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년 3월 20일 부활주일 아침 설교 성경 마 28ㅣ1-10 라온코이노니아의 환희의 기쁨
상영시간 107분 감독케빈 레이놀즈 출연조셉 파인즈 (클라비우스 역), 톰 펠톤 (루시우스 역), 피터 퍼스 (폰티우스 빌라도 역), 클리프 커티스 (예슈아 역)
요즈음 전국적으로 개봉 극장에서 부활이란 영화를 인기리에 상영하고 있습니다. 유감스럼게도 군산에서는 상영하지 않습니다. 영화의 내용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을 때 주관하던 로마 백부장의 이야기입니다. 그 백부장의 이름은 크라비우스입니다. 그는 검투사 출신으로 무자비한 군인 정신을 훈련받은 군인으로 정치적이고 매우 지능적인 사람입니다. 로마 총독 빌라도의 명령으로 십자가에 달린 예수를 처리하기 위해 십자가 처형장으로 간 그는 눈을 뜬 채 갓 숨을 거둔 예수를 보게 됩니다. 이후 아리마대 요셉과 니고데모가 시신을 장사하기 위해 가져가고, 유대인의 대제사장 가야바의 압박을 받은 빌라도로부터 예수의 시신을 지키라는 명령을 받습니다. 그는 장정 7명이 옮길 수 있는 거대한 돌로 무덤을 막고 인봉을 하였습니다. 그리고는 부하들에게 무덤을 엄중하게 지키라고 지시하고 처소로 돌아갔습니다. 그러나 삼일째 되는 날밤에 시신은 사라졌고, 유대교 제사장들은 매우 화가났습니다. 유대교 제사당들은 이번에도 빌라도에게 시신을 찾아내지 못한다면 로마아의 평화를 보장할 수 없다고 위협을 합니다. 그리고는 뒤로는 무덤을 지키던 보초들에게 돈을 주고 ‘예수의 시신을 제자들이 가져갔다’라고 거짓 증언을 하도록 사주합니다. 그들은 메시아가 부활했다는 소문을 잠재우기 위해 빌라도를 압박했고, 빌라도는 로마 황제에게 잘 보이기 위해 클라비우스에게 시신을 찾아오라고 명령하였습니다.
예수의 부활을 믿지 않는 클라비우스는 제자들이 예수의 시신을 가져갔다는 보초들의 거짓증언에 따라 수사에 나서지만 앞뒤가 맞지 않는 증언과, 밧줄이 터지고 돌이 날아간 흔적 등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일이 벌어진 현장 상황 등을 보고 혼란스러워 합니다. 목격자들을 신문한 끝에 결국 제자의 소재를 파악하는 데 성공해 기습하지만 자신의 눈앞에 펼쳐진 광경에 주저앉고 맙니다. 자신이 십자가에서 죽음을 목격했던 예수가 살아나 제자들과 함께 있는 광경을 보았고 예수는 눈앞에서 사라졌습니다. 그는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이 모습을 본 후 수사를 포기하고 예수를 다시 만나기 위해 제자들과 함께 갈릴리로 갔습니다.
자신이 본 것이 진실인지 확인하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는 갈릴리에서 예수를 만났고, “무엇이 두려운가”라고 묻는 예수의 물음에 “이게 진실인지… 모든 것을 걸어도 되는지”라고 말을 합니다. 그는 예수가 승천하는 것을 지켜봤고, 로마군인으로서의 자신의 지위와 명예를 다 버렸다는 이야기입니다.
클라비우스의 마지막 말이 기독교이의 삶의 정체성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I never be the same.
because I experienced..."
"분명한 것은 이제 예전처럼 살수 없습니다. 그것은 내가 예수님의 부활을 직접 목격하였기 때문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나타나셨습니다. 그리고 예루살렘에서 6㎞ 떨어진 엠마오 마을로 가던 두 제자를 만났습니다. 그들은 서로 대화를 나눴지만 처음에 너무 상심한 상태라 미처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하였습니다. 그러나 예수와 식사를 하면서 비로소 부활하신 예수님을 알아보았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을 믿지 못하였던 도마에게 예수는 “내 손과 발을 보라. 나를 만져보라”고 하였습니다. 도마는 직접 만져본 뒤에야 “나의 주님, 나의 하나님”이라며 감격하였습니다.
예수는 제자들에게 “온 천하에 다니며 부활의 복음을 전파하라”고 부탁하였습니다. 갈릴리리 바닷가에서 베드로에겐게 “나를 사랑하느냐”며 세 번이나 물었고 “내 양을 먹이라”고 분부하였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제자들 외에도 승천 이전까지 500여 사람들에게 일시에 보였고 친형제인 야고보와 사도바울 등을 만났습니다(고전 15:4∼8).
고린도전서 15장 3절로 8 절에 “내가 받은 것을 먼저 너희에게 전하였노니 이는 성경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위하여 죽으시고 장사 지낸 바 되었다가 성경대로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사 게바에게 보이시고 후에 열 두 제자에게와 그 후에 오백여 형제에게 일시에 보이셨나니 그 중에 지금까지 태반이나 살아 있고 어떤 이는 잠들었으며 그 후에 야고보에게 보이셨으며 그 후에 모든 사도에게와 맨 나중에 만삭되지 못하여 난 자 같은 내게도 보이셨느니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위대한 바울선생이 거짓말을 했겠습니까? 그는 다메섹 도상에서 그리스도를 만났습니다. 그리고 사울이 바울이 되고 위대한 그리스도의 사도가 된 것입니다.
오늘날 예수의 부활이 전해진 것은 누군가 증언했기 때문입니다. 처음엔 구전(口傳)으로, 그리고 성경이 부활을 기록했고 이어 신앙고백과 신조에 담겨졌습니다. 나중엔 기독교 신학으로 확립되었습니다.
신약의 기록 연대는 통상 AD 40∼100년에 기록 되었다고 말합다. 이는 고대 로마의 시인이었던 버질의 최고 오래된 기록이 그의 사후(死後) 350년이 지난 것이며 알렉산더 대왕에 대한 가장 오래된 자료가 죽은 지 400년이 지나서야 기록된 것과 비교하면 집필 연대가 이르다는 것은 그만큼 특정인을 신화로 각색하거나 영웅화할 여지가 줄어든다는 말이기도 합니다. 그것은 아직 살아있는 사람이 많이 있기 때문에 전설이나 신화로 꾸밀 수 없는 일입니다. 복음서 저작 연대만 보더라도 마가복음 40년, 마태복음 AD 50-70년, 누가복음 80년, 요한복음은 90년-100년 사이에 기록됐다고 말합니다. 더구나 사도바울이 쓴 고린도전서는 55년으로, 예수 처형 이후 30년이 채 안 됩니다. 부활 사건을 미화할 시간이 전혀 없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성서고고학이나 신학계에 따르면 현존하는 신약성경 사본만 5500개가 넘으며, 2000여개의 성구집, AD 3∼4세기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되는 125개의 파피루스, 소문자 필기체 그리스어 사본 2600여개 등이 남아 있습니다. 이 모든 고대의 자료에서 예수님의 부활을 증거하고 있습니다.
초대 교회 사도 교부들의 저작도 있습니다. 이들은 열두 제자의 제자였거나 그들과 가까웠던 사람들입니다. 1∼2세기에 걸쳐 활동하던 로마의 클레멘트(베드로의 제자), 서머나의 폴리캅(요한의 제자), 카르타고의 터툴리안 등이 대표적입니다. 이들은 자신들의 책에 부활하신 예수를 목격한 스승들의 이야기를 소개하고 있습니다. 클레멘트는 고린도 교회에 보낸 편지에서 “그들은 부활하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주시는 명령과 온전한 확신을 받았다”고 적었었습니다. 2세기 초 안디옥 감독 이그나티우스는 “예수 그리스도는 참으로 십자가에 못 박혔으며, 그는 참으로 죽은 자 가운데서 일어나셨다”고 썼습니다.
초기 신앙고백으로 알려진 로마신조는 AD 170∼180년에 확정됐습니다. 로마신조는 세례 요리문답자들을 위한 것으로 교회의 신조로 사용되었습니다. 로마신조는 지금의 신자들이 고백하는 ‘사도신경’의 기초가 되었습니다. 앞서 니케아공의회(325년)는 “고난당하시고 3일 만에 부활하셨으며 하늘에 오르셨다”는 구절을 신조에 포함시켰으며, 콘스탄티노플공의회(381년)에서도 “고난 받으시고 장사 지낸 바 되었다가 성경대로 3일 만에 다시 살아나시어 하늘에 오르사”는 구절을 재확인 하였습니다.
부활 증언은 중세를 거쳐 종교개혁에서도 이어졌습니다. 장 칼뱅은 ‘기독교강요’에서 “그리스도가 부활함으로 죽음의 공포와 죄의 지배에서 자유하게 됐고 하나님과 화해하게 되었다. 그분의 부활은 첫 부활로서 우리의 부활에 대한 보증”이라고 밝혔습니다(2권 16장 13항).
부활 증언은 개신교 신앙 속에 면면히 흘렀습니다. 20세기 신학자 볼프하르트 판넨베르크는 “예수의 부활은 증거를 아는 사람들이 한결 같이 증언하고 있는 객관적인 역사 사건”이라고 주장하였습니다. 세계적 변증학자인 알리스터 맥그래스는 “부활의 근본적 기능 가운데 하나는 그리스도의 신성을 확증하는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부활은 예수의 정체성을 하나님의 아들로 확증하고(롬 1:3∼4) 그의 가르침에 권위를 부여했다는 것입니다. 맥그래스는 “부활이 영원한 생명에 대한 기독교적 희망”이라고 말하였습니다.
예수의 제자들은 처음엔 부활을 믿지 못하였습니다. 초대교회 성도들도 처음에 부활을 믿을 수 없었습니다. 세계 각나라에 선교하던 수많은 선교사들도 예수님을 알기 전에는 예수님의 부활을 믿지 못하였습니다. 그러나 그 모두가 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확실히 믿게 되자 기꺼이 순교의 길을 갔고 기꺼이 부활의 증인자로 세계를 향해 나갔던 것입니다. 영화 ‘부활’의 마지막은 클라우비스가 자신의 신분을 나타내는 반지마저 빼버리고 다시 길을 떠나는 장면입니다. 그의 표정은 환희와 기대에 차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오늘도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너는 나를 본고로 믿는냐? 보지 못하고 믿는 자들은 복되도다.”(요 20:29)라고 사도 도마에게 말씀하셨고 또 오늘 우리에게도 말씀하십니다.
기독교 신앙은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함께 부활할 것을 믿는 믿음입니다. 이 땅에 사는 동안 우리는 심령의 부활 생활의 부활 그리고 영원한 생명으로의 부활을 믿고 있습니다.
고린도전서 15장 12절로 22절에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셨다 전파되었거늘 너희 중에서 어떤 이들은 어찌하여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이 없다 하느냐 만일 죽은 자의 부활이 없으면 그리스도도 다시 살지 못하셨으리라 그리스도께서 만일 다시 살지 못하셨으면 우리의 전파하는 것도 헛것이요 또 너희 믿음도 헛것이며 또 우리가 하나님의 거짓 증인으로 발견되리니 우리가 하나님이 그리스도를 다시 살리셨다고 증거 하였음이라 만일 죽은 자가 다시 사는 것이 없으면 하나님이 그리스도를 다시 살리시지 아니하셨으리라 만일 죽은 자가 다시 사는 것이 없으면 그리스도도 다시 사신 것이 없었을 터이요 그리스도께서 다시 사신 것이 없으면 너희의 믿음도 헛되고 너희가 여전히 죄 가운데 있을 것이요 또한 그리스도 안에서 잠자는 자도 망하였으리니 만일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의 바라는 것이 다만 이생뿐이면 모든 사람 가운데 우리가 더욱 불쌍한 자리라 그러나 이제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가 되셨도다 사망이 사람으로 말미암았으니 죽은 자의 부활도 사람으로 말미암는도다 아담 안에서 모든 사람이 죽은 것같이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사람이 삶을 얻으리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누구든지 저를 믿으면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습니다. 남녀노소, 빈부귀천 유무식 할 것 없이 죄를 지었음에도 불구하고 못났음에도 불구하고 버림을 당하는 일이 마땅함에도 불구하고 오직 믿음으로 우리는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겨지고 부활에 참여하게 되는 것입니다.
구원에 조건이 있다면 구원받을 사람 아무도 없습니다. 오직 구원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믿음으로 말미암아 되는 것입니다. 즉 예수님의 부활이 곧 나의 부활이 됩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부활은 인간이 경험하게 되는 그 모든 것에서 가장 큰 기쁨입니다.
오늘 봉독한 마 28: 8에 여자들이 무덤에서 예수님이 부활하셨다는 천사들의 말을 듣고 ‘큰 기쁨’(카라스 메갈레스)으로 제자들에게 알리려 달려갔다고 하였습니다. 여기 ‘크다’란 ‘메갈레스’로 그냥 큰 기쁨이 아니라 엄청난 기쁨 환희로 감정을 가눌 길 없는 기쁨을 말합니다. 이보다 더 큰 기쁨은 없습니다. 그런데 여인들이 달려 가다가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9절에 예수님이 말씀하시길 “평안하냐”고 인사말을 하셨습니다. 여기서 “평안하냐”는 인사말은 “카이레테”입니다. 이 말은 당시 사람들이 반갑게 인사하는 인사말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그런 문안인사로 카이레테하신 것은 아닙니다. 이 카이레테는 8절의 ‘큰 기쁨의 기쁨이란 말과 같은 단어입니다. 그러므로 직역하면 예수님이 여인들에게 “그렇게 기쁘냐”라는 말입니다.
예수님이 세상에 태어나실 때에 천사들이 광야에 있던 목자들에게 기뻐하라고 말씀하였습니다. 예수님의 공생애동안 모든 사람들에게 기쁨을 주신 수많은 일들을 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의 고난과 죽으심은 우리에게 말할 수 없는 슬픔을 준 사건이지만 곧 부활하심으로 말할 수 없는 엄청난 기쁨을 또한 주셨습니다. 부활은 큰 기쁨입니다. 곧 환희입니다. 부활을 믿는 기독교인들의 인생은 곧 기쁨이 충만한 인생입니다. 기쁨을 모르는 사람은 예수님의 부활 믿지 못하는 사람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기뻐하기를 원하십니다. 부활의 아침 자신을 찾아오신 여인들에게 기뻐하는가 라고 물으십니다. 이는 그 여인 뿐 아니라 모든 인류의 인간에게 기뻐하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지난 2005년 3월12일 새벽2시 미국 조지아주 아틀랜타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음식점종업원으로 일하는 26살의 에슐리 스미스라고 하는 여인이 살인범에게 납치가 됐습니다. 범인은 33살의 브라이언 니콜슨인데 성폭행, 마약소지, 납치혐의로 제판을 받다가 보안관의 총을 뺏어서 판사를 죽이고 그리고 네 사람을 더 죽이고 도망친 흉악범입니다. 얼마나 무서운 사람입니까? 이 무서운 범인은 에슐리를 집으로 끌고 들어가서 의자에 묶었습니다. 죽을지도 모르는 위급한 상황입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에슐리가 침착하게 범인을 대하고 밤새 7시간을 의자에 앉아서 대화를 했다는 겁니다. 그때 대화의 내용이 일부 소개가 됐습니다. 먼저
"난 남편이 4년 전에 나쁜 사람의 흉기에 찔려서 죽었습니다. 당신이 만약 나를 죽인다면 5살짜리 내 딸은 고아가 될 것입니다."
솔직하게 사정을 얘기하면서 긍휼(-불쌍히 여김)을 보였습니다. 그랬더니 이 말에 분위기가 한결 나아지고 범인은 부인의 결박을 풀어주었습니다. 그랬더니 이 여인은 범인에게 기독교 서적인 『목적이 있는 삶』이라는 책을 보여 주었습니다. 에슐리가 목적이 있는 삶이라는 책을 들고 훙악범에게 이 책을 읽어주었는데 책의 내용은 " 누구나 삶에는 합당한 이유와 목적이 있다. "는 겁니다. 여인은 범인에게 전도를 한 겁니다.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우리가 왜 세상에 살고 있는 것입니까? 도움이 절실한 사람들 편에 서기 위해서입니다. 당신이 이 시간 나를 인질로 잡은 것도 하나님이 당신에게 도움을 주라는 뜻이라 생각이 됩니다. 내가 당신에게 도움을 어떻게 줘야 할지를 생각했더니 바로 전도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전도 중에 내가 이 책을 소개합니다. 당신은 붙잡히면 감옥에 갈 것이고, 죽을 것입니다. 그런데 당신이 죽기 전에 해야 할 일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당신에게 주신 사명이 있습니다. 그것은 교도소에서 전도사역하라는 하나님의 뜻 일지로 모릅니다. 그런니까 체포되어서 감옥에 가면 죄수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파하도록 예정하신지도 모릅니다. 감옥의 죄수들을 만날 수 있는 게 누구입니까? 목사님도 잠깐 만날 수는 있지만 같이 살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당신은 죄수들과 같이 살수있지 않으십니까? 함께 시간을 보낼 수 있습니다.’ 에슐리는 흉악범 니콜슨에게 책에 씌어진 대로 인생의 존재 목적이 무엇이며 하나님이 이 세상에 보내신 이유를 설명하고 당신이 해야 될 사명을 가르쳐 주었습니다. 이 니콜슨이 감동을 받고 하는 말이 "당신은 하나님이 나에게 보내주신 천사입니다." 감사해하고 같이 아침식사를 하고 경찰에 자수를 했다고 합니다. 영화같은 이야기이죠? 그러나 바로 있었던 일입니다. 이 날 아침이 니콜슨의 부활의 아침이라고 하겠습니다. 그는 비록 자수해서 감옥에 갔지만 어제의 흉악범이 아닌 새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 애슐리는 누구입니까? 어떤 여인이기에 이렇게 담대합니까?
에슐리는 26살의 애기엄마입니다. 그런데 놀라운 사실이 있습니다. 에슐리 스미스는 10대 때 상점에서 물건을 훔치고 1년 보호관찰을 받은 문제의 소녀이었습니다. 음주운전하고 과속에 폭행사건에 연루가 됐었습니다. 그래서 남자를 만났습니다. 남자는 폭행사건에서 상대방의 칼에 찔려 죽었습니다. 너무나 가난합니다. 밤 늦게 까지 일하지 않으면 먹고살기 힘든 그런 사람입니다. 그런데 그런 사람이 부활의 주님을 믿고 그의 방탕하던 죽음의 길에서 생명의 길로 다시 부활하였고 또 부활의 증인이 된 것입니다. 에슐리에게 분명한 것은 이제 예전처럼 살수 없습니다. 그것은 에슐리가 예수님의 부활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한순간에 미국사람들의 영웅이 됐습니다. 세계적인 영웅이 됐습니다. 그의 이름을 가르켜서 이제는 "천사"다, "영웅"이다. "champion".이다. 이런 얘기를 합니다. 문제소녀가 한순간에 천사가 됐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아가는 것이 특별한 신앙이나 경험이 요구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들이 부활 신앙으로 말씀대로 순종하여 살면 모두가 하나님 나라의 챰피온이 될 수 있습니다.
이 26살의 에슐리가 예수님 부활의 목적을 깨달았을 때 그는 주의 일꾼이 됐고 승리자가 되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절대로, 절대로 주의 일에 힘쓰는 자들의 수고를 헛되지 않게 하십니다. 복 주신다는 사실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흔들리지를 않기를 바랍니다. 세상풍조, 마귀유혹, 육신의 육신이 흔들리지 않으려면 부활 증인이 되라는 것입니다.
예수님 부활신앙에 두 가지 기쁨이 있습니다. 첫째는 예수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사망과 죄와 율법의 권세를 이기는 승리자가 돼서 영생을 얻고 하나님의 자녀 되는 권세를 가지는 일로 우리는 기뻐하게 됩니다. 두 번째는 흔들리지 않기 위해서 부활의 증인이 되는 일입니다. 부활 증인이 되는 일이야 말로 가장 큰 기쁨입니다. 예수님은 땅 끝까지 이르러 부활의 증인이 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여러분에게 비밀을 하나 말씀드리면, 목사에게 가장 큰 기쁨은 말씀을 전하는 일입니다. 지금 저는 세상에 가장 큰 환희를 맛보고 있습니다. 목사에게 은퇴하고 가만히 있으라 하는 일이야 말로 가장 큰 비극입니다. 그러면 죽을 때 까지 기쁨을 상실합니다. 은퇴하신 목사님들을 보면 마치 노래 잃어버린 카나리아 같고 달빛도 별빛도 없는 오직 스산한 바람 부는 처량한 달밤입니다. 그러니 저는 얼마나 기쁜지 나는 행복합니다.
라온 코이노니아의 여러분은 이미 하나님의 자녀 되었으니 이미 기쁨을 소유하였습니다. 그러나 부활의 증인 아직 못 되었다면 아직 큰 기쁨의 맛을 모른다고 하겠습니다. 큰 기쁨은 오늘의 성경의 막달라마리아처럼 부활의 소식을 전할 때에 비로소 얻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오래 전 제가 군대시절 휴가를 끝내고 전방 부대로 버스를 타고 돌아가고 있었습니다. 그때 제 옆에 앉아 있던 한 부인이 전에게 전도지를 주면서 예수님을 열심히 전도하였습니다. 이미 저는 사령부 군종실에서 근무하고 있었지만 그 부인의 열성을 멈추게 할 수 없어 그냥 가만히 듣고 있었습니다. 그 부인은 예수님의 탄생때부터 공생애의 기적이야기를 들려 주었습니다. 그리고 우리 죄를 위해서 십자가에 죽으셨다는 이야기를 해 주었습니다. 그런데 그때 내가 내릴 정거장에 버스가 도착하여 그 부인에게 ‘잘 알겠습니다. 고맙습니다’ 진심으로 인사를 하고 버스에서 내렸습니다. 그런데 조금 가는데 뒤에서 그 부인이 달려오면서 나를 불렀습니다. 난 깜작 놀라 그 부인을 바라보았습니다. 그 부인이 이런 말을 하였습니다. “내가 아직 전하지 못한 말이 있어요. 예수님이 무덤에서 부활하셨습니다.” 그 말을 전하기 위해서 그 부인은 일부러 차에서 내려와 나에게 달려 온 것입니다. 나는 그 말을 듣고 깜짝 놀랐습니다. 부인의 말을 듣는 순간 온몸에 전율이 느껴졌습니다. 마치 저는 부활하신 주님을 본 것 같은 착각이 들었습니다. 이상한 힘에 묶인 것처럼 저는 멍하니 서 있었습니다. 그 부인의 얼굴은 기쁨으로 가득 차 있었습니다. 당시 저는 신학대학원생이었고 군대에서도 군종병으로서 군인교회 강당에서 가끔 설교도 하였지만, 분명한 것은 이제 예전처럼 적당하게 믿고 적당하게 군인생활 하고 적당하게 군종사변 노릇을 할 수 없었습니다. 그것은 제가 예수님의 부활의 소식을 막달라 마리아 같은 그 부인으로부터 직접 듣고 또 목격하였기 때문입니다.
주께서 십자가에 돌아가신 후 슬픔과 절망에 잠겨 있던 제자들이 갑자기 은둔처에서 뛰어나와 기쁨의 소식을 전하기 시작했습니다. ‘주님 부활하셨다’는 소식이 온 예루살렘 거리거리에 퍼졌습니다. 이 소식은 창세 이래 온 인류가 간절히 기다리던 사망 권세를 이긴 승리의 소식이었습니다. 그래서 이 소식을 복음이라고 말합니다. 이 기쁨의 소식이 오늘도 절망과 슬픔을 이기게 하고 수많은 사람들의 생명을 구원합니다.
이제 라온 코이노니아 성도 여러분에게 분명한 것은 예전처럼 살수 없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예수님의 부활소식을 들었고 또한 믿기 시작하였기 때문입니다.
라온코이노니아의 가장 큰 기쁨 ‘카라스 메갈레스’ 는 이제 여러분이 막달라 마리아처럼 부활 증인으로 나가 “예수님 다시 사셨습니다!”라고 증거 할 때 얻게 되는 기쁨입니다. 이 환희의 기쁨을 소유하시기를 부활하신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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