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년 7월 12일 주일아침 예배 설교 요 21:15-22 라온 코이노니아의 친구
지난 7월 4일 토요일 김옥주 전도사가 교회를 개척 설립하였습니다. 교회 이름이 “친구 교회”입니다. 제가 처음 그 교회 이름을 들었을 때 하도 많은 이름들 가운데 하필 친구라는 이름을 붙였는가? 좀 의아해 하였습니다. 그런 생각을 하다가 요한복음 15:15에서 예수님께서 “내가 너희를 친구라고 불렀다(에이레카 퓔루스)”라는 말씀을 기억하였습니다. 예수님이 나를 친구라 불러주셨는데 그러면 나는 예수님의 친구가 될 만한 사람인가 하는 생각을 하니 너무나 부끄러운 생각이 들었습니다.
예수님이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시고 내려오실 때에 가룟유다가 군인들을 데리고 예수님을 잡으러 올라 왔습니다. 가룟유다가 말했습니다. “랍비여 안녕하시옵니까?”하고 입을 맞추니 “예수님께서 이르시되 친구여 네가 무엇을 하려고 왔는지 행하라”고 말씀하시였습니다.(마26:49-50) 가룟유다의 배신을 이미 알고 있으신 예수님이 그를 친구라고 불렀습니다. 예수님은 가룟유다를 친구로 여겼는데 가룟유다는 예수님을 은 30량에 배신하였습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친구라 부르시는데 과연 우리는 예수님의 친구로 불려질만한가 생각해 보아야 할 것입니다.
1980년 8월 14일 육군본부 법정에서 ‘김대중 내란음모사건 군법회의 6차 공판’이 진행되고 있었습니다.(재판장:문응식소장, 재판광:박명철 이재홍 양신기준장, 법무사:양신기중령 검찰관:정기영중령 정인봉대위) 김대중 전 대통령을 비롯해서 문익환 목사님, 한완상 전 부총리 등 24명이 법정에 선 대부분의 피고인들은 ‘내란음모를 꾸몄다’는 자신들의 혐의를 부인했습니다. 수사과정에서 가혹한 고문 때문에 ‘김대중 씨로 부터 지시를 받아 내란을 기도했다’고 진술했지만, 법정에서는 그 진술이 진실이 아니라고 주장한 것입니다. ‘내란 음모를 인정하면 김대중 씨의 목숨이 위험하다는 것을 잘 알면서도, 70여 일 동안 계속된 가혹한 고문 때문에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는 것입니다. 대부분의 피고인들이 취조과정에서 폭행과 고문을 당했다는 사실을 폭로하면서 내란음모 사건은 조작된 사건이라는 사실이 드러나려 했습니다. 그러나 그 법정에서는 한 사람의 진술로 인해서 내란음모 사건으로 확정지어졌고, 우리가 잘 아는 것처럼 김대중 전 대통령에게는 사형이 언도되었습니다. 당시 서울대학교 총학생회장으로 민주화 운동을 하다가 함께 붙잡혔던 심재철(현 새누리당 국회의원)이란 학생이 “김대중 전 대통령에게서 20만원을 받았느냐”는 군 검찰관의 심문에 ‘그렇다’고 대답했습니다. 그리고 ‘이해찬 씨로부터 현 정부를 타도하고 김대중이 정권을 인수하도록 가두시위를 감행하라는 지시를 받았다’고 인정했습니다. 물론 그의 말은 거짓이었지만, 그 말 한마디가 내란음모의 결정적인 증거가 되어 수많은 사람들이 억울한 누명을 쓰고 옥고를 치러야 했습니다.
그가 거짓을 진술하는 사이에 법정은 시끄럽고 혼란스러워졌습니다. 그의 말 한마디가 가져올 엄청난 결과를 잘 알기 때문입니다. 이해찬 전 총리는 ‘너 미쳤어? 너 왜 그래?’라고 울부짖기도 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가장 큰 피해를 당하게 될 김대중 전 대통령은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심동지, 고생 많았지?” 자신의 목숨을 앗아갈지도 모를 거짓 증언을 한 젊은 학생을 향해서 김대중 전 대통령은 ‘얼마나 힘들었으면 그런 거짓말을 하겠느냐?’ 하며 오히려 그를 위로했다는 것입니다. 평범한 우리로서는 참 부러운 모습입니다. 어쩌면 그분 안에 신앙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 아니었을까 생각해 봅니다.
여기서 김대중 전 대통령이 심재철에게 “심동지”라고 부른 것은 친구라는 의미입니다. 비록 심재철이 배신을 하였지만 여전히 친구라고 생각한다는 말입니다. 그 후 심재철은 거짓진술을 하라고 고문한 사람들이 있는, 여전히 김대중 전 대통령을 모욕하고 있는 한나라당으로 들어가 거기서 국회의원을 하고 있습니다.
한자어로 친구라는 말이 두 가지가 있습니다. 벗붕朋 이란 말과 벗우友라는 말입니다. 붕朋과 우友가 우리말로 벗 친구라고 하였지만 조금 다른 의미가 있습니다. 옛날 중국의 제(齊)나라에 공양고公羊高라는 사람과 그의 제자들이 공자의 <춘추(春秋)>를 해석한 책에 同門曰朋 同志曰友 <公羊傳·注>란 말이 있습니다. 즉 붕朋이란 같은 선생님 밑에서 공부한 친구를 말하고 우友란 같은 뜻을 가진 사람을 말한다고 하였습니다.
조선 선조왕 시대(선조 10년인 1577년) 이 율곡(栗谷李珥)선생이 덕행과 지식의 함양을 위한 초등과정의 교재로 격몽요결(擊蒙要訣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을 가르치고 이끌어주는 확실한 길잡이라는 뜻)이란 교재를 엮어 펴냈는데 그 서문 글 중에 위붕우당유신(爲朋友當有信)이란 말을 하였습니다. 이 말은 친구사이에는 마땅히 믿음이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논어 학이편 제 4장에서 공자의 제자인 증자는 벗과 더불어 사귀면서 믿음 없는 일이 있었는가를 매일같이 반성해야 한다고 하였습니다.(曾子曰吾日三省吾身증자왈오일삼성오신 하노니 爲人謀而不忠乎위인모이불충호아 與朋友交而不信乎여붕우교이불신호아 傳不習乎전불습호 이니라. 증자가 말하기를 “내가 날마다 세 가지 일로 나 자신을 살피는데, 남을 위하여 일을 꾀함(계획함)이 성실하지 못한 것이 있었는가? 벗과 더불어 사귀면서 믿음 없는 일이 있었는가. 스승에게 전수한 것(배운 것)을 잘 익히지 못한 점이 있었는가?)
설교 때마다 동요를 소개하는데 오늘은 어렸을 적에 불렀던 윤석중 선생의 “어깨동무”동요를 함께 부르겠습니다.
1.동무들아 오너라 서로들 손잡고
노래하며 춤추며 놀아보자
낮에는 해 동무 밤에는 달 동무
우리들은 즐거운 노래동무
2.동무들아 오너라 서로들 손잡고
노래하며 춤추며 놀아보자
비 오면 비 동무 눈 오면 눈 동무
우리들은 정다운 어깨동무
(곡은 모차르트 곡으로 본래 독일어 가사는,
Oh, du lieber Augustin, Augustin, Augustin
Oh, du lieber Augustin, alles ist hin.
mad ist weg, geld ist weg, alles weg, alles weg
Oh, du lieber Augustin, alles ist hin.
--이렇다고 기억합니다.
오 너 사랑하는 아우구스틴아, - -
오 너 사랑하는 아우구스틴아, 모든 게 사라졌다
아가씨도 없어지고, 돈도 없어지고, 모든 게 없어졌다. 모두 가버렸다
오 너 사랑하는 아우구스틴아, 모두 사라졌다.)
친구들과 함께 노래하고 춤추며 즐거워하는 일이야 말로 참으로 인생의 즐거움입니다. 여러분이 이런 말을 잘 아시죠. “유붕이 자원방래하니 불역열호(有朋自遠方來 不亦樂乎)아라. 친구가 먼 곳으로 부터 나를 찾아와주니 이 얼마나 반가운 일인가?” 그러나 친구 나름이죠 만나서 즐거운 친구가 있고 만나면 껄끄러운 친구가 있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껄끄러운 친구는 친구가 아닙니다. 믿지 못할 사람은 껄끄러운 사람입니다.
친구사이에 가장 중요한 것은 바로 믿음이란 것입니다. 믿음이 없다면 붕도 아니고 우도 아닌 것입니다. 김대중 전 대통령은 심재철의원을 친구라 불렀지만 심재철은 그렇지 못했습니다. 예수님은 가룟유다를 친구라 불렀지만 가료유다는 그렇지 못했습니다. 믿음 없는 사람은 믿을 수 없는 사람입니다.
왜 예수님은 가룟유다에게 믿음을 주었는데 가룟유다는 예수님께 믿음을 주지 않은 것입니까? 예수님은 가룟유다를 알았는데 가룟유다는 예수님을 몰랐다는 것입니다. 몰랐기 때문에 믿음이 없었던 것입니다. 무엇을 알았습니까? 가료유다는 예수님을 단즉 로마를 몰아내고 왕이 될 사람으로만 알았습니다. 예수님을 몰라도 너무 몰랐습니다. 몰랐던 것만 아니라 엄청난 오해를 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마르다는 예수님이 누구인 줄 분명히 알았습니다.
동생 나사로가 죽었을 때 예수님이 마르다에게 물었습니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라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라고 말씀하시니 마르다가 대답 하기를 “주여 그러하외다. 주는 그리스도시오 세상에 오시는 하나님의 아들이신 줄 내가 믿나이다”(요11:25.26) 라고 하였습니다. 마르다는 예수님이 누구인신 줄을 분명히 알고 고백하고 믿었습니다. 예수님 말씀하시기를 “네가 믿으면 하나님의 영광을 보리라”(요11:40) 죽었던 나사로가 무덤에서 살아 나왔습니다. 예수님은 나사로를 친구라고 불렸습니다.(요11:11)
요즈음 우리는 배신의 시대에 살고 있다고 말합니다. 정치인들의 배신은 말할 것도 없고, 부부간에 부모자식 간에, 선생과 제자 간에, 직장 동료직원들 간에, 심지어 교회에서 교인들 간에, 목사들 간에도 이런 배신은 일상생활화 되었습니다. 어제의 친구가 오늘의 원수가 되니 이 세상에 과연 믿을 사람 아무도 없다는 말이 있습니다. 그래서 사람만나기가 사귀기가 무섭다라는 말도 합니다. 언제 누가 배신 때릴지 모른다는 것입니다. 한번 등 돌리면 그동안 아무리 친구였다고 해도 원수가 됩니다. 배신이란 말이 무슨 말입니까? 등배背 믿을신信 믿음을 등졌다 는 말입니다. 결국 오늘 날 배신의 시대가 된 것은 믿음이 없는 시대이기 때문입니다. 무신불립 (無信不立.) 믿음이 없으면 올바로 세상을 살아갈 수 없습니다. 그래서 사람은 믿음을 상실하고 친구를 상실하니 인생을 힘들게 외롭게 살아갑니다 (If you cannnot keep trust, you cannot enjoy a good life. ) 그래서 사람들은 정신적으로 황무하고 병들어가고 있습니다.
친구가 없는 시대입니다. 여러분에게 절대로 배신하지 않을 진정한 친구가 있습니까?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아들이 친구들하고 어울려 정신없이 놀러다니는 것을 보고 아버지가 좋은 친구들을 사귀어야 하는데 너의 친구들을 보니 너를 나쁜 길로 이끌어가니 그런 친구들과 만나지 말라고 하였습니다. 아들이 자기 친구들은 나쁜 친구가 아니고 무슨 일이 있어도 우정은 변치 않을 것이라고 말합니다. 아버지는 돼지를 잡아 부대 속에 넣어 아들에게 너의 친한 친구 집에 가서 이렇게 말하라고 말합니다. 내가 그만 실수 하여 한 아이를 죽였는데 나와 이 시체를 하루만 숨겨달라고 말하라는 것입니다. 가장 친한 친구 집에 갔습니다. 이 말을 들은 그 친구는 나는 지금 먼 길을 가려는 참이라 자네를 숨겨줄 수 없다고 말합니다. 다른 친구 집을 갔더니 그 친구는 나는 어머님이 병들어 계시기 때문에 도와 줄 수 없다고 말합니다. 밤새도록 아들은 그동안 친하게 지낸 친구들을 찾아 다녔지만 그 친구들은 이 핑게 저 핑게로 거절을 하였습니다. 아버지가 말합니다. 그러면 내 친구한테 가보자. 그리고 한 친구 집에 가서 내아들이 그만 실수하여 한 아이를 죽였는데 내 아들과 이 시체를 하루 동안 숨겨 줄 수 있겠나 하고 하였습니다. 그 아버지 친구는 어서 들어오라 얼마나 놀라고 마음고생이 컸겠느냐 하면서 아버지와 아들을 집안으로 들어오게 하고 피 묻은 옷을 벗게 하고 자기 옷으로 가라 입혀 주었습니다. 이제 방안에 들어온 아버지는 친구에게 자초지종을 이야기를 하였습니다. 진정한 친구가 어떤 사람인가를 아들에게 가르쳐 주기위해 이런 연극을 하였다고 하였습니다. 다음날 죽은 돼지로 진정한 친구를 위한 동리잔치를 열었다는 이야기입니다.
과연 친구의 허물을 감싸주고 그 고통을 함께 짊어질 친구가 얼마나 되겠습니까? 왜 배신을 합니까? 사람들이 자기 유익만을 구하기 때문입니다. 친구도 자기 유익을 위한 발편으로 사귑니다. 그러다가 유익이 없어지면 등을 돌립니다. 등만 돌리는 것만 아니죠. 칼을 드려댑니다. 그러나 그런 사람은 또 그런 사람들에게 배신을 당하게 됩니다. 배신자는 망합니다. 결국 가룟유다는 가장 비참한 죽음으로 죽었습니다. 그래서 이 세상에 배신은 돌고 돌며 믿음 없는 사회는 점점 멸망의 길로 가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에게 어떤 친구가 있습니까? 함석헌 선생의 “그대는 그런 사람을 가졌는가”라는 시가 있습니다.
“ 만리 길 나서는 길
처자를 내맡기며 맘 놓고 갈 만한 사람
그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
온 세상이 다 나를 버려 마음이 외로울 때에도
'저 맘이야'하고 믿어지는
그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
탔던 배 꺼지는 순간 구명대 서로 사양하며
'너만은 제발 살아다오'할
그런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
불의의 사형장에서
'다 죽어도 너의 세상 빛을 위해 저만은 살려두거라'일러줄
그런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
잊지 못할 이 세상을 놓고 떠나려 할 때
'저 하나 있으니'하며 빙긋이 눈을 감을
그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
온 세상의 찬성보다도
'아니'하고 가만히 머리 흔들 그 한 얼굴 생각에
알뜰한 유혹을 물리치게 되는 그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
가만히 생각해 보니 나에게 그런 친구가 없을 것 같습니다. 아니 나도 그럴만한 친구가 못될 것 같습니다. 그러나 이 세상에 믿을 수 있는 그런 분 딱 한 사람이 있습니다. 바로 예수님 이십니다
우리에게는 우리를 당신의 생명보다 더 사랑하시며 우리를 친구라 불러주신 진정한 친구이신 예수님이 있습니다.
요 15: 13.14에서 예수님께서 “사람이 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면 이보다 더 큰 사랑이 없나니 너희는 내가 명하는 대로 행하면 곧 나의 친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누가 예수님의 친구가 될 것입니까? 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릴 수 있는 사람입니다. 예수님은 이를 몸소 실천하셨습니다. 그러니 너희도 그렇게 하라. “내가 명하는 대로 하여야 나의 친구라 할 것이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자기 목숨을 버린다하면 모두 겁을 먹을 것입니다. 그러나 적어도 죽을 각오하고 친구를 위하는 사람은 절대로 배신하지 않습니다. 김대중 내란 음모사건 재판에서 온갖 고문을 받았지만 끝까지 김대중이 내란을 음모하지 아니하였다고 증언하였던 사람은 그때나 지금이나 김대중 전 대통령의 친구 편에 서 있습니다. 그러나 고문에 못 이겨 거짓 증언을 하고 김대중이 내란을 음모하였다고 거짓말을 하며 배신한 심재철은 새누리당 의원이 되어있습니다.
친구를 위하여 힘을 다하고 정성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자기를 희생하고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않고 믿음을 지킨다면 곧 예수님의 친구가 될 수 있습니다.
헝가리 금세공인 아들로 태어난 한스와 알브레트는 어린 시절 위대한 화가가 되는 꿈을 가지고 자랐습니다. 일찍부터 미술을 공부하였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가족들에게 어려운 시기가 닥쳐왔습니다. 가정 형편상 계속 미술을 공부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아버지의 가게에 나가 금세공 일을 도와야 했습니다. 한스는 동생 알브레트야 말로 화가로서의 훌륭한 소질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되어 자신이 험한 가게 일을 도맡기로 하고 알브레트에게 계속 미술 공부를 하도록 재정을 대주었습니다. 그 결과 알브레트 뒤러(Albrecht Durer, 1471~1528)는 르네상스 시대 독일 최대의 화가가 되었습니다. 화가로서 어느 정도 성공한 알브레트는 이제 한스도 미술공부를 시작하도록 도우려고 한스에게 달려갑니다. 그때 한스는 기도하는 중이었습니다. "하나님, 저는 이제 그림을 그리기에는 손이 너무 굳어졌습니다. 알브레트가 나의 몫까지 화가로서 성공하도록 도와주세요." 힘줄이 드러나고 굳은 살이 박힌 한스의 모아진 두손을 보고 알브레트는 자신의 성공이 자신의 재능으로만 이루어진 것이 아님을 깨닫습니다. 희생한 손, 그리고 희생을 행복으로 여기며 오히려 감사하는 기도하는 손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손인 것을 발견하고 그 자리에서 기도하는 손을 그리기 시작합니다. 이러해서 이 유명한 '기도하는 손'이 그려졌습니다. 바로 이 작품의 모델이 바로 한스 였습니다.
여러분에게도 이런 친구가 있습니까? 자기의 유익보다는 친구의 성공을 바라고 도우며 진실한 마음을 나눌 그런 친구가 여러분에게 있습니까? 배고 풀 때 먹을 것을 주는 친구가 있습니까? 아플 때 위로해 주는 친구가 있습니까? 어려울 때 도움을 줄 친구가 있습니까? 오리를 가자면 십리를 가 줄 친구가 있습니까? 겉옷을 달라면 속옷을 벗어 줄 친구가 있습니까? 혹 그럴 친구가 있다면 여러분은 행복한 사람입니다. 그러나 그런 친구가 없다고 해도 낙심하지 마십시오. 가장 좋은 친구 예수님이 계십니다.
요 15:15에 '이제부터는 너희를 종이라 하지 아니하리니 종은 주인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라 너희를 친구라 하였노니 내가 내 아버지께 들은 것을 다 너희에게 알게 하였음이니라' 예수님은 사랑하는 제자들의 친구가 되셨고 그들과 참된 우정을 나누셨습니다. 십자가에 돌아가시면서 사랑하는 요한에게 어머니를 부탁했습니다. 요한은 그때부터 예수님의 어머니를 자기 집에 모셨습니다. 평생 동안 마리아를 친어머니처럼 섬겼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요한은 예수님의 진정한 친구였습니다. 그러나 한편 베드로는 예수님을 세 번씩이나 부정한 배신자였습니다. 예수님을 배신한 베드로는 부활하신 예수님을 떳떳이 따르지 못하여 다시금 전에 하였던 어부생활로 되돌아갔습니다. 그런데 부활하신 예수님이 그 바닷가로 베드로를 찾아 오셨습니다. 놀라서 배에서 뛰어내려 헤엄쳐 예수님께로 온 베드로를 위하여 화덕에 생선을 구워 먹도록 하셨습니다. 그리고 세 번씩이나 “네가 이 사람들 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고 물으셨습니다. 베드로 대답이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 주님께서 아시나이다.” 다시 예수님이 물으시기를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 주님께서 아시나이다.” 세 번째로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을 주님께서 아시나이다.” 여기서 우리가 알아야 할 두 단어가 있습니다. 사랑이라는 말과 알다라는 말입니다.
예수님이 첫 번째와 두 번째로 사랑하느냐고 물으셨을 때에 사랑이란 말은 헬라어로 “아가페”입니다. 그리고 베드로가 대답할 때 사랑이라는 말은 원어로 “필로”입니다. 그런데 세 번째로 예수님이 말씀하신 사랑이 “필로”입니다. 역시 베드로의 대답도 “필로”입니다.
베드로가 “아신다”는 말에서 첫 번째 두 번째의 아신다의 원어는 “오이다”입니다. 그런데 세 번째는 “기노스코”입니다. 오이다란 그냥 겉으로 아는 것을 말합니다. 그런데 기노스코는 속속들이 영의 깊은 곳까지 안다란 의미입니다.
이제 다시 말씀드리면 예수님께서 두 번씩이나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라고 하실 때 “네가 나를 아가페적으로 사랑 하냐” 라고 물으시였습니다. 그런데 베드로의 두 번이나 “저는 예수님을 필로적으로 사랑합니다.”고 대답하였습니다. 아가페적 사랑은 신적인 사랑 곧 하나님이 세상을 사랑하시는 그 크신 사랑을 의미합니다. 필로적 사랑은 친구적 사랑을 말합니다. 감히 배신자 베드로가 하나님적 아가페 사랑으로 예수님을 사랑한다는 말을 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주님께서 저를 겉으로 보셔도 제가 주님을 친구적 필로사랑을 하는 것을 아시지 않습니까?”고 대답한 것입니다. 세 번째에 가서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그러면 정말 너는 나를 친구적으로 사랑 하냐”고 다시 물으셨습니다. 베드로는 “그렇습니다. 저의 깊은 영혼까지 살피시는 주님께서 제가 주님을 친구적으로 사랑하시는 것을 주님은 아십니다”라고 대답하였던 것입니다.
자칫 오해하기 쉽습니다. 예수님을 친구적 필로사랑으로 사랑한다는 말을 마치 예수님을 덜 사랑하는 것처럼 말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앞에서 예수님이 ‘너희를 나의 친구라(에이레카 퓔루스)’하리 라고 말씀하실 때 친구가 필로입니다. 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면 이보다 더 큰 사랑이 없다. 즉 친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필로사랑이 곧 아가페 신적 사랑이라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이 베들로에게 세 번째로 네가 나를 친구적 필로적으로 사랑하느냐고 물으실 때 베드로는 그렇습니다. 제 목숨을 다 바쳐 주님을 친구적 필로사랑 하겠습니다. 비로소 배신자 베드로는 십자가에 거꾸러 달려 순교하심으로 마침내 예수님의 참 친구가 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우리의 친구가 되심을 보여 주셨습니다. 그리고 우리를 향하여 너희는 나의 친구(에이레카 퓔루스)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친구가 되어야 예수님이 우리를 위하여 십자가를 지시게 되고 언제나 우리를 지켜 주시고 보호해 주십니다. 우리가 연약하여 죄 가운데 빠질 때도 예수님은 우리를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변호해 주십니다. 사단이 우리를 공격할 때도 예수님은 당신의 친구인 우리를 지켜주시고 우리를 사단의 억압가운데서 구원하여 주십니다. 우리가 세상가운데 곤고하고 외롭고 힘들 때 당신의 친구인 우리를 돌보시고 도와주십니다. 우리가 생의 어떤 위험한 자리에 있다 해도 친구로서 우리를 찾아와 주시고 우리를 그 가운데서 일으켜 주십니다. 마지막 세상 떠날 때 주님은 우리의 영혼을 당신의 나라로 인도해 주십니다. 주님은 저와 여러분의 진정한 친구이심을 믿으시길 바랍니다.
그러므로 라온 코이노니아 성도들은 진실한 믿음으로 예수그리스도의 친구가 되어야 합니다. 김옥주 전도사가 개척한 교회가 친구교회인데, 진정 우리 라온코이노니아는 예수님의 친구교회이여야 하겠습니다. 누가 배신자입니까? 여기엔 아무도 없습니다. 우리는 죽기까지 주님의 십자가 바라보고 주님을 따르는 붕우 곧 친구공동체 이것이 라온 코이노니아의 의미입니다. 라온 코이노니아 우리는 서로서로 정다운 어깨동무로 필로 사랑을 나누고, 이 필로 사랑으로 주님을 섬김으로 영원하신 하나님의 아가페 사랑 안에서 행복을 누리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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