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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병호목사의 교회이야기

전병호 목사의 설교



2017년 3월 12일  주일아침예배  왕하 6:15-19   영적 안목

 


노자의 도덕경 45장에 대교약졸(大巧若拙)이란 말이 있습니다. 이 말은 가장 아름다운 것은 아주 서투른 것처럼 보인다 라는 말입니다. 이 말처럼 저는 그저께 이정미 헌제소장 권한대행의 머리에서 아름다운 여인의 머리를 보았습니다. 
박근혜 전 대통령의 탄핵심판 선고일이 지난 10일 오전 전 국민의 시선이 헌법재판소로 쏠린 가운데 이정미 헌재 소장 권한대행의 출근 모습이 화제가 되었습니다.  이날 오전 7시50분쯤 헌재에 도착한 이 권한대행의 머리에 분홍색 헤어롤 두 개가 말려 있었기 때문입니다. 현장에 있던 기자들이 촬영한 그의 사진은 곧바로 ‘얼마나 긴장했으면’, ‘얼마나 재판에만 집중했으면’이라는 제목으로 인터넷에 올라왔습니다. 당황한 헌재 측은 기자들에게 “이정미 재판관이 어제 밤을 꼬박 새우다시피하고, 아침에 너무 정신없이 나오다보니 머리도 헝클어지고 엉망이었다고 합니다. 방송사들이 되도록 이정미 재판관 출근 영상을 안썼으면 좋겠다”고 말하였습니다. 역사적인 순간을 앞두고 재판관의 실수에 이목이 쏠리거나 가십거리가 될 것을 우려했기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예상대로 헤어롤을 꽂은 채 출근하는 이 권한대행의 사진은 순식간에 인터넷을 통해 퍼졌고 곧바로 패러디 사진이 돌았습니다.

박근혜 전 대통령은 정치에 입문하면서 지지자들에게 모친인 고 육영수 여사에 대한 향수를 불러일으키고자 육 여사의 올림머리를 연출해왔고, 자신의 트레이드로 만들었었습니다. 흐트러짐 없는 올림머리는 일반 여성들이 혼자 하기도 힘들고, 머리핀만 수십개가 필요할 정도로 손질하는 데 많은 시간이 필요합니다. 그러나 세월호 사고 당일 그 긴박한 시간에 박 전 대통령이 헤어스타일리스트를 청와대 관저로 불러 올림머리를 하는데 시간을 허비하고, 흐트러진 머리까지 전문가의 손길로 다시 ‘연출’했다는 사실이 드러나면서 사람들을 화나게 하였습니다.
반면 헌재에서 수십 명의 기자들과 플래시 세례가 쏟아지는 가운데도 머리에 헤어롤이 꽂힌 줄도 몰랐던 이 권한대행의 출근 모습에는 ‘아름다운 실수’, ‘일하는 여성의 진짜 모습’이라는 찬사가 이어졌습니다. 물론 일 하는 여성은 빈틈없이 화장하고 말끔하게 차려입으면 안되고, 부스스하거나 어딘가 빈틈이 있는 차림새여야 일에 몰두하는 여성이라는 뜻은 아닐 것입니다.  그 소박한 헤어롤은 일하는 많은 여성들에게는 동질감과 친근감을 불러일으켰던 것입니다. 무엇보다 국가의 앞날이 좌우될 중대한 결정을 앞두고 이 권한대행이 역사적 소명을 얼마나 무겁게 느끼고, 고뇌하고, 긴장했는지 국민들은 느낄 수 있었고 감동하였던 것입니다. (김수미 기자 leolo@segye.com에서 일부 발췌)
그런 이정미 재판관의 헤어롤 꽂은 머리는 설혹 실수였다해도 오히려 갸장 아름다운 머리 모습이라고 말하겠습니다. 그래서 코메디안 김미화 씨는 10일 자신의 SNS를 통해 이정미 재판관의 헤어스타일을 따라한 자신의 사진을 게재하였습니다. 김미화는 "오늘 유행이라 하여"라며 이정미 재판관처럼 머리카락에 헤어롤을 말아둔 모습으로 웃음을 선사하였습니다.


실수로 헤어롤 꽂은 여인의 머리가 다 아름답게 보이는 것은 아닙니다. 그런 의미에서 이정미재판관을 따라한 김미화씨의 모습은 그리 아름답게 보이지 않습니다. 왜 똑 같은 모습인데 달리 보이는 것입니까? 그것이 안목의 차이입니다. 이정미 씨의 헤어롤 헤어스타일을 볼 때 우리는 그 모습에서 나라를 위해 노심초사하며 머리손질 제대로 할 새 없이 바삐 일하는 그 모습에서 노자도덕경에서 말한 대교약졸(大巧若拙) 서투름 속에 감추어진 진정한 아름다움을 볼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 아름다움을 볼 수 있는 눈이 또한 남다른 안목을 가졌다고 하겠습니다. 아무나 그 아름다움을 보지 못 합니다. 대교약졸을 볼 수 있는 안목을 가진 사람만이 참 아름다움을 볼 수 있습니다.

이런 안목을 가진 사람들 중에 수석을 하는 사람들의 안목에서 찾아보게 됩니다. 수석을 하는 사람들이 가지는 세 개의 눈이 있습니다. 첫 번째 눈은 심미안입니다. 아름다움과 추함을 구별할 줄 아는 눈인데 특히 추한 것을 아름답게 승화시킬 수 있는 눈을 의미합니다. 두 번째 눈은 확대안 입니다. 하나의 작은 돌에서 광한한 자연을 또 우주의 드넓음을 볼 수 있는 눈입니다. 세 번째 눈은 투시안 입니다, 상상의 날개를 펴 돌 표면에서 보이지 않는 것까지 보는 눈입니다. 검은 줄무늬가 가 있는 돌에서 숲을 보고 계곡의 물흐름을 들을 수 있어야 합니다. 이런 눈을 가지고 있지 않으면 수석을 할 수 없습니다. 예전에 제주도에 관광하러 온 한 사람이 제주도 돌담에서 한 넓적한 돌을 발견하고 그 담을 헐고 새롭게 담을 쌓아 준 다음 그 한 돌을 가져갔습니다. 그런데 한 일본 사람이 그 돌을 보고 1억원에 사겠다고 해도 팔지 않았습니다.

 

 (시진)        
남한강에서            세계에서 가장 비싼
탐석된 돌입니다.      인생 (노틀담의 꼽추) 
마리아 상입니다       320억
가격이 30ㅡ 40억

 

아름답고 귀하고 고품격의 가치를 볼 줄 아는 그런 눈을 가진다면 우리는 보다 품격 있는 인생을 살아갈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다른 안목을 가진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번 박근혜 전 대통령의 탄핵사건을 보면서 참으로 저질 저급 한 사람들의 막무가내 막가파식 시위와 발언들을 보고 들었습니다. 그사람들이 변호사요 국회의원이요 나이들도 먹을 만큼 먹은 노인들의 입에서 험한 말들이 뱉어내지고 있는 것을 보고 밤길을 가다 어느 집 대문 안에서 별안간 악을 쓰며 짖어대는 개들을 연상하였습니다.  왜 그 개는 짖어 될까? 두려워서입니다. 문밖 지나가는 사람에게 내가 두려우니 가까이 오지 말라고 짖어 되었던 것입니다. 이런 안목은 개의 안목입니다.

그런 사람 가운데 김진태 의원이 있습니다. 김진태의원은 춘천 출신으로 이번 태극기 탄핵반대 집회에서 가장 영웅적인 활동을 한 자유한국당 국회의원입니다. 그런데 친박의 대표주자인 김진태의원이 박근혜 前대통령 탄핵을 하는데 오히려 제일 큰 공헌을 하였습니다. 어째서 가장 큰 공헌을 한 사람인지요?


2016년 10월 24일 JTBC 뉴스룸 손석희 앵커가 최순실의 태블리 PC를 처음 보도하였습니다. 그 테블릿 안에는 200여개의 국가비밀 파일이 들어있다고 보도하였습니다. 최순실이 온갖 국가비밀문서를 보고받고 대통령에게 지시를 내린 것처럼 보도하였습니다. JTBC는 이 태블릿PC를 국정농단의 증거로 제시함으로 박근혜대통령 탄핵의 시발점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 태블릿PC가 법적인 증거가 되는냐 못되느냐로 한동안 시비가 일어났습니다. 그러나 법적인 증거가 된다는 판결이 나서 더 이상 탄핵반대쪽에서 항의를 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서울=연합뉴스) 홍해인 기자 = 11일 오후 서울 덕수궁 대한문 일대에서 열린 탄핵무효국민총궐기운동본부 주최 태극기 집회에서 전날 집회 사망자를 추모하는 검정 리본을 단 자유한국당 김진태 의원과 태극기를 두른 박근혜 전 대통령 측 대리인 서석구 변호사(왼쪽)가 나란히 단상에 서 있다. 2017.3.11


그 까닭은 2016년 5월 19일 디지털 기기의 증거 능력이 있다고 하는 형사소송법 개정안이 국회를 통과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디지털포렌식(digital forensic) 기법이라는 것을 통해 PC, 노트북, 휴대전화 등 다양한 디지털기기에 남아 있는 디지털 증거 자료를 수집, 복구, 분석하는 디지털 과학수사를 법적을 할 수 있게 되었던 것입니다. 디지털 증거는 손쉽게 위·변조될 수 있어 디지털 증거의 복구와 디지털 증거의 ‘무결성’이 중요합니다. 우선 PC나 휴대전화에 저장된 자료를 삭제했다고 하더라도 저장장치에 그 흔적이 남아 있기에 원칙적으로 복구가 가능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박근혜 전대통령과 최순실의 컴퓨터나 노트북 심지어 전화상에서 지워진 자료들을 다시 복원시켜 찾아 증거로 삼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이 모든 것을 가능하게 한 법안이 바로 작년 5월 19일 국회에서 통과된 법입니다. 그런데 이 법안을 제출한 사람이 바로 바람 불면 촛불은 꺼진다고 말한 김진태의원인 것입니다. 김진태의원이 그 법안을 제출함으로 지금 박근혜 전대통력의 탄핵심판과 최순실 등 국정농단자들의 재판이 잘 진행될 수 있게 된 것이니 박근혜 탄핵의 가장 큰 공헌자는 바로 김진태 의원인 것입니다.  2016년 5월 19일 법안이 통과 되었을 때 자신이 한건 하였다고 잔치를 벌렸습니다. 당시 그의 안목은 10개월 후 탄핵 때 인용된 획기적인 법안이 될 것이라고 내다보지는 못하였을 것입니다. 이렇게 미래를 내다보는 안목을 불교용어로 혜안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서울법대 출신이요 서울 지검부장검사였던 김진태의원은 그런 혜안을 가지고도 옳고 그른 것을 가려보지 못한 목불식정 (目不識丁) 까막눈이 되었으니 참으로 그를 위해 슬퍼합니다.

 

우리 기독교인은 어떤 안목을 가져야 합니까?

이스라엘 왕국이 남북으로 분단되고 아합의 아들 여호람이 이스라엘의 왕으로 있던 시절입니다. 엘리야는 가고 그의 제자 엘리사가 북쪽 이스라엘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고 있었습니다. 여호람은 우상숭배를 일삼고 하나님의 종들을 죽인 아합 왕의 아들이었지만 그래도 엘리사를 아버지라고 부를 정도로 존경했습니다.
그때 아람의 벤하닷 왕이 이스라엘을 치기 위해서 비밀작전을 짜고 이스라엘 국경을 기습 공격을 몇 번 감행했는데, 그 직전에 엘리사가 여호람 왕에게 아람군대의 공격루트를 미리 알려주는 바람에 아람군대는 번번이 실패를 거듭했습니다.


아람왕은 누군가, 자기 군인 중에 이스라엘 왕에게 군사정보를 미리 제보해 주는 사람이 있다고 보고, 그 사람을 색출하라는 지시를 내렸습니다. 그런데 그의 심복 중에 하나가 왕에게 이렇게 말해주었습니다. 우리 중에 첩자가 있는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에는 엘리사라는 하나님의 종이 있는데, 그 사람은 하나님의 도움으로 우리의 사정을 눈으로 본 듯이 다 보고 있고 왕이 침실에서 하신 말씀도 다 알고 이스라엘 왕에게 고한다고 알려 주었습니다. 그러면 엘리사를 먼저 잡아야 한다고 생각한 아람 왕은 엘리사가 지금 어디 있는가를 수소문했고, 결국 엘리사가 도단성에 있다는 것을 알고 군대를 밤새 이동시켜서 엘리사가 머물고 있는 도단 성을 완전히 포위하여 버렸습니다.

 

하나님의 종 엘리사를 수종 드는 사람이 있었는데 이름은 게하시였습니다. 게하시가 아침 일찍이 일어나갔다가 아람 군대가 자기들이 있는 도단 성을 완전히 포위하고 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는 오금이 저려가지고 달려와서 엘리사에게 고하였습니다. “아아~ 내 주여, 우리가 어찌하리이까.”
그러자 엘리사는 이미 다 알고 있었는지라, 무슨 일이냐고 묻지 않고 이렇게 말했습니다. “우리와 함께 한 자가 저와 함께 한 자보다 많으니라.”
하나님께서 게하시의 눈을 밝게하시니 “보라! 불말과 불병거가 산에 가득하여 엘리사의 집을 둘러싸고 있구나.”
여기서 엘리사는 이미 불말과 불병거가 둘러싸 보호하고 있다는 것을 알았는데 게하시는 보지 못한 것입니까? 그리고 게하시가 어떻게 다시 불말과 불병거가 둘러 싸 보호하고 있는 것을 보게 된 것입니까? 17절에 하나님이 그의 눈을 열어 보게 하셨다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사람의 눈이 아무리 좋아도 2.0이상은 안될 것입니다. 매의 시력은 9.0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높은 하늘에서 땅에 기어가는 개구리를 봅니다. 그러나 사람은 볼 수 없습니다. 그런데 사람의 눈엔 볼 수 없는 것을 보는 눈이 있습니다. 그것을 心眼 마음의 눈이라고 말합니다. 불의를 보고 불의인지를 모른다면 이는 마음의 눈이 어둡기 때문입니다. 거짓을 보고도 거짓인줄 모른다면 이는 마음의 눈이 멀었기 때문입니다. 의로운 것을 보고도 의로운 줄 모른다면 이는 마음이 병들었기 때문입니다. 왜 정도를 보면서 그 길을 가지 않는다면 그 마음의 눈이 닫혀 있기 때문입니다. 나뿐 줄 알면서도 계속 나뿐 짓을 한다면 이는 마음의 눈이 삐뚜러져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마음의 눈을 바로 가져야 합니다. 그래서 불교의 가장 중요한 교리는 正見 마음의 눈을 밝히는 것입니다. 마음의 눈이 어디에 있습니까? 인도사람들은 여기 양 눈 사이에 있다고 생각하고 여기에 붉은 점을 찍습니다. 부처님 이마에도 이 점이 금박으로 찍혀 있습니다. 불교의 모든 수행은 이 마음의 눈을 발히기 위해서입니다. 이 마음의 눈을 뜨기 위하여 염불을 외우고 3천배 절을 하고 1만번 탑돌이를 합니다. 그러면 마음의 눈이 뜨게 됩니다. 그러면 정말 마음의 눈이 뜨게 되는 것입니까? 글쎄요. 타 종교의 이론을 왈가왈부 할 수 없습니다만 마음의 눈이 그래서 떠진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그러나 아닙니다. 왜냐하면 마음의 눈이 아니라 영의 눈을 떠야합니다. 영의 눈을 떠 하나님을 보아야 마음의 눈도 떠지게 됩니다.


마5:8에 마음이 청결한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을 볼 것이요 라고 예수님이 말씀하셨습니다. 바꿔 말하면 하나님을 볼 수 없다면 마음이 청결한 것이 아닙니다. 즉 마음의 눈이 떠진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볼 수 있는 눈을 영안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이 영안은 사람스스로 노력해서 수행과 고행 온갖 노력을 통해 뜨게 되는 것이 아닙니다. 이 영안은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이 뜨게 해 주셔야 뜨게 됩니다. 그래서 게하시도 하나님이 뜨게 하시니 영안이 떠 불말과 불병거를 보게 된 것입니다. 영안이 밝아지지 않으면 마음의 눈도 밝아지지 아니하고 진리를 보지 못합니다. 예수님께서 보지 못하는자의 눈을 뜨게 하시니 그가 주님을 보고 주님을 따랐습니다.

 

이것을 알아야 합니다. 교회를 다닌다고 해서 다 영안이 뜬 사람이 아닙니다. 목사라고 장로라고 교인이라고 해서 다 영안이 밝은 사람이 아닙니다. 성경을 수백 번 읽었다고 기도를 쉼 없이 한다고 해서 영안이 뜨게 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뜨게 해 주셔야 합니다. 교회를 다니는 사람들 중에 진리를 보지 못하고 하나님의 의를 보지 못하고 하나님의 정의로운 역사의 통치를 보지 못한 영안이 멀어버린 사람들이 있습니다. 어째서 영안이 멀었습니까? 

 

이 세상은 죄로 꽉 들어찼습니다. 우리가 매일 보고 듣고, 체험하는 모든 것들이 죄악으로 물들어 있습니다. 이처럼 죄 많은 세상을 바라볼 때 우리는 어떻게 의롭게 살 수 있을지 의문이 들어 낙심하게 됩니다. 그러나 우리가 영의 눈을 떠서 보면 이처럼 죄악 된 세상과 우리 사이에는 하나님의 은혜의 군대가 둘러 진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 보혈의 권세가 죄악 세상 가운데 있는 우리들을 감싸 보호하며 그 보혈의 능력으로 우리의 죄를 씻어 주시고 우리를 의롭게 하시어 하나님의 영광과 평안으로 채워주시는 것입니다.

갈라디아서 1장 4절에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곧 우리 아버지의 뜻을 따라 이 악한 세대에서 우리를 건지시려고 우리 죄를 대속하기 위하여 자기 몸을 주셨으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육의 눈으로 보면 이 세상은 마귀와 탐욕, 추함의 군대들로 꽉 차있습니다. 이처럼  죄악된 땅에서 우리가 어떻게 거룩하게 살 수 있을까요? 이 세상은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 이 세상 자랑으로 채워져 더럽고 추하기만 합니다. 이러한 세상 속에서 어떻게 우리 혼자 거룩하게 지낼 수 있을까요? 그러나 이 역시 우리가 영의 눈으로 보면 우리와 이 세상 사이에 우리를 거룩하게 하시는 하나님의 은혜의 군대가 둘러 진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 은혜의 군대란 바로 하나님 성령의 은혜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고아와 같이 버려두지 않으시고 우리에게 오셔서 늘 우리와 함께, 우리 안에 거하시어 하나님의 거룩한 능력으로 우리가 세상의 모든 추함을 이기고 승리하도록 하십니다.

 

고린도전서 6장 11절에 “너희 중에 이와 같은 자들이 있더니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과 우리 하나님의 성령 안에서 씻음과 거룩함과 의롭다 하심을 받았느니라”고 증거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성령이 우리를 둘러 진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우리는 영의 눈을 열어서 은혜의 군대인 성령을 바라보고 세상의 정욕과 탐욕, 더러움의 마귀 군대를 바라보지 말아야 합니다.
육의 눈에 보이는 병이란 마귀군대가 있습니다. 오늘날 이 세상에는 의학적으로 고칠 수 없는 흉악한 병이 많습니다. 과거에는 상상할 수 없었던 많은 종류의 암이 사람들을 도둑질하고 멸망시키고 있습니다. 암 외에도 고혈압, 당뇨병 등의 각종 성인병들이 있어 많은 사람들이 이에 고통받고 있습니다. 우리가 육의 눈으로 이 병들을 바라보면 위축되고 불안하며 초조합니다. 그리고 과연 이 병을 이기고 살아날 수 있을까하는 두려움이 생깁니다. 그러나 영의 눈으로 보면 병이라는 마귀 군대와 우리 사이에는 치료의 군대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예수 그리스도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기 때문입니다.

마태복음 8장 17절에는 “이는 선지자 이사야를 통하여 하신 말씀에 우리 연약한 것을 친히 담당하시고 병을 짊어지셨도다 함을 이루려 하심이더라”고 기록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약속의 군대들이 우리를 둘러 진치고 있으므로 우리가 하나님의 약속을 부여잡고 믿음으로 나아가면 마귀의 군대인 병의 군대를 이길 수 있습니다.

사도행전 10장 38절에 “하나님이 나사렛 예수에게 성령과 능력을 기름 붓듯 하셨으매 그가 두루 다니시며 착한 일을 행하시고 마귀에게 눌린 모든 사람을 고치셨으니 이는 하나님이 함께하셨음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십니다. 예수님은 오늘도 우리와 함께 계십니다. 우리와 함께 계신 예수님은 세상보다 강하십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영의 눈을 떠서 이러한 사실을 볼 수 있다면 그 어떠한 것이라도 넉넉히 이길 수 있습니다. 육의 눈으로 보이는 저주의 군대는 모두가 헐벗고 굶주리고, 직장을 잃고 사업이 무너져 살기가 어렵습니다. 온천지는 고통과 가난이라는 저주의 군대 밖에 보이지 않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영의 눈을 통해서 보면 또 다른 세계가 있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저주의 군대와 우리 사이에 하나님의 영의 세계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영의 세계는 축복의 세계입니다. 갈라디아서 3장 13절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 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으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저주가 우리에게 물러가도록, 하나님의 속량하신 축복의 은혜가 우리를 둘러 진치고 있는 것입니다. 고린도후서 8장 9절에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너희가 알거니와 부요하신 자로서 너희를 위하여 가난하게 되심은 그의 가난함을 인하여 너희로 부요케하려 하심이니라”고 바울 선생은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를 부요케 하는 은혜의 군대가 우리를 둘러 진치고 있습니다. 이 약속의 말씀을 통해 우리가 은혜의 군대를 영의 눈으로 바라보고 마음에 믿고 담대한 믿음으로 기도하면, 모든 저주와 가난은 물러나고 하나님의 은혜의 축복이 우리를 둘러싸게 됩니다.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세상을 살아 갈 것입니까? 하나님이 우리의 영의 눈을 뜨게 하셨으니 그 영의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아무리 마귀권세가 우리에게 덤벼들지라도 온갖 병과 가난과 질고와 염려가 우리를 넘어트리려 한다 할지라도 공포와 한숨과 탄식이 우리의 마음 안에 가시덤불처럼 진치고 있다 할지라도 아니요 우리를 보호하시는 불말과 불병거 하나님이 우리를 보호하신다는 것을 바라볼 수 있어야 합니다. 안경을 벗으면 저는 조금 떨어져 있는 사물을 구별하지 못합니다. 그러나 안경을 쓰면 모든 사물이 확연하게 보입니다. 아무리 세상이 지금 뒤죽박죽 살아가는 일이 막막하고 어디로 갈까 망서려진다 하더라도 영안을 쓰면 확연하게 길이 보입니다. 믿음은 보지 못하는 것은 보는 것입니다.

출애굽 후, 이스라엘은 얼마를 가지 않아 가데스바네아 광야에 이르게 된다. 여기에서는 가나안 땅이 그리 멀지 않았습니다. 이제 막 가나안 땅으로 들어갈 참이었습니다. 그러기 전에 가나안의 사정을 살펴봐야 했습니다. 이스라엘 각 지파의 대표자 한사람씩 세워 12인의 정탐꾼을 파견합니다. 40일 후에 정탐꾼 열둘이 돌아왔습니다. 열 명의 사람들과 두 명의 보고가 달랐습니다. 열 명의 정탐꾼들은 가나안은 좋은 곳이지만 그곳에 살아가고 있는 원주민들이 거인들이라 그들에게 우리는 메뚜기처럼 밟혀 죽게 될 것이니 결코 들어가지 못할 거라 보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두 사람의 경우는 달랐습니다. 오히려 하나님이 함께하시니 그들이 우리 밥이라고 얼마든지 쳐들어갈 수 있을 거라 보고하였습니다. 열 사람과 두 사람의 차이는 무엇입니까? 열 사람들은 하나님을 보는 눈이 멀었었고 두 사람은 하나님을 보는 영이 떠있었습니다. 영안이 떠 있는 사람은 하나님의 역사를 봅니다. 진실과 거짓을 보며 진실을 택합니다. 정의와 불의를 보고 정의를 택합니다. 선과 악을 보고 선을 택합니다. 그러므로 지금 내가 보고 있는 것을 육의 눈으로 보느냐 영의 운으로 보느냐 영의 눈으로 보는 사람은 하나님을 보게 되니 하나님의 보호하심을 받게 되고 육의 눈으로 보는 사람은 하나님을 보지 못하고 마귀를 보니 마귀에게 사로 잡혀 죄를 짓게 됩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엘리사를 보세요. 그의 종 게하시는 성을 둘러쌓고 있는 아람 군대를 보고서 두려워서 어찌할 바를 알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영적인 눈으로 바라본 엘리사는 전혀 걱정하지 않았습니다. 두려워하지도 않았고, 불안해하지도 않았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영안이 열려 하나님께서 자신과 함께 하셔서 자신을 지켜주고 계심을 보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영안이 열려 하나님께서 함께 하심을 보며 산다면 우리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전혀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다윗이 시편 23편에서 고백한 것처럼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해 주심”을 알기 때문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탄해 후에 우리나라가 어찌 돌아갈 것인가 누가 대통령이 될 것인가 안보는 어찌 될 것인가 중국 미국 일본과의 이교관계가 어찌 될 것인가 싸드가 설치될 것인가 북한이 미사일전쟁을 일으킬 것인가 우리나라 경제는 어찌 돌아갈 것인가 우리 서민들은 어찌 살아갈 것인가 골치아픈 온갖 문제로 걱정근심 무거운 짐 짊어지고 가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지요.
그러면 영의 눈을 떠서 보십시오. 불말과 불병거가 이 나라를 지켜 주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안심 하십시오

 

신 31:8
“여호와 그가 네 앞에서 가시며 너와 함께 하사 너를 떠나지 아니하시며 버리지 아니하시리니 너는 두려워하지 말라 놀라지 말라.”(신 31:8)

사랑하는 라온 성도여러분, 세상에서 가장 불쌍한 사람 가운데 하나가 앞을 보지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그런 사람보다 더 불쌍한 사람이 영적 안목이 없는 사람들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들의 눈을 뜨게 하사 하나님이 우리 라온 코이노니아 여기 둘레에 불말과 불병거가 가득하여 둘러쳐 주셨음을 영안으로 보기 바랍니다. 그래서 우리를 떠나지도 아니하고 우리를 버리지도 아니하시는 하나님의 보호하시는 손길을 바라보면서 그 손에 이끌림 받은 귀한 삶을 사시길 바랍니다.

 

찬송 366장에는 “어두운 내 눈 밝히사 진리를 보게 하소서 진리의 열쇠 내게 주사 참 빛을 찾게 하소서 깊으신 뜻을 알고자 엎드려 기다리오니 내 눈을 뜨게 하소서 성령이여”라는 가사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눈을 밝히시고 여시면 진리가 보입니다. 거짓된 무리에 속하지 아니하고 불의에 짝하지 아니하고 망령된 행실을 멀리하고  참 빛을 찾을 수 있습니다.
대교약졸(大巧若拙) 우리 라온 코이노니아는 세상눈으로 보면 서투르고 약한 것처럼 보이지만  아니오 가장 아름다움 교회중의 하나인 줄 믿습니다. 왜냐하면 여기 이곳에  아름답고 귀하고 고품격의 가치를 볼 줄 아는 그런 영적인 안목을 가진 여러분들이 보다 진실 되고 올바른 품격 있는 인생을 살아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언제나 저와 여러분의 영적 안목으로 하나님을 바라보며 축복인생 살아가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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