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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병호목사의 교회이야기

전병호 목사의 설교



2017년 1월 15일 주일아침 예배 설교  고전 15:57-58  근심지목(根深之木)


요즘 우리들은 스스로 대통령 감이라고 나서는 정치인들의 말들을 듣고 있습니다. 그런데 왠일일까요? 말하는 사람들이 다같이 화난 사람들처럼 얼굴이 벌겋게 큰소리를 치며 주먹을 흔들며 소리 지르고 있습니다. 왜 화가나 있을까요? 사람들이 자신들을 찍어주지 않을까봐 화가 났는가? 그래서 더 그들의 입에선 과격한 발언들을 쏟아내고 있습니다. 그들의 말을 듣고 있자니 2017년을 살아갈 걱정이 앞섭니다. 나라를 근심하고 우리의 살림살이를 근심하고 한해를 산다는 것에 근심을 하게 됩니다. 백성들을 근심하게 하는 정치지도자가 대통령이 된들 나라가 온전할까 그래서 근심하게 됩니다.


지난 1월 10일 지난 8년 동안 미국대통령을 마감하면서 미국국민들에게 고별 연설한 오바마대통령의 연설문을 읽었습니다. 참으로 멋진 연설문이었습니다. 한마디로 감동 먹었습니다. 미국민들은 얼마나 자랑스러울까? 미국엔 이런 대통령이 있었는데 우리나라엔 최순실씨가 써준 연설문을 읽고 있는 대통령이 있다니 참으로 우리 국민들이 불상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런데 더 감동 먹은 연설이 있었습니다. 바로 오바마대통령의 부인인 미셀여사의 역시 마지막 연설문을 읽었을 때입니다. 미셀 여사는 아주 짤막한 말을 하였습니다. “Young people, don’t be afraid. Be focused. Be determined. Be hopeful. Be empowered.”-“젊은이들이여, 두려워하지 마세요, 집중하세요, 결심하세요, 희망을 가지세요, 힘을 북돋으세요”
지금 미국은 트럼프라는 새로운 대통령을 맞이하면서 매우 앞날이 불투명한 채 많은 미국인들이 미래를 두려운 눈으로 바라보고 있다고 합니다. 미셀 여사의 메시지 “don’t be afraid, 두려워 마세요” 이 아주 간단한 한마디가 미국미들에게 희망의 불을 붙이는 말이 되었을 것이라고 봅니다. 그리고 ‘두려워 말라’ 이 말씀을 하나님께서 미국민들이 아니라 우리나라 백성들에게 전해 주는 분명한 말씀이라고 믿습니다. 

 

우리들은 그 어떤 시대보다도 많은 걱정과 근심의 문제를 안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아침에 눈을 떠서 저녁에 잠자리에 들 때 까지 근심과 걱정과 염려라는 물속에서 헤엄을 치며 사는 물고기처럼 그런 인생을 살고 있는 것입니다. 살아가는 방법이 옛날 보다는 보다 편해지고 삶의 수준이 향상되었다고 하지만 그 어느 때 보다 근심하고 염려할 문제들은 산더미처럼 많아 졌습니다. 성경에 근심하지 말라 염려하지 말라 걱정하지 말라 두려워 말라 라는 말씀이 365번이나 있다고 하는데 이 말씀은 역으로 생각하면 사람들이 매일 근심 속에 살아가고 있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일평생에 근심하며 수고하는 것이 수고와 슬픔뿐이라 그 마음이 밤에도 쉬지 못하나니 이것도 헛되도다. 전2:23
그러나 디모데후서 1장 7절에서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것은 두려워하는 마음이 아니요, 오직 능력과 사랑과 근신하는 마음이라"고 했고, 베드로는 베드로전서 5장 7절에서 "너희 염려를 다 주께 맡겨 버려라. 이는 저가 너희를 권고하심이니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요한복음 14장 1절에서,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니 여러분, 하나님을 믿는 여러분은  걱정할 것 없습니다. 염려할 것 없습니다. 근심이여 안녕하며 이제 2017년도를 살아가야 합니다. 그래서 근심하지 말자라는 말씀을 하려고 합니다.

항상 건강에 관심을 가지고 있던 한 사람을 그의 친구들이 골려주기로 작정했습니다. 그의 친구들은 번갈아가며 그를 만날 때마다, "너 얼굴이 수척해졌구나. 무슨 병이 있는 것이 아니냐?"하며 근심스런 표정으로 묻습니다. 처음 한 두 사람에게 이 소리를 들을 때에는 대수롭지 않게 넘겼는데, 많은 친구들이 그에게 이런 소리를 하니까 나중에는 정말 그 사람이 파리해지고 병들게 되었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많은 경우에 우리의 근심과 염려는 쓸 데 없는 것이며 신경성입니다. 현대인이 앓고 있는 병 가운데 신경성 병들이 많습니다. 신경성 위궤양, 신경성 치통, 신경성 정신질환 등등. 쓸 데 없는 염려와 근심이 우리를 약하게 하고 병들게 합니다.

근심과 염려와 고통은 아들레날린이라는 우리 몸 안에 독을 만들어 냅니다. 온 몸의 독소를 만들어 병들게 합니다. 마음의 즐거움은 양약이 되는 데 마음의 근심은 뼈로 상하게 한다고 말씀하였습니다. 근심은 우리 몸의 유익한 세포를 약화사키고 죽이고, 독성 인자를 높여서 각종 병 질환을 일으키는 원인이 됩니다. 근심은 각종 암의 결정적인 원인이 됩니다.

즐거움은 엔돌핀을 만들어내어서 암세포를 제거합니다. 녹아내리게 합니다. 통증을 완화시킵니다. 억지로 웃는 웃음도 효과가 있습니다. 항상 기뻐하라. 범사에 감사하라. 이는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 감사하면 5장6부가 건강합니다. 온몸을 건강하게 만드는 엔들핀 보다 4천배가 좋은 다이돌핀이 생성된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근심은 금물입니다. 그래서 노벨 의학상을 받은 알렉시스 카렌 박사는 "근심과 싸우는 방법을 모르는 사람은 일찍 죽는다"라고 말했습니다. <신경성 위장질환>이라는 책을 쓴 죠셉 몬테이크 의사는 "우리가 먹는 음식 때문에 위궤양에 걸리는 것이 아니라 우리를 좀먹는 근심 때문에 위궤양에 걸린다"라고 말했습니다.

 

문제는 다른 근심이 아니라 하나님으로부터 떨어지면 근심이 생겨나기 때문에 하나님으로부터 떨어질까 근심할 줄 알아야 합니다. 너의 영적상태가 하나님과의 거리가 멀어졌는지 아니면 가까워졌는지 살펴보아야 합니다.  히 3:12에서 “형제들아 너희는 삼가 혹 너희 중에 누가 믿지 아니하는 악한 마음을 품고 살아계신 하나님에게서 떨어질까 조심할 것이요”고 했습니다. 이 말씀에서 “떨어질까”는 원어로 “입히스테미”라는 말로 “꾀어내다, 배신하다, 떨어져 나가다”란 말입니다. 세상의 유혹에 믿음의 길에서 떨어져 나가면 그때부터 근심이 안개비처럼 우리 마음을 적셔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를 받기를 사모하지 아니하고 그 마음이 믿음에서 떨어지면 세상 온갖 근심 염려 걱정이 그를 회오리바람처럼 감아버립니다.

아무리 근심을 많이 한다고 해도 더 나아지는 것은 없고, 해결되어지는 것은 없습니다. 이런 근심과 염려가 자꾸만 사람의 마음에 축적되면 근심 그 자체가 우리 인간을 파괴하는 힘이 되고 마는 것입니다.
그 예로 제 2차 세계 대전 때, 미국이 독일군과 일본군에 대항해서 직접 전사한 사람의 수는 35만 명인데 비해서 남편이나 아들을 전쟁터에 보내 놓고 근심하거나 혹은 전쟁의 공포속에서 불안해 떨다가 심장마비로 죽은 사람이 100만 명이 넘었다는 통계가 나왔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근심은 아주 무서운 벌레입니다. 마음을 파먹는 벌레입니다.


미국 콜로라도주 한 산 봉우리에 오래된 큰 나무 한 그루가 쓰러져 있었습니다. 그 나무는 400여 년 간 열 네 번이나 벼락을 맞아도 쓰러지지 않았으며, 수많은 눈사태와 폭풍우를 이겨냈다고 합니다. 그런데도 그 나무가 쓰러진 까닭은 바로 딱정벌레 떼가 나무속을 파먹어버렸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오랜 세월에도 시들지 않고 폭풍과 벼락을 견뎌온 그 거목이, 작은 벌레들로 인하여 쓰러지고 만 것입니다.(카네기)
그렇습니다. 우리도 이 나무처럼 인생의 폭풍우와 눈사태와 벼락은 이겨내면서도, '근심'이라는 벌레에게 우리의 심장을 갉아 먹히고 있지는 않는가?
그러나 근심은 알고 나면 허수아비라 하겠습니다.


이외수 씨가 이런 글 (‘그대에게 던지는 사랑의 그물’)을 썼습니다. “나는 근심에 대해서 근심하지 않는다. 근심은 알고 나면 허수아비이다. 곡식이 익어가는 들판으로 가서 허기를 채우려면 필연적으로 마주칠 수밖에 없는 복병들이다. 하지만 어떤 참새라도 그 복병들을 근심할 필요는 없다
허수아비는 무기력의 표본이다. 망원렌즈가 장착된 최신식 장총을 소지하고 있어도 방아쇠를 당길 수가 없다. 자기 딴에는 대단히 위협적인 모습으로 눈을 부릅뜬 채 들판을 사수하고 있지만 유사 이래로 허수아비에게 붙잡혀 불구가 되거나 목숨을 잃어버린 참새는 한 마리도 없다. 다만 소심한 참새만이 제 풀에 겁을 먹고 스스로의 심장을 위축시켜 우환을 초래할 뿐이다.
나는 열 살에도 근심이 있었다. 나는 스무 살에도 근심이 있었다. 나는 서른 살에도 근심이 있었다. 나는 마흔 살에도 근심이 있었다. 그런데 그 때의 근심들은 모두 어디로 사라져 버렸을까. 지금은 흔적조차도 찾을 길이 없다.
근심에 집착 할수록 포박은 강력해지고, 근심에 무심 할수록 포박은 허술해진다. 하지만 어떤 포박이라고 하더라도 시간이 지나면 100 퍼센트 소멸해 버린다. 이 세상 시계들이 모조리 작동을 멈춘다 하더라도 시간은 흐른다.
지금 아무리 크나큰 근심이 나를 포박하고 있어도 언젠가는 반드시 소멸하고야 만다는 사실은 자명하다. 그런데 내가 왜 시간이 흐르면 100 퍼센트 소멸해 버리는 무기력의 표본 허수아비에 대해 근심하겠는가.“

 

근심은 큰 나무를 쓰러트리는 벌레 같으면서 그러나 분명히 허수어비 같아서 우리가 두려워 할 것은 결코 아닙니다.

마 6:27에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너희 중에 누가 염려하므로 그 키를 한 자나 더 할수 있겠느냐"고 하셨습니다. 그러면서 주님은 뭐라고 말씀하십니까? "이는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다" 라고 말씀하셨습니다(마6:32).
다시 말씀드려서 염려나 근심은 누가 하는 것이냐? 바로, 근심은 믿지 않는 사람들이 하는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믿지 않는 사람이 누구입니까?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믿지 않는 사람, 교회에 안 다니는 사람들을 말합니다.
"이는 다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이 말씀을 바꾸어 말하면 우리가 근심하는 까닭은 믿지 않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누구를 믿지 않습니까? 바로 하나님을 믿지 않기 때문에 근심하는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전능하신 하나님의 능력을 무시하는 것이요, 하나님을 신뢰하지 못하는 까닭입니다. 그러므로 근심은 바로 '죄'입니다.


이것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가 근심하는 순간 우리는 죄를 짓고 있는 것입니다. 그 근심의 밑 바탕에 흐르는 것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바로 '불신앙'입니다. 하나님을 믿지 못하는 불신앙이 모든 염려와 근심과 걱정의 밑바탕에 흐르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분명하게 제자들에게 마 6:32에서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줄을 아시느니라" 말씀하시였습니다.
그러므로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근심은 하나님의 백성의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믿지 않는 이방인의 것이다 이렇게 말씀한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완전히 신뢰하고 전적으로 팍 믿어버리면 하나님은 우리를 어여삐 보시고 우리를  복된 길로 형통한 길로 인도해 주실 줄로 믿습니다.
요7:38절 말씀에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오리라" 했습니다.
요14:1절에서는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고 말씀했습니다.
그래서 요16:9절 말씀에 보면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죄에 대하여라 함은 그들이 나를 믿지 아니함이요(페리 하마르티아스 멘, 호티 우 피스튜우신 에이스 에메)"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나 예수를 믿지 않은 것이 죄라고 말입니다.

 

믿음은 곧 인생을 나무로 비유하면 근심하지 않고 편안하게 행복하게 살아가는 인생의 뿌리입니다. 렘 17: 8에 말씀하기를 “그는 물가에 심어진 나무가 그 뿌리를 강변에 뻗치고 더위가 올지라도 두려워하지 안하며 그 잎이 청청하면 가무는 해에도 걱정이 없고 결실이 그치지 아니함 같으리라”고 하였습니다.
물가에 심어진 나무같은 사람이 있었습니다. 바로 요셉입니다. 창49:22, “요셉은 무성한 가지 곧 샘 곁의 무성한 가지라. 그 가지가 담을 넘었도다”라고 말씀하였습니다.  요셉의 가지가 담을 넘은 것은 샘 곁에 심겼기 때문입니다. 샘 곁에 심겨 뿌리가 물을 빨아 들였기 때문입니다. 말하자면 뿌리가 든든했습니다. 뿌리에서 계속 물의 공급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담을 넘은 것입니다. 성경은 또 복 있는 사람은 그 모든 행사가 형통할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래서 어떻게 그렇게 되나 보았더니 그 나무는 시냇가에 심은 나무입니다. 시1:3, “그는 시냇가애 심은 나무가 시절을 좇아 열매를 맺으며”. 시냇가에 심겼기 때문에 형통한 것입니다. 나무 자체가 대단해서가 아니라 시냇가에 심겼기 때문에. 다시 말하면 뿌리가 든든하게 때문에 거기서 주는 공급으로 잎사귀가 마르지 않고 열매도 맺고 형통하다는 것입니다.

 

오늘의 설교 제목이 무엇입니까? 근심지목입니다. 혹 근심의 나무라고 하면 이는 오해입니다.  한글을 창제하신 세종임금님이 정인지 권제 등을 시켜 자신의 조상님들과 조선이란 나라를 세운 일을 칭송하는 노래로 짓게 하였는데, 한글로 지은 첫 번째 책으로 “용비어천가”라는 것이 있습니다.

 

그 용비어천가 2장에 나오는 글로서 이런 말이 있습니다.

 

根深之木(근심지목)은        뿌리 깊은 나무는
風亦不扤(풍역불올)이라      바람에도 흔들리지 아니하고
有灼其華(유작기화)하고      그 꽃이 활짝 피고
有蕡有實(유분유실)하느니라  꽃이 있고 열매가 있다.
    
源遠之水(원원지수)는        근원이 먼 물은
旱亦不竭(한역불갈)하니      가물에도 그치지 아니하고
流斯爲川(유사위천)이고      이에 흘러 시내가 되고
于海必達(우해필달)하니라    반드시 바다에 이른다.


오늘의 설교 제목은 이 용비어천가의 ‘근심지목은 풍역불올이라’에서 따온 제목입니다.
성경의 말씀과 비슷한 의미입니다.

根深之木(근심지목) 믿음의 뿌리가 깊지 못하면 언제든지 흔들립니다. 개인 신앙도 마찬가지입니다. 어떤 환난이나 곤고나 핍박이 와도 믿음의 뿌리가 깊이 박혀 있으면 요동치 않습니다. 모든 것은 믿음으로만 이길 수 있습니다. 우리를 찾아오는 시험은 너무 큽니다. 그러므로 믿음이 있어야 합니다. 성도들을 향하여 찾아오는 시험은 너무 무섭게 다가옵니다. 그러므로 믿음이 필요합니다. 믿음으로 하지 않고는 하나님을 기쁘게 하실 수도 없습니다. 믿음이 없이는 이길 수 없습니다. 믿음의 뿌리가 깊게 내리도록 하려면 말씀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믿음은 들음에서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는다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항상 말씀을 읽어야 합니다. 말씀을 들어야 합니다.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는 청산유수 같이 하는데 하나님의 말씀은 한마디도 없고 '하나님께서 이렇게 하셨다'는 말 한마디 없다면 그것은 믿음의 생활이 아닙니다.

根深之木(근심지목) 믿음의 뿌리가 깊이 내리지 않으면 말 한마디에 넘어지기도 합니다. 작은 돌부리에 걸려 쉽게 넘어지기도 합니다. 믿음의 뿌리가 깊이 내리지 못하면 교인다운 모습이 나타낼 수 없습니다. 즉 빛과 소금의 역할을 감당할 수 없습니다. 믿음이란 하나님을 믿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입니다. 성령님을 믿는 것입니다. 부활을 믿고 심판을 믿고 구원을 믿는 것입니다. 이 믿음이 약하면 결국 빛을 제대로 낼 수 없고 소금의 맛을 낼 수 없습니다.

 

根深之木(근심지목) 믿음의 뿌리가 얕으냐 깊으냐는 언제 알 수 있습니까? 바람이 불어봐야 압니다. 날씨가 가물어 봐야 알 수 있습니다. 뿌리가 깊지 못하면 바람이 조금만 불어도 뿌리가 흔들려서 곧 말라죽습니다. 가뭄이 조금만 심해도 잎이 시들어지고 말라죽습니다. 그러나 뿌리가 깊으면 어지간한 바람에 흔들리지 않습니다. 어지간한 가뭄이 와도 시들지 않습니다. 마찬가지로 교인이 믿음의 뿌리가 깊으냐? 얕으냐? 는 어려운 환난의 바람이 불거나 사람의 마음을 건조하게 만드는 일들이 발생할 때 비로소 판단됩니다. 똑같은 어려운 시험이라도 믿음의 뿌리가 있는 성도는 오히려 그것을 바탕으로 더욱 굳건해 집니다. 그러나 믿음의 뿌리가 깊지 못한 교인은 온통 흔들리며 실족하여 근심 걱정에 파묻혀 교회에 나오지 않거나 믿음생활 자체를 포기하는 일이 발생합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믿음을 예수님에게로 깊이 뻗어야 합니다. 우리의 인생 중심에 예수님이 계셔야 합니다. 무슨 말입니까?

 

대학을 졸업하고 간신히 직장에 취직했는데 까다로운 상관을 만났습니다. 마음고생이 이만 저만이 아니라 회사를 그만 둘까 고민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때 그가 할 일은 우선 그만 두고 보는 것이 아니라 根深之木(근심지목), 믿음의 뿌리를 예수님에게 내린 사람은 예수님이라면 어떻게 했겠는가 묻습니다.  가정에서 어느 날 사소한 일로 아내와 다투었습니다. 그리고 화가 나서 집을 나갔습니다. ‘다시는 집에 들어오나 봐라’ 큰 소리쳤습니다. 그러나 막상 집을 나갔는데 갈 데가 없습니다. 할 수 없이 아무도 안보는 술집에 들어가서 소주 한 병을 마셨습니다. 시간은 점점 12시가 가까워 오는 데 어떻게 해야 할지 막막합니다. 그때 누가 떠오릅니까? 아내입니까? 술친구입니까? 예수님입니까? 그때 根深之木(근심지목) 예수님이 떠오른 사람이 예수님에게 뿌리를 내린 사람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이라면 어떻게 했을까를 묻는 사람입니다. 만일 그때 예수님을 떠올리지 않는 사람은 ”에이, 될대로 되라“ 그는 2차, 3차 술집으로 가서 결국 사고를 치게 되어 있습니다. 자녀가 원하는 대학에 못 들어갔을 때 어떻게 하나요? 사업이 안될 때 어떻게 하나요? 교회에서 누구 때문에 시험들고 ”에이. 교회 안 나올까?“할 때 어떻게 하나요? 교회에서 이런 저런 봉사를 부탁받았을 때 어떻게 하나요? 인생의 중요한 결정을 할 때 어떻게 하나요? 根深之木(근심지목) 예수님에게 믿음의 뿌리를 내린 사람은 ”예수님이라면 어떻게 했을까?“ 묻고 또 물어 봅니다.

도종환 시인의 시에 “흔들리며 피는 꽃”이란 시가 있습니다. 이 시에 이런 싯귀가 있습니다.

흔들리지 않고 피는 꽃이 어디 있으랴


이 세상 그 어떤 아름다운 꽃들도
다 흔들리면서 피었나니
흔들리면서 줄기를 곧게 세웠나니
흔들리지 않고 가는 사랑이 어디 있으랴

 

인생에 어찌 근심거리가 없겠습니까? 사는 일이 모두 근심으로 뭉쳐 있습니다. 그래서 흔들리게 됩니다. 머리가 흔들리고 가슴이 흔들리고 어지럽고 현기증이 나는 인생입니다. 버스에서 서서 갈때가 있습니다. 두발로 섯다고 하지만 버스가 덜컹 거릴 때마다 몸이 이리 저리 흔들립니다. 그러나 근심하지 않습니다. 손잡이 봉을 잡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 인생이 아무리 흔들리며 우리를 근심케 할지라도  그 흔들림 속에 예수님을 붙잡는다면 안심입니다. 根深之木(근심지목) 예수님에게 인생의 뿌리를 내린 사람은 평안입니다. 예수님 계신 인생은 행복입니다.


180년대 존 바에즈Joan Baez라는 스페인 여 가수가 No Nos Moveran (We Shall Not Be Moved)흔들리지 않게 라는 노래를 불러 세계적인 유행 팝송이 되었습니다. 저도 매우 좋아하며 불렀던 노래입니다.

그 노래에 이런 가사가 있습니다.

no, no, no nos moveran!no, no nos moveran!
como un arbol firme junto al rio
no nos moveran.
우리는 흔들리지 않으리 흔드리지 않으리
물가에 심어진 나무같이 흔들리지 않으리

 

根深之木(근심지목) 예수님에게 믿음의 뿌리를 뻗은 사람은 어떤 근심 중에도 흔들리지 않는 것은 그 근심중에 있는 예수님의 섭리를 알게 되기 때문입니다.  참새 한 마리도 하나님의 뜻이 아니면 결코 떨어지지 않습니다. 분명이 모든 사건 속에는 하나님의 손길이 임재하여 계십니다. 그것을 찾아야 합니다. 미국의 한 목제소에 40세를 막 넘긴 신실한 남자 하나가 열심히 일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불황으로 해고당하고 말았습니다. 회사측이 부도를 더 이상 감당할 수 없자 구조조정을 한 것입니다. 그 사람은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하였습니다. 눈을 들어 하나님을 바라보며 기도하였습니다. "하나님! 해고에 들어 있는 진정한 하나님의 계획은 무엇입니까?" 기도중에 그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습니다. "건전한 사람들이 자고 가는 건실한 여관을 만들어라" 그는 이 음성을 듣고 조그만 여관을 만들어 성실하게 손님들을 사랑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지금은 온 세계에서 가장 큰 체인을 가지고 있는 할러데이 인 호텔이 되었습니다. 그가 바로 할러데이 인을 창업한 케몬스 윌슨입니다. 그는 나중에 말했습니다. "만일 그 때 내게 해고통지서가 안 날라 왔다면 나는 목공소에서 늙었을 것이다" 문제는 문제가 아니라 새로운 출발을 하라는 새로운 명령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게 됩니다. 이 문이 막힌 것은 다른 문으로 보내시려는 하나님의 뜻이 들어 있습니다.

이 세상에 근심 걱정 없는 인생이 어디 있겠습니까? 매일 같이 이리 저리 흔들며 살지 않는 인생 없습니다. 다 흔들리며 사는 인생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인생이 흔들린다고 근심하지 말고 根深之木(근심지목) 예수님 안에 뿌리를 깊이 박고 그로부터 인생에 필요한 충분한 영양분과 수분을 얻어먹을 수 있어야 합니다. 뿌리를 잘 내린 나무처럼 바위 위에 세워진 집처럼 우리가 예수님 안에 뿌리를 박고 든든히 세워지기 만하면 절대 흔들리거나 쓰러지지 않을 것이며 근심이랑 안녕 영원히 안녕...... 바이바이입니다. 

 

걱정을 모두 벗어 버리고서 스마일 스마일 스마일
장미꽃처럼 활짝 웃어요. 세상 즐겁다.
걱정하면 무엇해. 즐겁게 노래하자.
걱정을 모두  벗어 버리고서 스마일 스마일 스마일♬

 

2017년 벌레 같은 근심 허수아비 같은 걱정 모두 벗어버리고 根深之木(근심지목) 예수님께 인생의 뿌리를 깊게 뻗으시어 엔돌핀 다이돌핀이 팍팍 솟아나와 건강하시고 형통하시고 주님이 주시는 온갖 은혜와 축복을 받으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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