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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병호목사의 교회이야기

전병호 목사의 설교



2015719일 주일아침 예배설교 계3:14-22 라온코이노니아의 문

 

 

제주도 사람들의 대문은 특색이 있습니다. 마당 입구 양 편에 구멍이 세 개가 뚫어진 돌 기둥을 세웁니다, 그것을 정주먹이라고 부릅니다. 그리고 그 뚫어진 구멍에 긴 장대를 가로로 걸쳐 집어넣습니다. 그 가로 장대를 정낭이라 합니다. 정낭 하나가 걸쳐 있으면 주인이 지금 집에 없으나 곧 돌아온다는 표시입니다. 두 개가 걸쳐 있으면 몇 시간 후에 돌아온다는 표시입니다. 세 개가 걸쳐있으면 오늘은 못 돌아온다는 표시입니다. 만일 그 집에 찾아오는 손님이 있다면 그 정낭의 수를 보고 기다리거나 돌아가거나 할 것입니다.

문의 역할은 그 집의 안과 밖을 구분해 주는 경계에 있습니다. 만일 누가 주인의 허락도 없이 밖에서 그 문을 열고 마당이나 집안으로 들어가면 가택 무단 침입 죄로 고발당합니다. 철대 문이 아니더라도 싸리문이라도 그냥 마당에 새끼줄을 처 놨다 해도 반드시 주인의 허락을 받아야 들어 갈 수 있습니다. 만일 낮선 문을 들어서려면 조금은 두려움도 느끼게 되고 그 문 안에 무엇이 있을지 궁금하기도 하고 반가운 사람을 만나려는 설레임도 있습니다. 어떤 문은 꼭 들어가고 싶은 문이 있고 어떤 문은 들어가고 싶지 않은 문도 있으며 어떤 문은 절대로 들어가서는 안 되는 문도 있습니다.

전에 부산남천중앙교회에 있을 때입니다. 어느 가정에서 구역예배를 드리는데 한 여집사님이 아파트에 구역예배를 드리러 갔습니다. 문을 여니 아직 아무도 오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집안에 들어가 한 참 기다리는데 아무도 오지를 않았습니다. 그래서 이 집사님은 오늘 구역예배를 드린다고 하고 아마도 취소한 모양이구나 그런데 나에게는 알려 주지 않다니 기분이 나빠 돌아 나오려고 하는 데 집주인 아주머니가 들어 왔습니다. “아니 할머니는 누구신데 주인 허락도 없이 들어오셨습니까? ” “댁은 누구십니까?” “나는 이 집 주인입니다.” “이 집은 박집사님 댁인데 그럼 언제 이사를 갔나” “무슨 말이에요 내가 이 집에 산지 10년도 넘었는데, 할머니는 도적질 하러 들어 왔군요. 그 가방에 무엇이 있나요.” 여집님과 집주인 여자와 논쟁을 하고 있는데 구역예배를 마치고 돌아가는 교인들이 4층에서 내려오다가 보게 되었습니다. “집사님, 여기서 무얼 하고 있습니까? 집사님이 안 오셔서 우리끼리 구역예배를 드렸는데 무슨 일이에요.” 자초지종을 알게 된 집주인 아주머니가 이해를 하였습니다. 여 집사님이 사층으로 가야 하는데 3층에 엉뚱한 집으로 들어갔었던 것입니다.

 

사람들은 여러 가지 인생의 문제를 안고 이집 저집 문을 찾아 들어 갑니다. 마치 그 집에 들어가면 자신의 인생의 문제가 해결되고 갈등이 잠잠해지고 마음에 평안 올 것이라고 잔뜩 기대 합니다. 그러나 이것을 알아야 합니다. 여러분이 찾아 들어간 그곳은 결코 들어가서는 아니 되는 집입니다. ‘이 세상 그 어떤 집도 나의 인생을 평안케 할 그런 집은 없다이렇게 생각하십시오. 한문으로 집을 가라고 집 가를 씁니다. 이 뜻이 무엇입니까? 갓머리라고 하는 집면 아래 돼지 돈이 있습니다. 즉 집은 돼지우리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집안이 평안하게 해달라고 귀신에게 돼지 머리를 올려놓고 제사를 지냅니다. 옛날부터 우리나라 사람들은 집마다 그 집을 주장하는 귀신이 있다고 생각들 하였습니다. 부엌의 조왕귀신(竈王神) 뒷간귀신 장독귀신 대문귀신 달걀귀신 몽달귀신 손각시귀신 온갖 잡귀신들이 집안에 오글거리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온갖 잡귀신들을 잘 달래야 귀신의 해를 받지 않는다고 생각들 하였습니다. 귀신이 좋아하는 부적을 부칩니다. 어떤 부적은 귀신을 쫒아내는 부적도 있습니다. 수 천 년 동안 귀신을 믿어 온 우리나라 사람들이 얼마나 귀신의 혜택을 받았습니까? 한마디로 이런 귀신들은 없습니다. 모두 짝퉁 귀신놀이 일뿐입니다.

우리 기독교인들은 집 가자를 어떻게 써야 할 까요? 하나님이 우리 가정의 주인이 되시니 돼지 한 마리가 들어앉은 집이 아니라 십자가가 세워진 갓머리아래 십자가를 쓴 글자로 사용해야 할 것입니다. 한문은 상형문자이니 제가 만든 한자입니다.

타 종교와 기독교의 신앙의 다른 점이 있습니다. 타 종교인은 절을 찾아가고 사당을 찾아 갑니다. 그러나 기독교인은 교회를 찾아오는 것 아닙니다. 예수님이 그를 찾아 가십니다. 예수님이 우리 집을 찾아오시어 문을 두드리십니다. 문 좀 열어달라고 나의 마음의 문을 두드리십니다. 나의 인생의 문을 두드리십니다. 하나님이 노아의 집을 찾아가시어 노아에게 방주를 만들라고 말씀하십니다. 노아가 하나님을 찾아간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찾아가시어 갈대아 우르의 집을 떠나라고 말씀하십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에게 집을 떠날까요 말까요 물어 본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모세에게 너의 민족을 구하라고 명하십니다. 모세가 하나님에게 자기 민족을 구할 테니 자기를 도와 달라고 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이 베드로를 찾아 오시었습니다. 그 전까지 베드로는 전혀 예수님을 알지도 못하였습니다. 예수님은 세관에 앉아 있는 마태를 찾아가 부르셨습니다. 예수님이 삭개오가 올라앉은 나무 밑에 가시어 오늘 너의 집에 머물겠다고 말씀하십니다. 삭개오가 초청한 것 아닙니다.

 

여러분이 예수님을 찾아 온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이 여러분을 찾아가셔서 여러분의 마음의 문을 두드리셨습니다. 한 두 번이 아니라 수 없이 찾아가시어 마음의 문을 두드리셨습니다. 강제로 여러분의 집에 들어가지 않으셨습니다. 여러분이 마음의 문을 열 때까지 예수님은 여러분 문밖에 기다리고 계십니다.

 

여기서 성경에 나오는 한 사람을 속하겠습니다.

브루스 윌킨슨와 브루스 윌킨스가 펴낸 "야베스의 기도"라는 작은 책 한권이 있습니다. 미국에서는 출간 12개월만에 500만부가 팔린 책이고, 우리나라에서 단 7개월 만에 68판을 찍어낸 책입니다. 이 책을 통해 사람들은 야베스의 아픔과 희망에 대한 동질감을 가졌습니다.

 

대상4:9-10 “야베스는 그의 형제보다 귀중한 자라 그의 어머니가 이름하여 이르되 야베스라 하였으니 이는 내가 수고로이 낳았다 함이었더라 야베스가 이스라엘 하나님께 아뢰어 이르되 주께서 내게 복을 주시려거든 나의 지역을 넓히시고 주의 손으로 나를 도우사 나로 환난을 벗어나 내게 근심이 없게 하옵소서 하였더니 하나님이 그가 구하는 것을 허락하셨더라

 

어떤 일이 급작스럽게 악화되거나 위험한 고비를 맞이 할 때 위기(危機)라는 말을 합니다. 그러나 이 위기라는 말을 다시 살펴보면 이 말은 위태할 위()자와 기회 기()자로 이루어 졌습니다. 위기는 곧 기회라는 말입니다. 한 평생 사람들이 살아가면서 수없이 큰고 작은 위험한 때를 만나게 됩니다. 그 위기에서 그만 좌절하고 절망하여 인생의 구렁텅이에 빠져 나오지 못하는 사람도 있지만 또 그 위기를 새로운 도약의 발판으로 삼아 성공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야베스는 태어나는 순간부터 그의 인생이 위기와 고통의 세월을 살아왔다고 하겠습니다. 야베스라는 이름의 뜻이 고통 아픔이란 뜻입니다. 아마도 전쟁이 일어나 아버지가 전쟁에 나가 전사하여 너무나 고통스러운 때 야베스가 유복자로 태어난 것 같습니다. 그래서 그의 어머니가 아이의 이름을 고통이란 야베스로 지었던 것입니다.

 

더욱이 그 시대는 매우 죄악으로 타락한 시대였고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로 우상을 지독히 숭배하던 시대였습니다. 이런 사회적 분위기 속에 하나님을 믿는 다는 것은 매우 힘들고 어려운 일이였습니다. 덩달아 세속을 따라가고 사람들의 죄악의 분위기에 함께 물들어 가기 쉬운 일이였습니다. 그러나 야베스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잘못된 것은 잘 못 된 것이요 더러운 것은 더러운 것이요 악한 것은 악한 것이요 죄는 죄입니다. 무슨 말입니까? 죄악된 세상에서는 모든 것을 비틀어 말합니다. 죄를 죄라하지 않고 악을 악이라 하지 않습니다. 잘못된 것을 잘못되었다고 말을 못합니다. 콩을 사람들이 팥이라 하고 도토리를 밤이라고 말할 때 그것이 아니라고 말하면 왕따 당하고 사는 것이 고통스러운 일이 됩니다. 그러나 야베스는 이러한 죄악의 물결을 거슬어 올라갔습니다. 이로인해 내가 고통을 당하면 오히려 이는 하나님의 뜻이요 나의 거룩한 일이라고 생각 합니다. 그러나 역사는 결국 진리가 이기고 정의가 바로 서게 된다고 증거합니다. 야베스는 자신이 처한 환경에 좌절하거나 굴복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을 붙들었습니다. 하나님께 기도하며 하나님이 원하시고 기뻐하시는 일이 무엇인가를 알고자 하였습니다. 그가 이런 삶을 살 때에 사람들은 마침내 그를 알아주었습니다. 사람들은 그를 귀중한자라고 하였습니다. 여기서 귀중하다는 말은 카바드라는 말로 존경을 받다란 뜻입니다. 사람들은 야베스를 존경하였습니다.

 

어떻게 야베스는 고통스런 인생을 극복하고 사람들에게 존경 받는 그런 사람이 되었겠습니까?

야베스는 자신의 이름처럼 자신에게 닥쳐온 불행 고통스러움을 극복할 수 없는 운명이라고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성명을 가지고 인생을 논하는 이들은 이름이 그 사람의 운명을 좌우한다고 하지만 아니요 어찌 내 이름 세자가 나의 일생을 좌우할 것입니까? 얼마든지 인생은 기회가 있고 새로워질 삶이 있습니다. 그것은 나의 인생은 오직 하나님의 능력에 의해서 변화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고정된 것이 아닙니다. 인생은 물같이 유동적이고 변화무쌍합니다. 이런 변화무쌍한 인생에서 하나님을 영접하고 믿고 의지한다는 것은 가장 인생을 확실하게 행복하게 살 유일한 방법인 것입니다. 야베스는 이것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그의 마음 문을 두드렸을 때 그는 활짝 마음의 문을 열고 하나님을 자신의 인생에 들어오시게 하였습니다. 하나님이 그의 마음 안에 성큼 들어오시자 그의 칠흑 같은 절벽에 부닥친 것 같은 인생에 밝은 태양이 떠오르듯 밝아지게 되었습니다. 이름 하여 믿음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세속을 바라볼 때에 침침하고 갈 바를 몰라 하던 그가 눈을 들어 신령한 세상을 바라보게 되었습니다. 세상이 다르게 보였습니다. 비로소 선이 있음을 보게 되고 비로소 의가 있음을 알게 되고 비로소 하나님의 뜻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인생을 살면서 여러 환난을 만나게 되고 불만스런 일들이 일어나고 괴로워 인생의 가장 깊은 바닥에서 슬피 눈물 흘릴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기독교인은 여기서 눈을 들어 하나님을 바라보는 사람들입니다. 절망 속에 희망을 노래하고 어둠속에 빛을 밝히는 사람들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절망으로 고통 하는 나를 보기를 원하지 않으시기 때문입니다. 좌절하여 눈물 흘리는 나에게 너는 그렇게 살라고 세상에 태어난 존재가 아니다. 라고 말씀하십니다. 만일 너에게 닥친 환난의 이유를 알고 그 아픔의 목적을 안다면 이제 문을 열어라 내가 너를 붙들어 줄 것이고 내가 너를 인도해 줄 것이다 라고 하나님은 말씀하십니다.

 

에베소서 210절에 "우리는 그의 만드신 바라"(에스멘 포이에마)하는 말이 있습니다. 여기서 만드셨다는 것은 포이에마라는 말로 그의 작품이란 말입니다. 이 포이에마란 말에서 영어 포윔poem 시라는 말이 나왔습니다. 인생에 대한 많은 노래들이 있습니다.

 

최근에 일본의 가수 다케우치 마리야(1955. 3.20-)가 부른 인생의 문이란 노래를 들었습니다. 그 노래 가사가 매우 좋았습니다. 이 노래 가사가운데 이런 구절이 있습니다. “활짝 핀 벚꽃도 물들어 가는 단풍도 앞으로 얼만큼 몇 번이나 더 보게 되는걸까 하나씩 하나씩 인생의 문을 열고서 느끼는 그 무게 한 사람 한 사람 사랑하는 사람들을 위해 살아가고 싶어...............”


(** 가사가 좋아 전문을 소개합니다.

人生(인생의 문)-다케우치 마리야(竹內まりや)

 

봄이 다시 찾아 올때마다 하나씩 나이가 늘어나네

눈에 비치는 풍경도 조금씩 변해가네

까불며 놀던 어린 나날은 저멀리

어느틈에 벌써 50인 내가 있네

믿을 수 없을 만큼 빠르게 시간은 지나간다고 알아차리면

어떤 작은 일도 기억해두고 싶다고 마음이 말했어

 

Fun 20,--뭘해도 즐거웠던 20

Great 30,-- 대단했던 30

Lovely 40,-- 매력적이었던 40

그리고 Nice 50. 50대도 멋진 나이가 될 것

 

나는 20세가 되는것이 즐겁다고 합니다.

당신은 30세가 되는것이 훌륭하다고 합니다.

그리고 그들은 40세가 되는것이 아름답다고 합니다.

그렇지만 나는 50세가 되는것도 좋은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활짝 핀 벚꽃도 물들어 가는 단풍도

앞으로 얼만큼 몇번이나 더 보게 되는걸까

하나씩 하나씩 인생을 문을 열고서 느끼는 그 무게

한사람 한사람 사랑하는 사람들을 위해 살아가고 싶어

 

나는 60세가 되는것이 멋지다고 말합니다.

당신은 70세가 되는것이 아무렇지도 않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그들은 80세가 되는것이 한층 더 좋다고 합니다.

그렇지만 나는 필시 90세를 넘을때까지 살겠지요.........

너의 청바지 푸른색이 바래는 만큼 멋이 나는 것처럼

긴 여로의 끝에는 빛나는 그 무엇이 누구에게도 있을거야

 

がまたるたび ひとつ하루가마타쿠루타비 히토츠토시오카사네

景色 しずつわるよ 메니우츠로케시키모 스코시즈츠카와루요

陽気にはしゃいでた -키니하샤이데타 오사나이히와토-

がつけば五十路 えたがいる 키가츠케바이소지오 코에타와타시가이루

 

じられないさで ると ってしまったら 신지라레나이하야사데 토키와스기사루토 싯테시맛타라

どんなさなことも えていたいと ったよ 돈나치-사나코토모 오보에테이타이토 코코로가잇타요

 

I say it's fun to be 20

You say it's great to be 30

And they say it's lovely to be 40

But I feel it's nice to be 50

 

満開 づく紅葉만카이노사쿠라야 이로즈쿠야마노모미지오

このいったい何度 ることになるだろう 고노사키잇타이난도 미루코토니나루다로-

ひとつひとつ 人生けては じるその히토츠히토츠 진세이노토비라오아케테와 칸지루소노오모사

ひとりひとり するたちのために きてゆきたいよ 히토리히토리 아이스루히토타치노타메니 이키테유키타이요

 

I say it's fine to be 60

You say it's alright to be 70

And they say still good to be 80

But I'll maybe live over 90

 

のデニムの せてゆくほど わいすように 키미노데니무노아오가 아세테유쿠호도 아지와이마스요-

旅路てに かが にでもあるさ 나가이타비지노하테니 카가야쿠나니카가 다레니데모아루사

 

I say it's sad to get weak

You say it's hard to get older

And they say that life has no meaning

But I still believe it's worth living

But I still believe it's worth living )

 

우리의 인생은 내가 하나님의 나를 통해서 쓰고 계시는 한 편의 가 아닐까? 하나님의 철필이 되어 나의 인생을 가장 아름다운 한 편으로 우리는 기록하고 있습니다. 나의 인생은 아름다운 입니다. 안에는 바람도 불고 눈보라도 치고 계곡을 타고 높은 산을 오르며 깊은 계곡사이 흐르는 물 따라 떠내려가기도 하고 조용한 풀밭에 누워 하늘의 뭉게구름도 바라보고 세계 이곳저곳 돌아다니며 사랑도 하고 온갖 희노애락이 가득한 우리들의 인생은 하나님의 한편의 아름다운 입니다.

 

야베스는 자신의 삶을 이처럼 이름답고 고귀한 한 편의 처럼 하나님의 사람으로 살았습니다. 그는 위기를 발판 삼아 행복의 꽃을 피웠습니다. 그는 고통을 디딤돌로 삼아 인생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만큼 슬프지 않다고 마음껏 즐거운 인생을 살았습니다. 하나님이 그의 문을 두드릴 때에 문을 열 개되니 이것을 알아야 합니다. 내 안에 갇혀 있던 불만이 빠져 나가고 슬픔이 빠져 나가니 고통이 사라지고 하나님이 들어오시니 아! - 이처럼 세상이 환 하구나 이처럼 세상이 아름답구나 그래서 그의 인생은 이제부터 복이 넘치니 삶의 지경이 넓어졌습니다. 사람들의 존경 받는 사람으로 살았습니다.

 

누군가 인터넷에 이런 글을 올려놨습니다.

삶은 우리가 생각하는 만큼 고통스럽지 않습니다. 사랑에 눈뜨면 그 이유를 알게 됩니다. 매일 행복으로 살아가는 삶은 가끔은 잊게 마련입니다. 당신의 기쁨과 행복을 위한 소금의 역활이 아픔입니다. 그것이 있기에 평화를 알게 됩니다.”

 

설교 때 마다 한 가지 동요를 소개하는데 이번에는 어떤 동요를 소개 할지 궁금하지 않으십니까?

 

동동 동대문을 열어라

남남 남대문을 열어라

열두시가 되면은 문을 닫는다

 

어린 아이들이 기차놀이 하면서 부르는 동요입니다. “열두시가 되면은 문을 닫는다그렇습니다. 우리 인생의 문이 영원 닫힐 때가 있습니다. 그때 가서는 문을 열고 싶어도 더 이상 문은 열리지 않습니다. 그럼으로 지금 우리는 우리의 인생의 문을 열어야 합니다. 지금 우리 문 앞에 계시는 예수님을 맞이하여야 합니다. 이미 여러분들은 예수님이 여러분들의 문 앞에서 문을 두드리실 때에 문을 열고 주님을 맞이한 여러분이신 줄 믿습니다. 그러나 때로는 예수님 들어오실까바 문을 걸어두고 그 예수님의 노크소리를 듣지 않으려고 귀를 막고 있지는 않습니까?

 

저는 새벽에 저 문을 열고 들어 올 때마다 문고리를 잡고 이런 기도를 합니다. “하나님, 오늘 이 문고리를 붙드는 이에게 축복해 주세요. 이 문을 열고 들어오는 이들에게 평화를 주세요. 이 문에 들어왔다 나가는 이들에게 세상에서 승리하게 해 주세요라고 매일 새벽마다 기도합니다. 바로 라온 코이노니아는 여러분의 인생을 행복하게 하시기 위해서 하나님의 마련하신 행복의 문이요 천국의 문이 되는 줄 믿습니다. 이 문을 들어오고 나갈 때마다 모든 이들에게 하나님의 축복이 충만하시기를 축원합니다.

 

어떤 어린아이가 아빠랑 비행기를 타고 여행을 하였습니다. 아이가 화장실에 갔습니다. 얼마 후 화장실 쪽에서 사람들이 웅성거리고 아이의 울음소리가 들려왔습니다. 아이가 화장실에서 나오려니 문을 열줄 몰랐습니다. 아버지가 달려가서 큰 소리로 이렇게 열라고 말해주지만 아이는 너무나 두렵고 큰 소리로 울기 때문에 아빠의 소리를 듣지 못한 채 계속 울어댔습니다. 스튜어디스가 달려와 문을 열쇄로 열어주었습니다. 안에서 문고리만 잡아당기면 열리는 데 아이는 그걸 몰랐던 것입니다. 마음을 열고 아빠 말을 들었으면 문을 열 수가 있었는데 아이는 두려운 나머지 우느냐고 아빠말소리가 들리지 않았던 것입니다.

 

사람들 가운데 이런 분들이 있습니다. 세상사는 것이 너무 힘들다고 고달프다고 자신의 인생을 슬퍼하느냐고 예수님이 그의 문을 두드리는 소리를 듣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문 두드리는 소리를 들으면 안심입니다.

"볼지어다 내가 문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로 더불어 먹고 그는 나로 더불어 먹으리라"(3:20)

 

오늘도 인생의 백지장위에 한편의 아름다운 시를 쓰고 계시는 여러분과 여러분의 가정위에 하나님의 은혜와 평강이 충만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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