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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병호목사의 교회이야기

전병호 목사의 설교




2016년 3월 20일 주일아침 예배 설교   성경 눅 12:6-7   라온코이노니아의 행복


몇 년 전에 참새시리즈 유머가 유행된 적이 있었습니다.
참새 한마리가 달려오는 오토바이에 부딪히는 사고가 났습니다. 마침 지나가는 행인이 참새를 주워서 집으로 가져와 치료​도해주고 모이도 주고 새장 안에 넣어두었습니다. 한참 뒤 정신이 번쩍 든 참새가 생각했습니다. " 아! 이걸 어쩌나! 내가 오토바이와 부딪혀 운전사가 죽은 모양이구나. 그러나 내가 이렇게 철장에 갇혀 있게 되었구나 어쩌면 좋아“
참새들이 나란히 전깃줄에 앉아 있었습니다. 그때 어디선가 포수가 나타나 한쪽 눈을 감고 총을 쐈습니다. 탕! 하는 소리와 함께 다른 참새들은 재빨리 날아갔으나 유난히 잘난 체 하던 암컷 한 마리가 총에 맞아 떨어졌습니다. 이 참새, 떨어지면서 하는 말이 “내가 멍청하였구나 포수가 날보고 윙크하는 줄 알았다니”

가수 송창식이 부른 ‘참새의 하루’라는 노래가 있습니다.
 “아침이 밝는구나 언제나 그렇지만
  오늘도 재너머에 낟알갱이 주우러 나가봐야지
  아침이 밝는구나
  바람이 부는구나 언제나 그렇지만
  오늘도 허수아비 뽐을 내며 깡통소리 울려대겠지
  바람이 부는구나...................................................“

우리가 참새를 생각할 때 참새는 농작물을 축내는 해조(害鳥)라고 말합니다. 그래서 제가 어렸을 적엔 학교에서 참새 잡아오라는 숙제를 내어 주었습니다. 아침에 일어나면 전깃줄에 참새들이 수십 수백 마리가 앉아 짹짹짹 노래를 불러댔습니다.  마당에 대 소쿠리를 새워놓고 그 아래 보리쌀 낟알을 뿌리면 참새들이 날아와 주서 먹습니다. 그때 소쿠리를 바쳐 논 작대기를 잡아채어 참새를 잡습니다. 어린 시절 길거리에 카바이트로 불을 밝힌 참새구이 포장마차가 많이 있었습니다. 그렇게 참새를 수없이 잡다 보니 어느새 참새보기가 어려워졌습니다. 그런데 참새가 없어지니 농작물 해충이 들끓었습니다. 그래서 참새를 이제는 잡지 말라고 합니다. 또 참새들의 서식환경이 줄어들고 농약살포로 참새들도 함께 살아갈 수 없는 세상이 되었습니다.

오늘이 낮과 밤의 시간 길이가 같아지는 춘분입니다. 오늘부터 낮 시간이 길어집니다. 그런데, 왜 이런 참새 이야기를 하는가 하면, 바로 오늘 3월 20일이 유엔이 정한 참새의 날입니다. 이제는 참새를 보호하자는 운동을 벌리고 있는 것입니다.또 하나 오늘은 2012년 6월 28일 유엔이 정한 세계 행복의 날입니다. 참새의 날과 행복의 날 서로 상관이 없지만 저는 무언가 관계가 있다고 봅니다.
사람들이 행복하지 못한 이유 중의 하나가 뜬 구름잡듯 행복을 잡으려 하기 때문입니다. 결코 뜬 구름 위에 행복은 없습니다. 독일의 괴테라는 사람이 말하기를 ‘구름을 아무리 보아도 거기에는 인생이 없다. 똑바로 서서… 자기 주위를 보면서 자기가 인정한 것을 붙들라’ 고 하였습니다. 지난 금요일 구레를 방문하다가 우연히 매화꽃이 만발한 산허리에 하얀 구름들이 마치 소털 모양으로 테를 두르듯 덮여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래서 옛날 사람들이 신선이 있어 구름을 밟고 다닌다고 하였는데 저 구름 위를 걸어보고 싶다는 생각을 하였습니다. 행복은 저 구름위에 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우리가 잡을 수 있는 땅위 우리 곁에 있다고 하겠습니다.

옛날 중국에 장자라는 사람이 말하기를 봉황의 행복과 참새의 행복의 크기는 우열을 논할 수 없다고 하였습니다. 봉황도, 참새도 삶의 결과보다도 각자의 목표를 향해 열심히 살아가는 과정에서 얻는 즐거움이 행복이라는 것입니다. 봉황에겐 봉황의 행복이 있고 참새에게는 참새의 행복이 있습니다. 자신에게 주어진 상황 속에서 우리는 우리의 행복이 있습니다. 어떤 가난한 사람이 로또에 당첨되어 수억 원의 부자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몇 년 후 그는 가진 돈을 다 탕진하고 엄청난 빚까지 져 마침내 자살해서 죽었습니다. 참새는 참새로서의 행복을 누려야지 봉황의 행복을 바래서는 안 된다는 이야기입니다.

일본에서 활동하던 우리나라 가수 계은숙이란 가수가 있습니다. 일본에서 “すずめの淚 / Suzumeno Namida”란 노래를 불러 크게 인기를 얻었습니다. 이 노래 제목은 “참새의 눈물”이란 말입니다.  그 가사  중에 이런 말이 있습니다.

    행복을 창에 가두어 두고 키워보려고 해도
       幸福を窓に閉じこめて 飼いなりしてみても
          시아와세오 마도니도지고메데 가이나리시데미데모
    슬픔이 가슴의 빈틈으로 숨어들어 오네요
       悲しみが胸のすき間から 忍び こんでくる
          가나시미가 무네노스키마까라 시노비곤데구로
    .....................
    만약이번에 태어난다면 공작보다는 참새(이고 싶다)
       もし 今度生れてくるなら 孔雀よりすずめ
          모시 곤도우마레데구루나라 고자쿠요리스즈메
    ....................
    화려한 꿈을 꾸기보다는 소박한 것이 좋아요
       色ついた夢を見るよりも ささやかでもいいの
          이루쯔이다 유메오 미루요리모 사사야까데모 이이노
    나만이 날 수 있는 파란하늘을 가진 사람 이라면
       あたしだけ飛べる靑空を 持ってる人ならば
           아타시다케도베루아오소라오 못데루히또나라바
 
아침 창성동에서 시장을 지나 금광 공원 쪽으로 넘어가다 보면  이리저리 날아가다 앉다를 반복하는 십여 마리의 참새들을 보게 됩니다. 잠시 자유롭게 움직이고 있는 참새를 보면서 행복의 의미를 생각해 보았습니다. 참새가 보여주는 그 작은 행복은 오히려 복잡한 세상에서 살아가는 지혜이기도 합니다.  참새의 몸놀림이 어찌나 빠른지 나의 시선이 못 따라갈 정도입니다. 하늘을 마음대로 그 작은 움직임이 얼마나 부러운지 날아가는 참새를 바라보며 부러워 해 보았습니다. 그러나 다시한번 생각해 봅니다. 참새는 작은 새입니다. 연약한 새입니다. 날개도 작고 다리도 마치 성냥개비 같이 가늘고 작은 소리에도 화들짝 놀라 날아갑니다.  과연 이 연약한 작은 새가 얼마나 행복할까요.

네덜란드 태생의 화가 빈센트 반 고흐는 '해바라기'라든지 자신의 '자화상'같은 작품으로 널리 알려진 화가입니다. 대개 예술계에서 두각을 나타내는 사람들은 아주 어렸을 적부터 천재적인 소질을 발휘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런데 고흐는 본격적으로 화가가 되기로 결심한 것은 1881년, 꾀 나이가 들은 때인 나이 28세 때였다고 합니다. 그 이전에는 벨기에와 영국의 탄광에 들어가 광부로서 일하면서 열악한 환경가운데 일하는 광부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전도사 활동을 하였습니다. 본래 목사의 아들로 태어난 고흐가 벨기에의 탄광에 인부로 일하면서 지내던 중 깨달았던 의미심장한 이런 이야기 한 토막이 있습니다.
지금으로부터 백 이십 년 전이니까 그 당시만 해도 옷감이 아주 귀할 때였습니다. 그래서 옷감이 아닌 다른 용도의 천으로도 옷을 해 입던 시절입니다. 실상 오늘날 젊은이들이 즐겨 입는 청바지도 실은 선원이나 광부들, 노동자들이 배의 돛이나 마차의 포장, 심지어 다이너마이트를 포장했던 천으로 만든 옷에서 유래된 것이라고 합니다. 지금도 물건의 Box 겉포장을 보면 그 물건을 어떻게 다루어야 할지를 큼지막하게 써 놓을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깨지기 쉬운 물건이면 그 겉포장에 "취급주의" "깨지기 쉬움" 영어로 "Fragile"이라고 씁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이 물건을 포장했던 천을 빨아서 옷을 만들어 입었습니다. 그런데 등판 쪽에는 새겨진 글씨가 완전히 지워지질 않아서 흐릿하지만 읽을 수 있는 글씨가 그대로 남아 있었습니다. 그 글의 내용은 이런 것이었습니다. "깨지기 쉬운 물건이니 취급주의." 이 글을 보면서 고흐는 큰 진리를 깨달았습니다. "그래! 정말 사람이야말로 깨어지기 쉬운 존재야!"

성경은 우리 인생을 마치 질그릇 같다고 하였습니다. 조그만 충격에도 어이없이 깨지고 마는 질그릇 입니다. 인간이 참 강한 것 같지만, 때로 보면 참 연약한 것이 인간입니다. 건강하던 사람도 깨집니다. 힘 있는 사람도 깨집니다. 요즈음 김무성 새누리당 대표가 깨지는 모습을 보니 그가 불쌍해 보입니다. 돈 많은 사람도 깨집니다. 인생은 어디서든지 언제든지 깨질 수 있습니다. 가정에서도 남편의 야속한 말 한마디에 아내가 깨지고,  아내의 눈짓 한번에 남편이 깨집니다. 시어머니와 시누의 뼈있는 말 한마디에 며느리들이 깨지고, 며느리의 섭섭한 말 한마디에 시어머니들이 깨집니다.
인간은 얼마나 연약한 존재인지 넘쳐도 문제가 되고, 모자라도 문제가 됩니다. 사랑이 너무 많아도 문제고 사랑을 못 받아도 삐뚤어지게 되게끔 되어 있습니다. 돈이 너무 많아도 타락하게 되고, 너무 적어도 비굴해 지는 것입니다. 이것이 인생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은 이처럼 연약한 인간을 하나님이 돌보신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오늘 말씀을 곰곰이 생각해 보세요,  참 마음이 든든해집니다. "나는 행복하다"는 느낌을 갖게 됩니다. 이 말씀에서 "세상을 살아가는데 전혀 두려움이 없고, 겁날 것이 없다"하는 자신감을 가지게 됩니다.
예수님은 참새의 값에 비유해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 말씀에 두 앗사리온이면 참새 다섯 마리를 살 수 있다고 합니다. 한 앗사리온은 당시 아주 작은 가치입니다. 지금으로 말하면 1000원 정도라고 하겠습니다.  참새는 푼돈으로 팔리는 아주 값싼 존재라는 말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이렇게 보잘것없는, 하찮은 이런 참새 한 마리에도 하나님의 계획이 있으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참새의 행복입니다. 참새가 비록 그 하나님의 계획을 알지 못한다하더라도 참새는 하나님의 사랑과 보호의 배려가운데 살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공중에 나는 새 한 마리의 생명도 하나님의 허락 없이는 떨어지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참새 한 마리가 죽느냐 사느냐 하는 문제에도 하나님은 관심을 가지고 그 참새의 삶을 주관해 주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예수님의 말씀이 "너희는 참새보다 귀하니라.( 폴론 스투루디온 디아페레테)" 예수님 말씀이 “참새가 얼마나 나에게 귀한지 모른다 하물며 너희들은 더 말할 것도 없다. 나에게 너희는 가장 귀한 존재다“라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그 엄청난 가치를 두신다면 우리는 인생을 넉넉히 행복하게 살아갈 의무와 권리가 있는 것입니다. 참새도 행복하게 살고 있는데 우리가 그보다 못해 나는 불행하다고 말할 것입니까?

어느 예배 때 목사님이 재미있는 실험을 했습니다. 그는 교인들이 보는 앞에서 자기 지갑 속에 있는 5만 원 짜리 지폐 한 장을 꺼내었습니다. 마치 은행에서 갓 찍어낸 듯이 빳빳한 신권이었습니다. 그는 그 돈을 손에 쥐고 흔들면서 청중들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여러분! 이것은 5만 원 짜리 지폐입니다. 저는 이것을 원하시는 분에게 드리겠습니다. 이것을 원하시는 분은 손을 들어주십시오." 그곳에 있는 사람들 모두가 손을 들었습니다. 그 모습을 보면서, 그 목사님 갑자기 그 새 돈을 양손에 쥐고서는 마구잡이로 구겨버렸습니다. 그러더니 그 구겨진 돈을 손가락으로 집어 들고서 또다시 교인들에게 물었습니다. "자, 이렇게 구겨진 돈이라도 갖기를 원하시는 분은 손을 들어주십시오." 모두가 또다시 손을 들었습니다. 그러자 그 목사님 그 구겨진 돈을 바닥에 던지더니, 자기의 구둣발로 몇 번 지근지근 밟았습니다. 이제 그 지폐는 먼지가 잔뜩 묻어서 아주 지저분해졌습니다. 목사님은 또 물었습니다. "여러분! 이 지폐가 이렇게 더러워졌는데도, 그래도 갖기를 원하시는 분이 계십니까? 어디 한 번 손들어보십시오." 교인들은 역시 모두가 손을 들었습니다. 그때 그 목사님은 이렇게 말을 이어갔습니다. "여러분! 이 5만원 지폐가 아무리 구겨지고 짓밟혀졌어도 여러분이 이 돈을 그래도 원하시는 이유는 이 돈의 가치가 상실되지 않고 그대로 남아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우리의 인생도 때로는 실패로 인해서 구겨지기도 했고, 때로는 당하는 환난으로 인해서 짓밟히기도 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것으로서 우리의 가치 자체가 상실되는 것은 아님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지금까지 살아 온 지난 날들을 돌이켜볼 때 때때로 쓰러질 때도 있었을 것입니다. 또 때때로 죄로 인해서 우리의 모습이 얼룩질 때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결코 우리 자신을 소홀히 생각하거나 과소평가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여전히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자녀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분명히 그리고 언재나 기억해야 할 것은, 하나님은 그 어떤 처지에 우리가 있다 해도 여전히 우리를 사랑하고 계신다는 것입니다. 왜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십니까? 이유는 한 가지밖에 없습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그 엄청난 보혈이 우리의 심려에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성령이 우리 안에 거하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보석 상자에 보석이 없다면 그 상자는 그냥 나무상자에 불과 합니다. 그러나 보석이 담겨 있다면 그 보석상자는 엄청난 가치가 있게 됩니다. 우리 안에 천국 보화가 가득하니 우리가 어느 처지 에 놓여 있다하더라도 우리는 천국 보물 상자로의 가치가 있습니다.  예수님 때문에 우리는 가치 있는 사람들이 된 것입니다.

또 말씀하시기를 하나님은 우리의 머리털까지도 다 세신다고 했습니다. 생각해 보세요. 여러분 신체 중에 가장 가치가 없는 것이 무엇입니까? 눈이나 입이나 귀나 팔 다리 손발보다는 아무래도 머리털이 가치가 덜 나가지 않겠습니까? 미장원에 가서 내 머리털 잘랐으니 돈 내라고 말하는 손님은 없습니다. 오히려 비싼 돈을 주고 나옵니다. 이처럼 우리 몸에 가장 가치가 떨어지는 멀리 털 한 가닥도 하나님은 귀하게 여기신다고 합니다. 머리카락이 빠져 대머리 되는 분들은 머리카락 한 가닥도 귀하게 여깁니다. 여러분 머리카락이 몇 개쯤 될까요? 어느 분이 말합니다. 12만 3456개라고 합니다. 아마도 그분은 머리숱이 많은 분입니다. 사람마다 다르지만 대체로 4-10만개 전후라고 합니다. 굉장히 많습니다. 하나님이 머리카락 한 가닥도 귀하게 여기시니 10만개 머리카락을 가진 사람을 10만배 사랑한 것입니다. 그러면 어느 분이 묻습니다. 나는 대머리이니 하나님은 얼마나 나를 사랑하실까요? 하나님은 누구보다 더 사랑하십니다. 성경을 보면 엘리사 선지자가 대머리였습니다(왕하2:23) 요나 선지자도 대머리였습니다.(욘4:6)  바울사도의 초상화를 보면 대머리입니다. 그러닌까 어느 분이 말하기를 하나님은 인간들이 하도 속을 많이 상하셔서 머리카락이 하나도 안 남으셨을 것이다 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하나님이 우리가 얼마나 귀중한지 머리털조차도 세고 계신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세밀하게 완벽하게 우리를 보살피시고 있다는 것입니다. 나는 내 머리털을 다 세지 못하지만 하나님은 나의 모든 것을 다 세시고 계십니다. 머리털까지도 세시는 하나님은 나의 심장의 박동 수도 체크하시고 있고, 콜레스토롤 수치도 계산하시고 있고, 시력도 얼마인지 살피시고 있고, 내가 나이가 먹어 몸에 어떤 증상이 나타날 것인지를 다 살피시고 계십니다.
왜 하나님이 이렇게 우리를 살피시고 있습니까? 하나님이 할 일이 없고 따분해서 저와 여러분의 머리털을 세시고 있는 것입니까? 그것이 아니라 우리의 가치가 많은 참새보다 귀하기 때문입니다.  만일 금고에 돈이 가득하다면 그 사람은 돈이 얼마인가 세보고 좋아하고 또 세보고 흐믓해 할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이렇게 살펴보시고 기뻐하시고 좋아하시니 나는 하나님의 진주보다 더 귀한 보물 덩어리라고 할 것입니다. 무슨 돈 문제가 아닙니다. 천하를 주어도 바꾸지 않는다고 하시니 그래서 독생성자 예수님까지 세상에 보내시어 십자가의 고난과 죽으시기 까지 우리를 사랑하신 것입니다. 여러분 한 사람 한사람을 위해 우리 주님이 고난당하시고 죽으심은 우리 한 사람 한사람이 그렇게 귀중하셨다는 증거입니다. 그러므로 나는 참새보다도 보잘 것 없음을 생각한다면 우리는 불행하고 절망하지만 예수 안에 나의 귀한 것을 깨닫는 다면 우리는 그 어떤 처지에 있어도 환난과 곤고와 죽음 앞에서도 나는 행복하다고 외칠 수 있는 것입니다. 혹 여러분의 어리석음 때문에 여러분의 부족한 것 때문에 어떤 사람이 여러분을 향하여 손가락질을 하며 욕을 할는지 모릅니다. 여러분과 가장 가까이 있는 사람이 여러분을 향하여 제발 지구를 떠나주었으면 좋겠다고 말할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이것을 알아야합니다.  하나님의 생각은 전혀 다릅니다. 하나님은 여러분을 사랑하시고 여러분의 엄청난 가치를 아시고 여러분을 보호하시고 지켜 주십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행복해 지기를 원하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당당히 말해야 합니다. “나는 행복하다!”

우리가 행복해지는 것은 나만의 꿈이 아니라 하나님의 꿈이요 하나님의 소원입니다. 여러분이 축복을 받고 오늘도 기쁘고 보람 있게 인생을 사는 것은 내가 꿈꾸기 훨씬 이전부터 하나님은 나의 행복을 꿈꾸셨습니다. 하나님은 나 자신보다, 여러분의 가족보다, 여러분이 더 잘되기를 소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 아버지는 오늘도 우리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많은 참새보다 귀하니라." 여러분, 어쩌면 인간의 모습은 참새와 같이 불쌍한 존재입니다. 오늘도 이 세상에 참으로 불상하게 살다가 불행하게 세상을 떠나는 사람들이 너무나 많습니다. 전도서의 말씀처럼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 헛되게 인생을 죽지 못해 살고들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귀하게 여기는 저와 여러분은 헛되게 사는 것도 아니고 헛되게 죽는 것도 아니고 행복하게 살다가 행복하게 영생복락을 누리며 천국에 살게 됩니다. 이것을 믿으십니까?

여러분, 하나님은 저와 여러분이 이렇게 참새처럼 한 앗사리온에 가치 없이 팔리고, 참새처럼 불쌍히 죽는 것을 원하시고 있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저와 여러분에게 영원히 살 수 있는 영생을 주시기를 원하시고 있고, 저와 여러분이 영원한 기쁨과, 영원한 행복과, 영원한 축복 속에 살기를 원하시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러한 나라인 천국을 예비해 놓으시고 있고, 이 땅에서도 천국의 맛을 보여주며 우리가 하나님의 귀한 사랑 속에 살기를 원하시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묻습니다 “여러분은 행복하십니까?”
유엔(UN)에서는 2015년 '세계 행복의 날(International Day of Happiness)'을 맞이하여 한 여론조사기관이 세계 143개국의 사람들에게 똑같은 질문을 던졌습니다.
"당신은 얼마나 행복한가?“

세계 여론 조사기관인 갤럽이 지난 한 해 동안 143개국에 걸쳐 국가 당 15세 이상 남녀 1000여명을 대상으로 면접, 전화  인터뷰를 통해 얻은 데이터를 바탕으로 사람들이 느끼는 행복도를 조사하여 순위를 매겼습니다. 세계 전체의 평균은 71점이었습니다. 한국인이 느끼는 행복감은 100점 만점에 59점으로 나타났습니다. 행복순위는 143개 나라 중 118위로 한국 성인 행복지수는 세계 평균에도 한참 못 미치는 셈입니다. 그러면 왜 한국인은 행복하지 못하다고 생각하고 있는 것입니까? 많은 사람들이 행복을 돈에 물질에 기준을 두고 있기 때문입니다.  미국의 시인 겸 수필가인 '헨리 벤 다이크'(Henry Van Dyke)는 "세상에 돈으로 살 수 있는 행복이라 불리는 상품은 없다"고 말했습니다. 돈으로 행복을 사려하니 돈이 없다고 생각하니 화가 나고 슬프고 괴롭고 그래서 전 세계에 술 소비율이 제일 많고 자살 율이 제일 많고 이혼율이 제일 많습니다. 행복은 인간의 쾌락이 아닙니다.  행복하게 할 것이라고 착각하게 하는 물질에대한 욕망을 내려놓아야 합니다. 오직 나를 불행하게 만들 뿐인 모든 보암직한 것 먹음직한 것 탐스러운 것들을 내려놓아야 합니다.

행복해지기 위한 간단한 방법이 있습니다.  나를 슬프게 만드는 모든 것들을 내려놓는 것입니다.(One of the simplest ways to stay happy is to let go of all of the things that make you sad.) 그리고 예수님의 뒤를 따르는 것입니다. 오늘은 참새의 날이요 세계 행복의 날일 뿐 아니라, 예수님이 우리를 구원하시려고 예루살렘 성에 들어가시는 종려나무 주일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우리를 사랑하시기에 십자가를 지셔 고난당하시고 죽으셨습니다. 그리고 우리를 더 이상 불행하게 살아가지 않도록 삼일 만에 부활하시였습니다. 예수님의 공생애는 우리에 행복을 찾아 주시기 위한 삶이셨습니다.

라온 코이노니아는  천하보다 귀한 성도들의 신앙공동체입니다.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사랑을 가장 많이 받고 계시는 여러분이십니다. 다시 다짐하십시오. 예수님의 뒤를 따르면 우리는 많은 참새보다 더욱 가치 있는 삶을 살게 됩니다. 그러나 우리의 인생이 예수님을 떠난다면 우리의 가치는 참새보다 못하게 되고 맙니다. 불쌍한 신세가 되고 맙니다. 라온코이노니아 여러분의 행복이 하나님의 소원이십니다.(빌 2:13) 예수님은 우리를 행복하게 해 주시기 위해서 지금 나귀타고 예루살렘 성에 들어가십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행복하게 해 주시기 위해 십자가 지고 골고다로 올라가십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행복하게 해 주시기 위해 십자가에서 피 흘리시고 죽으셨습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행복하게 해 주시기 위해 무덤에서 삼일 만에 부활하시였습니다. 그러므로 이제 행복하게 사시기 바랍니다. 매일 매일 예수님 안에서 행복하게 살아가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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