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년 9월 11일 주일아침예배 설교 누가 6:20-23 라온코이노니아의 청산별곡-얄리 얄리 얄라성 얄라리 얄라
SBS에서 2015년 10월 5일부터 2016년 3월 22일까지 방영된 육룡이 나르샤라는 드라마가 인기리에 방영이 되었습니다. 고려 말 나라를 지키려는 사람들과 새로운 나라를 세우려는 사람들 간의 갈등을 출연배우들의 열연으로 사람들에게 큰 감동을 주었다고 합니다. 여러 등장인물 가운데 땅새라는 별명을 가진 이방지(변요한)라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는 정도전의 호위무사로 조선제일의 검객 이였습니다. 이방지가 사람들 앞에서 청산별곡 부르는 장면이 나오는데 참으로 서글픈 목소리로 부르는 노래가 드라마에 나오는 사람들과 그 TV 화면을 보는 사람들에게 가슴에 슬픔을 안겨 주었다고 하겠습니다. 본래 이 청산별곡은 고려시대 노래이지만 그 곡조는 알려져 있지 않았습니다. 드라마에서 이방지가 부른 청산별곡은 1977년 제 1회 대학가요제에서 은상을 받은 이명우가 부른 ‘가시리’의 곡을 약간 바꿔 부른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그리고 이명우씨는 이스라엘사람들의 민요인 ‘장미꽃 가득한 저녁(Erev shel shoshanim)에서 곡을 그리고 가시리와 청산별곡에서 가사를 따왔다고 합니다. 이 청산별곡 노래에서 나오는 후렴이 "얄리얄리 얄라셩 얄라리 얄라"가 반복되어 나옵니다.
청산별곡
살어리 살어리랏다. 靑山(쳥산)애 살어리랏다. / 멀위랑 다래랑 먹고, 靑山(쳥산)애 살어리랏다. / 얄리얄리 얄랑셩, 얄라리 얄라. <제1연>
살고 싶구나, 살고 싶구나. 청산에 살고 싶구나. / 머루랑 다래를 먹고 청산에서 살고 싶구나.
얄리얄리 얄랑셩, 얄라리 얄라.
우러라 우러라 새여, 자고 니러 우러라 새여. / 널라와 시름 한 나도 자고 니러 우니노라.
얄리얄리 얄라셩, 얄라리 얄라. <제2연>
우는구나, 우는구나 새여. 자고 일어나 우는구나 새여. / 너보다 근심이 많은 나도 자고 일어나 울고 있노라. 얄리얄리 얄랑셩, 얄라리 얄라.
............................<제8연>
그러면 ‘얄리얄리 얄라셩 얄라리 얄라’란 말이 아무런 의미 없이 부친 그냥 재미로 붙였을까? 여러 사람들의 의견은 다만 리듬을 타기위한 후렴일 뿐이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대륙 조선사 연구회의 최두환박사는 구체적으로 언어학적으로 분석을 합니다. 이 말은 고려시대 이전 신라시대부터 서로 긴밀한 관계를 맺어온 페르시아의 말이라는 것입니다. 최두환 박사님의 해석에 의하면, 이 말의 뜻은 ‘용감하라 용감하라 오 하나님이시여 즐거운 세월 살게 하소서 오 하나님이시여“라고 하였습니다. 1500년 전 당시 페르시아 사람들 대부분은 전도를 받아 기독교인들이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신라시대 많은 기독교의 문물이 페르시아로부터 신라로 전해져 왔었습니다.
** 최두환 박사
(1) 얄: ye·lam> yl[yal]: 우승자. 영웅. 용감한 사람.
(2) 얄리: ye·lam·ye> yli[yali]: 용맹. 용기. 굳셈.
(3) 얄라: ye·lam·lam·alef> ylla[yalla]: ya-allah[오! 신이여!]의 줄임꼴.
(4) 얄라리: ye·lam·lam·ye> ylli[yalali]: 게으르고 태만한 날을 보내다.
(5) 셩: shin·nun·gaf>shng[shang/sheng]: 명랑한. 유쾌한. 예쁜.
이러한 페르시아어의 밑바탕으로 "얄리얄리 얄라셩 얄라리 얄라"의 의미를 찾아보자.
얄리얄리 : 굳세고 굳세어라
얄라 : 오! 신이시여!
셩 : 유쾌하게
얄라리 : 세월만 보내고 싶노라
얄라 : 오! 신이시여!
그래서 오늘의 설교제목을 얄리 얄리 얄라성 얄라리 얄라로 하였습니다.
누가복음 6:23 의 말씀에 “그날에 기뻐하고 뛰놀라(카이레테 카이 스키르테사테) 하늘에서 너의 상이 큼이라”고 말씀하였습니다. 마태복음 5:12에는 “기뻐하고 즐거워하라(카이레테 카이 아갈리아스데) 하늘에서 너희 상이 큼이라”고 하였습니다. 누가복음과 마태복음의 차이가 무엇입니까? 누가복음에서는 ‘기뻐하고 뛰놀라’라 하였는데 마태복음에서는 ‘기뻐하고 즐거워하라’라고 하였습니다. 마태복음에서 즐거워하라=아갈리아오는 그냥 즐거워가 아니고 아주 즐거워하라 입을 크게 벌려 박수를 치며 기뻐하라 입니다. 그런데 누가복음에서 뛰놀라=스카이로라는 말은 너무나 즐거워서 깡충깡충 뛰면서 기뻐하라 입니다. 그러므로 누가복음의 스카이로 말씀은 말할 수 없는 기쁨으로 펄쩍펄쩍 뛰며 그 기쁨을 표현하라는 것이니, 마태복음의 즐거워하라 아갈리아오 보다는 더 강조된 말입니다.
예수님을 믿는 사람은 항상 기뻐하는데 어떻게 기뻐하라고 합니까? 스카이로 스카이 콩콩 처럼 너무 기뻐 펄쩍펄쩍 뛰라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이렇게 기뻐하신 적이 있습니까?
여러분, 오늘 여러분 속에 기쁨이 있습니까? 우리는 요즈음 너무 기쁨이 없이 삭막한 생활을 사는 것 같습니다. 기쁨이라는 말에서 다만 기쁨의 조건이 있어 기뻐하는 일이 있습니다. 이런 기쁨은 그 조건이 사라지면 다시 슬퍼집니다. 반가운 사람과 오랜만에 만나면 기뻐합니다. 그러나 헤어질 때는 슬픔으로 눈물을 흘리게 됩니다. 뛰놀다 기쁨은 조건이 없어도 기뻐하는 것입니다. 상황과 조건을 초월한 기쁨입니다. 조건적인 기쁨은 세상 사람들의 기쁨이라면 초월적 기쁨은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이 누리는 기쁨입니다. 옛날 순교자들이 순교를 당하면서도 기쁨으로 찬송을 부르며 순교하였다고 합니다. 세상 사람들은 장례식장에서 아이고 곡을 하지만,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은 장례식장에서 찬송을 부릅니다. 왜 그렇습니까? 하나님이 주시는 상이 크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히 11:6에 무엇이라 말씀하였습니까?“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고 말씀하였습니다. 그러므로 바울선생님의 말씀처럼 항상 기뻐하라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빌4:4카이레테 엔 큐리오 판토테 팔린 에로 카이레테), 항상 기뻐하라(살전5:16 판토테 카이레테) 이 말씀이 우리 기독교인의 인생의 좌우명이 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얄리 얄리 얄라성 얄라리 얄라 용감하라 용감하라 오 하나님이시여 즐거운 세월 살게 하소서 오 하나님이시여’에서 용감하라 용감하라를 ‘기뻐하라 뛰도록 기뻐하라로’ 바꾸고 즐거운 세월을 ‘즐겁게 세상으로’ 바꾸어 말씀드리려 합니다.
그러므로 얄리 얄리 얄라성 얄라리 얄라 ‘기뻐하라 뛰도록 기뻐하라 오 하나님이시여 즐겁게 세상을 살게 하소서 오 하나님이시여“라고 고백해야 합니다.
검정 양복에 넥타이를 맨 어떤 사람이 굳은 표정을 하고 슈퍼마켓 계산대에 돈을 내려고 줄을 서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앞에 있는 여자가 힐끗힐끗 쳐다봤습니다. 그 여자가 궁금해서 “실례지만 혹시 목사님이십니까?” 하고 물었습니다, 목사님이면 자리를 양보하려고 하였던 것입니다. 그랬더니 그분이 “아닙니다. 저는 지금 장례식장에서 오는 길입니다” 라고 대답을 하였습니다. 어째서 이 여인은 그 남자를 목사님이라고 추측한 것입니까? 아마도 목사님의 얼굴은 엄숙한 표정을 짓고 있다고 머리에 새겨져 있었나 봅니다. 기독교인은 경건한 사람입니다. 그런데 얼굴을 엄숙하게 하는 것이 경건의 모습은 아닙니다. 여러분들은 평소 어떤 표정을 짓고 있습니까? 사람들이 여러분의 얼굴에서 기뻐하는 모습을 보이는 것이 곧 경건의 모양입니다. “왜 당신은 그렇게 생글생글 웃고 있습니까?” 라고 물으면 “예 저는 예수님을 믿고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나로 하여금 기쁨으로 살아가게 하시기 때문입니다.”라고 대답할 수 있다면 그는 가장 경건한 기독교인입니다. 만일 사람들이 기독교인의 얼굴에서 슬픈 표정 괴로운 표정 찡그린 표정을 본다면 대뜸 말하기를 “당신은 하나님을 믿는 다고 하면서 왜 그렇게 찡그리고 있습니까? 아마도 하나님이 죽은 모양이군요”라고 말할 것입니다. 종교개혁자 마틴 루터가 종교개혁운동을 하면서 말할 수 없는 괴롭힘을 받아 집에 들어오면서 얼굴에 수심이 가득하였습니다. 이 루터의 얼굴을 본 루터의 아내가 슬그머니 안방에 들어가더니 상복을 입고 나왔습니다. 루터는 깜짝 놀라 “아니 왜 상복을 입었습니까? 누가 죽었습니까?” 루터의 아내가 말하기를 “당신의 수심이 가득한 얼굴을 보니 하나님이 돌아가신 것이라 생각하고 상복을 입었습니다.”라고 대답을 하였습니다. 루터는 그 제사 자신의 잘못을 깨닫고 다시 용기를 내어 종교개혁운동을 계속하였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기독교인의 기쁨의 근원은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이는 기독교인의 모든 인생이 오직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만 가능하기 때문입니다. 만일 기독교인이 세상적인 어떤 것으로 즐거움을 얻고자 한다면 결코 성공할 수 없습니다. 오히려 마음의 괴로움만 더하게 될 뿐 아니라 스스로 시험에 빠져 죽음을 자초하는 것이 됩니다. 요한일서2:15절에서는,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치 말라. 누구든지 세상을 사랑하면 아버지의 사랑이 그 속에 있지 아니하니.”라고 하셨고, 야고보서1:14절에서는, “오직 각 사람이 시험을 받는 것은 자기 욕심에 끌려 미혹됨이니”이라고 하였습니다. 세상의 기쁨을 추구하는 것은 세상을 사랑하는 것이며, 세상을 사랑하는 것은 자기 욕심에 끌려 미혹된 것입니다. 그 결과는 스스로 시험에 빠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참된 기쁨은 나 자신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 머무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생각하기를 ‘나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다고 믿는데 그런 기쁨이 없다.’고 느껴진다면 다음의 말씀에 귀 기울이십시오. 요한복음15:10-11절을 봅시다. “내가 아버지의 계명을 지켜 그의 사랑 안에 거하는 것 같이 너희도 내 계명을 지키면 내 사랑 안에 거하리라.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내 기쁨이 너희 안에 있어 너희 기쁨을 충만하게 하려함이니라.”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얄리 얄리 얄라성 얄라리 얄라 ‘기뻐하라 뛰도록 기뻐하라 오 하나님이시여 즐겁게 세상을 살게 하소서 오 하나님이시여“라고 고백해야 합니다.
중병에 걸린 두 사람이 있었습니다. 둘은 큰 병원의 같은 병실에 입원했습니다. 병실은 아주 작았고, 바깥세상을 내다볼 수 있는 창문이 하나밖에 없었습니다. 한 사람은 치료의 과정으로 오후에 한 시간씩 침대 위에 일어나 앉아 바깥을 내다보았습니다. 그는 바깥 풍경을 맞은편 환자에게 일일이 설명하면서 시간을 보내곤 했습니다. 창을 통해 호수가 있는 공원이 내다보이는 모양이었습니다. 호수에서 오리와 백조들이 떠다니고, 아이들이 와서 모이를 던져 주거나 모형 배를 띄우며 놀고 있었습니다. 젊은 여인들은 손을 잡고 나무들 아래를 산책하고, 꽃과 식물들이 아름답게 수놓은 정원도 있었습니다. 이따금 공놀이가 벌어지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나무들 너머 저편으로는 도시의 스카이라인이 선명하게 보이기도 하는 모양이었습니다.
누워 있는 환자는 창가의 환자가 이 모든 풍경을 설명해 줄 때마다 즐겁게 들었습니다. 한 아이가 어떻게 해서 호수에 빠질 뻔했는지도 듣고, 대단히 매력적인 아가씨들이 여름옷을 입고 활기차게 걸어가며 데이트하는 모습도 설명해 주었습니다. 창가의 환자가 어찌나 생생히 묘사를 잘 하는지 그는 마치 자신이 지금 바깥 풍경을 내다보고 있는 듯한 착각이 들곤 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오후 한 가지 생각이 그를 사로잡았습니다. 왜 그 사람 혼자서 바깥을 내다보는 즐거움을 독차지하고 있는가? 왜 자신에게는 기회가 돌아오지 않는가? 그는 이런 생각을 하는 자신이 부끄러웠지만 그 생각을 떨쳐 버리려고 노력하면 할수록 점점 더 창가에 있는 환자에게 질투가 났습니다. 침대위치를 바꿀 수만 있다면 무슨 일이든 하고 싶었습니다. 아니 바깥세상을 즐길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어느 날 밤이었습니다. 그가 천장을 바라보며 누워 있는데 창가의 환자가 갑자기 기침을 하면서 숨을 몰아쉬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손을 버둥거리며 간호사 호출 버튼을 찾는 것이었습니다. 갑자기 병세가 악화된 것이 분명했습니다. 그는 당연히 그 환자를 도와 비상벨을 눌러 주었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가만히 지켜보기만 했습니다. 그 환자의 숨이 완전히 멎을 때까지도. 아침에 간호사는 창가의 환자가 숨져 있는 걸 발견했습니다. 그리고 조용히 시신을 치워갔습니다. 적절한 시기가 되자 그는 창가 쪽으로 침대를 옮기고 싶다고 간호사에게 요청했습니다. 병원 직원들이 와서 조심스럽게 그를 들어 창가 쪽 침대로 옮겨 주었습니다. 그리고 편안히 누울 수 있도록 자리를 매만져 주었습니다. 직원들이 떠나자마자 그는 안간힘을 다해 침대에서 몸을 일으켰습니다. 통증이 느껴졌지만 팔꿈치를 괴고 간신히 상체를 세울 수 있었습니다. 그는 얼른 창밖을 내다보았습니다. 창밖에는 아무 것도 없었습니다. 맞은편 건물의 회색 담벽이 앞을 가로막고 있을 뿐이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인생의 행복이나 기쁨 즐거움이란 것은 외적인 환경에서 얻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기쁨은 믿는 자들에게 주시는 예수님의 선물인 것입니다.
사람들은 세상이 주는 일로 기쁨을 얻으려는데 그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사람들은 돈이나 권력을 통해서 기쁨을 얻으려고 합니다. 사람들은 그런 것들이 자신의 인생을 지탱해주는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그런 것을 얻으면 기뻐합니다. 자신이 더욱 든든한 돈이란 주춧돌 위에 기둥을 세우고 권력이란 지붕을 얹어 그 안에서 즐겁게 살리라 천년만년 기쁘게 살리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어느 날 그 돈이란 주축돌이 빠져나가고 그 권력이란 지붕이 벗겨져 버리게 되면 그래도 기뻐할 것입니까? 그는 그만 죽음을 생각하게 됩니다. 얼마 전 우리나라 야구팬들이 좋아하던 고 하일성씨가 스스로 목숨을 끊었습니다. 그는 사기를 당했고 사기를 쳤다고 하는 검찰의 조사를 받는 중 스스로 죽음을 택하였습니다. 너무나 안타깝고 아쉬움이 남는 그의 인생입니다. 그가 자주 한 말 가운데 어느 팀이 이기다가 9회말 가서 지게 되면 “아, 야구 몰라요, 야구는 9회 말 부터야”라는 말을 하였다고 합니다. 고 하일성씨의 말을 바꿔 “인생은 몰라 마지막 끝나봐야 알겠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왜 하일성씨가 그런 극단의 인생길을 가야 하였을까요? 그에게 기쁨을 주는 돈이 그리고 사람으로부터 실망하였기 때문이 아니겠습니까?
성도 여러분, 과연 돈이나 명예나 권력이 그를 행복하게 해주고 펄쩍 뛸만한 기쁨을 줄 것이라 말할 수 있겠습니까? 아니요 바울선생님은 롬 2:6-8에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그 행한 대로 보응하시되 참고 선을 행하여 영광과 존귀와 썩지 아니함을 구하는 자에게는 영생으로 하시고 오직 당을 지어 진리를 좇지 아니하고 불의를 좇는 자에게는 진노와 분노로 하시리라."
어떤 사람에게 영생이 약속되어 있습니까? "선을 행하여 영광과 존귀와 썩지 아니함을 구하는 자에게", 반대로 진노와 분노는 어떤 사람에게 임합니까? "진리를 좇지 아니하고 불의를 좇는 자에게" 누구를 말합니까? 썩어지는 것을 구하는 사람, 세상적인 것을 구하는 사람, 구체적으로 세상 명예와 부와 권력을 얻기 위해서 오늘도 안달복달하며 수없이 죄를 짓고 악을 도모하는 사람들을 가리킵니다. 그러나 이런 사람의 결국에 하나님의 진노와 분노가 있을 뿐입니다.
그렇다면, 무엇을 우리의 기쁨으로 삼아야 합니까? 영혼 구원받음의 기쁨입니다. 우리의 기쁨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구원받았다는 사실에 대한 기쁨이 전부이어야 합니다. 이것을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우리에게 기쁨의 근본은 내가 구원받았다는 것을 인식하는 일입니다. 죄 많은 우리를 여전히 죄 가운데 버려두지 않고 하나님이 나를 불러주셨고 나를 구원하셨다는 것입니다. 세상에서 버림받은 자 같은 나를 그처럼 하나님은 나를 찾으셨고 나를 사랑하시니 이 보다 더 큰 기쁨이 어디 있겠습니까? 하나님이 나를 구원하셨다는 이 확신이 나를 펄쩍 뛰게 하는 기쁨이 되는 것입니다. 진정 예수님을 생각만 해도 기쁨이 코끝에서 몽실몽실 솟아나옵니다. 싱글 벙글 괜히 입 끝을 간지릅니다. 예수님은 나의 기쁨입니다.
그러므로 얄리 얄리 얄라성 얄라리 얄라 ‘기뻐하라 뛰도록 기뻐하라 오 하나님이시여 즐겁게 세상을 살게 하소서 오 하나님이시여“라고 고백해야 합니다.
함께 ‘예수나의 기쁨’을 부르겠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기독교인들은 이세상의 어떤 사람보다도 기쁨과 즐거움이 넘쳐야 됩니다. 왜냐하면 바로 우리 믿는 사람이야말로 이세상사람들이 가질 수 없는 주님 주시는 기쁨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믿음 없는 사람의 특징의 얼굴은 슬픔입니다. 그러므로 기쁨은 예수 믿는 사람들의 특징입니다. 노예에게 가장 큰 기쁨은 무엇입니까? 너는 이제부터 자유인이다 라는 소식입니다. 감옥에 갇혀있는 사람들에게 기쁨은 무엇입니까? 아직 때가 안 되었는데 갑자기 석방소식을 듣는 일입니다. 이력서를 내고 취업허락 통지서를 기다리는 사람에게 내일부터 출근하시오라는 통지를 받는다면 얼마나 기쁘겠습니까? 그러나 우리 기독교인들에게 그런 기쁨의 조건 때문에가 아니라 다만 예수님이 나의 구주가 되신다는 내가 세상에서 예수님을 믿고 있다는 이 믿음이 곧 나의 기쁨이 되는 것입니다. 조건이라면 바로 예수 때문입니다. 이보다 더 큰 기쁨의 조건이 없습니다. 혹 낙심하여 잔뜩 슬픔에 잠겨있는 사람이 ‘그렇지 예수님은 여전히 나를 사랑하고 계시지’ 이런 생각을 하게 된다면 그는 곧 기쁨을 회복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옛 우리 선조들, 신라시대 고려시대 사람들이 즐겨 부르던 민요 청산별곡, “살어리 살어리랏다. 청산에 살어리라다. 멀위랑 달래랑 먹고 청산에 살어리랏다. 얄리 얄리 얄라셩 얄라리 얄라” 이 가사를 바꾸어 부르면, 우리 라온코이노니아의 청산별곡입니다. “ 살어리 살어리랏다 주안에 살어리랏다. 기도와 찬송 부르며 주안에 살어리랏다. 얄리 얄리 얄라셩 얄라리 얄라, 기뻐하라 뛰도록 기뻐하라, 오 하나님이시여, 즐겁게 세상에서 살게하소서 오 하나님이여” 우리 라온 코이노니아 성도들은 이렇게 고백하며 살아가기를 바랍니다.
며칠 후 민속명절인 즐거운 추석 절에 여러분, 온 가족과 더불어 기뻐하시고 즐거운 명절을 보내시기를 축원합니다. 그러나 무엇보다 하나님과 함께 큰 기쁨으로 뛰놀라 즐거워하는 추석명절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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