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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병호목사의 교회이야기

전병호 목사의 설교



 2015년 8월 9일  주일아침 예배 설교  빌 1:20-28  라온코이노니아의 예의


과공비례(過恭非禮)라는 말이 있습니다. 지나친 예의는 예禮가 아니라는 말입니다. 지난 7월 25일,26일 미국을 방문한 새누리당 김무성 대표가  미국 워싱톤 DC 더블트리 호텔에서 열린 6.25전쟁 참전 용사 유가족 참전 만찬 행사에서 미국인 참전 용사들에게 값진 희생에 감사하다고 한국식 큰절을 하였습니다. 26일 오후에는 알링톤 국립묘지에 있는 고 월턴 워커(Walton H. Walker: 1889~1950)  장군 묘비를 찾아 역시 큰절을 하였습니다. 미 8군사령관을 지낸 워커장군은 6.25전쟁 당시 낙동강 전선을 지켰다고 합니다. 김 대표는 손수건을 꺼내 묘비에 묻은 진흙을 닦으며 "아이고, 장군님 감사합니다"를 연발하였습니다. 김 대표는 "우리나라를 살려 주신 분들인데 백 번 절을 해도 부족하다"고 말했다고 합니다. 개인적으로 6.25전쟁 미 참전용사들에게 그리고 고 워커장군을 추모하며 감사하는 일은 매우 잘한 일이지만 대한민국 여당의 대표로 그리고 차기 대통령을 꿈꾸는 김무성 대표는 개인이 아니라 국가를 대표하는 공인으로 큰절을 하였다는 것은 예의가 아니라 오히려 예의를 벗어난 행동입니다. 그것은 나는 이런 예절바른 사람이라고 과시하려는 생각이었다면 오히려 예의를 저버린 행동입니다. 만일 정말 6.25참전 용사들에게 감사하여 큰절을 올렸다면 다른 나라에 가서도 그리고 우리나라 참전용사들에게도 큰절을 올려야 하고, 동작동 국군묘지에 가서 분향만 할 것 아니라 큰절을 하고 비석을 닦아야 할 것입니다. 이는 미국인들에게만 아니라 우리나라 국민들에게 자신의 예절바름을 자랑하고자 함이라 하겠지만, 우리 국민들의 얼굴을 부끄럽게 한 참으로 예의 없는 무례한 행동이라고 할 것입니다. 이는 김무성 대표의 평소의 모습인지 아니면 어떤 의도가 있는 행동인지 김대표만이 아는 일이라 하겠습니다.(박근령씨의 일본에서의 망언이 얼마나 무례한 일인가와 가히 비견됩니다.)


옛날부터 우리나라를 東方禮儀之 君子國이라고 말하여 왔습니다. BC268년 공자의 6대손인 공빈(孔斌)이란 사람이 東 夷 列 傳을 기록하여 이런 글을 썼습니다.

其國雖大 不自驕矜 其兵雖强 不侵人國
기국수대 부자교긍 기병수강 불침인국
   그 나라는 비록 크나 스스로 교만하지 아니하고
   그 군대는 비록 강하나 남의 나라를 침략하지 않으며

風俗淳厚 行者讓路 食者推飯 男女異處 而不同席
풍속순후 행자양로 식자추반 남녀이처 이부동석
   풍속이 순박하고 후덕하여 길 가는 사람은 서로 길을 양보하고
   밥 먹는 사람은 서로 밥을 권유하고 남녀가 거처를 달리하여 앉는 자리를 함께 하지 않     으니
可謂 東方禮儀之 君子國也
가위 동방예의지 군자국야
   참으로 동방예의군자 국이라하겠다.


우리나라의 역사 그 어느 때보다 조선 500년(1392-1910)은 유교국가로 공자가 말한 예학을 매우 중시하여 왔습니다. 사람과 짐승이 다른 점으로 <예절>을 말합니다. 그래서 예절을 모르는 사람을 짐승만도 못하다고 말합니다. 공맹의 예절을 몸소 익혀 생활한 사람들이 선비들이었고 양반들이였습니다.

 공자선생이 이런 말을 하였습니다.
   子 曰 君子 有勇而無禮면 爲亂하고 小人이 有勇而無禮면 爲盜니라.
   자 왈 군자가 유용이무례면 이란하고 소인이 유용이무례면 위도니라.

공자 말씀하시길 “군자가 용기는 있으나 예의가 없으면 세상이 어지럽고, 소인이 용기가 있으되 예의가 없으면 도둑질을 하느니라” 

공자의 말에 비추어 말하면, 조선이 망한 원인 중의 하나는 무례한 집권자들에 의해서 라고 하겠습니다. 어찌 옛날뿐이겠습니까? 지금도 짐승만도 못한 인간, 짐승 보다 더한 무례한 인간들이 정치 경제 학교 심지어 종교에 까지 우리 사회에 곳곳에 우글거리고 있어 나라는 더욱 어지러워지고 살아가는 일이 혼란스럽습니다.


전에 한국 사람들이 싸울 때에도 예의를 지켰습니다. 먼저 때리지 않고 자기의 가슴을 상대방에게 내밀며 "자 먼저 때려, 어서 때려"한다는 것입니다. 먼저 때리라고 하면 상대방 역시 "네가 먼저 때려, 때려 봐"하는 식으로 하여 싸울 때도 양보심이 많았던 우리나라 삼들입니다. 그런데 요즈음은 싸우는 방법이 달라졌습니다. 다짜고짜 먼저 상대방에게 주먹을 휘두릅니다. 이제는 동방예의지국이란 말이 무색하리만큼 무례한 일들이 도처에서 빈번한 것을 봅니다. 요즈음 무더위로 불쾌지수가 높아서 그런지 사람들 서로 간에 무례히 행하여 불평하고 화를 내고 짜증부리는 일들이 많이 있습니다. 요즈음 보복 운전이라 하여 다른 차가 자기 차 앞으로 끼어들었다고 고속도로까지 쫒아가 뒤를 박아다는 뉴스가 전해졌습니다. 어떤 사람은 "금연"이라는 표지판 앞에서 버젓이 흡연을 하거나, 담배꽁초를 아무데나 버립니다. 쓰레기 버리지 마세요 라는 팻말 앞에 더 많은 쓰레기가 쌓여 있습니다.


예절은 그 사람의 교양, 인성, 인품, 인격의 수준을 보는 척도라고 하겠습니다. 서양 말로는 “에티켓” 또는 매너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에티켓 있는 사람이 되라 하면 좋은 충고로 받아들이는데 사람들에게 예절을 지키라고 하면 무슨 귀신 씨 나락 까먹는 소리를 하냐 지금이 어느 시대인데 예절을 찾느냐고 말합니다. 예절은 '인성의 시작이요 마침표'로서 중요한 인간경쟁력이 됩니다. 직장에서 신입사원을 뽑을 때 인성이 우선이고 다음 적성과 자질을 봅니다. 정부에서는 인성교육 진흥법을 발의하여 21일부터 시행한다고 합니다. 인성교육의 핵심은 바로 예 효 정직 책임 존중 배려 소통 협동 등으로 인간다운 성품과 역량을 기르는 교육이라고 말합니다. 여기에 전교조는 이 인성교육법이 양심의 자유를 침해한다고 반대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누가 어떻게 가르치느냐는 방법론에 대한 논의는 반드시 필요합니다만 인선교육은 오히려 늦은 감이 있습니다.
지금 우리 사회에서 들려오는 무례한 비 윤리적 일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부모에게 행패부리는 자식, 담임여교사의 머리채를 쥐고 흔드는 학부모, 시위도중 경찰들에게 폭력을 행사하는 일, 여자당원이 당대표에게 쌍욕을 하며 행패부리는 일, 극장이나 식당을 놀이터처럼 뛰어다니는 아이를 내버려 두는 부모, 학교에서 군대 내에서 빈번하게 일어나는 성폭력, 국회 안에서 폭언하는 국회의원들.....TV드라마를 보면 직장 안에서의 상사의 갑질 횡포, 아부하며 모함하는 장면들을 보여주는 수많은 이야기들을 보면서 으스스 떨리는 것이, 어찌 우리나라가 온통 무례함으로 가득차 있는가? 무더운 여름철인데 마음이 냉동고 안처럼 얼어 옵니다.  


그러면 어째서우리나라에  그토록 좋은 예절이 실종되고 말았을까요? 여러 가지 원인이 복합적으로 작용했겠지만 간추려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일제의 압박과 6.25전쟁 그리고 가난한 시절을 겪으면서 예절 같은 것을 살필 겨를이 없었다고도 하고, 산업화가 되면서 개인적인 욕심 때문에 공(公)과 사(私)를 구분하지 못하게 되었기 때문이라고도 말하며, 재산 모으기와 자식들을 출세시키려는 욕심 때문에 가정에서 예의를 논하지 않게 되었다고 하고, 공교육 기관인 학교에서 인성교육은 제쳐 두고 입시 위주의 지식 교육에만 몰두하였기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또 하나를 더 언급한다면 자식을 한 명씩만 낳아서 금지옥엽처럼 귀하게 키운 나머지 자식의 우상화가 예절의 실종이라는 결과를 초래하게 된 것이라고도 말합니다. 그러나 오늘날 한국 문화가 저질 타락  온통 사회에 만연하여 마치 폭력을 미화하고 야한 성문화나 동성애를 인정하는 것이 선진문화처럼 여기는 등 죄악의 세속문화가 사람들의 인성을 오염시키므로 결국 무례한 문화가마치 정상적인 것처럼 착각하고 살고 있는 것입니다.


기독교인의 예의 없는 행동은 곧 하나님을 욕되게 하는 일입니다. 모든 행동에서 주님의 향기를 뿜어내야 하는 기독교인들이 옷차림과 말투, 기본적인 생활예절 등을 무시한다면 주변 사람들의 곱지 않은 시선을 받기 쉽습니다. 기독교인에게 늘 강조되는 ‘신행일치’는 예의바른 태도에서 시작된다는 것을 우리는 간과해선 안 됩니다.

그런데 기독교에서 말하는 예와 유교에서 또는 세상에서 말하는 예와는 차이가 있습니다. 세상에서 예의는 사람의 노력과 가르침을 받아 예를 실천하게 됩니다. 그런데 기독교는 사람의 노력으로 예를 이룰 수가 없다고 말합니다.
생각해봅시다. 조선 500년 그렇게 예의를 숭상하였는데 어째서 수없이 사색당파로인한 수많은 사람들이 불행을 당하였고 그렇게 예의를 숭상하였던 조선말 수많은 유학자들이 많았음에도 결국 나라가 어지러워 망한 것입니까? 어째서 공자선생님이 사셨던 그 옛날 중국의 춘추전국시대에 평화의 시대가 없었으며 공자의 나라 노나라는 망하였고 중국을 공자의 도로 통일한 진나라는 몇 십 년 만에 망한 것입니까? 참으로 공자선생님의 예에 대한 가르침은 귀한 교훈이나 사람들이 그 교훈을 따를 만한 존재가 못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공자의 예의는 그냥 이상적인 논리였다고 하겠습니다. 죄로 가득한 인간이 예의로 옷을 입었다고 그 속이 예의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니였던 것입니다. 오히려 내 예의가 옳다 너의 예의가 틀리다 하면서 당파 싸움으로 수많은 사람들이 사약을 먹고 유배를 당하고 정권이 무너졌습니다. 문제는 이미 죄로 예의를 잃어버린 인간 심성에 예의의 옷을 입혀 보지만 역시 예의 없는 인간일 뿐입니다.


디도서 3:7에 “우리로 그의 은혜를 힘입어 의롭다하심을 얻어 영생의 소망을 따라 상속자가 되게 하려 함이라.”고 말씀하였습니다.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은 은혜로 의롭다하심을 얻었다고 하였습니다. 이 말씀에서 “의롭다”는 말씀은 원어로 “디카이오덴테스”라는 말로서, 사람의 노력과 공력으로가 아니라, 하나님이 의롭다고 인정해 주심으로 의로운 사람이 된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의롭다”는 말은 사람이 마땅히 지켜야 할 예의를 말합니다. 다시 말씀 드리면 기독교의 예의는 위로부터 은혜로 주어지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하나님의 사람에 대한 예의 이였습니다. 하나님은 사람을 예로서 대해 주셨습니다. 하나님이 독생성자 예수님을  보내주시고 예수님이 십자가에 우리의 죄를 대속하시기 위한 고난과 죽으심은 우리 죄인들에 대한 예수님의 예의 이였습니다. 태초에 하나님이 범죄한 아담과 이브를 에덴동산에서 내 보내심은 하나님의 사랑이요 하나님의 예의 이셨으니, 이는 만일 죄인 된 인간이 그대로 에덴동산에 남아 있었다면 속된 것이 거룩한 곳에 서면 마땅히 멸망하게 되기 때문에,  하나님은 불가불 세상으로 그들을 내보내신 것이고 가죽옷을 입혀 주신 것입니다. 만일 죄인된 인간들을 벌하신다면 한사람도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서 구원받을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저와 여러분을 구원하기 위해선 예수님이 대신 고난과 죽으심을 받으셔야 하겠기에 예수님은 기꺼이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로 올라가셨으니 이는 예수님의 의요 예의이신 것입니다. 그래도 부족합니다. 성령께서 우리에게 오심으로 말미암아 비로소 우리로 예수그리스도를 믿고 하나님의 축복자녀 되게 하셨으니 하나님의 자녀로 산다는 것이 바로 하나님의 예의를 따르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자녀는 마땅히 예의 사람이니 결코 무례한 사람이 될 수 없는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13장 사랑의 장에서 5절에 사랑은 무례히 행하지 아니한다고 하였습니다. 여기서 무례히 행하다는 말은 “‘아스케모네이’(아스케모네오. 동 직 현 능3단)란 말로 ‘격에 맞지않다, 어울리지 않다’는 말로 ‘스케마’에서 유래된 말입니다. ‘스케마’는 ‘모양, 형상 이란 말입니다. 태초에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형상으로 사람을 창조하셨습니다. 그럼으로 사람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하나님을 닮은 존재로 살아야 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을 닮은 존재로 살지 않는 것이 바로 무례한 일일인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죄인 된 삶입니다.


니콜라스 허만(Nicholas Herman)이라는 사람을 기억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는 1610년에 프랑스에서 태어났습니다. 청소년기에 그는 30년 전쟁에 참여하게 되었고, 좌골신경(sciatic nerve)에 치명적인 손상을 입었습니다. 그 이후 그는 다리를 절며 살았습니다. 전쟁이 끝난 후, 파리에 새로 세워진 수도원에 요리사로 취직합니다. 15년이 지난 후, 그는 수도사들의 신발을 고치는 일로 자리를 옮깁니다. 그렇게, 40여 년 동안 수도원에서 허드렛일을 섬기다가 그는 1691년에 81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납니다. 그 수도원에서 니콜라스는 가장 보잘 것 없는 허드렛일을 섬겼지만, 말하고 행동하는 것으로 인해 모두로부터 사랑과 존경을 받았습니다. 그에게는 특별한 것이 있었습니다. 그의 말에는 상대방에 대한 이해와 배려와 사랑이 느껴졌습니다. 그의 표정에는 늘 하늘의 평화가 깃 들여 있는 것 같았습니다. 그가 일하는 것을 보면 마치 아름다운 율동을 보는 것 같았습니다. 그는 늘 무엇엔가 취해 있는 것 같았고, 만나는 사람들에게 그 기쁨을 전염시켰습니다. 그는 늘 무엇인가를 생각하는 것 같았고, 누군가와 말 없는 대화를 주고받는 것 같았습니다. 그의 손을 거쳐 나오는 일은 항상 완벽했고 모두를 만족하게 했습니다. 그는 아무 것도 걱정하지 않은 것처럼 보였고, 아무 것도 두려워하지 않은 것 같았습니다. 모두가 그에게서 특별한 것을 느꼈지만, 그것이 무엇인지, 어디서 온 것인지, 몰랐습니다. 그가 세상을 떠난 후, 놀랍게도, 그가 남긴 글과 편지가 발견되었습니다. 그것을 읽어 본 사람들은 비로소 니콜라스의 비밀을 알게 되었습니다. 자신의 은사의 이름을 따서 로렌스 형제(Brother Lawrence)라고 불리기를 좋아했던 니콜라스는 매일, 매 순간 하나님의 임재를 의식하고 주님과 함께 동행하는 것을 삶의 목표로 삼고 살았다는 사실을 남겨진 글에서 확인했기 때문입니다. 결국 그의 글이 묶여서 책으로 나왔고, <하나님의 임재 연습>(Practice of the Presence of God)이라는 제목의 이 책은 지금까지도 영성 고전(spritual classic)으로 사랑받고 있습니다. 이 책에 보면, 그가 어떻게 살았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그는 주방에서 계란 프라이를 뒤집을 때조차도 주님을 생각하였고, 수도사들의 옷을 다림질할 때도 주님의 영광을 위해 했다고 합니다. 이것이 니콜라스의 의요 예의의 삶이였습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은 늘 십자가를 바라보고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신다는 임마누엘 하나님의 임재를 생각하며 살아가야합니다. 항상 하나님의 임재를 연습하면 삽니다. 이것이 기독교인들의 의로운 삶이요 예의 생활입니다.


오늘 본문 빌1:27절 상반절에 보면, "오직 너희는 그리스도 복음에 합당하게 생활하라"고 말씀했습니다. 여기서 "합당하게 생활하라"는 말은, 헬라어로 '폴리튜오'라고 합니다. 이 말은, '시민으로서 행동하다'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기독교인은  하나님 나라의 백성으로서 천국 시민답게 생각하고 행동하고 생활해야 합니다. 빌3:20에 "오직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는지라, 거기로서 구원하는 자 곧 주 예수 그리스도를 기다리노니"라고 말씀했습니다. 우리는 지구인입니다. 대한민국백성입니다. 전라북도 군산시민입니다. 그리고 엡 2:19에 “...오직 성도들과 동일한 시민이요 하나님의 권속이라.” 또한 하나님 아버지의 하나님 나라의 천국시민임을 고백합니다.


성도여러분, 우리는 하나님의 임재연습을 해야 합니다. 어디서나 어떤 일을 할 때나 지금 하나님이 나에게 임재하신다는 믿음을 가질 때 우리는 천국 시민으로 무례히 행할 수 없습니다. 왜 그래야 합니까? 빌 1: 28에 “무슨 일에든지 대적하는 자들 때문에 두려워하지 아니하는 이 일을 듣고자 함이라”고 말씀하였습니다.  ‘대적'이라는 단어는 헬라어로 '안티케이마이'라고 합니다. 이 말이, 눅13:17에서는, 예수님을 반대했던 무리들을 가리킬 때 사용되었고, 갈5:17에서는 성령을 거스리는 '대적자'들을 가리켰습니다. 이 세상에는 수많은 적그리스도 안티기독교 대적자들이 있습니다. 마귀의 역사로 인터넷에 수많은 대적자들이 기독교를 비난하고 있습니다. 이런 대적자들을 두려하지 말아야 합니다. 여기서 '두려워하다'는 단어는, '프튀로마이'라고 하는데, 이 '프튀로마이'라는 단어는, 겁먹은 말이 놀라는 표현을 연상하시면 됩니다. 겁먹은 말이 놀라면 어떻게 합니까? 안절부절 못하고 마구 뛰어다닙니다. 우리는 이런 세상의 대적자들로 놀랄 일 전혀 없습니다. 그러나 한국의 기독교인들은 그 비난을 감수해야합니다. 그것은 한국의 기독교인들의 하나님의 형상답지 못한 무레한 언행이 그들의 조롱과 비난을 받고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한국의 기독교인들이 얼마나 천국시민 답지 못한 예의 없는 말과 행동들을 세상에서 가정에서 교회에서 하고 있습니까?


거룩하다고 말하면서 가장 세속적이고, 의를 말하면서 불의와 짝하고, 복음을 말하면서 율법주의에 빠져 있고,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라고 말하면서 언제나 옛것에 얽매어 있고, 순종을 말하면서 불순종을 일삼고, 겸손을 말하면서 교만하기 그지없고 , 원수를 사랑하라하면서 가장 이웃들을 미워하고 있고,  섬기라고 하면서 가장 불평 많은 사람들이요, 믿음을 말하면서 가장 믿음 없는 사람들이 오늘의 한국교회에 많이 있습니다. 한마디로 기독교인으로 천국시민으로 예의 없는 사람들입니다. 분명한 것은 예의 없는 기독교인은 천국시민 자격이 없습니다. 한마디로 그들은 기독교인이라 할 수 없습니다.
생각해 보세요. 만일 대적자들이 나를 비난한다면 나의 어떤 무례한 행동을 보고 비난 할 것인가? 

우리 라온 코이노니아는 하나님의 예의 바른 성도들인 줄 믿습니다. 우리 중에 무례한 사람은 한사람도 없는 줄 믿습니다. 오직 빌 1:20의 말씀처럼 “살든지 죽든지 내 몸에서 그리스도가 존귀하게 되게 하려 하나니”말씀처럼 우리의 인생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예의 바른 천국시민으로 살아가기를 바랍니다. 

우리들이 꼭 지킬 라온 코이노니아의 예의 네 가지 말이 있습니다.
이 네가지 말을 노래로 함께 불러 보겠습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실(온 세상이 바꾸어 질)  예의 바른 네마디 말  먼저하세요  미안합니다  감사합니다  제가할께요"


하나님의 은혜와 축복이 예절바른 라온코이노니아  모든 성도들 위에 함께 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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