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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병호목사의 교회이야기

전병호 목사의 설교



2017년 2월 19일 주일아침 예배  고후 4:1-10  No OTL


 "나는 위대한 과학자 보다 신실한 크리스챤이고 싶다"(정근모지음 출판사:국민일보 | 2010.04.02 란 책이 있습니다. 이 책의 저자는 세계적인 원자력전문가인 정근모 박사입니다. 그는 삼성제일교회 장로요 과거에는 과학처 장관 이기도하였고 호서대학교와 명지대학교 총장이며 집없는 사람들에게 집을 지어주는 국제 해비타트운동에 한국지부 이사장이기도 하였습니다. 이 분은 얼마나 머리가 좋은지 중고등학교를 최고수석으로 공부하고 고등학교 2학년 때 검정고시에 합격하여 서울대학교에 들어갔다가 미국에 유명한 대학에 들어가 20대 초반에 미시간주립대학에서 박사가 되고 25살 때 미국의 플로리다대교수 MIT공대교수 뉴욕과학대학교수가 되었습니다. 그는 현재 세계적인 원자력 연구회원 중에 한 사람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런데 천재의 머리를 가진 그에게도 견디기 어려운 시련이 있었습니다. 그에게 아들 하나가 있었는데 그가 어려서부터 몹쓸 병으로 고생하여 중대한 수술을 6번이나 하면서 나중에는 정 박사 자신의 신장하나를 아들에게 떼어주기도 하였습니다. 그런데 정근모박사는 아들이 죽을병에서 고생하는 것을 지켜보면서 그는 인간의 한계를 깨닫게 된 것입니다. 아무리 의술이 발달되고 자신의 머리가 천재면 뭘 합니까? 자식이 중병으로 고생하는 것을 보면서 정박사는 하나님을 만나게 된 것입니다. 이 책의 저자인 정근모박사는 그의 책 속에서 이런 말을 하고 있습니다. "인생의 고통스런 경험이 때로는 귀한 자산이 된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는 다시 이런 말을 합니다. "아 정말이다. 인생의 시련이 없었더라면 나는 기도하지 않았을 것이다. 내 아들의 고통이 없었더라면 예수님을 나의 구주로 영접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그는 이런 말도 했습니다. "시련을 만나거든 기도하십시오" 이 짧은 말이 바로 이 세상의 모든 고통 속에서 신음하는 사람들에게 들려주고 싶은 교훈이라고 말하였습니다. 정근모박사는 하나밖에 없는 외아들이 죽을 때 그의 아버지에게 이런 말을 남겼다고 합니다. "제가 죽거든 절대로 눈물을 흘리지 마세요. 저를 위해 축복기도를 해주세요. 제게 있어서 죽음은 곧 천국학교에 입학하는 것입니다."라고 말하더란 것입니다. 이런 말이 쉬운 것이 아닙니다. 깊은 믿음가지고 살지 않는 자가 이런 말을 할 수가 없습니다. 아버지 정근모 장로님은 이런 아들의 마지막 말을 듣고 신앙의 위대한 체험을 하게 된 것입니다.

 

이 땅에 사는 모든 인생들은 모두가 문제를 가지고 있습니다. 남에게 말할 수 없는 아픔이 있고 고통이 있고 실패의 쓴잔을 마시면서 살고 있습니다. 지금 우리 사회는 이런 이유 저런 이유로 인생의 실패와 좌절 속에서 인생자체를 비관하고 지금의 실패가 영원한 실패로 여기면서 절망과 실망 속에 사는 사람들이 참으로 많이 있습니다. 아마도 한 아기가 모태에서 떨어지는 그 순간부터 인생은 절망의 연속이 아닐런지요.
성경에 기록된 수많은 믿음의 사람들을 살펴보면 모두가 인생의 좌절로 그리고 실패의 쓴잔을 맛보지 않은 사람이 없습니다.  아브라함의 일생도 갈바를 알지 못하며 동가식 서가숙하면서 수많은 인생의 실패의 쓴잔을 맛본 사람입니다. 야곱은 형과 아버지를 속이고 20년간 고향과 부모 곁을 떠나 타향살이하며 머슴살이를 하였습니다. 요셉은 젊어서부터 형들의 미움을 받고 애굽에서 종살이하고 억울하게 누명을 쓰고 옥에 갇힌 일이 있었습니다. 이스라엘의 위대한 지도자 모세는 어떻습니까? 40살까지는 애급의 왕자였지만 그후 40년 동안 미디안 광야에 가서 양치는 목자로 살았습니다.  다윗도 사울왕에게 쫒겨 수많은 살해의 위협을 받았습니다.

 

오늘 봉독한 본문은 저 유명한 사도바울의 말씀입니다. 그가 다메섹도상에서 예수님을 만난 후 그리스도를 위해 살면서도 얼마나 많은 고통과 시련과 실패가 그에게 닥쳐왔습니까? 그는 “내가 수고를 넘치도록 하고, 옥에 갇히기도 더 많이 하고, 매도 수없이 맞고, 여러 번 죽을 뻔하였으니, 유대인들에게 40에 하나 감한 매를 다섯 번이나 맞았으며 세 번 태장을 맞고 한번 돌로 맞고 세 번 파선하고 일주야를 깊은 바다에서 지냈으며 여러번 여행하면서 강의 위험과 동족의 위험과 이방인의 위험과 시내의 위험과 광야의 위험과 바다의 위험과 거짓 형제중의 위험을 당하고 또 수고하며 애쓰고 여러 번 자지 못하고 주리고 목마르고 여러 번 굶고 춥고 헐벗었노라”(고후11:23-27)고 하였습니다.  보통 사람 같으면 좌절과 절망가운데 헤어 나오지 못하였을 것입니다. 아마도 한 대만 맞아도 교회를 나가니 안 나가니 할 것입니다. 교회 다니다가 작은 시험을 당하면 예수를 안 믿겠다고 12번도 더 말할 것입니다. 그런데 바울은 무엇이라고 말하였습니까? 오늘 봉독한 말씀에서, 고후 4:8절에 보면 “우리가 사방으로 우겨 쌈을 당하여도 싸이지 아니하며, 답답한 일을 당하여도 낙심하지 아니하며” 원어(엔 판티 들리보메노이 알 우 스테노ㅎ코루메노이, 아포루메노이 알 우크 엨사포루메노이)대로 해석을 하면, “압박을 당하여도 억압되지 아니하며, 환란에 빠져도 모든 희망을 포기하지 아니한다” 라고 하였습니다. 9절에는 무엇이라고 말씀하였습니까? “박해를 받아도 버린바 되지 아니하며 거꾸러뜨림을 당하여도 망하지 아니한다” 원어(디오코메노이  알 우크 엘카탈레이포메노이, 카타발로메노이 알 우크 아폴뤼메노이)대로 번역하면 “구박을 받아도 포기하지 아니하며, 아래로 내던져져도 완전히 부서지지 아니한다”

 

오늘 설교제목이 입니다. 영어글자로 No OTL입니다. 그런데 OTL의미가 무엇일까요. OTL은 글자가 아니라 그림을 글자로 형상화한 이모티콘입니다. 이 형상은 한 사람이 좌절하여 엎디어 있는 모습니다. 바로 이런 모습입니다. 백년전 활동하던 독일 조각가로 빌헬름 렘브루크(Wilhelm Lehmbruck)라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렘부루크는 독일의 로댕이라고 불려진 당시 유명한 조각가입니다. 그는 1915년에 <좌절한 남자>라는 조각을 하였는데 그가 경험한 1차 세계 대전의 고통이 얼마나 크고 절망적이었는지, 그 조각은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맨몸, 가늘고 긴 형상의 젊은 남자가 머리를 바닥에 붙인 채 절망 속에 괴로워하고 있습니다. 인간이 맨 밑바닥에 처박힌 상태가 이런 모습 아닐까 싶습니다. 더는 나아갈 곳도, 일어설 기운도 없는 상태, 그 처절한 몸부림이 이 거대한 조각 안에 고스란히 담겨 있습니다. 이 절망과 좌절의 형상은 몇 년 전부터 인터넷상에 자주 등장하는 '좌절금지'라는 이모티콘의 남자 모습과 꽤 많이 닮았습니다.  이 이모티콘은 일본 애니메이션 영화감독 미래소년 코난으로 유명한 미야자키 하야오(宮崎駿, Miyazaki Hayao)의 지브리 스튜디오 앞에 교통 표지판처럼 붙어 있는 '좌절금지' 팻말이었습니다. 미야자키 하야오가 렘브루크의 <좌절한 남자>를 보고 그 형상을 착안했는지의 여부는 알 수 없지만, 좌절하여 쓰러저 일어서지 못하는 인간의 모습을 OTL 이라는 영문자로 간결하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挫折禁止>라고 글자를 새겨 넣었습니다.

 

한 젊은이가 택배회사에 취직하였습니다. 어느날  한집에 30kg짜리 소금이 10자루를 배달하게 되고 또 그 옆집도 같이 주문했는지 5자루를 배달하게 되었습니다. 같은 방향으로 갈 물건이라 배달 차량에 실어야 하는데 배송코스에 먼저 배달할 물품이 있어 자동차 중간에 올겨 실어야 했습니다. 그래서 소금 15자루를 차량 중간에 실고 또 내리고 하다가 그만 손목이 아파 병원엘 갔는데 주사한방 놔주고 약 처방받아 쓴 비용이 20,700원 이었습니다. 이 젊은이는 과연 내기 이 택배회사에 계속 다녀야 하나 마나에 고민하다가 좌절감에 빠졌습니다. 한겨레경제사회연구원이 전국의 만 19~34살 1500명을 대상으로 벌인 ‘청년 의식 조사’를 보면, ‘우리 사회는 노력에 따른 공정한 대가가 제공된다’는 응답이 13.9%, ‘공정한 대가가 제공되지 않는다’는 답변이 86.1%로 나타났습니다. 응답자의 65.1%가 ‘우리 사회는 한번 실패하면 다시 일어서기 어렵다’고 답했고, ‘다시 일어설 수 있다’는 34.9%에 불과했습니다. 또 ‘열심히 일하면 더 나은 계층으로 올라갈 수 있다’는 응답은 22.7%에 그쳤고, ‘다시 올라갈 수 없다’는 응답이 77.3%였습니다. 오늘날 우리 청년들의 좌절감이 얼마나 큰지 너무나 가슴 아픈 현실입니다. 그래서 좌절합니다.

 

서울에 차를 가지고 다녀보면 참으로 괴롭습니다. 꽉 막힌 서울 간선도로. 우측으로 빠지려고 했지만, 쉽지 않은 상황입니다. 우측에서 차량이 연이어 달려와 빈틈을 주지 않습니다. 방향지시등을 켰지만, 우측 뒤에서 달려오던 차량은 경적을 울리며 더 빠른 속도로 질주해 옵니다. 겨우 원하는 차선에 진입해 한숨 돌렸지만, 경적을 울리던 뒷 차량이 순식간에 앞을 막아서며 다시 신경질적으로 경적을 울립니다. 최근 급속히 늘어나고 있는 ‘보복운전’의 한 모습입니다. 2015년 4월부터 경찰청이 보복운전 신고 건수를 집계한 결과 2015년 4~6월까지 100건도 채 되지 않았던 보복운전 신고 건수가 2016년 2~3월에는 약 500건으로 급증하였다고 합니다. 아파트 층간소음 분쟁으로 살인을 서슴치 않는 흉흉한 소식도 들립니다. 상대방이 무시하는 것 같아서 무분별한 폭행을 저질렀다는 사건도 끊이지 않습니다. 최근 2~3년 동안 한국 사회는 분노조절장애라는 집단 병리 현상을 겪고 있다고 합니다. 왜 이런 분노조절장애현상이 일어나고 있는 것입니까? 

 

예일 대학의 심리학자들에 의해 제안된 ‘좌절-공격 이론’이란 것이 있습니다. 핵심은 자신이 추구하려던 목표가 좌절되었을 때 공격적이 된다는 것입니다. 좌절로 인해 유발된 공격이 내부로 향하면 자기 학대나 우울증으로, 외부로 향하면 좌절을 불러온 사람 또는 단순히 자기 앞에 있는 대화 상대에 대한 공격적 행동과 발언으로 나타난다는 것입니다.
대학 입시에서 낙제한다든지, 시험에서 좋지 않은 성적을 거두지 못하는 등 어떠한 성취상황에서의 좌절, 좋아하는 여자에게 데이트 신청을 했다가 거절당하는 대인관계상황에서의 좌절, 자신의 의사와 상관없이 경험할 수 있는 사회 경제적 좌절 까지 모두 공격동기를 유발시키는 원인이 된다는 것입니다.   지금 우리 사회는 모든 사람들이 온통 좌절감 억울함, 주체성을 깎아내리는 무시받는 느낌으로  분노가 사회적으로 높아지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고 허태균 고려대 심리학과 교수는 말하고 있습니다.

 

다시 질문하면, 왜 좌절합니까? 자신의 인생이 실패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실패는 죄악이 아닙니다. 실패는 특별히 잘못된 사람만 하는 것이 아닙니다. 실패는 누구나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실패에 대하여 어떤 태도를 가져야 하는가요? 첫째로 기독교인은 실패를 두려워하지 말아야 합니다. 둘째로, 기독교인은 실패를 부끄러워하지 말아야 합니다. 실패는 누구나 경험하는 삶의 한 부분입니다. 두려워하거나 부끄러워 할 필요가 없습니다. 셋째로, 기독교인은 실패를 현실로 인정해야 합니다. 과거에 매이지 않고 미래를 보기 위해서 현실을 받아 드리고 인정해야 합니다. 기독교인은 실패를 통해 사람의 한계와 하나님의 뜻을 배워야 합니다. "형통한 날에는 기뻐하고 곤고한 날에는 생각하라" (전 7:12)라고 하셨습니다. 실패는 없습니다. 잠시 시간이 늦처 질뿐입니다. 그리고 그 늦처 진 시간은 바로 하나님을 만나는 시간입니다. 그러므로 믿는 사람은 좌절하지 않습니다. 혼자 방황하고, 혼자 고민하고, 혼자 헤맬 때가 어렵지 하나님과 더불어 가면 고난의 길을 능히 헤쳐 나올 수 있습니다. 우리는 답답한 일을 당하여도 낙심하지 않습니다. 즉 마음고생이 있어도 낙심하지 않는 것은 하나님이 함께 하시기 때문입니다. 마음고생이 있을 때 하나님께 기대십시오. 방황할 시간이 있으면 하나님께 부르짖으십시오. 기도가 끝나고 “아멘” 하며 일어날 때 신비한 하나님의 평화가 여러분의 마음과 생각을 이끌어 줄 것입니다. 올 때는 무거운 걸음으로 왔지만 마치고 돌아갈 때는 가벼운 발걸음이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좌절 금지입니다.
우리 기독교인은 압박을 당하여도 억압되지 아니하며, 좌절금지입니다. 환란에 빠져도 모든 희망을 포기하지 아니하고 구박을 받아도 포기하지 아니하며, 아래로 내던져져도 완전히 부서지지 아니 합니다. 좌절금지입니다.

 

시37:24에 "그는 넘어지나 아주 엎드러지지 아니함은 여호와께서 손으로 붙드심이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한마디로 좌절금지입니다. 잠언24:16에 "의인은 일곱 번 넘어질지라도 다시 일어나려니와"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한마디로 좌절금지입니다.
왜 사람들이 실패한 다음에 절망하는 줄 아십니까? 지금의 실패가 영원한 실패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낙심하고 좌절하는 것입니다. 지금의 실패가 오늘의 고통이 영원한 실패요 영원한 고통이라고 생각하면 용기와 희망을 가질 수 없습니다. 그런데 우리 하나님은 어제 넘어졌으나 오늘 다시 일으켜주십니다. 지금은 실패했으나 내일 다시 성공케 하시는 분임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이런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믿었기에 아브라함도 다시 일어났습니다. 야곱도 요셉도 모세도 다윗도 다시 일어나서 위대한 인생과 축복된 인생을 살았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믿는 사람은 좌절금지입니다.
“그래, 맞아 난 이제부터 좌절금지야!”

 

이런 복음성가를 다 아시지요.
 "주님여 이 손을 꼭잡고 가소서

약하고 피곤한 이 몸을

폭풍우 흑암속 헤치사 빛으로

손잡고 날인도 하소서.

 

인생이 힘들고

고난이 겹칠 때

주님여 날 도와주소서

외치는 이 소리 귀기울이시사

손잡고 날 인도 하소서" 


우리는 이것을 알아야 합니다. 기독교인의 사전에는 좌절이란 단어가 없다란 것입니다. 좌절은 기독교인들의 말이 아닙니다. 기독교인들은 좌절이란 말 자체를 모릅니다. 왜요 좌절해 본적이 없기 때문입니다. 넘어질 때도 있고 억압받을 때도 있고 온갖 제상 고난당할 때가 아무리 많다고 해도 기독교인들은 그 때가 하나님의 손을 붙잡을 때요 그 때가 주님의 인도하심을 받게 될 때이지 좌절하여 웅크리고 괴로워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기독교인은 좌절금지입니다.

 

만일 여러분의 나이를 뒤로 돌릴 수 있다면 어떤 나이 때로 돌아가고 싶습니까? 대부분의 사람들이 20대의 나이로 돌아가고 싶다고 한답니다.  20대는 인생의 황금기입니다. 그런데 20대 살아가는 청년들은 그것을 모릅니다. 그래서 그 황금기를 허송세월하는 젊은이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래서 어영부영하다가 20대가 지나고 30대에 접어들면 사람들이 ‘아이고, 20대가 지나갔구나.’하며 놀란답니다. 20대가 씨 뿌릴 때라면 30대는 밭을 잘 갈무릴할 때입니다. 밭에 잡초도 뽑고 자갈도 제거하고 비료도 주고 인생이 잘 자라 열매 맺도록 열심히 일하는 때입니다. 요즈음 어린아기 첫 번째 반항기가 4살때라고 하는데 인생의 40대가 되면 반항기에 접어듭니다. 미래에 대한 불확실성에대해 불안과 염려로 마음이 급해집니다. 젊은 청년들을 보면  ‘저것들은 왜 저리 젊어?’하며 질투하고 미워한답니다. 모 교수의 말에 의하면, 학생들의 잘못을 제일 많이 지적하고 학생들을 제일 많이 꾸짖고 들볶는 교수는 대개 40대 교수들이랍니다. 그런데 50대가 되면 20대에 대한 미움이 흠모로 변한답니다. 그래서 주름살 수술도 하고 지방을 없애는 수술도 하고, 다리나 가슴에 실리콘 같은 것을 넣는 수술도 한답니다. 만일 박금혜대통령이 그런 수술을 하였다면 이해해 주어야 합니다. 그리고 50대가 되면 여자나 남자나 옷도 고운 것을 입는답니다. 여자들의 옷이 40대보다 더 화려해지고 남자들은 빨간 넥타이를 즐겨 맨답니다. 그러다 60대가 되면 아무리 애써도 20대처럼은 안 된다는 것을 깨닫고 철이 든답니다. 그래서 60대를 넘고 70대를 넘으면 20대처럼 되려고 노력하지 않는답니다. 영국 격언에 “젊음은 일생에 한 번밖에 없다(Youth comes only once in a lifetime).”라는 말이 있습니다. 청춘은 다시 오지 않는 것입니다. 한 번 가면 다시 오지 못하는 청춘입니다. 그래서 70, 80이 넘으면 ‘아, 이제 나는 시들어 가는구나. 내 인생은 나래를 접는구나.’하며 축 처져 살다가 세상을 떠나는 것입니다. (지용수목사설교중)


그런데 이것을 알아야 합니다. 바울 선생님은 결코 자신 인생이 늙어간다고 좌절감에 빠져 있지 않았습니다.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우리가 낙심하지 아니하노니 겉 사람은 낡아지나 우리의 속사람은 날로 새로워지도다.”(고후4:16)


이 말씀에서 ‘낡아지나’란 말씀이 개역성경에는 ‘후패하다’란 말로 번역하였는데 오히려 개역성경번역이 원어에 가깝다고 하겠습니다. ‘낡아지다’란 말 보다는 좀 더 강한 의미로 쓰였습니다. 원어로 ‘디아프데이로’인데 이 뜻은 ‘완전히 부패하다. 못쓰게 되다.“입니다. 그야말로 아무짝에도 쓸데가 없다하더라도 아니요 세상에 쓸모없는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개똥도 쓸데가 있습니다. 동의보감에 보면 조선시대에 개똥을 태워서 술에 섞어 먹었다고, 2010년 9월 미국 뉴잉글랜드 매사추세츠주(州) 케임브리지 지역의 스파크 공원 가로등 불을 키는 이색 친환경 프로젝트로 이 공원에 설치된 특수 장치는 프로젝트 예술가 매튜 모조타가 메사추세츠공과대학교(MIT)와 케임브리지 시의 도움을 받아, 애완동물의 배변을 특수 미생물 분해 봉지에 담은 후 이 장치 안에 넣으면 메탄 압축기와 무산소 박테리아를 통해 배변이 분해돼 메탄가스로 바뀌게 됩니다. 이렇게 생성된 메탄가스는 튜브를 타고 공원 램프로 올라가 불을 켜는데 사용된다고 합니다.
냇가에 널려진 돌맹이도 다윗의 손에 들어가니 골리앗을 넘어뜨리었습니다. 그 어떤 환경에 있던지 간에 하나님의 손에 붙잡힌 사람은 세상에 그 누구도 부러워 할 놀라운 일을 할 수가 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하나님은 망가진 겉을 보지 않으시고 낡아진 겉을 보지 않으시고 날마다 새로워지는 우리의 속을 보시는 하나님이시라 우리의 속사람이 날로 새로워지기만 하면 날로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항상 오늘 좌절금지입니다.

 

김C 란 가수겸 작곡가가 있지요. 김C가 부른 좌절금지란 노래가 있습니다. 그 가사중에 이런 가사가 있습니다.

< 하루해가 저 물어요 오늘하루 어땠나요
자고 나면 내일 일까 아니에요 오늘이죠
다시 또 새날이 돌아와 아무렇지도 않을꺼에요
이 음악이 멈추어도 당신들은 춤을 춰요
오늘 웃고 오늘 울고 오늘 살고 오늘 죽고
우리는 언제나 오늘을 살아요>


《You Raise Me Up》(유 레이즈 미 업)이란 노래를 아십니다. 2004년 시크릿 가든의 롤프 뢰블란(Rolf Løvland)이 편곡을 하고, 브렌던 그레이엄(Brendan Graham)이 가사를 쓴 노래입니다. 전 세계적으로 수백명의 가수들이 이 노래를 불렀고 전 세계인들이 부르는 가장 유명한 노래입니다. 최근에 Joshua Winslow Groban(1981년 02월 27일생, 미국 로스앤젤레스)라는 가수가 이 노래를 부러 다시 새롭게 힛트 시키고 있습니다.

그 가사의 일부가 다음과 같습니다.

 

내가 힘들어 내 영혼이 너무 지칠 때에
괴로움이 밀려와 내 마음이 무거울 때에
당신이 내 옆에 와 앉으실 때까지
나는 고요히 이 곳에서 당신을 기다립니다.

당신이 일으켜 주시기에 나는 산 위에 우뚝 설 수 있고
당신이 일으켜 주시기에 나는 폭풍의 바다 위를 걸을 수 있습니다.
당신의 어깨에 기댈 때에 나는 강해지며
당신은 나를 일으켜 나보다 더 큰 내가 되게 합니다. .....................

When I am down and, oh, my soul, so weary;
When troubles come and my heart burdened be;
Then I am still and wait here in the silence,
Until you come and sit awhile with me.

You raise me up, so I can stand on mountains;
You raise me up to walk on stormy seas;
I am strong when I am on your shoulders;
You raise me up to more than I can be........................

 

“우리가 항상 예수 죽음을 몸에 짊어짐은 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 몸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10절) 하였습니다. 우리 육체의 마지막 호흡은 죽어 없어지는 패배의 순간이 아니라 부활과 영생으로 돌입하는 승리의 시간입니다. 죽음마저도 부활과 영광으로 들어가는 문이라면, 인생의 나머지는 주님의 은혜로, 주님과 함께 넉넉히 이겨낼 수 있지 않습니까? 그러므로 라온코이노니아 우리의 인생의 길에 서있는 표식판이 있으니 곧 좌절금지입니다.


이 좌절금지표를 봅시다. 여기 좌절금지건이 있습니다. 이 선이 무슨 선일까요? 이제부터 다시 시작이다.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다시 시작하는 출발선입니다. 100미터 경주할 때 선수들이 이런 자세를 취합니다. 이 선에서 다시 시작하는 것입니다. 좌절금지는 희망시작입니다

 

그러므로 라온코이노니아는 나마다 하나님과 함께 살아갑니다. 무엇이 필요합니까? 지혜, 건강, 용기, 평화, 사랑, 용서, 인내 여러분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세요. “하나님 제가 여기 있나이다. 저를 도아주소서!” 그래서 사도 바울의 고백처럼 따라서 합시다. “우리가 사방으로 우겨쌈을 당하여도 싸이지 아니하며 답답함을 당하여도 낙심하지 아니하며 박해를 받아도 버린바 되지 아니하며 거꾸러뜨림을 당하여도 망하지 아니한다”라고 당당히 말할 수 있기 바랍니다. 우리에게는 오직 좌절금지입니다. 좌절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여러분에게 힘과 은혜주시고 이것을 깨닫게 하셔서 주님과 함께 인생의 수많은 도전들과 압력들을 이기며 살아가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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