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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병호목사의 교회이야기

전병호 목사의 설교



 

2017년 1월 1일 신년주일아침 예배   막14:27-31, 66-72  목계지신(木鷄之信)

 

1217년의 새해 새날이 밝아 왔습니다. 금년을 정유년丁酉年이라해서 붉은 닭의 해라고 말합니다.  육십갑자(六十甲子)로 헤아리면, 서른네 번째 해로 천간(天干)이 ‘정(丁)’이고, 지지(地支)가 ‘유(酉)’인 해입니다. 정(丁)은 빨갛다는 의미이고 유(酉)는 12지신 중 열번째 동물인 닭을 말합니다. 그래서 해석하면 "빨간 닭의 해" 라고 합니다.  옛날부터 닭은 새벽을 알리는 울음으로 귀신을 내쫓고 풍요와 다산을 상징하는 상서로운 동물로 우리 민족의 역사와 함께 해왔습니다. 새해에 행운이 깃들기를 기원하며 그리는 그림인 세화(歲畵)의 소재가 된 동물 중에 호랑이, 용, 개와 함께 닭을 그리곤 하였습니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아주 오랜 옛날부터 닭을 키워 왔습니다.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의 김알지(金斡智)의 탄생담에 의하면, “신라왕이 어느 날 밤에 금성(金城) 서쪽 시림(始林) 숲속에서 닭의 울음소리가 나는 것을 듣고 호공(瓠公)을 보내어 알아보니 금빛의 궤가 나뭇가지에 걸려 있었고 흰 닭이 그 아래에서 울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 궤를 가져와 열어보니 안에 사내아이가 들어 있었는데, 이 아이가 경주 김씨(慶州金氏)의 시조가 되었다.”고 하였습니다. 그 뒤 그 숲의 이름을 계림(鷄林)이라고 하였으며 신라의 국호로 쓰이기도 하였습니다.
신라 왕릉인 천마총을 발굴했을 때, 단지 안에 수십 개의 계란이 들어 있었고 또 신라의 여러 고분에서 닭뼈가 발견되었습니다. 능속에 계란과 닭뼈가 들어 있었던 것은 저 세상에 가서 먹으라는 부장 식량일 수도 있고, 알속에서 새로운 생명이 탄생하듯이 재생, 부활의 종교적인 의미로 해석해 볼 수 있습니다. 중국의 ≪삼국지 三國志≫ 위지 동이전에서는 한(韓)나라에 꼬리가 긴 세미계(細尾鷄)가 있다고 하였고, ≪후한서 後漢書≫에서도 마한의 장미계(長尾鷄)는 꼬리가 5척이나 된다고 하였습니다.

옛 사람들은 닭은 5덕을 겸비하였으니 닭이 머리에 관(볏)을 썼으니 문(文), 발톱으로 공격을 하니 무(武), 적을 보면 싸우니 용(勇), 먹을 것을 보면 서로 부르니 인(仁), 어김없이 때를 맞춰 우니 신(信) 등 오덕을 지녔다고 여겼다고 하여 닭은 상서러운 동물로 여기었습니다. 닭은 울음으로써 새벽을 알리는, 빛의 도래를 예고하는 존재입니다. 닭은 여명, 빛의 도래를 예고하기에 태양의 새입니다. 닭의 울음은 때를 알려주는 시보의 역할을 하면서, 앞으로 다가올 일을 미리 알려주는 예지의 능력이 있기도 합니다. 장닭이 홰를 길게 세번 이상 치고 꼬리를 흔들면 산에서 내려왔던 맹수들이 되돌아가고, 잡귀들의 모습을 감춘다고 믿어 왔던 것입니다.
그래서 닭을 마을 이름으로 삼아 닭이 마을을 지켜 준다고 여겼습니다. 국토정보지리원에 따르면 닭과 관련한 유구한 역사와 민속 덕에 국내 지명 가운데 ‘계룡산’ ‘계족산’ ‘닭실마을’ 등 닭과 관련한 지명은 총 293개로 12지신 관련 지명 중 용(1261개), 말(744개), 호랑이(389개)에 이어 네 번째로 많은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닭의 울음 소리는 어떻습니까? “꼬기오 꼬꼬” 다른 나라의 닭의 울음소리는 어떨까요.  나라마다 닭의 울음 소리가 다릅니다.
미국 닭은 ‘컥카둘두’ 영국 닭은 "아리키리키오" 캐나다 닭은 "아르크르크"
일본 닭은 "가께가꼬" 독일 닭은 "키케리키" 아르헨티나 닭은 "아레키리끼"
브라질 닭은 "후꾸꾸움바" 멕시코 닭은 "꺼끼꺼꺼어" 프랑스 닭은 "코코리코“
스페인 닭은 ‘키키리키’ 중국닭은 수탉은 ‘워워’ 암탉은 ‘거거’
외국 닭들은 외국어로 우는가 봅니다.

우스게 말로 닭에 대한 인터넷 비유어는 다음과 같습니다.
제일 빠른닭 – 후다닥 성질급해 죽은닭 – 꼴가닥 정신줄 놓은닭 - 헷가닥
가장 섹시한 암닭 – 홀딱  집안 망쳐 먹은닭 – 쫄딱 시골사는 닭 - 촌닥
수다를잘 떠는 닭 – 속닥속닥 흥분 잘하는닭 – 팔닥팔닥 가장 천한닭 - 밑바닥
싱싱한 닭 – 파닥파닥 가장 뜨거운닭 – 불닭   봐줄 수 없는 닭 - 꼴닭

닭이 새벽에 우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닭의 뇌 속에 있는 뇌하수체 전엽에는 사람들에게는 이미 기능이 퇴화되어버린 송과체, 일명 생체 자명종이라 불리는 콩알정도 크기의 기관이 존재한다. 여기에서 생산되는 멜라토닌이라는 물질이 생체 내 생리작용을 조절하는 각종 호르몬의 일주기 작용을 조절하고 있으며, 이 물질의 혈액내 농도가 하루 중 새벽에 가장 높아 생리적으로 그 시각을 인식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닭 1마리가 일생동안 계란 몇개를 낳을까요? 품종에 따라 차이가 있으나 난황으로 발달하는 난포의 수 1,000~3,000개입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마지막 만찬을 하실 때, 너희들이 다 나를 버리라(마태26:31) 말씀하셨습니다. 그 때 베드로가 대답했습니다. '모두 주를 버릴지라도 나는 결코 버리지 않겠나이다' 그 때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네가 오늘 밤, 닭 울기 전에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 베드로가 얼마나 섭섭했는지..... 그래서 다시 고백합니다. '내가 주와 함께 죽을지언정 주를 부인하지 않겠나이다.' 그러나 예수님이 재판 받는 자리에서 사람들이 너도 예수를 따르던 제자가 아니냐고 질문을 하자 베드로는 세 번이나  ‘나는 그를 모른다(헬-웈 오이다 안스로폰 투톤, 라틴어-Non Novi Illum)’고 부인하였습니다. 재판을 받고 있던 예수님이 멀찍이 있는 베드로를 바라보셨습니다. 이때에 어디선가 닭이 두 번 울자 베드로는 정신 번쩍 났습니다.  밖으로 뛰쳐나갔습니다. 그리고는 통곡하였습니다. 회개의 눈물을 하염없이 흘렸습니다. 연민의 마음을 담아 쳐다보시던 예수님의 눈빛을 잊을 수 없었습니다. 내가 주님과 함께 죽는 데까지도 따라가겠다고 했었는데.... 세상이 모두 예수님을 부인하여도 나는 결코 주님을 부인하지 않겠노라 큰 소리 쳤었는데..... 내가 어찌 예수님을 모른다고 하였단 말인가..... 베드로는 새벽 닭 소리에 주님말씀 기억하며 통곡하였던 것입니다.

(예루살렘 베드로 통곡 교회)

예수님이 이유 없이 성전 경비병들에게 잡혀 갔을 때에 제자들은 뿔뿔히 도망을 쳤습니다. 그래도 베드로는 멀찍이나마 뒤를 따라 예수님이 재판 받고 있는 대제사장 가야바의 집의 대문밖에서 기웃거렸습니다. “나는 결코 주님을 버리지 않겠다”고 맹세하듯 큰 소리쳤던 베드로는 주위 사람들에게 자신의 신분이 탈로 날까봐 간댕이가 콩알 만해져있었습니다. 그런데  옆 사람이 당신도 저 예수와 한패지(수 메타 투 예수) 라고 힐문하자 아니 난 그를 모른다고 소리쳤습니다.  인간의 연약함이 여실히 증명되던 순간입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연약하였지만 또한 그 연약함을 한 순간에 벗어 던져버렸습니다. 베드로의 통곡은 바로 자신의 연약함을 벗어 던지는 일이었습니다.
주님은 두려움에 배신한 베드로를 들어서 초대교회 큰 일군되게 하셨습니다. 자신의 연약함을 통회하며 통곡하는 베드로의 모습을 주님은 사랑하셨습니다. 비록 인간적인 연약함이 있어 위급한 상황에 주님을 모른다고 부인하였지만, 통회하며 통곡하는 베드로의 중심에는 예수님 사랑이 있었습니다. 주님을 위해 살고자 하는 열정이 있었습니다. 주님이 보시는 것은 현재 넘어진 모습이 아니라 사명을 감당할 그의 미래의 모습이었습니다. 비록 지금 넘어졌지만 베드로 속에 있는 믿음을 보신 주님께서 그를 높이 들어 쓰셨습니다.

때때로 우리는 주님의 말씀에서 벗어나 세상 가운데 방황할 때가 있습니다. 우리도 우리의 삶의 현장에서 베드로가 될 때가 허다합니다. 논 노비 일룸 나는 그를 모른다 이렇게 예수님 모르는 사람처럼 세상에서 살아갑니다. 요즈음 정치적 사건들을 보면서 과연 저들이 예수님을 알고 있는 사람들인가하는 생각을 가지게 됩니다. 예수를 아는 정치인이 되어야 하는데 정치할 때는 예수를 모르는 사람처럼 행동을 하고 있습니다.
문제는 닭이 훼치며 울기 전에 회개하여 하나님 말씀 앞을 돌아 와야 합니다. 닭이 첫 번째 훼칠 때 아 내가 지금 죄 가운데 있구나 정신을 번쩍 차리고 두 번째 훼치기 전에 엎디어 회개해야 할 것입니다.
그 때마다 닭우는 소리를 들으시기 바랍니다. 급한 현실 상황에서 자신도 모르게 점점 곁길로 들어서고 있는 베드로에게 경고의 신호를 보낸 것은 새벽 닭 소리였습니다. 그 소리는 베드로를 깨우는 소리였습니다.


(스페인 바르셀로나 사그라다 파밀리아   가우디의 성당 밖 부조 중 닭울기 전 )

 


오늘 설교 제목이 목계지신(木鷄之信)입니다. 목계木鷄는 나무로 만든 닭을 말합니다. 여기 목계가 있습니다(목계를 보여준다). 목계지신은 나무로 만든 닭의 믿음을 말합니다. 본래는 목계지덕(木鷄之德)이란 사자성어 입니다. 덕德을 믿을 신信으로 고쳤습니다. 먼저 목계지덕의 유래를 소개 하겠습니다.

기원전 8세기 경, 중국 주나라의 선왕에겐 특이한 취미가 있었습니다. 투계(닭싸움)였습니다. 선왕은 최고의 투계 조련사를 찾았으며, 그의 이름은 기성자였습니다. 왕은 닭을 한 마리 구한 후 기성자를 불렀습니다. 왕은 기성자에게 자신의 닭을 최고의 싸움닭으로 만들 수 있겠느냐고 물었습니다. 기성자는 그렇다고 답했고, 왕의 닭을 맡았습니다.

닭을 맡은 지 10일 후, 선왕은 기성자를 찾았습니다.

"내 닭이 최고의 싸움닭이 되었느냐?"
"아닙니다. 아직 그렇지 못 합니다.
"무엇 때문이냐?"
"현재 왕의 닭은 강합니다. 하지만 교만합니다. 자신이 최고의 싸움닭인 줄 알고 착각하고 있습니다. 교만함을 버려야 합니다."

닭을 맡긴지 20일 후, 선왕은 기성자를 다시 찾았습니다.

"내 닭이 최고의 싸움닭이 되었느냐?"
"아닙니다. 아직 그렇지 못 합니다.
"무엇 때문이냐?"
"현재의 왕의 닭은 교만함을 버렸습니다. 하지만 상대 닭의 행동에 너무 예민합니다. 눈빛과 행동과 소리에 쉽게 반응합니다. 조급함을 버려야 합니다."

닭을 맡긴 지 30일 후, 선왕은 기성자를 다시 찾았습니다.

"내 닭이 최고의 싸움닭이 되었느냐?"
"아닙니다. 아직 그렇지 못 합니다.
"무엇 때문이냐?"
"현재 왕의 닭은 조급함을 버렸습니다. 하지만 눈초리가 매우 공격적입니다. 자신의 감정을 상대 닭에게 읽히고 있습니다. 공격성을 버려야 합니다."

닭은 맡긴지 40일 후, 기성자는 선왕을 찾아왔습니다.
"현재 왕의 닭은 최고의 싸움닭이 되었습니다."
"이유가 무엇이냐?"
"왕의 닭은 교만함을 버렸고, 조급함을 버렸고, 공격성을 버렸습니다. 완전한 평정심과 편안함을 얻었습니다. 따라서 상대 닭이 소리를 지르고, 어떤 행동을 하더라도 미동조차 하지 않습니다. 이 모습을 보고 다른 닭들은 겁에 질려 도망치고 있습니다. 현재 왕의 닭의 모습은 목계(木鷄) 같습니다.

(紀渻子爲王養鬪鷄(기성자위왕량투계)
기성자가 왕을 위해 싸움닭을 기르고 있었다.
十日而問(십일이문)
10일이 지나자 왕이 물었다.
鷄可鬪已乎(계가투이호)
닭은 쓸 만한가?
曰(왈) 未也(미야)
아직 멀었습니다.
方虛憍而恃氣(방허교이시기)
지금은 교만하여 허세만 부리고 자기의 기운만 믿고 있습니다.
** 憍-교만할 교 虛憍-헛되이 방자하고 교만함.

十日又問(십일우문)
십일이 지나자 왕이 또 물었다.
曰(왈) 未也(미야)
아직 멀었습니다.
猶應嚮景(유응향경)
다른 닭의 울음소리를 듣거나 그림자만 보아도 덤벼들려고 합니다.
** 嚮景-주위의 환경에 민감하게 반응함

十日又問(십일우문)
십일이 지나자 왕이 또 물었다.
曰(왈) 未也(미야)
아직 멀었습니다.
猶疾視而盛氣(유질시이성기)
다른 닭의 모습을 보면 노려보고 기운이 성합니다.
**疾視(질시): 눈을 부릅뜨고 노려보다. 盛氣(성기): 한창 기운이 성하다.

十日又問(십일우문)
십일이 지나자 왕이 또 물었다.
曰(왈) 幾矣(기의)
이젠 됐습니다.
鷄雖有鳴者(계수유명자)
다른 닭이 아무리 울며 싸움을 걸어와도,
已无變矣(이무변의)
전혀 움직이는 낌새조차 보이지 않고,
望之似木鷄矣(망지사목계의)
멀리서 보면 마치 나무로 만든 닭 같습니다.
其德全矣(기덕전의)
비로소 덕이 온전해졌습니다.
異鷄无敢應(이계무감응)
이렇게 되면 어떤 닭도 감히 당하지 못하고
見者反走矣(견자반주의)
모습만 보아도 오히려 달아나고 말 것입니다.)

 

“망지사 목계 기덕전(望之似 木鷄 其德全), 멀리서 보면 마치 나무로 만든 닭 같습니다   비로소 덕이 온전해졌습니다 ” 즉 겉보기엔 마치 나무로 만든 닭과 같지만 그 덕이 완전하다는 것입니다. 목계(木鷄)란 분노케 해도 평정심(平靜心)을 유지하여 나무 닭의 경지에 이른 태연자약(泰然自若)함입니다. 목계의 “덕이 완전하다”(德全)란 모든 일에 상대가 아닌 자기와의 싸움에서 이기는 것입니다. 손자(孫子)는 군쟁편(軍爭篇)에 부동여산(不動如山)이라 하였습니다. 태산처럼 움직이지 않는 여유라 했습니다. 노자(老子)는 제56장에 화광동진(和光同塵)이란 말을 하였습니다.  자신의 지덕(智德)과 재기(才氣)를 감추고 세속인과 어울려 지내면서 참된 자아를 보여주는 것이라 했습니다.

2500년 전 장자는 최고의 싸움닭을 나무 닭 목계라 하였습니다. 이 이야기에서 장자는 최고수가 되려면 세 가지 조건을 갖추어야 한다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첫째는 자신이 최고라는 교만함을 버리는 것이요, 둘째는 상대의 말과 위협에 민감하게 반응하지 말라는 것이요, 셋째는 상대방에 대한 공격적인 눈초리를 버리라는 것입니다. 리더는 어떠한 경우에도 목계처럼 자신의 감정을 통제하고 평정심을 유지하라는 목계지덕 나무 닭의 덕인 것입니다

이 목계의 덕을 온전히 성취한 분은 바로 예수님이십니다. 마치 나무 닭처럼 예수님은 제자의 배신에도 평정심을 잃지 않았습니다. 그를 모른다고 소리친 베드로를 보시면서도 예수님의 눈초리는 부드러우셨습니다. 예수님은 최고의 인간이시면서도 태어나실 때는 말구유가 그 첫 보금자리였으며 세상 떠나실 때는 죄인처럼 십자가를 지시고 골고다로 오르셨습니다. 이것이 예수님의 목계지신(木鷄之信)입니다.

2017년 우리는 어떤 자세로 한해를 살아가야 하겠습니까? 아마도 2017년은 경천동지할 수많은 사건들이 우리 주변에서 일어날 것입니다. 어찌 살 것입니까? 바로 목계지신 나무 닭처럼 십자가를 지신 예수님의 뒤를 따라  우리들의 믿음도 목계지신(木鷄之信) 나무 닭처럼 믿음을 가져야 할 것입니다.

첫째로 목계지신(木鷄之信)이란 평정심(平靜心) 믿음입니다. 2017년 어떤 날엔 우리를 화나게 하는 일이 있을 것입니다. 그럴때에 평정심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만일 평정심을 잃어버리고 분노한다면 마귀에게 지는 날입니다.  왜 가인은 아벨을 죽였습니까? 평정심을 잃어버리고 부노하였기 때문입니다.(창 4:6-8)   왜 모세가 가나안 땅에 들어 가지 못했습니까? 어느날 그 평정심을 잃어 버렸기 때문입니다. 모세는 마지막 날도 느보산에 올랐고, 시력과 기력이 왕성했지만(신 34:1-7), 분노했기에 가나안에 못 들어가고 그 느보산에서 죽었습니다(민 20:12). 마귀는 분노하는 틈을 노립니다(엡 4:26-27). 욥은 하나님을 욕하고 죽으라는 아내의 말에 평정심을 잃지 않았습니다.(욥 2:9-10).

둘째로 목계지신(木鷄之信)이란 오래 참음의 믿음입니다. 오래참음은 성령의 열매입니다. 주님이 유다의 입맞춤으로 체포되자, 베드로는 “주여 우리가 칼로 치리이까?”라며 대제사장의 종 말고의 귀를 잘랐습니다(요 18:10). 주님은 “이것까지 참으라!”(에아테 헤오스 투투 눅 22:51)며 그 귀를 만져 고쳐주셨습니다. 진정한 승리는 오래 참는 자에게 찾아옵니다(히 12:1-3). 오래 참음이란 미래를 하나님께 맡기고 기다리는 것입니다. 원수 갚는 것을 하나님께 맡기고, 오히려 박해자를 축복하는 일 선으로 악을 이기자!(롬 12:14-21) 이것이 오래 참음의 목계지신입니다.

셋째로 목계지신(木鷄之信)이란 온유란 믿음입니다. 예수님은 온유한 자가 복이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대체 온유한 자가 누구이기에 복이 있는 것일까요? 우리는 보통 온유한 사람을 온순하고 부드러운 천성을 소유한 사람이라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또 매사에 화를 내지 않고 큰 소리 치지 않고 공격적이지도 않고 이것도 좋고 저것도 받아들이 사람을 향해 온유하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자기 의견이 강하지 않고, 우유부단하고 말이 없고 조용한 사람에게도 좋게 표현을 해서 온유한 사람이라고 말합니다.  우리말 “온유한”으로 번역된 헬라어 ‘프라우스’는 길 들여진 온유함, 가르침을 통해 변화된 온유함을 의미합니다. 따라서 성경이 말하는 온유는 천성적으로 부드러운 성품이 아니라, 예수님을 믿은 후에 성령으로 길들여진 성품, 주님의 눈초리로 이웃을 바라보며 사랑하고 배려하고 용납하는 성품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변화된 성품, 믿음으로 성숙해진 온유한 성품을 가리킵니다. 진정한 온유란 이길 수 있어도 져주는 사랑의 힘입니다. 온유란 강자가 약자에게, 부모가 자녀에게, 남편이 아내에게 져주는 외유내강의 사랑입니다. 티내지 말고 져주는 진정한 능력입니다. 온유란 바다처럼 태연자약(泰然自若)한 마음입니다. 망망대해(茫茫大海)는 육지에서 온갖 쓰레기가 들어와도 드넓고 푸릅니다. 세상의 영향력을 받지 말고, 세상에 선한 영향력을 끼치며 사는 것이 목계지신 온유함입니다.

붉은 닭의 해 2017년을 목계지신으로 살아갑시다. 평정심믿음으로 오래 참음의 믿음으로 온유한 믿음으로 올 한해를 살아갈 때에 하나님이 우리 라온 코이노니아 성도들에게 놀라운 은혜와 축복이 충만하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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