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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병호목사의 교회이야기

전병호 목사의 설교



2016년 12월 25일 성탄절   마 2; 1-12  라온코이노니아의 큰 별


마태복음은 복음서 중에 유일하게 동방박사의 경배이야기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동방박사들은 별을 보고 유대인의 왕이 태어났다는 것을 알고, 동방에서 예루살렘까지 와서 헤롯왕에게 유대인의 왕으로 태어난 아기에 대해 묻습니다. 헤롯은 놀라서 대제사장과 율법학자들을 불러 모아서, 메시야가 태어나는 곳이 어디로 예언되어 있는 지를 묻습니다. 유대 학자들이 메시야가 태어날 곳이 베들레헴으로 예언되어 있다고 알려주자, 동방박사들에게 아기를 찾거든 자신에게도 알려달라고 합니다. 그리고 동방박사들이 밤하늘을 보니 유독 별빛이 머물은 집이 있어 가서 보니 아기 예수가 어머니 마리아의 품에 안겨있었습니다. 박사들은 아기 예수께 경배하고  황금과 유향과 몰약을 선물로 드립니다.

동방박사들을 베들레헴의 예수님의 집으로 인도하였다는 별을 베들레헴의 별이라고 불리는데, 어떤 학자는 이 별이 BC 12년에 나타났던 헬리 헤성일 것이라고 추측하기도 하고, 1614년 독일의 천문학자인 케플러는 BC 7년에 목성과 토성이 나란히 서면서 이것이 베들레헴의 별로 보였던 것이라고 말하였습니다. 흥미 있는 사실은 BC 5년에 중국과 우리나라 천문학자들이 한 곳에 약 70일간 멈추어 있었던 헤성 또는 신비한 별에 대해서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러닌까 베들레헴의 별을 우리나라에서도 볼 수 있었다고 합니다. 마치 베들레헴의 별이 베들레헴 위에 머물러 있었던 것처럼 말입니다. 호주 천문학자 데이브 르네케 씨는 "BC3년 8월12일 오전 3시45분에서 5시20분까지 중동의 동쪽 새벽하늘에 목성과 금성이 매우 가까이 근접했다"면서 "이는 뭔가 일어나고 있음을 시사하는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는 BC2년 6월17일에도 '왕들의 행성'인 목성과 금성이 사자자리(왕권과 권능을 상징)에서 다시 합쳐지듯이 아주 가까이 접근하면서 이루어졌다면서 이때 두 행성은 하나의 밝은 별처럼 빛났을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는 이러한 두 행성의 합이 전례 없는 것으로 "저녁시간에 발생해 밤하늘을 그야말로 환히 밝혔을 것"이라고 말하였습니다.


이렇게 베들레헴의 별은 언제 예수님이 탄생하셨는가를 알려주는 단서가 되고 있습니다. 1세기 유대의 역사학자 요세푸스는 이 잔인한 헤롯왕은 월식이 일어난 후 곧 죽었다고 기록했는데, 이는 곧 BC 4년 3월 13일이며, 그의 아들 헤롯이 BC 4년에 왕위에 오를 때에 만든 기념주화가 이를 사실로 증명하고 있다고 합니다. 따라서 예수님의 탄생은 동방박사들이 별을 처음 보았던 BC 6년에서 헤롯이 베들레헴의 아기를 죽였던 BC 4년 사이로 추정할 수 있다고 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고대 신화에 나타나는 별 이야기를 기독교가 차용한 것이라고 역사성을 부인합니다. 만일 베들레헴의 별이 신화에서 차용한 것이라면 마태복음 다른 부분에도 이런 신화적인 이야기들이 있어야 할 것입니다. 마태복음이 기록된 때는 거의 동 시대적인 이야기를 신화적으로 썼다면 당 시대 다른 사람들도 다 알았을 것인데 당시 그런 말을 한 기록은 전혀 없었습니다. 그러므로 베들레헴의 별과 동방박사의 이야기는 역사적 사실이었음을 2000년 기독교 역사가 증언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에서 동방의 박사들이 하늘의 큰 별을 따라 베들레헴 까지 찾아 왔다는 것은 그 큰 별이 진짜 있었느냐 없었느냐는 천문학적인 이야기도 아니고 예수님의 탄생 연대를 찾아보라는 역사적 힌트를 준 이야기가 아닙니다. 동방박사들이 오직 하늘의 별을 바라보며 불원천리 진리를 찾아 마침내 그 진리를 발견하였다는 이야기입니다.

오늘 사람들이 모두 너무 땅의 것에 집착해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래서 모두 아래만 바라보고 살아갑니다. 그러니 저 하늘위에 있는 별이나 달이 보이겠습니까. 하나님이 하늘에 별을 만드신 이유는 사람들이 탁한 공기 속에서 살아가다가 하늘의 별을 보고 마음과 정신과 생각을 맑게 하라는 뜻입니다. 별을 보면서 추해진 마음을 닦고 정신을 가다듬고 잃은 꿈을 되찾으라고 만들어 놓으신 것입니다. 그래서 옛사람들은 별을 보고 노래했고 시를 지었고 대화했습니다. 일제 시개 윤동주 시인은 ‘별 혜는 밤’이란 시에서“별 하나에 추억과 별 하나에 사랑과 별 하나에 시와 별하나에 어머니...나는 별 하나에 아름다운 말 한마디씩 붙여 봅니다” 란 시를 지었습니다. 그런데 오늘은 그런 삶이 없이 모두 아래만 쳐다보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오늘 사람들은 자신의 삶이 현재 정도에서 이탈되고 궤도에서 멀어져 있는지 조차도 모르고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19세기에 스코틀랜드의 유명한 탐정추리 소설가 코난 도일의 소설에는 그 유명한 명탐정인 셜록 홈즈와 그의 조수이자 의사 친구인 왓슨이라는 두 인물이 등장합니다. 어느 날 셜록 홈즈와 닥터 왓슨이 범죄를 수사하던 중, 날이 저물어 밖에서 야영을 하게 됐습니다. 텐트를 치고 잠이 든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셜록 홈즈가 왓슨을 깨웁니다. “왓슨, 하늘을 봐. 뭐가 보이나?” 그러자 왓슨이 잠에서 덜 깬 목소리로 대답합니다. “하늘을 보니 수많은 별들이 보이는군.” 다시 셜록 홈즈가 묻습니다. “별들이 우리 눈에 보인다는 것이 무슨 의미지?” 그러자 왓슨은 잠시 생각을 하더니 대답을 했습니다. “별들의 의미라. 천문학적으로 토성이 사자궁 안으로 들어갔다는 것을 의미하고, 시계학상(horology)으로는 밤 3시 15분가량이 되었을 것이라는 의미지. 또  기상학적으로는 내일 날씨가 맑다는 것을 의미하고, 신학적으로는 하나님은 전능하시며 인간은 작고 미약하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지.” 장황하게 대답한 왓슨은 이제 홈즈에게 되묻습니다. “그런데 홈즈. 자네 생각은 어떤가?” 그러자 셜록 홈즈는 어이없다는 듯이 왓슨을 바라보면서 “이런 멍청이야. 지금 우리 눈에 별이 보인다는 것은 우리가 자고 있던 텐트를 누군가가 도적질 해갔다는 그런 의미라고.” 이처럼 사람들은 별을 보면서 의미를 찾고자 합니다.

그렇다면 베들레헴의 별, 예수 그리스도를 상징하는 이 별은 도대체 무슨 의미를 가지고 있을까요?

우리 인생에서 중요한 것이 무엇입니까? 많은 사람들이 속도에 관심을 둡니다. 30년 전 만해도 경부고속도로에서 지동차 속도가 100km라면 상당히 빠르다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매우 느린 속도라고 생각합니다. 지금은 300km가 넘는 자동차도 있습니다. 사람들에게 요즈음 어떻게 지내십니까 하고 물으면 바쁘게 지냅니다 라고 말합니다. 지금의 시대는 속도 경쟁 시대입니다. 그러나 속도는 대형사고의 원인이 되기도 합니다. 그래서 교통법으로 고속도로는 110km로 속도를 제한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속도는 누구보다 빠르게 성공하려는 욕망으로 자신의 인생의 고속도로를 달리다가 전복되는 모습들을 많이 보게 됩니다. 빠르게 좀 더 빠르게 더욱 빠르게 하다가 꽝하고 그의 인생이 폭발하는 것입니다. 잠14:12 “어떤 길은 사람의 보기에 바르나 필경은 사망의 길이니라”고 하였습니다.

우리가 알아야 하는 것은, 얼마나 빠르냐 보다 어디로 가느냐 하는 속도가 아니라 방향이 중요합니다. 제가 대학 다닐 때의 일입니다. 당시 저는 서울 삼각산 밑에 있는 임마누엘 수도원에서 학교를 다녔습니다, 저의 부모님은 대전에서 살았습니다, 겨울방학이 되어 잠시 집으로 가려고 서울역에 도착하였습니다. 막 떠나려는 기차가 있어 올라탔습니다. 요행이 빈자리가 있어 앉아 잠을 잤습니다. 한참 자고 있는데 기차표 검사하는 사람이 흔들어 잠이 깨었습니다. 기차표를 보여 주십시오 그래서 기차표를 내보여 주었습니다. 검사원이 기차표를 보더니 “아니 이 기차표는 대전행 표가 아니요?” “예 대전엘 갑니다” “기차를 잘못 탔구먼 이 기차는 중앙선이요 지금 양평을 지나고 있는데”저는 깜짝 놀랐습니다. 생각해 보니 서울역에서 기차를 탈 때 오른쪽에 있는 기차를 타야 했는데 왼쪽 편에 있던 기차를 탔던 것입니다. 그래서 충주에서 내려 충북선으로 가라타고 다시 조치원에서 경부선으로 갈아 타 대전에 도착하게 되었습니다. 당시에 완행열차라 이틀이나 걸려 집에 돈도 없어 밥을 굶어가며 오느라고 얼마나 고생하였는지 모릅니다.

무엇이 중요합니까? 속도보다 방향이 중요합니다. 지금 나의 인생의 기차가 어느 방향으로 달려가는가? 지금 나의 인생길이 삼천포로 빠지고 있지는 않는가? 하늘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옛날 사람들은 길을 가다가 방향을 잊어버리면 밤하늘 별들을 바라보았습니다. 북극성이 어디에 있는지 북두칠성이 어디에 놓여 있는지, 동방박사들은 먼 길을 가며 하늘에 떠있는 큰 별을 바라보았습니다.
우리가 인생의 길을 성공적인 행복한 인생을 살아가기 위하여 우리는 지난 2천년동안 사람들의 인생의 방향을 바르게 가도록 인도하였던 하늘의 별을 보아야 합니다. 바로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인생의 스타 큰 별입니다. 큰 별이라 누구나 다 볼 수 있습니다. 베들레헴에 떴던 별을 아시아 동쪽 끝 우리나라에서도 보았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인생을 살아갈 때 고개만 들으면 큰 별 예수그리스도를 보게 됩니다.  예수님께서 친히 말씀하셨습니다. 요14:6 “나는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언젠가 예화로 소개한바 있는데 다시 미국의 땅콩 박사 조지 워싱턴 카버(George W Carver1865-1943)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100여 년 전 미국 남부 지역 농가들이 면화를 재배하고 있었는데 문제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면화는 땅 속의 질소를 파괴해서 토지를 황폐화시킨다는 겁니다. 점점 면화농사가 줄어들게 되자 농민들은 큰 고민을 하게 되었습니다. 카버는 이 말을 듣고 땅콩을 재배할 것을 권면하였습니다. 처음에는 이 카버의 말을 따르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땅콩 농사로 성공하는 농부들이 나오자  너도 나도 땅콩을 재배합니다. 정말 토지가 회복되고 풍년이 됐습니다. 그런데 생각지 않은 큰 문제가 생겼습니다. 땅콩이 과잉 생산되어 전부 망할 위기에 처한 것입니다. 카버 박사는 고민에 빠져 기도합니다. “주여! 왜 땅콩을 만드셨나요? 왜 땅콩을 심게 했나요? 이제 어쩌란 말입니까?” 몸부림치며 눈물로 기도하는 데 주님의 음성이 마음속에 들려왔습니다. “땅콩 한 줌 갖고 실험실에 가라! 내가 알려 줄 테니 ... ”마침내 카버박사는 땅콩을 재료로 사용해서 만들 수 있는 수많은 식품과 제품을 만들게 됩니다. 땅콩버터, 땅콩 크림, 땅콩 식용유, 땅콩 구두약 ... 무려 105 가지 식품과 200 가지 실용 제품을 만들게 되어 미국은 물론 전 세계에 대박을 치게 되었습니다.

때때로 인생에 위기가 올 때가 있습니다. 이럴 때에 하늘을 바라봅니다. 우리의 큰 별인 예수그리스도를 바라보며 예수님을 의지하고 그 방향으로 나아 갈 때에 새롭고 놀라운 인생을 경험하게 됩니다.

그런데 누구나 고개를 들기만 하면 볼 수 있는 우리의 큰 별인 예수 그리스도를 보지 못하거나 안 보려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바로 헤롯왕이거나 왕 주변에 있었던 대제사장 서기관들입니다.
본문 6절 말씀대로 700년 전 미5:2의 예언대로 베들레헴에서 메시아 난다고 했지만 예수님을 바라보고 따라간 사람은 없었습니다. 그들은 영적인 눈이 멀어 별도 보지 못하고 성경의 예언도 깨닫지 못한 것입니다. 이것을 알아야 합니다.  별을 보지 못하면 ‘별 볼 일 없는 인생’이 됩니다. 예수님을 만나지 못하면, 따라가지 않으면 결국은 실패와 좌절에서 벗어 날 수 없습니다. 나중에 후회해도 이미 때는 늦으리 입니다. 최근 박근혜대통령 최순실 사건을 보고 들으면서 가장 안타까운 일은 그 주변의 그 똑똑하다는 사람들이 영적인 눈이 어두워 진실을 보지 못하고 그들이 살아갈 바른 방향을 찾지 못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돌이킬수 없는 죄 저질러 놓고 뉘우치면서 울어도 때는 늦으리 으음 때는 늦으리” 문주란이 부른 동숙의노래 가사입니다. 지금이 눈을 뜰 때인데 아직도 눈을 감고 허공에 손을 휘젖고 있으니 때는 늦으리 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인생의 길이 지금 잘못 가고 있다는 것을 알지 못하고 무작정 지옥 길로 가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지요. 그들은 구원의 길이 있다는 것을 모릅니다. 온갖 세상 것에 휩쓸려 삽니다. 요즈음 어린이 집 보모들의 유아 폭력을 큰 죄로 다스립니다. 그것을 보모들은 잘 압니다. 그런데도 여전히 유아 폭력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요즈음 성폭력 사건을 가장 큰 사회악으로 취급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여전히 대학생들이 심지어 외교관들이 성폭력을 일으켜 자신의 인생을 망치는 것은 물론이요 나라까지 망신을 시키고 있습니다. 요즈음 일부 여당의원들이 국정조사에서 일으킨 불미스런 의혹들로 국민적인 분노를 사고 있는데 여전히 자신이 잘했다고 변명만 말함으로 의혹만 더 키우고 있습니다. 왜 이런 일들이 일어납니까?  영혼의 눈이 멀어 있어 진리를 보지 못하고 정의를 찾지 못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인생의 큰 별 예수 그리스도는 멀리 떠 있지 않습니다. 눈을 들어 하늘을 보면 바로 내 머리 위에 밝은 빛을 비추고 있는 예수그리스도를 발견 할 것입니다. 영의 눈을 떠 진리의 길을 보십시오. 정의로운 세상을 바라보십시오. 그곳에 예수그리스도께서 우리를 부르고 있음을 보게 될 것입니다. 그냥 올테면 오고 말테면 말라라고 하심이 아니요 우리를 간절히 부르십니다.

528장 찬송 2절
 간절히 오라고 부르실 때에 우리는 지체하랴
 주님의 은혜를 왜 아니 받고 못들은 채 하려나
 오라 오라 방황치 말고 오라
 죄 있는 자들아 이리로 오라 주 예수 앞에 오라

어떤 사람들은 인생의 큰 별이신 예수그리스도를 따라 가다가 그만 중간에 별을 놓쳐버린 사람들이 있습니다. 엉뚱한 별을 찾아 엉뚱한 인생의 길로 가다가 멸망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예수님을 믿다가 낙심하였거나 이단에 빠져버린 사람들입니다. 하늘을 바라보다 그만 넘어지거나 늪에 빠지기도 합니다. 그 때에도 바로 하늘을 보면 큰별 예수그리스도가 그 위에 계심을 볼 것입니다. 가룟 유다가 예수님을 배신하였습니다. 베드로의 배신도 가룟 유다의 배신이나 엇비슷합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눈을 들어 예수님을 다시 바라보았고 가룟 유다는 바라보지 못했습니다. 예수님을 바라본 베드로는 모든 교회의 반석이 되었고 가룟 유다는 모든 교회의 저주가 되었습니다. 죄는 우리를 넘어뜨리고 악은 우리를 짓밟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죄와 악이 아닙니다. 그 때에 내 눈이 큰 별 예수 그리스도를 향해 있느냐 없느냐 그것이 문제입니다, 바라보는 사람은 구원을 받을 것이요 바라보지 못하면 지옥 길을 갈 것입니다. 죽느냐 사느냐 그것은 나의 눈이 어디를 향하여 있느냐에 결정됩니다.

히12:2에 무엇이라 말씀하였습니까? “믿음의 주요 또 온전케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여기서 바라본다는 말은 ‘뚫어지게 바라보다’ ‘응시하다’ 등의 뜻을 가진 단어입니다. 그러니까 별을 보고 따라가되 끝까지 놓치지 않고 따라가는 게 중요하다는 겁니다.
세상에 살다보면 얼마나 많은 위협이 있습니까? 얼마나 많은 유혹이 있습니까? 우리의 인생에 얼마나 많은 샛길이 있는지 모릅니다. 그럴 때 혹시라도 마음이 흔들리면 곤란합니다. 예수님을 향한 내 눈의 시선을 놓치지 않고 바라보며 잘 따라가야 합니다.

2000년 전 동방박사들이 바라보았던 그때의 그 별은 지금은 보이지 않습니다. 그러나 동방박사들이 바라보았던 별보다 더 큰 별 예수그리스도의 별이 오늘 우리 라온 코이노니아 위에 머물러 계심을 믿으시길 바랍니다. 우리는 항상 우리위에 떠 있는 큰 별 예수그리스도를 바라보며 살아가야 합니다. 그것이 오늘 태어나신 아기 예수님이 우리에게 들려주시는 크리스마스 캐롤 입니다. 제가 그 캐롤을 부르겠습니다.

옛날 어린시적 제가 눈만 뜨면 부르던 어린이 노래가 있습니다.
반짝 반짝 작은별 입니다

반짝 반짝 작은별 아름답게 비치네 서쪽하늘에서도 동쪽하늘에서도
반짝 반짝 작은별 아름답게 비치네

 

중국어 버전  小星星
​一闪一闪亮晶晶 满天都是小星星  이쌴이쌴 리앙찡찡 만티엔또우쓰 시아오씽씽
​挂在天上放光明 好像许多小眼睛  ​꽈짜이 티엔샹 팡꽝밍 하오시앙쉬뚜어 시아오얜징
一闪一闪亮晶晶 满天都是小星星  이쌴이쌴 리앙찡찡 만티엔또우쓰 시아오씽씽

일본어버전
​きらきら光る お空の星よ        키라키라 히카루 오소라노 호시오
まばたきしては​ みんなを見てる  마바타키 시테와 민나오 미테루
​きらきら光る お空の星よ​        키라키라 히카루 오소라노 호시요​

라온코이노니아 버전
반짝 반짝 큰- 별     하늘 높이 떠있네
베들레헴 하늘에      우리마음 속에도
반짝반짝 예수님 별  라온코이노니아의 별

메리크리스마스 성탄절을 맞이하여 큰 기쁨과 평화가 여러분과 온 가정에 충만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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