 변화되고 확고히 담지해야 할 일이 무엇인가? 여기서부터 21세기 복음교회 선교의 미래가 결정될 것이다.
최태용과 그의 신앙동지들의 십자가 신앙이 우리 복음교회 맥락 속에 흐르고 있다. 오늘의 여가 현장에서 부정의 싸움을 계속하여 마침내 푸로테스탄트를 프로테스탄트하는 교회로서 복음교회를 세워 나가야 할 것이다. 선교정책협의회를 맞이하여 한 알의 밀알이 썩어 수많은 밀로 태어나듯이 ‘너는 너를 부정하였는가?’를 화두로 남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