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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병호목사의 교회이야기

전병호 목사의 설교



2017년 3월 26일  주일아침 예배  마 5:37   當是是否否(나이나이우우)

 


여고시절에 지나칠 정도로 라이벌의식을 갖고 지내던 두 여학생이 있었습니다. 이제 그들이 학교를 졸업하고 대학을 나오고 각기 시집을 가고 아이를 낳고 사회인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정말로 오래간만에 우연히 길거리에서 이 두 사람이 만났어요. 라이벌이었던 친구가 말합니다. “얘야, 우리 신랑은 얼마나 자상한지··· 내 반지의 다이아가 좀 오래되서 더럽혀졌다고 새로운 것으로 갈아끼워줬지 뭐니?” 하며 반지를 자랑합니다. 또 이어서 “우리 신랑은 얼마나 자상한지, 내가 집안에서 살림만하고 애키우니 힘들다고 2개월에 한번씩 아이를 맡겨놓고 해외여행을 다녀온다!” 합니다. 이 얘기를 듣던 친구가 “어머, 환상적이네!” 이 반응에 더욱 신이나서 이야기합니다. “그런데 너는 요즘 어떻게 지내니?” 듣기만 하던 친구가 말합니다. “응. 나는 화술학원에 다니고 있어.” “화술학원에서 뭘 배우는데?” “말을 품위있게 하는 법을 배우는 곳이야. 말하자면, ‘어머, 꼴값떠네!’ 하는 것을 ‘어머, 환상적이네!’하는 법을 배우고 있어.” 아무리 친구가 옛 학창시절에야 라이벌 의식을 갖고 지냈다할지라도 오랜만에 만났으면 좋은 덕담을 해주고 반갑게 칭찬해주며 안부도 묻고 좋은 화젯거리를 삼아서 말을 하면 오죽이 좋겠습니까? 자기 자랑이나 늘어놓고, 상대방을 기죽이려하니... 이렇게 말하는 것은 옳지 않다고 생각되어집니다. 사람이 서로 간에 만나면 얼마든지 좋은 말, 격려하는 말, 축복하는 말을 할 수 있잖아요? 굳이 상대방을 기죽이는 말을 할 필요가 없지 않습니까? 그런데 사람 간에 좋은 말 칭친해 주고 축복해 주는 말을 하기가 왜 그렇게 어려운지요.

 

어려운 말중 하나가 「뜰의 콩깍지가 깐 콩깍지인가,안 깐 콩깍지 인가 」라고 합니다.이 말은 몇번 반복하기가 참으로 힘들고 어렵습니다. 어릴 적의 놀이 중에 발음하기 힘든 단어를 누가
더 잘 하나 내기를 할 때 단골로 등장하던 말이지요. 비슷한 말로 ‘저 말뚝이 말 맬 만한 말뚝이냐? 말 못 맬 만한 말뚝이냐?’ ‘저분은 백법학 박사고 이분은 박법학 박사다.’  ‘앞집 팥죽은 붉은 팥 풋 팥죽이고 뒷집 팥죽은 햇콩 단콩 콩 죽이고  우리 집 깨죽은 검은 깨 깨죽인데  사람들은 팥죽, 콩죽, 깨죽 죽먹기를 싫어하더라. ’
그런데 이런 말들보다 가장 사람들이 따라하기 어려운 말을 예수님이 말씀하였습니다.
“오지 너희 말은 옳다 옳다 아니라 아니라 하라 이에서 지나는 것은 악으로부터 나느니라”(에스토 데 호 로고스 휘몬 나이 나이 우 우 토 데 페릿손 투톤 에크 투 포네루 에스틴) 하지만 이 단순한 주님의 말씀을 따르기가 세상에서 가장 어려운 말입니다. 일반적으로 아니오라고 말하는 상황은 예라고 말하는 상황보다 쉽지 않고, 게다가 그것이 특별히 다수의 사람이 예라고 말하는 자리에서라면 그 어려움은 절정에 달합니다. 모두가 암묵적으로 동의하는 상황에서, 여기서 아니라고 말한다면 분명히 모두의 불편한 이목을 끌게 되는 상황에서, ‘아니다’라고 말하기는 얼마나 어려운지. 하지만 예수님은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아니오 할 때에는 아니오라는 말만 하여라.” 더 나아가 그렇게 하지 못 하는 상황에 대해 예수님은 뜻밖의 말씀을 하십니다. 우리는 우리가 아니오라고 말하지 못하는 것을 대개 용기가 없어서이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주님은 달리 말씀하셨습니다. ‘이보다 지나는 것은 악으로 부터 나느니라’  그것은 그저 용기가 없는 것이 아니라 악으로부터 기인한 것이라고. 언제나 그렇듯 예수님의 말씀엔 가만히 있으면 중간은 간다는 식이 없습니다. 선을 행하지 않는 것은 악을 행하는 것이고, 생명을 구하지 않는 것은 생명을 죽이는 것이라는 말씀처럼(막 3:4) 우리 주님은 언제나 분명하고 확정적으로 그리스도인의 윤리에는 중도란 없습니다.

 

흔히 “나치 경례를 거부한 남자”라는 제목으로 알려진 역사적 사진이 있습니다. 사진의 주인공은 아우구스트 란트메서 (August Landmesser1910~44)라는 사람으로 그는 히틀러 집권 당시 함부르크 조선소의 노동자였습니다. 1936년 그가 일하던 조선소에서 군함이 완성되고 히틀러가 진수식에 등장했을 때 모든 사람들은 오른 손을 앞으로 내미는 ‘하이 히틀러!’나치식 경례를 히틀러에게 하였습니다. 그런데 바로 이때 수많은 군중을 찍은 사진 속에서 유일하게 팔짱을 끼고 경례에 동참하지 않은 사람이 있었으니 그가 바로 아우구스트 란트메서였습니다.
란트메서는 1931년 일자리를 얻기 위해 나치당에 가입했었으나 1935년 유대인 여성과 약혼한 후 나치당을 탈당했습니다. 그 후 유대인 아내로 인한 많은 핍박이 있었고, 아내뿐 아니라 란트메서 자신 역시 강제수용소에 수감되었으나 그는 끝까지 아내를 배신하지 않았습니다. 그의 아내는 결국 처형되고 말았습니다. 험난한 인생사 속에서도 사랑과 신념을 배신하지 않았던 란트메서는 공개적인 장소에서 유일하게 히틀러에 대한 경의를 거부했던 자신의 행동으로 그렇게 역사가 되었습니다. 그는 ‘아니오’라고 말해야 하는 자리에서 유일하게 ‘아니오’라고 말했던 사람이었습니다.

 

(사진)

(**나치 경례를 거부한 사진이 촬영된지 1년 후 37년 란트메서는 에클라와 함께 덴마크로 도피하려 했으나 실패했습니다. 그는 인종오염죄로 고발당했습니다. 란트메서는 에클라가 순혈 유대인인 줄 자신도, 에클라 스스로도 몰랐다고 항변해 증거 불충분으로 풀려났습니다. 대신 법정은 그에게 에클라와 이혼하라는 조건을 걸었습니다. 그러나 란트메서는 아내와 이혼하지 않았습니다. 38년 7월 다시 체포돼 니더작센의 엠슬란트라거 강제수용소로 보내졌습니다. 둘째를 임신 중이었던 에클라는 게슈타포에 의해 풀스뷔텔 형무소로 끌려갔습니다. 이후 그들의 인생은 어떻게 됐을까요. 란트메서의 두 딸은 고아원으로 보내졌습니다. 에클라는 강제수용소 여기저기로 이송되다 42년 2월 베른부르크 안락사 센터에서 1만4000여명과 함께 살해당합니다. 란트메서는 1941년 1월 출소한 뒤 한동안 화물운송회사의 감독으로 일하다 44년 2월 강제징병됐습니다. 44년 10월 17일 크로아티아 전선에서 전사했습니다. 부부의 이야기는 둘째 딸인 이렌느가 61년 『후견문서 1935~1958: 인종모욕죄로 기소된 가족(The Guardianship Documents 1935~1958: Persecution of a Family for “Dishonoring the Race)』란 책을 내면서 세상에 알려졌습니다. 아버지 란트메서의 사진은 91년 3월 22일 독일 신문 '빌트'에 처음 공개가 됐습니다. '나치 경례를 거부한 남자'와 '팔짱 낀 남자'라는 이름과 함께 세계적으로 유명해졌습니다. 란트메서가 정치적 신념에 의해 나치 체제를 거부한 것으로 생각되진 않습니다. 다만 부인 에클라와 두 딸에 대한 사랑, 가족을 지키려는 가장의 마음 때문이겠죠. 때론 가족애가 이념을 앞서나 봅니다.)

나치 경례를 거부한 남자는 모두의 신념에 반하는 자신의 신념을 지켰습니다. 그 대가를 분명히 알고 있었을 터였지만 그래도 그는 분명히 ‘아니오’라고 말했습니다. 아닌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아닌 것은 아니라고 말하는 것이 믿음입니다.

 

예를 말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그것은 하나님의 뜻에 따라 살겠다는 다짐입니다. 예 함으로 예수님의 방법대로 살아 구원받고 축복받게 다는 그랭이질입니다. 그랭이질을 아십니까?

 

(사진)

(그랭이질한 불국사 석축 기단 : 사진출처 인터넷 불펌)

예전에 한옥을 지을 때 주춧돌을 놓고 그 위에 기둥을 세웠습니다. 주춧돌을 묻고 그 위에 기둥을 세우기에 주춧돌이 판판하게 다듬어졌을 것이라고 대개 생각하지만 자연석을 그대로 사용했습니다. 다듬지 않아서 돌의 윗면이 울퉁불퉁합니다. 집을 짓는 사람들은 주춧돌의 울퉁불퉁한 면에 맞춰 기둥의 밑동을 파냅니다. 물론 목수 중에서 최고의 기술을 가진 도편수가 맡아서 합니다. 도편수가 울퉁불퉁한 주춧돌에 잘 맞도록 기둥의 밑동을 파내는 것을 그랭이질이라 합니다. 돌과 나무, 성질이 전혀 다른 두 물체를 접착제 없이 하나로 만드는 것입니다. 이 때 무엇을 중심으로 그랭이질을 하느냐가 중요합니다. 주춧돌을 깎아 변형시키는 것이 아니라 주춧돌에 맞추어야 합니다. 주춧돌을 중심으로 집을 지어가는 그 정신이 아름답고 귀합니다. 신앙생활은 마치 그랭이질을 하는 것과 같습니다. 주춧돌로 예수를 삼고 그 위에 인생의 집을 건축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기둥을 편하게 세우기 위해 주춧돌을 평평하게 고르는 것이 아닙니다. 주춧돌이신 예수를 중심으로 우리의 삶을 고르고 맞추어야 합니다. 예수를 중심으로 한 그랭이질의 속성이 바로 믿음입니다. 그 믿음이 예수님을 향한 예로부터 시작됩니다.

 

태초에 하나님께서 아담과 이브에게 동산 중앙에 있는 선악과를 따 먹지 말라 라고 말씀 하셨을 때 아담과 이브는 분명히 예라고 대답하였습니다. 그것이 믿음입니다. 그런데 아담과 이브는 사탄의 유혹에 따라 선악과를 따 먹었습니다. 그것은 아니오 였습니다. 아니오는 죄입니다. 태초의 죄는 이 아니오로 부터 시작되었던 것입니다.

 

예수님 비유말씀에 포도원 집 두 아들의 비유말씀이 있습니다.
아버지가 큰 아들에게 “얘야 오늘 포도원에 가서 일하라”할 때에 “아버지여 가겠소이다” 하더니 말만 하고 가지 아니하였습니다. 이는 당시에 대제사상, 바리새인들을 가리키고 있습니다. 이들은 하나님을 경외한다고 하지만 실제 행동은 믿음 없는 사람들처럼 살고 있습니다. 이들은 표면적으로는 하나님의 뜻을 순종하는 것 같은데 실상은 불순종하며, 율법대로 산다고 했지만 실상은 내 뜻대로 살아가는 자들 이었습니다. 아담과 하와가 이런 경우입니다.
아버지는 둘째 아들에게도 “포도원에 가서 일하라”고 하자 둘째 아들은 “싫소이다”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그 후에 뉘우치고 포도원에 갔습니다. 이들은 바리새인들이 미워하던 세리들 과 창기들을 가리키고 있습니다. 또한 처음에는 예수님을 알지 못하고 각종 세상 죄악에 빠져 살다가 주 앞에 돌아와 주님의 말씀에 예한 성도들을 가리킵니다.

 

성경에 보면 둘째 아들처럼 ‘아니오’로 시작하여 ‘예’로 하나님을 믿은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중 삭개오는 백성들에게 부당 세금을 거두어 착복하였던 악질 세리장으로서 처음에는 아니오로 시작하였으나 나중에는 예수님을 영접함으로써 ’예 ‘로 아름답게 살았습니다. 사도 바울은 어떤 사람이었습니까? 기독교를 핍박하던 울법주의자 였습니다. 그러나 다메섹으로 가는 길에서 부활하신 주님을 만난 후에 그는 부활 주님을 세계를 다니면 전파하였으니 아니오에서 내 모습 이대로 예하므로 마치 그랭이질 하듯 하나님 집에 예수님의 신실한 기둥이 되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와 아니오는 자신의 인생을 결정하는 중대한 선택이요 결단이라고 하겠습니다. 믿음은 예라고 대답하는데서 시작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예수님이 우리들의 삶에 “예”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우리들에게 YES 예가 되십니다. Yes Us = Yesus = Jesus

그 이유는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으심이 곧 우리들을 죄로부터 마귀로부터 죽음으로부터 지옥으로부터 살리신 대속의 죽으심이시기 때문입니다.
요 6:53-57의 말씀입니다.
 “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인자의 살을 먹지 아니하        고 인자의 피를 마시지 아니하면 너희 속에 생명이 없느니라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영생을 가졌고 마지막 날에 내가 그를 다시 살리리      니 내 살은 참된 양식이요 내 피는 참된 음료로다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내 안에 거하고 나도 그의 안에 거하나니
    살아 계신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시매 내가 아버지로 말미암아 사는 것 같이 나를 먹는      그 사람도 나로 말미암아 살리라.“

 

초대교회 시절 많은 교인들이 로마군인들에게 붙잡혀 순교를 하였습니다. 그 원인중에 하나는 기독교인들이 자기 선생의 살을 먹고 피를 마신다는 이유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기독교인들은 살인자들이요 식인종들이라하여 잡아다가 죽였습니다. 그러나 로마군인들은 커다간 오해를 하였습니다. 예수님의 살을 먹고 피를 마신다는 것은 그런 식인종 같은 행위가 아닌, 매우 상징적인 의미가 있다는 것을 알지 못했던 것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 상에서 고난당하실 때 그 살점이 뜯겨지고 온몸의 피가 다 흘러 내렸습니다. 그러나 그 고난과 죽으심은 우리를 죄에서 구원하시고 우리를 영원한 죽음에서 살리시려는 하나님의 구원역사 이였던 것입니다. 누구든지 이 하나님의 구원역사를 예하고 믿으면 구원을 얻고 영생을 얻게 됩니다. 이 예수님의 십자가 고난을 예하고 믿는 일이 예수님의 살과 피를 먹는다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성만찬을 행할 때 빵과 포도주를 먹고 마심으로 십자가 상에 찢기시고 흘리신 예수님의 살과 피를 기념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이 날 위해 “예”가 되시니 우리가 살았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예수님이 나를 향해 예가 되시고 내가 예수님 향해 예하게 되니 바로 내 인생 반석 되신 예수님 위에 나의 인생의 기둥을 세우는 그랭이질하는 일인 것입니다.

 

1972년 10월 13일. 전세비행기, 페어챠알드 F 227기가 우루과이 몽테비레오 출발하여 칠레 산디에고로 가다가 악천후로 안데스산맥 눈 속에 추락하여,아마추어 럭비선수 15 명, 응원단 25명, 승무원 5명, 모두 45명이 눈 덮인 안데스산맥에서 실종되었다가 사고 67일 만에 29명이 죽고 16명이 극적으로 구출되었습니다. 이 사건을 "Alive"(생존) 영화화 되었습니다.
도저히 생존 할 수 없는 상황에서 16명이 생존할 수 있었던 이유를 죽은 니코리치 군이 아버지께 남긴 메모를 통하여 알게 되면서  이 사건은 사람들에게 더 큰 감동을 주었습니다. "아버지도 전혀 믿기 어려우실 일이 여기에서 벌어졌습니다. 죽은 친구의 살을 쪼개내어 먹는 일입니다. 이 일 외에는 다른 길이 없습니다. 살길이라고는.....저도 이제 부상으로 오래 살지 못할 것 같습니다. 친구들에게 부탁합니다. 내가 죽은 뒤 나의 살을 먹음으로  친구들이 살아남기를 진심으로 바란다고..."

 

나중에 구출된 청년 호세 군이 도져서 신부께 고백 하였습니다. "저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위에서 나를 위해 대신 죽으셨다는 대속의 죽음이 무엇인지 모르고 성만찬을 기계적으로 받았습니다. 그러나 산 위에서 죽은 친구의 살 조각을 손에 들었을 때 그것이 예수그리스도의 살인 줄 알았습니다. 비로소 십자가에서 나를 대신하여 죽으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를 받아먹으라’ 말씀하시는 음성이 들렸습니다."

 

우리 모두는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대속적 죽음으로 죄를 씻음 받고  새 생명으로 다시 사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그리스도는 의로우신 하나님 앞에서 우리를 "하나님께 YES"가 되게 하신 분입니다. 즉 예수님은 우리를 구원하여 영생을 얻게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누가 예수님 앞에서 ‘아니오’라고 말할 것입니까? 만일 아니오 라고 말한다면 이는 가장 큰 죄를 짓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을 향하여 예만 하는 인생을 살아야 합니다. 우리는 예수님이 우리에게 예가 되시니 예수 안에 사는 인생은 언제나 예수 안에서 예하며 살아야 합니다. 이것이 예수님과 내가 결합되는 믿음의 그랭이질인 예의 믿음인 것입니다. 말씀에 예합니다. 말씀에 예할 때 우리들의 인생은 긍정적이고 적극적이고 역동적인 삶을 살게 됩니다.

 

지그 지글러(Zig Ziglar 1927. 11.6- , 미국의 최고 대중연설가)는 미국의 최고 대중연설가로서 19년 동안 3,000번 이상의 강연과 [정상에서 만납시다] 를 비롯한 수많은 베스트 셀러를 집필했습니다. 그는 2001년 전문 강연가의 위상 정립에 공헌한 사람에게 주는 케벳 상은 물론 전미강연가협회가 수여하는 최고 영향력 상등 수많은 상을 수상했고, 기독교 모임에서 선정하는 모범 평신도 상을 두 번이나 수상 하기도 했습니다. 이러한 그는 원래 지극히 평범한 미국 남부 시골 미시시피주 야주시티(Yazoo City)라는 작은 마을, 가난한 가정에서 열두 형제 중 열 번째로 태어났습니다. 그가 5세 때 아버지가 돌아가시는 바람에 그의 어머니는 아이들을 혼자 키워야 했습니다. 하지만 그의 어머니는 자녀들을 '올바르게' 키웠습니다. 그의 어머니는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존재는 하나님이며 모든 것을 이 원칙에 맞추어야 한다고 강조했습니다. 그는 어머니의 이러한 교육과 기도로 45세가 되었을 때에 예수님을 인격적으로 영접하게 되었고 자서전에서 고백하기를 "어렸던 나는 이 어머니의 말을 단지 있는 그대로 받아들였는데, 시간이 훨씬 지난 후에야 진정한 의미를 깨달을 수 있었다."
지그 지글러는 계속해서 그의 자서전에서 고백하였습니다.

 

엘리자 H. 해밀톤(Eliza H. Hamilton 19C). 영국 태생의 찬송 작가. 가난하여 배우지 못한 소녀가 구원 문제로 고민하다가 마침내 구원받은 극적인 사건에 대해 무디 선생이 간증하는 것을 듣고 큰 감명을 받아 그 자리에서 이 찬송시를 쓰게 되었다.

 

1873년? 어느날 영국 스코트랜드 어는 도시에서 무디(Dwight L. Moody: 1837~1899) 부흥사의 음악담당이었던 생키(Ira David Sankey 1840-1908)목사가 무디 부흥회에 참석하고 있었습니다. 이때 참석한 어느 소녀가 구원에 관한 간절한 소망을 안고 자기 교회에 돌아가, 구원받는 길을 자세히 알려달라고 담임목사에게 물었습니다. “아가씨, 걱정하지 말아요. 간단해요. 성경을 읽고 기도를 드리세요. 그러면 구원받아요.” 담임목사는 쉽게 대답하였습다. 그러자 가엾은 소녀는 울면서 말하기를. “목사님, 저는 글을 몰라요. 기도할 줄도 몰라요!” 목사는 그를 위해 기도한 후 기도를 가르쳐주었습니다. 그러자 소녀가 이렇게 기도를 하였습다. “주 예수님, 제 모습 이대로 받아주세요.” "Lord Jesus, Take me as I am!" 이렇게 하여 그 소녀는 신실한 교인이 되었습다. 이 소녀의 얘기를 들은 엘리자 해밀턴(Eliza H. Hamilton)이 감동하여 한 편의 찬송시를 썼습니다. 쌩키목사가 교회신문에서 이 시를 읽고 부르기 쉽게 작곡하였는데 곧 세계적으로 불려지게 되었습나다. 이 찬송이 바로 214장 ‘나 주의 도움 받고자’입니다.
후렴에 “내 모습 이대로 주 받으 옵소서 날 위해 돌아 가신주 날 받아 주소서”
이 믿음이 구원과 영생을 얻게 되는 예의 신앙의 고백이라 하겠습니다.

 

그 후 눈물로 기도하던 그 소녀는 어떻게 되었는가, 그 소녀는 불신자로서 자기 집에 하숙하고 있는, 구둣방 남자의 아내가 되었습니다. 여자는 남자를 교회에 가자고 권했으나 듣지 않았답니다. 뿐만 아니라 좀 읽어보라고 마루에 놓아두었던 그의 성경을 찢어 놓기까지 하였습니다. 착한 그 여자는 화도 안 내고 정성 드려 도로 붙여서 제 자리에 두며, 제발 좀 읽어보세요, 하고 권하였답니다. 그러나 남편은 소설이나 신문만 읽을 뿐 거들떠보지도 않았답니다. 세월이 흘렀습니다. 어느 봄날, 그 늙은이는 심한 기관지염에 걸려 병원에 입원하였습니다. 그 착한 여자는 혈혈단신인 그 늙은 남자를 정성껏 간호하였습니다. 그리고 기회만 있으면 영혼구원에 대해 얘기해주고, 성경을 읽어주며 친절하게 설명하였습니다. 어느 날, 그 착한 여자는 ‘나 주의 도움 받고자 주 예수님께 빕니다’ 찬송을 읽어주었답니다. 그가 후렴을 읽자 그 늙은이가 소리쳤습니다. “그런 말은 책에 없잖아!”  “왜 없어요?” 그 착한 여자는 대답하며 찬송을 드려댔답니다. 남자는 읽어보려 했으나 읽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는 안경을 달라 해 그 구절을 읽고는 깜짝 놀라는 것이었습니다. (날 위해 돌아가신 주라니…!) 그는 찬송을 읽고 또 읽었습니다. “날 위해 돌아가신 주, 날 받으옵소서. 오! 날 받으옵소서…. ” 몇 주 후 아침, 그 늙은이가 말하였습니다. “여보, 나 퇴원할래. 난 이제 정말 행복하오. 정말….” 집에 돌아온 지 두 시간이 채 못 되어  “날 위해 돌아가신 주 날 받으옵소서.”라고 계속 중얼거리면서 그는 세상을 떠났답니다. (Sankey, pp. 20-23) 비로소 남편은 자신의 삶과 예수님을 그랭이질하는 예를 고백하였으니 아니오라는 불신앙 생활에서 마침내 영생을 얻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갔습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는 어떤 신앙의 자세가 되어야 할까요. 맏아들은 ‘아버지 가겠소이다’ 말한 후에 가지 않았습니다. 이 신앙은 책망 받을 신앙입니다. 그러나 둘째 아들은 ‘싫소이다’ 하더니 후에 포도원에 가서 일하였습니다. 이 신앙은 복 받을 신앙입니다.
‘예’ 이 말하기가가 그렇게 어려운 말입니까? 그러나 예수님 앞에 내 모습 그대로 받으옵소서 그랭이질 예함으로 구원받고 축복받는 믿음인 것을 기억하여야 합니다. 

 

미셸 콰스트(Michel Quoist 프랑스) 신부의 시집 ‘삶의 모든 것’ 중에 이런 시가 있습니다.
“주님, 나는 ‘예’라고 하기가 두렵습니다./ (중략) 아들아, 예라고 대답해다오./ 내가 세상에 오기 위해 마리아의 예라는 대답이 필요했듯이/ 너의 예라는 대답이 필요하다. 오늘 이 세상을 구원하는 데에 아무래도/ 너의 긍정적인 대답이 필요하다./ 오, 주님! 주님의 요구는 참으로 두렵습니다./ 그러나 누가 주님을 거역할 수 있겠습니까?/ 내 나라가 아니라 주님의 나라가 임하고,/ 내 뜻이 아니라 주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서/ 지금 ‘예’라고 대답하게 하소서.”

 

當是是否否(나이나이우우) ‘마땅히 예는 예라하고 아닌 것은 아니라 하라’ 예수님 말씀입니다. 오직 진리를 향해 예라 하고 의를 향해 예라하고 선을 향해 예라하고 불의에 대해서는 아니라 하고 악에 대해서는 아니라하고 거짓에 대해선 아니라하라는 것입니다. 오직 예수님을 향해 예라하고 말씀에대해 예하여야만 믿음의 그랭이질하니 예수님과 하나 되어 구원받고 축복받고 영생을 얻게 됩니다.

우리 라온코이노니아아는 내 모습 이대로 예수님 만나 우리의 인생 그랭이질 하듯 예수님과 함께 예만 고백하는 신앙공동체입니다. 예수님 말씀 ‘나이나이 우우’ 이대로 실천하여 하나님의 은혜와 축복 성도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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