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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병호목사의 교회이야기

전병호 목사의 칼럼



 

2018년 1월 22일 기독교대한복음교회 총회 주제 발표

 

최태용 목사의 영적기독교론

총회신학교 총장 목사 전 병호

 

최태용 목사님의 영적기독교론을 이해하려면 먼저 성령론에 대한 조직신학적으로나 교회사적으로의 이해가 있어야 할 것입니다. 또 성령에 관한 성경해석학적인 연구와 각 교단적인 상이한 견해들에 대한 고찰도 필요하고 다양한 영성운동에 대한 설명도 있어야 할 것입니다. 또한 타종교의 영성이해와 여러 영성가들에 대한 고찰도 필요합니다. 특히 다석 유영모 선생의 영성론이 흥미롭습니다. 무엇보다도 최태용 목사님의 신학적인 바탕과 그의 교회개혁 정신도 살펴 볼 수 있어야 합니다.

최태용 목사님의 독특한 영적독교론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공시적(共時的: synchronical), 통시적(通時的: diachronical)으로 통전적(holistic) 연구가 병행되어야 할 것입니다. 저는 총회신학교 대학원과정에서 영적기독교론을 한 학기 18시간을 강의하고 있습니다. 오늘 이 시간은 시간적인 제한으로 다만 최태용 목사님이 말씀한 영적기독교론이 무엇인가 맛보기로 설명해 드릴 수밖에 없습니다. 혹 설명에 미진한 사항도 있을 수 있음을 양해하여 주시고, 언제라도 우리 총대님들과 함께 영적기독교론에 대한 구체적으로 심도 깊은 논의가 충분히 할 수 있기를 기대합니다.

각 교단 나름대로 그 교단이 존재해야할 필연성으로 자기들의 신학을 주장하고 있습니다. 그 교단의 신학은 그 교단을 세워 주는 기둥의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그 신학이 없다면 그 교단은 교단으로서의 존재의미를 상실하게 되는 것입니다. 장로교회의 칼빈신학, 감리교회의 웨슬레신학, 성결교회의 사중복음 신학, 오순절교회의 오순절 신학이 있다고 하면 우리 기독교대한 복음교회의 신학은 무엇입니까? 당연히 최태용 신학이요 최태용 신학이라면 바로 영적기독교론인 것입니다. 흔히 영적기독교론을 선입관적으로 사람들은 신비주의적이거나 오순절 계통의 성령이해처럼 생각하거나 최근의 영성운동 같은 것이 아닌가하는 막연하게 생각을 합니다, 그러나 기존의 성령에 관한 논의들을 개관하여 보니 최태용 목사님의 영적기독교론에 유비해볼만한 것을 찾아보지 못하였습니다. 전혀 격이 다르고 차원이 다른 새로운 영성론 입니다. 저는 최태용 영적기독교론 이야말로 21세기 인류를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축복이라고 감히 말씀드립니다. 혹 어떤 기회가 주어지면 분명히 이점을 제시하고자 합니다.

 

1926년 12월 6일 서울 YMCA강단에서 모여든 사람들 앞에 최태용은 한국교회의 “신앙혁명선언”을 하였습니다. 이 선언문에서 최태용은 “신앙혁명의 소리는 외쳐 가라사대 조직의 교리, 제도의 교회에 초월하여 영 진리 생명의 그리스도 자신에게 와서 영이 되라! 진리가 되라! 생명이 되라!”고 외쳤습니다, 여기서 그의 새로운 혁명적 신앙운동의 주제가 영 진리 생명이라는 사실을 명시해 놓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의 신앙 운동의 주제를 펼치기 위해 1925년에 ‘천래지성’이란 잡지를, 1928년부터 ‘영과 진리’란 개인잡지를 발간하여 꾸준히 독자들과 한국교회에 알리었습니다. 1929년 최태용은 그 어느 신학자의 학설이나 그 누구의 도움 없이 순전히 성령으로 말미암아 자신 안에 용광로처럼 분출되는 말씀의 역사를 체험하면서 조선을 살리고 교회를 혁신하는 새로운 신앙혁명원리로 영적기독교론을 발표하였다고 하였습니다. 이 새로운 신앙원리를 1929년 영과 진리 7월호(제 7호)로부터 시작하여 1931년 7월호(제 33회)에 이르기 까지 26개월 동안 총 20호에 걸쳐 연재 하였습니다. 그리고 1935년 기독교대한복음교회를 창립하면서 영적기독교론을 복음교회의 신학 원리로 삼았던 것입니다.

 

최태용 목사님은 기독교는 영의 종교라고 단언합니다. 영이 위로부터 와서 사람안의 깊음에 회개가 일어나고 새 생명이 시작되고 그 생명이 자라는 데에 기독교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까지의 기독교는 모이는 일이나 의식을 행하는 일이나 제도와 교리에 머물러 있으니 영 진리 생명의 교회가 되지 못하였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영은 우리 안의 깊음에서 일하여 영원한 생명을 산출하십니다, 그러므로 영적생명이 있는 그 곳에 기독교가 있다고 단언합니다. 롬 8:2에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고 말씀하시었습니다.

 

여호와를 아는 것이 지식의 근본이라는데 여호와의 무엇을 아는 것을 말함인가? 하나님의 본질의 계시가 무엇인가? 요4:24에 “히니님은 영이시다(프뉴마 호 데오스).” 이 말씀이 영적기독교론 전 편에 걸친 주조음(the keynote)음처럼 들려지고 있습니다. 그러면 영은 무엇을 말하는 것인가? 영이란 창조자 절대자의 본질로 이는 설명될 수 없습니다. 그러나 또한 설명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영은 진리로 자기 현현을 하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최태용의 용어 해석에 주의를 해야 합니다. 흔히 사람들은 진리란 변하지 않는 이치이라거나, 언제나 누구에게나 타당하다고 인정되는 만민의 일치(consensus gentium)가 진리라는 프로타고라스적 이해이거나, 삶에 유용한 것이 진리라는 실용주의적 진리를 말합니다, 그러나 최태용은 그런 사전적 철학적 경험적인 인식이 전혀 아닌 다른 의미로 사용하고 있기 때문에 영적기독교론을 이해하는데 오해가 없어야 합니다.

 

진리는 영이 구체화한 것입니다. 영의 言表(statement)가 진리입니다. 하나님의 본질인 영이 사람에게 있어서 언표인 진리 이것이 기독교의 근본 원리입니다. 하나님을 아는 지식은 영을 아는 지식인데 영을 그대로 알지 못하고 그 영이 언표된 것을 아는 것을 말합니다. 바울이 말한 하나님을 아는 것에 자라가라“(아웈사노메노이 테 에피그노세이 투 데우 골1:10)는 곧 영이 언표 된 지식을 말합니다. 모세의 율법은 당시 이스라엘 사람들이 영인 하나님을 이해하여 언표한 것입니다. 당시 사람들은 율법을 통해서 영이신 하나님을 알았습니다. 따라서 모세의 율법은 그러므로 이론이거나 설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의 언표로 진리입니다. 그러나 이 영의 언표로서의 진리는 과거의 진리입니다. 진리는 영의 언표인고로 언제나 새 시대 새 사건에 따라 새로운 언표를 하게 됩니다. 하나님이 창조하신 생명은 변하게 됩니다 그 변화에 따라서 하나님은 자신을 보여주십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한층 더 높이 더 새롭게 자라게 하심으로 그의 창조를 진보시켜 나가십니다. 그래서 바울은 “형제들아 지혜에는 아이가 되지 말고 ... 지혜에 장성한 사람이 되라(고전 14:20)”고 하였습니다. 한 시대가 지나가고 묵은 진리를 고집한다면 이는 도리어 하나님께 반항하는 것입니다. 유대인은 율법에 충성하고자 하여 은혜의 주 그리스도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았습니다. 묵은 진리의 고집은 그러므로 가장 무서운 죄입니다.

 

구약성경의 예언자들을 보면, 그들은 영의 느낌을 받아 그 사회를 보고 그 사회의 상황에 대한 영의 의의, 즉 진리를 지득하였습니다. 바꾸어 말하면 예언자들은 당시 사회의 상황을 살핀 그들에게 하나님의 영이 임하심으로 그들은 진리를 확신하고 그 사회를 향하여 진리를 주장하였던 것입니다. 이 진리는 그들에게 주신 영의 언표로 그들의 사회 문제를 해결하는 절대 명령 이였던 것입니다. 그러면 그 옛날 예언자들에게 언표 된 진리가 오늘 우리에게는 필요 없는 것이 아닌가하는 문제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만일 그 때 그 사건에만 해당된 것이라면 오늘 우리에게는 의미가 없을 것입니다. 진리는 영의 현현이기 때문에 그때의 상태와 현현된 진리를 배워서 오늘날 우리들의 문제를 해결하는 영의 성질을 배울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성경 연구는 꼭 필요한 일입니다. 3000년 전 다윗의 시는 오늘 날에도 같은 상태에 있는 사람들의 문제를 해결하는 살아 있는 진리가 됩니다. 이사야 시대와 오늘 우리들의 시대가 영적으로 도덕적으로 그 상태가 비슷하다면 이사야를 통하여 주신 하나님의 견책의 말씀은 역시 오늘 우리에게도 주시는 진리임이 분명합니다. 왜냐하면 같은 상태에 언표 된 진리는 그것이 광채와 같아 그 빛을 영원히 방사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마치 에너지 보존의 법칙처럼 진리의 보존의 법칙이라고 하겠습니다.

 

바울의 영적기독교에 대해 말씀드리겠습니다. 먼저 분명히 알아야 할 것은 예수그리스도는 영과 진리의 총 계시라는 것입니다. 예수그리스도는 영이십니다.(고후3:17 ‘주는 영이시니 주의 영이 계신 곳에 자유가 있느니라’) 성령은 인간 상태에 있어 영인 예수 그리스도를 현시하여 그들이 진리를 이해함으로 문제 해결함을 얻고 살림을 받게 됩니다. 요 6:53에 ‘살리는 것은 영이라’고 말씀하였습니다.

바울의 신학적 주제는 십자가와 부활입니다. 흔히 많은 사람들이 바울 서신에 예수에 관한 사실들에 관한 기록이 없다하여 바울은 예수를 모른다고 주장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바울은 예수의 여러 언행보다는 예수그리스도 그분 자체에 주목하였던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그리스도의 크라이막스인 십자가와 부활 사건의 예수그리스도를 바라보았던 것입니다. 예수의 언행을 알고 따르는 것도 중요합니다. 그러나 다만 예수의 언행을 따른다는 것은 마치 어느 성인들의 언행을 본받는 일이나 매 한가지로, 물론 그 일도 제대로 따르고 있지는 못하지만, 그렇다고 그것을 기독교의 전부라 말할 수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영이시니(고후3:17), 우리는 영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보아야 합니다. 흔히 우리는 ‘예수그리스도를 닮아가자’라는 말을 합니다. 그러나 그보다 기독교는 예수그리스도와 하나가 되는 것을 추구하는 종교입니다. 바울은 말합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엔 에모이 크리스토스)께서 사신 것이라(갈 2:20)”고 말씀하였습니다.

 

바울은 십자가에서 흘리신 예수의 피, 그 참담한 피 그것에서 영원히 사람의 죄를 속하는 제물을 보았습니다. 구약의 속죄제는 장차 올 일의 모형입니다. 이제 하나님께서 그 아들의 십자가의 죽음이 인류의 죄에 대한 영원한 속죄 제물이 되게 하고 누구든지 그를 믿으면 죄 사함을 얻게 되었다고 분명히 말합니다. 이런 바울의 속죄론은 그리스도의 영이 그의 속에서 언표 되어 그의 진리 이해와 주장으로 나타난 것입니다. 이런 바울에게 언표 된 속죄의 진리는 절대 진리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최태용의 반전의 논리가 시작됩니다. 속죄론이 절대 진리이나 이것을 교의화 하여 여기에 묶여 있다면 이는 올바른 기독교인이라 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속죄론의 깊은 이면에 있는 영의 실재, 하나님 경험, 하나님 지식, 영적 생명의 성장에 이르러야하기 때문입니다. 영을 수반하지 않는 속죄론, 교의적 학습에 따른 속죄론, 그 어떤 신학적 속죄론이라도 참 된 의미의 속죄론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우리 각자가 자기의 영적 경험으로 말미암아 같은 속죄론을 새롭게 확실하게 주장할 수 있어야 합니다. 과연 속죄에 대한 깊은 영적 고뇌가 있었는가? 그 고뇌 상태에서 영의 임하심을 경험하였는가? 바울은 율법의 경험을 가졌었지만 영으로 말미암아 빛나는 은혜의 구원의 진리를 깨닫게 되자 그의 지난 모든 것을 버렸다고 하였습니다.

물론 다른 사도들도 율법에 매인바 되었었고 또한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성령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그들에게서 어찌하여 율법의 파기, 은혜의 구원이 주장되지 못 하였습니까? 그 이유는 그들이 율법 하에 살았지만 철저히 율법을 경험하지는 않았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들에게 영이 임하였지만 그 율법대신 은혜의 진리를 바울에게 있었던 것처럼 철저히 선명하게 언표 하지 못하였던 것입니다. 여기에 중요한 한 일은 진리 주장이 위로부터 말미암은 동시에 그것을 언표 할 인간 상태가 어떠한가가 중요한 조건이 된다는 것입니다. 그 진리가 언표 되기 위해서는 영을 파악 할 수 있는 상태가 갖추어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이해하기 위해서 우리가 어떤 상황에서 어떤 부디침에 따라 그 말씀을 받느냐 이때 영의 언표로 진리를 알게 됩니다.

 

여기서 최태용은 바울의 속죄론이 한 단계 업그레이드되고 있다고 말합니다. 롬 6:4에서 바울은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음으로 그와 함께 장사되었나니 이는 아버지의 영광을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심 같이 우리로 또한 한 생명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하심이라” 는 말씀에서, 죄의 사면을 받는 일보다 더 한 걸음 더 깊은 경험을 말합니다. 롬 8:10,11에 의하면, 우리의 몸은 죄 때문에 죽은 몸인데 예수를 죽은 자리에서 일으키신 영이 우리 안에 거하시므로 말미암아 우리도 죽은 몸에서 살아났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제 사람은 죽은 육에 있지 아니하고 영에 살지 않으면 아니 됩니다(갈5:25 ‘만일 우리가 성령으로 살면 성령으로 행할지니’). 육인 자가 아니고 예수그리스도의 영이 우리 안에 거하시므로 육은 죽고 영으로 살아가게 됩니다. 이것을 바울은 “우리 안에 있는 그리스도(골1:27)”라고 언표 하였던 것입니다.

 

최태용은 예수그리스도가 누구신가에 질문을 합니다. 복음서는 예수에 관한 기록문서들입니다. 그러면 복음서는 예수의 전기를 기록한 것인가? 그렇지 않습니다. 복음서는 복음서 기자들의 메시지입니다. 복음서는 표면적으로는 예수 이야기 이지만 그 안에 내재되어 있는 이야기는 복음서기자들이 속한 공동체가 현재에 처한 상황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따라서 복음서는 역사서가 아니라 독자들에게 주는 신학적 메시지를 이야기 형식으로 기술하였던 것입니다. 바울은 설교와 신학의 진술을 편지에 담았고 복음서 기자들은 예수의 이야기를 취한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예수에 대하여 무엇을 알고 있는가? 사람들은 예수의 외적 언행에 관심을 둡니다, 그러면 예수의 내적 생활에 대하여서는 무엇을 알고 있는가? 물론 예수의 외적 미션에 대해 알아야 합니다. 그러나 그 미션을 실행하려는 예수의 실존을 알아야 하지 않겠는가? 예수의 미션보다 실존이 먼저입니다. 예수의 실존이 무엇인가? 역사적 예수는 선포된 예수입니다. 그러나 감추어진 예수가 있습니다. 우리는 말씀이 육신이 되었다는 화육사상에서 그 낌새를 찾게 됩니다. 예수는 육이 되셨습니다. 육을 취한 것도 아니고 육을 입은 것이 아닌 말씀이 육으로 존재 변화되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생은 말씀이 육이 되셨고 육이 영이 되셨습니다. 여기서 예수의 육은 죄가 없는 純肉입니다. 장로교회 박형룡교수는 최태용의 생각이 순육론이라고 비난하면서 이는 그노시스트(영지주의)라고 비판하였는데, 이는 그 다음을 듣지 못한 일방적 오해입니다, 예수의 육은 순육이나 우리와 똑같은 연약한 육신인 것입니다. 예수는 광야의 3대 유혹을 받을 정도의 우리와 똑같은 육이지만 우리와 다른 것은 성령에 붙잡힌 육인 것입니다. 성령으로 잉태하셨고, 세례 받으실 때에 성령이 그의 위에 임하셨고, 성령의 인도로 광야의 기도가 있었고, 성령과 함께한 공생애를 살으셨습니다. 예수의 존재의식은 언제나 성령과 함께 하심이었습니다. 여기서 예수의 소명의식이 언제부터였는가를 논하기 전에 예수의 존재의식이 먼저 있었다는 것입니다. 최태용은 예수의 광야의 시험은 마치 고치가 탈바꿈하듯 육에서 하나님의 아들로 탈바꿈하는 일이라고 말합니다. 이 사건을 첫 번째 부활사건이라고 말합니다. 예수는 슈퍼맨으로 태어나신 것이 아니라 슈퍼맨이 되어 갔습니다. 그리고 비로소 신적 사명을 가지고 메시야 활동을 하였습니다. 막 9:37에서 예수는 “누구든지 내 이름으로 이런 어린 아이 하나를 영접하면 곧 나를 영접함이요 누구든지 나를 영접하면 나를 영접함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를 영접함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또 마15:24에서 “나는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외에는 다른 곳으로 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였다”라고 말씀하셨는데, 유대교에서 보냄을 받은자‘살라아흐’는 보낸 자와 같다는 의미입니다(슥1:10). 요5:23에 “이는 모든 사람으로 아버지를 공경하는 것 같이 아들을 공경하게 하려 하심이라. 아들을 공경하지 아니하는 자는 그를 보내신 아버지를 공경하지 아니 하느니라”고도 말씀하였습니다.(cf.눅10:19, 요 13:20)

그러나 예수는 메시야 의식을 가졌지만 행동하는 메시야로서 아직 어둠에 있으며 그는 역시 그의 영혼이 어둠을 통하여 조각되지 않으면 아니 되었던 것입니다. 여러분은 어둠 속에서 방황하였던 적이 있으십니까? 광야의 시험은 하나님의 아들로서 하지 않아야 할 것과 어떻게 할 것인가를 결정하는 일이었고 그가 영의 진리를 파지하는 한 과정이었고 그 시험을 통하여 영의 진리를 파악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최태용은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예수그리스도의 구원은 교훈에 있지 않다고 하였습니다. 이 말을 오해해서는 안 됩니다. 교훈이 필요 없다는 말이 아니라 구원의 우선 조건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 우선 조건이란 예수와의 코이노니아인 것입니다. 예수와 인격적 결합이 우선입니다. 기독교의 신앙은 머리에서 무슨 생각을 하는 것이 아니라 가슴을 지향한다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전도란 예수의 교훈을 전하는데 있는 것이 아니라 예수와 함께 사는 것을 보여주고 예수와 함께 죽는 것을 증거 하는 일에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최태용은 나의 기독교는 둔세주의가 아니라 삶 그 자체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기독교의 삶의 원리는 무엇인가?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막14:36) 예수의 게셋마네 최후의 기도에서 보여주셨듯이 자기부정입니다. 기독교는 철저히 자기를 부정하고 아버지께 순종하는데 그 존재의미가 있습니다. 예수의 생활 원리는 하나님에게 두고 있습니다. 요6:57에서 ‘살아계신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시매 내가 아버지로 말미암아(디아 톤 파테르) 산다“고 말씀하였습니다. 롬 8: 14에 “무릇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사람은 곧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말씀하였습니다. 그러나 사람으로 하나님의 아들로 하나님의 뜻으로 산다는 것에는 엄청난 고난이 따르게 됩니다. 육이 된 자가 육에 있으면 아버지의 뜻을 알지 못합니다. 육을 부정할 때 비로소 영이 그에게 임하여 아버지의 뜻을 진리로 받아 생활하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에 따른다는 것을 신비적이거나 상상의 생활을 하는 것이 아니라 구체적으로 실제 생활 속에 명확하게 하나님의 뜻을 적용하는 것을 말합니다. 그것이 곧 진리대로 사는 삶인 것입니다. 그리고 그 삶이 나를 부정하는 십자가를 나도 지고 사는 삶인 것입니다. 예수는 ’나는 진리다‘라고 말씀하였습니다. 육을 죽이지 아니하고는 진리도 생명도 되지 못합니다. 예수그리스도의 자기 부정이 곧 십자가의 죽으심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영이 되셨습니다. 그래서 진리가 되셨습니다. 그러므로 내안에 그리스도가 산다는 것은 곧 내 안에 영이 산다는 말이요 이 같은 말을 할 수 있는 것은 육인 우리가 역시 자기를 부정할 때 예수그리스도와 연합하여 일어나게 됩니다. 요6:57에 “살아계신 아버지께서 내가 아버지로 말미암아 사는 것 같이 나를 먹는 그 사람도 나로 말미암아 살리라”라고 말씀하였습니다. 바울은 롬8:18에 “너희가 육신대로 살면 반드시 죽을 것이로되 영으로써 육을 죽이면 살리니”라고 하였습니다.

 

최태용은 십자가에 두 가지 의미가 있다고 말합니다. 하나는 외적인 의미로 속죄입니다. 이는 십자가의 절대적 의미입니다. 다른 하나는 내적의미입니다. 육이 되어 영으로 살던 예수는 그 육이 완전히 영에 정복되어 영이 되신 것을 말합니다. 그래서 영원히 영이 되신 사건이 부활사건입니다. 그러므로 예수그리스도를 믿는 다는 것은 예수의 영이 우리에게 임하시어 우리에게 예수의 생활 그의 십자가와 부활이 재현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지금까지 기독교는 로마서 3장 기독교로 로마서 6장을 알지 못하여 왔다고 하겠습니다. 이제까지 기독교는 로마서 3장의 속죄적 기독교 이였다면 이제 로마서 6장부터의 영적 기독교가 되어야 한다고 최태용은 주장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영적 기독교의 믿음 생활이란 무엇입니까? 최태용은 기독교의 신앙이 진리지식에 있지 아니하고 자기감정의 흥분이거나 신비적 신앙에 있거나 제도와 교권과 교리에 붙잡힌 고목화 된 신앙이어서는 안 된다고 말합니다. 왜 기독교인들이 잘못된 신앙생활을 하는가? 그것은 속죄적 경험을 한 후에 어떻게 살아야 할 줄을 몰라 영적 생명이 자라지 못하였기 때문입니다. 마치 돌작 밭에 뿌려진 씨앗처럼 발아는 되었지만 말라버리고 死角化 되어버렸습니다.

속죄적 기독교의 주제는 죄의 사면입니다. 그러나 바울은 로마서 6:3에서 “그리스도와 합한 세례”를 말하였고 6:6절에서는 “우리의 옛 사람이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힘”을 말합니다. 그러면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얻는 다는 것은 6:7에서“이는 죽은 자가 죄에서 벗어나 의롭다하심을 얻음이라”고 하셨는데 여기서 죽은 자는 무엇을 말합니까? 6장 6절 하반 절에 “죄의 몸이 죽어 다시는 우리가 죄에게 종노릇” 아니 한 자를 말합니다, 그래서 옛 사람인 나를 그리스도 십자가에 못 박아 버림으로 그리스도의 죽음에 합해져야 합니다. 속죄는 그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와 인간이 연합해 질 때 비로소 신앙이 시작되는 것입니다. 더 한 걸을 나가, 롬 8:9에서 우리가 육에 있지 않고 영에 있어야 그리스도인이라고 말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속죄적 기독교는 건물의 기초석입니다. 기초만 놓고 건물은 세우지 않은 것이 지금까지의 기독교입니다. 지난 기독교 역사에서 로마서 3장의 속죄적 기독교에 대하여 무수한 신학화 작업이 있어왔습니다. 그러나 6장 8장은 신학화 되지 못해 왔습니다. 다만 주석가들의 짧은 주석으로 흘려보내었거나 교리 교권 교회의 뒤편에 숨겨져 왔거나 하여튼 로마서 6장 이하의 영적기독교론은 때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이제 최태용은 영적 기독교론으로 신학화 작업을 시도하려는 것입니다.

 

속죄적 기독교는 우리 안에 계신 그리스도가 아니라 우리 밖에 서신 그리스도를 말합니다. 신앙의 내적인 면을 무시하였습니다. 속죄함을 받은 후에는 어떻게 되는가? 다만 하나님과 사귐에 들어간다는 막연한 표현을 하였을 뿐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과 사귐에 들어간다는 것은 그리스도와 함께 못 박혀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내안에 그리스도가 사는 일입니다. (갈2:20) 그리스도와 신비적 결합(mystical union)입니다. 그러나 신비가 아니라 그것은 체화(incarnation)되는 일입니다. 그리스도의 영이 육을 죽인 내안에 있어 영으로 사는 일입니다. 고전 15:45에서 “...마지막 아담은 살려 주는 영이 되어나니(호 에스카토스 아담 에이스 프뉴마 조포이운)” 그러므로 구원은 다만 죄를 없이 하는 문제가 아니라 그것은 육인 자가 영의 생명을 받는 것입니다. 만일 영의 일을 할 자리에 육의 일이 들어서면 그 육을 우리는 부정하여야 합니다, 그렇게 해서 우리의 신앙생명이 성장하게 됩니다. 기독교는 둔세주의가 아니라고 이미 말하였습니다. 세상 속에서 십자가를 지고 영으로 맞서나가는 삶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대적 마귀를 대적하라(엡6:11)고 바울은 말씀 하였습니다.

 

그러기위하여 기독교인의 생활은 항상 나의 태도를 영에 의해 결정하도록 해야 합니다. 육의 욕망을 부정하고 영에 있게 해야 합니다. 만일 육을 취하면 영은 죽습니다. 바울은 때때로 “오호라 나는 곤고한 자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저 내랴!”라고 탄식하였습니다. 사망의 몸인 육의 뜻은 어두운 지식이요 헛된 지식입니다. 그러나 영의 지식은 밝은 지식이요 실제적 지식이요 진리지식입니다. 만일 우리가 병을 앓고 있다면 어두운 육은 탄식하고 괴로워합니다. 그러난 영의 지식은 하나님의 뜻을 살피고 영의 의미를 찾습니다. 이것이 진리지식입니다. 바울은 골 1:9에서 “...구하노니 너희로 하여금 모든 신령한 지혜와 총명에 하나님의 뜻을 아는 것으로 채우게 하시고” 라고 말씀하였습니다. 이 말씀에서 ‘아는 것으로(텐 에피그노신)’는 정밀하고 정확한 지식을 말합니다. 우리의 육의 눈은 사물의 겉만 알게 되지만 영의 눈은 그 사물에 대한 하나님의 뜻을 알게 됩니다. 그러므로 신앙생활은 영의 생활이요 하나님의 뜻을 아는 생활인 것입니다. 그래서 호세아 6:6에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번제보다 낫다.”라고 하였습니다. 어떻게 우리의 생활을 구체적으로 살아갈 수 있을까? 예수그리스도께서 우리보다 앞서 영원한 생명을 생활하는 영의 생활, 진리 생활로 살으셨습니다. 예수그리스도는 화육하여 육을 따라 살지 않으시고 영을 따라 살아 진리인 생명이 되시었던 것처럼 우리 역시 세상을 살아갈 때에 그 육을 부정하고 영의 승리자가 되어 살아가야 합니다.

 

최태용은 결코 과거의 기독교를 부정하는 것이 아닙니다. 다만 과거의 기독교에 영적 기독교를 더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여 우리의 기독교는 퍽 큰 포괄적인 것이 되어 더욱 우리의 영적 생명의 발전에 보탬이 되게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언제든지 영적인 생명인 자이어야 합니다. 그 생명으로 자라고 또 자라 그리스도의 충만한 분량에 까지 이르러야 합니다(엡4:13). 그래서 최태용은 우리가 그리스도를 믿는 일을 생명이 되게 하고 그것이 영원한 생명의 성장으로 자라게 하는 것이 영적 기독교의 주장이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의 기쁨은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영적 기독교인으로 자라는 사람들에게 있습니다. 생명의 자람, 이것이 하나님께 가장 높은 예배입니다. 그래서 예수는 요4:24에서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영과 진리로 예배할 지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최태용은 영과 진리지에 영적기독교론을 발표하기 4년 전 일본어로 처음 작성하였습니다. 그러다가 영과 진리지에 개재하면서 중심은 같으나 그 내용으로는 전혀 다르게 하였다고 말합니다. 다만 이 영적기독교론은 아직 미완성이라고 말합니다. 그것은 본인의 필생 과업이지만 아직 학문적으로나 신앙 경험에 있어서나 미숙하기 때문에 독자들 가운데 그리고 후학 중에 계속 논조를 발전시켜 나갈 수 있기를 원한다고 하였습니다.

그가 20회에 걸쳐 펴낸 영적기독교론은 그 후에도 이에 관한 논의를 영과 진리지에 계속 발표하였고, 또 1937년 10월 31일 영과 진리 100호에서 102호에 이르러 3회에 걸처 ‘영적기독교의 과제와 그 현재적 개정’이란 제목으로 발표함으로서 새로 창립된 복음교회의 신학으로 분명하게 제시하였던 것입니다.

아마도 창립자 최태용 목사님은 후대 복음교회 교역자 뿐 아니라 모든 복음교회 성도들이 복음교회의 창립정신과 신학적 정체성이 무엇인가를 알아서 더 깊이 복음교회를 사랑하고, 복음교회의 나갈 방향을 새롭게 정립해 나갈 수 있기를 바라고 이 영적기독교론을 발표하였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끝으로 전 한신대 교수인 김경재교수의 논평을 들으며 본 강연을 마치겠습니다.

“최태용 신학의 훌륭한 점은 그의 신앙과 신학이 매우 생명적이고 생동적이기 때문에 진리의 실천적 삶이라는 생활신앙으로 이어질 강점을 지니고 있다. 그러한 신앙은 요즘의 말로 말하면 역사적 신앙, 현실 참여적 신앙이라는 말이다. 최태용의 신앙과 신학이 그런 실천적 동력을 지닐 수 있는 것은 생명이 영에 촉발 받아 영적 생동감으로 거듭나면 진리라는 언표로 나타나기 때문이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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