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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병호목사의 교회이야기

전병호 목사의 설교



2016년 11월 27일 대강절 주일아침예배 마 5:13-216 라온코이노니아의 언덕위에 빛

 

 

유대교의 경전인 탈무드에 보면, 머리가 둘 달린 사람이 태어났습니다. 이 사람은 자기가 한 사람인지 두 사람인지 스스로 분별하지 못하고 늘 의심스러웠습니다. 그래서 지혜자에게 물었습니다.

“내가 한 사람입니까? 두 사람입니까?” 그러자 지혜자가 말하기를 뜨거운 물을 한 쪽 머리에 부을 때 두 머리가 동시에 뜨겁다고 고통스러워하면 한 사람이고, 머리 하나만 뜨겁다고 하면 두 사람이라는 분별법을 알려주었습니다. <국민일보, 2007. 8. 3. 참조>

 

함께 느낄 수 있으면 한 사람이고 함께 느낄 수 없으면 두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어제 저녁 200만 촛불 집회를 슬프고 안타깝고 아픈 마음으로 인터넷 TV로 보았습니다. 서울 광화문 광장에 대학생들도 있고 노인들도 있고 어린아이를 안은 엄마들도 있고 노동자도 있고 농민도 있고 회사원도 있고 여학생들도 있고 초등학교 학생들도 있었습니다. 비록 서로 알지도 못한 그들이지만 하나 되어 같은 마음으로 함께 촛불을 키고 추운 광화문 광장을 뜨겁게 밝혔습니다. 저도 비록 인터넷으로 보고 있지만 어느덧 저도 마음 안에 촛불을 켜고 그들과 함께하고 있었습니다. 참으로 우리나라 정치가 혼돈과 어둠움에 빠져 언제 새벽이 올 것인가? 어제 밤에도 찬비가 내리는 광화문 광장을 촛불로 뜨겁게 달군 함성이 아직도 귀에 쟁쟁합니다. 함께 아픈 마음으로 불붙였던 촛불이 기쁨의 촛불 되어 우리나라를 더욱 환하게 할 것입니다. 그 함성 속에 희망의 서광이 비쳐오는 것을 느끼게 됩니다. 그러나 참 한심스러운 것은 여당이란 새누리당의 몸은 하나인데 머리가 둘이 되어 서로 다투고, 야당들도 목적은 하나인데 머리들이 서로 달라 딴 소리들을 하고 있어 국민들을 더욱 실망시키고 있는 모습이 안타깝습니다.

 

갈릴리 호수 인근에 예수님이 오르시어 제자들에게 산상보훈을 전하신 얕으막한 산이 있습니다. 산이라기보다는 언덕이라고 말 할 수 있습니다. 그곳을 사람들은 팔복산이라고 합니다. 팔복산은 히브리 말로 ‘하르 하 오셰르’ 즉, 복의 산을 의미합니다. 이곳에 로마카톨릭의 ‘팔복산 교회’가 세워져 있고, 교회 옆으로 숲이 무성하게 자란 나지막한 언덕이 하나 있는데, 전형적인 갈릴리 지역의 낮은 언덕 산 모양을 하고 있습니다. 이곳은 옛날 유대인들이 절기나 행사가 있을 때마다 모여 랍비 등 말씀 맡은 자들의 설교를 듣는 곳으로도 전해지고 있는 장소입니다. 성지 순례자들은 이 팔복산 교회를 으레 방문하여 그 옛날 예수님의 말씀을 상기하고 있습니다.

 

언덕 위에서(마5:1) 제자들에게 예수님은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니,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고 가르치셨습니다. 예수님의 제자 된 사람에게는 모름지기 소금의 사명과 빛의 사명이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고 따르는 사람이라면 그 어떤 직업으로 어떤 생활을 하던지간에 어디서다 언제나 소금과 빛의 사명을 가지었다는 것입니다. 소금사명은 무엇입니까? 썩어져 가는 것을 썩지 않게 하는 사명입니다. 빛의 사명은 어둠은 곳을 환하게 밝힐 사명입니다. 일리 사회 그 어느 곳에 썩어져 가는 것이 있거나 어두운 곳이 있다면 그것은 우리가 살고 있는 사회에서 기독교인으로 소금과 빛의 사명을 제대로 하고 있지 않고 있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소금의 사명에 대해서는 다음에 말씀드리고 오늘은 빛의 사명에 대해 말씀드리려 합니다. 그런데 기독교인들 가운데 어떻게 어두움을 몰아내는 빛의 사명을 감당할 것인가? 어렵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시위하는 이들이 촛불을 켜들 듯이 우리는 이것을 알아야 합니다. 이미 우리 안에 촛불이 켜 있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8장에 보면, 예수님께서 “ … 나는 세상의 빛이니 나를 따르는 자는 어둠에 다니지 아니하고 생명의 빛을 얻으리라”(요8:12) 고 하셨습니다. 예수를 믿는 사람은 이미 예수님으로부터 생명의 빛을 받은 사람입니다. 이미 우리 안에 생명의 촛불이 켜 있습니다. 어떤 여당 국회의원이 촛불은 바람이 불면 꺼진다는 말을 하였다는데 바람이 불면 촛불은 옮겨 붙습니다, 더 많은 사람들에게 촛불이 옮겨 붙듯이 우리안에 있는 생명의 빛은 어려울수록 힘들수록 더 어두울수록 그 빛이 더 많은 사람에게 전달됩니다. 지금 이 세상에 20억이 넘는 기독교인이 있다는 것은 20억이 넘는 생명의 빛이 켜져 있다는 것을 말합니다.

 

30여 년 전 저희가 부산 남천중앙교회에서 목회할 때 한 청년 회장이 있었습니다. 지금은 굵직한 중년이 되었는데 아직도 사모랑 핸드폰 인터넷으로 소식을 주고받고 있습니다. 어제 사모에게 띄어진 인터넷 소식에 교회장로라 하는 이정현 새누리 대표가 탄액을 반대하는 여당 의원을 예수님을 배신한 가룟유다니 베드로라 하면서 비난하고 있는데 그러면 박근혜대통령은 예수고 반대하는 국민들은 예수를 못 박으라고 소리친 유대인들이냐 이런 말도 안 되는 무식한 말을 하는데 왜 교회는 침묵하고 있는가하면서 매우 안타까워하는 글을 썼습니다. 그래서 아내 몰래 아내의 핸드폰으로 교회는 침묵하고 있지 않고 있다 다만 드러나 있지 않기 때문이라는 답신을 써서 보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가운데 “너는 구제 할 때에 오른손이 하는 걸 왼손이 모르게 하라(마 6:3)”는 말씀이 있습니다. 그래서 기독교인들은 자신의 선행을 다른 사람이 모르게 하는 습관이 있습니다. 여기서 구제라는 말이 헬라어로 ‘엘레에모쉬네’라는 말인데 이 말은 ‘긍휼’ 자비‘를 뜻한 ’엘레오스‘에서 왔습니다. 즉 우리가 만일 좋은 일을 할 때 이는 하나님의 사랑의 역사로 내가하는 나의 자랑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이 되기 때문에 드러내지 않으려 합니다. 만일 좋은 일을 하고 나의 자랑으로 드러난다면 오히려 이는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는 죄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가능한 나를 숨기고 하나님의 사랑 하나님의 영광만이 드러나기를 원하는 것이 기독교인의 믿음입니다. 따라서 오늘날 우리나라 곳곳에 이름도 없이 드러냄도 없이 묵묵히 그리스도의 소금과 빛의 역할을 하는 수많은 기독교인이 있습니다. 그런데 세상 사람들은 드러내기를 좋아하여 나타나지 않은 것은 아예 없는 것으로 생각하고 기독교를 비난하고 교회를 비판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불가불 극히 일부분을 나타낸다면, 몇 년 전 통계입니다만, 종교관련 사회복지법인 총 372개중 기독교 194(52.15%), 전국 종합사회복지관 총414개중 기독교 188개(45%), 노인복지시설 88개중 기독교 54개(62.85%), 전체 지역아동센터 3013개중 기독교 1601개(53.13%), 전국 사립 초, 중, 고 361개중 기독교 259(72%), 대북지원민간단체 79개중 기독교 22개(36%)이고 지난 3년간 북한을 지원한 총지원액중 기독교 40.29%, 해외원조단체 협의회 47개중 기독교 17개(36%), 전국 종교병원 169개중 기독교 49개(29%), 사랑의 장기기증운동본부 장기기증신청자 586,407명중 기독교 363,496명(62%) 그리고 2007년 12월 7일 서해안기름유출 봉사 1,226,730명중 기독교인이 700,000명(57.06%)이었습니다.

 

어떻습니까? 이 정도면 기독교가 세상에서 큰일을 하고 있는 것 아닙니까? 기독교는 다른 종교보다 심지어 어떤 때는 정부보다 더 많은 일을 하고 있습니다. 복지, 학교, 병원, 봉사, 어떤 분야에서도 기독교는 월등하게 봉사를 하고 있습니다. 교회가 세상으로부터 비난받는 것은 교회가 아무 것도 안 하고 있거나 항상 잘못하기 때문이 아닙니다. 교회는 정도 이상 하고 있고 분에 넘치게 잘하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회는 비판받고 있습니다. 왜 비판받느냐? 우선 교회는 자신이 한 일을 홍보하지 않습니다. 하나님만 아시면 되지 하고 숨겨왔습니다. 그런데 왜 어떤 사람들은 기독교를 비난하고 있습니끼?

 

교회가 세상보다 더 나빠서 비난당하는 것이 아닙니다. 세상은 깨끗한 데 교회만 유달리 더러워서 문제가 된 것이 아닙니다. 상대적으로 보면 교회는 훨씬 깨끗하고 좋은 일도 훨씬 많이 합니다. 다만 이 차이가 있습니다. 세상의 죄는 잘 안 드러나고 교회의 죄는 잘 드러납니다. 검은 종이에 잉크를 엎질렀다면 잘 보이지 않습니다. 그러나 백지에 잉크 한 방울은 금방 눈에 띕니다. 세상은 죄가 드러날 때까지 숨기다가 드러나면 끝까지 오리발입니다. 그러나 교회는 언제나 공개되어 있고 드러나면 숨길 수 없습니다. 세상은 본래 죄짓는 곳이기 때문에 수 많은 사람이 죄를 지어도 그런가 보다 합니다. 그러나 교회는 본래 죄 없는 곳으로 생각하다가 어느 한 사람 무슨 죄가 드러나면 사람들이 “아니, 교회가?” 하고 놀랩니다. 일반인은 죄를 지어도 그런가 보다 합니다. 그런데 목회자는 죄를 지으면 안 된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더 비판을 받습니다. 한마디로 교회는 언덕위에 집입니다. 수많은 사람이 바라보고 있고 다 노출되어 있습니다. 말하자면 세상은 골짜기에 있고 교회는 언덕위에 있습니다. 그래서 늘 표적이 됩니다. 교회의 잘못이 없어야 하지만 혹시 잘못이 있어도 교회를 부수지 말아야 할 이유가 여기 있습니다. 죄를 지은 것은 교회가 아니고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기독교인들을 더욱 조심하고 경성하고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는 죄를 지어서는 안 됩니다. 기독교인들은 빛 되신 예수님을 따라 사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므로 언덕위에 집에 불이 켜 있으면 어디서나 보입니다. 우리 기독교인들은 언덕위에 있는 집에 불이 켜있듯 그렇게 세상 사람들이 바라보이는 곳에 불 켜진 사람들입니다. 우리 기독교인들은 어디서나 언제나 언덕위에 불 켜진 집입니다. 무슨 불을 킵니까? 16절처럼 불을 켜야 합니다.

 

“이같이 너희 빛이 사람 앞에 비치게 하여 그들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마 5:16)

 

예수 믿는 사람들이 지금까지 오른손이 하는 것을 왼손도 모르게 하라는 말씀에 따라 착한 행실을 아무도 모르게 하려는 생각을 하여 왔습니다. 그러나 바울 선생님이 불가불 자랑하리라는 말씀대로 어두운 세상을 밝히는데 산위에 집에 불이 켜있듯이 다른 사람 모르게 불을 켜서는 안 됩니다. 일단 불을 켜면 다른 사람들이 알게 됩니다. 광화문 광장의 사람들이 정의와 진실의 촛불을 켜 들 듯이, 여기에 예수의 정의와 진리와 자유의 생명의 불이 켜있다고 우리의 믿음의 촛불을 든 손을 높이 들어 온 사방을 비추어야 합니다.

그러나 주의할 것은 그렇게 드러내어 다만 자기의 의를 나타내려 해서는 안 됩니다. 자기가 칭찬 받고 박수 받고 상 받고 영광 받으려는 생각을 하여서는 안 됩니다. 왜냐하면 우리 기독교인들이 높이 든 빛은 나의 빛이 아니라 내안의 예수의 빛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나라에서 제일 큰 교회의 목사가 며칠 전에 이런 시국에 대통령표창을 받았다고 인터넷에 소개되었습니다. 그 소개 글을 보고 칭찬할 마음보다 아니 지금이 어느 때라고 같은 동역자로 신학 선배로 부끄러운 마음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목사가 주의 종으로 모든 행한 일은 예수의 이름으로 한 일로 자신이 훈장을 받아서도 안 됩니다. 모든 영광은 하나님께 돌리게 해야 합니다(마5:16). 전에 군산복음교회 목사이셨던 고 조용술 목사님은 박정희 군사정권과 전두환 군사독재시절에 민주화투쟁에 앞장서 많은 억압을 받은 분입니다. 김영삼대통령 시절 민주화 투쟁을 하고 옥고를 치루고 억압을 받았던 이들에 대한 포상을 주었습니다. 그래서 많은 이들이 얼마간의 돈을 정부로부터 받았습니다. 그러나 고 조용술 목사님은 거절하였습니다. 내가 무슨 보상을 받고자 민주화 운동을 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명령으로 하나님이 시키셔서 한일인데 무슨 포상을 받느냐고 거절하였던 것입니다. 그러나 훈장은 거절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저는 노무현대통령과 10년 동안 함께 민주화 인권운동을 하였습니다. 1987년 민주화 유월 항쟁 때 부산 민주화 운동본부의 공동대표로서 부산 길거리를 데모대들과 함께 최루탄 가스를 뒤집어쓰며 시위를 하였습니다. 그 당시 스위스 세계교회협의회에서 추천을 받아 전액장학금으로 보세이 인스트튜트에 유학을 갈 기회가 있었습니다. 그때 저는 이 민족적 역사적인 현장을 떠나 나의 영달을 바라고 갈수 없다고 거절을 하였습니다. 노무현대통령이 대통령이 된 후 청와대에 오라고 하였지만 가지 않았습니다. 지난번 문재인씨를 만났더니 저를 찾다가 외국에 간줄 알았다고 합니다. 저는 민주화 인권운동을 한 것이 하나님의 명령과 그 뜻에 따랐을 뿐 제 개인의 명예 때문이 아니었던 것입니다. 다만 목사로서 부끄럽지 않고 예수그리스도의 종으로서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지 않기를 바랐을 뿐이었습니다.

 

다시 말해 선행은 우리가 해도 영광은 하나님이 받으셔야 한다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아무리 큰일을 멋지게 했어도 예수 믿는 사람의 입에서는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하나님께서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축복입니다.”라고 모든 영광을 하나님께 돌려야 합니다.

 

우리는 부족합니다. 우리는 어리석습니다. 우리는 여전히 어두운 세상가운데 살고 있습니다. 어두운 세상을 밝힐 능력도 없습니다. 우리 스스로 빛을 낼 수는 없습니다. 어떤 사람이 말하기를 나는 믿음의 그릇이 작아 세상의 빛은 고사하고 30촉 전구도 되지 못 합니다. 라고 말합니다. 어떤 이는 또 말하기를 광화문 광장의 촛불은 고사하고 겨우 반디불이 불 정도나 될까요? 그런 믿음의 불을 켜봤자 어찌 세상의 빛이 되겠습니까? 세상의 빛 되는 것 포기하렵니다. 라고 말합니다. 그래서 자신의 가정도 밝히지 못하고 자기 자신도 그냥 어둠에 묻혀 사는 기독교인들이 있습니다.

 

형설지공(螢雪之功)이란 말이 있습니다. 옛날 중국 진나라의 차윤(車胤)이란 학자가 너무나 가난해서 반딧불로 글을 읽었고. 손강(孫康)이란 사람은 눈 빛으로 글을 읽었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반디불이를 몇 마리나 잡아야 실제로 책을 앍을 수 있는지 시험해 본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 결과 2천 마리 정도를 잡아 불을 밝히니 어두운 방안에서도 웬만큼 글을 읽을 수 있었다고 합니다. 만일 반디불이의 불 정도나 될 그런 기독교인들이 2000명 모인다면 책을 읽는 것이 아니라 세상을 밝히는 언덕위의 집에 빛이 될 것입니다. 나의 믿음은 보잘 것 없어 불빛이라고 해 봤자 반디불이 불 정도라고 하더라도. 아니요 이 작은 빛으로도 세상을 밝히리라는 믿음을 가진다면 여기에 성령의 불이 함께 하시니 세상을 밝힐 언덕의의 빛이 될 것입니다. 믿음으로 행하는 나의 작은 선행이 나의 작은 진실이 나의 작은 정의로움이 세상을 밝히는 불씨가 될 것입니다.

 

국민일보 2007. 5. 26)에 소개된 다음과 같은 우화 이야기가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지게를 지고 물을 날랐습니다. 지게 오른쪽과 왼쪽에 각각 항아리가 하나씩 있었습니다. 왼쪽은 금이 간 항아리였습니다. 물을 가득 채워서 출발했지만 집에 오면 왼쪽 항아리는 반쯤 비어 있었습니다. 물이 샜기 때문입니다. 반면에 오른쪽 항아리는 가득 차 있었습니다. 왼쪽 항아리는 주인에게 너무 미안한 마음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주인에게 요청했습니다. “주인님, 나 때문에 항상 일을 두 번씩 하는 것 같아서 죄송해요. 나를 버리고 새것으로 쓰세요.” 그러자 주인이 대답했습니다. “나도 네가 금이 갔다는 것을 안다. 그걸 알면서도 일부러 바꾸지 않았다. 우리가 지나온 길 양쪽을 바라보아라. 오른쪽에는 아무 생명도 자라지 않는 황무지이지만 왼쪽에는 아름다운 꽃과 풀이 무성하게 자라고 있다. 너는 금이 갔지만 너로 인해서 많은 생명이 자라나는 모습이 아름답지 않느냐? 나는 그 생명을 즐긴단다.”

 

많은 사람이 완벽함을 추구합니다. 자신의 금 간 모습을 수치스럽게 여깁니다. 가정에 금이 간 것, 경제적으로 금 간 것, 이런저런 다른 사람에게 내놓기 싫은 금간 것을 수치로 여기고 아무 것도 하지 않으려고 합니다. 그러나 이것을 알아야 합니다. 오늘날 우리 정치가 혼돈스럽게 된 것은 금이 간 인생 때문이 아니라 금이 간 줄 모르고 여전히 자기가 완벽한 줄 아는 거짓 인생들 때문입니다. 광화문 광장에 사람들이 들고 있는 작은 촛불 하나하나는 작은 촛불이지만 130만새가 모이니 정권을 바꾸는 거대한 불빛이 되는 것처럼, 비록 우리가 완벽한 믿음은 아니더라도 그것을 알고 이는 우리의 작은 빛이 언덕위에 있다면 그래서 두 사람 세 사람 모여 있다면 그만큼 세상을 밝히는 빛이 될 것입니다.

 

어떤 새누리당 국회의원이 말하길 광화문 광장에 100만 명이 모였다 하더라도 우리나라 인구 5천만 중에 4900만명은 모이지 않았다고 말합니다. 그러니 100만 명의 촛불 걱정할 것 없다고 말하였습니다. 그렇습니다. 아마 촛불 시위를 싫어하는 사람들도 있을 것이고 나가고 싶어도 마음이 내키지 않았거나 자기 일에 바빠 안 나간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안 나갔다고 박근혜 대통령과 최순실을 반대하지 않는 것은 아닐 것입니다.

이런 교인들도 있습니다. 나는 언덕 위의 집에 환한 불을 켜고 싶습니다. 그러나 제 성격이 소심하고, 나이도 많고, 이거저것 할 일도 있어 언덕위에 빛을 높이 들지 못합니다. 마음 안에 예수님의 생명의 빛을 간직하였지만 이런 저런 이유로 감히 밖으로 불 밝히지 못하는 교인들도 많이 있습니다. 그렇다고 세상이 좋다거나 세속의 풍속을 따라가지는 않습니다. 착한일 하고 싶어도 못하고 의로운 일을 하고 싶어도 못하는 사람들, 이러한 믿음이 잘못된 걸 까요? 라고 물어온 사람도 있습니다.

 

빛에 대해 조금 지식을 가져 봅시다. 빛에 대한 개념이 변했습니다. 과거에는 눈으로 보여지는 붉은 빛을 이것을 가시광선이라고 하는데 이 보이는 빛을 빛이라고 생각하였으나 지금은 빨간색 가시광선보다 보이지 않는 파장이 긴 적외선(750nm~1mm)과 파장이 짧은 자외선(10~390nm), 그리고 자외선보다 파장이 더 짧은 X선 등의 전자기파를 빛에 포함합니다. 적외선을 의료용으로 쓰일 때 소독, 멸균을 하거나 근육을 치료하는데 사용되고 있습니다. 물리치료실에 가면 적외선 치료기로 통증완하 혈액순환을 위해 쪼여 주고 있습니다. 자외선도 역시 살균력을 가지고 있어 대장균 디프테리아균 이질균등을 죽일 때 사용합니다. 특히 비타민 D2를 생성시켜 구루병을 예방합니다.

 

왜 이런 말씀을 합니까? 눈에 보이는 빛만 빛이 아닙니다. 눈에 보이는 믿음의 행실만 믿음의 역사가 아닙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 적외선 자외선이 우리 몸의 건강을 돕듯이 비록 눈에 보이지 않는 그러나 내 마음 속에 예수의 생명의 빛을 간직하고 있다면 비록 광화문 광장에 나가 촛불을 켜들고 있지 않아도 나라를 사랑하는 수많은 국민들이 있듯이, 세상을 비추는 빛을 환하게 밝히지 않더라도 이 세상을 밝히는 수많은 믿음의 빛들과 함께 어두운 세상을 치유하는 빛으로 빛 된 인생을 살아가는 기독교인들도 많이 있습니다. 마치 말을 못하지만 마음으로 말을 하듯, 노래는 못 부르지만 마음으로 노래 부르듯, 비록 청산유수로 큰소리로 기도는 못하지만 마음으로 기도하듯이 우리가 언덕위에 집에 함께 있다면 바로 모두 함께 적외선 자외선처럼 세상을 치유하는 빛이 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라온코이노니아 성도 여러분!

오늘은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심을 기다리는 대강절 주일입니다. 예수님은 이 땅에 빛으로 오셨고 어둠과 죄악세상을 밝히셨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 기독교인은 세상에 빛이 되어야 합니다. 예수 믿는 사람은 언덕위에 빛이 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어둡고 답답한 세상 사람들의 마음을 밝게 해주는 언덕위에 빛이 되어야 합니다.

 

이 어둡고 죄악 세상가운데 슬퍼하며 탄식하며 이 나라를 어찌할까 앞으로 이 나라 운명이 어찌 흘러갈 것이며 또 어떤 세상이 우리 백성들에게 대못을 막을 것인가 우리 자라나는 청소년 어린아이들이 앞으로 어찌 살것인가? 그 해답은 오늘 기독교인들이 언덕위의 빛을 비추고 있는가에 있습니다.

그럼으로 언덕위의 빛을 비추어야 할 한국교회가 새로워져야 합니다. 꺼져가는 진리와 자유 정의의 생명의 예수의 빛을 다시 활활 타오르게 해야 합니다. 한국교회들이 언덕위의 횃불되어 빛으로 살아가야 합니다. 우리는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 모세의 하나님, 엘리야의 하나님을 믿는다면 어찌 세상이 어둡다고 탄식하고 혼란스럽다고 슬퍼만 할 것입니까?

 

슬픈 마음이 듭니다. 예루살렘을 바라보시며 우시던 예수님의 마음으로 오늘을 이 나라를 봅니다. 어떻게 어둠을 밝히고자 촛불을 든 사람들에게 진정한 희망의 빛을 보여 줄수 있습니까? 박근혜 대통령이 물러나면 또 어떤 대통령이 들어설 것입니까? 과연 그 다음 대통령도 우리가 기대할 만한 대통령으로 정치를 할 것인가? 여전히 혼돈과 어둠의 세상가운데 그 누가 대통령으로 적합 할 수 있을까요? 이제 다시 촛불을 들지 않아도 좋을 그런 세상이 올 수 있을까요? 우리는 어디서 그 누구에게서 그 해답을 들을 수 있겠습니까? 다만 우리는 긍휼의 하나님께 기도할 뿐입니다. 홍해를 가르신 하나님, 불가능이 없으신 하나님, 이 땅을 긍휼히 여기소서. 이 땅에 긍휼을 베푸소서! 긍휼을 베푸소서! 긍휼을 베푸소서! 하나님의 얼굴빛을 다시 이 땅에 비취사 긍휼을 베푸소서! 하나님의 권능이 다시 이 나라에 보이게 하소서! 이 나라의 해안 지대에 임하게 하소서! 도시들에게 임하게 하소서! 이 나라의 서울에 임하게 하소서! 이 나라의 심장부 청와대에 임하게 하소서! 이 땅에 하늘의 빛을 비추어 주소서. 이 나라의 정치도 경제도 인간의 능력으로 조용해 질 수 없습니다. 오직 '예슈아 하마쉬아흐', 메시아 예수의 이름이며, 모든 이름에 뛰어난 이름이며, 유일한 해답이자, 유일한 소망이며, 언덕위의 도시가 다시 구원의 빛을 발하고, 우리가 다시 찬송과 영광이 될 수 있게 하는 유일한 길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유일한 해답인 줄 믿습니다. 성령이여, 불의 혀 같이 언덕위에 임하시여, 성령의 횃불이 이 언덕에서 횃불처럼 빛을 발하여 주소서.

 

우리 라온코이노니아는 언덕위의 집이라 하겠습니다. 우리는 오늘 이 집에서 빛 되신 예수그리스도로부터 성령의 생명의 빛을 전달 받았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라온코이노니아의 “빛의 자녀들”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우리로 빛의 자녀들이 되게 하신 하나님의 목적이 있습니다. 그 목적을 베드로는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오직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 데서 불러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자의 아름다운 덕을 선전하게 하려 하심이라”(벧전2:9)

 

그렇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아름다운 덕을 선전하기 위하여 이 땅에 존재하도록 세움을 받은 “빛의 자녀들”입니다. 설교 처음에 예화로 소개한 몸이 하나요 머리가 둘인 사람이 아니라 광화문 광장에 어둠을 밝힌 200만 촛불 시위대들이 서로 다른 사람들이지만 마음이 하나요 목적도 하나인 것처럼, 우리는 이 역사의 어둠과 죄악의 세상 광장에 오신 몸 된 예수님의 지체들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마음도 하나요 뜻도 하나요 세상을 밝히는 하나 된 언덕위의 빛으로 살아가야 하겠습니다.

 

하나님의 은혜와 축복이 예수님의 오심을 준비하는 우리 모두에게 함께 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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