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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병호목사의 교회이야기

전병호 목사의 설교



2017년 1월 29일 주일아침 예배  빌 2: 5-8  예덕선생


지금부터 250년 전 연암 박지원(燕巖 朴趾源  1737. 영조 13-1805. 순조 5) 선생이 살고 있었습니다.  그의 생활은 매우 곤궁하였습니다. 그는 탑골공원(파고다공원) 인근 오두막집에 살면서 굶기를 밥 먹듯이 하였습니다. 어느날 후에 조선 4대 문필가의 한 사람으로 추사 김정희의 스승이기도한 박제가(朴齊家, 1750년 11월 5일-1815년 4월 25일)가 18살 소년으로  다 쓰러져가는 박지원의 사립문을 두드렸습니다. 박지원은 가슴을 풀어헤치고 망건도 쓰지 않은 맨상투를 너덜거리며 뛰어나왔습니다. 그리고 두 손을 마주잡고 방 안으로 맞아들였습니다. 두 사람은 나이나 신분의 차이를 뛰어넘어 문학과 세상 이야기로 시간 가는 줄 몰랐습니다. 저녁 먹을 때가 되자 박지원은 밥을 지어 들여왔습니다. 차 끓이는 주전자에 밥을 해서는 물 담는 옹기에 퍼 담아 들여왔습니다. 두 사람은 맨바닥에서 밥을 먹고 난 뒤 밤을 새우면서 이야기꽃을 피웠습니다. 이처럼 박지원은 격이 없이 상대가 양반이던 상놈이던 행랑아범이던 길거리 걸인이던 함께 이야기를 나누며 사귀었습니다. 그래서 그의 초가집에 많은 사람들이 찾아 와 밤새는 줄 모르고 시문을 논하며 시국에 대해 이야기꽃을 피웠습니다. 박제가는 박지원의 제자가 되었습니다. 박지원은 고루한 유교사상을 개혁하여야 우리나라가 부강한 나라가 될 수 있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던 선각자 이였습니다. 그런 사상을 실학이라고 합니다. 그는 이 실학의 대표적인 인물이었습니다. 그의 집에는 홍대용 이덕무 박제가 이서구 서상수 유득공등 당시 시대를 개혁하려는 많은 인물들이 찾아와 그들을 역사에서는 북학파라고 하였습니다.
그는 뒤늦게 1791년 54세 때에 한성부 판관 1792년 1797년 면천군수 안의현감 1800년 양양 부사 등 여러 관직에 있었지만 늘 그는 어려운 생활을 벗어나지 못했습니다. 특히 그는 당시 천주교라는 서양종교 사상에 관심을 보이고 서양의 새로운 문물과 과학에 심취하였습니다. 그의 대표적인 책으로 열하일기가 있는데 이 글에서 강조하는 것은 중국을 여행하면서 보고들은 것을 통해 청나라의 번창한 문물을 받아들여 낙후(落後)한 조선의 현실을 개혁하고자 하였습니다. 특히 경제 문제에서는 토지개혁정책·화폐정책·중상정책(重商政策) 등을 제창했으며 현실의 문제를 개혁하지 않고는 미래의 비전을 찾기 힘들다는 점을 강조하였습니다.

박지원은 “방경각외전”이란 책에 아홉 편의 한문 단편 소설을 썼는데 그 두 번째에 “예덕선생전(穢德先生傳)”이 있습니다.  여기서 ‘예穢’는 한문 뜻으로 ‘더러울 예 추한 예’입니다. 

이 작품에 등장하는 인물은 선귤자와 자목뿐입니다. 선귤자(蟬橘子)는 선생이고 자목(子牧)은 그의 제자입니다.  주인공 예덕 선생은 그 모습을 한 번도 나타나지 않습니다.
선귤자는 당대의 학자로 매일 똥을 푸는 직업의 엄 행수를 예덕 선생이라 부릅니다. 그런데 제자 자목은 그런 하찮은 사람과 친하게 지내는 선생님을 못마땅하게 생각하고 그런 사람을 선생이라고 부르는 것에 대해 항의를 합니다. 선귤자는 그런 자목에게 참다운 친구란 어떤 사람인가를 설명하며 엄행수를 왜 예덕선생이라고 부르는가에 대해 소개를 합니다. 

〈박지원 편지〉, 『근묵』, 1781, 초서, 34.8×50.3㎝, 성균관대학교박물관. 서울에 있던 박지원이 새해를 맞아 친형인 박희원(朴喜源)에게 보낸 편지. 내용은 새해 인사 및 선물, 주변인들의 근황 등에 대한 것이다.

내용 중의 몇 구절을 소개하겠습니다.

<嚴行首는
里中之賤人役夫               마을에서 가장 비천한 막일꾼으로
下流之處 而恥辱之行也.     열악한 곳에 살면서 남들이 치욕으로 여기는 일을 하고 있는 사람인데

                                   저 엄 행수란 사람은 일찍이 나에게 알아 달라고 요구하지 않았는데도
吾常欲譽之而不厭也.        나는 항상 그를 예찬하고 싶어 못 견뎌했지.
其飯也頓頓 其行也伈伈 (*頓(돈):조아리다. 伈(심):두려워하다.) 그는 밥을 먹을 때는 끼니마다 착실히 먹고,     길을 걸을 때는 조심스레 걷고
其睡也昏昏 其笑也訶訶    졸음이 오면 쿨쿨 자고, 웃을 때는 껄껄 웃고 ,
其居也若愚                   그냥 가만히 있을 때는 마치 바보처럼 보인다 네.
築土覆藁 而圭其竇* (藁=槀(고):마르다. 圭(규):홀, 모서리. *모서리에 구멍을 내고)  흙벽을 쌓아 풀로 덮은 움막에 조그마한 구멍을 내고
入則蝦背 眠則狗喙         들어갈 때는 새우등을 하고 들어가고 잘 때는 개처럼 몸을 웅크리고 잠을 자지만
朝日熙熙然起 荷畚入里中餘溷 .(*畚(분):삼태기. 溷(혼):뒷간, 어지럽다.)  아침이면 개운하게 일어나 삼태기를 지고 마을로 들어와 뒷간을 청소하지.
歲九月天雨霜 十月薄氷   9월에 서리가 내리고 10월에 엷은 얼음이 얼 때 쯤이면
圊人餘乾 皂馬通(말똥)(*圊(청):뒷간)  뒷간에 말라붙은 사람똥, 마구간의 말똥,
閑牛下(쇠똥) 塒落鷄狗鵝矢    외양간의 소똥, 홰 위의 닭똥, 개똥, 거위똥,
苙豨苓․ 左盤龍(人糞)․ 翫月砂)․ 白丁香     돼지똥, 비둘기똥, 토끼똥, 참새똥을
取之如珠玉 不傷於廉    주옥인 양 긁어 가도 염치에 손상이 가지 않고,
獨專其利 而不害於義    그 이익을 독차지하여도 의로움에는 해가 되지 않으며,
貪多而務 得人不謂其不讓. 욕심을 부려 많은 것을 차지하려고 해도 남들이 양보심 없다고 비난하지 않는다네.
唾掌揮鍬 磬腰傴傴 (*鍬(초)가래. *傴(구)구부리다) 그는 손바닥에 침을 발라 삽을 잡고는
若禽鳥之喙也.            새가 모이를 쪼아 먹듯 꾸부정히 허리를 구부려 일에만 열중할 뿐,
雖文章之觀 非其志也.  아무리 화려한 미관이라도 마음에 두지 않고
雖鍾鼓之樂 不雇也.     아무리 좋은 풍악이라도 관심을 두는 법이 없지.
夫富貴者 人之所同顧也.   부귀란 사람이라면 누구나 원하는 것이지만
非慕而可得 故不羨也.  바란다고 해서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기에 부러워하지 않는 것이지.
譽之而不加榮            따라서 그에 대해 예찬을 한다고 해서 더 영예로울 것도 없으며
毁之而不加辱.           헐뜯는다 해서 욕될 것도 없다네.
枉十里蘿蔔 箭串菁     왕십리(枉十里)의 무와 살곶이〔箭串〕의 순무,
石郊茄窳․水瓠․胡瓠    석교(石郊)의 가지 · 오이 · 수박 · 호박이며
延禧宮苦椒․蒜․韭․葱․薤  연희궁(延禧宮)의 고추 마늘 부추 파 염교며
靑坡水芹 利泰仁土卵 田用上上 청파(靑坡)의 미나리와 이태인(利泰仁)의 토란들은 상상전(上上田)에 심는데,
皆取嚴氏糞 膏沃衍饒  모두 엄씨의 똥을 가져다 써야 땅이 비옥해지고 많은 수확을 올릴 수 있으며,
歲致錢六千.              그 수입이 1년에 6000냥이나 된다네.
朝而一盂飯 意氣充充然 하지만 그는 아침에 밥 한 사발이면 의기가 흡족해지고
及日之夕 又一盂矣.  저녁이 되어서야 다시 한 사발 먹을 뿐이지.
勸之肉 則辭曰        남들이 고기를 먹으라고 권하였더니
“下咽則 蔬肉同飽矣.    목구멍에 넘어가면 푸성귀나 고기나 배를 채우기는 마찬가지인데
奚以美爲?”             맛을 따져 무엇 하겠느냐고 대꾸하고,
勸之衣 則辭曰        반반한 옷이나 좀 입으라고 권하였더니
“衣廣袖 不閑於體    넓은 소매를 입으면 몸에 익숙하지 않고
衣新不能負塗矣.”    새 옷을 입으면 더러운 흙을 짊어질 수 없다고  하더군.
歲元日朝 始笠帶衣屨 해마다 정월 초하루 아침이나 되어야 비로소 의관을 갖추어 입고
遍拜其隣里           이웃들을 두루 찾아다니며 세배를 하는데
還乃衣故衣 復荷糞入里中 세배를 마치고 돌아오면 곧바로 헌 옷으로 갈아입고 다시 삼태기를 메고 마을 안으로 들어간다네.
如嚴行首者           엄 행수와 같은 이는
豈非所謂穢其德 而大隱於世者耶? 아마도 ‘자신의 덕을 더러움으로 감추고 세속에   숨어 사는 대은(大隱)’이라 할 수 있겠지.
.............
夫嚴行首 負糞擔溷以自食 可謂至不潔矣. 엄 행수는 지저분한 똥을 날라다 주고 먹고살고  있으니 지극히 불결하다 할 수 있겠지만
然而其所以取食者는 至馨香  그가 먹고사는 방법은 지극히 향기로우며,
其處身也는 至鄙汚나   그가 처한 곳은 지극히 지저분하지만
而其守義也는 至抗高   의리를 지키는 점에 있어서는 지극히 높다 할 것이니,
推其志也는 雖萬鍾可知也. 그 뜻을 미루어 보면 비록 만종의 녹을 준다 해도  그가 어떻게 처신할는지는 알 만하다네.
...............
故吾於嚴行首 師之云乎 그래서 나는 엄 행수에 대하여 스승으로 모신다고 한 것이네.
豈敢友之云乎?            어찌 감히 벗하겠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
故吾於嚴行首 不敢名之 이러한 이유에서 나는 엄 행수의 이름을 감히 부르지 못하고
而號 曰穢德先生.         예덕선생이라 부르는 것일세.” ?

   
마을에서 가장 비천한 막일꾼으로 열악한 곳에 살면서 남들이 치욕으로 여기는             분뇨  퍼 나르는 일을 하고 있는 사람으로, 저 엄 행수란 사람은 일찍이 나에게 알아 달라고 요구하지 않았는데도 나는 항상 그를 예찬하고 싶어 못 견뎌했지. 그는 밥을 먹을 때는 끼니마다 착실히 먹고, 길을 걸을 때는 조심스레 걷고 졸음이 오면 쿨쿨 자고, 웃을 때는 껄껄 웃고 ,그냥 가만히 있을 때는 마치 바보처럼 보인다네. 흙벽을 쌓아 풀로 덮은 움막에 조그마한 구멍을 내고 들어갈 때는 새우등을 하고 들어가고 잘 때는 개처럼 몸을 웅크리고 잠을 자지만 아침이면 개운하게 일어나 삼태기를 지고 마을로 들어와 뒷간을 청소하지. 9월에 서리가 내리고

10월에 엷은 얼음이 얼 때쯤이면 뒷간에 말라붙은 사람 똥, 마구간의 말똥, 외양간의 소똥, 홰 위의 닭똥, 개똥, 거위똥, 돼지똥, 비둘기똥, 토끼똥, 참새똥을 주옥인양 긁어가도 염치에 손상이 가지 않고, 그 이익을 독차지하여도 의로움에는 해가 되지 않으며, 욕심을 부려 많은것을 차지하려고해도 남들이 양보심 없다고 비난하지 않는다네. 그는 손바닥에 침을 발라 삽을 잡고는 새가 모이를 쪼아 먹듯 꾸부정히 허리를 구부려 일에만 열중할 뿐, 아무리 화려한 미관이라도 마음에 두지 않고 아무리 좋은 풍악이라도 관심을 두는 법이 없지. 부귀란 사람이라면 누구나 원하는 것이지만 바란다고 해서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기에 부러워하지 않는 것이지. 따라서 그에 대해 예찬을 한다고 해서 더 영예로울 것도 없으며  헐뜯는다 해서 욕될 것도 없다네. 왕십리(枉十里)의 무와 살곶이〔箭串의 순무, 석교(石郊)의 가지 오이 수박 호박이며  연희궁(延禧宮)의 고추 마늘 부추 파 염교며 청파(靑坡)의 미나리와 이태인(利泰仁)의 토란들은 상상전(上上田)에 심는데, 모두 엄씨의 똥을 가져다 써야 땅이 비옥해지고 많은 수확을 올릴 수 있으며,  그 수입이 1년에 6000냥이나 된다네.  하지만 그는 아침에 밥 한 사발이면 의기가 흡족해지고 저녁이 되어서야 다시 한 사발 먹을 뿐이지. 남들이 고기를 먹으라고 권하였더니 목구멍에 넘어가면 푸성귀나 고기나 배를 채우기는 마찬가지인데  맛을 따져 무엇 하겠느냐고 대꾸하고, 반반한 옷이나 좀 입으라고 권하였더니 넓은 소매를 입으면 몸에 익숙하지 않고  새 옷을 입으면 더러운 흙을 짊어질 수 없다고  하더군.
해마다 정월 초하루 아침이나 되어야 비로소 의관을 갖추어 입고 이웃들을 두루 찾아다니며 세배를 하는데 세배를 마치고 돌아오면 곧바로 헌옷으로 갈아입고 다시 삼태기를 메고 마을 안으로 들어간다네. 엄행수와 같은 이는 아마도‘자신의 덕을 더러움으로 감추고 세속에 숨어 사는 대은(大隱)’이라 할 수 있겠지. 엄 행수는 지저분한 똥을 날라다 주고 먹고살고  있으니 지극히 불결하다 할 수 있겠지만  그가 먹고사는 방법은 지극히 향기로우며,  그가 처한 곳은 지극히 지저분하지만 의리를 지키는 점에 있어서는 지극히 높다 할 것이니, 그 뜻을 미루어 보면 비록 만종의 녹을 준다 해도 그가 어떻게 처신할는지는 알 만하다네. 그래서 나는 엄 행수에 대하여 스승으로 모신다고  한 것이네. 어찌 감히 벗하겠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  이러한 이유에서 나는 엄 행수의 이름을 감히 부르지 못하고 예덕선생이라 부르는 것일세.”

선귤자의 이야기를 통해 엄 행수는 아무런 요량 없이, 타고난 분수를 기꺼이 받아들이면서 사람이 마땅히 지켜야 하는 예를 지키며 묵묵히 분뇨를 퍼 나르는 일에 최선을 다합니다. 그것은 자신이 천한 직업에 대한 무기력함에서 나온 행동도, 상놈의 삶을 살아가는 삶에 대한 환멸도 아닙니다. 오히려 세상을 담담하게 인정하는 의연한 모습으로 오히려 그의 당당함을 엿볼 수 있습니다. 그러니 엄 행수야말로 더러움 속에서 덕행을 행하니 세상에서 깨끗하게 사는 사람입니다. 선귤자는 말합니다. “엄 행수의 하는 일이 비록 불결하다지만 그의 삶은 지극히 향기로우며, 그가 처한 곳은 더러우나 의를 지킴은 꿋꿋하다”고.....
예덕 선생은 비록 똥을 져 나르는 천한 역부의 우두머리지만 새해 아침 의복을 깨끗이 입고 웃어른들에게 세배를 다닐 줄 안다는 예의도 그렇지만, 그보다 간과할 수 없는 것은 자기 직분에 충실히 임한다는 점입니다. 엄 행수는 똥을 져서 밥을 먹고 있으니 지극히 불결하다 하겠습니다. 그러나 그가 밥을 얻을 수 있는 까닭을 따지자면 지극히 향기롭다고 하겠습니다. 그의 몸가짐은 더럽기 짝이 없지만, 그 옳음을 지키는 것은 지극히 높습니다. 이 점에서 보면“깨끗한 것에도 더러운 것이 있고 더러운 것에도 깨끗한 것이 있을 뿐이다(潔者有不潔。而穢者不穢耳)”라고 선귤자는 제자 자목에게 분하면서 엄행수를 감히 이름으로 부르지 못하고 예덕선생이라고 부른다고 말합니다.

 

왜 예덕선생을 길게 소개하는가 하면 다만 박지원 선생의 삶에 대한 글을 읽다가 박지원선생의 드높은 기개와 고결한 삶이 존경스럽고 그의 예덕선생이란 한문단편 소설을 읽다가  묵상하는 중에, ‘아 그렇구나. 예수님도 예덕선생님이셨구나’하는 하나님의 은혜로운 말씀이 저에게 섬광처럼 주어졌기 때문입니다.

요한복음 1:46에 나다나엘이 이런 말을 합니다.“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날수 있느냐?” 예수님의 제자 빌립이 친구 나다나엘에게 예수님에게 와서 그 말씀을 들어보라고 권하자 나다나엘의 반응이 뜨악(不愿意)합니다. 그것은 나사렛이란 동리에 대한 선입관 때문입니다. 당시 나사렛이란 곳은 가난뱅이, 그 시대의 천민이라 할 수 있는 막 노동자들이 사는 달 동리였기 때문입니다. 십여 년 전에 성지순례하면서 이 나사렛을 가보았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아버지인 요셉의 집이라는 곳을 가보았습니다. 지금은 그 위에 커다란 성당이 있습니다. 그 성당 안에 들어가면 그 옛날 요셉이 살던 곳이라는 데가 있는데 마치 토굴 같은 곳입니다. 땅을 파서 그 위에 천막을 얹어 살았다는 것입니다. 나다나엘 뿐 아니라 당시 율법사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이 그런 천한 동리 출신이란 것에 조롱을 하고 업신여겼던 것입니다. 어찌 메시야가 그런 곳에서 태어나신다는 것에 대해 인정할 수 없었습니다. 예수님의 출생신분은 당시 사람들에게 매우 천히 여겼던 목수의 자식이었고 태어난 곳도 허름한 마굿간 이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정말로 예수님은 천한신분으로 멸시천대 받을 그런 사람입니까? 절대로 아니라고 오늘 봉독한 빌립보서에서 바울선생은 힘주어 말합니다.

빌 2:6-8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 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

 

여러분이 믿는 하나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우선 하나님은 우주와 천지만물을 창조하신 분이십니다. 하나님은 무에서 유를 창조하신 분이십니다. 하나님은 창조를 위해서 피땀을 흘리며 일하신 것이 아니라 단지 말씀으로 창조하셨습니다. 빛이 있으라, 물은 한 곳으로 모이라, 하늘이 있으라고 말씀만 하시면 모든 것이 하나님이 말씀하신 대로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전능하신 분이십니다.

하나님은 우주를 창조하신 분이시므로 우주가 존재하기 전부터 존재하신 분이십니다. 그리고 지금까지 살아계시고, 앞으로도 영원히 살아계실 것입니다. 그 하나님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요 1:14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예수님은 하나님이십니다. 이것이 우리가 믿는 믿음입니다.


하나님이 참 사람으로 이 땅에 예수님으로 오셨습니다. 사람의 눈에 보이는 어떤 환상의 존재가 아닙니다. 그리고 그분은 참 사람으로 오셨지만 구름을 타고 있는 분도 아니요, 저 성곽이 높은 궁중에 계신 분도 아닙니다. 바로 “우리 가운데 거하시는 분”으로 오셨습니다.

“우리 가운데 거하신다”는 이 말은 원문에 ‘스케노어’로  “천막을 친다”라는 뜻으로 나와 있습니다. 이 말씀을 좀 더 쉽게 풀이하면 “하나님이 이 세상에 오셔서 아예 천막에 치시고 우리와 함께 먹고 마시면서 동거한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성경에서는 이 단어가 상당히 발전하면서 사용되는 예를 볼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구약시대에서 40년 동안 있을 때는 하나님이 성막이라고 하는 천막을 치고 계셨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살고 있는 그 회중 한가운데 천막을 치고 계셨는데 형상은 보이지 않고 순전히 천막만 보였습니다. 그러니까 천막이 하나님이 거기 계신다는 하나의 상징물이었습니다. 그래서 그 천막에서 이스라엘 사람들은 하나님을 만났고, 하나님의 말씀을 들었고, 그 다음에 하나님 앞에 제사를 지냈습니다. 그러나 보이는 것은 천막밖에 없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오심으로 인해서 이 세마포 염소가죽 수양가죽 해달가죽으로 덮인 천막이 무엇으로 바뀐 줄 아십니까? 육체로 바뀐 것입니다. 마치 천막 속에 함께 거하시듯이 몸을 입고 오신 예수님, 그분이 우리 중에 거하십니다. 이제 우리는 천막을 보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육체를 입고 나와 꼭 같은 모습으로 오신 하나님을 보는 데까지 이르렀습니다.

예수님은 육신을 입고 이 땅에 오셔서 사람들과 함께 사셨습니다. 하나님은 하늘에 계시면서 지고한 행복을 누리시고, 우리가 고통과 괴로움 많은 이 땅에 살고 있다는 것이 사람들의 생각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사람이 되어 이 땅에 오셨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와 함께 하고 계시다는 것을 보여주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시기 때문에 예수님이 탄생하실 때에 천사가 나타나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고 말씀하였습니다.  사람이 되신 예수님은 임마누엘의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이 사람이 되어 우리 가운데 오시어,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생애를 마치시고 하늘로 가실 때 “내가 세상 끝 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마 1:23且我常偕爾 이두 에고 멛 휘몬 에이미 파사스 타스 헤메라스)”고 말씀하셨습니다. 제자들에게 하나님께로 돌아갈 것을 말씀하시면서 가시면 보혜사 성령을 보내주시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성령의 오심은 주님이 우리와 함께 하신다는 증거입니다. 하나님은 언제나 우리를 떠나지 않고 함께 하십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이신 데 왜 사람이 되셔서 이 땅에 오셨을 가요? 우리와 영원히 함께 하시기 위해서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임마누엘이십니다. 우리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101가지 이야기라는 책에 이런 이야기가 나옵니다. 한 사람이 아내와 두 살 난 딸을 데리고 캠핑카로 멕시코 여행을 하였습니다. 마지막 날 밤 그들은 해변에 차를 세우고 즐겁게 지낼 생각을 했습니다. 그런데 그만 그 밤에 강도들이 앞 유리창을 깨고 물건을 훔치기 시작했습니다. 가장인 남편은 권총에 짓눌린 채 넘어져 있고, 아내와 딸은 담요를 둘러쓰고 오들오들 떨고 있었습니다. 강도 세 명은 여기저기 차안을 뒤지기 시작했습니다. 그 때 성경구절이 남편에게 떠올랐습니다. 원수의 목전에서 식탁을 베풀리라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상을 차리라는 생각이 자꾸 떠올랐습니다. 그는 도둑들이 물건을 제대로 찾지 못하는 것을 알고 물건을 가르쳐주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더 이상 줄 물건이 없자 이번에는 음식을 주어야 겠다는 생각을 하고 냉장고를 열고 사과를 꺼내 주었습니다.

이제 모든 것이 끝나고 강도들은 그들을 차에 태우고 외 딴 곳에 있는 자기들의 집으로 갔습니다. 그동안 그 가족은 그들을 손님으로 생각하고 노래를 부르며 여행하는 기분으로 함께 하여습니다. 마침내 그들은 자기들의 목적지에 도착했습니다. 그 남편은 이제 죽었구나 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그 강도가 당신은 좋은 사람이라면서 강도짓을 해서 미안하다고 사과했습니다. 그러나 너무 가난해서 이렇게 하지 않고는 살 수 없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신용카드, 지갑, 운전면허증을 돌려주고, 가다가 기름을 넣으라고 돈까지 돌려주었습니다. 그리고 인사를 했습니다. “아디오스. 잘가시오!” 아디오스는 “하나님이 함께 하시기를”이라는 축복의 인사입니다.

사람이 되신 하나님, 우리 주 예수님은 언제든지 여러분 곁에서 함께 하시고, 함께 고통도 겪고 함께 울고, 함께 웃고 계십니다.

여러분, 힘든 일이 많으십니까? 장래 불안하십니까? 두려움이 있으십니까? 아픔이 있습니까? 걱정하지 마십시오. 주님이 함께 하십니다. 주님이 이 땅에 사람으로 오신 것은 우리들과 함께 하면서 우리가 느끼는 것, 생각하는 것, 소망하는 것을 알고 우리와 함께 하시면서 우리의 모든 문제를 해결해 주시기 위해서입니다.

예수님을 예덕선생님이라 하겠습니다. 여기서 예는 예수 예입니다. 덕은 예수님의 아름답고 선하신 공생애를 말합니다(벧후1:3... 자기의 영광과 덕으로서 우리를 부르신 이). 당시 사람들은 예수님을 랍비또는 랍오니라 불렀습니다. 랍비는 선생님이란 의미입니다. 랍오니는 선생님을 더욱 높혀 부르는 말입니다. 지금 그 예덕 선생님으로 오신 예수님이 하나님 되시어서 우리 안에 계십니다. 그 예덕선생님이 우리 안에 있는 온갖 더러운 똥 같은 죄를 십자가의 보혈의 피로 다 치워주시고 우리를 정결케 해 주십니다.  그래서 바울선생은 예수님을 영접한 다음 자신의 온갖 더러운 죄를 똥같이 다 내버렸다고 하였습니다.

 

이제 예수님과 함께 예수님을 따르는 예수님의 제자는 선귤자의 자목 같은 못된 제자가 아니라 궂은일도 마다하지 않고 자기에게 주어진 일에 최선을 다해 이웃들을 섬기는 제자가 되어야 합니다.  오늘날 정치권에서 대통령 되겠다는 사람마다 개혁하겠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250년 전 선각자 박지원 선생이 꿈꾸는 개혁된 나라는  예덕선생 같은 분뇨 푸는 궂은일을 마다하지 않고 백성들과 고락을 함께 하는 지도자들이 있는 나라입니다.

 

우리는 분뇨보다 더러운 죄가 우리 안에 가득하여 매일 같이 죄를 짓고 살고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예덕선생 되시어 우리의 모든 죄를 십자가의 피로 깨끗이 씻어 주시는 줄 믿습니다.
우리 라온코이노니아에  예수님이 오시어 우리와 함께 하시고 우리를 도우시고 우리를 인도하여 주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세상사는 일에 염려하지 말고 걱정하지 말고 두려워하지말고 우리와 함께하시는 예수님이 우리를 인도해주심을 믿고 항상감뻐하며 범사에 감사하면서 살아가야 합니다. 또한 예수님과 함께하는 우리는 예수님의 제자로서 가족은 물론이요 어렵고 힘들어 하는 이웃들과 그들을 사랑하고 그들과 기쁨과 슬픔, 행복과 불행까지도 함께 나누는 곧 예덕선생님 곧 예수님의 섬김의 삶을 살아야 하겠습니다.   오늘도 하나님을 보지 못해서 믿지 못하는 사람들, 오늘도 고통 받는 사람들에게 가서 하나님이 여전히 지금 우리와 함께 계시다는 것을 보여주어야 합니다. 여러분의 삶으로, 여러분의 섬김으로 하나님이 함께 하심을 보여주십시오. 거기에 하나님의 은혜가 더 풍성해 지고,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날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와 축복이 여러분과 온 가정 간에 함께 하시기를 축원합니다. 

 

복음성가 “참말이야”를 부르겠습니다.(뽕짝 목사 작사/곡 : 구자억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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