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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병호목사의 교회이야기

전병호 목사의 설교



2016년 9월 18일  주일아침 예배 마 16:13-20  라온코이노니아의 고백

 

1998년, 택지 개발이 한창이던 경북 안동시 정상동 기슭에서 주인 모를 한 무덤의 이장(移葬) 작업이 있었습니다. 시신을 보호하는 외관(外棺)은 갓 베어 놓은 듯 나뭇결이 살아 있어 혹시 최근에 조성된 무덤이 아닌가 추측 되기도 하였습니다. 그러나 야간까지 이어진 유물 수습 과정에서 무덤은 수백 년 전의 것으로 판명되었습니다. 유물을 절반쯤 수습했을 무렵 죽은 자의 가슴에 덮인 한지(韓紙)를 조심스레 벗겨서 돌려 보니 한글로 쓴 편지가 있었습니다. 남편의 갑작스런 죽음을 맞으며 아내가 쓴 편지였습니다.  수백 년 동안 망자(亡者)와 함께 어두운 무덤 속에 잠들어 있다가 이장하는 과정에서 세상에 모습을 드러낸 것입니다. 유물에서 확인한 단서를 정리하면 묻힌 이는 때는 1586년으로 31세 나이에 죽은 고성(固城) 李氏 가문의 응태라는 사람 이였습니다. 이응태의 아내는 사랑하는 남편을 잃은 슬픔을 편지에 고스란히 전하고 있습니다. 이 편지에는 죽은 남편을 꿈속에서라도 다시 보기를 바란다는 내용을 담고 있었습니다.

430년 전 죽은 남편을 향한 아내의 애절한 사랑 고백을 들어 보십시오. 그 일부만 소개 하겠습니다,


< 원이 아버지께

당신 언제나 나에게 "둘이 머리 희어지도록 살다가 함께 죽자"고 하셨지요.
그런데 어찌 나를 두고 당신 먼저 가십니까? 나와 어린 아이는 누구의 말을 듣고 어떻게 살라고 다 버리고 당신 먼저 가십니까?
당신 나에게 어떻게 마음을 가져왔고, 나는 당신에게 어떻게 마음을 가져왔었나요?
함께 누우면 언제나 나는 당신에게 말하곤 했지요.
"여보, 다른 사람들도 우리처럼 서로 어여삐 여기고 사랑할까요? 남들도 정말 우리 같을까요?”
어찌 그런 일들 생각하지도 않고 나를 버리고 먼저 가시는 가요.
당신을 여의고는 아무리 해도 나는 살수 없어요. 빨리 당신에게 가고 싶어요. 나를 데려가 주세요.
...............................................................................
이 편지 자세히 보시고 내 꿈에 와서 당신 모습 자세히 보여 주시고 또 말해 주세요.
나는 꿈에는 당신을 볼 수 있다고 믿고 있습니다. 몰래 와서 보여 주세요
하고 싶은 말, 끝이 없어 이만 적습니다. >


사람들이 서로 사랑을 고백한다면 그만큼 인생은 행복할 것이고 그만큼 세상은 살맛나는 세상일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고백에 사람들은 너무 인색합니다. 옛날 여인들은 사랑한단 말 못하고 옷고름 입에 물고 입만 빵긋 할 뿐이였습니다.

여러분은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누구에게 사랑한다고 좋아한다고 고백해본 적이 있습니까? 당신 없는 밤은 달 없는 밤이요, 앙꼬 없는 찐빵이요, 김빠진 사이다 맛이요 뭐 이런 말 해 본적이 있습니까? 저는 40여 년 전 그래 본 적이 있습니다.  

아무 말도 못해서 인사조차 못해서
너의 앞에만 서면 바보 같아서
내 맘 속 깊이 너를 숨겨둔 채로
혼자 애만 태우는 바보 겁쟁이라서
설레는 가슴을 달래보아도 감출 수 없어서
이제 더는 가슴 터질 것만 같아서
용기내 좋아한다고 사랑한다고 세상
그 누구보다 더 널 원한다고
네가 내 전부라는 걸 너 뿐이란 걸
다시 태어나도 너 하나뿐이란 걸
...................
내 모든 걸 다 줄게 내 곁에 있어줘
(좋아한다고 사랑한다고 / 권희안)

그런데 결혼 45년이 지나면서 저는 요즈음 이런 고백을 해 봅니다.

젖은 손이 애처로워 살며시 잡아본 순간
거칠어진 손마디가 너무나도 안타까웠소
시린 손끝에 뜨거운 정성 고이접어 다져온 이 행복
여민 옷깃에 스미는 바람 땀방울로 씻어온 나날들
나는 다시 태어나도 당신만을 사랑하리라

미운 투정 고운 투정 말없이 웃어넘기고
거울처럼 마주보며 살아온 꿈같은 세월
가는세월에 고운 얼굴은 잔주름이 하나둘늘어도
내가아니면 누가살피랴 나하나만 믿어온 당신을
나는 다시 태어나도 당신만을 사랑하리라

-아내에게 바치는 노래(하수영) 가사

 

 
서로 사랑한단 말에 인색하지 맙시다. 남편과 아내사이에 사랑하다고 말하시고 부모와 자식간에 사랑한다고 말하시고 고부간에도 사랑하고 이웃 간에도 사랑하고 나는 당신을 사랑한다고 말한다면 세상은 참으로 아름다울 것입니다. 그러나 사랑 없는 거리에 멸시와 천대, 찔레와 가시덤불이 얼마나 사람들의 마음을 슬프게 하고 가슴을 아프게 하는지요. 기독교를 믿는다는 것은 사랑을 고백하는 사람이라는 것을 말해줍니다. 그러나 과연 그렇습니까?

 

우리 기독교는 고백 신앙을 강조합니다. 고백 없는 신앙은 아직 예수를 믿는 믿음이 아닙니다. 롬 19:9 “네가 만일 네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며 또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네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받으리라”고 말씀하였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다면 입으로 시인해야 합니다. 옛날 순교자들에게 권력자들이 묻습니다. 너는 예수를 믿는가? 많은 순교자들이 “예 나는 예수님을 나의 구주로 믿습니다.”고 당당하게 고백하였습니다. 기독교는 이 고백신앙을 통해서 지난 2000년 동안 믿음이 이어져 오게 된 것입니다.


마태복음 10장 32~33절을 보면 “누구든지 사람 앞에서 나를 시인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그를 시인할 것이요 누구든지 사람 앞에서 나를 부인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그를 부인하리라.”


우리 예수님을 나의 주님으로 믿는 사람들은 아주 분명하게 하나님 앞과 사람들 앞에서 “나는 예수님을 나의 주님으로 믿습니다”라고 말 할 수 있어야합니다. 그러면 롬 10:11에 “누구든지 그를 믿는 자는 부끄러움을 당하지 아니하리라.” 주를 시인하고 고백하는 사람은 부끄러울 것 같지만 부끄러움을 당하지 아니하고 감추는 사람은 오히려 부끄러운 시험에 빠져들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마 26:75에 베드로는 어떤 모습이었습니까? 울면서 통곡했다고 그랬습니다. 왜  울면서 통곡합니까? 사람들 앞에서 예수님을 모른다고 부인하고 나서 받은 시험입니다. “네가 예수와 함께 다니는 것 내가 봤어!” “무슨 소리야? 나 그 사람 몰라!” 세 번이나 부인했다가 추악해진 자신의 모습을 보고 나가서 통곡하며 울었던 것입니다. 그런 베드로는 어떤 사람이었습니까?

3년전 어느날 베드로가 갈릴리 호수에서 밤새도록 그물을 던지며 고기를 잡으려 하였지만 허탕질만 했습니다. 아침에 빈배로 돌아와 잔뜩 부어터진 얼굴로 그물을 깁고 있었는데 예수님이 많은 사람들과 바닷가에 오셨습니다. 사람들에게 밀려 예수님은 성큼 베드로의 배에 오르시고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셨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듣는지 말았는지 여전히 베드로는 묵묵히 그물만 깁고 있었습니다. 그런 베드로를 보신 예수님이 베드로에게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으라.”고 말씀하였습니다. 베드로가 말했습니다. “선생이여. 우리들이 밤이 맞도록 수고를 하였으되 얻은 것이 없지마는 말씀에 의지하여 내가 그물을 내리리이다.” 예수님은 어부가 아닙니다. 고기를 잡아보신 적도 없으십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복음을 묵묵히 듣고 있던 베드로는 자신도 모르게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갈릴리 호수 깊은 곳으로 가서 그물을 던졌습니다. 얼마나 고기가 많이 잡혔는지 그물이 찢어질 정도 였습니다. 그리고 동료를 불러 두 배에 가득하게 물고기를 잡았습니다. 베드로는 예수님 앞에 무릎을 꿇고 말했습니다.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나를 떠나소서.” 자신의 보잘 것 없는 모습이 부끄러웠습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너를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 나를 따르라.” 베드로는 즉시 배와 그물을 버려 두고 예수님을 따라나섰습니다. 그리고 베드로는 예수님의 수제자가 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어디를 가시던지 항상 예수님 옆을 따랐습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의 말씀을 귀담아들었고 예수님의 각가지 이적과 기사를 옆에서 지켜 보았습니다. 예수님은 보통사람이 아닌 아주 특별한 분이라는 것을 분명하게 알고 있었습니

어느 날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데리고 가이사랴 빌립보라는 곳으로 가셨습니다. 길가에 앉아 쉬시면서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물으셨습니다. “사람들이 인자를 누구라 하느냐?”제자들이 대답하였습니다. “세례 요한, 엘리야, 예레미야, 선지자 중의 하나라 하나이다” 예수님이 다시 물으셨습니다.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이 때 베드로가 대답하였습니다.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수 에이 호 크리스토스 호 휘오스 투 데우 투 존토스)”
예수님이 말씀하셨습니다. “바요나 시몬아 네가 복이 있도다. 이를 네게 알게 한 이는 혈육이 아니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시니라. 또 내가 네게 이르노니 너는 베드로라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 내가 천국 열쇠를 네게 주리니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마 16;17-19)

우리는 베드로가 예수님을 향한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고 한 말을 베드로의 신앙고백이라고 말합니다. 이 신앙고백이 모든 기독교인들의 신앙고백이기도 합니다. 세례 받을 때 모든 사람은 이 고백을 하게 됩니다. 이 고백을 하지 못하면 결코 기독교인도 될 수 없고 구원 받을 수도 없고 마귀가 틈타게 되고 그래서 천국에 오르지도 못합니다. 이 고백이 교회의 근본이요 마귀를 이기는 능력이요 천국의 열쇄요 기도의 본질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주인이십니다.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리스도라는 말은 구세주를 말합니다. 그 옛날에도 그리고 지금도 영원히 우리 곁에 살아계시는 하나님의 독생 성자 이십니다.  독생 성자란 하나님과 일체되신 분이라는 뜻입니다. 
우리가 믿고 고백하는 예수님은 이런 분입니다. 세상의 그 어떤 종교가 이런 예수님과 같은 교주가 있습니까? 귀신도 예수님 앞에 무릎을 꿇고 세상의 그 어떤 권세도 예수님의 발 앞에 머리를 조아리게 됩니다. 그러므로 이런 고백을 한 사람은 겁내지 않습니다. 세상을 무서워하지 않습니다. 슬퍼하거나 낙심하지도 않습니다. 우리가 믿는 주 예수님이 우리를 지켜주시고 인도해 주시니 우리는 용기를 가지고 담대하게 “주 예수 믿는 힘으로 온 세상 이기네(357)” 세상을 이기며 살아가게 됩니다. 베드로의 고백은 베드로 한사람의 고백이 아니라 예수님을 믿는 모든 기독교인들의 고백이 되기에 오늘도 우리는 세상을 이기며 살아갈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베드로에게 문제가 생겼습니다. 예수님이 재판정에서 재판을 받으실 때에 자신이 예수님으 제자라는 것이 탄로 날까 바 두려웠습니다. 사람들이 너는 예수의 제자가 아니냐고 지적을 할 때에 손시레를 치며 나 예수의 제자가 아니다 예수가 누군지 예수의 예자도 난 모른다 땅에 침을 뱉아  예수님을 저주하고 그에게 예수의 제자가 아니냐고 말한 사람을 칠 듯이 하였습니다. 그때에 새벽닭이 날개 치며 꼭끼오 3번 울었습니다.  이때 베드로가 정신이 번쩍 들었습니다. 전날 밤 마가의 다락방에서 유월절 저녁을 먹을 때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새벽닭이 세 번 울기 전에 나를 세 번이나 모른다고 말하게 될 것이다 라고 하신 말씀이 생각난 것입니다. 그때 베드로는 자기는 죽기까지 예수님을 따를 것이라고 장담하였던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 말씀처럼 두려운 나머지 예수님을 3번씩이나 모른다고 말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베드로는 너무나 부끄럽고 죄책감에 통곡을 하며 울었던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여기서 깨닫게 되는 것이 있습니다. 믿음은 고백입니다. 그러나 이 믿음은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예수님의 놀라운 기적사건들을 보면서 예수님이 그리스도이구나, 하나님의 아들이구나라고 고백하였던 것이지 예수님에 대한 깊은 사랑은 없었던 것입니다. 즉 사랑이 없는 믿음의 고백은 울리는 쾡과리 같이 공허한 소리에 불과합니다. 사랑 없는 고백은 마음에 없는 고백입니다. 마음의 고백은 오직 사랑이란 연필로 써야 지워지지 않습니다. 전영록이 작곡 강민경이 노래한 ‘사랑은 연필로 쓰세요’라는 노래가 있었습니다. 그 노랫말 중에 ‘사랑을 쓰다가 쓰다가 틀리면 지우개로 깨끗이 지워야 하니까.’란 가사가 있는데 잘못된 생각입니다. 연필로 쓰다가 지워지는 사랑은 애시당초 사랑이 아닙니다. 그러나 사랑이란 연필은 지워질 수 없습니다.
예수님에 대한 사랑은 그냥 사랑하는 일이 아닙니다. 예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십자가의 사랑을 받음으로 비로소 예수님의 사랑이 나에게 얼마나 크고 놀라운 것인가를 깨달은 사람에게 내리신 사랑의 은총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내가 사랑하는 사람을 사랑한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기독교의 사랑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베푸신 큰 사랑을 깨달은 사람에게 주시는 그 예수님의 십자가사랑을 체 받은 사랑인 것입니다. 즉 예수님이 십자가상에서 피로 쓴 사랑입니다. 바로 그 십자가 사랑을 우리는  내리받은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사랑의 은총입니다. 그러므로 이 내리받은 십자가 사랑으로 우리는 세상을 바라보며 사랑을 나누게 됩니다. 그래서 그 내리받은 십자가 사랑으로 남편은 아내를 사랑하고 아내는 그 사랑으로 남편을 사랑합니다. 그 사랑으로 자녀를 사랑하고 부모를 사랑합니다. 그 사랑으로 이웃을 사랑합니다. 그래서 원수도 사랑하게 됩니다. 내 안의 사랑은 내 육신에서 만들어진 사랑이 아니라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피 흘려 내린 그 사랑의 보혈이 흘러와 십자가 펜으로 보혈을 잉크 삼아  내 심령 속에 기록한 십자가 내리 받은 사랑입니다. 그러므로 세상 사람들의 사랑은 썼다가 지우고 다시 썼다가 지우다가 휴지조각같이 버려지는 사랑이지만 기독교의 사랑은 파내고 지우려 해도 지워지지 않는 사랑이란 두 글자입니다. 오히려 지우려고 박박 문지르면 문지를수록 더욱 빛을 발하는 사랑이 십자가 내리 사랑입니다.

 

지난 추석날 서울에서 온 아들과 손자와 함께 영화관에 가서 벤허라는 영화를 보았습니다. 제가 고등하교 3학년 때인 1961년 서울 대한극장에서 관람하였는데 55년 만에 다시 새로 만든 벤허영화를 보았습니다. 그 영화에 골고다에 높이 달리신 예수님에게서 피가 흘러 바위틈 사이로 스며들어 그 바위 밑 동굴에 나병환자로 갇혀 있던 벤허의 어머니와 여동생이 고침을 받게 되었고 철천지원수였던 친구를 용서하고 화해하는 장면을 보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보혈의 사랑을 하나님의 은혜로 받은 사람만이 예수님의 사랑을 사랑하고 이웃을 내 몸같이 사랑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이 십자가의 사랑을 이어받는 일은 오직 하나님의 은총입니다.

 

베드로가 통곡하고 자신의 죄를 깨달았지만 염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전에 살던 고향으로 돌아가 고기를 잡고 있었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이 다시 그 곳으로 찾아 오셨습니다. 그리고 예전같이 깊은 곳에 그물을 던지라고 말씀하십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인줄 보고 물에 뛰어들어 헤엄쳐 예수님에게 달려 왔습니다. 생선을 화덕에 굽고 계신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숫불에 구운 생선을 주시면서 나를 사랑하느냐고 세 번이나 물으셨습니다. 그때마다 예수님을 사랑하지 못하였던 자신을 깨달은 베드로는 예수님을 세 번이나 사랑한다고 고백을 합니다.
그후 베드로는 수많은 고난을 받으면서도 담대히 예수님을 전하고 그 사랑으로 마침내 십자가에 못박혀 순교를 당하게 됩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열두 사도와 바울 사도 그 밖의 초대교회 성도들이 이 예수님의 십자가 보혈의 사랑으로 사랑하면서 교회를 세우고 그리고 순교를 당하였습니다.

 

성도여러분, 오늘도 우리를 사랑하시기 위해 우리를 부르신 예수님을 바라봅니다. 그 예수님의 뜨거운 십자가 사랑을 느끼시기 바랍니다. 감히 우리가 예수님을 사랑한다 말을 하기도 부끄럽고 죄송스러운 마음이지만 예수님은 당신의 그 십자가 ᄉᆞᆼ을 내리받기를 원하십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사랑한다는 말을 듣기를 바라십니다. 한번 입으로 조용히 고백해 봅시다. “예수님 사랑합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의 사랑으로 나를 사랑해 주셨듯이 나도 십자가 사랑으로 주님을 사랑하겠습니다.”

<고백> 복음성가를 함께 부르겠습니다.


여러분 우리는 이것을 믿고 고백해야 합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믿습니다. 믿을 뿐 아니라 예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것 같이 예수님을 사랑합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십자가를 나도 지고 그 십자가의 길을 마다하지 않고 가는 것이 예수님에 대한 사랑임을 고백합니다. 이렇게 고백해야 합니다. 무슨 조금의 고난이라고, 무슨 세상일에 바쁘다는 일로, 무슨 약하고 어렵다고, 사람들과 감정이 상했다고, 돈 벌는 일로 세상 친구들과 놀러 다니는 일로 예수님이 우리에게 이어주신 이 십자가의 사랑을 버린다면 역시 그에게 베드로의 배신의 닭이 울게 될 것입니다.

 

어제 9월 17일은 ‘고백의 날’입니다. 처음 만나 서로 사귀던 두 남녀가 이제 서로 사랑한다는 말을 고백하는 날이라고 합니다. 왜 9월 17일이 고백의 날인가 하면 12월 25일 성탄절을 100일 앞둔 날이 되어 성탄절 100일 전 사랑을 고백하고 그 사랑으로 크리스마스를 맞이하기 위해서 랍니다. 누가 언제 정하였는지는 모르지만 의미가 있다고 하겠습니다. 

오늘 우리 라온코이노니아 성도들의 고백이 무엇입니까? 성탄절 100일 앞두고 예수님의 십자가의 사랑을 내리 받은 우리도 예수님 사랑합니다 라고 고백하시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서로 사랑하며 더 많은 사람들에게 예수님 사랑을 나누는 사랑의 공동체가 되겠습니다.” 이렇게 고백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사랑과 축복이 여러분과 온 가족 간에 충만하시기를 축원합니다.


복음성가 83장을 부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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