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년 5월 15일 주일아침예배 설교 약 4:6-10 라온코이노니아의 항복
어제 물김치를 사모와 강부자 권사님이 어느 식당에 가서 사오셨습니다. 이야기를 들으니 주인은 싹싹하고 친절한데 그곳에서 일하는 한 여인은 불친절하더라는 것입니다. 그것을 본 강 권사님이 한마디 헀습니다. ‘주인은 친절한데 왜 당신은 불친절하냐.’ 종업원이 불친절하다면 손님들은 다시 그곳을 찾지 않게 됩니다. 식당은 물론이고 모든 사업은 서비스업입니다. 서비스업의 경영 제1원칙은 친절입니다. 그래서 어느 식당에 가보면 ‘손님은 왕이다’라는 글을 써 붙여 놓은 것을 봅니다. 손님에게 항복하라는 말입니다. 손님에게 항복하지 않으면 교만하게 됩니다. 교만한 사업은 망하게 됩니다.
미국 뉴욕에 한 식당이 있었습니다. 이 식당에는 나이 드신 까다로운 손님들이 많이 왔는데, 주방장이 고분고분한 성격이 아니라, 때때로 손님들하고 다투는 일이 많았습니다. 그래서 주인은 항상 주방장을 불러 놓고 “손님은 왕이니 절대로 싸우지 마세요. 손님들이 요구하는 대로 다 해 주세요”라고 당부했습니다. 그런데 하루는 한 점잖은 할아버지가 오더니, 감자튀김을 주문했습니다. 감자를 튀겨 오니까, 너무 두껍다고 다시 썰어서 튀겨 달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다시 썰어서 튀겨 오니까 이번에는 더 얇게 썰어서 튀겨 달라고 했습니다. 이렇게 몇 번에 걸쳐서 주문을 하니 주방장이 화가 나서 씩씩거렸습니다. 그래도 주인은 옆에서 “손님은 왕이다. 항복 항복” 하고 옆구리를 찔렀습니다. 그러나 주방장은 화가 잔뜩 나 이제는 종잇장처럼 아주 얇게 썰어 튀겨서 갖다 주었습니다. 그랬더니 손님이 그 감자튀김을 맛있게 먹었습니다. 그가 먹는 모습을 옆에서 지켜보던 사람들이 너도나도 그 감자튀김을 주문했습니다. 그래서 이 레스토랑은 그 감자튀김 때문에 유명해져서 손님이 많이 오게 되었고, 그로 인해 ‘포테이토칩’이 세상에 처음 생겨나게 되었습니다. 손님에게 항복하는 것이 자존심 상하는 일인 것 같지만 그것은 성공의 지름길입니다.
미국 사람들은 성공의 85%가 인간관계에서 비롯되지만 한국 사람들은 실패의 99%가 인간관계 때문이라고 합니다. 사실 아침에 눈을 뜨면서부터 다시 잠 잘 때 까지 사람들의 하루는 인간관계에 관한 한 편의 드라마입니다. 취업보다 더 어려운 것이 직장에서 인간관계입니다. 어렵게 취업한 직장인 97.5%가 직장을 그만두고 싶어 한다고 합니다. 그 첫 번째 이유가 바로 직장상사나 동료 간의 인간관계 갈등 때문입니다.
미국의 사회학자 커밍 워크(Cumming Walk)라는 교수는 인간 성공의 요건으로 4가지를 말하였습니다. 첫째는 "머리"(I.Q)가 좋아야 하며, 둘째는 "지식"(Knowledge)이 있어야 하며, 셋째는 "기술"(Technique)이 있어야 하며, 넷째는 "태도"(Attitude)가 중요하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이 네 가지 요인 중에서 성공적인 삶에 적어도 93%이상으로 결정적인 영향을 주는 것은 바로 "태도"라고 하였습니다. 아무리 머리가 좋고 지식이 있고 기술을 갖추었다 하더라도 삶의 태도가 잘못되면 성공할 수 없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리고 그는 '바른 태도'로는 두 가지 태도를 말하였습니다. 먼저 "주저함이 없는 긍정"이요, 다음으로는 "기쁨 마음으로 하는 찬성"이라고 했습니다. 우리 주변에 머리도 좋고, 지식도 많고 기술이 많아도 실패한 사람을 보거나, 머리도 지식도 기술도 없는 사람이 성공한 사람을 보면 그들의 삶의 태도 때문이라는 것을 쉽게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주저함이 없는 긍정 그리고 기쁜 마음으로 하는 찬성 이 두 태도를 기독교에서 두 글 자로 줄여 말한다면 무엇이겠습니까? 바로‘아멘’입니다.
기독교인의 삶의 태도는 바로 ‘아멘’ 태도입니다. 아멘이란 말의 의미는 “참으로 진실로 맞습니다. 그렇게 하옵소서”등의 뜻입니다. 그러나 이 말은 하나님을 향한 나의 믿음을 확신하는 고백 어입니다. 이 말에는 ‘나는 하나님께 항복입니다’ 라는 의미가 들어 있습니다. 하나님께 항복하지 않는 사람은 아멘이란 말을 할 수 없습니다. 사탄은 절대로 아멘이란 말을 할 줄 모릅니다. 교만한 사람은 절대로 아멘이란 말을 할 줄 모릅니다. 회개할 줄 모르는 사람은 아멘이란 말을 할 줄 모릅니다. 예수께서 말씀을 하실 때 "진실로, 진실로"라는 말을 자주 함께 붙여서 말씀하시었습니다. 이것은 예수님의 하나님 앞에서의 태도를 말합니다. 예수님은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에 대하여 한 번도 아멘을 하지 않으신 적이 없었습니다. 예수님께서 하늘 보좌를 버리시고 이 세상에 오실 때도 아멘으로 오셨고, 일평생 고난의 삶을 아멘으로 사셨고, 또 아버지의 뜻대로 하옵소서 라고 말씀하시며 아멘으로 십자가 위에서 죽으셨습니다. 예수님은 철저하게 하나님의 뜻에 대하여 아멘의 모범을 보이셨습니다. 그래서 요한은 계시록 3:14에 예수님을 가리켜 "아멘이시요 ‥참된 증인이시요 하나님의 창조의 근본이신 이"라고 하였습니다. 사도 바울은 이러한 예수님에 대해 "너희 가운데 전파된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는 예 하고 아니라 함이 되지 아니 하였으니 그에게는 예만 되었느니라."(고후 1:19) 했습니다. 아멘은 내가 하나님을 향해 항복한다는 선언이며, 하나님께서 들으실 때 나의 믿음을 확인하시는 증표가 되는 것입니다.
목사들이 말은 안 하지만 속으로 가장 예뻐하는 성도가 있습니다. 누구일까요? 설교를 할 때 하나님의 말씀을 전할 때에 아멘으로 동의하는 성도들입니다. 칭찬은 고래도 춤을 추게 한다는 데 아멘은 설교자를 춤추게 합니다. 설교자에게 가장 큰 힘을 줍니다. 야구선수가 홈런을 쳤는데도 불구하고 아무런 반응이 없다면 그 선수는 풀이 죽어 다음엔 절대로 홈런을 치지 못할 것입니다. 가수가 많은 사람들 앞에서 열창을 했는데도 박수나 환호가 없다면 그 가수는 얼마후 가수생활을 그만 둘 것입니다.
마찬가지입니다. 목사가 하나님 말씀을 대언할 때 아무런 반응이 없다면 은혜가 사라지고 마귀가 틈을 엿보게 됩니다. 물론 목사에게 아멘하라는 것이 아닙니다. 목사가 선포하는 하나님의 말씀에 동의하여 말씀에 아멘하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어떤 목사님은 설교할 때 말끝마다 아멘을 연발합니다. 또 교인들에게 아멘을 강요하기도 합니다. “내가 지난주에 고향에 내려갔습니다. 아멘? 거기서 보신탕을 맛있게 먹었습니다. 아멘?”이런 식입니다. 그것은 아멘의 모독입니다. 목사님은 하나님의 말씀을 전할 뿐이지 아멘의 대상이 아닙니다. 그것도 모자라 교인보고 아멘 하라고 강요 합니다. “내가 보신탕 먹은 것이 못 마땅합니까? 아멘 하세요.” 그러면 교인들은 덩달아 “아멘”합니다. “우리교회 이 권사님이 교회를 짓는데 집한 채를 바쳤습니다.” 교인들이 가만히 듣고 있으닌까. “ 이 권사님이 집 한채 바쳤다고 하니 속이 쓰립니까? 왜 아멘 안하세요. 아멘 하세요” 목사님의 말에 교인들이 힘없는 목소리로 “아-멘”하니, “좀 더 크게 아멘 하세요?”
아멘은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나의 확고한 믿음의 응답인데, 목사님 보신탕 먹은 것에 아멘하라니 이는 아멘이란 말을 욕되게 하는 일입니다. 이 권사님이 집 한 채 바친 것에 아멘하고 할 것이 아니라, ‘우리가 하나님께 나의 정성을 다 할 수 있다면 이 얼마나 기쁜 일입니까?’ 라고 물을 때 듣는 사람들 중에 스스로 성령의 감동이 온다면 마음에서 우러나는 아멘 할입니다. 강요된 아멘은 아멘이 아닙니다. 믿음은 강요가 아닙니다. 나의 깊은 심령 속에서 터져 나오는 감격의 고백이어야 합니다.
어떤 교인은 아무 때나 습관적으로 아멘을 연발합니다. 목사님의 은혜로운 말씀에 믿음으로 받아 아멘을 말해야 합니다. 그런데 어떤 교인은 목사님이 말할 때 마다 아멘을 연발합니다. 오히려 설교에 방해 하듯이 아멘 하고 큰 소리로 말합니다. 예배 끝난 후 그분에게 목사님이 무슨 말씀을 하셨는가 물어보면 한마디도 기억 못합니다.
아멘의 삶은 말로만이 아니라 몸으로 그 아멘을 실천할 때 진정한 아멘의 삶이 있게 됩니다. 생을 살아가는 최선의 방법은 하나님께 항복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어떤 교인들이 하나님께 항복이 아니라 “나 항복 싫어”하듯이, 아멘이 아닌 노멘으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사모와 함께 차를 타고 분당 서울병원엘 갑니다. 군산에서 안성까지는 사모가 운전을 하고 안성에서 병원까지는 제가 운전을 합니다. 사모가 운전할 때에 저는 잠을 잡니다. 그런데 제가 운전 할 때에는 사모가 잠을 못잡니다. 계속 불안해합니다. 무슨 차이입니까? 저는 사모의 운전 기능을 믿고 안심을 하고 잠을 자는데 사모는 저의 운전 기능을 믿지 못해 불안해합니다. 아마도 저의 운전 습관이 아내 보기에 불안스러운 점이 있을 것입니다. 제가 좀 거칠게 모는 편입니다. 그러나 나의 인생이란 차를 몰고 처음가는 인생의 고비고비 길을 가는데 가장 베테랑 운전기사는 어리석고 서투른 나 입니까 아니면 나의 주 예수그리스도입니까?
어느 목사님이 다음과 같은 설교를 합니다. 목소리를 바꾸어 말하겠습니다. <모든 사람은 결국 어떤 것엔가 또는 누구에겐가 항복합니다. 하나님이 아니라면 우리는 돈, 욕망, 또는 자아에 항복하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께 삶을 드리는 것이 가장 좋은 삶의 방법입니다. 하나님 외의 다른 모든 방법은 좌절, 실망 그리고 자기 파괴를 낳을 뿐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 삶의 운전석에 앉게 하고 나는 핸들에서 손을 떼어야 합니다. 손을 뗀다고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나의 인새의 핸들을 주님께 맡길 때 비로소 주님은 나의 인생을 잔잔한 시냇가 푸른 초장으로 인도해 주십니다. 내가 내 인생의 핸들을 잡고 있는 한 주님은 나를 도울 수 없게 됩니다. 그분의 손 안에서 불가능한 것은 없습니다. 절대 긍정이고, 절대 희망입니다. 빌 4:13절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 고 말씀하였습니다...... >
이런 말씀을 목사님이 전할 때에 듣고 있는 교인 가운데 “아멘”하고 말하는 이가 있습니다. 그러면 이 아멘이라고 말하는 그는 그렇게 자아를 버리고 좌절 실망하지 않고 내 인생의 운전수 되시는 주님을 의지하면서 살아가야 합니다. 그런데 예배 후에 “아이고 사는 게 힘들어 죽겠어요? 난 지금 죽지 못해 살아요?” 이런 말을 하였다면 그의 아멘은 하나님 앞에 거짓말하는 것이 됩니다. 노멘입니다. 목사님이 “성수주일 해야 하나님의 축복을 받습니다”라는 말씀을 아멘 하며 들은 교인이 예배 끝난 후 “난 다음 주일 교회 못 나와요. 왜요? 남편 친구의 딸 결혼식에 가야 해요?” 교회 나와 하나님 아버지께 예배드리는 일보다 남편 친구 딸 결혼식에 가는 것을 더 중요하게 생각한다면 어찌 하나님의 은혜를 받으려 하는 교인일 것입니까? 실상 많은 교인들이 말씀과는 다른 믿음 아닌 생활을 하고 살고 있습니다. 그러면 왜 이런 아멘이 아니라 노멘 거짓된 신앙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까? 하나님께 항복한 믿음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보다 자기를 남편 친구를 더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왜 하나님께 하복하지 못합니까? 자기 생각이 모든 생각의 기준이고 자기의 행동이 모든 사람들의 행동의 표준이 되는 것처럼 착각하고 있는 것 그것 때문에 하나님 앞에 항복하지 못합니다. 아멘이 노멘입니다.
한 부인이 목사님의 자기 사랑을 버리라는 설교를 들은 후 심각한 얼굴로 목사님을 찾아 왔습니다. “목사님 저는 아침에 화장대 앞에서 오랫동안 제 얼굴을 쳐다봅니다. 그것은 제가 보기에도 제 얼굴이 너무 예쁘기 때문입니다. 목사니, 이렇게 제 얼굴이 예쁘다고 쳐다보는 것도 죄입니까?” 목사님 대답이 “아니요 그것은 죄가 아닙니다. 그것은 착각입니다.”라고 말하였습니다. 자기주장 자기 만족 자기중심주의는 착각입니다.
600년전 유명한 설교자 중에 사보나 롤라라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당시는 카톨릭 세계였으니까 성당에서, 어느 날 아침에 산책을 하다 보니까 거기에 마리아 상이 있었는데 마리아 상 앞에 어떤, 꽤 나이 가 들어 보이는 부인 하나가 경건한 모습으로 참배를 하면서 아주 진지하게 기도를 하고 있는 모습이 보였습니다. 그 이튿날 산책을 하다 보니까 똑 같은 시간에 그 부인이 옵니다. 비가 오나 눈이 오나 바람이 부나 봄, 여름, 가을, 겨울 한결 같이 같은 시각에 와서 마리아상 앞에 참배하는 이 부인을 보았습니다. 아주 깊은 감명을 받았습니다. 아주 신앙심이 귀한 분이로구나. 어느 날 이 사보나 롤라가 자기 동료 사제를 산책을 하다가 만나서 그 부인을 가리키면서 여보게 내가 저 부인을 가만히 관찰해 보니까 봄, 여름, 가을, 겨울 변함이 없소. 눈이 오나 바람이 부나 폭풍우가 몰아치나 꼭 같은 시간에 와서 저렇게 기도를 한단 말이야. 참 신앙심이 특별하지? 그랬더니 옆에 있던 사제가 껄껄 거리면서 웃는 것입니다. 자네 모르는구만. 그래서 뭘 모르나? 그랬더니 자네 마리아상 이야기 모르나? 무슨 이야기? 50년전 이 성당에 이 마리아상을 처음 조각할 때, 어느 조각가에게 조각을 부탁하였거든, 그 조각가는 마리아상 조각을 위해 적당한 모델을 찾았지. 그 모델로 선정된 사람이 바로 처녀시절의 저 부인이 뽑혔다네. 그래서 저 여인을 모델로 해서 마리아상을 만들어 놓은 이후로 그 다음 이튿날부터 출근해서 지금까지 빠진 일이 없다네. 하고 일러 줍니다. 그 부인은 마리아가 아니라 자기를 숭배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부인은 거기서 자기 얼굴을 보고 자기를 즐기고 자기를 숭배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 부인은 착각을 하였지만 바로 이 착각이 죄의 뿌리입니다. 사단은 에덴동산 처음 사람 아담과 이브에게 찾아와서 첫 번째 유혹을 이렇게 던졌습니다. '네가 하나님과 같이 되리라.' 네가 하나님이 될 수가 있다. 사탄은 아담과 이브에게 착각하도록 한 것입니다. 그 착각이 원죄가 되었습니다. 자기사랑은 착각입니다. 자기 만족 자기 고집 자기중심주의는 모두 착각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그 착각이 죄의 시작입니다. 왜 착각합니까? 하나님 앞에 바짝 엎드리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반면에 하나님께 항복은 죄를 이기게 합니다.
대학생 선교회(Campus Crusade for Christ)의 창립자로 20세기의 가장 위대한 크리스천 지도자 가운데 한 사람은 빌 브라이트(Bill Bright) 목사님입니다. 그는 사영리 소책자를 통해서 1억 5천만 명 이상의 사람들을 그리스도에게로 돌아오게 하신 목사님이십니다.
어느 날 젊은 시절 릭 웨렌(새들백 교회 목사)이 브라이트 목사님에게 이렇게 물었습니다. “목사님, 왜 하나님이 당신을 사용하시고 당신의 삶에 그렇게 많은 복을 주시는 걸까요?” 브라이트 목사님은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젊었을 때 나는 하나님과 계약을 맺었지요. 나는 직접 계약서를 쓰고 밑에 서명을 했습니다, 거기에 ‘바로 이 날부터 나는 예수 그리스도의 종이다’라고 썼습니다.” 빌브라이트 목사님은 철저하게 주님께 항복하고 아멘의 삶을 살았습니다.
저는 44년 전 목사안수를 받았습니다. 그때 목사 안수를 받은 후 저에게 목사 까운을 입혀 주었습니다. 여러 선배 목사님들의 축사와 격려사가 있은 다음 저의 인사말이 있었습니다. 그때 저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 이 목사 까운은 저에게 수의壽衣와 같습니다. 저는 죽고 이제 주님이 입혀주신 수의를 입은 것입니다. 그리고 저는 주님 앞에 갈 때 까지 이 수의를 입을 것입니다.” 그렇게 수의를 입고 44년을 죽어 왔습니다. 저는 죽고 제 몸에서 주님의 영광을 드러내기 위하여 목회를 하여 왔습니다. 저는 제 명예와 저의 영광을 탐하지 않았습니다. 제가 죽으니 하나님이 저를 세워 주셨습니다. 부끄러움 속에서 부끄럽지 않게 해 주셨습니다. 오히려 저를 부끄럽게 한자들을 부끄럽게 하셨습니다. 지금도 저는 수의를 입고 있습니다. 그래서 나는 죽고 나를 통해 주님이 존귀하게 하는 인생인 아멘 인생입니다. 아멘은 하나님을 행한 나의 항복 선언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 항복이 나에게 행복입니다.
제가 가장 좋아하는 말씀이 빌1;20-21 말씀인데, “나의 간절한 기대와 소망을 따라 아무 일에든지 부끄러워하지 아니하고 지금도 전과 같이 온전히 담대하여 살든지 죽든지 내 몸에서 그리스도가 존귀하게 되게 하려 하나니 이는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함이라.”라는 말씀입니다.
항복이란 표현을 어떻게 합니까? 흔히 항복하면 두 손을 번쩍 듭니다. 그런데 요즘 젊은이들에게는 좋다 이겼다란 의미로 두 손을 번쩍 듭니다. 항복은 바짝 엎드림입니다. 납작 엎드림입니다.
하나님 앞에 바짝 엎드린 사람이 바로선 사람이오. 양심이 바른 사람이오. 남을 내 몸처럼 도와주는 사람이오. 하나님이 그와 함께 하는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요즘에 대학교에서 강사를 모집하면 미국, 영국, 독일, 프랑스 선진국에서 박사학위를 받아온 사람들이 강사 한사람 뽑는데 수십 명씩 이력서를 냅니다. 그러면 강사는 한 달에 돈을 얼마 버느냐? 40만원. 강사 생활하면 전상적인생활을 못합니다. 그래서 이 학교 저 학교 나가서 강의를 많이 하지만 150만원을 넘지 못할 가능성이 많습니다. 그러나 대학교수가 되면 교수마다 다르죠. 정교수 되면 최소한 연봉 6,000만원 그렇게 받습니다. 그러니 요즘엔 지식인들이 너무 많아서 박사학위 가지고 노는 사람이 우리 한국에 3,000명이 넘는다고 합니다. 무슨 이야기냐? 지식이 아무리 많아도 지혜가 없으면 이 세상을 못 삽니다. 지혜는 하나님께 바짝 엎드린 사람에게 임합니다. 초등학교 나오고, 중학교 나와서 지식이 좀 적어도 하나님과 손을 잡은 사람은 세상에 부러움 없이 살아갈 수 있습니다. 그런데 나는 박사다 지식이 많다고 하면서 교만한 사람은 쓰임 받을 수 없습니다. 오히려 지식이 많은 사람일수록 머리가 숙여지고 겸손히 행할 때 그는 많은 사람에게 존경을 받게 됩니다. 우리 교단에 총회장을 지내신 지동식 목사님이 계셨습니다. 그분은 일본에서 대학원을 나오셨습니다. 그런데 연세대학교에서 오랫동안 교수생활을 지내셨습니다. 그분은 겸손하시어 모든 학생들에게 존댓말을 썼습니다. 1학년인 저에게 까지 전선생님하고 불렀습니다. 심지어 어린아이에게도 존댓말을 썼습니다. 그분은 우리나라 신학계의 아버지라고 부를 출중한 학문을 소유 하셨지만 한번도 자신의 지식을 자랑하지 아니하고 자신은 늘 부족하다고하며 후배 교수님들에게 연구 실적을 돌렸습니다. 하나님은 그를 대학학장에 대학원장장까지 세우셨습니다. 하나님 앞에 항복을 선언하여 바짝 엎드리면 하나님은 그를 세상에 높이 쓰임 받도록 할 것입니다. 그런데 세상에 안타까운 일은 이런 지식이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을 멀리하니 그가 배운 지식을 제대로 쓰이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잠언서에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이 지식의 근본이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을 경외 한다는 말이 무엇입니까? 경외한다는 말은 무섭고 부들부들 떨라는 말입니다. 마치 할아버지의 사랑만 믿고 할아버지 수염을 잡아 재치는 버르장머리 없는 손자처럼 하나님을 사랑으로만 생각하고 하나님 앞에 건방지고 오만 방자한 사람이 많습니다. 하나님을 두려워 할 줄 모릅니다. 그런데 이것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심판주 이십니다. 격노하시어 나라와 민족을 송두리째 멸망시키시는 무서운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이 한번 노를 발하시면 우리는 뼈도 못 추리게 됩니다. 어디 하나님 앞에 까불고들 있습니까? 하나님 무서운 줄 모르고 함부로 신앙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나의 생사화복을 주관하십니다. 누가 하나님의 진노를 피할 수 있으며 하나님의 채찍 앞에 숨을 수 있겠습니까? 교만한자는 목이 곧은 자들입니다. 하나님 앞에 마치 칠 테면 쳐 보슈 하듯이 목을 꼿꼿이 처 들고 있습니다. 이것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 앞에 믿는 자의 기본자세는 바짝 엎드림입니다. 감히 머리들 수 없습니다. 거룩하신 하나님의 거룩이란 말의 뜻은 트레멘둠 마구눔이라고 하는데 이는 무시무시하고 어마어마하고 마른 소름이 온몸에 짝 돋아 부들부들 떨리는 그런 상태를 말합니다(루돌프 오토). 여러분, 하나님 앞에 두렵고 떨리는 이 거룩한 신비한 체험(트레멘둠 미스테리움)을 가진 적이 있습니까? 이런 거룩의 체험을 한 사람은 하나님의 신비한 능력(트레멘둠 페시노숨)을 얻게 됩니다. 하나님께 바짝 엎드릴 때 비로 하나님의 신비한 능력을 보게 됩니다. “아멘 하나님께 항복합니다.” 라고 말할 때 비로소 하나님의 어마어마한 능력이 눈에 보이게 됩니다. 비로소 영안이 떠졌다라고 말합니다.
바짝 엎드리지 않으면 하나님의 능력이 보이지 않습니다. 바짝 엎드린 사람의 손을 하나님이 붙잡아 일으켜 주십니다. 마 15장, 한 가나안 여자의 귀신들 딸을 고치실 때 이 여인은 자신을 개에 비견하여 말하였습니다. 많은 사람이 소원이 있다고 별별 기도를 다 합니다. 별별 기도가 다 응답받는 것이 아닙니다. 바짝 엎드린 사람의 손을 붙잡아 일으켜 주십니다. 하나님은 하나님 앞에 바짝 엎드린 사람의 눈에만 보입니다. 하나님의 통치와 사랑과 은혜가 비로소 보이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마가복음 5장에 회당장 야이로가 예수님을 만나는 장면이 나옵니다. 회당장은 그 시대에 사람들에게 존경받는 사람입니다. 함부로 사람들에게 머리숙이는 사람이 아닙니다. 그런데 어린 딸이 병들어 죽어가자 예수님께 달려와 예수님 발아래 엎드렸습니다. 예수님의 그의 간곡한 소원을 들으시고 그의 집에 들어가 이미 죽은 딸의 손을 붙잡고 “달리다굼 소녀야 일어나라” 말씀하시니 딸이 살았습니다.
달리다굼
캄캄한 인생길 홀로 걸어가다
지치고 곤하여 내영혼 깊은잠이 들었었네
어두운 죄악의 길을 걸어가다
상하고 찢기어 내영혼 깊은잠이 들었었네
내영혼 어둠속에 방황할 때
어디선가 들려오는 주님음성
깨어라 일어나라 달리다굼 일어나라
일어나라 죄악의 잠자던 영혼아
달리다굼 깨어라 일어나 걸어라
어둠은 물러가고 새날이 다가오네
주님 오실날 멀잖았네
어둠속에 잠자던 영혼 일어나라
일어나 걸으라 달리다굼 일어나라. 아 멘!
우리들은 늘 완악하여 죄와 악한 생각들을 마음에 품고 살아가기 때문에 틈만 나면 교만하고 방심하고 하나님보다 내 방식대로 모든 것을 내 기준과 판단으로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고 함부로 말하고 행동하며 살아가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이렇다가 어떻게 일이 잘 풀리지 않거나 생각대로 되지 않을 때 그때라도 하나님을 찾고 무릎을 꿇고 바짝 엎드려 하나님의 뜻을 알려고 기도하면서 근신하면 좋은데, 이때도 하나님을 찾기보다는 세상을 바라보고 사람들을 의지하면서 모든 것을 내 방식대로 찾아 헤메다가 지쳐 쓰러져 가는 사람들을 보게 됩니다. 이때도 하나님을 찾지 않고 하나님을 찾기보다 원망하며 불평하기 일쑤인 사람들은 점점 어렵고 힘든 수렁 속으로 빠져 들어 가고 있습니다. 또 이런 경우도 봅니다. 이럴 때에 예배도 소홀히 여기고 성도 간에도 불평과 다툼으로 사는데도 별반 어려운 일도 없고 잘 살아가는 경우도 있습니다. 머리는 더욱 꼿꼿하고 아멘은 없고 그래서 더 교만합니다. 그러나 이럴 때가 가장 무섭고 두려운 때임을 알아야 합니다. 가장 강력한 저주는 정말 힘들어지고 모든 하는 일들이 생각대로 되지 않고 어려운데 하나님을 찾지 않는 것, 그보다도 더 큰 저주는, 이럴 때 하나님이 그냥 내버려 두신다는 것은 정말 큰 저주입니다. 하나님은 늘 하나님의 사람들을 하나님이 이끄시는 대로 하나님의 방식대로 인도하시기 위해 늘 조정하시고 때로는 채찍으로 때로는 징계로 바로 잡아주십니다. 이럴 때 하나님을 다시 찾아 하나님 앞에 엎드리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이때를 알아 하나님 앞에 항복하여 하나님의 말씀 앞에 아멘하면 그는 하나님의 손을 다시 붙잡을 수 있습니다. 이럴 때 하나님은 일하십니다. 나의 잘못된 길을 조정하시고 나의 잘못된 삶을 새롭게 리모델링하여 주십니다. 하나님께 항복한 사람은 하나님이 나를 지켜 주시고 나에게 은혜주심을 확신하니 이것이 아멘 신앙입니다. 하나님을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하나님 앞에 나올 때 하나님의 나의 항복을 받아주시며 아멘 하는 나의 입술에 당신의 은혜의 손을 대어 주십니다. 하나님께 항복은 곧 나의 행복입니다.
수많은 사람들, 허다한 무리가 예수님 주변에 모였지만 주님은 다 뒤로하시고 발 앞에 엎드린 야이로 한 사람과 가십니다. 수많은 사람이 교회를 다닌다고 다 주님의 손길이 함께 하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 앞에 바짝 엎드려 ‘주님 저는 주님께 항복합니다’라고 말하는 그 사람에게 주님은 그의 소원을 들어 주십니다. 교회는 숫자 놀음 하는 곳이 아닙니다. 주님께 항복한 사람들이 모인 곳입니다. 그를 통해서 주님은 새 역사를 전개해 가십니다. 주님께 항복한 사람은 화가 변해서 복이 됩니다. 어두움이 물러갑니다. 슬픔이 기쁨으로 바꾸어집니다. 죽음이 생명으로 바꾸어집니다. 바꾸어 놓는 분은 주님이지만 그렇게 바꾸어 놓도록 하는 것은 바짝 엎드린 그 사람입니다.
주님 앞에 여러분 항복하십시오. 주님 발 앞에 납작 엎드리세요. 그러면 주님께서 우리를 일으켜 세워 주실 것입니다.
오늘은 성령강림주일입니다. 초대교회 120명의 성도들이 마가의 다락방에 모여 기도할 때에 성령이 그들에게 임하였다고 하였습니다. 그때부터 사도들은 길거리에 나가 전도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성령 받은 증거가 무엇입니까? 바로 하나님께 항복입니다. 하나님께 항복한 사람들에게 성령이 임하십니다. 반면에 하나님 앞에 교만한 사람은 신앙의 착각 속에, 자기 교만이란 죄의 함정에 빠져, 사랑하지 못하고 기뻐하지 못하고 화평하지 못하고 참아내지 못하고 자비하지 못하고 선한 행동도 하지 못하고 온유하지 못하고 절제하지 못하니 그는 성령에서 떠나 악령에 사로잡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두려워 떨며 하나님께 항복하고 바짝 엎드려 오직 하나님께 나를 맡기고 살 때에 오늘 주신 말씀처럼 “ 주 앞에 낯추라 그리하면 주께서 너희를 높이시리라(타페이네세테 에노피온 큐라우 카이 휘포세이 휘마스)” 이 말씀이 우리의 축복의 말씀이 되기를 바랍니다.
라온 코이노니아 우리 모두는 오직 하나님께 항복한 사람들인 줄 믿습니다. 하나님께 항복은 우리의 행복입니다. 오직 하나님께 바짝 엎드려 “주님 말씀만 하옵소서 주의 종이 듣겠나이다. 주님 말씀대로 행하여 살겠나이다.” 이런 항복을 고백을 하는 라온 코이노니아의 우리 모두 위에 주의 성령이 충만히 임하시길 주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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