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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병호목사의 교회이야기

전병호 목사의 설교



2017년 2월 26일  주일아침예배  잠 15: 15-17   '와비∼사비'(Wabi-Sabi, 侘―寂わびさび)한 교회

 

 

오늘의 설교제목이 ‘와비 사비한 교회’라하였습니다. 이 말은 일본어이고 일본 사람들의 美에 대한 정신을 함축적을 표현한 말이라고 합니다.
500년전 일본 풍신수길 시대 때에 다도법을 확립시켜 일본사람들이 茶聖이라 추앙받고 있는 센리큐(千利休1522년-1591년 4월 21일)라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센린큐가 젊은 시절 다도(茶道)를 배우기 위해 유명한 스승을 찾아갔습니다.

스승은 젊은 센리큐에게 다도를 가르치기 전에 먼저 정원을 가꾸라고 지시합니다. 센리큐는 잡초를 뽑고 땅을 고르고 꽃과 나무를 심어 완벽한 정원을 만들었습니다. 미학적으로 전혀 부족함이 없는 정원이 된 것입니다. 그런데 센리큐는 스승에게 보이기 전에 무엇인가 잘못되어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경치가 완벽하여 인공적으로 보일 뿐, 자연 그대로의 소박미가 결여되어 있음을 발견한 것입니다. 그래서 센리큐는 벚나무를 흔들어 바닥에 벚꽃이 흩어지도록 만들었습니다. 그것이 더 아름다울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와비사비란 이처럼 다도(茶道)에서 나온 용어로 일본 고유의 미의식(美意識)을 보여주는 말입니다. 이처럼 부족해 보이고 허술해 보이는 것을 통해 자연미를 회복하는 정신이 바로 '와비-사비입니다. ‘와비’(侘)는 가난함과 부족함 가운데서도 마음의 충족을 끌어내는 여유로운 마음이며, ‘사비’(寂)는 한적한 가운데서도 깊고 풍성함을 깨닫는 고요한 마음입니다.

삶의 아름다움은 완전으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림을 그릴 때도 어두운 부분이 있어야 전체가 조화를 이루듯이 삶도 어둡고 고통스러운 측면이 있을 때 더 아름답게 보여집니다. 무엇인가 모자란 것 같고 없는 것 같고 가난한 것 같고 허약한 것 같고 조금은 멍청한 것 같기도 하지만 바로 그 가운데서 오히려 인생의 멋을 보암직하기도 합니다. 이 결핍의 미, 우리나라 옛날 선비들은 이것을 유여의 미라고 하였습니다. (事事에 留個有餘하여 不盡的意思면 便造物도 不能忌我하리라 모든 일에 여분을 남겨 못다 한 뜻을 둔다면 조물주도 시기하지 않으며–채근담)

 

기독교에서는 진리를 말할 때에 역설적으로 말하기도 합니다. 가난한자가 복이 있다. 죽어야 산다. 잔치집에 가는 것보다 초상집에 가는 것이 더 났다. 넓은 길로 가지 말고 좁은 길로 가라.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 환난 중에 즐거워하라. 이런 말씀들이 역설적인 말씀입니다.

 

오늘 봉독한 잠언서의 말씀에도,

잠 15:16-17 가산이 적어도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크게 부하고 번뇌하는 것보다 나으니라

 

채소를 먹으며 서로 사랑하는 것이 살진 소를 먹으며 서로 미워하는 것보다 나으니라.
는 말씀도 역설적 진리의 말씀이라고 하겠습니다. 

 

많은 기독교인들이 하나님을 믿는 이유를 복받으려한다는 말을 합니다. 이 복은 사업이 번창하고 장사가 잘되고 물질이 풍성하고 고급주택에 살며 산해진미를 먹으며 고급 옷을 입고 보석패물을 걸치며  고급자동차를 타고 해외여행을 이웃집 드나들듯하며 사는 것 그것이 복 받으며 사는 것이라고 착각합니다. 물론 기독교인들 가운데 그렇게 사는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을 잘 믿으면 하나님께서 물질의 복을 주십니다, 그러나 그것이 행복이 아님을 예수님은 부자 농부의 비유에서 잘 말해 주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주신 그 물질의 복을 지키기 위해서 그때부터 그는 죄를 짓고 악을 행하기 시작합니다. 그래서 딤전 6:10에서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가 되나니 이것을 탐내는 자들은 미혹을 받아 믿음에서 떠나 많은 근심에서 자기를 찔렀도다.“ 여기서 ‘찔렀도다”란 말의 헬라어 원어는 “페리펠로”로 쇠꼬챙이로 찌르다란 의미입니다. 돈을 탐하는 것이 스스로 자기의 심장을 바늘로 찔러대는 일이라는 것입니다. 얼마나 고통스런 일입니까? 우리는 평생 이 고통스런 일을 하고 있으니 사는 것이 얼마나 괴로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과연 이 고통스런일을 하다가 지옥에 간다면 얼마나 억울한 일입니까?  그러면 이 고통스런 인생에서 어떻게 하면 행복하게 살아갈 수 있습니까?

 

옛날에 가난하지만 행복한 농사꾼 부부가 있었습니다.
어느 날 농부가 부인에게 여보! 우리말을 팔아서 더 좋은 말과 바꾸고 싶은데 당신 생각은 어떻소. 부인은 좋아요 당신 생각대로 하세요 했습니다. 농부는 말을 몰고 시장으로 가다 살진 암소를 몰고 가는 사람을 만났습니다. 농부는 자기의 말과 그 암소를 바꿨습니다. 한참 가다 양 한 마리를 끌고 가는 사람을 만났습니다. 그는 자기의 암소와 양을 바꿨습니다. 한참 가다 붉은 벼슬을 가진 장닭을 안고 가는 사람을 만났습니다. 그는 양과 장닭을 바꿨습니다. 한참 가다 어떤 사람이 썩은 사과 한 자루를 지고 가는데 사과 썩는 냄새가 향긋해 장닭과 썩은 사과 한 자루와 바꿨습니다. 어느새 날이 저물어 여관방에서 잠을 자게 되었는데 한방에 있던 귀족 두 사람이 자루에서 사과 썩는 냄새를 맡고는 무엇이냐 물었습니다. 농부는 자초지종 이야기를 했습니다. 귀족은 농부에게 당신은 집에 돌아가면 부인이 화가 나서 당신을 받아들이지 않을 것이라 했습니다. 그때 농부는 ‘아니요. 나의 아내는 나에게 참 잘했다 할 것이요.’ 그때 귀족은 ‘만일 당신 아내가 참 잘했오라는 말을 하면 내가 가진 금화 모두를 주겠오’라고 하였습니다. 이튿날 썩은 사과를 가지고 귀족과 집에 도착하여 되어진 일을 이야기했습니다. 그의 아내는 말 한필과 썩은 사과 한 자루와 바꾸어온 남편에게 ‘그렇잖아도 식초를 만들기 위해 썩은 사과가 필요했는데 참 잘되었군요.’ 칭찬을 했습니다. 결국 농부는 내기에 이겨 큰 부자가 된 것입니다.

물론 누가 보더라도 이 농부는 어리석은 사람입니다. 그러나 그 모자람 속에 소박하고 醇醇한 사람냄새가 납니다, 그의 아내는 남편에 대한 무한한 신뢰와 사랑을 보여주었습니다. 이
집이 불행한 가정입니까? 아니면 행복한 가정입니까? 가난하고 조금은 모자란 것 같은 부부이지만 아름답습니다. 와비사비의 멋이 있습니다.

 

우리 기독교인은 너무 세상을 영리하지도 않고 똑똑하게 살아가지도 않습니다. 어떤 때는 참 바보같이 삽니다. 그러나 거기서 참 신앙을 보게 되고 믿음의 멋을 보게되고 하나님의 은혜를 받게 됩니다. 
골2:2-3에 말씀하시기를 “사랑 안에서 연합하여 확실한 이해의 풍성함과 하나님의 비밀인  그리스도를 깨닫게 함이니 그 안에는 지혜와 지식의 모든 보화가 감추어져 있느니라”

우리는 부족하고 모자라고 가난하고 연약하지만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 안에서 연합하여 있다는 것은 세상 그 무엇도 부러워하지 않고 세상 그 어느 것과도 바꿀 수 없는 우리의 마음은 풍성하고 또 부요하다고 하겠습니다.  ‘채소를 먹으며 서로 사랑하는 것이 살진 소를 먹으며 서로 미워하는 것보다 나으니라’고 하였습니다. 중요한 것은 채소를 먹는냐, 살진 소를 먹느냐 이것을 이야기 하는 것이 아니라 사랑하며 사느냐, 미워하며 사느냐입니다. 가난해도 불행할 수 있고, 부요해도 불행할 수 있습니다. 가난해도 행복할 수 있고, 부요해도 행복할 수 있습니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물질 때문에 다투고 미워합니까? 물질 때문에 부모자시간이 갈라지고 형제간에 미워하게고 어제의 친구가 오늘 원수가 되고 있습니다.  불행의 원인은 가난이나 부요함이 아니라 미움입니다. 행복의 원인은 가난이나 부요함이 아니라 사랑입니다. 사랑하면 채소만 먹어도 행복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면 고기를 먹지 않아도 행복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즉, 사랑은 모든 것을 초월합니다. 가난도 부요함도 궁핍함도 풍부함도 초월합니다. 없다고 해서 기죽지 않고, 있다고 해서 교만 하지 않습니다. 사랑하면 담대합니다. 사랑하면 겸손하게 됩니다.
아가서8:6 사랑은 죽음보다도 강하다고 하였습니다.
벧전 3:8 형제를 사랑하며 불쌍히 여기며 겸손하라고 하였습니다.

 

이런 말이 있습니다.

 "돈으로 침대는 사지만 달콤한 잠은 살 수 없다.
책은 살 수 있지만 명석한 두뇌는 살 수 없다.
음식은 살 수 있지만 식욕은 살 수 없다.
화려한 장신구는 살 수 있지만 아름다움은 살 수 없다.
집은 살 수 있지만 행복한 가정은 살 수 없다.
사람들은 살 수 있지만 진정한 친구는 살 수 없다.
약은 살 수 있지만 건강은 살 수 없다.
오락은 살 수 있지만 행복은 살 수 없다.
종교는 살 수 있지만 구원은 살 수 없다.
장식용 십자가는 살 수 있지만 구세주는 살 수 없다.
좋은 삶은 살 수 있지만 영생은 살 수 없다.
세계 어느 곳이라도 갈 수 있는 여권은 살 수 있지만
천국의 여권은 아무나 살 수 없다."

 

천국 여권이 무엇입니까? 바로 사랑입니다. 사랑 없는 사람은 천국에 못들어 갑니다. 그러므로 세상에 사는 동안 열심히 사랑을 벌어 놓아야 합니다.

사랑은 무엇입니까? 사랑이란 말이 어데서 생겨났는가 연구해보니 어디까지나 저의 독자적인 연구입니다. 사랑은 살의 알 곧 살알맹이란 말입니다. 살알맹이 이 살알맹이가 없으면 살이 죽습니다. 살이 썩어지고 흙이 됩니다. 살이 살아있기 위해서 살 알맹이가 있어야 하는데 그것이 바로 사랑입니다. 그리고 사랑의 집이 마음입니다. 문제는 사랑의 집인 이 마음을 잘 지켜야 하는데 가끔 이 마음에 도둑이 들어옵니다. 도둑이 들어와 우리 마음에서 사랑을 훔처갑니다. 사랑을 빼앗긴 그 마음은 황량하고 외롭고 두려움이 가득합니다. 결국 사랑 없는 마음집은 무너지게 됩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 마음을 지키기가 어렵다는데 있습니다. 집을 지키고 사무실을 지키고, 상점 을 지키고, 돈을 지키는 것은 다른 사람에게 맡길 수 있어도 우리의 마음을 지키는 일은 나 이외의 다른 사람에게 맡길 수는 없는 일입니다. 내 마음은 내가 지켜야 하는데 마음을 지키지 못하니 사랑을 도둑맞게 됩니다.  아무리 마음을 꽁꽁 싸매어도 어느듯 아픔이 찾아오고 괴로움이 찾아오고 슬픔이 찾아오고 온갖 죄의 유혹들이 찾아와 속삭이니 아담과 이브가 넘어 가듯이 그렇게 속절없이 마음이 넘어가버립니다.
우리는 이것을 알아야 합니다, 세상의 모든 유혹들은 마음도둑들입니다. 보암직스럽고 먹음직스럽고 탐스럽게 보인다 하더라도 그것들은 내 마음의 마귀 도둑들입니다. 마귀 도둑들이 들어와 내 마음 안에서 오부탕질하니 미움 질투 원망 불평 불만 시기 다툼 교만 이간질 분당질 온갖 노심초사 스트레스  분노 울화 불면증 무기력 열등감 자괴감 신경증세 우울증 조울증들이 내 마음 안에서 무당 널 뛰듯 하니 마음이 무너집니다.

 

왜 이런 마귀가 오부탕치는 마음이 되었습니까?

눅 11:20-26  “그러나 내가 만일 하나님의 손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낸다면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너희에게 임하였느니라  강한 자가 무장을 하고 자기 집을 지킬 때에는 그 소유가 안전하되  더 강한 자가 와서 그를 굴복시킬 때에는 그가 믿던 무장을 빼앗고 그의 재물을 나누느니라  나와 함께 하지 아니하는 자는 나를 반대하는 자요 나와 함께 모으지 아니하는 자는 헤치는 자니라  더러운 귀신이 사람에게서 나갔을 때에 물 없는 곳으로 다니며 쉬기를 구하되 얻지 못하고 이에 이르되 내가 나온 내 집으로 돌아가리라 하고  가서 보니 그 집이 청소되고 수리되었거늘  이에 가서 저보다 더 악한 귀신 일곱을 데리고 들어가서 거하니 그 사람의 나중 형편이 전보다 더 심하게 되느니라”

 

어떤 사람이 도끼를 잃어버리고는 이웃집 아들을 의심했습니다. 걸음걸이를 보아도 안색을 보아도 말투를 들어도 도끼를 훔친 것 같았습니다. 모든 동작과 태도가 도끼를 훔친 사람 같아 보였습니다. 그런데 얼마 후에 골짜기를 지나다가 그는 잃었던 도끼를 찾았습니다. 다음날 다시 이웃집 아들을 보니 동작과 태도가 전혀 도끼를 훔친 사람 같지 않았다고 합니다. 때에 따라 동일한 대상이 다르게 보이는 것은 그때마다 내 마음의 주인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지금 우리 마음의 주인은 누구인가? 한 번 돌아봐야겠습니다.

 

누가복음의 예수님의 말씀에서, 더러운 귀신이 쉴 곳을 찾아 거하기 위해서 계속 헤매다가 전에 살았던 사람에게 돌아와 보니 비어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어서 가서 저보다 더 악한 귀신 일곱을 데려다가 거하여, 그 사람의 형편이 더 심하게 되었다고 하였습니다.

이 말씀의 요점은 귀신을 쫓아내었으니 내 마음의 주인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집에 예수님이 계시지 않으니 쫒겨 난 옛 주인인 마귀가 다시 찾아 들어와 오부탕 질을 치고 있다는 것입니다.  내 마음의 집 주인은 분명히 예수그리스여야 합니다. 그런데 때때로 사람들은 예수님 없는 마음이 되 버립니다. 곧 사랑 없는 마음이 되 버립니다. 진실 없는 마음이 되고 정의롭지 못하고 말씀에 순종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빈집이 됩니다. 서포리 저의 집 근처에 빈집이 3채가 있습니다. 전에는 따뜻한 사람들이 살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은 벽이 허물어지고 지붕이 뚫어지고 마당은 잡초 밭이 되어 있습니다. 주인 없는 집 예수님이 없는 나의 마음 마당은 마귀들이 날뛰는 마당이 될 것입니다.  내 마음의 집을 그러므로 지켜여 합니다. 빈집이 아닌 예수님 모신 마음 집이 되어야 온전히 사랑이 가득한 따뜻하고 포근한 사람 살맛나는 인생을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이제 다시 설교제목으로 돌아가겠습니다. 와비 사비 이 일본말은 다만 일본사람들의 어떤 정신을 말하고 있지만 그 말이 뜻하는 의미는 또한 우리 기독교 신앙의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다고 하겠습니다. 부족함 모자람 조금은 어리석고 가난하고 힘도 쓰지 못할 그런 약하게 보이는 사람, 우리 이런 사람을 예수님에게서 봅니다. 얼마나 어리석습니까? 말한마디면 로마 군단 수천명을 쓸어버릴 그런 능력을 가진 예수님이십니다. 그런데 이미 제자의 배신을 알고도 그대로 어린양처럼 십자가를 짊어지고 골고다로 올라가는 그 모습이 참으로 처량하고 생각만 해도 화가 날 지경입니다. 제가 그 골고다 언덕길에 있었다면 구레네 시몬처럼 십자가나 받아 대신 짊어지지 않고 이렇게 호령하였을 것입니다. “예수님 왜 병신같이 십자가 지고가다 쓰러지십니까? 당장에 호령을 치고 저들에게 불벼락을 내리십시오”라고 그런데 예수님은 바보 같은 미소를 흘리시며 저에 말씀하시길, “이 길이 나의 길이요 이 길이 네가 갈 길이다”라고 말씀하십니다.  그 십자가의 길은 사랑의 길입니다. 원수도 사랑하라는 말씀은 바보 같은 말씀입니다. 가난한자가 복이 있다는 말씀은 어리석은 말씀입니다. 오른뺨을 때리면 왼편 뺨도 내밀라는 말씀은 참으로 참기 어려운 말씀입니다. 그 모든 예수님의 공생애 마지막 사람들이 예수를 죽이라고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소리치고 침 뱃고 욕지거리를 그대로 들으신 예수님은 이미 그 가슴에 대못이 박히는 아픔을 겪으셨을 것입니다. 왜 바보같이 몰매를 맞고만 계셨을까요? 사랑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사랑은 “오래 참으심”으로 이루셨습니다.  세상 사람들의 사랑은 후루루 끊다가 식어지는 사랑이 대부분입니다. 어떤 신랑 신부는 헤어지면 죽는다고 부모에게 협박하여 결혼하고 신혼여행에서 돌아 올 때 각자 헤어져서 돌아 왔다는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의 사랑은 일시적인 사랑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참지 못해서입니다. 얼마나 오래 참는냐가 사랑이 얼마나 오래 가느냐가 결정됩니다. 그리고 영원한 사랑 천국에 이르는 아가페 사랑 그 사랑은 예수님처럼 하염없이 속절없이 오래 참으며 사랑해야 진짜 사랑이 됩니다. 이런 하염없이 사랑하려면 바보같아야 합니다. 예수님이 왜 그렇게 오래 참으셨는가 그 이유를 딤전 1:16에서 말씀해 주십니다.
 “ 예수 그리스도께서 내게 먼저 일체 오래 참으심을 보이사 후에 주를 믿어 영생얻는 자들에게 본이 되게 하려 하심이라”고 하였습니다. 우리에게 본이 되시려고, 우리에게 그 오래 참으시는 사랑을 가지도록 하시기 위해서 먼저 바보같이 십자가의 오래 참으신 사랑을 보이셨다는 것입니다. 저는 이것을 와비사비 사랑이라고 말합니다.
그래서 바울 선생님은 그 예수님의 오래 참으신 사랑을 본 받아 전 세계를 다니시며 예수님의 사랑을 전파 하였습니다. 고린도전서 13장 사랑의 장의 말씀을 하실 때에 사랑에 대해 가장 먼저 소개한 말씀이 4절의 ‘사랑은 오래 참고(헤 아가페 마크로두메이)’ 라는 말씀 이였습니다.  영어 번역이 잘 되어있습니다. “Love suffers” 즉 사랑은 고통을 이겨낸다는 말이지요. 그 다음 단어가 “long”입니다. "Love suffers long." 즉 사랑은 고통을 오래 감수해 내는 것입니다.

 

오래 참는 모습은 바로 하나님의 모습입니다. 출애굽기 34장 6절에 보면 하나님이 친히 모세에게 “자비롭고 은혜롭고 노하기를 더디 하고(long suffering) 인자와 진실이 많은 하나님이로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노하기를 더디 한다(에레크 앞파임)”는 말은 “고통을 오래 참는다”는 뜻입니다. 실제로 하나님은 고통을 끌어안고 나아가셨습니다. 만약 하나님께서 오래 참지 않으셨다면 이스라엘은 벌써 이 땅에서 사라졌을 것입니다. 광야생활 40년 동안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께 얼마나 못되게 굴었습니까! 아무리 선지자들을 보내어 타일러도 그들은 말을 듣지 않았습니다. 어떻게 보면 우리 민족과 참 비슷해요. 만약 하나님이 오래 참아주시는 분이 아니라면 우리 민족도 노아 시대처럼 “도저히 안 되겠다”하고 싹 쓸어버리셨을지 모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다시는 그렇게 하지 않겠다고 약속하시고 우리를 오래 참아주셨습니다. 여러분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그 순간까지 하나님께서 참고, 참고, 또 참고 기다려주셨던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도 믿음생화 할때에 참는 습관을 가져야 합니다. 처음에는 작은 고통을 감수합니다. 관계가 깨지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을 찬송하고 성령의 도움을 받아 두 번, 세 번, 고통을 이겨나갑니다. 그리고 네 번, 다섯 번 고통을 참는 횟수가 거듭될수록, 이제는 고통이 다가와도 겁나지 않습니다. 전에는 고통당하는 것이 두렵고 겁이 났지만 이제는 걱정이 없습니다. ‘이제 내가 고통을 얼마든지 이기고 견뎌낼 수 있구나! 걱정하고 염려할 것이 없구나!’하며 성숙한 모습을 보이게 됩니다. 그 때마다 주님을 신뢰하며 믿음으로 한 번, 두 번, 거듭 참아 고통과 시련을 이겨내는 것이 적극적인 인내, 즉 사랑의 모습입니다.

 

예수님은 그 오래 참으신 사랑을 저에게도 우리에게도 본을 보여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이 오래 참는 사랑은 예수님처럼 바보 같아야 닮을 수 있습니다.
골로새서 3장 12절을 봅시다. "그러므로 너희는 하나님이 택하사 거룩하고 사랑받는 자처럼 긍휼과 자비와 겸손과 온유와 오래 참음(longsuffering)을 옷 입고“라고 말씀하였습니다.

고전13:7절에 다시 사랑은 참는 것이라고 재차 반복하듯이 강조하여 말씀하시는데, “모든 것을 참으며” 여기서 참는다는 말씀은 ‘판타 스테게이’ ‘모든 것을 덮다’란 의미입니다. 참는다는 것은 다 받아들이고 수용한다는 것입니다. 사람을 골라서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처럼 생겼으면 그냥 품어준다는 겁니다. 우리 고향사람인가, 나랑 성격이 맞겠나, 느낌이 통하겠나, 이런 것을 따지지도 않고 판단하지도 않습니다. 이 세상에 사람이 몇 명인데 어떻게 골라서 품습니까? 하나님은 우리가 쉽게 살기를 원하십니다. 그래서 사람이면 그저 못 본척하고 편안하게 다 품으라고 하십니다.

 

오늘 봉독한 잠 15: 15 “마음이 즐거운 자는 항상 잔치하느니라” 사람을 사랑하면 인생이 매일 잔치하는 것 같이 즐겁습니다. 언제나 어디에서도 우리는 나와 함께 잔치할 사람들을 만나게 됩니다. 나와 아무 상관이 없어도, 사람들의 걷는 모습, 웃는 모습이 나와 다르니까 재미있습니다. 참으로 다양한 사람들을 보면서 우리는 얼마든지 즐길 수 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이 사람을 싫어한다면 큰일입니다. 어디를 가도 사람이 있는데 어디로 도망을 치겠습니까? 한적한 곳으로 휴가를 가도 거기에 사람이 더 많아요. 사람을 고르지 않고 그대로 품을 수 있는 와비 사비한 마음을 갖기를 기도해야 할 것입니다. 사도 바울도 “너희 관용을 모든 사람에게 알게 하라”(빌4:5)고 했습니다. 하나님을 믿는 사람으로서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의 큰마음을 가졌으니 그저 관용하고 품으며 사랑하며 살라는 말씀입니다. 내 마음에 맞지 않는다고 각을 세워봤자 밥 먹은 것 소화만 안 됩니다. 다른 사람들의 단점과 장점, 있는 모습 그대로를 품는 마음 그 마음이 와비 사비한 마음이요 사랑이 살아 숨 쉬는 사랑의 집 마음입니다.

 

지난 토요일(2.18)춘천에서 탄핵찬성 촛불집회와 반대 태극기집회가 있었습니다. 반대집회는 김진태의원이 주동하고 찬성집회는 김제동씨가 연설을 하였습니다. 김제동씨는 연설중에 “저주는 저들의 것이고 사랑은 위리의 것이 되게 하자”라고 말하였습니다. 참으로 멋진 말입니다. 김제동씨의 말에서 오늘 설교 주제 힌트를 얻게 되었습니다.

우리 라온 코이노니아 여기는 참으로 부족한 것이 많습니다, 없는 것 투성 입니다. 우리들 돌아보면 다 약하고 부족하고 모자라고 가난한 우리들입니다. 그러나 이 와비 사비한 멋이 있습니다. 이 세상어디에도 이런 素朴하고 醇醇한 와비사비한 멋진 교회가 없습니다. 이 작은 19평 공간 열너댓 명 성도들 사랑으로 연합된 우리 라온코이노니아 여기 보다 아름다운 교회는 없습니다. 하나님이 사랑하시고 기뻐하시는 우리 교회인줄 믿습니다.

이제 우리가 우리 각자가 좀 모자라다고 좀 약하다고 좀 가난하다고 아니요 여기에 하나님이 계시고 오래 참으신 주님의 사랑이 넘치시니 이곳이 꽃동산이요 여기가 하나님나라입니다.

하나님이 와비 사비한 우리교회와 여러분에게 은혜와 사랑이 충만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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